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어제  일어난 보스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의 참사 보도를 보며 떠오른 것은 9.11 당시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실시간 중계되는 TV 모니터를 보면서 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쌓였던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겪여낸 일들을 돌아보노라면 그 두려움이 까닭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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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 현재 아직 사건의 배후나 범죄 소행자들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가지.

 

한글로 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인데요.  추측성 기사에 대한 것이랍니다.  이 점 긴 말씀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두려움 곧  fear요 공포입니다. 무릇 대개의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바로 “나에게만 다가온 두려움”이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 또는 ‘나’와 ‘두려움‘이라는 놈은 아마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딱 지금 “비정상적인 불확실성”앞에 놓인 미국민들만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뭐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에 수많은 신의 명령들이 나오지요. 일테면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무수한 신의 명령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신의 명령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이랍니다. 뭐 약 360번 정도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360번 – 바로 일년 365일에 대응하는 숫자랍니다. 사람이란 매일 매일 두려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꼭 껴안아라.>라는.

 

진정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인데요, 그걸 껴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만들 우둔한 사람이나 세력은 없겠지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땅, 미국을 위해 기도하며….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1

둘째로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기쁨”이다.

몇 군데 성서를 찾아 읽어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이하 공동번역 성서)”,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7)”,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9-10)”,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누가 15: 32)” 긴 이야기를 다 인용하지 못하였다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나는기쁨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기쁨이란 것이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누리는 것이거나 막연하게 생각속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전과 지금의 바뀐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말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 잃었던 것을 되찾은 현실, 집 나가갔던 아들의 돌아옴같이 이전과는 다른 어떤 현실 속에서 맛보는 기쁨이다.

예수는 이 천년 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요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공동의 사전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며 오기를 고대하였던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한하나님의 나라의 차이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바로 이 기쁨에 대한 이해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따랐던 추종자들이나 예수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나 예수의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Point-of-View

먼저 예수를 따랐던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 보자.

“우리를 위하여 태어 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야 9: 5-6)”

이 염원은 갈리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유대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의 기대는 분명 로마 압제에서의 해방,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던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헤롯왕국의 변혁이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 왕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대신한 구세주가 통치하는 세상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이란 바로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고 예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를 적대시했던 이들의 눈에도 예수는 분명코 무슨 일을 내고야 말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 19)”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이 문제였다. 먹고 마시되 체제 안에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무리와 어울려 먹고 마시고 나누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분명 체제 전복을 노리는 세력 바로 중심이었다.

예수가 말한 상황이 바뀐 곳에서 맛보는 기쁨에 대한 이해는 듣는 이들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섰다. 추종자들에게는 확 바뀐 현실이 곧 다가 올 것이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고 기쁨은 그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적대자들에게는 체제 전복의 언어로 다가 선 것이다. 그러다 이들의 이해는 한 곳에서 만난다. 추종자들은 어느새 실망하고 분노한 군중으로 변하고 적대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예수의 죽음이다. 무엇이었을까? “기쁨을 말하였던 예수가 왜기쁨을 고대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의 함성과 손에 죽게 되었을까?

나는확 바뀌는 세상꾸준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바뀌는 세상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의 첫 선포는 매우 다급하고 급박한 표현으로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바로 지금 눈 앞에 다가 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은 확 바뀌는 혁명적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 차이다. 사람들은 당장 맛 보아야할 기쁨, 확 바뀌는 세상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나라를 말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필요와 욕망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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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한 수 위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온종일 당신을 부르는 소리 가운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인지요?

 

뭐 일테면, ‘김군아!’라든지 ‘어이’. ‘헤이’ 또는 ‘김사장’, ‘김선생’, 등등 말입니다. 아마 직업과 나이에 따라 저마다 다 제일 많이 듣는 소리들이 다를겝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한울아빠”랍니다. 제 아내가 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세어 보거나 통계를 내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지만 그냥 느낌만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루 평균 백번은 족히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랍니다. 물론  아내가 이 소리를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 24시간을 사는 이들은 아마 제 느낌에 동의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글을 쓰기 조금 전의 일입니다. 예의 그 아내의 옥타브 높은 “한울아빠!”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이게 뭔뜻이야?”하며 책을 내밉니다.  “뭔데?”하며 받아든 책은 혜민 스님이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담낭암 수술을 받으시고 지난 주에 chemotherapy를 마치신 장모님께 투병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몇 권 드린 적이 있었는데, 장모님께서 일독하신 후 아내에게 건너 온 모양이었습니다.

 

아내가 손가락으로 짚은 혜민스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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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의 최고의 표현은 유머입니다. 평화롭고 거룩하고 아주 선해 보이는 상태는 한 수 아래입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왈 경건이 최상인 신자들에겐 낯설 법도 한 표현이지만은 “텍스트text”(교과서)와 “컨텍스트context”(현실)의 차이를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 아내에게 한 한마디랍니다. “무릇 깨달음에는 나이가 없나니…”

 

매사 넉넉히 웃으며 살 일입니다.

 

이미 할머니 반열에 오른 아내는 아직도 유치원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유머가 있답니다.

 

하여 말로써는  제가 한 수 위인데, 깨달음은 아내가 한 수 위랍니다.

 

시간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이민 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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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노동력이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인 이민들은 노동집약적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탁업에 이르면 그야말로 노동이 곧 돈인 비지네스입니다. 하여 “이민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돈 곧 자본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임으로 일괄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에서는 일곱개의 시간 낭비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갑자기 불쑥 걸려오는 전화, 예기치 못한 방문객, 회의, 긴급상황, 연기, 사교활동과 잡담, 우유부단함과 미룸’  하지만 필자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가장 큰 시간 낭비 요소는 위의 낭비 요소를 허락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가 전화를 받는가?  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가? 누가 긴급 상황을 만들고, 누가 연기를 하는가? 누가 사교 활동에 참가하고 잡담하며 우유부단하게 미루는가?  

바로 자신이다.>  – 양정훈지음 , <9 to6 혁명>에서-

 

시간 씀씀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옳은 일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 – Randy Paush 라는 교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골프, 한국비디오(이즈음엔 컴퓨터에 앉아 즐기시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무슨 무슨 각종 회합들… 거기에 얹어 자신의 게으름까지…. 시간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똑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요. 바로 올바른 정보를 갖고, 바르게 활용한다면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남보다 좀 더 앞서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가라(Go)!

참 제 앞가림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이 넓어서 이것 저것 생각만 많은 사람입니다만, 이 땅을 이민으로 살면서 고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이지요.

참으로 많은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인 이민들 앞날에 장애물 아니면 애물단지가 바로 이 교회라는 생각에 허풍 조금 보태면 잠 못 이루는 그런 날이 제법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뭐 긴 말씀 드릴 요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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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말씀으로 끝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표준 새번역 개정판)

“Neither do I condemned you; go and sin no more”(New King James Version)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자면 꽤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우선 Go 다음에 나오는 “sin no more”라는 말,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은 후대 첨가구라는 것이 것이고 예수가 한 원형적 말은 “go” 곧 “가라”라는 말씀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근데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가는 것이지요. 간음한 여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병든 사람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지요. 죄인의 죄를 씻겼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라(go)”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요? 

가족에게로, 일상으로, 평범한 생활 가운데로, 이웃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아니 그 곳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성서에 다음 구절들이 다 그런 말씀들입니다.(마가복음 1장 44절, 2장 11절, 5장 19절,34절, 8장 26절, 10장 52절 누가복음 7장 15절, 17장 19절 요한복음 5장 9절, 9장 7절, 11장 44절등등)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당시에 죄인들(병든 자를 비롯한 사회 하부계층 –쯧쯧, 이렇게 표현하면 좌파가 되겠고- 일테면 소외받은 자들 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좌파?)은 일상사에 있어서 “남들처럼 대접받지 못하는”부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는 이른바 귀환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맹점이랄까 아님 이민교회의 부정적 측면이랄까 그런 것이 드러나는 까닭은 바로 이 “귀환명령”, “돌아가라”, “가라”하는 명령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기 얽매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이웃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떳떳하게(신앞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하는 원천이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얽매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찰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청정도량(淸淨道場)이란 바로 삶, 곧 일상을 위한 곳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십시요. 이즈음 교회나 사찰(사찰에 대한 부분은 깊이 천착한 바 없습니다만. 이민의 땅에서 말입니다.) 들이  얼마나 이민들을 얽매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보아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대한민국 오월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뉴욕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거기 옛날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더군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는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하고는 도망쳐 ‘소도’라고 부르는 종교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에서는 그들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도망쳐 온 인민들에게 종교를 초계급적인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그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한편 저들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돌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좀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예수의 “가라”라는 말은 소도라는 종교적, 사회적 제약을 깨고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민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명령 ”가라”하는 말씀을 전혀 귀 담아 듣지 않는 까닭에서 오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라는 말씀이지요.

믿음이란 무릇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도”에 머물 일이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몸만이 나니라 생각과 정신과 맘이 “오늘, 내 삶의 현장에 있어야”겠지요.

아 참! 예수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를 주창하기도 하셨지요. 그건 또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애국(愛國)에

재작년 아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뜬 Russell W. Peterson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내가 살고있는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오랜 공화당원 생활을 접고 민주당원으로 그가 당적을 바꾼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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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여든 셋에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당시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면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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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었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찌 미국 뿐이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0

성서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곧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를 하기 전, 예수가 사탄에 이끌리어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돌로 밥이 되게 하라”, “기적을 보여라, 신이 너를 지키리니…”, “나를 경배하라, 세상을 네게 주리라” 하는 세 가지 시험 말이다.

이것은 바로 당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던 유대 민중들이 원했던 절실한 바램을 해결해 줄 세가지의 열쇠이었다. 경제, 정치, 종교적 압제에서의 해방을 이루어줄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시작부터 “아니오”였다.

당시의 민중들이 바라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아니오”하며 그들 앞에 선 사람이 예수였다.  갈릴리 해변에 모여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예수와 듣는 사람들의 생각이 처음부터 달랐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까닭이다.  예수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처럼 밥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그런데 밥을 바라보는 예수와 듣는 청중 사이에 간격이 있었고,  그 간격 때문에 예수가 죽는다는 말이다.

밥의 문제 때문에 이야기를 들으려 온 사람들의 관심은 제 배 채우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나누는 밥”을 말하였던 것이다. 있는 분, 없는 놈이 예수의 관심이 아니었다.

성서를 다 인용할 수가 없다. 만일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지금 성서를 찾아 읽어 보라. 신약성서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 24절까지이다. 얼핏 읽으면 부자에 대한 피해 망상적인 기피증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방적 편애가 나타난 것 같지만 “아니다”이다.

밥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을 예수는 우선 피력하였고 예수의 관심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잔치상에 모든 이들을 초대한다. 있는 놈, 없는 분을 가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도 나온다. 누가는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었다고 하였고 마태는 왕이 잔치를 열었다고 기록한다. 어쨋거나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먼저 초청을 받은 이들은 그들의 가진 것 때문에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화가 난 주인은 가난한 자, 불구자, 소경, 절뚝발이는 물론이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불러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한다. 잔치상이 무엇인가? 나누어 먹는 것이다. 이 나누어 먹는 잔치상을 차려 놓은 것은 주인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초대한 주인은 애초 어떤 편파성을 띄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나누어 먹는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잔치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밥을 나누는 나라인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예수가 말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감을 얻어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오 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기적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누어 먹는 밥상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김지하 이야기 나왔으니 한마디 하고 갈까. 그가 ‘밥이 하늘이다’고 선언했을당시만 하여도 그는 맨정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 ‘나누어 먹는 하늘’이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던가? 그도 제 배가 고팠을 터이고… 선언이 아뿔사였겠지. 그를 탓할 일 없다. 느끼고 깨달으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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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쉬우리라”고 가히 혁명적 선언을 한 예수의 참 뜻은 바로 나누어 먹는 밥상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 없으며 부를 누리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부와 가난의 본질 곧 나누는 밥상 정신이 있고 없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하는 부자청년이 “영생의 길”의 길을 묻자 그에게 한 대답 아니 명령은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갈파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 내용이다. 나누는 밥 말이다. (나누는 형식에 대한 고민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터이고, 비록 돌고 돌며 때론 뒷걸음치는 것같지만 그래도 공평한 방법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 나갈 것이다.)

두 번째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을 누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누어 먹는 곳”이라는 말은 아주 현실적 표현이다. 나중에, 뒤에 가서, 그 날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어 먹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오늘의 사족

오병이어 곧 물고기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 그거 한 번 생각해 보자.

오천 명이 있었다. 애들과 여자는 빼고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종교적 모임 그러면 당연히 여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 거기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 명은 넘었었겠지. 글쎄 그 당시 인구로 이게 가능했을까? 믿자. 믿음인고로.

그러나 그 광야에 그렇게 나 온 이들 가운데 먹을 거 가지고 온 사람이 달랑 한 가족 뿐이였을까? 그건 아니였겠지. 딱 자기들만 먹으려고 짱 박고 있었겠지. 움켜 쥐고 있었겠지. 나와 내 가족들 배채우는 게 우선있을 터이니…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다. 기적은 있다. 나누려는 맘이 바로 기적의 씨앗이었다. 예수의 기적은 마음에서 시작된 일 아닐까?

열 두 광주리 남은 이야기는 이 글의 이부(가슴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에서 이어가려 한다.

 

 

오만 잡생각

오만 잡생각”

이런 저런 걱정거리나 머리가 복잡할 때 종종 쓰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오만 잡생각”이라는 말엔 아주 과학적인 근거가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National Science Foundation(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연구 결과랍니다.

 

사람은 보통 한 시간당 천 개가 넘는 생각을 한답니다. 물론 생각의 편린 곧 생각의 조각들(fragments)의 숫자이지요.  지금 저처럼 어떤 글을 쓰고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당 약 2천 5백가지가 넘는 생각들을 한다고 하네요.  보통사람들은 하루에  일만 이천개 정도의 생각을 하며 살고요. 생각을 좀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약 5만개의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지요.

 

참 우리 선조들은 연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고  “오만 잡생각”이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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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5만에서 6만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고요. 그런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그 오만 잡생각 가운데 15% 정도는 긍정적인 생각들이고 나머지 85%가 부정적인 생각들이랍니다. 일테면 걱정, 근심, 불안 등등과 연관된 생각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젠가 고 김대중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를 죽 읽다가 저를 사로잡은 것은 2월 7일에 쓰신 단 두 문장으로 된 일기였답니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제가 감히 거기에 무슨 사족을 달겠습니까? 그냥 가슴이 싸하게 다가 온 말씀이었지요.

 

그 분도,  아니 그 분은 저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많은 생각을 하시며 사신 분이지요. 어쩌면 하루에 5만, 6만이 아니라 10만, 20만 아니 그 이상의 생각들을 하시며 사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그 날의 일기에 달랑 저렇게 두 문장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을 보면 누리셨던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일기를 다 읽고 제 마음에 든 생각 하나. “참으로 그 분은 긍정의 힘으로 사신 분이구나” 이거였답니다.

 

장사 – 역시 긍정의 힘이 이끌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하루 하루를 15%의 긍정적 생각들이 이끌고 가게해야 합니다. 긍정적 생각들이란 지푸라기라도 잡는 어떤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는 그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생각들을 참 그 방향으로 나가게 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 분이 살아 온 길이 바로 그렇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큰  사람만이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작은 구멍가게 하나 잘 꾸려 나가는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장사 안 되어서 걱정”, “이거 진짜 큰일”, “아이고 어쩌지” 그 부정적 생각들을 머리 흔들어 떨쳐 버리고, “이건 내게 좋은 기회야”, “그래, 이거 하나 바꾸어 보자”, “이렇게 다시 시작해 볼까” 긍정적 생각들로 아주 작은 것부터 준비하고 행동으로 옮겨 보는 일.

 

어떠세요?

한 번들 함께 해 보시지 않으시려는지요?

 

 

실행하는 사람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행한다. 한 시대가 그 전 시대로, 또는 그 전의 문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뜻이다포도주 병의 코르크 마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역사도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듯 하지만 사실은 수준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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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또는 비지네스맨의 영원한 멘토라고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의 말입니다. 어떤 하나의 현상을 보면 마치 역사가 뒷걸음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발전한다는 것이지요.

인생을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의 개인사나, 조직의 역동성을 굳게 믿는 단체나 크거나 작은 기업사, 민족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가진 민족사 나아가 인류 보편의 자유를 신봉하며 나아가는 세계사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겠지요.

<실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 전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아주 많은 일상적인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매일 3시간씩 연습을 한다. 아무도 그가 연습을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을지라도 40살 이후에도 실력을 향상 시키려면 그것을 즐겨야 한다나는 몇 년 전 한 피아니스트에게서 “나는 내 손가락에 생명이 있는 한 연습을 한다”는 훌륭한 말을 들었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연습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그의 책 ‘경영 바이블’에서 한 말입니다.

무릇 직업적인 일이란 대부분 아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길수 있어야합니다. 그 삶이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