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 19

방은 고요하다. 어머니 곁에 앉아 함께 숨을 쉰다. 아니 엄마와 함께 숨을 쉰다. 엄마는 종이장같은 가슴을 풍선처럼 만들어 큰 숨을 내리 쉬다가 순간 가슴은 다시 평면이 되어 고요해진다. 한손으로 차가운 엄마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엄마의 얼굴과 이마를 쓰다듬는다. 엄마가 컥 소리와 함께 목에 모아 두었던 숨을 내쉬면 나는 안도의 숨을 쉰다.

저쪽 다른 침대에 누워 이 고요와 숨소리를 허락하며 조용히 주무시는 아버지가 고맙다. 아내가 카톡으로 찬송가를 들려드리라고 음악을 보내왔지만 나는 이 고요가 더 좋다. 아내의 재촉 카톡 소리에 찬송가를 들려 드리지만 어머니는 무반응이다. 엄마도 나와 함께 숨쉬는 게 더 즐거울지 모른다.

엄마가 잠시 안정적인 숨소리를 이어간다. 일어나 창밖을 본다. 누군가 오늘이 어머니날임을 알리는 예쁜 그림과 글씨를 길에 그려 놓았다.

5-10-20

엊그제였던가? 집으로 꽃병 하나 배달이 왔다. 아내와 나는 당연히 딸아이가 보낸 것이려니 했다. 꽃에 꽂힌 카드를 열며 아내가 ‘웬일이야!’하며 소리를 높였다. 우리 내외의 예상을 깨고 아들내외가 보낸 꽃이었기 때문이다. ‘며늘아이가 시켰고만…’ 내가 던진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다 아들녀석 생각으로 헛웃음 짓다 떠올려 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이다.

저녁에

  • 김광섭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나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어디서...

화가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모티브가 된 시이다. 가수 유심초의 노래로 더욱 알려져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내 나이 스물 언저리,옛 명동 국립극장에서 본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연극을 함께 보았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난다.

인연으로 치자면 엄마와 나는 수 억겁을 쌓은 연일 터이고 절대적인 만남의 예정이라면 신이 맺어 준 결단코 뗄 수 없는 만남이다.

고요한 방에서 그 연과 절대적 만남으로 이어진 엄마와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은 가늠하지 말아야 할 축복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시는데 소리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만을 반복한다.

엄마는 이제 별이 되려고 한다. 별이 되기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의 숨조차 다 태우는 중이다.

정말 고마운 일 하나. 별과 사람, 하루와 천년 또는 오늘과 내일 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신을 엄마와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

허나 나는 아직 하루를 센다.

엄마 날에

하루 – 18

곡기 끊으신 지 딱 한 달 째이다. 과일즙을 끊으신 지도 한 열흘. 엊그제부터는 물까지 끊으셨다. 어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나 보다.

어머니는 여전히 곱다. 모두 세심히 곁에서 보살피는 내 누나 덕이다. 이따금 육이오 전쟁통으로 어머니를 데리고 가곤 하는 알츠하이머 증세조차 어머니에겐 마지막 좋은 벗일 수도 있다. 다섯 살 첫 딸을 피난 길에서 잃고,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는 상이 군인으로 돌아왔던 그 시절이 어머니는 평생 아팟었나 보다. 종종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리들을 만나는 것을 보면.

날짜를 꼽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두루 어수선하다. 허기사 늘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딱히 분주할 일은 없다.

‘하필 이 때….’라는 원망 섞인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만 아흔 세 해를 넘기신 어머니와 함께 하신 신에게 드릴 일은 아니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 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이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내 손 꼭 쥐고 친정행을 하시곤 했다. 신촌 버스 종점에서 한남동 버스 종점까지 서울역에서 버스 한 번 갈아타고 가는 길, 나는 버스만 타면 졸았었다. ‘넌 버스만 타면 졸았지!’ 내가 서른이 넘을 때까지 들었던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오늘 낮에 어머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게 건넨 말, ‘얘야! 가지 마라.’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가길 어딜 가요. 항상 여기 있지.’어머니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곧 자리를 떳다.

지난 해 어느날엔가 아버지는 당신들께서 세상 떠나는 예배를 드릴 때 읽어야 할 성서구절과 찬송을 적어 내게 건내셨다. 오늘 집에 돌아와 한참을 그 기록을 찾느랴 시간을 보냈다. 잘 간직한다고 놓아두면 그 놓아둔 장소를 잊곤 한다. 딱히 나이 탓은 아니다. 예전부터 있어 온 습관이므로,

아버지가 지정해 둔 찬송은 새찬송 609장 ‘이 세상 살 때에’다. 그 1절 가사다.

<이 세상 살 때에 수고와 슬픔/  나그네 인생길 빨리 지나네/ 돌아갈 고향은 주님의 나라/ 주께서 예비한 주님의 나라>

어머니의 하루가 지고 있다.

하루 – 17

내 생각보다 빠르게 주지사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그 동안 영업이 정지되었던 일부 업종들이 문을 열 수 있단다. 일부 업종이라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업종들이 거리두기 등의 준수사항들을 지킨다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 세탁소도 정상영업을 해야겠다. 느낌이 왔었나보다. 아침 일찍부터 텃밭 만들기를 오늘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을 떨었다. 그리고 오후에 들은 주지사의 결정이었다.

열무, 배추, 고추, 파, 양파, 상추, 쑥갓, 들깨, 토마토, 오이,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의 채소와  백일홍, 금잔화, 데이지, 물망초, 칸나, 라벤다, 야생화 등의 화초 씨와 모종을 뿌리고 심는 일을 마치고 난 후 들은 소식이다.

이젠 평범한 일상 맞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재밌는 기사 하나 눈에 뜨여 읽다가 문득 옛 생각으로 웃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기사의 제목이었다. ‘듀퐁가(家)의 저택 돌담장 위엔 왜 둘쭉날쪽한 유리조각이  박혀 있을까? Why does a duPont mansion have a stone wall topped with jagged glass shards?’

내가 사는 델라웨어주는 한때 듀퐁주로 일컬어 질 만큼 듀퐁 가문의 위세가 한세기를 넘게 떨친 곳이다. 듀퐁가문의 시조격인 Alfred I. duPont이 유리조각들이 박힌 돌담장으로 둘러 쌓인 저택을 지은 때는 1901년, 당시 건축비가 2백만 달러. 오늘로 환산하자면 약 오천 삼백만 달러였단다.

제법 긴 기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10피트(약 3미터)나 되는 높은 담장에 유리조각들을 박은 까닭은 외부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내부의 가족들 간의 분쟁 탓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들의 감옥을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듀퐁가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가족 분쟁기사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기사를 읽으며 웃은 까닭은 내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는 담장 위에 박힌 유리조각들 때문이었다.

내가 살던 신촌엔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서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받이에는 루핑집들 이른바 하꼬방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제2한강교가 들어 설 무렵 그 하꼬방들은 이층 양옥집들로 바뀌면서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옥집을 둘러싼 시멘트 담장 위엔 어김없이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거나 둥그런 가시철망들이 얹혀 있곤 했다.

내가 이리도 그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 첫사랑이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이 잘 어울렸던 그 아이가 사는 집 담장에도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십 수년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에서 다시 만났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교회를 갔다 온 아내가  뜬금없이 건넨 말이었다. ‘자기 첫사랑이 여기 온대! 곧 만나겠네.’

사연인즉, 그 얼굴 하얀 아이의 동생 부부가 교환교수로 이 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동생 부부를 방문하러 온다는 것이었고, 그 동생과 아내가 언니와 나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맞추다 보니 딱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 하얗던 아이와 그렇게 만나 저녁을 함께 했었다. 그 아이의 가족들과 내 아내는 놀리기에 급급했지만, 그 아이와 수 십년 전 유리조각 박힌 돌담장 집에 살던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 웃었다.

다시 돌아가는 일상의 어느 날, 내 채마밭에서 밥상이 차려지고 화단의 꽃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웃는 모습을 그리며….. 또 웃다.

5-5-20

하루 – 16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중략 –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 echo chamber, 메아리방)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제15장 ‘무지’에서

오월이다. 여전이 비일상적인 생활이 계속되고 있지만 오월은 오월이다. 화사하다.

총을 차고 미국기를 흔들며 모든 가게들은 정상영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시위대 소식과 연일 늘어나는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소식들이 동네신문 온라인판 헤드를 함께 꾸미고 있다. 주지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조금은 강경한 편이다.

내 가계경제(家計經濟)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면 나 역시 빨리 모든 것들이 정상화 되기를 바라지만, 공동체 사람살이로 보자면 조금은 진득해 질 때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즈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빠르면 앞으로 두어 주, 길어야 한달 안짝으로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처럼 다시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될 듯하다.

마음이 급해지는 까닭은 마구 뒤집고 파 놓은 채마밭과 화단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뿌린 씨앗들과 심은 구근 들에서 파란 싹이 올라오고, 옮겨 심은 모종들의 하루가 궁금한 이즈음 생활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내 삶에 찾아 온  새로운 걱정이다.

생각컨대 아마도 내 일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달포 전 신문에 게재된 유발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처음 읽었을 때 떠올랐던 말은 ‘변곡점’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변곡점이든 내 개인적 삶의 변곡점이든 이즈음 내가 살아가고 있는 COVID -19  상황은 분명 하나의 큰 전환점임에 분명하다. 그 무렵 책장을 덮었던 하라리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느꼈던 그에 대한 생각의 연장이었을 수도 있다.

이즈음 COVID 이후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넘쳐나지만, 유발 하라리의 지적은 사람살이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운 좋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벗들이 있다. 이건 분명 내가 누리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벗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요 며칠 동안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꼼꼼히 곱씹어 읽다.

혹시 관심있는 이들을 위하여 원문 링크와 번역한 글을 드린다.

무릇 이전(以前)과 이후(以後), 모든 시간들은 그 하루를 사는 이들의 몫이다.

https://amp.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영문)

https://docs.google.com/document/d/1lIU7c1JRVQ1D4W5n7vBY8CGCOQPJtSMlu6hfSvkmG-o/edit?usp=sharing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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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5

바람과 꽃비와 새소리에 홀려 아침 한 때를 보내다.

이젠 곡기 끊으신 어머니는 내내 주무시다가도 내가 찾아 가면 가는 눈 뜨시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시곤 다시 눈을 감으신다. ‘아이고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왜 이리 오랜만에…’

덩달아 급속히 오락가락이 심해지시는 아버지는 며칠 전 당신이 꼭 움켜쥐고 계셨던 몇 가지 기록들과 물건들을 내게 건네시며 말씀 하셨다. ‘나도 이젠 다 놓아야겠다.’

오후 들어 비바람이 거세다.

딱히 손에 잡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꺼내 들었다. 문득 생각난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소제목 탓이었다. 언제 읽었더라? 가물하다. 옛날식 번역은 이제 내게도 낯설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자기 자신 삶의 관객으로 살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그 삶을 완성해 주는 꿈을 보태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꿈으로 꾼다.  – 최초의 인간 ‘노트와 구상’에서>

누구에게나 하루는 최초의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간들 역시.

하루 -14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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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 13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뒤집으며 보내는 하루 해는 참 짧다. 솔직히 내가 하는 삽질로 무엇이 바뀔지는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저 흙을 손에 묻히고 땀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즈음 내가 누리고 사는 축복이라는 생각 뿐이다.

내가 엄청 부자라는 것도 이즈음 처음 깨달은 사실이다. 이웃들 눈치 보아야 하는 잔디 밭 빼고도 내 맘대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땅이 족히 삼백 평이 넘으니 이미 족함을 넘어 사는 삶이다.

유튜브와 구글 신(神)의 도움을 받아 흉내 될 수 있는 일들을 다해 본다만, 모를 일이다. 내가 꽃을 피우게 하고 채소를 거두어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런지는.

아무튼 구근들을 심고 모종을 만드는 시늉도 해 보고 씨앗도 뿌려 본다. 언덕받이엔 야생화 씨앗들도 넉넉히 뿌려 두었다.

첫번 째 채마밭은 아직 땅을 고르기도 전에 손님이 먼저 다녀 가셨다. 다람쥐나 토끼는 아닌 듯하고 여우나 사슴일지도 모르겠다. 미처 자주보는 손님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또한 내가 누리는 부요다.

허나 이 낯선 내 부유한 형편보다는 하루 열 두시간 씩 세탁소에서 일하는 날들이 아직 내겐 편한다.

모처럼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다.

<‘이제’는 사는 때, 곧 지금을 말합니다. ‘그제, ‘어제’는 내가 사는 때가 아닙니다. ‘이제’가 내가 사는 때입니다. 사는 때가 이제입니다. 사는 곳이 여기입니다. 이어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됩니다. 하느님이 얼 줄로 나를 이어주고, 나는 하느님과 얼 줄로 이어지고 다시 이어져 여기에 온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때나, 곧 언제나 이제입니다. 다 이제(영원한 현재)가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이제 나왔습니다.’하고, 운명할 때도 ‘이제 숨을 거두었습니다.’합니다. 여기와 이제를 혼돈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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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서삼수

내가 이민 초기에 알게 된 사람들로 이제껏 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큰 형님 뻘이다. 이상하게도 당시 알게 된 내 또래 사람들은 모두 동네를 떠났다. 이젠 나이 탓이기도 하고 내 못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그리 가까이 지내는 한인 또래들은 없다.

서삼수 장로님. 그가 가셨다. 큰 형님 뻘인 그는 종종 내 친구가 되어주곤 했었다.

오늘 아침 그의 장례식이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장례식에 참여할 수 인원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예식이 끝난 후 그의 운구가 교회 마당을 한 바퀴 돌 때 교인들이 각자의 차 안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단다. 아내는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 한다며 함께 가자고 재촉을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던 날, 곰곰 생각해 보니 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동네에서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영근씨’라고 불렀었다. 나는 그가 부르던 호칭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살갑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세상 바라보는 눈과 생각이 엇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신앙에 대해서도 그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더더구나 그는 전형적인 대구 사내여서 많은 부분에서 나와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들이 많았던 이다.

그러나 기억컨대 그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때 그와 나는 죽이 참 잘 맞았다. 생각지도 않을 때 문득 내 가게를 찾아와 한참을 사는 이야기로 꽃 피우기도 했었고, 이따금 안부 전화를 나눌 때면 그저 서로 사는 이야기로 한참을 이어가기도 했었다.

내게 언제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그가 갔다. 일흔 여섯. 너무 이르다.

올초에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던 그를 내가 모처럼 참석했던 주일 예배에서 만났었다. ‘영근씨, 교회 좀 나와라. 가끔은 사는 이야기도 하며 살아야지!’ 그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사람 서삼수, 그를 잃다. 참으로 미안하다.

*** 이 땅에서 그가 사람으로서 끝내 풀지 못했던 한들이 이제 한순간에 풀리는 신의 은총이 그와 함께 하심과, 오늘을 아파할 그의 아내 서후임 권사님 그리고 가족들에게  신의 크고 놀라운 위로와 위안이 함께 하심을 믿고 고백하며…

걱정에

너나없이 걱정과 염려가 많은 이즈음, 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마음으로 일요일 아침에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벌써 41년이네!’ 며칠 전 아내가 툭 던졌던 말입니다. ‘뭐가?’라는 제 물음에 아내가 한 대답은 ‘우리가 만난 거.’였습니다.(이튿날 아내는 42년 이라고 정정을 했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아내와 함께 해 왔습니다. 그 세월 중 세탁소를 이어 온 30여년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함께 했으니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 부부가 얼마나 많이 싸우며 살아 왔을까요?

최근 가정에 머무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부부싸움이 늘고 아동학대도 심해졌다는 신문기사를 읽다가 생각난 저희 부부의 지난 시간들이랍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세탁소를 한 10여년 했을 무렵이랍니다. ‘세탁소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세탁소 하려고 이민을 왔었나?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에 빠져 세탁소를 아내에게 맡기고 제가 새로 시작한 일은 신문사였습니다. 워싱톤에서 뉴욕까지 미국 동북부 지역에 사는 한국계 시민들을 위한 한국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물론 아내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일천한 경험과 이재에 밝지 못했던 저의 부족함으로 신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한 이년 후 다시 세탁소롤 돌아온 제게 남은 것은 빚 뿐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오직 세탁소 일에만 매달려 빚을 갚았답니다. 그 때 이후 세탁소는 내 천직이 되었고, 그 무렵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손님들에게  보내는 주말편지랍니다.

다시 세탁소로 돌아왔던 그 해 겨울 매우 추었던 어느 저녁이었답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내와 제 차를 모두 판 뒤 600불을 주고 산 아주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녔답니다. 자동차 창문이 열리지 않는 차였답니다. 그 추운 저녁 세탁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시동을 걸었답니다. 그 때 아내가 웃으며 제게 했던 말이랍니다. ‘야! 이 차가 벤츠보다 좋네! 이렇게 추어도 단 한번에 시동이 걸리네!’

그 날 이후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며 살지만, 그 추운 겨울 저녁에 아내가 제게 준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을 넘어서는 싸움은 해 본 적이 없답니다.

너나없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들을 안고 사는 이즈음입니다. 저희 부부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장 내야 할 렌트비를 비롯한 금전적인 걱정 뿐만 아니라 노부모와 아이들에 대한 염려 등등  그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답니다.

하여 오래 전 읽었던 아주 짧은 이야기 하나 나눕니다.

<어느 마을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마을사제에게 돌림병으로 200명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을사제는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지어 사망자의 수를 1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돌림병이 지나가고 난 후에 살펴보니 마을 주민이 700명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제는 죽음의 사자에게 왜 약속을 어겼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100명밖에 죽이지 않았어, 나머지 600명은 염려로 죽은 거야”>

제 이야기를 늘어 놓다보니 오늘 편지는 조금 길어졌습니다.

서로 간에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하는 이런 상황도 결국은 끝날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 그리고 안녕을 묻는 이웃들 사이에 걱정, 염려, 두려움 대신에 사랑과 이해, 용기와 희망이 넘쳐나는 이 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3bjFd44

하루 – 12

오늘 내가 사는 곳의 주지사는 학교 문을 일년 동안 닫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단다. 지난 달에 5월 15일까지 학교 문을 닫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온 주지사의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까지는 각급 학교가 문을 열지 않을 것 같다.

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가계 형편은 긴 겨울이 될 듯 하다. 살며 걱정 없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뒤돌아 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상업고등학교를 나왔건만 난 이재(理財)와는 참 거리가 멀다. 나를 조금만 아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다.

이제껏 살며 몇차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겠노라고 야심차게 일을 벌려 보았지만 그 때 마다 번번히 거의 만신창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나마 삼십 년 넘게 붙들고 있는 세탁소 하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아내가 버텨낸 산물이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 지 어느새 한달 째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의 가계를 재단해 볼 능력이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 온 나이 값은 하노라고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보는 이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는 주판알엔 관심 없고 그렇게 주판알을 튕기는 나를 기특히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돈이야 이 나이에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끝난 터이라 주판알 엎어 버리면 그만일 터이고, 문제는 느닷없이 남아 도는 시간이다.

남아 도는 시간 사이로 잽싸게 찾아 드는 놈은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 이겨보고자 손에 든 것은 삽, 바로 삽질이다. 집 앞뜰 화단을 뒤엎고, 지난 해 가을 몽땅 베어버린 뒤뜰 대나무 밭을 뒤집는 삽질이다. 꽃 심고, 채마밭 한번 일궈 보자고 작심하며 해 보는 삽질인데, 모를 일이다. 꽃을 보게 될런지 또는 우리 부부 저녁상에 올릴 푸성귀를 거둘 수 있을지도.

그냥 요 며칠  하루 하루 그 꿈으로  삽질하는 즐거움에 그칠지라도, 그 또한 하루의 즐거움이려니.

늦은 저녁, 뉴스들을 훑다 보게 된 동영상 속 장면 하나에 딱히 뭐라할 수 없는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 하나.

세월호 6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한 국회의원 당선자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흐른 눈물이었다.

이런 젊고 따듯하고 유능한 이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그려보는 재미라니.

욕심이 아니라 하루를 위하여 드는 모든 삽질엔 뜻이 있을 터이니.

또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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