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 떠오르는 일터의 아침 하늘을 바라본 아주 짧게 누린 느긋함이 건내 준 하루의 은총(恩寵).

그 은총은 일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떼던 늙은 노동자나, 먼 길 떠날 준비로 든든한 아침 밥상을 즐기던 오리 떼들이나, 늘 같은 아침이건만 하늘 바라보는 여유를 잊고만 사는 내게나 똑같은 크기로 아침마다 다가올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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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聽松)

 <신촌 연세대 뒷산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매미와 잠자리들을 잡으며 놀다가 상감(어린 우리들은 학교 수위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는데 거기에 마마를 붙여 상감마마라 부르기도 했었다. 일제시대에 쓰던 산감(山監)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에게 잡히면 호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1960년 대 초였으니 어느새 육십 여년 전 일이다.>

지난해 이즈음 어느 날 내 일기장에 남겨 둔 글의 일부이다.

대현동 쪽 간호대 기숙사에서 연대 후문에 이르기까지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기병대처럼 자갈밭길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그 후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곳이 청송대(聽松臺)였다. 그곳엔 말 그대로 소나무들이 그득했던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청송대(聽松臺) –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언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훗날 머리 굵어지고 나서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 내가 먼저 알게 된 이름은 청송당(聽松堂) 이었다.

청송당(聽松堂) 바로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집이라는 택호가 붙어있는 집터가 청와대 뒷산  북악산 기슭에 있는 내 모교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가 학교의 상징일 정도로, 학교 본관 앞에는 솔바람 소리 내는 동시에 사람 소리 듣는 모습의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종종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아픔이기도 하고 그 아픔을 몇 배나 덮을 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잊고있었는데 개교 백 주년을 맞는다고 한다. 허긴 내가 졸업한 지가 오십 년 전 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던 연세대 청송대. 내 유소년의 추억과 함께 청년의 꿈이 묻힌 곳이 되었다. 야외수업이 이루어진 곳인 동시에 젊은 축제의 현장이기도 하였고, 그 시절 은밀한 이야기를 숨겨놓은 곳이기도 하였으며 민주 통일 역사 하며 차마 손에 닿지 않는 속앓이를 끓였던 내 젊었던 일천 구백 칠십년대가 내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는 곳. 바로 청송대이다. 그 시절 그 곳에서 들었던 솔바람 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나무조차.

지난 해 이맘 때쯤 뒷 뜰에 세월을 먹고 웃자라 족히 삼사십 피트 크기가 넘는 나무들 열 댓 그루를 잘라내었다. 소나무와 전나무 일곱 그루에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였다. 내가 이 집에서 산지 이십 오 년 동안 그냥 늘 그 모습대로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함께 해 왔으므로.

나무를 잘라내고 난 뒤, 뒤뜰 한 켠이 늘 휑하니 허전한 듯하여 울타리 나무로 향나무들을 심었다.

그러다 생각난 청송이었다.

비롯 늦었지만 이제라도 솔바람 소리, 소나무와 사철 푸른 나무들이 전하는 소리 듣고, 향나무가 전해주는 세상 향 음미하는 시간을 누릴 수 있으려나?

청송 – 아직은 꿈을 꿀 수 있어 좋은…. 푸른 솔바람소리 듣고 향을 느끼는 세상!

  • 청송– 그시절을함께한후아직도한결같은모습으로사는친구들의소식을듣노라면참좋다. 비록내부끄러움은커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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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추석 또는 한가위 – 이제 내겐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추석이예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그저 덤덤하실 뿐이고, 함께 명절 밥상 나누시던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겐 꽃 들고 인사 드리러 가는 날 일 뿐.

다들 살기 바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직은 살기 바쁜 탓에 한가위 명절은 그저 옛 생각 이나 더듬어 보는 시간일 뿐.

초저녁, 뒤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그저 차분히 고요할 뿐.

보름달을 향해 속삭이는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고 작은 기도소리로 들릴 뿐.

* 사위, 며느리 사돈들께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아직은 좋은 명절에.

** 단순함과 감사를 일깨우는 명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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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連休)에

“다음 연휴는 언제 일까?”하며 아내가 달력을 넘겼다. 연휴를 마치고 일을 다시 시작한 어제 가게에서 였다. 연휴를 맞아 즐기는 맛보다는 다시 그 시간들을 기다리며 꿈꾸는 멋진 상상들이 어쩌면 더욱 삶에 기운을 북돋는 흥일 수도 있을 터.

노동절 연휴에 애초 내가 세웠던 계획은 울타리 나무들을 심는 것이었는데 이런 저런 까닭으로 미루게 되었다. 하여 온전한 쉼을 즐기는 쪽을 택해 시간을 보냈다.

엊그제 일요일이었다. 교회에 간 아내가 전화를 했다. “신권사님 내외가 오셨네! 예배 마치고 점심 식사하러 가는데 함께 안하시려나? 오랜만이잖아?”.

‘신권사’ – 그의 이름을 듣자 그가 서부시대 마차에 보따리 짐 바리바리 싣고 황금을 캐러 서부로 향했던 옛사람처럼, 밴트럭에 가득 짐을 싣고 동네를 떠나던 날이 생각났다. 얼추 스무 해 전 일이었다.

신권사 내외는 남도(南道)의 흥으로 사는 이들이었다. 그의 집 문턱은 매우 낮아서 누구나 무시로 드나들 만큼 넉넉하였다. 십 수년 한 동네에서 살며 또래들이 신앙으로도 차마 채울 수 없는 이민 생활의 헛헛함을 채우는 우물 같은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 무렵 그의 집에 자주 모였던 이들 중 이 동네에 남아 있는 이들은… 글쎄… 떠오르질 않는다.

나는 아내의 권유를 물리쳤고, 그 날 저녁 신권사 내외와 이젠 교회와 동네 터주가 된 오랜만에 만난 이장로 내외와 옛 이야기 나누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었다.

이곳을 떠나 캘리포니아에서 십년, 시카고에서의 십년 – 그가 지낸 시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마차를 타고 이 동네에서 달려 온 이장로와 내 이야기를 섞어 나누고 들으며 모처럼 맞은 연휴의 뜻을 새기는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내가 말 많이 한 밤이었다.

제 마음대로 할 일 다 해도 하늘의 뜻에 거스를 일 없는 나이라 하여 공자왈 일흔 나이를 종심(從心)이라 하였다던가?

살며, 쌓인 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또한 감사함 하나 꼽을 수 없는 삶은 없을 터.

하여 그저 감사함으로. 스무 해 만에 만나 얼싸 안으며 반가운 사람 하나 있어 감사! 하늘의 뜻 거스를 일 없는 나이에 품은 흥 넘치는 남도(南道) 사내 내외의 꿈을 위하여 빌 수 있는 믿음 하나 있어 감사!

연휴의 마지막 날, 아내와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꽃길 걸으면서 미처 생각치 못했던 소원 하나 비는 밤.

‘이젠 달력이 전해 주는 연휴를 벗어나 연휴를 만들어 가며 사는 여유를 허락해 주시길…. ‘

그 또한 감사하는 맘 위에 살포시 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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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欲望)에

먼 길 운전은 점점 여러 번 깊게 생각 하고서야 나서게 된다만, 단지 밥 한 끼 먹자고 왕복 다섯 시간 운전을 마다치 않음은 다 내가 좋으면 따질 일 없다는 욕심 때문이다. 아니, 욕심 보다는 욕망이 맞겠다.

아들 며느리가 서로 좋아라 하는 모습이나 딸 사위가 행복해 하는 순간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가히 크기에, 그 기쁨의 시간들을 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연휴 첫날, 딸과 사위와 한 끼 맛나게 먹고 함께 걸으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쁨으로 내 욕망이 맘껏 채워진 하루였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내 뜰 위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일상의 기쁨까지 누린….하루 해에 감사!.

아직은 채울 수 있는 욕망의 크기에 대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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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낮엔 여전히 찌는 여름이다만 아침 저녁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 온 가을맞이를 재촉한다.

아침에 새들이 새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 나절 새들이 새들에게 응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이 바뀌는 하루해를 보낸다.

새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종종 나도 그 이야기에 끼어들 때가 있다.

그땐 비록 내 맘 속 소리지만 내가 내는 소리조차 좋다. 맑은 새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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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텃밭에서 놀며 즐기는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자면 단연 씨 뿌린 후 올라오는 새싹들을 바라 볼 때이다.

엊그제 처서處暑)도 지나갔다지만 내 일터는 여전히 찌는 더위였다. 하루의 피로를 안고 돌아와 며칠 전 뿌렸던 가을 채소 씨앗들이 파란 새싹들로 변신해 올라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인다.

이 나이에 철딱서니 없게 과한 말일지라도, ‘이 경이로움이라니, 아름다움이라니!’

살아오며 내가 누렸거나 내 곁을 스쳐간 경이로움과 아름다움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내 삶 속 느즈막한 순간일지라도 텃밭의 즐거움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 그 감사를 느끼는 내 대견함을 허락하심에 또 감사!

마치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가 된 듯이 읊조려보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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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일

아이들 개학이 가까워 지면서 부모들의 걱정이 커진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이런저런 물가들이 모두 뛰어 오른 탓에 아이들 개학 준비를 하는데 드는 경비 또한 덩달아 올라 학부모들의 부담이 커졌고, 어떤 소비를 우선시해야 하는지 학부모들의 선택이 어려워진다는 이즈음 상황을 전하는 뉴스였다. 이 뉴스는 덧붙여 전하길, 이런 상황은 개학 대목을 기다리는 이런저런 도소매 업체들에게도 그 여파가 이어질 것이란다.

내 가게 영업도 아이들 개학에 아주 민감한 영향을 받는 터인지라 눈 여겨 보게 된 기사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디어진 탓인지, 아님 게을러진 탓인지, 그도 아니고 이젠  나이 들어 매사 너그러워진 탓인지, 눈 여겨는 보았으되 그저 덤덤하게 뉴스를 넘겼다.

저녁상 물리고 바깥 바람 쐴 요량으로 뒷뜰로 나가다 딱 마주친 사슴 가족. 나보다 늦은 저녁상 즐기시려 나섰던 사슴 가족 일행은 나를 보자 순간 그 자리에서 동상들이 되었다. 나 또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렇게 사슴가족들과 나는 한동안 마주 보고 서 있있다.

가만히 서서 사진을 찍는 나를 보며 한켠으로 안도가 되었는지, 엄마인지 아빠인지 모를 책임감이 충만한 녀석이 나를 주시하는 사이 나머지 가족들은 저녁상을 즐겼다.

사실 사슴 녀석들 탓에 쓸데없는 노동을 더하곤 한다. 어제만 하여도 손바닥만한 텃밭에 가을 채소 종자들을 뿌리곤 사슴 방지용 울타리 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따져보면  그 또한 내 욕심일 뿐.

어차피 밥상이란 나누는 일일 터이니.

허나 매사 대하는 태도에 덤덤함이 더해지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나이 들어 가며 모를 일이 하나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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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세사모

토요일 오전, 필라 외곽의 작은 도시 Ambler의 거리 풍경은 마치 먼 나라에 여행을 온 듯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른바 Multiplex라고 하는 대형 극장에 이미 익숙해진 내게 Ambler 영화관은 젊어 한 때 즐겨 찾곤 했던 연극 소극장을 추억하게 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해 준 벗들에 대한 고마움이 참 컸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그대가 조국>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냥 가슴이 아렸다. 영어로 번역한 제목 <The Red Herring>이 원제보다 더 가까이 마음에 다가 온 영화였다. 돌아가신 노무현대통령 팔이를 하는 이들은 차고 넘쳐도 그 이를 닮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 않듯, 변혁의 깃발을 들어 흔드는 시늉만으로 뭇매와 화살비를 맞고 쓰러진 참 잘난 사내에 대한 저주와 비아냥은 아직도 이어지지만 그가 품었던 꿈과 이상을 말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자리를 준비했던 이들이 마련해 준 팝콘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일행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들렸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는데(글쎄… 이즈음 내가 종종 범하는 우(愚) 가운데 하나. 상대방의 나이 가늠을 잘 못한다는 점. 나는 늘 젊었다는 착각의 잣대질 때문.)… 아무튼 그이들의 이야기.

‘이건(이 영화 상영은) 누가 주최해서 이루어 진 일인가?’, ‘지금 한국정부 싫어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거 아닐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때, 뒷줄 좀 떨어져 앉아있던 젊은 여성 한 분(이 또한 내가 자주 범하는 우(愚)일 수도 있다. 여성들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므로.)이 어르신 일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글쎄…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필라세사모라고…. 세월호 참사…. 그거 아시지요…. 그 사건을 잊지말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래요…. 거기서 주관했다고 해요.’

이어진 어르신들의 질문, ‘거기 대표나 회장은 누구요?’ 젊은 여성분의 대답. ‘글쎄요? 잘은 모르겠고요. 아마 저기 저 앞자리에 계신 파란 점퍼입고 계신 분일거요…’

그러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필라세사모> – 내가 아는 한, 대표니 회장이니 하는 직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라고 하는 개념 조차 없는 그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나와 이웃들이 안전하게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뜻이 맞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8년 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이 모임의 동기가 되었다.

여남은 여명이 그 동안 꾸준히 이 모임을 함께 해 오고 있고, 나처럼 간혹 머리 숫자 채우고 박수치는 이들까지 합치면 사오십 여명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필라세사모 – 숱한 거짓 정보들과 자기 집단 이익에 사로잡혀 이웃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현실을 함께 직시하고 그저 각자의 삶 속에서 작게 나마 사람 답게 살아보고자 애쓰는 이들 정도로 나는 이 모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화 <그대가 조국The Red Herring>을 선택한 것은 참 걸맞았다.

조국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때를 기다리며…. 그날이 오면, 오늘도 꾹꾹 참아 삼키고 있을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삭힌 한(恨)들이 풀리지 않을까..

**** 영화를 보며 며칠 전 북의 김여정이 했다는 말. “남조선 당국의 대북정책을 평하기에 앞서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라는 말이 큰 공감이 되어 떠올랐는데…. 이름만 바꾸어 불러도 좋을 분(糞)들이 영화 속에 참 많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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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또는…

내일 가보려 하는 다큐 영화 <그대가 조국>을 보기 전에, 읽어 본지 겨우 몇 달 지나지 않았건만 다 잊어 버린 책을 꺼내 대충 훑어 다시 읽었다. ‘아픔과 진실 말하지 못한 생각’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조국의 시간>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해진 그물을 묵묵히 꿰매며 출항(出港)을 준비하는 어부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자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한 말을 되뇌이며. “사람은 패배를 위해 만들어 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

책의 저자 조국은 바로 그 전 페이지에서 또 다른 책의 주인공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 끝부분에 나오는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쓴 편지의 마지막 문구. “견디며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저자 조국은 이 책의 마지막 각주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달아 놓고 있다.

<* 이 유명한 소설에서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여러 사람에 의해 나폴레옹을 지지하며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고 14년 동안 감옥에 갇힌다. 모함자 중에는 제라드 드 빌포르 검사대리가 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반역 세력의 우두머리임을 숨기기 위해 에드몽의 편지를 불태워 버리고 에드몽을 재판도 없이 투옥해 버린 후 무기 징역수로 만들었으며, 이후 승승 장구해 검찰종장이 된다. 이후 빌포르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내용을 조국답게 참 점잖은 표현으로 각주를 달아 놓았다.

사실 소설 속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개명한 이후 무자비한 복수극을 펼친다. 특히 빌포르 가문에 대한 복수는 당테스 스스로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의 복수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처절했다.

비록 소설 속 이야기지만 ‘패배를 넘어서는 희망’보다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행위에 대한 심판으로써 의 복수’가 내게 더욱 와 닿는 이즈음에….

아직도 난 어리거나 최소한 늙지는 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