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소리

한낮에 내 일터는 여전히 눅눅한 더위와 겨루는 싸움터이지만 일터로 향하는 이른 아침 바람엔 이미 마른 찬기가 담겨있다.

이 나이에도 아직 급한 성정을 버리지 못하고 저녁 나절 매미 소리 가득한 내 뜨락에서 가을맞이를 궁리한다.

장자(莊子) 왈 부지춘추(不知春秋)라 했다던가.

하루살이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 철 울다 가는 매미가 일년을 어찌 알겠느냐는 가르침이라지만, 매미가 땅속에서 오랜 시간 짧은 생명을 위해 버텨낸 시간에 대해선 장주(莊周)선생은 알지 못했을지니.

하루살이는 하루살이, 매미는 매미 답게 제 삶을 사는 것이고.

내 생각속에서 꿈꾸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고 큰 것이니, 그를 즐기는 짧은 여름 날 저녁 한 때에 대한 감사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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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거의 일 년 반 만에 아들 내외와 딸아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게다가 이제 새 식구가 될 예비사위까지 함께 한 아주 특별한 저녁 시간이었다.

결혼예식을 두어 달 앞둔 딸과 예비사위, 아들 내외와 함께 한 저녁은 오롯이 즐거움과 기쁨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아내가 여러 날 전에 내게 들려 준 작가 이민진의 소설 대목을 들려 주며 아들과 딸아이에게 물었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너희들은 자라면서 어땠어? 세탁소하는 엄마 아빠 보면서?”

내 물음에 두아이들은 아주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엄마 아빠가 자랑스러운데!” 며느리와 예비사위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행복에

어느새

오늘도 일터의 아침 해는 떠오르면서 이글거렸다. 가게 건너편 공사판 일꾼들은 나보다 먼저 더위를 맞고 있다.  이젠 게으름이 아니라 느긋함으로 치장된 일상을 시작하며 보일러를 켠다. 그 느긋함으로 눈치챈 사실 하나, 해는 어느새 분명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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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일터의 아침이 참 좋다. 한땐 이 아침을 피해보려고 많이 질척이던 때도 있었다만, 이젠 그저 감사다.

그렇게 하루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이즈음 친한 벗이 된 호미와 함께 놀며 저녁 한 때를 보낸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소리에  더위는 이미 겁을 먹은 듯하다.

자리에 눕기 전, 장자(莊子)를 손에 들다.

<대지인 자연은 나를 실어주기 위해 그 몸을 주었고, 나를 일 시키기 위해 삶을 주고, 자연을 즐기도록 늙음을 주고, 나를 쉬게 하려고 죽음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힘써 일하는 내 삶이 좋다고 한다면, 당연히 휴식인 내 죽음도 좋다고 하게 되리라.>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 제 7장에서

자연으로 읽든 신이라 읽든 아님 내 스스로라고 읽든, 아직 죽음도 좋다고 할 만한 지경엔 이르지 못했다만, 그저 하루 일과 쉼에 감사할 나이엔 이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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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무더위에

세탁소의 스팀 열기와 연일 백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축 처졌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이거 한 번 들어 보셔!’하며 읽어 준 대목이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아내가 이즈음 읽은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쓴 자전적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한 대목이란다.

나는 그날도 미스, 미스터 뿐만 아니라 써, 맴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비록 이십 대 아이들일지언정. 뿐이랴! 캔이나 윌은 거의 쓰지 않는다. 큐드와 우드를 입에 달고 산다.

그날 밤, 내 아이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잔 찐하게 했다.

기억에

“망각의 구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적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으며, 망각이 가능하기에는 이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단 한사람이라도 항상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시아의 유태, 아시아의 독일이라면 혹 하면서, 수천년 동안 노예의 후예임을 잊지 않고 기억하거나 ‘모든 정부는 그의 선임 정부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으며, 모든 민족은 과거의 행위와 과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떠맡는다’는 선언에 충실한 두 나라의 모습에는 애써 무관심한지…

 

연휴(連休)에

지난 주초 사나흘 이어진 폭염과 예기치 않게 쌓인 세탁물 처리로 온몸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삼십 수년 간 이어져 온 일이지만, 세탁소의 첫 무더위는 아직도 여전히 힘들다.

그렇게 맞은 연휴 이틀, 틈나면 누워 쉬었다. 오라고 했던 아이들에게는 다음 기회로 하자고 미뤘고, 초대받은 곳에는 미안함을 전했다. 아직 재활원에 계신 아버지 찾는 일도 큰 맘 먹고 걸렀다.

토요일부터 누워 긴 잠을 누렸으니 가히 사흘을 쉰 셈이다. 내가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지만 아직은 복용약이 전무하여 약과는 친숙하지 않아서인지 진통제 한 알 먹고 모처럼 제법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주 깨끗하게 가뿐하지는 않았으나 견딜 만 하였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연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런 저런 계획했던 일들에 빠져 보았다. 될 수 있는 한 더디게 천천히 그저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맘으로.

저녁상을 물리고 뒤뜰에 나앉아 새소리 들으며 오늘에 이어진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며 한참을 보내다.

그저 감사다.

연휴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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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

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동네 뒤쪽에 있는 체육공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걸어서 고작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지난 해에는 펜데믹으로 불꽃놀이를 열지 못했다. 올핸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전제로 불꽃놀이가 있었다. 일테면 일정한 거리두기, 벤더 또는 푸드 트럭 영업금지, 가급적 차량 안에서 구경하기 등의 주의사항들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산지 얼추 25년이니 그 세월 동안 불꽃놀이를 즐겨온 셈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손잡고 좋은 자리 찾아가 구경을 했고, 아이들이 머리 굵어진 이후엔 우리 내외만 구경을 나서기도 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집을 떠나고, 우리 내외도 다리 품 팔면서 구경 나서지는 않는다. 그저 윗층 창문을 통해 바라보거나, 집 앞뜰에 서서 불꽃놀이를 즐긴다.

뜰에서 덤덤하게 불꽃놀이를 바라보다가 들어와 앉아 지난 시간들을 두서없이 곱씹는다.

그러다 문득 떠올린 Walt Whitman의 선언.

<억겁을 거쳐 나에게 까지 다다른 이 시간 이보다 더한 좋은 때는 없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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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참 좋은 벗들이 있음은 내가 살며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다. 더더구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엇비슷한 시각과 시선으로 함께 바라보며, 그 뜻을 헤아리는데 다툼이나 삐짐 없이 훅 또는 맘껏 제 속내 들어낼 수 있는 벗들임에랴! 그저 만나서 참 즐거운 일이다.

펜데믹 탓으로 거의 일년 반 만에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그저 소소한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우리들의 공동 목표에 대한 이야기들로 모처럼 만남의 기쁨을 한껏 즐겼다.

나야 어쩌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끼여들은 처지이지만, 함께 한 벗들은 지난 삼, 사십 년 동안 필라델피아를 근거로 평화, 통일, 민주, 인권 등등 거대 담론에서부터 그저 사람 답게 하루를 살아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에 이어진 행동들을 함께 해 온 이들이다.

벗들은 지난 수 년 동안 한 푼 두 푼 작지만 뜻있는 종자 돈을 모아왔다. 이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우리 세대 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만드는 일에 나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닦고자 함이었다.

앞으로의 일이야 어찌 알겠느냐만, 그저 나름의 역사성을 곱씹으며 오늘에 충실한 벗들이 참 좋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한 친구가 아직은 검은 머리인 내게 물었다. ‘염색 안하시죠? 어떻게 아직도…’. 이어진 내 짧은 대답, ‘아! 머리를 안 쓰고 사니까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거나 머리털이 아직은 까만 것은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저 타고난 체질일게다. 그렇다하여도 이즈음 거의 머리를 안 쓰고 사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보면 내 일상과 세상사(事)는 내가 살아 온 지난 시간들과 다름없이 혼돈(渾沌)의 연속이지만, 그냥 그대로 그 혼돈을 받아 들이며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즐기려 하는 편이다. 머리 쓰지 않고.

그러다 이 나이에 장주(莊周)를 만나면 그 또한 복일 터이니.

이즈음 내 삶의 또 다른 참 좋은 벗들, 내 뜨락에 푸성귀와 꽃과 풀잎들.

벗들로 하여 누리고 있는 내 복에 대해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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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

외식(外食)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니 가히 15개월여만이다. 간혹 take-out한 경우는 있었지만 식당 테이블에 앉아 본 일은 참 오랜만이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을 찾아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누리다. 작은 마을 금요일 저녁은 팬데믹과는 상관없는 해방구였다.

거리 구경을 하며 걷는 우리 내외를 향해 누군가 전하는 인사말. “아유~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차안에서 소리치는 귀에 익은 한국어였다.  연(緣)의 끈들이 이어져 있기에 살아있음이다.

“우리가 부모님들 처럼 함께할 수 있을까?” 아내의 물음에 나는 차마 강한 부정은 못하고 웃었다. 내 부모는 70년, 처부모는 60년 해로를 하셨는데… 우리 부부가 그걸 넘으려면 내 나이가?… 쯔쯔쯔…. 하여 웃다.

바라기는 이렇게 저렇게 얽힌 연들과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이런저런 소소한 시름과 걱정들 속에서도, 우리 내외가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감사하는 날들이 어제보다는 넉넉해지기를.

모처럼의 외식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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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밑의 개들

글의 시작은 삶의 처절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내려 가는…그러나 꾹 참고 써야했습니다. – 7쪽,  기막히고 황당했다. – 22쪽,  (그들은)야비했다. -81쪽>

글은 벼랑 끝에 선 절박함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이어 전한다.
<서둘러야 했다. 집중해야 했다. …버텨야 했다.  237쪽>

글 곳곳에는 곤고한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고백이 이어진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 101쪽, 고마웠다. 239쪽, 가슴 찡하게 감사했다. 278쪽>

그리고 글 말미에 적힌 주인공의 다짐이다.
<‘불씨’ 하나만 남아 있으면 족하다. 이 불씨 하나를 꺼뜨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주어진 삶을 살 것이다. 280쪽>

그렇게 책 <조국의 시간>을 덮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장면, 바로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이었다.

<형벌의 수단으로써 십자가는 고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 그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형벌이었으며 또 그런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무엇보다도 … 특히 유대의 불순분자들에게 과해졌다. 그것을 사용한 주된 이유는 소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억제력으로서의 탁월한 효과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들에 달린 희생자들이 야수들과 새들의 먹이로 제공된다는 것은 일반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십자가에 달린 이)의 수치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 마틴  헹엘(Martin Hegel) 이 쓴 <고대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 메시지의 오류Crucifixion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Folly of the Message of the Cross>에서

<로마의 극형 세 가지는 십자가와 화형과 야수였다. 이것들을 최악의 것이 되게 한 것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이나 공개적인 명예 실추 때문이 아니라, 이런 처형의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매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십자가형에 대하여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나 죽어 가는 자들의 위에서 울어 대고 밑에서 짖어 대는,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와 개의 존재이다.>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에서

나는 글의 주인공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길 ‘불씨’ 하나 품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만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 같은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비록 내 초라한 일상 속에서만이라도.

*** 책 <조국의 시간> 마지막 표지에 실린 도서출판 한길사 광고에 ‘한나 아렌트’의 명저들이 실린 발상에 탄성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쉽게 십자가 밑의 개떼들로 변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가르침과 이어져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