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에

일터로 나서는 아침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에 나무와 새가 한 몸이 되어 전하는 소리 – 봄이 오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늘 이야말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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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異端)

며칠 전 아들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이 눔이 갑자기 웬 일?’하는 맘으로 녀석의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웬 일이셔? 엊그제 봤는데…”하는 내 인사에 녀석은 평소와 달리 가래 잔뜩 낀 목소리로 응답했다. “몸이 좀 이상해서… 테스트했더니 파지티브라고…” 그렇게 아들놈은 바이러스 확진 소식을 전했다.

며칠 동안 가보지도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아들과 며느리 안부를 묻는 전화만 하며 보냈다. 행여? 하는 마음으로 돌아본 우리 내외는 무사하다.

나흘 째. 녀석이 입 맛이 돌아왔단다. 그래 안심이다. 먹는 즐거움을 찾았다니!

며칠 동안 이래저래 복잡한 머리 속 달래려고 꺼내 들었던 책 <성서 밖의 예수>이다.

벌써 이십 수년 전 일이 되었다만, 한 때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예수 세미나’ 학자들이 펴낸 글들에 푹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 참고 서적 중 하나로 대충 읽어 보았던 <성서 밖의 예수>였다.

종교사회학자인 일레인 페이젤(Elaine Pagels)이 쓴 이 책의 원제는 ‘영지주의 복음서(Gnostic Gospels)’이다.

예수가 죽은 이후 기독교가 형성된 이래 최초의 이단(異端)이 되어 역사의 패배자가 된 영지주의에 대해 개설해 놓은 책이다.

저자 일레인 페이젤(Elaine Pagels)은 만일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서가 기독교의 경전(이른바 성서)에 정경의 일부가되었다면(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보다는 훨씬 나은 종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테면 영지주의자들의 찬양했던 하나님이 어머니이자 아버지였던 점, 인간적인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 부활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 무조건적임 믿음에 앞선 하나님과 나와의 지식적 만남 등등… 나름 충분히 이해할 수 그들의 신앙과 주장이 이단으로 치부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린 것을 아쉬어 하는 지은이가 남긴 말이다.

<내가 영지주의에 열중했던 것은 정통파 기독교에 대항하고 영지주의를 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역사학자의 임무는 어느 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그렇게 닿은 이단에 대한 내 생각 하나.

무릇 모든 종교의 교단(敎團)이란 그들이 내세운 최초 선각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이단 아닐런지?

예수, 석가, 무함마드 어쩌면 공자까지도.

아들 녀석 덕에 우연히 꺼내들어 잠시 빠져 들었던 <성서 밖의 예수>. 이십 수 년에 밑줄 그었던 곳엔 별 감흥 없이 새롭게 밑줄을 다시 그으며 읽었다.

내 뜰엔 봄 꽃이 다시 피고 두어 주 전에 파종한 텃밭엔 새 싹이 오르고…

무엇보다 내 아들 녀석 입 맛이 돌아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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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아버지 고향인 경기도 포곡면 유운리 유실 마을은 내가 어릴 적 방학이면 찾아가 지내던 곳이다. 초, 중, 고교 시절이었던 1960대만 하여도 아직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살았던 유실 마을까지는 서울 신촌에서 거의 하루길이 걸렸다.

유실 마을을 지키고 계셨던 작은 할아버지 체구는 지금의 나 만큼이나 작고 야윈 분이셨다. 그 작은 할아버지는 신 새벽이면 ‘어흠’ 기침소리로 일어나셔 밤새 끓인 쇠죽을 여물통에 옮기신 뒤,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시곤 밭으로 나가셨었다. 그 할아버지 닮아서인지 나 역시 지금까지 해 뜬 후 눈 뜬 적은 별로 없다.

새벽 밭일 끝내고 돌아오셔서 조촐한 아침 상 물리신 후 작은 할아버지는 죽 여물로 배 든든히 채운 황소를 앞세우고 다시 들일에 나서시곤 하셨다.

어린 내겐 엄청난 크기의 황소는 작은 할아버지 앞에서는 늘 공손했고 내가 기억하는 한, 유실 마을 아버지 고향의 기둥이었다.

대학생이 된 내가 1972년 여름 7.4 남북 공동성명 소식을 들은 곳도 이미 전기가 들어 온 유실 마을에서 였다.

그 무렵에 삼성일가의 돈이 그 일대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모를 일이다…. 지금은 몇 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는지?

다만, 오늘 다시 생각해보는 황소다.

오늘 아침 장기요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찾기 전에 잠시 만났던 참 좋은 벗 필라 이종국 선생에게 들은 황소 그림 이야기 때문이었다.

올 정월 즈음이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하는 “기억 하장, 함께 하장”이라는 후원행사가 있었다. 뜻있는 분들이 이런 저런 물품들을 기증하고 그 물품들을 구입한 기금으로 4.16가족협의회의 진상규명 활동비를 마련해 보자는 뜻으로 열린 행사였다.

‘필라세사모’ 이름으로 작은 물품 하나라도 구입해 보자는 뜻이 모아져 기증 물품들을 보고 있던 중에 ‘필라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모임)”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작가 류연복의 작품인 그림 <황소>였다.

그러나 당시 한 회원이 남긴 의견 <이 황소는 구경만 하시는 것으로.^^>처럼 다른 물품들에 비해 조금 고가였다.

나야 그저 이름만 걸쳐 놓았을 뿐이지만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황소처럼 우직하다. 결국 <황소> 그림은 필라델피아로 오게 되었고, 지난 주에 한인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아시안계 이민자들 나아가 소수자들의 권익옹호에 앞장 서 일하는 ‘필라 우리센터’  사무실에 걸었단다.

다시 <황소>

이재(理財)에 재빠르게 밝은 이들에게 황소는 그저 물품이거나 지나간 시절의 추억거리일 수 있겠다만, 그 우직함과 꾸준함 나아가 든든함을 이어가는 역사성을 찾는 이들에겐 곁에 두고 싶은 상(象)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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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春雪)

우수(雨水), 경칩(驚蟄) 다 지나고 내일이면 Daylight saving time 곧 summer time으로 시간이 바뀌는데 사방이 눈으로 덮였다. 날씨도 제법 춥다. 겨울 옷 벗어 던진 지도 제법 되었는데 다시 찾아 입었다.
내일은 화단 꾸밀 요량으로 벌써부터 맘 설레었는데 일기 가늠 못하는 것을 보면 아직 내가 세상 덜 살았나 보다.

‘봄눈, 봄눈, 봄눈이라…’ 그리 홀로 읊조리다 정지용 시인의 <춘설春雪>을 읊어 본다.

<춘설(春雪)>

문 열자 선뚝! 뚝 둣 둣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롭워라.

옹승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 아니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우수 지난 봄눈과 추위를 맞아 시인은 아직 벗지 않았던 핫옷(솜옷)을 벗어 던지고 온몸으로 추위와 봄눈의 뜻을 즐겨 보겠단다. 아마 곧 맞게 될 화사한 봄 맛을 더하게 위함으로.

*** 나 역시 마찬가지다만 이 번 주초에 있었던 한국 대선 결과에 낙담하고 시름하는 벗들에게…. 우리들이 지난 날 누리지 못했던 찬란한 봄 맞이를 위한 통과의례 쯤으로 생각하자는 뜻으로 전해 보는 봄눈(春雪)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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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으로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깊었었는데 그예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 점 부끄럼 없이 탐욕스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똘똘 뭉친 기득권 세력들이 제 놈들 모습 쏙 빼어 닮아 완장 채워 내세운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이 되었단다.

잘 싸운 듯 한데, 딱 한 치 모자라 칠 십 년 빌어 온 간절함을 이루지 못했다. 거의 다 와서 딱 한 치 앞에서라니.

또 한 번 한참을 뒷걸음질 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여 답답함이 밀려오긴 한다만, 무릇 역사가 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느린 걸음으로 사람사는 세상 또는 하나님나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이르면 또 참을 만한 일이다.

다만, 한반도 역사를 등에 걸머지고 오늘을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드렸던 이들이 아파하며 흘릴 눈물을 생각하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솔직히 떠나 사는 내가 뱉는 이 말들은 모두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 내가 기껏 마주 할 앞으로의 일들이란 한반도의 위기를 전하는 신문을 들고 올 내 가게 손님들 또는 부끄러운 대한민국 뉴스에 대해 묻는 손님들을 만난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때론 인근 대도시 한인 마켓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내 모습을 상정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땅에서 또 다시 치열하게 삶을 깍아내며 살아가야 할 이들을 생각하면 그저 아플 뿐이다.

참 아프다.

허나, 딱 한 치 앞까지 이르기에 칠 십 년 걸어 온 공동체이고 보면 조금 주춤해진 모습이라도 주눅들 일은 결코 아니다.

무릇 민(民)이 부서지면서 깨어 일어나 제 얼 바로 세워 이어가는게 바로 역사다.

오늘의 아픔으로.

  1. 9. 22

간절함

우리 내외와 내 아이들은 사뭇 다르다. 그 중 하나는 반려동물에 대한 태도다. 우리 내외는 이제껏 반려동물을 키워 보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더하여 내 경우엔 직업상 쌓인 이력 탓이기도 하겠지만 개나 고양이는 딱 질색이다. 검정색 겨울 울 코트에 개나 고양이 털을 잔뜩 묻혀온 세탁물을 받아 본 세탁업자들 이라면 나를 충분히 이해하리라.

우리 부부와 달리 아들 내외는 고양이를 키우고, 딸 내외는 개를 키운다. 어찌하리, 아이들이 키우는 개와 고양이는 까닭을 묻지 않고 그냥 내 새끼가 된다.

허나 아이들의 개나 고양이는 내 속내를 이미 꿰뚫고, 제 놈들을 한 다리 걸러 대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듯 하다.

딸 내외는 아픈 경험을 한 유기견을 데려 다 키운다. 녀석은 딸과 사위, 특히 사위 곁을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한다.

모처럼 딸과 사위 그리고 수키(개 이름)가 찾아와 이틀 동안 함께 한다.

오늘 낮에 아내와 사위와 딸은 교회 주일 예배를 드리려 가고, 수키와 내가 단 둘이 집에 머문 약 한 시간 반은 내겐 정말 긴 시간이었다.

수키 – 녀석은 나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녀석은 울음과 짖음을 끊지 않았다.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 쪽은 나였다.

한 시간 여 녀석을 달래다 지친 내가 택했던 방법은 녀석과 함께 창가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수키 녀석의 간절함 이라니! 나는 언제 그렇게 간절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와 수키의 울음과 짖음이 멈춘 후, 나는 두 어 시간 삽질을 했다. 지난 해 보다 한층 넓어진 텃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이 나이에 수키만큼 만이라도 무언가에 간절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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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세상 걱정 모두 내려놓고 그저 내 맘과 몸이 가는 대로 보낸 하루야 말로 참 안식일(安息日)이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

이른 아침 지난 뉴스들을 훑다가 보게 된 부고(訃告)들. 솔직히 덤덤하게 받아들일 연세 즈음에 떠나신 이들이라 그 이들의 지난 삶을 잠시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한쪽은 과할 정도로 뉴스 량이 많고 다른 한 쪽은 조촐하 다만, 나는 조촐한 쪽에 꽂혀 그를 추억한다.

이어령 선생은 나름 한 시대에 이름 한번 떨친 이었으나 내겐 별로 큰 의미 없는 이었으므로 그저 뉴스일 뿐, 서광선 선생의 부음은 아주 잠시라도 삶과 신과 이웃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서광선 선생은 “믿음이란 불안 없는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태초의 창조의 힘으로 생각하고, 관계성의 힘으로 생각한다면, 창조의 보전은 인간들 사랑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를 알게 해 주신 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장수시대라도 때 되면 다 떠나게 마련이다.

바람 소리 거세도 이미 매운 맛 잃은 봄바람이다. 애초 오늘의 계획대로 뒤뜰 텃밭을 갈아 일구다. 모처럼 삽질에 ‘흠흠’ 콧소리 내며 내가 봄이 된다. 화단엔 움 돋는 화초들과 이미 만개한 이른 봄꽃들이 게으른 내 어수선함을 비웃는 듯하다만 내 흥이 돋는데 제깟 것들이 뭔 대수랴!

오후에 참 좋은 벗이자 후배가 찾아와 쉬는 날 담소(談笑)를 즐겼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내가 만나는  발 딛고 서 있는 삶 가운데서 가장 성서적 삶을 살려고 애쓰는 친구다. 그래 난 늘 그가 참 좋다.

무엇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그저 느낄 수 있을 만큼은 누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응원한다. 필라 우리센터(https://wooricenterpa.org/ )는 그의 꿈이 녹아 싹 트고 있는 꿈이다.

담소 끝에 한국 선거 걱정을 하는 그에게 내가 던진 말.

“걱정 마시게! 지난 칠십 년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일깨우며 살아 온 시민들이 있는데…>

무릇 안식일은 걱정조차 없어야 한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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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도

연 이틀 모질게 매운 바람 불다 그치니 내 집에 봄이 내려 앉았다. 봄 준비 한답시고 뒤뜰로 나선 내게 활짝 핀 크로커스 꽃들이 웃으며 말을 건냈다. “쯔쯔쯔 이 게으른 친구야! 난 벌써 와서 기다렸구만…” 허나 내게도 늘 핑계는 있는 법. “예끼! 비웃지 말어! 겨우내 집안 단장하느냐고 나도 몹시 바뻣다고. 네 놈 웃음을 반갑게 맞는 걸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봄이 온다.

오늘 아침 집안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작은 상자는 눈에 익지 않은 것이었다. 상자를 여니 돌아가신 장모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 물건들 중엔 돌돌 말린 신문 쪼가리들이 담긴 백이 하나 있었다. 그 신문 쪼가리들을 펼치며 터져 나온 말 “에고, 우리 장모님”

어느새 스무 해가 빠르게 지나 간 일이다. 그 무렵에 나는 지역 한인사회 신문에 글을 열심히 썼고 한 때는 신문을 만들기도 했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모아두었던 흔적들을 모두 없앴던 일도 벌써 오래 전이다. 하여 이젠 거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 되었다.

허나 장모는 그 당시에 내가 썼던 글들을 오려 고이 간직해 두셨던 것이다. 장모 남기신 물건들도 이젠 없다 싶었는데 상자 하나 남아 잠시 옛 생각에 빠져 본 아침이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 중계를 보며 썼던 글을 보며 웃었다. 그 때만 하여도 내가 참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중계 카메라가 비추어 주는 곳곳마다 온통 붉은 바다였다. 열 두 번 째 선수라는 응원단 곧 red devils의 상징색이란다. 더하여 그들의 가슴에는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 구호조차 선명하였다. 이 어찜이뇨? 이 넉넉함이 어디서 온 것이더뇨?

일개 축구응원단의 색깔을 비약한다 말하지 말라. 지난 세기, 우리에게 적(赤)은 오직 적(敵)이었으며 뛰어넘지 못할 벽이었다. – 그렇게 반 백년을 살아왔다. – 그럼에도 아직도 툭하면 좌파입네 우파입네 손가락질로 때리고 싸우며 저 함성 뿐인 민중을 속이는 정치꾼, 오직 양시(兩是)나 양비(兩非) 뿐인 사이비 언론들 그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쏟아 터져 나오는 저 붉은 빛의 함성, 붉은 파도 이 어찌 신(神)의 일하심 아니겠나!>

이 글의 끝을 나는 이리 맺었었다.

<비노니 언론이여! 실축(失蹴)한 젊은이에게 돌 던지지 말지어다. 분단의 세월, 그대들이 내지른 고의적 실축은 천년이 가도 남을지니.>

이즈음 한국 언론들을 보면  ‘양비양시’도 아니고 그저 장사꾼처럼 보인다. 실축도 아니고 고의적 실축 뿐.

지금 내가 사는 곳이나 그저 생각 속에 남은 한국이나 봄이 참 봄 다운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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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내가 대통령 선거 투표를 처음 해 본 때는 2000년도이다. Al Gore와 George W. Bush가 붙었던 그 해 선거에서 나는 아시안계 정치 참여단체인 80-20 Initiative의 이사자격으로 Al Gore를 위한 선거 운동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투표권을 부여 받을 나이부터 이민을 올 때까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민 온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기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다 맘먹고 시민권을 갖고 뒤늦게 첫 대통령 선거 경험을 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넘을 무렵에 품은 꿈이 하나 있었다. 예순 다섯이 되면 가능한 이중 국적을 얻어 한국 대통령 선거도 한 번 해 보아야겠다는 꿈이었다. 막상 그 나이에 이르자 나는 망설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 가 누울 한 뼘의 땅도 없는 처지이고, 돌아가 살 마음도 없고, 내 아이들도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 그 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 꿈을 접은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비록 권리는 없으나 관심마저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법적 지위로야 어찌되었던 나는 근본이 그저 한국인이므로.

그렇게 보게 된 한국 대통령 후보 토론이었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가름이나 좌나 우를 나누는 일은 그리 마뜩찮게 여기는 편이다. 무엇보다 내가 선 자리를 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그 자리매김이 힘든 일은 점점 많아진다. 다만 그 양단의 극에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듣지도 않거니와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조차 피하는 편이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페북을 통해 오래 전 어렸을 때 친구들의 소식들을 힐끔거리론 하지만, 친구 맺기를 거의 하지 않는 까닭은 나와 세상보는 생각이 이미 너무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 공연히 어색한 관계를 잇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옛 추억으로 반가움을 되새기고 말 뿐.

이젠 칠순잔치 소식들을 올리는 친구들과 내가 서로 결코 꺾이지 않을 고집스런 생각을 나누며 시간을 허비 할 순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에서 선거란 개인이나 이런 저런 각종 이익, 이해단체들이 자신이나 속한 단체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대표자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하여 자기 주장도 펴고, 아까운 돈과 시간을 보태기도 하고, 속한 공동체의 뜻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도 하는 법이다.

문제는 대표자로 나서는 후보자들이나 그를 내세우는 정치집단과 표를 행사하는 개개 유권자나 각종 이해 단체들 사이에 난무하는 거짓과 사기질들이다.

그 거짓과 사기질을 잘 가리는 유권자들이 표를 제대로 행사하는 사회가 민주적으로 앞서 나가는 법일 터이고.

그렇게 든 몇 가지 생각들.

우선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대한민국은 정말 짧은 시간에 너무나 빨리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첫째이다. 그 생각의 까닭은 단순하다. 내가 비록 투표권은 행사하지 못했지만 처음 투표권을 가졌던 1970년 대초만 하여도 이편 저편의 세가 99.9대 0.1이었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이젠 거의 51대 49 다툼이 되었으니 참 많이 바뀌었다. 그 다툼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만 하여도 크게 나아진 일 아니겠나? 더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여건임도 불구하고.

둘째는 사람의 생각이나 모습이 바뀌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심상정과 안철수를 보며 가져 본 생각이다.

세째는 사람살이 발전해 나아가는 방향에는 언제나 맞바람이 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보며 든 생각이다. 그를 보며 내가 공연히 부끄러워진다. 허나 역풍으로 하여 사람살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힘이 더욱 거세진 역사도 종종 겪어온 일이다.

오래 전 0.1이었던 숫자가 이번 선거에서 51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래 또아리 틀었던 양 극단(極端)들이 모두 한 칸 씩 밀려나 사라지는 역사가 일지 않을까?

과메기

친구 덕에 말로만 듣던 과메기 맛을 보았다. 과메기란 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과메기라는 말을 들어 본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내게 과메기 맛을 보게해 준 친구 역시 그의 지인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어 처음 마주하게 된 음식이란다. 우리들이 즐겨 먹던 건조 생선으로는 오징어, 굴비, 북어, 양미리 등이었을 뿐 한국에서 살 때 과메기란 음식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서울내기들인 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과메기 뿐만 아니라 친구 아내는 생태찌개, 김치 찜, 삼겹살 수육 등 맛깔스런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 내어 우리 부부가 호사를 누린 어제 저녁이었다. 친구는 그가 담근 매실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게 뒤끝이 참 깨끗해요. 맘껏 마셔도 내일 아침 거뜬할 겝니다.” 그의 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실로 간만에 권커니 잣커니 하며 마신 술자리였는데 오늘 아침 맞이는 정말 가뿐했다.

엊그제 친구를 만난 것은 거의 삼년 만 이었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살지만 코로나 탓도 있고 그저 무심히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먼저 인사 치레를 건넸다. “아이고 날 잡아 오랜만에 한 잔 합시다.” 이어진 그의 응답이었다.”아이 뭔 날을 잡아요? 그냥 오늘 하면 되겠구만!”

그렇게 마련한 어제 저녁 자리였다.

서로 못 본 사이에 그는 이사를 했다. 그의 새집은 그의 농장을 한 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작고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친구 내외의 노년을 보낼 집으론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일찌감치 노년을 즐길 준비를 마친 그가 크게 부러운 저녁이었다. 근사한 저녁상과 매실주 반주에 대한 감사는 부러움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길고양이 두 마리를 보살펴 키우는 재미도 듣고, 구십 대 쇠약해지신 그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 소식들도 나누고, 우리들의 노후에 대한 그저 쓰잘데없는 걱정도 나누며 적당히 오르는 취기를 즐긴 저녁이었다.

어쩌면 내게 과메기는 어제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겐 낯 선 음식이기도 하거니와 구태여 특별한 음식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 내 성정 탓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든다.

다만 과메기 없이도 숙취 없는 매실주 없이도, 그저 참 좋은 친구들과 이따금씩이라도 얼굴 마주 하고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시간들을 즐길 기회를 누렸으면 좋겠다.

친구내외에게 고마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