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늘로 열흘째 어머님께서 지내시는 곳은 노인병동입니다. 2 1실인데 그 사이 어머님 옆 침대는 세 분이 들어왔다가 나가셨습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가신 백인 할머님은 연세가89이셨는데 참 곱게 늙으셨답니다. 다만 치매기가 좀 있으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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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오후에 병실에 들렸을 때 할머님이 저를 보자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지요. “Hey baby! I’ll go home tomorrow!” 정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얼굴이셨답니다.

잠시 후, “내가 집으로 가기 전에 이거 다 부셔버리고 갈거다갑자기 화난 얼굴로 할머님께서 소리치셨답니다.(소리라고 해보았자 모기소리지만….) 환자들이 모두 노인들이다보니 행여 의자나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질까보아 환자가 움직여 침대나 의자바닥과 몸이 밀착되지 않으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방석을 가르키며 하신 말씀이었지요.

집에 돌아가셔보았자 특별히 하실 일도 없을 것이고, 간호할 누군가가 옆에 붙어있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이시고, 차라리 병원에계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상태이셨지만 집으로 가시는 것이 그리 소원이셨던 모양입니다.

오늘, 어머님의 옆침대에는 말씀조차 못하는 거구의 백인 할머님이 새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지요.“얘야, 집에 가고 싶다.”

바로 일상이지요. 일상에 대한 감사오늘 어머님이 제게 주신 가르침이랍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벌써 사년 전 일입니다만 당시 USA TODAY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이 날로 힘들어 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For immigrants, living the dream is getting tougher)

많은 이민자들이 스물비지네스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최근 불어닥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하며, 이들의 삶이 이민초기의 무일푼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스몰비지네스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 약 150만명의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비이민자에 비해 이민자들의 스몰비지네스 창업율이30%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bout 1.5 million immigrants own U.S. businesses, according to a study for 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by Rob Fairlie, an economics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Cruz. He found that immigrants are 30% more likely to start a business than non-immigrants.).

미국내 스몰비지네스의 12.5%가 이민자들 소유이며 멕시칸 이민자의 스몰비지네스 소유가 2.22%로 가장 많고 다음이 한인으로 전체의 0.78%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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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남미,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이민을 와서 옷가게, 식당, 세탁소, 그로서리등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이 땅에 쏟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은) 실로 슬픔입니다.” (I put my blood, sweat and tears in this place. It’s a sad story.)

한인 이민자들인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신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의 착각과 편견을 벗어 내 버리면 말입니다.

다른 통계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안계 대다수가 평균적인 중산층 수입 이하의 소득수준을 보이고, 1가구당 수입이 다른 인종(백인, 흑인, 히스패닉)에 비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5가구중 1가구가 빈곤선 이하) 게다가 아시안계 가정의 54%가 영어 미숙자로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80-20 initiative)

저는 착각과 편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아시안계에 속하기를 거부합니다. 특히나 남미나 흑인계 이민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꺼립니다. “한국인”을 이야기 하고 높은 학력과 아시아의 유태인으로 견주기를 즐겨합니다. 이 땅의 타 민족 이민자들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자부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이젠 솔직해 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에 통계나 USA TODAY의 기사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부”는 지녀야 할 덕목이지만 그 보다 먼저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USA TODAY 기사는 1970년대 중반에 그리스에서 이민을 와서 세탁소(Four Seasons Cleaners)를 경영하고 있는Panayiota Koskiniotis 씨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저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비록 경기침체의 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스몰 비지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힘들만큼 현실의 여건은 어렵더라도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 등등 현실을 헤쳐 나갈 도구들도 충분치 않지만 여전히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이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비록 어려운 경제환경과 우리들이 지닌 핸디캡들(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에도 불구하고 세탁소를 비롯한 스몰 비지네스로 성공 이민의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내 비지네스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삶의 정치 – 그리고 인생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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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와 좌파의 논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까닭은 그들이 삷의 정치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Anthony Giddens이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갈파한 말이다.

그는 급진과 보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모델이 필요하고 이는 이미 이행되어 가고 있다고 주창한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모든 부문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좌파와 우파는 대립과 투쟁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솔직히 좌로 조금 기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적인 틀(일테면 미국과 세계, 한반도의 남북 또는 남쪽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좌로 좀 더 기울 것이다. 수년동안 내가 고뇌하고 있는 이민신학(移民神學)은 기실 정치, 해방, 민중신학과 십 수년래 미국에서 풍미한 예수세미나 회원들의 고뇌의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른바 거룩한 보수정통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해란 예수쟁이와는 거리가 꽤 먼 것으로 비췰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케리그마, 말씀의 선포 곧 설교자들의 설교도 토론이 병행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 바 이런 생각들은 좌의 끝자리쯤일 것이다. 

이런 내가 아주 꼴통보수우익으로 수성(守城)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찬송가 부르기다. 내 주는 방패되시니’, ‘죄짐맡은 우리구주’, ‘뜻없이 무릎꿇는’같은 고전적인 찬송에는 함께 하다가도 이즈음 유행하는 복음성가에는 도대체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다. 특히 이즈음엔 생업(生業)으로 하는 복음성가 가수들도 있어서 어쩌다 그 이들의 노래를 들을라 치면 왠지 노래하는 기교와 가락이 배어 있는 듯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민기보다도 덜 종교적이란 생각이 들곤하는 것이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어쩌다 참석한 집회에 찬양과 경배 그런 순서가 있어서 박수치고 율동하고 그러면 참으로 나는 좌불안석이 되곤 한다. 게다가 찬양 인도자가 ‘박수치세요’, ‘율동하세요’, ‘!자 함께 은혜 받아요’ 하기라도 하면 왜 집을 떠났던고, 성경 한 줄 읽고 고민할 걸 가히 후회막급이라! 이 아니 꼴통보수 아니랴! 그러나 교회사에는 피아노도 경망스럽다하여 금기했던 세월도 있었으니 원조보수는 아닌 셈이다. 

그런 나도 이따금 흥얼거리는 복음성가가 하나 있다. 이것 역시 고전이다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열고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하는 노래이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지 좌편 끝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우편 끝 모서리에서 뒤뚱거릴 때도 있으며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서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세상 내 손 안에 쥘 때도 있고 시궁창에 빠져 숨조차 내쉬기 힘든 때도 있기 마련이지 어찌 바른 길로만 올곧게 걸을 수 있겠는가? 돌아볼수록 부끄러운 걸음이지, 오직 떳떳함 뿐이로다할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하늘문 열고 말한다지 않는가? 예수가 여기 인도했노라고 그게 믿음이지, 당당한 믿음이지. 

여기까지 온 것도 예수 인도하신 까닭이요, 피안(彼岸) 저 편에 다달아 예수가 인도하였다는 고백을 하려면 지금 오늘을 예수 안에서 살아야 되는데 거기 무슨 우파와 좌파가 있으랴! 뛰어 넘어야지. 어찌 삶의 정치뿐이겠나? 하여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를 노래하는 한 진정 좌파와 우파의 자리는 없다. 

그래, 봄으로 찾아오는 이 사순절 그렇게 살자. 내 인생 여정 끝내어…

밥과 기쁨 -2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

첫 생각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예수는 분명하나님의 나라를 첫 설교에서 선포하였고 그의 생애를 통해 즐겨 이야기하였는데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이 없어진다면 이건 좀 우스운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체의 설명없이 예수는 막바로 그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천년 전 유대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자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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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대 중반의 서울, 사람들이 연일 모여 데모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붙들고 “여러분, 마침내 이 땅에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민주화가 무엇이오?”하고 묻겠는가 아니면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겠는가? 

또 다른 이야기 하나. 2015년 어느 날, 남북 문제가 아주 잘 풀려서 남북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치자. “칠 천만 한민족 동포 여러분! 마침내 통일이 다가왔습니다” 그랬다고 상상이나 한 번 해 보자는 말이다. 그 때 “통일이 무엇이오?”라고 묻겠는가 아니면 “어, 어”하며 설레임과 말 못할 두려움 그런 것들에 휘감기겠는가?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리네 역사 경험에서 갖게 된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어떤 표상이나 현실에 대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솔직이 내가 이 글편들을 쓴 것은 몇 년 전 일이다. 한국은 민주화된 나라라는 것이 이 글을 쓸 당시 나의 인식이었다. 헌데 2013년 현재의 한국은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선포가 여전히 유효한 땅이다. 어쩜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똑 같은 거 아닐까?)  

나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이해가 이와 거의 엇비슷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함께 느끼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원과 그 나라가 온다는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에워싸기 시작했고 예수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 비유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 예수는 기도의 원형을 가르쳐 주었다. 

모이면 외우는 주기도문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임하다” 곧 “come”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하겠다.

하나님 나라는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 한복판 곧 우리들의 삶의 현장 바로 오늘 여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 어디를 훑어 보아도 한국적 생각과 관습에 젖어 쓰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표현은 없다. 더더군다나 “천당에 간다”는 표현도 없다. 다만 주로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들이 있지만 이 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당에 간다”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마태의 유대교적 전통과 그들의 역사적 관습에 따른 표현 “성전에 들어간다”고 하는 매우 현실적 상황을 나타내는 어법이라는 말인데(이 부분은 슈바이쳐의 해석이다) 또 조금 어렵게 나갔다만 성서의 본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뜻의 그런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복판 바로 여기 지금 오늘 가까이 왔다. 그렇게 온다. 그게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늘의 사족> : 천국,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바로 우리들의 구멍가게 바로 그 곳으로 온다. 코너 스토아, 네일가게, 가발 가게, 잡화, 세탁소, 야채가게 등등 바로 오늘 하루를 지지고 볶는 그 곳에…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

 

스스로 벗는 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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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힐링전성시대라지요. “힐링상품들이 넘쳐나기도 한다지요. 늘 그렇듯 넘쳐나는 곳엔 가짜도 덩달아 판을 치는 법이고요.

 

“나 XX때문에 상처 받았어!”라는 말들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으니 “힐링”이 필요하겠지요.

 

살다보면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아플 때도 있고, 상처가 나서 피를볼 때도 있고, 뼈가 부러지거나 탈골이 생기는 경우도 있거니와 이러저런 각종 크고 작은 몸의 이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저절로 낫는 경우가 태반이지요.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는 대부분 스스로 낫게 되거나 아주 작은 약물치료나 운동을 통해 평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이지요.

 

마음의 상처, 삶의 상처와 아픔도 마찬가지일 겝니다. 스스로 저절로 치유되거나 치유 할 수 있는 것들이 태반인 것이지요. 누군가가 꼭 도와주거나 치료해 주어야만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힐링”이라는 말과 유행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다보니 마치 “스스로”라는 기능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답니다.

 

육체가 건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치유되거나 치유하는 기능이 잘 이루어지듯이, 영혼과 정신이 건강한 사람일수록 스스로  자신의 심성을 다스릴 수 있을겝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피해 갈 생명체는  없습니다.

 

힐링이라는 말로 티낼 필요도 없거니와 힐링이라는 말에 의지할 까닭도 없습니다.

특히나 이즈음 호들갑스러운 종교에 이르면 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의 소리와 움직임을 잘 보고 들을 수 있다면 힐링의 세상은 늘 열려있는 것일 겝니다.

제 스스로의 소리도 듣지 못하는 주제에 남을 힐링한다고 깝칠 일는 더더우기 아닙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뱀발(蛇足) :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기능과 힘을 절대자가 은혜로 주었다고 고백하고 감사한다면 그게 바로 종교 아닐까요? 강요하거나 중간개입자를 상정하는 일 말고 말입니다.

 

일분만 시간을…

오늘 엉뚱한 일로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였답니다. 그걸 허비라고 할런지 좋은 경험이라고 할런지는 아직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아무튼 예상치 않은 일로 하루 해가 저물었답니다.

 

사건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 평소처럼 이메일함을 체크하면서 일어난 듯합니다. 평소와 달리 아침 출근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건성으로 메일함을 쭉 훑다가 낯익은 이름과 주소에서 보낸 메일이라 무심코  열었는데 아마 그게 화근이었던 거 같습니다.

 

상대방 메일 주소를 이용한 스팸메일이었습니다.  평소같았으면 열어보지 않고 그냥 스팸처리를 했을 것인데… 아뿔사….

 

일을 나가서 이런 저런 일들을 처리하고는 컴앞에 앉았더니만 글쎄 제 메일 계정 중 스팸 메일을 열었던 계정에서 누군가가 마구 스팸메일을 뿌린 것이었습니다. 단지 서너시간 사이에 거의 천 여통의 스팸 메일이 제 이름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부랴부랴 그 회사에 신고를 하고 패스워드를 비롯한 정보를 바꾸었답니다. 해놓고보니 찜찜한 구석이 있어 제가 쓰는 모든 온라인상 계정의 정보들을 다 바꾸었답니다. 엉뚱하게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보내고나니 머리속이 멍하였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 National Clothesline 2월호  편집자의 글을 읽게 되었답니다. 마침 제목이 “Got a minute?”이었답니다.

 

1분이 그렇게 아깝고 많은 일을 아니 결정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인데, 단지 급한 마음으로 1초를 잘못써서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서 소비한 시간들이 생각난 것이지요.

 

아무튼 편집인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1분만 시간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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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기대할 뿐 아니라, 좀 더 빠르게 아니면 즉석에서 그 바램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우리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보통 컴퓨터는 초당 100 million(1억), 다르게 말하면 분당 6 billion(60억)의 명령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매 1분 동안에,  570개 이상의 웹싸이트가 새로 만들어지고, 약 47,000회의 애플 ‘app’의 다운로드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트위터 사용자들은 100,000개 이상의 트윗을 보내고 있다. 또한 매 1분 동안에, 구글에 2백만 이상의 서치 요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684,000개 이상의 콘텐트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메일 이용자들은 204 million 이상의 메세지를 전송하고, 소비자들은 온라인 쇼핑으로 $272,000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단지 1분 동안에.

 

인터넷에서만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60초 라는 시간은 다른 유형의 세계에서도 차이를 나을 수 있다. 매 1분 동안, 미국인들은 총 21,000개의 피자를 먹고 있어서, 곳곳의 피자집 주인들을 수입을 올려 기쁘게 만든다. 물론, 당신도 피자로 끼니를 때울 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당신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60초 동안의 복근 운동 ‘abs’를 다운받을 수 있다. 정말로 더 이상 무엇이든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통증 해소, 빨리 마르는 네일 폴리시, 스프레이 선탠, 밥과 달걀 식사 등을 치과의사가 통상 식사후 양치질 하라는 시간 2분의 절반의 시간으로 할 수 있다.

 

또한 취직 면접에서 첫 60초 동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그 직장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들 한다. 세탁소 손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손님이 옷을 찾아갈 때, 품질에 좋은 인상을 받고 만족하여 충성고객으로 될 지를 결정짓는 것은 종종 바로 대충 살피는 그 첫 번째 눈길이다. >

 

젊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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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talit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아마 영어권 사람들에게도 낯선 말일겝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런 말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널리 퍼진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타임즈의Catherine Mayer기자가 만들어 낸 말인데죽을 때까지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현상을일컫는 뜻이랍니다.

 

세상이 이미 나이를 잊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의학과 과학기술에 힘입어 장수시대가 열렸고, 나이의 경계없이 하려고만 하면 나이를 이겨내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자 trendwatching의 커버스토리에도 다룬 “Virgin Consumers”  곧 새 것을 바라고 소비하는 소비문화에도 나이는 이미 경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아그라’로 대변되는 노인 성해방의 역사도 이런 흐름을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잊고 살게 된 세대들이 출현하므로 인해 전통적인 결혼, 가족, 사랑, 종교, 소비 등등의 개념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Catherine Mayer는 <어모털리티는 우리의 삶을 저 깊숙한 곳까지 바꿔놓고 있다. 일, 여가, 가족, 사랑, 젊은 나이와 늙은 나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amortality현상에 동조하는 옥스포드 대학교 ‘인류 미래 연구소 (Future of Humanity Institute)’ 은 “중요한 것은 태어난지 몇년이 흘렀느냐가 아니라, 생의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다.( The important thing is not how many years have passed since you were born, but where you are in your life, how you think about yourself and what you are able and willing to do.)라고 말합니다.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이 되었고 그것은 바로 당신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자! 이제 나이 6,70에 노인티 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amortality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설명하며 세상이 엄청 바뀐듯한 글들과 주장을 들으며 든 제 머리속 생각이랍니다.

 

쯔쯔쯔, 서양인들의 사고의한계라니… 이미 이천 수백년 전에 장자(莊子) 선생이 이리 말씀하신 것을 알기나 하고들 하는 말들인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씀입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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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망년망의진어무경(忘年忘義振於無竟)”  나이와 옳고 (그름)을 잊고 무한한 경지로 뻗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바로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면 그리된다는말입니다. 무위의 경지란 바로 제 맘에서 시작되는 것이고요.

 

나이란 바로 제 마음 속에 있다는 생각으로 살면 뭐 한번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나이를 넘어 젊게 삽시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마지막 글

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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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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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4

<떠남, 버림 그리고 만남>

호주에서 33년간 이민목회를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의 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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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리들이 주는 의미

 

이제는 위에서 나누어 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들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의 경험담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해야 할 차례다. 두가지 교훈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다 기독론과 관계된다. 기독교란 결국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백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The Incarnation )의 연속적 재현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도성인신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더불어,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독론을 끊임 없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 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 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분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며 사셨고, 사심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 5-8, 유진 피터슨의 신약 번역 “메시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행위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이는 겸손하게 행동 하신것이 아니라 겸손한 인간이 되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두잉(doing)이 아니라 비잉(being)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진짜로 사람이 되셨지, 사람이 되신 것처럼 가면을 쓰고 찿아 오신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는 예수를 다시 설명하고 기독론을 재해석한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민자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민을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굽에 가서 피난 살이를 했다. 그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그는 이천 년전에 이미 보트 피플(boat people)로 국경을 넘어간 불법 입국자였다. 그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그는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땅에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주변인간, 변두리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버려진 땅에서 잊혀진 사람과 함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고난의 시대를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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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민사건은 하나님의 <떠남>과 <버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떠남>과 <버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모두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을 떠나고 시날 평지를 떠나고 갈데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랄과 불레셋을 떠나고 다시 하란과 가나안을 떠나고 마침내는 애굽을 떠난 사람들의 떠나고, 버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으며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이며 심볼이다.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부모와 이웃,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배와 그물,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의 흩어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넓히는 촉매와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직 떠날 준비 조차도 되어 있질 않다. 그러니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도 없이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운 일이며, 버리지도 않고 얻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히도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일단 지리적으로나마 떠난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숙제로 주어진 요구 사항은 이 지리적 떠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이별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떠남>과 <버림> 다음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은 흙과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만나 주셨고 그 인간들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 (요한복음서 1:14절, 개역 개정판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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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는 조국과 함께 그 땅에서 맺어졌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체의 전통과 습관, 문화와 역사를<떠남> <버림>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 꽃피어 진다. 하지만 몸은 떠났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 어느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 꿈적도 하지 않는 이민자들과 이민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아직도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혹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나를 불러주지나 않을까 하면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선교행위는 아직도 1세기의 가현설(Docetism)을 넘어서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한지, 아니면 그냥 가난한 척 하고 있는지, 교회가 진짜로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섬기고 사랑하는 척 하는지, 목사들이 참으로 겸손한지, 아니면 그냥 내숭을 떠는지, 훤히 우리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

 

몸에 밴 권위주의적 생각과 습관에 매여 목사랍시고 손가락으로 지시만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높은 연봉과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에만 관심을 갖고, 삼박자 축복을 포함한 기복주의 신앙에 젖에 아무나 보고 축복한다며 자신을 무슨 축복의 통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선교의 현장에 적합한 사람이 못된다. 이민목회는 나라 떠나 찢기고 상처 투성이인 이민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생각과 삶을 같이 하고 동고동락하는 동화작업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목자이고 신도나 교민들은 양 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개혁 신학이 아니라 카톨릭적 발상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아니라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양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이고 오직 예수만이 목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어느 동네 양반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을 듣고 혼자 혀를 끌끌 차다가, 문득 예전에 긁적여 놓은 글이 생각나 찾아보니 삼년 전 딱 오늘인 2010년 2월 4일에 낙서처럼 남긴 것이더군요. 그런데 그게 오늘도 딱 유효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안 바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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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의 넓이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스물 네해 째 살고 있는 곳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 보았던 것입니다.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라는 곳입니다.

County 면적이 1,278 km²랍니다.

 

이게 어느 정도될까?

그래 서울시와 한번 비교해 보는 것이지요.

서울시 면적이 605.41㎢이라고 하니 약 두 배 정도입니다.

인구는 약 60만명정도이고요. 한적한 시골입지요.

한인인수는 고무줄 통계이지만 약 4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요.

 

교회 수는 캐톨릭교회 한 곳을 포함하여 8곳이지요.

8곳의 등록교인 수 얼추 천 오백여명.

 

재미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싸우고 있다는 것…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신앙의 이름으로…

 

이 너른 이민의 땅에서…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