저녁길에

매사 그저 덤덤해 지는 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영락없는 노인이다. 성탄, 연말, 연시, 그리고 올해의 마지막 주말 등등 시간을 나누는 일에 그저 덤덤하기에 해 보는 소리다.

아내와 함께 해가 지는 공원길을 걷다.

우리 부부는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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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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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풀들은 지는 햇빛을 온 몸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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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모두가 일상적인 매 순간 순간들이 엄숙한 시간들인 동시에 덤덤한 시간으로 새길 수 있다면 나이 드는 일이 결코 손해보는 일은 아니다.

또 한 해를 보내는 저녁길에서 곱씹어 보는 감사가 크다.

성탄에

오랜만에 전화 안부 인사를 나눈 캘리포니아 조선생님은 여전히 왕성한 현역이었다. 올해 일흔 고개를 넘어선 그의 새해 포부는 가히 다부지다. 그런 그가 내게 말했다. ‘김선생도 늙어가나 보오.’ 칠십 고개를 향해 올라가는 내 언행에 대한 격려였을 게다.

성탄 이브에 막내 동생이 대가족을 위한 저녁 상을 거하게 차렸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귀여운 나이들인 조카 손주들 재롱에 내 어머니 총기가 되살아난 저녁이었다. 이즈음 가끔 생각해보는 것이지만 시간이란 참 별거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조카 손주들을 번갈아 보고 있노라면 이백년 세월을 능히 가늠케 한다.

하여 오늘 아침 내가 하늘을 담았었나 보다.

먼동 트는 하늘이 그리 멋지게 다가온 까닭은 금새라도 꺼질 듯한 가는 빛으로 떠 있는 그믐달 때문이었기에.

먼동에서 그믐달까지 연이 닿아 함께 세월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기를.

내 안에  그 맘 하나 들어와 성탄이다.

  1. 2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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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의 집

부부가 모두 은퇴한 이후 내 가게 출입이 아주 뜸해진 Gaskin씨가 자기 집에서 여는 성탄 파티에 초대한 것은 몇 주 전 일이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 그는 일부러 내 가게를 찾아와 저녁에 있을 파티 참여를 확인했다. 사실 그 몇 주 사이에 같은 시간에 열리는 다른 송년모임이 생겨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예전에 비해 거의 발길 끊긴 손님이 파티 준비로 여러모로 바쁠 시간에 구태여 찾아와 함께 하자는 말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쳐 우리 부부의 발길은  Gaskin씨네로 향했다.

해마다 이맘 때 벌어지는 Gaskin씨네 파티는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두 부부의 직장 동료 및 동호회 모임 식구들에 이르기 까지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제법 큰 성탄 잔치이다. 우리 부부는 Gaskin씨 부부가 애용하는 세탁소 주인이로서 이 잔치에 여러 해 동안 함께 했었는데, 지난 해는 건너 뛰었다.

부부 모두 이미 은퇴한 후 시간이 흘렀건만 많은 전 직장 동료들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 까지 족히 백여명이 넘는 이들이 엊저녁에도 함께 했다.DSC09270 DSC09289

부부는 현관에서 일일이 손님들을 맞았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맘껏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흥겨운 저녁 시간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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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간 주자이자 싱어인 산타의 추임새에 따라 신나게 두드리는 드럼 주자, 이어지는 색스폰 주자의 소리와 기타를 이빨로 튕기는 신공을 보여준 기타리스트까지 잔치자리 흥의 중심은 단연코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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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멤버들 가운데 가장 분주한 이는 이 밴드의 트럼펫 주자인Gaskin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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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흥겨운 잔치자리에서 내가 찾아낸 파티의 주인공은 산타들이었다.

남녀노소와 인종을 불문한 수많은 산타들이 어제 잔치 자리에 주인공이 되어 함께 했다.  산타들을 초대한  Mrs. Gaskin에 따르면 그 산타들 역시 하나하나 일일이 초대했다고 한다. 그녀는 알라스카, 플로리다 등지에서  부부가 여행 중에 만난 산타들을 하나하나 모셔 왔다고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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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는 가히 산타들의 집’이라고.

그리고 오늘, 이즈음 읽고 있던 책 한 권 마무리하며 덮기 직전에 만난 글에서 Gaskin씨 성탄 잔치의 뜻을 곱씹어 보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끝없이 연장되는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세우는 삶의 깊이 내지 ‘삶의 질’을 말한다. ….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Gaskin씨 부부와 그들과 늘 함께 사는 산타들이 머무는 집에서 맛 본 사랑을 생각하며.

2019년 성탄의 계절에.

124

욕심에

내가 잘하는 것 딱 한 가지, 잠을 참 잘 자는 습관 아님 버릇이다. 통상 밤잠 여섯 시간, 낮잠 삼십 분 , 정말 꿀잠을 잔다. 낮잠이든 밤잠이든 누우면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들고 딱 정해진 시간이면 눈을 뜬다. 세상 무너지는 걱정이 코 앞에 있어도 누우면 그냥 잠에 빠져든다.

그런 내가 간밤에 잠을 설쳤다. 깊게 잠들을 시간인 새벽 세시에 눈을 떠 그대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게 깨진 리듬으로 하여 뒤숭숭하게 하루 해를 보냈다. 가만히 따져보니 모두 내 욕심 탓이다.

지난 토요일에 찾아 뵌 아버지는 좁은 아파트 방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당신의 삶에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이젠 그 답답함조차 다 그대로 받아 들이실 나이에 대해 말하는 내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뿐만 아니라 내게도 그냥 공허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Longwood Garden 정원 길을 걸으며 더 늦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화사한 장식으로 꾸며진 이 정원을 함께 즐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었다.

그리고 어제 정원이 비교적 한가한 아침 시간에 부모님을 모시고 정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세상 꽃구경 다했노라시며 즐거워 하셨다. 한식당이 좋겠다는 어머니 생각에 따라 나눈 점심 밥상에서 두 분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하셨고, 그냥 좋다는 말씀을 이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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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거기까지였다. 어머니의 기억의 방은 그 즐거움을 담긴엔 이미 꽉 채워져 있었고, 아버지의 삶은 지난 토요일 좁은 아파트 방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제 늦은 저녁까지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어제 밤 내가 잠을 설친 까닭은 그래 모두 내 욕심 탓인게다.

그래도 그저 고마운 것 하나, 어머니가 아직은 아들 며느리 얼굴과 목소리 익히 알고 그저 고맙다는 말씀 이어가는 일.

어제 아내가 어머니를 웃게 했던 한 마디, ‘어머니, 봄에 꽃 필 때 다시 와요!’

늦은 밤,정호승의 시 하나 눈으로 읽다.

<어머니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룻 떠 놓고 달님에게 빌으시다.>

오늘 밤은 깊게 잠을 잘 수 있을게다.

 

장식에

타고난 내 성격 탓일게다. 매사 극단적 사고나 선택은 피하는 편이거니와, 때론 그런 생각이나 주장에 대해 강하게 거부나 반대의 목청을 높이곤 하는 성정은 나이 들어도 바뀌질 않는다. 믿음도 예외는 아니다.

모처럼 참석한 예배 설교 시간, 그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믿음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미화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다.

어쩌면 계절 탓인지도 모르겠다.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이즈음,  믿음 안에서 맞는 죽음까지 아름다워야 할 까닭들도 있을게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자들의 장식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오후에 아내와 함께 성탄 장식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Longwood Garden 정원을 걸었다. 아내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DSC09058DSC09072 DSC09085 DSC09095 DSC09111 DSC09119DSC09167 DSC09168 DSC09169 DSC09175 DSC09177 DSC09200 DSC09204 DSC09211

인형같은 어린아이들이 장식에 홀려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며 내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내 아이들이 저렇게 인형 같았을 어린 시절에 왜 이런 장식을 함께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최근에 읽은 책 속 한 대목.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세상과 작별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 병에서 치료되어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모순인가! 그러나 비록 신자(信者)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정원을 나서며 사무실에 들려 wheelchair 사용에 대해 묻다.

더 늦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이 정원을 함께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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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기쁨

한 해 마무리를 재촉하는 주일 아침에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 한 통 띄우다. 어쩌면 내게 보낸 편지일지도.


어느새 12월 중순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새로운 꿈들을 꾸어 보는 때입니다.

연 이틀 비가 내리던 어제 오후, 가게가 한가해진 시간에 잠시 저의 한 해를 돌아보았답니다. 그렇게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 되여 본 말은 그저 감사랍니다.

올 한 해 가게 자리를 옮겼고 그 과정에서 여러 걱정들이 있었지만 그 걱정들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가 첫째였습니다.

저희 부부가 이제껏 살아오며 제일 많이 병원을 드나든   였지만저희들을 그렇게 병원을 찾게 했던 노부모님들이 오늘도 살아 계심에 대한 감사가 둘째입니다.

카운터에 놓인 장미 화분을 보며 든 아내와 제 아이들에 대한 감사가 세번 째입니다. 며칠 전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제 딸아이가 보낸 장미 화분이랍니다.

그 감사에 대한 생각 끝에 이어진 것은 아쉬움입니다. 올 한 해 이루지 못한 것들, 계획과 엇나간 일들, 여전히 이어지는 이런 저런 불안과 아픔들입니다.

그리고 어제 늦은 밤, 새로 산 시집 시들을 읽다가 번쩍 눈이 뜨이는 즐거움을 맛보았답니다.

<내비게이터를 꺼버려/ 대충 방향 잡고 돌아 오는 길/ 도로가 한갓지다. / …  / 하늘에는 멎은 듯 흐르는 넓은 구름 강물/ 있다가 없다가 다시 있는 것들의 모습

이왕 길을 벗어난 김에/ 물새들과 알 듯 모를 듯 같이 걷는 해변, 번지는 황혼/ 금빛 우려낸 빛이 사방에 어른댄다./ …  / 하늘에 희한하게 하얀 반달 하나/ 찾으면 있고. 않으면 없고.>

황동규라는 시인이 쓴 ‘내이비게터를 끈 여행’이라는 시의 일부랍니다. 시인의 나이 올해 여든 한 살인데 아직도 왕성히 시를 쓰고 있답니다.

그가 시집을 내며 하는 이야기랍니다.

<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 주위에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가득 찬 잔만큼 아직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 한다.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이제 올 해도 겨우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뭐 크게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올 한 해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id-December came so soon. It is a time to wrap up a year and to dream a new dream for a new year.

Yesterday afternoon when the store was quiet and while the rain continued for two consecutive days, I tried to look back over the year. It was just gratitude which I reiterated and listened to myself, while I was looking back on the year 2019.

This year, I moved the store and had many worries in the process of moving. But, it was like I cried before I was hurt. To get to realize it was the first gratitude.

Though my wife and I had to go to the hospital this year more often than any other year because of my father-in-law and my parents, the gratitude for their being alive today was the second.

The third was the gratitude for my wife and children, which came across when I looked at the pot of roses on the cleaners’ counter. It was what my daughter had sent to my wife as a birthday gift the other day.

What followed after the gratitude was a sense of regrets and frustration, because of the thoughts about things to be done but unfinished, things that went awry, and this and that anxiety and suffering.

Then, last night, while I was reading a new book of poetry which I had gotten recently, I enjoyed an eye-opening happiness.

<Turning off the navigator/I took the course roughly, returning/the road was deserted./… /A wide river of clouds which looks to halt but flows in the sky/the look of things which appear, disappear and appear again.

Once straying from the right path/the beach on which I walked with waterfowl as if we both knew or not, spreading twilight/the lights brewing golden light glimmered everywhere./ … /The strangely white half-moon in the sky/was there when I looked for it and was not there when I didn’t>

It is a part of a poem, “A Trip with the Turned-off Navigator,” which Dong-gyu Hwang wrote. Though he is eighty-one years old, he is still very active in writing poetry.

He wrote in the preface of the book:

<As I have followed the poetry, I now stand at the autumn of my life. Those who have turned or are turning into their own colors around me are beautiful. A still-some-left glass makes my mind thrilled as much as a full glass. Please forgive me for this ‘joy of living’ which is small and itchy like a bug bite.>

Now only about half a month is left before the end of this year.

I wish that you will have time in which a still-some-left glass makes your mind thrilled for the remaining days of this year, if not life itself.

From your cleaners.

장미에

‘결혼 기념일?’ 아님 ‘누구 생일?’. 카운터에 새롭게 놓인 장미 화병을 보며 손님 몇이 아내에게 던진 물음이란다.

어제 딸아이가 각기 12송이씩 묶은 장미 두 다발을 보내왔다. 나름 생각 깊은 아이가 숫자 놀음을 했겠다 싶지만 툭 튀어 나온 내 혼자 소리, ‘쯔쯔쯔, 돈 아까운지 모르고…. 뭘 …한다발이어도 족한데…”. 아내는 싫지 않은 듯 내 괜한 트집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내 젊은 시절 고약한 기억 가운데 하나인 12.12 사태 이전부터 아내의 생일을 함께 했으니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세월도 만만치 않다.

나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우기지만 아내는 큰 연(緣)이라고 믿는 우리 가족 생일력이  그 세월과 늘 함께 한다. 생일력이란  2땡, 9땡, 10땡, 12땡으로 월과 일이 함께 하는 우리 네 식구 생일에 대한 이야기다.

딸아이 덕에 집과 가게가 장미 화병으로 화사하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자라 아내의 십대 초반 어린 시절이 환하게 보이는데… 쯔쯔… 어느새 아내도 은퇴연금 수령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그게 웬지 또 공연히 미안하다.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다만, 이민 후 살 만 하다 싶었을 무렵 내 엉뚱한 욕심으로 하여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루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거의 삶에 대해 체념(諦念) 상태였다. 허나 아내는 늘 웃었고 우스개 소리를 끊이지 않았었다.

나의 체諦가 깨달음의 제諦가 되는 세상을 맛보게 한 것은 아내였다.

하여 살며 내가 맛보는 즐거움의 반은 온전히 아내에게서 온다.

장미를 안겨 나를 깨운 딸아이에게도 아낌없는 한 몫.

고마움을.

성탄 또는 성서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성서 베드로전서 1장 24절(새번역에서)

설교자는 말씀하셨다. ‘어느 날 떨어지는 꽃잎처럼 삶은 유한할지언정 우리네 삶을 꽃이라 비유하신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얼마나 감사한가! 또 그런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신 신의 은총은 얼마나 큰가! 우리 모두 언젠가 확실히 떨어지고 말 꽃들이다, 다만 그 언젠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없기에 불확실한 존재들이다. 모든 생각들을 접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 모두는 꽃이다. 오늘을 꽃처럼 살자!’

그리고 설교자는  ‘아름다운 꽃처럼 설다 간 사람’이라고 내 장모를 기렸다.

장모가 세상 뜬지 오늘로 딱 만 삼년,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목사님을 비롯해 교회 공동체들이 장모 삼주기 추모 예배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했다.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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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후 아내와 아들 내외와 함께 장모 쉬시는 공원을 찾다. 장모 계시는 곳, 바로 앞 묘지 터엔 오래 전 예약해 놓은 내 부모와 우리 부부가 누울 자리가 있다. 장인은 장모와 합장이 예약되어 있고… 묘지 공원엔 성탄이 이미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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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시간을 쪼개어 준 아들 내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해 보낸 후, 일흔 세 해  함께 사시며 이젠 오락가락하는 정신 줄 같이 붙들고 씨름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뵙다. ‘이젠 진짜 갈 때가 됬는데…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어머니 푸념에 그저 웃으며 답하다. ‘아이고 오늘 얼굴 좋으시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장인 누워 계신 양로시설에 들리다. 대낮에도 한밤 중이시던 양반이 잠시 깨어 묻는다. ‘김서방 나이가 몇 이야? 김서방도 나이 많지?’ 나는 또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인보단 한참 젊지요!’

양로시설 성탄 장식은 정물화(靜物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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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휴일 낮잠을 즐기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으므로. 낮잠 대신 동네 한바퀴를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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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도 늦은 걸음으로 성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해를 보내고 마주 한 컴퓨터 모니터가 전해 준 세상 소식 가운데 하나.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엇비슷한 생각으로 이즈음 삶의 결을 같이 하고 있는 벗의 모친상 소식.

하여 다시 손에 들어 보는 성서. 그리고 떠오른 안병무선생님의 말씀 하나.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에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물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관심이나 전제를 갖고 묻는다. 관심이나 전제 없는 성서해석은 없다. 까닭은 성서를 읽을 마음이 나는 것은 그것에 관심이 갈 때 가능하며 그 관심은 성서가 이런 대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심이나 전제가 묻는 자의 삶과 최단 거리에 있으면 있는 만큼 그 물음이 진실하며 그것에서 얻는 대답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된다.>

오늘, 삶 또는 죽음에 대하여.

집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12월 초하루, 모처럼 내 집안에서 나 홀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내 오두막에는 세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얼토당토않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흉내 짓도 이런 날 내 집에서 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은 가하다. 이따금 내다 보는 창문 밖 풍경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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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큰 감사가 일다.

두 권의 책을 읽다. 홍성수가 쓴 <말이 칼이 될 때>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쓰고 임현경이 옮긴 <속도에서 깊이로: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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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는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칼이 된 사회를 고발하며, 이어지는 ‘증오범죄’가 만연 되어가는 현실을 단숨에 읽히는 글로 엮어 놓았다.

저자 홍성수의 말마따나 ‘입법 조치나 법적 대응에 한정하지 말고 전 세계에서 고안되고 실천되어 온 거의 모든 반혐오 표현 대책을 이 책에 모두 망라해’ 놓았다. 그는 그렇게 이 책을 쓴 까닭을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며 글을 맺는다.

그는 ‘증오범죄가 발생했다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편견과 차별이 있고 혐오표현이 난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없이 증오범죄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 강조한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한번 돌아 볼 일이다.

책을 읽으며 어느 잔치 자리에서 백인 사내가 우리 부부 테이블로 다가와 “너희 나라로 꺼려라!”했던 수 십년 전 경험과 며칠 전 내 가게에서 한 백인 여성이 “여긴 미국이야!” 소리치며 말도 안되는 불만을 터트렸던 일이 생각나 창문 밖 풍경에 위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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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이다.’라거나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 영역들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 자율에 맡기기 어려운 영역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 한정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읽다가 여전히 할 일 많은 세상에 감사하다.

다수자와 가진 자들이 외치는 표현의 자유의 소리가 여전히 높고, 한정하고 규제해야 할 영역들인 고용, 서비스, 교육 등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숱한 혐오표현들과 증오범죄들이 여전히 난무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다소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쓴 <속도에서 깊이로>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보편화된 읽기가 개개인에게 부여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을 설명하며 저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예수가 했던 <가라!>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간음한 여인을 비롯해 앉은뱅이, 소경, 절름발이들을 용서하거나 고치신 예수는 그들에게 그들이 본래 있었 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들은 모두 당시 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범죄의 대상자들이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후일담은 없다.

예수의 ‘가라!’라는 명령은 혐오와 증오범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예수의 명령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예수의 명령을 들은 이들의 귀가 열리기에 1500여년이 필요했고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또 500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내 집안에서 누리는 12월 초하루의 자유를 더불어 누리는 세상으로 넓혀 나가는 일은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있는 한 지속해야 할 일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겨우 몇 번 얼굴 내밀었다만, 지난 두 달여 매 주말 마다 이어온 필라세사모 벗들의 꿈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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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비 내리는 12월 초하루, 집에서

딸에게

어느새 12월이 코 앞에 다가섰다. Thanksgiving day 하루를 쉬고 습관으로 이른 아침 가게로 향했다. 연휴 새벽 도로는 한산했다.

어제 밤, 딸아이가 물었었다. ‘아빤 언제까지 일해?’ 아무 생각없이 튀어나온 내 대답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였는데 그에 대한 딸아이의 간단한 물음이 내 앞에 놓인 질문이 되었다.  딸아이가 던졌던 아주 간단한 질문은 ‘왜?’였다.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 낳은 딸아이가 사는 세상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 듯, 아이 역시 내가 사는 세상을 다 알 수는 없을게다. 어쩜 내 스스로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거늘.

간 밤에 모처럼 나눈 딸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기며 이르른 가게 앞 하늘 풍경에 홀려 내 눈에 담아 보았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열리는 아침에 홀려 아직 어둑한 상가를 덮은 추위를 잊은 채 아침 풍경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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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든 생각 하나. 동 트는 아침 해를 맞기 위해  산이나 바다 등 명소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내 일터의 아침은 내가 누리는 큰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 나절에 맞은 손님 한 분, 며칠 전 작고 예쁜 포인세티아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를 담은 손편지를 전해 주셨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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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편지와 화분을 받던 날, 문득 내 눈에 들어 와 박힌 풍경은 가게 뒤편 우체국 담장 너머에 있는 단풍나무였다. 사철 푸른 나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들이 누런 잎새들을 다 떨어 버리고 열반에 이른 계절에 우체국 담장 안 단풍나무는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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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우체국 나무인데…. 좋은 소식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시들지 않는 단풍 나무 하나 오래 품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쯤 내 딸아이에게 보내는 응답을 찾다.

내 일터에서 찾는 즐거움이 있기에… 적어도 그 즐거움을 잃는 날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