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 낱말 사전은 “야비 (野卑/ 野鄙) 하다”라는 말을 이렇게 풀고 있다. <사람의 성질이나 하는 짓이 곱지 못하고 천하고 야하며, 도리에 어긋나다.>라고.

‘비겁하다’, ‘치사하다’, ‘교활하다’, ‘얍삽하다’ 등등 비도덕적인 일들을 일삼는 사람들의 행위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글쎄? 사람마다 다 세상 바라보는 눈높이와 그를 재는 잣대의 길이가 달라 옳고 그름을 정확히 재고 판단할 유일한 저울이 어디 있겠느냐만, 그저 내 상식과 작고 좁은 내 머리 속 생각만으로 따져보자면 최근 십 수년 이래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과 ‘조국 전 장관과 그의 가족들’에게 팔매질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일컫는 말로는 이게 가장 적합할 듯 하다. – <야비 (野卑/ 野鄙)>

필라의 좋은 친구들이 모처럼 기지개 켜고 사람 깨우는 자리를 마련했단다.

주말에 아내와 함께 가보려 한다.

세월호 6주기

기도

1.
오랜만에 세탁물을 찾으러 온 그의 얼굴은 텁수룩하게 기른 턱수염 탓인지 매우 수척했다. “장사는 좀 어때?”라며 묻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은 좀 공허했다. “뭐, 그저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름철이라 한가한 편…”이라는 내 대답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틈새로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떠세요? 부인께선….”

잠시 두 눈을 껌벅 이던 그가 입을 뗀 말, “떠났어요.”

나보다 몇 살 위인 Charlie는 삼십 년 가까운 내 단골이자 내 이민생활의 좋은 멘토였다. 큰 회사의 중견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후 그와 그의 아내는 이런저런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그는 지팡이를 벗삼아 내 가게를 들락이면서도 늘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었다.

어제, 아내가 세상 떠난 짧은 인사를 던지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남긴 그 공허한 잔상이 아직 내게 이어지고 있다.

2.
이번 주말, 살아 생전에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외길 걸었던 선배의 삼주기 기일을 맞아 필라 인근에 사는 그의 후배들이 함께 하려 했었다.
그러다 듣게 된 참으로 느닷없는 부음(訃音). 선배의 아들 노릇했던 아직 쉰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맏사위의 갑작스런 떠남.

그 부음을 알리는 선배 가족의 알림. “……..정말 통탄스럽게도……담에 연락할 때는 정말 더 밝은 소식으로 만나기 바래요.”

아직 내 속 아림이 이어지고 있다.

3.
죽음 앞에 서면 나는 예수쟁이가 된다. 더욱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죽음이란 단지 어딘가 닿을 또 다른 떠남이기에. 하여 오늘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종말론적 삶을 재촉하는 깨침이기에.

… Charlie와 선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밤에.

바다

살다 보면 종종 생각지도 않은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지난 목요일이었다. 주말 장사 준비를 마친 친구가 시간을 내어 내 가게를 찾아왔다. “이번 일요일에 특별한 계획 있으신가?”, 나는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글쎄 뭐 별로 특별한게… 없지!.”

“잘됐네, 바다바람이나 한번 쐬러 갑시다!”하는 그의 권유에 나는 흔쾌히 “좋구먼!”하며 맞장구를 쳤었다.

사실은 주말에 가을 무와 배추를 키울 텃밭 준비를 해볼까 하는 계획이 있었다만, 찌는 더위가 이어지고 있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으므로 쉽게 뒤로 물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친구 따라 바다바람도 쐬고, 바닷물에 발도 담구어 보고 모래사장을 걸어보는 일도 좋겠다는 생각에 흔괘히 응했고 아내도 좋다고 하였다.

이어진 친구의 말. “특별한 준비물은 없고, 가벼운 점퍼는 좀 챙겨서 요셔!”

그리고 어제 아침 집을 나서기전 그가 말한 ‘가벼운 점퍼’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졌었다. 바닷가라 일기가 불순할 수도 있으니 혹 그에 대한 예비를 하라는 뜻이였나? 아님 너무 따가운 햇살을 피할 요량으로 준비를 하라 한 것일까? 아무튼 아내와 나는 가벼운 점퍼 대신 긴 팔 셔츠 한 장씩을 준비해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뉴저지 친구 집으로 향했었다.

그렇게 친구집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친구의 계획은 낚시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일정이었다. 몇 달 전에 친구 내외가 처음 낚시배를 타 보았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며 그 재미에 우리 내외를 초대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낚시를 쫓아 다녀 본 경험은 있었지만, 낚시배를  타본 적은 없는 우리 내외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낚시배에 올랐다. 날씨는 참 좋았다. 낚시배에는 낚시대와 미끼 뿐만 아니라 미끼를 끼워 주는 손길도 제공해 주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 낚시 어종은 flounder(넙치 또는 가자미)라고 하였다. 선원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바닷가 풍경을 담기 바빳고, 평생 처음 해 보는 낚시배 경험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 배가 만(灣)을 빠져 나가 바다로 나가기 전 까지는.

탈 때는 제법 큰배라고 생각했었는데 바다로 나가니 일엽편주 그야말로 작은 잎 파리 위에 읹아 있는 느낌이였다. 제법 높은 파도를 거스르며 나아가는 배는 앞뒤로 크게 요동을 쳤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사진 찍기에 바빴었다. 바다와 보이는 인근 풍경들이 그저 새로울 뿐이었다.

드디어 첫 포인트에 이르러 배가 멈추자 짧은 뱃고동 신호와 함께 낚시꾼들은 낚시줄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만 해도 참 좋았었다. 주변에서 제법 큰 고기들을 낚아 올리면서 환성이 터졌고, 내심 기대도 커지기 시작했다. 헌데 배가 심하게 좌우로 출렁거리며 요동쳤다.

다시 짧은 뱃고동이 울리자 모두들 낚시줄을 거두어 들이고 두번 째 포인트로 이동했다. 그즈음이었을 게다. 내 몸에 이상이 왔다. 배에 출렁거림이 내 머리와 내 뱃속으로 이어져 내 스스로 내 몸을 제어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생각난 친구의 말, ‘가벼운 점퍼’ 추웠으므로.

그렇게 네 시간 여 낚시배에서의 내 첫경험은  참담하였다.

그렇게 얻어 온 sea robin(성대 또는 바다울대라고…)  몇 마리가 어제의 수확? 그리고 바다.

*바다 – 남의 글과 말로만 전해 듣고 나름 내 작고 좁은 생각 속에 가두어 두었던 바다 –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또 바다 – 종종 민심에 견주어 일컬어 지곤 하는 바다 – 그 비유는 참 적절하다만 깨닫기는 정말 쉽지 않을 듯.

*** 그리고 다시 바다 – 아내와 참 좋은 친구 내외 – 어제 내가 누린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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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가게 문을 닫으려고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내용이 대개 뻔하다. ‘곧 문닫지요? 제가 맡긴 옷이 오늘 저녁 꼭 필요한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교통사정이 복잡해서…. 5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대충 그런 내용의 전화가 대부분이어서 때론 내 귀가길을 한참 동안 붙잡곤 한다. 하여 반갑지 않다.

아내가 전화를 받더니 한국말로 응대를 한다. “잠깐만요…”하더니만,  “한국인데…”하며 내게 전화기를 건넨다.

“예, 여보세요…”하는 내 말에 수화기에서 들려온 말, “야! 나야, 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대뜸 누군지 알아채곤 던진 내 말. “엉? 너 아직 살아있냐?” 중, 고, 대학교 동창인 박(朴)이었다.

얼굴 본 지 십 수년이 지나 목소리로 만나 떠든 그와의 수다로 아내의 귀가 길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도 정년으로 그만둔 지 벌써 다섯해가 되었단다. 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낯설단다. 백세를 넘기신 그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흔 여섯을 넘기신 내 아버지 이야기, 서로의 아이들 이야기…

“야! 니 목소리 들으니 넌 하나도 안 변하고 옛날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라는 그의 물음에 내가 던진 말, “글쎄… 아무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가?”

십 수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 혼자였던 그의 생활이 궁금해 내가 물었다. “그래, 누구랑 사니?”. 그의 대답, “응, 십년 됐어. 재혼한지.”

“그래, 잘 했다. 늙막에 함께 하는 동무 있어야지. 뭐 딴 거 있냐? 건강하자!”

집에 돌아와 저녁상 물린 후 뒷 뜰에 앉아 해질녘까지 시간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다가오는 꽃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려 이즈음 다시 넘기고 있는 책장들은 그대로 덮어 둔 채, 내가 맺어 온 짧은 연(緣)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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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덕(德)

친구 덕에 또 다른 세상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누린 즐거움과 느긋한 쉼은 친구가 우리 부부에게 덧붙여 얹어 준 선물이었다.

엊저녁에 친구의 맏딸 결혼 피로연이 워싱톤 D.C. 북쪽 Rockville에서 있었다.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라서 시간에 맞추어 오가면 자정 전에는 족히 집에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별 다른 계획을 세우진 않았었다.

그러다 두어 주 전 쯤 맘이 바뀌어 내친 김에 쉬었다 간다고 주말이니 근처에 걸을 만 한 곳 찾아 아내와 함께 걷다 오자는 생각에 필라 이길영선생께 좋은 곳 추천을 받아 야무진 주말 계획을 세우고 나섰었다.

친구 내외는 중국 음식을 참 좋아한다. 그 덕에 우리 부부가 이곳 저곳 중국 만두와 국수와 오리요리들을 비롯해 새로운 세상 구경 여러 번 하였다.

그리고 엊저녁, 친구 내외가 맞은 맏사위는 중국계였고, 피로연이 열린 곳은 중국 식당이었다. 이젠 사십 년을 향해가는 내 이민일지 중에 한 순간 가장 많은 중국인들과 마주하게 된 자리에 앉아서 나 혼자 웅얼 거렸던 말, ‘친구답구먼, 사위 잘 보았네!’

왈 대륙 미국의 심장부 워싱톤 D.C. 부근에서 중국 대륙의 잔치를 보는 신비함이라니! 정말 큰 잔치였다. 그 왁짝지걸 흥이 넘치는 자리는 내가 이민 와서는 처음일게다.

친구와 그의 맏사위의 착한 웃음이 닮아 있어 참 좋았다. 친구 아내가  부끄러운 듯하게 짓는 넉넉한 웃음과 잔치의 주인공이었던 친구 딸의 당당한 모습은 내 친구가 누리는 어제의 축복이었다.  모처럼 얼굴 마주한 한 동네 오래 살아 내 친누이 같은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한 즐거움도 참 컸다.

그리고 오늘, 더워도 너무 더웠다. 화씨 백도에 이르는 더위가 아침부터 시작되어 걷는 일은 포기 하였다. 다만 두 시간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하루 길 잡아 쉬며 쉬며 서두르지 않고 돌아 돌아 왔다.

폭포 구경도 하고, 워싱톤 D.C. 남쪽 한국식당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한국 맛 외식도 하고, 바다 구경도 하고, 바다 위에 놓인 긴 다리도 건너고, 한 동안 사방 옥수수 밭 사이 마치 비행기 활주로 같은 탁 트인 도로를 달리며…. 그렇게 느긋하게 하루 해를 보낸 감사를….

내 참 좋은 친구 내외와 그의 딸과 사위에게.

***걷기 좋은 곳 추천해 주신 이길영선생께 빚진 맘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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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하루

덥다. 아주 덥다. 세탁소의 여름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예나 지금이나 그냥 덥다. 여름철 장사가 좀 한가해진 것은 어쩜 내게 주어진 피서(避暑)일 수도 있다.

피서 놀이 해보라는 듯 잽싸게 빠른 작은 새 두 마리가 세탁소 안으로 들어 와 온 종일 내게 씨름을 걸어왔다. 놈들을 가게 밖으로 좇아 내느냐고 온갖 짓을 다해 보았지만 가게 문 닫기까지 땀 흘린 헛노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놈들은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높은 천장 위에서 나를 놀렸으므로.

문 닫기 직전에 같은 샤핑센터 안에 있는 애완동물 가게에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새를 잡는 도구나 쫓아내는 방법에 대해 물었더니 뾰족한 방법을 아는 바 없다며 새모이 한 봉지를 거저 주면서 하는 말이었다. “이 모이를 이용해 보시구랴!”

구글과 유튜브를 통해 알아낸 방법을 흉내 내어 새 잡는 덫을 엉성하게 만들어 그 안에 거저 얻은 새모이 듬북 넣어 놓고 가게 문을 닫았다.

피서놀이 치고는 참 원치 않은 일이었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게 어디 놀이 뿐이랴! 사는 게 어쩌면 원치 않는 일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 아닐까? 나이 든다는 것은 그 연속을 덤덤하게 받아 들이거나 나아가 그 안에서 즐거움까지 찾아내는 일 아닐까?

내 세탁소가 있는 샤핑센터는 두 해 째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무더위 보다도 더욱 지루하다.

저녁상 물리고 뒤뜰에 나가 앉으니 더위 가신 시원한 바람 한 점이 나를 도닥인다. ‘에고,  이 사람아!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이 더위와 겨우 새들의 놀림에… 쯔쯔쯔…’

복중(伏中) 더운 하루가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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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들이

아버지의 보챔을 이루어 드린 날, 누이들과 매형이 함께 했다.

한 해 반전에 쓰러지신 뒤 나선 아버지의 첫 나들이였다.  그 동안 몇차례 장기요양시설과 병원을 앰뷸런스를 타고 오가시긴 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여유로운(?) 바깥 나들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론 오락가락하시지만 그래도 아흔 여섯 연세에 비하면 정신은 맑으신 편이시다. 다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전혀 안되시는 답답한 형편을 그런대로 잘 견디어 내시는 아버지의 보챔은 달 포 전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잠들어 계시고 당신께서 누우실 곳에 한 번 꼭 가보시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그 보챔을 달램 반, 이루어 드린다는 맘 반으로 쉽게 “알았다”고 대답했던 누나가 무척 애를 많이 썼다.

가능한 차량과 인력을 준비하는 일, 아버지의 건강과 그 날의 날씨 상태에서 부터 형제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까지 그렇게 어찌어찌 짜맞추어 이루어진 아버지의 나들이였다.

비록 초복을 코 앞에 둔 더운 날이었지만 오늘 아침 무렵 어머니가 누어 잠들고 계신 곳은 잔디들이 포근하다고 느낄 만큼 참 좋은 날씨였다.

소원을 이룬 아버지는 좋아라 하시며 우리들에게 “수고했다”를 몇 차례 이으셨다.

아버지는 물론 우리 형제들도 이젠 새롭게 맞이하는 삶의 변화들과 불확실함에 대해 어느 정도는 길들여진 나이들이 되었다.

큰 맘 먹고 나선 아버지의 나들이에 함께 한 누이들과 매형을 통해 세월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뗄 수 없는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되새긴 하루였다.

*** 참 좋아라 하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오간 차량 운전사와 간호 도우미 하신 분들께  특별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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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生業)에

엊그제 손님 한 분이 신문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었다. 그가 읽어 보라고 준 기사의 제목은 “고전하는 세탁소 가격인상 마땅(Struggling Dry Cleaners Are Forced to Lift Prices)”이었다.

기사가 전하는 내용들은 내게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익히 경험으로 아는 사실들이기 때문이었다.  세탁소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물품들 – 일테면 행어, 폴리백 등-의 가격과 개스 전기료 등이 턱없이 뛰어오른 현실은 비단 세탁소에만 국한 된 일은 아니지만 최근 그 인상 폭은 전에 경험에 보지 못한 정도이다.

게다가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자가 급증하고, 캐쥬얼 의상을 주로 입는 사회적 변화는 세탁소가 고전하는 치명적 요인들이 되었다. 더하여 일할 사람들 구하기가 어려워 올라 간 종업원 임금도 세탁소 하기 힘든 한 요인이 되었다.

기사의 내용들이었는데 모두 내가 이미 겪고 있는 일들이다.

또 기사에 따르면 펜데믹 이후 미국내 세탁소들의 약 30%가 이런 저런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내 주변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기사를 마무리하는 미주리주 한 세탁소 여주인의 말이다. “세탁료 인상? 내가 어쩌겠어요. 세상이 그렇게 변하는 걸요.”

힘든 게 어디 세탁소 뿐이겠나? 미주리나 내가 사는 델라웨어나 크게 다를 바 없듯, 세상 어디나 이즈음 거의 한 흐름으로 돌아가는 형편이니 그저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은 거의 엇비슷 할 터.

그나마 내 걱정 해주며 ‘너도 가격 올려서 버텨 보라!’고 신문 한 장 건네 주는 손님 한 분 있어  한 주간 일의 피로를 덜 수 있는 기쁨에.

삶에…… 감사에!

흉내 짓

이런저런 흉내들을 많이 내며 살아왔다. 더러는 꿈으로 비나리로 그리 하기도 하였고, 때론 욕심이 동하여 내 본 흉내들도 많았다. 이제와 따져보니 대개가 흉내 짓으로 그치고 말았을 뿐, 온전히 내 몸짓 맘짓 이었다할 만한 것은 없다. 이젠 솔직한 그런 내 모습에 족할 만도 하건만 내 흉내 짓은 지금도 여전하다.

텃밭을 일구고 푸성귀를 거두어 밥상 한 번 차려 내는 일 따위는 꿈 속에서 조차 그려 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 일들을 이 나이에 흉내를 낸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찾아 온 아이들에게 차려 낸 밥상을 달게 즐기는 모습을 보며 모처럼  흉내 짓이 온전히 내 것인 양 좋아라 했다. 그저 속으로 만이지만.

감자 캐어 돼지갈비와 함께 감자탕도 끓이고, 알감자로 감자조림도 켵들였다. 상추와 오이 따다 묵 한 사발 무쳐 놓고 완두콩 따서 콩밥 한 사발 씩, 그렇게 모처럼 나눈 밥상.

아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도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하루를 보낸다.

때론 흉내 짓만으로도 족한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 한적한 공원 길을 함께 걷고, 동네 사람들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를 함께 즐긴 일은 아이들이 내 흉내 짓에 건넨 연휴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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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부모님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내 기억속엔 없다. 내 고향은 서울 신촌이다. 창천동, 대현동, 대흥동을 전전하는 세방살이, 내 유년을 지낸 곳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던 해에 우리 집과 내 방을 가졌던 노고산동에서 서른 나이에 이르기 까지 살았으니 신촌 골목 골목이 내 고향이다.

여러 해 전에 찾아 간 신촌은 내 기억과는 사뭇 다른 세상이었다. 그 때까지 연세대 앞에서 개업의를 하던 고향 후배가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내 말에 응수한 말이었다. “아이구 형님, 서울에서 여기만큼 안 바뀐 곳도 드물어요, 여긴 옛날 그대로인거예요.” 나는 그에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했었다.

지금의 신촌은 또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만 내 고향 신촌은 일천 구백 육 칠십 년 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무릇 고향이란 그런 곳일게다.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집을 찾아 온 딸아이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자고 하였다. 아들 녀석도 종종 찾는 곳이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아내가 종종 찾는 우리 동네 아이스크림 집이다.

이젠 이 곳을 떠나 돌아 올 생각이 없는  내 아이들에겐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곳이다.

딸과 사위 앞세우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은 날,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고향이 되었다.

***고향 – 고향을 추억하는 한 오늘은 마땅히 살아 즐거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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