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편지

손님들에게 부활절 아침 편지를 띄우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다른 종교를 믿든 또는 아무 종교도 없든지 누구나 이 맘 때 쯤이면 밝고 환한 기분에 젖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화사한 계절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 분위기는 정말 낯섭니다. 이런 느낌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 낯선 상황이 제가 맞는 올 부활절과 이 계절의 뜻을 다시 새겨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세탁소를 시작했던 30여년 전에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은 일년 중 세탁소가 가장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세탁소에 나와 밤 늦게까지 일했던 기억이 있답니다. 특히 흰색 정장과 흰색 드레스, 흰색 블라우스에서 아이들의 옷까지 흰색 빨래들이 연중 가장 많이 쌓이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그런 풍습들은 사라졌습니다.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한주간이 되었고, 최근 십여 년 이래로는 오히려 평소보다 한가한 주간이 되었답니다. 이미 사라진 풍습에 더해 부활절 휴가철를 보내는 사람들의 유행도 달라진 탓입니다.

사람살이 모습이 늘 그렇듯, 변해가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며 살게 마련인지라 이 맘 때 세탁소가 한가해진 모습에 그려러니 하며 산답니다.

올 부활절은 그런 한가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누군가 제게 당신은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고 물을 때면 저는 크리스챤이라고 대답을 하지만, 그다지 성실한 신자는 아닙니다. 일년에 교회 나가는 회수라야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랍니다.

다만 종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편이어서 성서나 불경 또는 유교의 경전들을 틈나면 손에 들고는 한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것에 얼치기랍니다. 단 내 직업인 세탁업에 대해서는 얼치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얼치기인 제가 느끼는 올 부활절 아침의 생각이랍니다. 비록 이런 부활절은 처음이지만 부활의 뜻은 변함없이 한결 같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얼치기인 제가 새기는 변치 않는 부활의 뜻이랍니다. 하루 하루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며 이웃들에게 밝고 맑은 정(기운)을 전하며 사는 삶의 현장이 바로 제가 부활하는 모습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부활절 아침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부활의 아침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2wxjaYm

하루 -11

은퇴한 이들에게 물으면 종종 듣게 되는 대답이다. ‘당신도 해 봐. 또 바쁜 일들이 생겨요. 그냥 뭔지 모르게 그냥 바쁘다니까…’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시간이 넘쳐난다 했더니 그도 잠시, 계획 이외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엊그제 마치 지붕이 날라갈 듯 심한 비바람이 일더니 실했던 이웃집 사철나무 허리가 댕강 부러져 내 집 뒷뜰 언덕배미로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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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사내와 오전 내내 쓰러진 나무 정리를 하고 샤워를 끝낼 무렵, 누이의 전화를 받았다.

예약된 hospice 시설에서 어머니를 위한 침대가 지금 온다고 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 듯 했었다. 응급으로 모시고 갔던 병원에서의 결과는 이제 삶이 아닌 죽음을 준비할 시간 이라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먼저 보내 드린 장인 장모의 경험으로 인해 조금은 차분하게 준비할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젠 온전히 신이 주관하는 시간이다. 내 어머니의 삶은.

오늘 예정되어 있던 유일한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땀 식힐 시간 없이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세월호 6주기를 추모하는 필라 세사모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때가 때인지라 함께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추모 행사를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않고 쉼 없이 활동해 왔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뿌리내린 이곳 필라델피아에서 6년 동안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고 행동해 왔습니다. 어려움도 부족함도 많지만, 진상규명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기억과 연대와 행동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호와 아이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힘겹게 견뎌온 가족들과 생존 학생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모든 분들이 이 어려운 시기에 건강하시고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행사에서 필라 세사모를 대표해 이선아선생이 드린 추모사의 일부다.

오늘 이태후 목사님께서 선포해 주신 말씀은 가슴을 깊게 울렸다.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버리고 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끝없는 사랑을 외치고 베풀며, 그들이 끝내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위해 온 몸을 바쳤던 예수에 대한 선포였다.

그리고 함께 본 영화 한 편, ‘부재의 기억’이다. 보며 절로 흐르는 눈물 감출 수 없었다. 딱히 뭐라 표현 못할 분노의 눈물이었다.

예수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가장 도두라지게 했던 행동 하나가 바로 분노이다. 그리고 욕설도 따랐다. 바로 그 지점이랄까? 저절로 나오는 욕에 이어진 눈믈이다.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이 동시대에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버리고야 마는 죽음과 삶에 대해 고뇌하고 욕하고 저항하며 함께 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이다.

모든 부활은 눈물 끝에 온다.

하루해가 또 저문다.

내일은 부활의 아침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며.

내 집 풍경은 이미 온통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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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10

TV에 빠져 있던 아내가 혼자 중얼거리며 숫자를 읊더니 ‘에고 오래 되었네’하며 한마디 던졌다. ‘벌써 사십 일 년 전 이네…’. ‘뭐가?’하는 내 물음에 대한 응답. ‘우리 만나 거…’

코로나 바이러스로 갑자기 차고 넘친 시간에 조금씩 적응되어 간다. 이젠 공원 출입 인원도 제한한다는 주정부의 발표 이후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뒷뜰에 텃밭이라도 만들어 놀아볼까 하며 세운 하루의 계획은 비바람 치는 날씨 탓에 내일로 미루었다.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오래된 서류 상자들을 꺼내 정리하다. 정리했다기 보다는 오래  묵혀 둔 쓰레기 파기 작업이었다. 종이 파쇄기가 온 종일 일을 참 많이 했다. 오래된 각종 기록들 일테면  내 잡기장이나 은행 및 세무 서류, 비지니스 관련 온갖 문서들 또는 동네 일하면서 쌓아 둔 각종 문서들을 파쇄하며 새삼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 마저 애써 지우다.

그러다 듣게 된 아내의 시간 ‘사십 일 년’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이라는 성서구절 하나. 그것이 어찌 새 하늘 새 땅을 주관하는 주(主, 神,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그 무어라 부르든)이거나 새 하늘 새 땅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자들 만이 누릴 몫이랴!

그저 오늘을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삶을 누리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진 물음이자 답인 것을.

마치 시간이 정지 되어 있는 듯한 이즈음 이야말로 사람살이가 왈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하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보니 부활주일이 코 앞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는 곳에서 더욱 가까워진 이웃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날 수 있기를.

사십 일 년이 이미 하루이고, 때론 하루가 사십 일년이 아닌 천년이 되곤 하는 우리 부부 역시. 사랑으로.

(어쩌다 찾아 낸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다.)

하루 -9

생각치 않게 주어진 넉넉한 시간들. 더는 낯설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찌할고, 어찌할고를 되뇌이다  찾아낸 두가지 보고(寶庫).

KBS 다큐멘터리 연속물들과 내 집에 눈길 안 주고 버려 둔 땅이다.

‘차마고도’와 ‘다르마’에 빠져 보내는 시간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일인 듯하다.

공원을 찾아 걷는 일도 눈치 보아야 하는 세월에 찾은 일 하나, 뒷뜰 언덕배미 손길 눈길 안 주었던 땅을 뒤집어 보는 일. 어쩌면 평생 해보지 않았던 밭일에 나설 수도.

그래,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게 무릇 종교인 것을.

앞뜰엔 이미 봄이 오셨다. 마치 부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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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하나

충청북도 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사는 인구수는 백만 명 남짓,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 주 개관이다. 삼십 수년 전에 내가 이곳으로 이주했을 당시 인구수가 육십만 남짓이었으니 변화가 더딘 곳이다.

서울내기인 내가 아주 단조로운 삶에 적당히 녹아 들어도 놀랄 것 없는 세월도 흘렀거니와 이 곳의 한결같은 촌스러움이 이젠 내 몸에 온전히 배어 있어 그야말로 나는 가히 델라웨어 사람이다.

이 작은 주에 하루에 백 명 이상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소식으로 흉흉해 진지 벌써 사흘 째다. 그 수가 어느새 천명에 육박했다. 주지사가 다음 주 안으로 확진자 삼천 명 운운한 말은 사뭇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나 보다. 이건 인구 대비 대한민국의 열 다섯 배 수치이다.

하루에 몇 차례 알림 속보로 마주하는 바이러스 환경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그러다 보게 된 세계 여러 나라들의 바이러스 확진자 추이 비교 도표다. 그야말로 자랑스런 대한민국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왜? 대한민국을 깍아 내리는지? 그것도 자국의 언론과 정치꾼들과 미신적 종교에 빠진 얼치기 종교인들과 아직도 삼국시대를 살고 있는 지역 연고 우선인 사람들과…. 암튼 난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21세기 민주주의와 복지 실험을 거쳐가는 모든 나라들 가운데 앞서 가려고 하는 정부를 가진 대한민국의 오늘이 자랑스럽다.

누구나 다 제 생각이 옳다고 믿고 사는 게 사람사는 모습이겠다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세력들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는 이해 불가다.

사월 – 주말편지

너나없이 답답함 안고 사는 이즈음, 손님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띄우다. 어쩜 내게 보낸 것일 수도. 봉화 농사꾼인 벗이 찍은 봄소식을 덤으로 얹었다.


한국인들이 쓰는 아침인사말은 ‘좋은 아침’입니다. 영어의 good morning과 똑같은 말입니다. 한국인들이 이 아침 인사말을 쓴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한국인들이 주로 쓰던 아침인사말은 ‘밤새 안녕하십니까?’ 또는 ‘아침 드셨나요?’였습니다.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생긴 인사인데 그저 하루 하루 안전하게 살아있는 게 고맙다는 뜻으로 나눈 인사일겝니다. ‘아침 드셨나요’라는 인사는 눈 뜨고 일어나면 그 날의 양식 걱정을 했던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에 나눈 인사였습니다.

이즈음 다시 생각나는 오래 전 제가 쓰던 아침 인사말이랍니다.

거의 매일 한차례 씩은 들려서 인사 드리던 구순 노부모님들께 이즈음은 주에 두차례 그나마 길어야 5분 내외의 짧은 인사만 드리곤 합니다. 노인들에게 가기 전엔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장갑을 끼고 찾아 뵙는답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바이러스를 옮기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 때문이랍니다.

필라에 사는 아들, 며느리와는 이따금 전화 목소리로 안부를 나눈답니다. 그래도 아들 내외는 부부가 함께 있어 걱정이 덜한 편이랍니다.

뉴욕 맨하턴에 있는 딸아이는 전화 할 때 마다 ‘제발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랍니다. 석 주 전에 재택근무를 하는 딸아이에게 제안을 했었답니다. ‘어차피 재택근무를 하니 델라웨어로 내려 오라. 내가 올라가서 너를 데리고 오마.’ 제 제안에 딸아이는 강력히 거부를 했답니다. 계속되는 제 재촉에 딸아이가 한 대답이랍니다. ‘뉴욕에는 이미 바이러스 확진자가 많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이미 감염이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행여라도 내가 델라웨어로 가서 엄마 아빠에게 옮기게 되면 어떡하냐. 아파트 안에서 꼼짝않고 지낼 것이고, 먹을 것도 많으니 제발 걱정말라.’ 그만 제가 지고 말았답니다.

엊그제 딸아이는 화상 전화를 해서 자신이 스파게티를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 먹고 있는지를 보여 주었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영상을 보면서 가슴 한 곳이 찡해졌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쟁터 최일선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을 격려하자며 아파트와 집에 갇혀 사는 이들이 보내는 박수와 함성 소리를 담은 영상이었답니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 사이에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야 하는 이즈음이지만 이럴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의 이해는 더 넓어지고 서로간 격려의 소리는 더욱 커지는 더하여  평소에 잊고 살았던 가족들과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월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한국에서 농사 짓는 벗이 찍은 봄 소식 함께 나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 어제 CDC(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는 cloth face mask를 쓸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미 지난 주 이메일을 통해 저희 부부는 수제 면 마스크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무료 제공한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에게 무료 제공해 드립니다. 다만 지난 주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원하셔서 미처 다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내일(월)은 지난 주에 미처 드리지 못한 분들에게 먼저 제공해 드립니다. 새로 신청하시는 분들에겐 수요일 이후 부터 제공합니다.

https://conta.cc/39I814B

https://www.youtube.com/watch?v=-5XqjyfI6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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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8

‘주(州) 내 노인 요양원에 코로나 바이러스확산으로 가족들 임종 지키지 못해’ – 오늘자 동네 신문 온라인판에 오래 동안 걸려 있는 머리기사 제목이다.

오늘까지 주내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이 노인 요양원에서 나왔단다. 신문기사는 가족 면회가 차단된 노인 요양원의 현재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임종을 홀로 맞이해야만 하는 노인들의 모습과 빤히 알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가족들의 처지를  꽤나 장문으로 전하고 있다.

노인 요양원에도 여러 등급이 있고, 고급 요양원에서 확진자나 사망자가 발생한 일은 없단다. 비교적 저소득층이 가는 요양원에서 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단다. 기사는 주내 요양원의 실태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를 읽으며 내 머리속은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약 일여 년 넘게 노양원에서 지내시다 지난 정월에 돌아가신 장인 생각과 치매기 날로 깊어지고 쇠해지시는 부모님을 할 수 있는 한 요양원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지내는 내 형제들과 가족들 생각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리 속이 내 맘대로 풀리지는 않을게다. 그저 하루 하루 시간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미 먼저 가신 장인이나 장모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저 모든 것 감사하므로 기억해야 할 터이다. 오늘 하루 내 삶을 감사할 수 있는 맘 하나, 먼저 가신 이들이 키워 준 것이다.

저녁 나절에 애기처럼 맛나게 드실 어머니 생각하며 우거지 갈비탕 진하게 우려 끓였다. 국을 끓이며 내일을 사는 힘을 얻다.

나는 그저 기억만 할 뿐이지만, 기억함으로 좋은 세상을 바꾸려고 늘 애쓰는 참 좋은 친구들의 삶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정열이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고맙다. 그들로 하여 내일을 사는 내 힘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삶은 죽음에 닿아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기억을 통해 영생하는 삶에 닿아 있다.

필라세사모 -4-2b

하루 – 7

제 뜻과 제 맘대로 살지 못하기에 사람일게다. 아무렴, 그래야 사람인데 그걸 종종 잊고 산다. 아무리 백세시대라 하여도 나와는 그리 상관 없는 듯 하고, 이쯤 살았으면 많이 걸어 온 듯도 하고, 살며 더는 남에겐 아쉬운 소리는 않고 살겠지 했는데, 그 맘 먹고 산지 겨우 몇 해이건만 그예 깨지고 말았다.

내 가게 건물주에게 새 달 렌트비를 보내며 향후 두 서너달 렌트비를 감면해 주십사하는 편지를 동봉하다. 구걸이 아니라 싸움일 수도 있겠다만, 이 나이에 아니할 수 있었다면 훨 나을게다. 그러나 어쩌겠나, 사람살이인 것을.

채 한 달 만에 주(州)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삼백이 넘고 사망자가 열명에 이르렀단다. 어제 주지사는 앞으로 두 세주 안에 감염자가 삼천에 이르고 입원 환자는 오 백에 이르러 병실이 없을 것이란다. 동네 농구장과 대학 운동장 등 몇 곳을 정해 임시 병실을 만들 예정이란다.

이게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다. 한국 감염자 수가 만여명이라지만 오천만 중 만명이다. 여기 삼천 명은 백 만명 중 삼천이다. 0.02% 대 0.3% 곧 한국보다  15배가 넘는 수치다.

여러모로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사람사는 세상. 나의 세상 끝. 바로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곧 내 가게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는 온종일 손님들에게 나누어 줄 수제 마스크를 만들다.

매 주 일요일 아침, 내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운 지 어느새 십 오륙 년이다. 편지에 대한 손님들의 응답이 지난 두 세주 만큼 열성적인 때는 없었다. 서로의 안녕을 묻고, 함께 이겨 나가자는 격려의 인사들이었다.

어디나 다 사람사는 세상은 엇비슷하다.

이 어려움이 끝나면 세상은 틀림없이 많이 바뀔 것이다.

사람이 더욱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상으로.

지난 일요일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한국 봉화에서 도인(道人)의 자태로 농사짓는 벗이 찍은 봄 사진 몇 장 얹었더니 그걸 또 그리 좋아들 했다.

아무렴, 사람 마음 다 엇비슷하다.

누구에게나 하루가 24시간 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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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6

내 가게가 있는 샤핑센터 입주 업소들 중 지난 화요일 주정부가 내린 명령에 따라 현 상황에서 영업을 지속할 수 업소는 딱 세 군데 뿐이다. 큰 식품 체인점인 ACME 와 주류 판매업소 곧  liquor stores와 세탁업인 내 가게가 그것들이다.

나는 아직 여러모로 헷갈려하며 다음 주부터  당분간 주 사흘간만 하루에 여덟 시간 씩 영업을 하려한다.

오늘은 비록 가게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다음  주부터 원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줄 수제 마스크를 만들었고, 나는 손님들과 우리 부부 사이의 거리를 서로간 모든 가능한 동선에서 일정 간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카운터 언저리를 재배치 하였다.

주차장에 차량은 평소보다 1/5 수준도 채 안되는 듯 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던 마스크 쓴 샤핑객들을 이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식품점이야 꼭 필요한 것이고, 세탁소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치자고…. 근데 술 파는 집이 왜 꼭 필요한 업종이 되어야 하지?’… 내 대답, ‘글쎄???’

아내의 물음에 대해 해답을 준 이는 우리 동네 주지사이다. 오늘 동네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주지사와 일문일답을 하는 질문자가 물었단다. ‘주지사님, 술 판매 업소들은 여전히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왜 그 업종이 지금의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것인지요?’

주지사의 대답이란다. ‘불행하게도 우리 델라웨어 사람들 중에는 약물 중독자들(여기에 많은 알콜 중독자들이 포함 되는 듯) 이 많답니다. 만일 술 판매 업소를 닫아 버린다면, 중독자들이 갈 곳은 딱 한 곳이랍니다. 바로 병원이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이 병실을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관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 사회의 바닥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답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술 판매업 영업을 정지시킨 이웃 펜실베니아 거주민들이 아침 일찍 우리 동네 liquor stores 앞에서 길게 줄을 선 뉴스를 본 게 며칠 전이었다.

그래, 모든 일엔 다 까닭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런 저런 하루의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오늘의 공원 길을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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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5

오늘도 낯선 시간 앞에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하루를 보내다. 손님들에게 이미 고지한대로 가게 문은 닫았다. 다음 주부터 주 사흘 동안 짧게 라도 영업을 지속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은 남아 돈다. 그렇게 빨리 달리던 시간들이었는데 한적한 거리 풍경만큼 더디다.

오후 속보는 주(州)내에서 첫 바이러스 감염 사망자 소식을 전한다. 오늘로 첫 확진자 소식 이후 보름이 지났다. 현재  확진자 수는 143명이란다. 주내 인구라야 아직 백만명에 이르지 못하므로 인구 대비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신문은 coronavirus pandemic 상황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이웃들을 위해 서로 위로하는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과 글로 오늘을 이겨내는 사람들 소식도 전한다.cec82e34-d943-4d01-a697-73a61516d18f-Jen_5 d8471453-ec20-493d-86dd-9a99da7e063d-Jen._3

그리고 재미있는 기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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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근무가 늘어가면서 집안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된 부부 사이의 갈등 현상과 그 해결 방안들을 제시하는 기사였다.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거의 24시간을 아내와 함께 하며 살아 온 내 눈을 반짝이게 한 기사였지만,하루에도 열 두 번(아주 최소한으로 잡더라도) 싸우며 무사하게 살아 온 우리 부부에겐 별무 소득이었다.

그러다 손에 든 송기득 선생님 책 ‘인간(그리스도교 인간관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을 읽다가 내 온 몸과 맘으로 웃는 웃음을 짓다.

“그런데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모든 <남>에게 <너>가 되려고 애쓴 예수의 삶은 결국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나>의 참된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끝내 자신의 <참 나>를 살아냈던 것 뿐이다.  ………..

우리는 이따금 우리 둘레에서 자신의 온 삶을 한 이성異性을 위하여 살고 있는 사람을 본다. ….이러한 삶의 자리를 우리는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너를 삶으로서 <나>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너를 사는 나, 그것이 곧 나이며 그 밖에 나는 따로 없는 것이다. 나 없는 <너와 나>라고 할까……….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비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너>에게  <나를 드림>  이라는 미명으로 하여 자신의 순수한 새 가능성을 억누른다든지, 그와 못지 않은 <나>의 성실을 저버린다든지, 심지어 그것으로 하여 반反너스러운 것의 발현을 위장한다든지, 자기 속임수를 감추려든다든지. 또한 그것이 저만의 희생이라고 하여 자만하거나, 과장한다던지 한다면, 그것은 드디어 <나>도 못살고 <너>도 못살고 마는 자기파멸을 가져 올 것이 뻔하다. 더구나 그러한 <나>로 하여 자신을 쳐다보고 구원을 바라는 그 밖의 사람들을 못 본 채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그러나 <너>에의 고귀한 삶도 깊이 따지고 보면 결국 <나>를 사는 삶 그것을 넘지 못하리라.”

그래, 무릇 너를 위한 나를 살기 위해 누구 또는 무엇과 싸우더라도 웃으며 살 일이다. 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