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3

이야기 여섯 – “목사동무란 우리 당서기 동무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DSCN4931

요즘은 호주에도 탈북 동포들을 위시하여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꾀 많이 있는 편이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질 않았다. 그런데 마침 북한의 국가 대표 운동선수를 지낸 분이 어찌어찌 해서 호주에 와 우리 교회 근처에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그이는 스스로 자유를 찿아 망명을 해 오긴 했지만 자본주의, 자유의 땅에서 홀로서기가 그리 쉽게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국가란 뭘 하는 뎁니까? 집도 자기가 구해야 하고 직장도 스스로 찿아야 하니 참 답답 합니다” 그는 호주에서 사는 것에 불만이 싸이기 시작했다.

배급도 없고 배치나 조직도 없이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한 훈련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자유를 주어도 그것을 누릴 수가 없다.

그는 교회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교회란 북녘에서는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한 곳 이라고 했다. 그래도 교인들이 여러모로 친절하게 대해 주니 사람들을 따라서 몇 달 동안 꾸준히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는 이렇게 말 했다. “목사님, 그 동안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젠 알겠습니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기 동무 하고 똑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군요”

호주에서의 이민목회는 일일이 찿아가지 않고서도 한 자리에서 거의 모든 세계인들을 다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호주는 그야말로 인종과 국경, 언어와 문화, 사상과 종교의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가지 않고서도 많은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눌 수 있다. 지난날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기독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용이하게 접근하여 가장 평이하게 복음과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교회사적 역사와 경험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목적에 다른 방법론을 적용해 보도록 그들을 설득 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우리 교회는 지니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가 동무 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이 한마디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호주 이민교회는 미국 이민교회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이는 흔히 말하는 북한선교나 북한의 복음화 차원이 아니라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이념과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적 사상을 결합 하거나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지향(Aufheben)을 주도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게는 주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주는 미국식 자본주의 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동시에 호주는 사회주의적 경제구조를 퍽 많이 채용하고 있다. 호주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는 직접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장차 통일된 조국의 정치와 경제체제에 있어서 제 3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결국 개개인의 구원 뿐 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다.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 한인들을 디아스포라로 부르시고 또 목사들을 당서기 동무 비슷하게 만드셨을까, 생각 해 보면 멀고 깊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획이 보이는 듯 하다.

이야기 일곱 – “당신은 독재자야!”  “당신은 바람 난 목사야 !”

벌써 15년도 더 된 이야기 이지만 당시 나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회오리 바람에 휩싸였다. 나는 이미 그 교회에서 18년이나 목회하던 중 이었다. 지난 날 한국에서 정치적 장기집권과 유신체제를 비난하고 싸우다가 감옥에 갔던 내가 그 대통령과 비슷한 기간을 한 교회에서 보냈다. 초창기 교민사회는 교회를 돌보는 일 이외에도 할 일이 참 많았고 또 교민들의 수는 날로 증가 하던 때 였으니까 나열식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도 그 대통령 처럼 여러가지 퍽 많은 일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행사나 프로그램은 하나도 중요한 일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권위주의적 교단이나 신비적이고 은사중심적 교회 출신이 아니라 비교적 개방적인 신학과 민주적 교회 행정 체제 속에서 훈련 받아온 사람으로써 이미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었다.

갈등과 고민 중에 있던 나에게 드디어 한 사람이 전면에 나타났다. 그는 제직회원이 아니면서도 수시로 제직회에 참석하여 소란을 피웠다. 긴 과정을 다 쓸 수는 없으나 나는 여러가지 신앙적이면서 또 합법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교회에서 출교 조처 했다. 그러자 그이는 더 거칠게 나왔다. “홍목사, 당신은 독재자야! 이제 우리교회를 떠나!” 그는 나를 불러내어 싸우자고 했다. 경찰에 고발도 하고 교단의 주 총회에 진정도 했다.

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교민 신문에서는 나에게 여자문제가 있다고 소설 같은 기사를 만들어 길게 글을 썻다.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때때로 소문은 진실 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나와 교회가 소속된 호주연합교회의 시드니 노회가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했다. 나를 포함하여 신문에 보도된 사람들을 불러 두 달이나 조사를 한 후 “홍목사에게는 아무런 성적인 비행이 없었다”고 확인하고 공문을 보내어서 그 사실을 교회에 공고 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나와 우리 가정은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계속하여 그 교회에서 목회 할 힘을 잃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나를 이해하고 지지 한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사람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교인을 이길 수 있는 목사는 하나도 없다. 나는 노회에 사임서를 보내고 환송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한 교회에서의 18년 목회를 마무리 했다.독재자가 따로 이겠나? 18년이나 한 교회에 있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독재인 것을!

그 일을 경험 하면서 나는 두가지 교훈을 받았다.

하나는 교만하면 망한다는 성서적 진리를 확인한 것이다. 나 자신이 평생을 가르치고 배워 온 진리를 그제서야 몸으로 깨달았다. 사실 나는 겉으로는 늘 웃으며 상냥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시드니에는 교회도 많고 목사도 참 많이 있지만 속으로는 우리 교회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그리 된 것 이라는 마음이 자라를 잡고 있었다. 시드니에는 이미 수 백 명의 목사들이 있지만 나 만큼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배경을 지니고 또 좋은 대학과 신학교에서 정상적으로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은근히 속으로는 허세를 떨었다. 늘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고 그럴싸하게 말은 하면서도 진짜 속으로는 참 교만했다.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나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는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보다 못한 목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하여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 만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인생과 신앙의 가장 기본적 진리를 목사 된지 25년이 넘어서야 다시 배웠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바보 중에 진짜 바보다. 교인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목회에 있어서 교인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갈등이 있다. 목회란 하나님을 믿음과 동시에 끊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는 훈련인데 교인을 믿어서는 안된다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의 갈등이고 목회의 예술이다. 믿어서는 안되는 인간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고 또 상처와 생채기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래도 믿어 볼려고 하는 기나긴 여정이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이다.

“믿을까? 말까?” 나는 지금도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오늘도 그 인간을 믿음으로, 이미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은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질 않는다. 행복 속에도 불행이 있고 불행 속에도 행복이 있다. 믿음과 불신 역시도 꼭 두 가지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신뢰 속에도 회의가 있고 의심 가운데도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와 선교, 인생과 역사는 이런 갈등 속에서 이어지는 모순이요, 갈등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2

호주 시드니우리교회에서 32년 6개월 동안의 이민 목회를 마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님의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가운데 제 3장에 있는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두번 째 글입니다.

1342430034_c839c0406e

 이야기 셋 – “선생님, 한대 피우시지요”

아주머니는 벌써 몇 달 째 교회에 나오는데 아저씨는 아직 교회에 출석 하지 않는 가정을 방문 하게 되었다. 집에 가 보니 마침 그 자리에는 주인 아저씨를 비롯하여 두어 분의 친구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다음 자리를 잡고 앉자 그 댁 주인 아저씨가 선듯 앞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그 중 한 개비를 빼내어 내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 했다. “선생님, 한 대 피우시지요” 나는 순간적으로 잠시 당황 했고 “저는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약간 썰렁해 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보통 한국 목사들은 천주교회의 신부들이나 서구 목사들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생각 해 보니 나 역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시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 에서는 우선 담배부터 권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요, 또 인간 관계에서 친밀도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를 모르고 목사들은 교인들을 모른다. 교회는 세상을 모르고 세상은 교회를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피차 간에 오해를 줄이고 가까워지는 방법은 서로서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 하려고 하는 마음 가짐이라고 본다. 목회나 선교란 세상과 교회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교회나 목사는 이 세상을 다 알고 이 세상은 늘 교화 되어야 만 할 대상이라고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목회나 선교는 끊임없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 지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는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같이 한 교회당을 사용하는 호주 목사님에게 실수했던 경험이 있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입구에 서서 성도들과 악수를 할 때 마다 우선 담뱃불 부터 붙여 입에 물고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어느 주일 예배 후 나는 차를 마시면서 그 목사님께 한국교회에서는 보통 목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 이는 아주 정색을 하면서 담배는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기호라고 하며 몹씨 언짢아 했다.

세상이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든 세상이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삶의 모습 때문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풍성해 진다. 모든 목회나 선교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도 하는 상부상조요, 상호교류 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넷 – “목사님이 요즈엔 날 사랑하지 안챦아요 !”

교우 가운데 늦게 아들을 낳은 댁에서 토요일 오후에 돌잔치를 할려고 했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목사에게 구역식구들 모두를 초청하고 싶은데 좀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담당 구역장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꼭 구역식구들 모두에게 연락을 해서 많이 오셔서 축하해 드리도록 부탁을 드렸다. 그 여자 집사 구역장은 그리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주일예배 후 다시 확인도 했다.

그 주말 오후 우리부부와 다른 부교역자 부부가 함께 시간을 맞추어 그 댁에 도착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장로님 부부 두 가정과 그 여자 구역장 만 와 있었다. 구역식구들은 한 분도 오질 않았다. 한 2-30분이나 기다렸다. 당황도 되었고 좀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예배를 드린 후 구역장 되는 그 여자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님, 왜 구역식구들이 한 분도 못 오셨나요? 혹시 연락을 못하셨나요?”

그러자 그이는 갑자기 눈가를 적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이민자들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거의가 다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인생길을 걸어 간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부, 유무식을 막론하고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관심, 배려, 이해, 동정, 나눔, 대화, 베품과 같은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 되는 사랑이 바로 목회요, 선교다. 목회와 선교는 사랑 이상도, 사랑 이하도 아니다. 특히 나라 떠나 이역에 와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더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이다. 목회와 선교는 영원한 사랑의 연습이다. 사랑으로 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로 안되는 일이다.

목회와 선교를 포함한 일체의 인간역사는 사랑으로 하면 반듯이 이루어 지게 되어있다. 만약 우리에게 아직도 그 무엇인가 이루어 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충분히 사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죽고 싶도록 억울한 일도 넘어서고, 일체의 분노와 슬픔과 쓰라림도 지나서 그냥 말 없이 희생하고 죽는 일 이기 때문이다. 죽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 안되는 일이다. 그러데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는가!

모든 살아 있는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선교사와 목사가 된 사람들이다.

“목사님이 요즘은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자주 생각나는 말이다.

이야기 다섯 – “목사님, 명예박사 학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호주에서의 이민목회가 한 15년쯤 되었고 내 나이 막 50 이 넘었을 무렵 한국에서 한 후배 목사가 찿아왔다.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가 번역한 책도 한 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에서 나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줄려고 한다면서 그 학교에 장학금 조로 약간의 도네이션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듯 기분 좋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다. 그는 나를 추켜세우면서 목사님은 넉넉히 명예박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도 남는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 신학교에 대해서도 믿음을 줄려고 여러가지 좋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생각 해보고 기도 해 본 다음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가 돌아 간 다음 나는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평소 나를 많이 후원해 주는 내 멘토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 잘 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그 목사나 그 신학대학은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학위를 남발하는 엉터리라고 하면서 그런 학교에서의 학위는 훗날 오히려 나에게 큰 불명예가 될 것 이라고 했다.

목회나 선교나 그 무엇이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

물질과 명예를 탐하고 잘난 척 하다가 결국은 잘못 되어지는 경우가 어디 정치계 뿐이겠는가? 목사 안수식은 죽을 때 까지 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평생 노예 서약식”과 마찬가지 이다. 목사직이 무슨 대단히 높은 자리인줄 알고 가문의 영광 운운 하는 이들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서글프게도 가짜 박사 중에는 신학박사가 제일 많다고 한다. 목사들 만큼 명예를 탐하고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 있겠나 싶을 정도이다. 예수는 목사도 아니었고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고 학위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의 교회와 목사들은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오래 전에 평양에 가서 조선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봉수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곳에서 만난 이들은 말 할 때 마다 나를 “홍박사님, 홍 박사님!” 하고 불렀다.  참 민망 했다. 그래서 내가 “아, 저는 박사가 못 된 목사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 때 지금은 돌아가신 강영섭 목사님이 말했다. “남조선 목사님중에도 박사 아닌 목사가 다 있습니까? 참 이상한 목사님 이군요”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이럴 땐 나도 박사학위를 딸걸 하는 생각이 한 순간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질 않는다. 돈과 여자 그리고 명예와 권력은 한국이나 호주, 목회자나 선교사,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자리도 구별 하질 않고 찿아 오는 유혹자요 함정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1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나 이름만으로도 푸근해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런 이들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다보면 “아하, 내가 잊고 지낸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시절들이 있었지…”하는 생각에 오늘 바로 이 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지요.

호주에서 은퇴 소식을 전해 오신 홍길복목사님께서는 저희 부부가 결코 잊지 못하는 참 좋은 신앙의 길잡이자 선생이요, 형님이요 오빠요, 삶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저희 부부가 열심히 연애에 빠져 있었을 때, 저희 부부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계셨던 분이랍니다.

그런데 참 33년을 뵙지 못했답니다. 참 송구한 일이지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또 다시 쓰기로 하고요. 오늘은 홍목사님께서 은퇴 소식을 전하시면서 주신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My Ministerial Stories of Korean Diaspora Church in Australia)>를 몇 번이나 읽다가 단 한 분이라도 함께 나누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소개 드리려합니다.

꽤 긴 글 가운데 홍목사님의 호주 목회 이야기 부분을 발췌하여 앞으로 서너차례 연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  홍길복 (시드니 우리교회  은퇴목사)

priest_hong

1980년 6월, 나와 우리가족이 호주에 도착 했을 당시 우리가 가지고 온 짐 속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 와서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호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은 그져 모든 면에서 미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120년 전 죠셉 헨리 데이비스가 미지의 땅, 조선에 왔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미지의 땅 호주에 왔다. 정말 우리는 선교사처럼 이 곳에 도착했다. 생각도 준비도 마음의 태세도 여느 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이 우리는 이 땅으로 던져졌다.

우리 가족은 호주에 오자마자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약 4천 킬로미터도 더 되는 퍼스(Perth)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한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편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그 곳에는 주로 광산 지역을 중심 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약 3-40세대쯤 살고 있었다. 그 교회가 지금의 “서부호주한인교회” 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참 좋은 학습 기간을 보냈고 또 적지 않은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그 해 말 우리는 다시 시드니로 왔다. 평신도들 몇몇이 이전에 자신들이 다니던 “시드니 한인 연합 교회”를 떠나 새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찿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호주로 초청한 죤 브라운 목사께서 우리를 그 교회에 소개 하였다. 그 교회가 지금은 32년의 역사를 지닌 “시드니 제일 교회”이다. 나는 이 교회에서 1998년 12월 까지 만 18년을 목회했다.

1973년 월남 전쟁이 끝나기 이전 까지는 시드니에 사는 우리 교민이 모두 3-40 세대 정도라고 알려졌고 1974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시작 되었는데, 내가 시드니제일교회에 부임 할 당시 벌써 시드니에는 약 2천 여명의 한인들과  5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99년 1월부터 나는 시드니 제일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시드니 우리교회”로 부터 부름을 받고 지금 까지 만 14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겨 왔으며 오는 12월 은퇴를 앞에 두고 있다. 정말 커다란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그 동안 우리 한인 사회는 약 7만 명 정도의 영주하는 교민들과 4-5만 명을 넘나드는 각종 단기 체류자들을 포함하여 10-12만 정도의 커다란 공동체로 변화 되었다. 한인교회도 250개 를 넘어 300개에 이르게 되었고 각종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기독교 언론과 유관 단체들이 수 없이 많이 생기고 또 살아지기도 한다.

지난 날 들을 돌이켜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출신의 목사로써는 처음 시드니에 와서 지난 30 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목회 해 온 나로써는 결코 적지 않은 종류의 다양한 인생살이와 목회 현장들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 날의 그런 경험들이 만들어 준 더 깊은 생각과 사고, 교훈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지금은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 이라고 생각 하며 오직 감사 할 뿐이다.

그 동안 호주 이민목회를 통하여 애기세례를 포함하여 세례와 입교 예식을 베푼 사람은 모두 819명이다. 156번의 결혼예식, 52번의 장례식, 1300여 번의 주일 낯 예배 설교, 8천 번을 넘어서는 심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1650여 회에 이르는 상담과 1200번이나 되는 각종 회의 참석과 인도가 나의 목회일지에 남겨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통계 자료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지난날에 경험 했던 목회 이야기들을 써 봄으로 좀 더 다듬어진 선교행위로써의 이민목회의 의미를 생각 해 보려고 한다.

 

이야기 하나 – “목사님,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할머니 신도 한 분에게 오늘 낯에 심방을 가겠노라고 전화를 드렸다. “ 목사님, 미안 하지만 심방 오시는 길에 한국 식품점에 좀 들려서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예, 그렇게 하지요. 콩나물 말고 또 다른 필요한 것은 더 없으세요?” 요즘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도 버스나 기차를 타시고 이곳 저곳 잘 다니시지만 초창기 한인 사회는 그렇질 못했다.

한인 공동체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민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기능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 봉사적인 일들을 감당 해야 만 했다. 처음 오신 이민자나 방문자들을 맞아주고 바래다 드리기 위하여 수시로 공항에 드나드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민성을 찿아가 비자문제를 안내해 주고 아이들 학교에 입학시키느라 선생님을 찿아 가는 것도 목사의 일 이었다.

운전 면허증 시험을 치루도록 공부를 시키고 시험장으로 데려가고 통역을 해주는 일은 요즘 같아서는 운전학원이 하는 일이지만 30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목회활동 이었다. 집을 얻는 일이나 차를 사는 일을 포함하여 할머니 혼자 사시는 분들을 위하여 쌀과 라면, 콩나물과 두부를 사다 드리는 심부름은 매우 중요하고 즐거운 사역 중 하나 였다.

1981년 5월 어버이날,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교민 사회 전체를 수소문하고 연락해서 38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시내 쎈테니얼 팤으로 모시고 가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교회에 다니시든 성당에 다니시든 절에 다니시든 아무 상관없이 그 때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민자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선교 라고 믿었다.

SAMSUNG DIGITAL CAMERA

이야기 둘 – “아저씨 되게 말 잘 하네요”

처음 퍼스에 가서 막 교회를 개척 할 때 였다. 하루는 주일 예배 후 모두들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데 한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쩜 그렇게도 말을 잘 하세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던 이들은 모두들 그 아가씨를 쳐다 보았다. 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나이 어린 사람 이라 하더라도 목사를 아저씨 라 하고 설교를 말 잘한다고 하는 것이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가씨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데를 와 보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참석 한 젊은이 였다.

그것도 나라 떠나 이역만리 호주에 유학 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찿아 온 것이 교회였다. 보통 교회 다니는 이들은 세상에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도 모르는 사람이 다 있을까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질 않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부지기수 이다.

인간이란 주로 끼리끼리 모여서 살아서 그렇지 기독교인들이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울타리 밖을 내다 본다면, 바다에는 물 반, 고기 반 이라고 하듯이,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들 중에는 죽을 때 까지 교회라고는 한번도 안가 보고,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목사는 그냥 아저씨가 되고 목사 부인은 사모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 되는 것이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의 모습을 비슷하게 나마 재현 해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래 예수께서는 평범하게 하셨던 말씀을 교회는 꼭 설교라고 하는 종교적 언어로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선교행위로 써의 이민목회가 주는 반성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신촌연가 8

탈신촌기(脫新村記)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입니다.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 주었던 술집들 이름이지요.

꽉 찬 10년, 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었지요.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적 없는 학교생활이었지요.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 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제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답니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습니다.

학교도 짤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습니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입니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제게 신촌은 이미 제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7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 각서라는 것을 쓰고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지요.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이 눔아! 책 같은 걸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13년 후>

11박 12일.

13년만의 귀향이었다. 아기자기한 반도의 산하(山河)모습을 한 창 밖 구름들을 보며 서울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크고 깨끗한 영종도 새 공항과 빠르고 친절한 입국절차에서 엄청나게 변한 도시를 예감할 수 있었다.

새벽, 시원히 뚫린 공항로를 달리며 바라 본 낯 익은 산들과 거기 휘며 춤추듯 자라는 나무들이 열 세해의 공백을 메워버렸다. 김포쯤해서 눈에 들어 온 거대한 아파트군(群)들은 한강 호위병처럼 서서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강 건너 난지도에 솟아 오른 두 개의 산봉우리는 흐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잘 꾸며진 강변 고수부지 공원들과 제법 푸른 도시 녹지공간들은 남산을 가로 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 뿐이랴! 짐을 풀기 바쁘게 나선 서울거리는 정말 깨끗하였다.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거리는 매우 낯 선 것이었다.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잘 연결된 깨끗하고 시원한 지하철은 그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거리를 뒤덮은 자동차의 행렬은 이미 나를 주눅들게 하였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제법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튿날, 내 고향 신촌을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급작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하철 신촌역에서 내리자 이십대 아니 십대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그들을 뚫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채 1Km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 내 유년과 소년, 청년을 보냈던 그 거리 어디에서도 낯 익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스무명 남짓한 옛 벗들의 만남의 장소로 갈비집을 택한 까닭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을 떠나 사는 친구들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란 스무 해 넘게 한 곳에서 장사하는 그 갈비집밖에 없었으므로.

완전히 변모한 거리 모습에 비해 벗들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더러는 흰머리를 이고 더러는 대머리를 겸연쩍어 하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세월의 두께로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서울생활에 나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오랜만인지라 서로의 근황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 도시의 복잡함을 쉽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이 어린시절 드나들던 목로주점이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있다는 것을 떠 올렸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야고 되묻곤 일어나 우르르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없어진 신촌시장 한 귀퉁이 바로 그 자리에 옛날 모습을 안팎으로 고스란이 간직한 채 막걸리와 소주그리고 동태찌게 안주를 파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이 곳을 역사 보호구역으로 정하자”는 흰소리를 해가며 마시고 마시고 그렇게 취했다.

그 밤 그 곳에서 함께 취했던 벗들은 모두 서울을 버티는 중년들이었다. 정치인, 회사중역, 대학교수, 행정가, 변호사,목사, 성공한 자영업자 – 서울을 버텨 내야만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 밤 나는 그들이 지쳐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얼굴 어디에고 서울의 버팀목으로서의 자부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 채울 수 없는 허탈, 마지못해 버티는 무력감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밤 서울은 내게 내 벗들의 지친 얼굴처럼 다가왔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그 거리를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고향이므로. 내 조국이므로. 내 어머니의 땅이므로.

문질러도 문질러도 희어 질 수 없는 피부색처럼 끈질긴 인연의 땅이므로.

(2001. 7. 17)

그리고 다시 십년 후인 2011년의 추억들은 이어집니다.

DSC00262

 2011년 딸과 함께 옛 추억속으로

신촌연가 7

<그리운 얼굴들>

도상_1~1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금도 변화의 연속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만 그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정책과 입시제도일 것입니다.

나이가 한 삼년 차이만 나면 아마 다른 교육정책과 입시제도 아래서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을 할 때부터 달라진 것은 이른바 동일계 진학이라고 해서 인문학교의 경우 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그대로 그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A중학교를 나왔으면 한 울타리에 있는 A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만 있는 경우였지요. 한 울타리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각 인문학교의 학급 수를 조금 늘린 것이지요. 그렇게 늘린 숫자만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짱구가 그런 입시제도를 생각해 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평등, 형평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어쨋거나 제가 다니던 중학교 한 울타리에 같은 모표를 쓰는 고등학교는 경기상업고등학교였답니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거의 많은 아이들이 별 선택없이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선택했지요.

물론 제 짝궁 상태처럼 비좁은 경쟁을 뚫고 당시 일류학교라는 인문계 K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도 있으니까 다 제 탓이겠지만, 공정한 게임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지요.

한국의 돌아가신 두 분 대통령님께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셨지요. 두 분 다 정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시지만 두 분들께 따라다니는 수식어 “똑똑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말에는 불만이 좀 있답니다.

똑똑한 아이들도, 가난한 아이들도, 잘 사는 아이들도, 덜 똑똑한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 실업계 학교이고, 실업계학교가 대우받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와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실업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올 초에 받은 “도상(道商) 45회” 수첩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다들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제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십니다.

“고난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늘 영어로만 하셨지요. Suffering Jesus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 박대위교수님입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 넣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입니다.

제가 공부를 지지리 못했습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수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지요.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고요.

영어선생님이시던 김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지요.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제 길을 선택해 주셨지요.

그 김선생님 훗날 제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답니다. 그래 제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지요.

아! 제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교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아내는 중학교 또뽑기 학번이라 세검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지요.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만이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신촌 곳곳에 내 걸리기 시작했답니다.

 

신촌연가 6

<말표 운동화>

신작로(新作路), 문(門)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입니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문(四大門)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다마치기라고했지요),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1.21사태라는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군요. 자하문 앞이지요.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땡볕에서 몇 시간이나 전교생들이 서 있었지요. 몇몇 아이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그즈음에 제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 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답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제게서 멀어졌습니다. 제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견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제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독립문 부근이었지이요.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저는 방과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탓었지요.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입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지요.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하였답니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제 즐거움이었지요.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몰랐는데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운동화.

그즈음 제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저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답니다.

그런데 주일 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요.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지요.

저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 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지요.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저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답니다.

horse brand

“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요.

그래 어쨋냐구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답니다.

대학교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 신고 학교를 갔고요.

 

신촌연가 5

<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images (2)

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신촌연가 4

<할아버지의 추억>

신촌에서 보낸 제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시랍니다.

43954564xr1

아버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습니다.

1901년생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습니다.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 할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 저희와 며칠 또는 두어 달 함께 계시다가 어디론가 떠나곤 하셨습니다. 그러다 찬바람 일면 다시 한 식구가 되곤 하셨습니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곤 했었답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저와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습니다.

“어째 니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제 아버님과 저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아버님과 저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습니다. 힘이 엄청 좋으셨답니다. 젊어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답니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답니다. 씨름판 황소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랍니다.

아버님이 채  열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제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답니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답니다.

훗날 저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 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제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저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자루 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 오시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던가 , 아마 제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답니다.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나선 것이었지요.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지요.

할아버지는 제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 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제 방에 누어 계셨답니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주셨던 분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제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답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답니다.

“아부지,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고 하셨지요.

그 때 제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제 아버님은 거의 음치에 가까운 분이십니다. 그래도 쉬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지요. 우리 아버님께서.

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images (1)

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2

sc-2

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