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 그 사람 냄새

연휴 첫날 아침에 전혀 계획에 없던 얼굴을 만났습니다.

물론 저를 만나기 위해 그가 불쑥 찾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만든  14년 만의 계획 속에 제가 우연히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14년 만이라고.

 

그가 서부 어느 곳인가에서 살고 있고, 그를 만나려고 맘만 먹으면 대여섯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탓에 제 기억 속에 그는 대여섯 시간의 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14년이 흘렀다고 그가 말했답니다.

이제 손주가 셋, 곧 넷이 된다고 했답니다.

 

모처럼 그가 던진 메세지가  참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답니다.

평안함.

사람 냄새나는 평안함.

내 또래인 그의 몸에 배인 냄새였습니다.

 

강가를 거니며 그가 읊조린 노래가락입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를 “예순 즈음에”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그 이별 위에서 자유하는 진리를 툭 던지고 갔답니다.

“자비를 간구” 할 수 있는 바로 그 여유,

바로 그 진리 말입니다.

 

참 좋은 벗과 함께 했던 2013년 메모리얼 데이 연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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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의 여유

지금은 뉴욕에 계시는 문동환목사님께  기독교교육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벌써 35년 전 일입니다. 어느날 강의실에 들어 서신 목사님께서는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내방송이 나옵니다. ‘비행기가 심각한 이상이 생겨 추락하고 있습니다. 약 10분 후 이 비행기는 태평양상에 떨어 질 것 같습니다.’ 자 ! 여러분에게 10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내가 나누어 드린 종이 위에 글이든 그림이든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적어 보십시요.” 

 

그리고 10분 후 목사님께서 다시 말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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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승객이 모두 죽은 비행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시신조차 찾기 힘든 사고이었지요. 그런데 사고현장에서 어느 일본인이 남긴 짧은 기록을 발견하였답니다. 거긴 이렇게 쓰여있었답니다. ‘내게 10분의 여유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감사한다. 사랑한다.’라고요. 자! 이제 여러분들이 남긴 것들을 공개해 볼까요.”

 

그렇게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던 우리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유서들을 공개했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때 제가 무어라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네요.

 

지금의 내가 “10분의 여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내가 그 짧은 시간 사랑과 감사를 고백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무려 삼십 팔년간을 쫓겨 다니며 사셨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님 이야기지요.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선생님이시지만 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하지요.

 

어느날 멍석을 짜고 계신 해월선생님께 어느 도인(道人)이 물었답니다.

선생님 내일이면 또 떠날 길인데 멍석은 무어라 짜십니까?”

해월선생님 왈,

“내 몸이야 떠나지만 여기 멍석이 있으면 훗날 누구라도 이 곳에 와서 쉬지 않겠는가?”

 

늘 마지막인 순간에도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참 도인(道人)이겠지요.

쪼금 아는 체 하는 것 용서해 주시기 바라고요.

이러한 삶들을 일컬어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이라고 하지요.

 

종말론적 삶에는 무엇보다 치열함이 있지요.

그 치열함 속엔 여유와 넉넉함과 사랑과 감사 그리고 나눔이 있게 마련이고요..

 

무엇보다 종말론적 삶에는 끝없는 희망이 살아 숨쉬는 것이지요.

 

내래 뭘 알겠노?

글 한 줄 쓰자하고  앉으면 나오느니 육두문자 뿐입니다. 그래 차마 글 한 줄 못쓰고 한 주가 지나갑니다. 

“내래 뭐 알겠노.”하시며 평생 소주잔에 몸과 맘을 담고 사시다 가신 피양도 피난민 처고모부가  아마 이즈음 제 심정으로 세상을 사셧을 겝니다. 

떠나온지가 한 세대에 이르러서인지 도대체 “내래 뭐 알겠노”의 연속입니다. 그냥 모르고 안보면 되는 일인데 세상사는일이 어째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딱 그 나이의 딸아이를 키우는 아비로서  늘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었답니다. 건강한 미국시민으로 살되 한국인임을 잊고 살지 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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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윤모라는 자의 뉴스를 접했을 때는 “참 철따구니 없는 놈일세”하며 끌끌 혀차고 말았답니다.  이즘 세상에 미친 놈들이 한 둘도 아니고, 그 놈도 그 중 하나겠거니 했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폼새가 그게 영 아닙니다. 

윤모라는 놈은 바로 지금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라는  게 이즈음 제 생각이랍니다. 

거기까지 이르니 이제 제가 정신병자가 됩니다. 

하여,  제 정신건강을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내래 뭘 알겠노?”

봄, 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함을 느끼는 오월은 처음인 듯합니다. 생각의 한계인 줄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쩜 늙어가는 탓인 줄도 모를 일이고요.  저 뿐 아니라 지구도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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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순으로 접어드는 오월, 여전히 꽃잎들이 날리는 봄이랍니다. 

꽃은 떨어지며 열매를 품습니다.

기억 용량이 그리 크지 않은 제 작은 머리속에도 수많은 꽃들이 떨어지며 품었던 열매들의 꿈들이 남아있답니다. 끝내 이루지못한 꿈들, 아직도 맺지못한 열매들이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오월- 그렇게 떨어진 꽃잎들이 품었으나 맺지 못한 열매들을 추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밤입니다. 하루의 시작인 시간입니다. 구태여 유태인들의 시간관념을 빌어오는 까닭은 지금의 쉼이 곧 시작이고 싶은 꿈 탓입니다. 

봄 그리고  밤.

바로 봄밤이기에

비록 아쉬움 많아도 서두르지 않는답니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한계(限界)

노인이 하우에게 말했다.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고 하우에게 내밀었다.

“자, 보게. 사진이라네.”

하우는 사진을 건네받았다. 두 장이었다.

언뜻 보기엔 꼭 같아 보이는 두 장의 사진. 수평선 너머에 있는 태양을 찍은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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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에 어떤 게 일출 사진이고 일몰 사진인지 분간할 수 있겠나?”

하우는 사진을 이리저리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딱히 일출과 일몰을 구분할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둘 다 일출 사진이라고 해도, 둘 다 일몰 사진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았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만, 얼핏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르신, 분간하기가 어려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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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일출 사진이라네. 당연히 다른 사진은 일몰 사진이고.”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노인은 말했다. “일출이건 일몰이건 똑 같은 태양이지. 어떤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야. 한계도 마찬가지지. 그걸 일몰이라고 보면 일몰인 거고 일출이라고 보면 일출인 거라네. 한계는 말이지, 꽉막힌 벽이 아니라 허들 같은 거라네. 뛰어넘으면 그만이지. 최선을 다해 뛰어넘어 보게.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 말이야.” 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김현태 『향유고래이야기』중에서 – 

주일 오후에 읽은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한계는 뛰어 넘으면 그만이랍니다. 최선을 다해…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

아주 큰 행복

예년에 비해 달포는 늦은듯한 봄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뒤뜰에 등나무가 연보라빛 연등을 켠 것을 보면 올해는 봄과 여름이 함께 하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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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초하루, 느긋함으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An early-morning walk is a blessing for the whole day.”라는 말처럼 봄이 가득한 이 아침을 마시며 하루가 아닌 한해의 축복을 느껴봅니다.

언젠가  미국인들의 <행복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쓰는 것 곧 소유와 소비가 행복의 척도였는데 이젠 <마음의 행복>이라는 잣대를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가 내다 본 세상은 작은 것이 아름다운(Small Is Beautiful) 세상입니다. 

“경제학이란 보다 적은 소비로 보다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바로 슈마허의 말입니다.

<부자나라에서 좋은 것이 가난한 나라에도 좋은 것이라는 가정은 옳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분에서만 적용될 뿐 대부분의 틀린 것이다> 역시 슈마허의 말입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지나치게 <비교행복>에 빠져들다 보면 불행을 낳을 뿐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봄날 아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지금 제가 누리는 아주 큰 행복입니다.

언제 철 들까?

이순(耳順) 나이에 이르르면 매사 넉넉히 듣는다던데, 쉽게 발끈하여 속내를 드러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性情)은  고칠 수 없는 병인듯 합니다. 어제, 오늘 아내의 이어지는 잔소리를 ‘허허’웃으며 감내하는 까닭은 제 고질병을 익히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위한답시고 올들어 몇 번 참석한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어느 해부터인가 제가 피하는 자리가 있답니다. 정치 이야기, 종교 또는 믿음 이야기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어야 하거나, 또는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저와 성향이 다른 이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때  애초 자리를 피하거니와, 마지못한 자리라도 슬그머니 피하곤 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올들어 몇 번 아내와 함께 참석했지만 그 때마다 후회를 안고 돌아 온 자리였답니다. 끝내 제 병이 도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연인즉  <‘하나님의 사람’과 ‘보통  나 같은 사람(제가 아니고  말을 하던 화자랍니다)’과는 확연한 어떤 차이가 있어서 비교 불가하고 그렇게 될 가능(하나님의 사람)이 ‘나같은 사람(화자)’에겐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만 제가 발끈해 버렸다는 이야기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분은 중절모가 정말 잘 어울리는 멋진 노년이시랍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기시고  칠순을 바라보시며 조곤조곤 삶을 즐기며 정리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썩 매료되는 멋진 양반이시랍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양반의 이야기 허리를 뚝 끊고 “그건 아니오!”라고 선언을 해 버렸으니 아내의 걱정이 이틀이나 이어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터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잔소리에 ‘허허’거리며 눙치는데는 내심 ‘내 고질병은 나름 옳은 구석이 있다’는 고집이 꽈리틀고 앉아있거니와  ‘요기서 밀리면 또 그 모임에 이끌려 나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을 피해 보자는 꼼수도 곁들여 있는 것이랍니다.

자! 이쯤 제 이야기입니다.

<역사 이래, 살다 죽은 또는 지금 살고 있는,  아니 앞으로 나올 세상 사람 누구나 다 100%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없고, 100% ‘평범한 사람’도 없다. 신 앞에서는…. 다만 1-99% 사이의 ‘하나님의 사람’, ‘평범한 사람’을 범위를 나누며 상대 우위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평범한 사람’을 쫙 줄 긋듯 가르는 것은 참 위험하다. (지배의 논리, 죄의 온상이 거기서 싹 트므로…)>

그렇게 운운 했던 것인데….

아무튼 아내의 이야기는  “니가 잘난 척”했다는 것인데 일견 수긍하는 부분도 있고, 그래 허허거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다 어제 바티칸 뉴스 하나에 오늘 제가 힘을 다시 얻어 “그려, 모임을 피할 까닭은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Francis 교황께서 미사를 통해 하신 말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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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를 제가 읽은 까닭은 <Confession is not like dry cleaners, but is encounter with Jesus (신앙고백 또는 고해란 세탁소에 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라는 기사 제목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 내용 가운데 하나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용기 나아가 기쁨으로 “죄인이라는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야한다고, 교황은 말했다.  “우리가 겸손하고 친절하며” 진실된 것을 “요구하시는 신 앞에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않된다.” (However, people must go before the Lord with courage, even joy, “with our truth of being sinners,” he said. “We must never disguise ourselves before God,” who “asks us to be humble and kind” and truthful.)>

결코 100%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용기, 그 안에서의 기쁨 – 바로 신앙이요, 믿음이지요.  역사이래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요. 단 하나 신과 신이였던 사내 빼고 말입니다.

거기 누구라도 사람이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걸 용인하거나 사칭한다면 그게 바로 죄요, 신에 대한 모독인 셈이지요.

그래 발끈했던 것이지만, 암튼 아내의 걱정을 듣는 한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은 모양입니다.

36계 줄행랑

오늘 온라인 잡지 American Drycleaner에 실린 세탁인들의 말이랍니다. 올 3월과 지난 해 삼월의 매상 비교를 하는 서베이에 커멘트한 말들입니다. 

동네 다섯군데 있던 세탁소 중 나만 살아 남았답니다.([There were] five dry cleaners in town, now I’m the only one.)”

지난 육 주간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랍니다.(It’s [been] getting better for [the] last six weeks)”

동네 시장 환경은 아주 조금씩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듯 한데…(market conditions in our area are somewhere between static and slight improvement.)”

해마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나빠진다는…(Year over year, the conditions are getting worse)”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대꾸들이랍니다.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고, 갈수록 어렵다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서베이 응답을 보면 서부 지역을 빼 놓고는 미 전역에서 매출이 지난 해보다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아주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탁인들의 이야기도 있답니다. 

어제 어느 세탁인에게서 받은 전화 내용도 바로 이런 헷갈리는 환경 탓에서 오는 고민이었을 겝니다. 내용인즉은 지난 해 대비 올 1/4분기에 매상이 떨어졌는데 가격을 올릴까 말까하는 물음이었답니다. 

저라고 뭐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뾰족하게 신통방통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일들을 시도하고 되풀이 해 보는 것이지요. 

그 방법들 가운데 한가지랍니다.  얼핏36계 줄행랑과 맞닿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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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불분명 할 때 사람들의 심리도 흥미롭다. 이스라엘 학자 바 엘리는 축구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와 골키퍼를 관찰했다. 차는 방향을 보니 왼쪽 1/3, 오른쪽 1/3, 가운데가 각각 1/3이었다. 근데 볼을 막는 골키퍼의 반은 왼쪽으로, 나머지 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었다. 볼의 1/3은 가운데로 오는데 왜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을까? 왜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할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편향이다(action bias).> – Rolf Dobelli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들이지요. 뭔가 불안하고, 앞날이 확실치 않을 때면 무슨 일이던 뭔가 해야만 될 것같은 초조감이 일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초조함으로 벌인 일들로 인해 상황은 더 꼬이기도 하곤 하지요. 

하여 때론 조용히 하던 일을 묵묵히 하면서 기본적인 일들에 충실해 보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무릇 36계 줄행랑이란 도망그 자체에 뜻을 두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2

다시 성서로 돌아가 보자.

마가복음 4장 30-32에는 이른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4장 26-29절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 33절에는 “누룩의 비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말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는 말을 세상을 확 바뀌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만 겨자씨의 비유나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나는 서서히 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 밀가루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이야기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 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 나는지 모른다(마가 4: 26-27)”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핵심적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는 땅, 누룩을 받는 가루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자라고 부풀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 바뀌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는 없어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 천년 전 예수가 서서 말하였던 갈릴리에서부터 오늘 여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곳이며 이 일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끌려 간)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금 오늘도 곳곳에서 일어 나고 있다. 그를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꾸  뒤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또 어려워졌다. 쉬운 이야기 하나 하자.

 언젠가 “아버지 학교”를 다녀 온 후배가 한 말이다. “제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쁘게 살자는 것이죠. 우선 화를 내지 말자. 말의 높이를 낮추자. 성내는 마음을 죽이자. 그렇게 하고 나니 우리 가정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어 갑니다.”

자, 그의 표현대로 그가 확 바뀌었다치자. 그의 가정은 아버지학교를 다녀오기 전이나 다녀 온 후나 구성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먼 곳이 아니다.

기쁨과 나누어 먹는 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마침내 말로써가 아니라 그의 온 몸을 던진 증언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다가 서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먹는 본을 보이며 마침내 그의 몸을 나누는 밥으로 내어 놓은 역사적인 장면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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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 14: 22)” 이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식탁, 그는 나누는 밥상을 온 몸으로 보여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밥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처럼 한 마디 달자. 이즈음 차고 넘치는 교인들의 “나 하나만” 또는 “내 가정만” 아니면 “내 교회만”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주 다른 곳이다. 물론 나도 그 한 가운데 서 있다.

기쁨에 대한 예수의 실체적인 증언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 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하였다.(마가 16: 6-7)”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라는 본래의 말 뜻은 <일어나다> 또는 <궐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캄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다시 궐기한 예수는 갈릴리로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갈릴리로 먼저 향했다. 기쁨은 바로 이것이다. “기쁜 소식” 곧 복음 – 예수가 살아 복음이 되어 오늘 여기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기쁨으로 일한다는 성서의 증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를 죽였던 무리들, 그를 따르다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함께 하였던 추종자들은 오늘도 살아 있다. 그들은 어떤 이들 이었을까?

***오늘의 사족

‘아버지 학교’를 통해 확 바뀌었다는 후배는 세월이 흘러 바뀌기 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에게이로’ – 일어나라! 궐기하라! 그게 아직도 누구에게나 유효한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태(世態) 이제(二題)

세월이 하수상하니 별별 일을 다 보게 된답니다.

우선 한가지.

어제 커테티컷 Darien에 있는 Sandra’s Cleaners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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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쯤이었다고 하니 정말 눈 깜작할 사이 코를 베인 형국이랄 수 있겠습니다. 시티 워터 (수도물)을 쓰지 않는다면 세탁소에  필수 장비 가운데 하나인chiller를 뜯어다가 팔아 먹으려던 도둑 두 명이 잡혔다는 뉴스랍니다. 

세탁소에서 일어난 강절도 사건 뉴스는 종종 듣는 것이지만, 세탁소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통상 건물 밖에  놓이게 마련인 장비를 뜯어가는 일은 처음 듣는 일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명의 도둑들의 나이에 또 한번 놀랐답니다. 쉰 둘, 쉰 셋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오늘 오후에 뉴저지의 어느 세탁인이 전화를 주셨답니다. 어눌하지만 절실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한 그 이의 문의였답니다.

“오늘, 맡긴 지 오년이 지난 웨딩 가운을 찾으러 온 손님이 있었는데요. 분명 맡긴 영수증을 들고 오긴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나고…. 물건도 없고해서…. ‘없다고 했더니…. 화를 내며 돈을 안주면 법정으로 간다며…. 이럴 땐 어떻하면 좋을지요?” 

처음에 제 대답이었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통산 관례법이라는 게 있는데, 5년이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는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지만 제가 오히려 찜찜했답니다. 그래 자료를 찾아 보았답니다.

대부분의 주마다 왈 관례에 따라 적용되는 것 같고요. 실제 판례에 나타난 세탁물 보관에 따른 소송 결과들은 이렇답니다. 

Massachusetts Law에 따르면 90일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고요. New York Law는 6개월이고요. Ohio Law는 120일로 규정하고 있답니다. 

이런 시비에 말리지 않으려면 넉넉잡고 한 일년 정도는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튼 세월이 녹녹치 않아서 일어나는 일인듯 합니다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인류사 수천년 이래 늘 일어났던 일이겠지요. 

무릇 세월이 하수상하다는 말은 느끼기 나름일게고요.

자!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겠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이즘 세태를 감안하여 chiller도 틈틈이 확인하고, 세탁물과 손님들 확인하며 산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닐 듯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