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분만 시간을…

오늘 엉뚱한 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였답니다. 그걸 허비라고 할런지 좋은 경험이라고 할런지는 아직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예상치 않은 일로 하루 해가 저물었답니다.

 

사건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소처럼 이메일함을 체크하면서 일어난 듯합니다. 평소와 달리 아침 출근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건성으로 메일함을 쭉 훑다가 낯익은 이름과 주소에서 보낸 메일이라 무심코  열었는데 아마 그게 화근이었던 거 같습니다.

 

상대방 메일 주소를 이용한 스팸메일이었습니다.  평소같았으면 열어보지 않고 그냥 스팸처리를 했을 것인데… 아뿔사….

 

일을 나가서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고는 컴앞에 앉았더니만 글쎄 제 메일 계정 중 스팸 메일을 열었던 계정에서 누군가가 마구 스팸메일을 뿌린 것이었습니다. 단지 서너시간 사이에 거의 천 여통의 스팸 메일이 제 이름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부랴부랴 그 회사에 신고를 하고 패스워드를 비롯한 정보를 바꾸었답니다. 해놓고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어 제가 쓰는 모든 온라인상 계정의 정보들을 다 바꾸었답니다. 엉뚱하게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고나니 머리속이 멍하였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 National Clothesline 2월호  편집자의 글을 읽게 되었답니다. 마침 제목이 “Got a minute?”이었답니다.

 

1분이 그렇게 아깝고 많은 일을 아니 결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단지 급한 마음으로 1초를 잘못써서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서 소비한 시간들이 생각난 것이지요.

 

아무튼 편집인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1분만 시간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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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기대할 뿐 아니라, 좀 더 빠르게 아니면 즉석에서 그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우리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보통 컴퓨터는 초당 100 million(1억), 다르게 말하면 분당 6 billion(60억)의 명령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매 1분 동안에,  570개 이상의 웹싸이트가 새로 만들어지고, 약 47,000회의 애플 ‘app’의 다운로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트위터 사용자들은 100,000개 이상의 트윗을 보내고 있다. 또한 매 1분 동안에, 구글에 2백만 이상의 서치 요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684,000개 이상의 콘텐트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메일 이용자들은 204 million 이상의 메세지를 전송하고, 소비자들은 온라인 쇼핑으로 $272,000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단지 1분 동안에.

 

인터넷에서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60초 라는 시간은 다른 유형의 세계에서도 차이를 나을 수 있다. 매 1분 동안, 미국인들은 총 21,000개의 피자를 먹고 있어서, 곳곳의 피자집 주인들을 수입을 올려 기쁘게 만든다. 물론, 당신도 피자로 끼니를 때울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당신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60초 동안의 복근 운동 ‘abs’를 다운받을 수 있다. 정말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통증 해소, 빨리 마르는 네일 폴리시, 스프레이 선탠, 밥과 달걀 식사 등을 치과의사가 통상 식사후 양치질 하라는 시간 2분의 절반의 시간으로 할 수 있다.

 

또한 취직 면접에서 첫 60초 동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 직장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들 한다. 세탁소 손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손님이 옷을 찾아갈 때, 품질에 좋은 인상을 받고 만족하여 충성고객으로 될 지를 결정짓는 것은 종종 바로 대충 살피는 그 첫 번째 눈길이다. >

 

젊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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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talit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마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낯선 말일겝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런 말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널리 퍼진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타임즈의Catherine Mayer기자가 만들어 낸 말인데죽을 때까지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현상을일컫는 뜻이랍니다.

 

세상이 이미 나이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의학과 과학기술에 힘입어 장수시대가 열렸고, 나이의 경계없이 하려고만 하면 나이를 이겨내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자 trendwatching의 커버스토리에도 다룬 “Virgin Consumers”  곧 새 것을 바라고 소비하는 소비문화에도 나이는 이미 경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아그라’로 대변되는 노인 성해방의 역사도 이런 흐름을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잊고 살게 된 세대들이 출현하므로 인해 전통적인 결혼, 가족, 사랑, 종교, 소비 등등의 개념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Catherine Mayer는 <어모털리티는 우리의 삶을 저 깊숙한 곳까지 바꿔놓고 있다. 일, 여가, 가족, 사랑, 젊은 나이와 늙은 나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amortality현상에 동조하는 옥스포드 대학교 ‘인류 미래 연구소 (Future of Humanity Institute)’ 은 “중요한 것은 태어난지 몇년이 흘렀느냐가 아니라, 생의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다.( The important thing is not how many years have passed since you were born, but where you are in your life, how you think about yourself and what you are able and willing to do.)라고 말합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자! 이제 나이 6,70에 노인티 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amortality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설명하며 세상이 엄청 바뀐듯한 글들과 주장을 들으며 든 제 머리속 생각이랍니다.

 

쯔쯔쯔, 서양인들의 사고의한계라니… 이미 이천 수백년 전에 장자(莊子) 선생이 이리 말씀하신 것을 알기나 하고들 하는 말들인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씀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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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망년망의진어무경(忘年忘義振於無竟)”  나이와 옳고 (그름)을 잊고 무한한 경지로 뻗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면 그리된다는말입니다. 무위의 경지란 바로 제 맘에서 시작되는 것이고요.

 

나이란 바로 제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면 뭐 한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나이를 넘어 젊게 삽시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마지막 글

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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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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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4

<떠남, 버림 그리고 만남>

호주에서 33년간 이민목회를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의 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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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리들이 주는 의미

 

이제는 위에서 나누어 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들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의 경험담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해야 할 차례다. 두가지 교훈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다 기독론과 관계된다. 기독교란 결국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백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The Incarnation )의 연속적 재현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도성인신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더불어,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독론을 끊임 없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 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 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분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며 사셨고, 사심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 5-8, 유진 피터슨의 신약 번역 “메시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행위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이는 겸손하게 행동 하신것이 아니라 겸손한 인간이 되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두잉(doing)이 아니라 비잉(being)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진짜로 사람이 되셨지, 사람이 되신 것처럼 가면을 쓰고 찿아 오신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는 예수를 다시 설명하고 기독론을 재해석한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민자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민을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굽에 가서 피난 살이를 했다. 그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그는 이천 년전에 이미 보트 피플(boat people)로 국경을 넘어간 불법 입국자였다. 그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그는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땅에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주변인간, 변두리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버려진 땅에서 잊혀진 사람과 함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고난의 시대를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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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민사건은 하나님의 <떠남>과 <버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떠남>과 <버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모두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을 떠나고 시날 평지를 떠나고 갈데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랄과 불레셋을 떠나고 다시 하란과 가나안을 떠나고 마침내는 애굽을 떠난 사람들의 떠나고, 버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으며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이며 심볼이다.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부모와 이웃,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배와 그물,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의 흩어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넓히는 촉매와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직 떠날 준비 조차도 되어 있질 않다. 그러니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도 없이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운 일이며, 버리지도 않고 얻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히도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일단 지리적으로나마 떠난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숙제로 주어진 요구 사항은 이 지리적 떠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이별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떠남>과 <버림> 다음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은 흙과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만나 주셨고 그 인간들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 (요한복음서 1:14절, 개역 개정판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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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는 조국과 함께 그 땅에서 맺어졌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체의 전통과 습관, 문화와 역사를<떠남> <버림>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 꽃피어 진다. 하지만 몸은 떠났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 어느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 꿈적도 하지 않는 이민자들과 이민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아직도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혹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나를 불러주지나 않을까 하면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선교행위는 아직도 1세기의 가현설(Docetism)을 넘어서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한지, 아니면 그냥 가난한 척 하고 있는지, 교회가 진짜로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섬기고 사랑하는 척 하는지, 목사들이 참으로 겸손한지, 아니면 그냥 내숭을 떠는지, 훤히 우리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

 

몸에 밴 권위주의적 생각과 습관에 매여 목사랍시고 손가락으로 지시만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높은 연봉과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에만 관심을 갖고, 삼박자 축복을 포함한 기복주의 신앙에 젖에 아무나 보고 축복한다며 자신을 무슨 축복의 통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선교의 현장에 적합한 사람이 못된다. 이민목회는 나라 떠나 찢기고 상처 투성이인 이민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생각과 삶을 같이 하고 동고동락하는 동화작업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목자이고 신도나 교민들은 양 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개혁 신학이 아니라 카톨릭적 발상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아니라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양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이고 오직 예수만이 목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어느 동네 양반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을 듣고 혼자 혀를 끌끌 차다가, 문득 예전에 긁적여 놓은 글이 생각나 찾아보니 삼년 전 딱 오늘인 2010년 2월 4일에 낙서처럼 남긴 것이더군요. 그런데 그게 오늘도 딱 유효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안 바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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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의 넓이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스물 네해 째 살고 있는 곳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 보았던 것입니다.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라는 곳입니다.

County 면적이 1,278 km²랍니다.

 

이게 어느 정도될까?

그래 서울시와 한번 비교해 보는 것이지요.

서울시 면적이 605.41㎢이라고 하니 약 두 배 정도입니다.

인구는 약 60만명정도이고요. 한적한 시골입지요.

한인인수는 고무줄 통계이지만 약 4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요.

 

교회 수는 캐톨릭교회 한 곳을 포함하여 8곳이지요.

8곳의 등록교인 수 얼추 천 오백여명.

 

재미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싸우고 있다는 것…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신앙의 이름으로…

 

이 너른 이민의 땅에서…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오늘도…

봄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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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을 건강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묘약은 무엇일까? 나의 만병통치약은 아침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는 것. 아, 아침 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이 새벽에 아침 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침 공기를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하리라. 아침으로 가는 예매표를 잃어버린 이 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하여>

 

<어떤 대변혁이 아무리 세상을 들쑤셔놓을지라도, 황혼 무렵의 서쪽 하늘과 같이 그렇게 순수하고 고요한 것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리라>

 

<아침과 봄에 얼마나 공명하는가에 따라 그대의 건강을 가늠해 보라. 자연의 깨어남을 보고도 그대 속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을 해도 잠이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가장 먼저 귓가를 두드리는 새의 노랫소리에도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깨달으라. 그대 인생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비록 맥박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천국은 우리 머리 위뿐만 아니라 우리 발 아래에도 있는 것을…>

 

<그대의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맞부딪혀 살아나가라. 회피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대가 나쁜 사람이 아니듯 삶도 그렇게 나쁘진 않다. 그대가 가장 풍요로울 때에는 삶은 가장 초라하게만 보인다. 불평쟁이는 낙원에서도 불평만 늘어놓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가 비록 형편없이 가난한 집에 있다고 하여도 즐겁고 가슴 떨리게 멋진 시간들을 보낼 수 있으리라. 황혼의 빛은 부자집 창문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집 창문도 밝게 비춘다. 또한 초봄에는 가난한 자들의 집앞에 쌓인 눈도 녹는다. 그대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거기서도 궁전에서처럼 즐겁고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메사츄세스 콩코드강변의 철인(哲人)이자 미국의 정신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살아생전 딱 두 권의 책을 내었지만 읽어주는 이들이 없었다. 첫 번째 책은 겨우 200여권이 팔렸을 뿐이고 두 번째 책인 <월든>이 그나마 이천부정도가 팔렸지만 그러기에는 5년이 걸렸다.

 

삶은 가난하였으나 그는 삶을 사랑하였다.

 

사람들이 성공적이라고 칭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삶은 단지 한 종류이다. 우리는 왜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고 한 가지만을 과대평가해야 하는가?” 살아있을 때 그가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죽은 뒤 그에게 돌아갔다. <소로우의 삶은 도덕적 영웅주의의 표본이자 정신적 차원의 삶을 끈질기게 추구한 표본으로서 미국인의 삶에 깊고 넓게 영향을 끼쳤다>는 평()으로.

 

일에 쫓기고 빌(bill)에 쫓기며 살아가는 이민(移民)들에게도 봄 햇살은 다습게 다가온다. 비록 쫓기며 살아가는 삶이 힘에 겨워도, 가난한 삶이 못내 버겁더라도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한 삶은 살만한 것이다.

 

탓과 덕분

tree탓과 덕분이라는 말이 제대로만 쓰이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아마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네 탓>과 <내 덕분>뿐이 아니라 <내 탓>과 <네 덕분>이 먼저인 세상 말입니다.

그게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탓과 덕분이라는 말이 제대로만 쓰이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Alice May Douglas의 시 한편을 되뇌이며…

 

 

Who Loves the Trees Best? 

  – Alice May Douglas

 

 Who loves the trees best? “I,” said the Spring.

 “Their leaves so beautiful to them I bring.”

 Who loves the trees best? “I,” Summer said.

 “I give them blossoms, white, yellow, red.”

 Who loves the trees best? “I,” said the Fall.

 “I give luscious fruits, bright tints to all.”

 Who loves the trees best? “I love them best,”

 Harsh Winter answered, “I give them rest.”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봄이 말했다.

 예쁜 옷을 입혀 주는 것은 바로 나니까.”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여름이 말했다.

 “나무에게 희고. 빨갛고 노란 꽃들을 주는 것은 바로 나니까”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나!” 가을이 말했다.

 “맛있는 과일과 화사한 단풍은 내가 주는 걸…. .”

 나무를 제일 사랑한 사람은? “내 사랑이 제일 클 걸…”

 추운 겨울이 대답했다, “난 나무들에게 쉼을 주지.”

 

이 아름다운 날들

“강둑 위를 눈부시게 비추는 햇볕의 따뜻함을 느낄 때, 노란 모래 밑에 숨어 있는 검붉은 흙을 바라보고, 마른 잎의 살랑거리는 소리와 강가에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영원성은 나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봄이면 봄마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런 경험을 했던가! 나는 점점 자신이 생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영속성과 회복성이 바로 나 자신에게서 느껴지기 때문에.”<쏘로우가 1856년 3월 23일에 쓴 글>

쏘로우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이 벌써 사십여년 전 일이다. 우스운 기억이지만 그의 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은 당시 한국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판금도서였다. 알음알음으로 그 복사판을 구해 만났던 쏘로우에 대한 나의 기억은 사회운동가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순(耳順)에 이르는 나이에 다시 만난 그는 명상가이자 시인 나아가 노장(老莊)에 가까운 자연주의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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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 매사추세스주 콩코드에서 태어난 쏘로우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졸업 후 고향 콩코드로 돌아와 교사로 취직하지만 며칠 후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거부하고 사직한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연필공장에서 잠시 일하던 그는 28살 되던 1845년 초봄 월든 호숫가로 들어간다.

그 곳에 한 칸짜리 통나무 집을 짓고, 단 하나의 침대와 세 개의 의자를 놓고 홀로 문명을 등진 숲속에서 외롭게 살다, 마흔 다섯의 이른 나이에 간 기인(奇人)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간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의자에 앉아 깊이 사색하면서 매일 글을 썼다. 비록 그의 생전에 그가 쓴 글들이 주목받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 그의 책 <월든>은 19세기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 E. B. White는 “만약 우리 대학들이 현명하다면 졸업장 대신 <월든>을 한 권 씩 주어 내보낼 일이다”라고 극찬하였다.

1846년 멕시코전쟁이 일어나자 그 전쟁과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납부를 거부하던 쏘로우는 감옥에 수감된다. 이 때 쓴 연설문이 바로 ‘시민불복종’이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나는 쏘로우에게서 한 분의 스승을 발견했으며 ‘시민불복종’에서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땃다.”고 한 글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 신이였던 예수말고 누가 감히 이런 말을 할까? 말의 아름다움이여! 자연과 함께했던 그 아름다운 날들의 쏘로우가 오늘 여기에 살아있음 아닌가!

이른 봄날 늦저녁, 노을에 반달 걸리고 이름모를 새들 지저귀는 이 아름다운 날들의 소중함이여.

비록 미룬 일 태산이고 내일이면 또 다시 아둥바둥 땀 흘릴 이민일지라도…

신이 내게 허락한 세상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아름다운 날들이여!

밥과 기쁨 – 1(하나님 나라)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7

<밥과 기쁨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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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일이 있다.

도대체 그가 살아생전 무엇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고 무슨 말을 하였나 하는 것이다.

역사속 예수를 연구하던 또는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거룩하신 정통 보수 신앙인들 모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물론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반쯤 죽은 상태에 있다가 그의 측근들에 의해서 어찌어찌 구사일생하여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멀리 일테면 스페인 어디론가 가서 숨어 살다 죽었다던가 하는 소설책들도 있다만 그런 것은 다 허구의 문학작품들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은 사실인 동시에 진실임이 명백하다.

그가 왜 그렇게 죽었을까?

그가 한 말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답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은 예수가 한 첫 번째 설교인 동시에 그의 공생애 동안 한 모든 이야기의 요약이라고 해도 아무 탈없다.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하는 까닭은 기독교의 좌, 우파 신학자 또는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a,b,c로 곧 a “때가 찼다”, b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c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렇게 나누어서 a,b는 진짜 예수가 한 말 c는 후대에 첨가한 말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로 있지만 뭐 거기까지야 고민할 필요 있겠나?

여하튼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줄기차게 이야기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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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갓 이민 와서 몇 해 동안은 주로 아이가 태어난 집들을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세월이 흘러 이즈음엔 자녀 결혼식 초대나 어르신들 부고(訃告) 청첩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지난해와 올 들어 유난히 장례식에 참석하는 회수가 많았다. 최근에 참석하였던 세 곳의 장례식의 설교자들은 서로 다른 이들이었지만 내용은 엇비슷하였는데 나는 그 때마다 “참 아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오늘 아무개집사(성도,권사,장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시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이 죽음 앞에 서서 우리가 결단을 해야합니다. 열심히 교회 섬기다 하늘나라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지옥불에 던지워질 것입니까?”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김없이 이런 협박성 경고는 빠지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였다. 설혹 ‘교회’ 대신에 ‘예수’로 말을 바꾼다 하여도 여전히 “아니다”이다. 마치 설교자들이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서 “너는 들어 가고, 당신은 안돼!”하는 어투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 예수로 돌아가자. 예수가 한 말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에서 “다가왔다” 또는 “가까왔다”라는 말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 나라가 이미 온 것이냐(현재형) 아니면 곧 올 것(미래형)으로 해석해야 하느냐하는 문제이다. 이 논쟁은 꽤 오래된 것이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른바 종말론이 이 논쟁에 끼여들게 된다. 또 이야기가 어렵게 나가는 것 같다. 내가 어렵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바 이것은 읽는 이들을 향해 하는 말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하는 말이다. 쉬운 말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살며 그를 쫓아 다녔던 사람들이나, 예수가 죽은 후(혹 느낌이 안 좋으신 분들에게는 부활승천후) 그를 믿고 고백했던 첫 무리들(교회)은 그들 당대 곧 그들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그렇게 믿다가 죽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을 하나 생각 해 보자. 서기 2000년을 앞두고 있던 1990년대 우리 이민사회도 함께 시끄러웠던 무슨 선교회인가 하는 집단들이 “휴거”운운 하며 떠들었던 일 말이다. 종말이 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런 비슷한 사건들은 지난 이천년 동안 쉬지않고 계속되어 온 일이다. 서기 1000년을 앞두고서 일어났던 세계 종말에 대한 믿음은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놓기까지 하였다. 옛날 이야기만이 아니다. 바로 몇 달 전인 2012년 말에는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까지 얹혀 전 세계가 들썩한 일도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을 연결 짓는 일을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하나는 개인의 종말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이다.

개인의 종말이야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아니겠나? 그 어떤 변설과 유려한 말로 치장 하더라도 죽으면 이 세상은 없다. 세상이 끝난 것이다. 죽은 이에게 지금 여기서 돌아가는 세상은 끝난 것이다.

역사의 종말 곧 세계의 종말에 이르면 참 복잡해진다. 개인의 죽음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 일어날 일들과 세상은 반드시 끝장은 나는데 그 뒷일들을 고민, 고민하다가 만들어 낸 말이 이른바 “피안(彼岸)”, “하늘나라”, “천당”, “천국”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 앞에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 곧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역은 그렇게 가장 중요한 말과 내용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잃게 한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바로 올바른 성서적 이해라고 믿고 있다.

성서를 통해 보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 해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일테면 복음서들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그 곳이 어떤 곳이냐 하는 명확한 언급은 거의 없다는 점, 심지어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너희가 이 비유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비유들을 알아듣겠느냐?”고 예수가 말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에게 철저히 가리워져 있다는 믿음을 심은 것들이 그러한 예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아주 논리 정연하게 이론화 시킨 사람이 불트만이다.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 보자.

“하나님 나라는 인간 역사 안에서 실현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 돌, 건설, 그리고 완성은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그 나라의 ‘가까이 옴’, ‘도래’, ‘출현’만이 언급될 뿐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비세상적인 어떤 것이다.”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다 보니 우리가 잃어 버린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이다.

*** 오늘의 사족 : 예수를 죽음으로 몰았던 그의 말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고 꿈꾸거나 가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

인류사에 지속된 고민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한정된 삶 가운데 자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난 곳이기도 하다.

역사속 예수를 찾아서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6

<역사속 예수를 찾아서>

지난 이야기에서 성서의 정전(canon)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나를 간략히 말하였다.

문예부흥 이후 인쇄술의 발달과 번역 작업에 힘입어 성서는 급속도로 세상에 퍼졌다.

이후 성서는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팔린 부수에 비해 가장 안 읽히는 책들 중 하나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엄청난 판매량에 비해 성서에 대한 이해나 인식수준은 놀랄만치 낮다. 특별히 한인교회들은 매우 심한 편이다. 평신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설교자들도 신학교에서 당연히 배웠을 성서의 비평학적 이해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이해의 능력조차 없는 이들이 많다.

(이쯤 읽다가 “짜식 니가 뭔데? 니가 뭘 아는데? 아님 너 anti냐? 그러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고 계속해야겠다. 나는 ‘쟁이 곧 예수쟁이이지 anti가 아니라는 것, 아는 거 별 거 없다는 거, 나는 그저 나라는 거…. 다만 그저 내 생각을 말씀드리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결코 당신의 동조를 얻고 싶다거나, 그렇게 내 생각에 동의해 달라고 구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성서란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지도 않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이 많은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내촌(內村)선생의 “성서우상화”에 대한 통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성서가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19세기 들어 일단의 학자들과 문학가들이 역사속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실제 이 땅을 살다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물음으로 역사적 예수를 찾는 작업들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 지루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학문이란게 사실 좀 따분한 것인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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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우스라는 신학자가 <예수의 생애>를 발표한 것이 1835년이었다. 스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성서속 예수 이야기에는 신화 곧 전설이 많이 끼어 들었다고 말하고, 이런 역사적이지 않은 사실이 끼어든 것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화적 상상력이 발동한 탓이라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책 하나를 쓴 까닭으로 평생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격리되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신의 아들 또는 신이었던 예수보다는 권위있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들이 몰두하였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연구에 첫 번째 철퇴를 든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처이다.

의사이자 위대한 신학자였던 슈바이처가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펴 낸 것은 1906년의 일이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사람이었던 예수는 역사속에 살다 간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 곧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그려서 만든 그들이 좋아하는 예수의 모습일 뿐”(솔직히 슈바이처가 한 본래의 말은 좀 졸립다. 하여 쉽게 풀어 써 본 것이다)이라고 통박하였다.

여기에 “역사속의 예수 연구”에 대해 결정적 쐐기를 박은 사람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불트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을 쉽게 풀어 쓰면 “예수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성서는 오직 예수가 구세주라는 선포에 충실할 뿐이다. 곧 말하는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매우 강력하였다. 적어도 한 세기동안 그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덮쳤고 한 동안 역사적 예수를 말하는 이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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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무슨 고수가 있겠는가? 고수가 되었다는 순간 벌써 저 아래 후배가 치고 올라와 한 방에 고수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학문아닌가? 딱이 뭐 학문뿐이겠나? 그게 세상 이치이지. 그 대단한 불트만에게 잽을 날리며 “역사적 예수 이야기 없이 어떻게 신의 아들 예수 이야기가 나오랴?”하며 역사속 예수 이야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불트만의 제자들인 케제만, 보른캄등이었다. 그 케제만 아래서 대단한 한인 신학자 한 명이 나오니 그가 안병무이다. 안병무 목사 – 이른바 민중신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며 세계 신학계에 한국말 “민중”을 알린 사람이다.

역사속의 예수를 찾아 나선다고 하면서 왜 이리 지루한 이야기를 하는고 하면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고 근 일 백년 이상 썩 대단한 사람들이 찾아 나섰던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쯤 하면 또 거룩하신 성도나 정통보수의 깃발을 높이 드시는 높은 분들은 “성서가 있거늘…”하고 말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성서는 신앙적 고백의 집산이다.

일테면 “처녀가 애를 낳다”는 사실 하나를 보자. 믿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면 호박씨 까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지만 믿는 눈으로 보면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은 진실일 수 있다. 나는 사실이라 하지 않고 진실이라고 말하였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닷물을 소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인증해 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다”하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다 그런 것이다. 믿음은 그냥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서야 할 것이 있다. 그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역사속 예수를 찾아 나서는 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믿음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하는 판단을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 저마다 제 믿음이 한 수 하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믿음이 진짜 참 순수 원조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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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럴 때 즐겨 이야기하는 예화가 하나 있다.

이건 중세시대 진짜 있었던 이야기이다. 신심(信心)깊은 수도승 한 분이 계셨다. 평생 수도원에서 절제의 삶을 살며 이 수도승이 연구에 몰두한 일이 있다. 그게 뭐냐고?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을까?”라는 연구였다. 이 연구로 평생을 산 수도승의 이야기. 지금 우리들의 눈높이로 보면 “이런 미친 놈이 있나?”이겠지만 그는 처절하였을 것이며 진지하였고 그것의 자기의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웃을 일 하나 아니다. 21세기 이 문명의 땅에서 나는 믿음이라는 허울로 중세의 수도승마냥 정말 미친 짓하는 수 많은 이웃들을 보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신학이란 인간학이란 말이 있다. 다음 글에는 예수의 행태(사실 이런 말은 썩 좋지 않다만, 예수가 살았던 방법 쯤이 좋겠는데, 나도 가끔은 유식한 척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가 바로 인간학에 초점을 둔 것이라는 말하고자 한다마는 옳은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제 “삶의 자리”(이게 또 내 말이 아니고, 신학자들 중 이른바 양식사학자들이 쓴 말이다)에서 제 값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찾아내는 일은 바로 그 옳은 믿음으로 가는 길을 밝히는 일이다.

오늘의 사족: 진실과 사실, 그 차이와 차이의 폭을 아는 일, 그게 바로 믿음이다. 이거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믿으면 다 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그저 웃는다.

다만 차이와 폭 사이에 제사밥이 없다면, 그 제사밥에 눈독 들이는 세력이나 개인이 없다면 나도 동의하겠다. 믿으면 다 된다는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