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꽃

가게 앞 공사판은 곧 끝날 듯 끝날 듯 하며 지루하게 이어져 족히 삼 사백 피트(백 미터 이상) 걸어서 세탁물을 들고 오가는 손님들에게 미안함 마음 그치지 않는다.

한 물 간 업종이라는 말도 많고, 더하여 접근성 제로에 이르는 공사판 환경임에도 찾아주는 손님들 덕에 바쁜 한 주간을 보냈다.

지난 주말에 텃밭 열무를 거둘까 하다가 한 주 미루었는데 그새 열무 꽃밭이 되고 말았다. 텃밭 농사 흉내내기 삼년 차, 가장 쉬었던 게 열무농사였다. 그냥 씨 뿌려 놓으면 그만 이었는데, 아뿔사! 내 게으름으로 그만….

처음 경험하는 일이므로 구글(google)신(神)에게 물었다. “열무꽃이 피었을 때…”라고.

그렇게 만나 문태준 시인의 극빈(極貧)이라는 시였다.

<극빈極貧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열무꽃 덕에 이웃에게 결코 넉넉치 않았던 내 삶을 잠시 돌아보는 시 한편 곱씹다.

*** 거센 열무 꽃대 잘라 내고 여린 열무 잎 다듬어 거두다. 아침 새소리는 경쾌하고 저녁 나절 새소리는 넉넉하다. 새 소리에 취해 열무 다듬는 시간에 누린 행복이라니. 그 짧은 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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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는 일도 기쁨이겠다만, 종종 지나간 것을 되새겨 얻는 즐거움도 제법 쏠쏠하다.

두어 주 전에 코로나와 씨름 하노라고 방에 갇혀 며칠을 보내며 다시 읽어 본 소설 <나무 위의 남작> 이었다. 얼추 스무 해 전에 읽었던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새롭게 눈 뜬 기분이었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나무 위의 남작> 속 주인공 코지모 남작은 그가 열 두살 되던 해인 1767년에 일생을 나무 위에서 살기로 작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이후 평생을 마치 타잔 처럼 나무와 나무를 타고 지낸다. 타잔과는 다르게 땅 한번 밟지 않고 나무 위에서만 삶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죽어 땅으로 돌아와 묻혀 남긴 그의 비문(碑文)이다. –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다.>

그가 어린 나이에 나무 위로 올라가게 된 까닭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반항 때문이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상징은 곧 기득권 세력, 부패한 체제를 일컫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대변혁기를 남들 보다는 조금은 높은 나무 위에서 당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뇌하며 행동하는 주인공 코지모 남작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왔다.

그가 비록 현실의 부조리와 부패에 저항하는 뜻으로 나무 위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그는 땅과 사람을 사랑했던 이었다. 그는 남들 보다 조금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꿰뚫어 보며 살았다. 그는 사람과 사람살이 그리고 자연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품고 살다 갔다. 나무 위에서.

어제 텃밭과 꽃밭 잡초를 뽑다가 문득 바라본 하늘이었다. 하늘을 향해 꼭대기로 치솟는 나무들의 새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던 말. ‘꼭대기’

꼭대기에 닿으면 그저 잊지 말아야 할 말, 바로 ‘겸허’

이젠 점점 하늘에 가까워 가는 나이에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말 , 바로 ‘겸허’ 그리고 오늘에 대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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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동淸雲洞

세상이 너무 많이 달라져 누군가의 경험을 일반화 시키는 일은 아주 무모한 일이 되었다. 비록 그 경험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 다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나이 들어 돌아보는 십대 나이 어린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제와 돌이켜보는 내 십대 어렸던 시절의 추억은 부끄럽지만 내 살아 온 시절 가운데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들이었다.

일차 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실패했던 내가 이차 시험을 통해 들어간 학교는 청운 중학교였다.  머리 빡빡 밀고 검정 교모와 교복을 입고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신문로에서 내려 신문로 사거리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한참 걸어야 닿았던 청운 중학교였다.

그렇게 여섯 해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청운 중학교와 경기상업고등학교, 내 십대 소년을 되돌아 추억해 보는 밤이다.

북악산(학교 때 교지 이름이 백악이었는데 북악보다는 나는 백악이 더 좋았었다) 기슭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품는 멋진 곳에 위치한 학교였다. 구글 검색을 통해 학교를 찾아보니 중학교는 완전히 옛 모습을 잃었으나 고등학교 건물은 예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청운동, 효자동, 통인동, 내자동 그 거리 거리와 골목골목들이 내 어린 시절 벗들의 얼굴들과 함께 내 머리 속을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 누가 무어라 할지라도 지나간 모든 시간들은 비록 아릴지라도 소중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더하여 소년 시대의 추억이라면.

기억컨대 청운동 그 거리를 1972년 이후 밟아 본 적이 없다. 딱 오십 년이 지났다.

몇 해 전 일이던가? 세월호 가족들이 울며 걸어 닿은 곳이 청운동사무소 앞이라는 신문기사를 보며 옛 생각에 잠시 빠졌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한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청와대 뉴스를 보며 돌아보는 옛 생각이다.

사람살이 종종 반동(反動)의 시간을 겪기는 한다지만, 오십 년 아닌 칠 십년 전 자유당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한국의 권부와 그 주변 소식들이 조금은 난감하다만….

잠시나마 내 소년에 대한 추억은 여전히 아름다울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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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해마다 이 맘 때면 내 집 앞에 꽃길이 펼쳐진다. 날씨가 궂은 해에는 일주일여, 봄이 제법 긴 해는 석 주 이상 꽃길을 걸으며 일터로 향하고, 그 길을 딛고 돌아온다. 일주일이든 석 주든 해마다 내가 누리는 꽃길의 즐거움은 딱 그만큼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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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過程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좀 이상 했었다. 으스스하니 춥고 세수하며 손끝에 닿은 물이 그리 찰 수가 없었다. ‘몸살 기운이 있나?’하며 일터로 나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온 몸이 마디마디 쑤시기 시작했다. 오후 들자 콧물 나고 잔기침이 잦아졌었다. 아무래도 좀 심상치 않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covid test를 해보니 영락없이 양성 반응이었다. 다행히 아내는 음성이었다. 지난 주 수요일 일이었다. 마침 수요일엔 가정의(family doctor) 사무실이 8시까지 문을 열었다. 전화를 하니 잠시 후 의사에게 연락이 왔다. 내 증상과 증상이 나타난 시점 등을 물은 의사는 먹는 치료제도 나왔으니 이튿날에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튿날 이런 저런 검진 후 의사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치료를 위해 먹는 약 PAXLOVID를 처방하기 전에 내게 물었다. ‘이 약을 일반인들 누구에게라도 급한 경우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게 바로 어제부터 랍니다. 아직은 연구중인 약품인 것이지요. 약간의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제 생각입니다만 김씨는 특별한 병력도 없고  복용하는 약도 없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묻는 것이지요’

나는 잠시 망설였었다. 그 때 증상으로 보아 참을 만도 했고, 앓아봐야 며칠 고생하면 끝일텐데… 부작용을 염려하면서 까지 먹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먹고 빨리 나을 수 있다면 나은 방법 아닐까? 또 아내가 아직 괜찮은데 공연히 내가 옮기기 전에 빨리 복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 사이에서 왔다갔다 했던 것이었다.

결국 처방전을 받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약을 받아 들고 돌아와서도 먹을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그 때까진 증세가 참을 만 했기 때문이었다.

본격적인 증상이 시작된 것은 그 날 밤부터 였다. 물은 커녕 침조차 넘기기 어려운 목 통증과 기침 가래에 이은 답답한 가슴 통증 등이 거의 만 48시간 이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장시간 누워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아침 저녁 각 세 알씩 오일 간 복용하는 PAXLOVID 30알을 남김 없이 먹었다. 어제 오후엔 의사선생이 전화를 해서 내 상태를 물었다. 나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듯 하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이틀 간격으로 아내는 테스트를 계속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연이어 음성이 나왔다. 아파보니 40년 함께 해 온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크게 인다.

누워 있으며 잠시 들었던 생각. < 다 과정인데…. 언젠가 머지 않아 맞이할 내 마지막 때에도… ‘뭘 과정일 뿐인데…’하며 웃을 수 있으려면…. 하루 하루 내가 마주하는 순간 순간들이 그저 과정인데 하며 겸허하고 너그럽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제법 나이 든 생각 하나.

그리고 며칠만에 다시 돌아온 일터에서 만난 진상 손님으로 하여 피로와 짜증과 화가 치밀다 가라앉은 후 중얼거렸던 내 혼잣말. “에이그… 나이가 들긴 뭘…?…. 겸허하고 너그럽게..? 에이고 아직 멀었습니다!”

어쩌겠나?  다 과정인 것을.

그거 하나 되씹어 볼 수 있던 것 만으로도 지난 한 주간에 대해 감사!

시간에

“내가 26년생…. 지금은 22년…. 백 년이 얼마 안 남았네…. 참 오래도 살았다. 이젠 가야 되는데…”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시며 중얼거리시는 아버지는 이즈음 정신이 아주 맑으시다. 식사량도 그렇고 잡숫는 즐거움도 맘껏 누리시는 편이다. 오늘 같기만 하시다면 백수(白壽) 아닌 백수(百壽)도 욕심만이 아닐 듯 하다.

어제 이발을 했다. 이발을 해주시는 이가 내게 덕담을 건넸다. “아니 어쩜 이 연세에 흰머리 없이 까마세요.” 그러던 그가 깜작 놀라며 조금은 호들갑스럽게 “아이고, 이거 어떡하죠? 여기 머리 빠진 걸 모르고 너무 짧게 짤라 버렸네요.  어떡하죠?” 하며 미안해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뒤통수는 내가 볼 수도 없고, 내 머리 쳐다볼 사람도 없고, 설마 구멍난 거 본들 뭐 문제 있나요?”

“참 낙곽적이신데도 스트레스를 받으시나 봐요? 원형탈모는 스트레스 때문이라던데요…”계속되는 그 이의 말을 이렇게 막았었다. “스트레스는 무슨… 그냥 때 되니까 빠졌다 났다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아직은 다시 나니까 괜찮아요. 머리털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는데… 그저 나이들어 가는 증상일 뿐인걸요.”

오늘 아버지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을 빼곤 온종일 뜰에서 지냈다. 화단에 잡초를 뽑고 멀칭을 입히고, 여름 구근과 응달 식물도 심고, 꽃씨도 뿌렸다. 토마토와 고추 모종도 심고, 완두콩, 시금치, 열무, 배추, 상추 등속이 올라오는 텃밭 잡초들도 뽑아 주었다.

백 년, 칠십 년이 아니라 내겐 아직 하루 해가 짧다.

저녁나절 간지러운 봄바람 타고 내 귀를 홀리는 새소리와 풍경소리에 이는 춘정(春情)을 달래려 한 잔 술을 벗삼다.

분홍 봄꽃은 비나리로 연등처럼 걸렸고 하늘엔 시간이 비행기를 타고 흐른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려 보는 말. “스트레스 없는 사람, 걱정과 염려 없는 사람, 분노와 미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냥 시간을 효소 삼아 사는게지.”

시간(時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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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장이

오늘 아침 바라본 내 가게 앞 풍경이다.

그야말로 공사판이다. 가게 앞엔 공사판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다. 샤핑센터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 지는 여러 달 전 일이다. 건물주가 말하는 공사계획에 따르자면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단다.

내 가게 코 앞에 차를 대고 세탁물을 들고 날던 손님들이 이즈음엔 족히 300에서500 피트(약100-200미터)를 걸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미안하고 또한 그저 고마울 뿐.

이른 아침 찾아 온 손님에게 내가 건넨 인사 말,  ‘아이고, 멀리 걷는 불편함을 드려 미안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에 대한 손님의 응답, ‘뭘요, 걷는 운동하고 좋지요. 당신 탓도 아니고요. 공사 끝나고 당신 가게가 이전 보다 훨씬 잘 되었으면 참 좋겠어요! 당신 가게가 여기 있어 난 참 좋아요.’

하여 난 아직 은퇴하기 이른 나이다. 세탁장이로.

부활 이후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교회 토요 모임이 끝난 후 몇몇이 모여 제법 진지하게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었다. 이야기의 수준이 뭐 대단했을리 없었겠지만 사뭇 진지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K가 있었다. 그는 부활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당시 또래들과는 다르게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렸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일요일 늦은 밤에 그의 형이 나와 친구들 집을 찾아 다니면서 그의 행방을 물었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간 K가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하루가 지난 후, K는 한강 샛강에서 주검으로 떠올랐었다.

오십 수 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 때 토요 모임과 K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생각할수록 순수하고 순진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아프고 아리고 쓰린 기억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 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말을 주고 받았다. 가서 보니 그렇게도 커다란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 갔더니 웬 젊은이가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보고 질겁을 하자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였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 – 마가복음 16장 1-8>

예수 부활에 대한 마가의 기록이다.

마가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한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들(마가복음 16장 9- 22절) 곧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과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들은 후대에 사람들이 만들어 첨가한 것이라는 의견에 대체로 공감한다고 한다.

아직 얼굴 모습이 선한 어린 K와 헤어진 지도  반 백년이 넘었고,  그새 나는 고집스런 노인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젠 누구의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어 버린 내 부활신앙이다.

다시 일어나 자신이 일하며 살았던 갈릴리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함께 일어나자고 외쳤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 마가에게 공감하며.

오늘 여기에서 다시 일어나는 삶, 그것이 부활이후라는 믿음.

공연히 죽음 넘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일일랑은 접고.

부활주일이었던 어제, 내 뜰은 온통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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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금요일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던 날을 기리는 성(聖) 금요일( Good Friday) 밤이다. 지난 일요일인 종려주일 이후 몇 번을 되새겨 다시 읽어 보는 마가의 기록이다.

마가는 예수에 대한 16장의 기록 가운데 1/3이 넘는 분량에 예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을 담았다.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가 자신의 마지막 삶의 여정 한 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갈릴리 출신 시골사람 예수가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인 도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에게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호산나!’ 곧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외침이었다. 예수가 곧 군중에 의해 신이 되는 시간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던 마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첫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마가복음 14장 한글 공동번역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를 죽일 음모—–과월절 이틀 전 곧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였다.>

예수 죽음의 시작은 곧 누군가의 음모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다.

‘그 누군가’는 곧 당시 체제의 기득권자들이었다. 이어지는 마가의 기록에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부인한 제자,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나아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신의 자리에 올렸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며 악을 써 외치는 모습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 예수를 기리는 성 금요일 밤이다.

죽음을 맞기 전 예수는 이런 기도를 했다고 마가는 전한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Good Friday라는 반전(反轉)의 용어는 예수가 구했던 그 뜻을 헤아려 깨닫기 전에 쓰기엔 많이 가볍다.

그렇게 예수는 군중이 아닌 스스로의 뜻으로 신이 되었다.

2022년 다시 마주 한 성 금요일 밤. 오늘도 누군가는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권유하고, 누군가는 또 배신을 일삼거나, 부인하거나 외면하고….

누군가는 그들이 누리는 오늘의 이익을 위해 꾸준히 음모를 꾸미고.

마침내 예수가 마지막 숨을  내쉬던 그 밤에 먼 데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는 마가의 기록.

당시 예수 부근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 그들을 통해 그 어둡고 처참했던 밤에서 빛을 그려낸 마가.

성금요일에 다시 마가를 읽으며.

고추장

나는 입이 매우 짧다. 그렇다고 음식을 가리는 쪽은 아니다. 어떤 음식이든지 먹을 만한 것이라면 가리지는 않는다. 이른바 혐오음식으로 알려진 것들도 대개는 거부감없이 먹었다. 물론 싫어하는 음식들도 있다. 일테면 고수(실란초Cilantro)  등과 같은 허브류 등 입에 안 맞는 것들은 거부하는 편이지만 질색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는 편은 아니다.

아무튼 나는 입이 짧다. 소식(小食)  곧 먹는 양이 적은 편이다. 대단한 건강 타령으로 그리 하는 것은 것은 아니다. 그냥 내 생긴 형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냥 많이 먹지를 못하기 때문이고, 많이 먹어 배가 부르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입이 짧다. 그렇다고 반찬 투정을 부리지는 않는다. 그냥 있는대로 내 배 찰 정도로 잘 먹는 편이다만, 종종 내가 듣곤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나는 입이 짧다.

그런 내가 제일 좋아한다기 보다는 즐겨 찾는 것은 고추장이다. 아이들 다 집 떠나고 난 뒤, 아내와 나는 일주일에 거의 반반씩  음식과 설거지를 나누어 한다. 내 순번이 되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음식 재료는 단연 고추장이 으뜸이다.

어쩌다 나 혼자 밥을 먹게 될 때엔 뜨듯한 밥 한 공기에 고추장 하나면 족하다. 참기름 몇 방울 더한다면 그 족함에 더할 나위 없다.

이런 내 입성을 캘리포니아 사돈 어른들이 어찌 아셨는지 고추장 한 병을 곱게 싸 보내 주셨다. 그냥 고추장도 아니고 커다란 대추알 박힌 대추 고추장이었다.

그 고추장 풀어 달달하고 얼큰하게 장칼(?)국수(엄밀히 칼국수라 할 수 없는 마켓에서 산 국수임으로)로 아내와 함께 저녁상을 즐겼다. 다음에 아이들 오면  칼국수 만드시던 어머니 흉내 내어 내가 직접 만든 장칼국수 한번 끓여 보아야겠다.

고추장 한 숟갈로 넉넉히 배부르고 좋은 주말 저녁에.20220406_183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