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신(神)의 무상급식법-2

(당신의 천국- 세번 째 이야기)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 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 드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출애굽기 16장 16-19절, 공동번역) 

제 나이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후 무렵일 터이니 1950년대 말에서 1960대 초 쯤의 제 기억일 것입니다. 친가보다는 외가 친적들이 많았답니다.  특히  한남동 토박이 외할아버지의 권위가 대단한 시절이어서 명절이면 외가에 모인 친척들이 수십명이 넘었답니다. 

제가 한 살 터울 외사촌 형과 막걸리에 취해 어른들의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답니다. 

잔치상에 한 잔 얼근해 지신 어른들의 이야기는 한 곳으로 모이곤 했답니다. 대청 마루에 진을 치셨던 외할아버지 항렬의 할아버지들이나 건너방의 외삼촌들과 큰 형님들 사랑채 차지였던 아버지나 이모부들 예외가 없었답니다. 

이야기의 꼬리가 물려 이어지던 이야기는 바로 6.25 전쟁 때 이야기였답니다. 

6.25a

할아버지들의 피난 이야기나, 큰 외삼촌의 국민방위군 시절 이야기, 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의 전쟁 이야기, 막내 삼촌과 큰 형님의 피난 이야기 등등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리 만큼 듣고 또 들은 이야기들이랍니다. 

외가 일가들이(당시 용산 미군 부대에서 일하시던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들도 한남동 외가의 일원이었답니다.) 피난 행렬에 합류한 것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이후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강을 접하고 있는 한남동의 특성상 배를 타기가 쉬었기에 한강을 쉽게 건넜다고 합니다. 

외가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날 무렵 이고 지고 온 먹을 거리들이 동이 났고, 가락지들을 팔아야 하는 끼니를 때우는 처지들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부산에서 다시 합류하여 한남동으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그 긴 소설들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국민방위군_징집자들

제 외가의 피난 이야기를 돌아보면 급하게 짐을 꾸려 떠났지만 서울서 천안까지는 먹을 만큼의 양식을 이거나 지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양식이면 바로 돌아 올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들도 조금은 했을 것이고, 당시 지니고 떠날 양식의 전부가 그 것 뿐이었을 수도 있겠고, 운반 수단상 그 이상은 짊어지거나 이고 갈 수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겝니다. 

그 피난 대열에서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무사했고, 다시 다 한남동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다만  저 보다 일곱 살 위인 누님이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제일 거지 차림으로 해골만 남은 모습으로 돌아 온 가족은 국가에서 불러서 동원되어 국민방위병이 되었던 큰 외삼촌이었다는 이야기가 아직 생생하답니다. 

자! 3500여년 전으로 중동의 시내 광야로 돌아가봅니다. 

탈애굽을 한 백만(사실 이 숫자는 아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에 이르는 노예 무리들이 강을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이들이 애초 목적지로 정한 가나안은 무리들이  약 한달 정도 걸으면 도착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 먹을 양식은 탈애굽을 할 때  너나없이 챙겨왔을 것입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굶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세를 비롯한 왈 지도부에게 원망의 소리를 드높혔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먹는 것으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노예들이 원망하고 항의하는 대상은 모세와 지도부였습니다.(출애굽기 16장 3절) 모세와 지도부가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대책 마련을 하고 어쩌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리들의 원망에 바로 야훼 신이 개입해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출애굽기 16장 4절) (모세와 지도부는 허당이었다는 것인데요. 요거 나중에 또 이야기 합니다.) 

“내가 먹을 것 준다”는 약속입니다. 

야훼라는 신이 개입하는 세상, 곧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본은 “먹을 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라는 음식이건 햄버거건 육개장이건 아니, 하다못해 풀죽이건 굶어죽이지는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성서 이 부분에 대한 뛰어난 주석들도 많고, 오늘도 많은 설교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남기지만 신의 선언은 “내가 다스리는 한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서 이야기에서 실락원 이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제가 죽음 이후에 만날 천국의 첫 모습인 동시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첫 번째 동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공짜로 먹을 거리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확대사”야말로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대사가 인류 역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  곧 절대 기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10억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 퍼센테이지는 인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줄어왔습니다.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신(神)의 무상급식법 제 일장 제일조는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달 정도 걸릴 거리를 사십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히브리족의 숱한 사연들 처럼 아주 간단할 것 같은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신의 선언은 ‘하나의 조건’으로 하여 3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완성의 선언으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답니다. 

하늘나라의 두번 째 모습,  바로 평등의 문제랍니다.

만나 – 신(神)의 무상급식법-1

(당신의 천국 – 두번째 이야기)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출애굽기16장 4절, 공동번역)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이야기는 대충 기원전 1500년경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시대 쯤일 것입니다. 인류의 발전과정으로 보면 아직 철기시대는 꿈도 꾸지 못한 청동기 시대쯤이 될 것입니다. 피라밋 제국인 이집트의 중간왕조 시대이니, 우리들이 아주 먼 서양역사로 생각하는 그리스 로마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동양으로치면 중국의 은 (殷)나라 시절쯤입니다. 은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학자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중국 역시 그 때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때이랍니다. 

인류의 역사시대가 막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시각을 잠깐 돌려 3500여년 후의 한국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1세기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는 시대에  단지 7년전 있었던 기록에 대해 진실여부를 따지고 존재 여부를 따지는 2013년 10월 현재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신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이시라면 한번 눈감고 잠시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 7년도 지나지 않는 문서의 내용과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3500년의 이야기들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제 이야기는 시작된답니다. 

“진짜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과 “믿고 이야기(고백)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관없음은 결코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 딱 잘라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진실입니다. 

일테면 진짜 일어 났었고, 있었던 사실이라도 그 사실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에 따라 그 내용의 진실이 달리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그렇게 믿거나 역사가 그랬다고 기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 이집트 노예 무리들이었던 히브리족이 출애굽을 합니다.  출애굽이라지만 사실은  탈애굽입니다. 수십만 거의 백만에 육박하거나 그 수를 넘었다는 한 무리들이 애굽을 탈출한 것이지요. 

그들의 목적지는 분명했습니다. 가나안이었습니다. 야훼라는 신(神)의 계시를 받아 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모세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신과의 직통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과 직통대화가 가능한 수많은 인물들이 전 세계에 널려 있지만, 모세가 누렸던 특권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가 없을겝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정상인의 걸음걸이로 약 보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아! 물론 저도 걸어보진 못했지만 그냥 남들 이야기랍니다.) 백만명 정도가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건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는 시간이랍니다.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축하연

제가 한국군대 생활을 한게 1970년 초중반 일인데요. 그 당시 육군 보병으로 100Km 완전군장 행군을 분기마다 했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령도 많이 피어서 다 하지는 않았답니다만.)  아마 대대별 시간 측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답니다. 그 때 우리부대 사단장님의 존함이 장태완장군님이었는데 전두환 반란 사건 이후  저는 그 분을 진짜 장군으로 생각하지만 제가 100Km 행군을 했을 당시의 장태완님은 제겐 미친 개또라이였답니다. 

아무튼 장장군님의 훈련 효과 때문이었던지 처음 100Km 행군에서 24시간 정도 걸렸던 대대행군 속도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스무시간 이내로 단축시켰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답니다. 

하물며 3500년전 백만명의 탈출행로에 있어서 모세와 그의 수족들이 자신들이 계획대로 된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가라! 모세!”라는 신의 명령으로 백만여명의 노예들의 탈출 대열에 선봉이 된 모세와 그의 측근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야훼를 믿는 마음으로”만 그 길을 떠났을까요? 거의 백만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단 하나의 이견(異見)조차없이 보따리를 쌓았을까요? 

만나이야기는 애굽 탈출 후 약 한 달 반이 지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랍니다. 

자! 이쯤 아주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했던 탈출 노예들이 배고픔을 호소하고 그 호소를 신이 들어 응답했던 시점 말입니다. 탈출 후 한달 반 쯤 지난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걸릴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들이 예상할 수 있는 시간 약 한 달 전후고요. 

이야기의 진행상 최소 한 달 반 정도 탈출 무리들이 먹을 식량은 준비하고 떠난 일이라는 것 쯤은 상상이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한 달 반은 커녕 사십년이 지난 이후에야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이고요. 

탈출 후 약 한 달 보름 후 최소한 배고픔을 면할 정도의 먹을거리가 없었던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식사입니다. 

 

당신의 천국 -1

<세계사의 모든 새로운 단계는 옛 것들의 마지막 융성 이후에 나타났다. – Paul F. Knitter> 

2013년 10월 1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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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의 shutdown 소식과 한국의 국군의 날 퍼레이드 기사를 보다가 글 하나 써보자는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제 머리 속에 있는 세개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이야기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려합니다. 

<첫 번째 생각> 

ObamaCare라는 이름의 의료개혁안이 끝내 오늘 연방정부의 shutdown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정책 문제로 며칠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두 문제 모두 복지에 대한 또는 돈에 대한, 나아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최소한 서로 누리고 사는 하한선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복지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이  감히 저처럼 소시민이 감놔라  배놔라 할 정도로 쉬운 것들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답니다.

 

단지, 복지와 평등의 문제를 제 알량한 수준에 맞게, 아니 제 수준의 이해 정도가 이런 것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한 번 정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두 번 째 생각> 

여름 내내 글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답답한 시간들을 보냈답니다. 그래 모처럼 아내 치마 폭에 쌓여 교회 나들이도 다녔고, 모임들에도 참석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소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구순(九旬)을 넘기신 시아버님을 걱정하는 참 맘씨 고운 며느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 머리 속에 맴맴거린답니다. 

“시아버님이 하늘나라 가셔야 하는데 천주교인이라….”

그날 이후 제 머리 속에 떠나지 않는 생각 하나가 바로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세번 째 생각> 

어느 날엔  앞으로 십년은 넉넉할 것 같고, 또 다른 날엔 바로 내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답니다. 

바로 제 부모님과 처부모님의 모습이랍니다. 

제가 네 분들에게 이즈음 웃으며 드리는 말씀 가운데 이런게 있답니다.

“이젠 몰라요. 진짜 몰라요. 누가 먼저인지는… 저까지요. (죽음은 그저 과정일 따름이예요. 우리 모두는 참 축복받은 편이잖아요.)” <괄호 안은 입밖에 못 내놓는 제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부모, 처부모 네분들의 성격과 특성들이 다르다보니 그 표현 방법들 역시 조금씩 다르답니다. 

아무튼 역사 이전이나 이후나 모든 생명체들이 피해 갈 수 없었던,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에 대한 생각이지요. 

이렇게 세가지의 다른 생각들이 마구 머리 속에 오고가는 시월 초하루에 “하늘나라 이야기”를 시작해 보렵니다. 

무릇 모든 생각들은 그 생각의 주체 곧 생각하는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 교육, 문화, 종교, 특히 인간관계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법이지요. 

그런 전제 아래 “하늘나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제가 성서 이야기로 시작하는 점에 대해 넉넉한 이해를 부탁드린답니다. 

첫번 째 이야기 – 

하늘나라의 첫번 째 그림 –  “만나 이야기” 

역사 이야기가 먼저일겝니다.

예수쟁이들, 기독교인들, 믿음의 사람들, 천국에 속한 사람들 – 무어라고 당신이 불리우기를 원하시건 역사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이왕 알려면 바로 알아야겠고요. 두 가지를 함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랍니다. 

먼저 두 가지란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역사와 각자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역사라는 관점입니다. 

뭐 어렵게 이야기하는 건 늘 질색인지라 제 이야기로 쉽게 말씀드리지요. 

기독교인인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제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역사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 미국, 기독교의 역사를 훅 한번 훑고 지나가는 일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첫번 째 그림에 대한 이야기입니. 먼저 성서를 보겠습니다. 

출애급기 16장과 민수기 11장 한번 읽고 다음 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좀 더 쉽게  제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겝니다.

-계속…

낙엽에

구월의 마지막 주일도 저뭅니다.

지난 유월 이래 긴 여름을 보내며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서서 뱅뱅 돌며 길을 찾노라 애쓰다, 끝내 어지러운 현기증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답니다. 

한 끼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어도 아직 하루 삶의 무게는 짊어져야만 하는 나이에 자꾸 그 짐의 무게가 버겁다는 생각과 이런 저런 연으로 이어진 이들의 똑같은 고민과 걱정들을 해결해 줄 능력의 부족, 아래로는 아직 짝짓지 못한 아이들의 미래와 위로는 돌아가야만 할 본향길이 썩 내키지 않으실 내 부모님들에 대한 연민, 오지랖이지만 육십여 년 나를 떠받쳐 주었던 역사의 바른 방향이라는 믿음들이 깡그리 무너져 버리는 현실들 – 그냥 아프기만 할 뿐 단 한 줄의 글조차 사치스럽던 2013년 여름이 낙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one leaf오늘 아침, 앞뜰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으음, 다음 주엔 낙엽을 쓸기 시작해야겠네.” 혼자소리를 하다가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랍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낙엽을 태우며”라는 어느 수필가의 글을 배울 무렵 제 맘에 있었던 기억이지요. 

1960년대, 집 뜰의 낙엽을 태우는 가을을 맞았던 서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수필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지금은 제게 집뜰의 낙엽이 그 옛날 수필가의 마음으로 다가오지만 말입니다. 

너무 큰 것 붙들지 않고, 하루 하루 숨쉬듯 작고 자연적인 것들부터 한걸음씩 이어가야겠습니다. 

낙엽이 주는 교훈일겝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는 인도의 신학자 S J Samartha 의 말로 2013년 제 여름의 고민들을 텁니다.

결국엔….

거의 한 달 넘게 휴가 중이었습니다.

나선

뭐 가치관의 혼동이라는 말로 어렵게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요? 

이제껏 믿고 살아왔던 지난 세월들이 다 헛 것이었다는 생각과 더불어 앞으로 내가 해 나가고 싶은 일들이 끝내 헛짓이고야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들이 저를 한 쪽으로 막 밀어 붙였답니다. 

그래 정신없이 마구 남의 생각들을 파헤쳐 보았답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역사를 다시 돌아 보는 것이었고, 앞날에 대해서는 유사한 경험들을 곱씹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유심사관唯心史觀, 유물사관唯物史觀, 민중사관民衆史觀, 기독교사관 등으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사관으로 해석한 한국사 책들을 죽 훑어 보았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 곧 한인 이민자로서 미국의 자영업자들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성공한 사례들을 훑어 스크랩했습니다. 

올 여름 휴가였던 셈입니다. 

결론입니다. 

무릇 사람의 역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두어 주 전에 딸아이가 Haiti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Haiti행을 반대했었습니다. 

“너와 네가 속한 그룹의 만족을 위한 여행이 될 것이므로”라는 제 반대 의견은 아이에게 묵살 당했고 아이는 잘 다녀왔습니다. 아이는 많이 느꼈다고 했고, 나는 허상만 보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네가 아이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역사를 보아라” 라고… 

모를 일입니다. 아마 딸아이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딸아이의 아이티 선교로 인해 달라진 것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한달 간 책으로 얻으려 했던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을 길게 늘려보니 역사의 시계는 어느 곳에서건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천국이던, 헤겔이 말하는 자유확대사건,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이던,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이던… 무어라 말하던 어제보다는 나은 내일로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것이 엄청나게 큰 나선형 그림으로 나아가기에 때론 바닥이라고 느낄 뿐! 

올 여름 휴가 끝.

사십년이 바로 어제 같은 벗들

시간 단위로 살던 삶인데 환경이 바뀌니 아직 익숙칠 않습니다. 계획보다는 모든 일들이 더디 가고 있답니다.

 

아무튼 그런, 아직은 낯선 아침들을 맞고 있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8시경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국 분인데….” 전화기를 건네며 아내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 김영근….”,  “혹시, 김영근 맞스… 맞니?”

 

도대체 누군지 감을 잡지 못해 뭐라 대답하기가 참 애매했답니다.

그래 던진 말이 “근데….”였답니다.

청운중학교 

“너 영근이구나! 나 길환이야! 오길환! 청운중학교! 나 알지?”

“어… 오길환이! 니가 어떻게?”하는 제 대답과 동시에 우리들은 사십년 저 쪽 세월로 날아가 있었답니다.

 

대뜸 사십년 전으로 돌아간 친구의 목소리였습니다.

“XX, 오랜만이다!”

그리고 제 대답이었습니다.

“XX, 진짜 오랜만이다!”

 

그렇게 이어진 통화는 인규로 영환이로 그렇게 사십년 전 친구들의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이 한국시간으로는 밤 9시쯤이었던 모양입니다.

 

올해 환갑을 맞는 중학교 동창들이 모처럼 모여 저녁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는 모임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찌하다가 제 이름이 나왔고 그 중 한 친구가 마침 제 전화번화를 갖고 있어서 전화를 하게 되었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지가 60년대 말이니 사십 수 년이 지났습니다.

 

어제, 오늘 복에 겨운 날들을 보냈답니다.

 

세상에 누군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저를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복이지요. 사십년 전의 친구를  기억하고 전화를 돌릴 수 있는 친구들이 어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진짜 복에 겨운 일이었답니다.

 

어제 불알친구 길환이가 제게 던진 질문이랍니다.

“영근아! 니 고추 아직도 하야냐?”

“그럼, 여전히 희지!”

 

추억은 때론 내일의 힘이 됩니다.

 

벗들과 저의 노년을 위하여!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모처럼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를 담을 형편이 아니었답니다.

 

오늘은 제 세탁소의 오래된 단골 손님인 Jim McKelvey 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이제는 은퇴한 치과의사랍니다.

 

jim mckelvey

 제 가게에 들어설 때 마다 “오늘 하루를기쁘게 살고, 웃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바로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이다”라는 주제로 그가 매주 만드는 명함 하나를 건넨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진들이 그의 명함이랍니다.

 

그리고 제가 주일 아침이면 보내는 이메일 편지의열렬 독자이기도 하고, 그가 똑같이 그의 “일상에서의 기쁨을 나누는 이야기들”을 보내는 멤버의 한 사람으로 저를 선택해 준 덕분에 그의 이야기들에 늘 귀를 기울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답니다.

 

다음은 엊그제 그가 칠순 생일을 보내며 느낀일들을 잔잔히 기록한 편지랍니다.

 

그 이의 허락을 얻어 제 블로그에 번역해올려봅니다.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 함께 나눕니다.

 

Jim McKelvey의 글입니다,

 

< 일흔을 맞으며…

 

지난달 일흔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노래하고, 소원을 빌며, 촛불을 불어끄는 그러한 성대한 생일잔치가 아니었다.

 

하루 저녁에는 저녁식사 후 촛불 하나를 얹은 컵케익이 전부였고, 그리고서는 먼 친지를 방문하여 또 다시 촛불 얹은 컵케익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또 다른 날에는 누이와 함께 점심을 들면서 조용히 생일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나서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촛불과 컵케익 없이 뉴욕에서 이틀을 보냈다. 이렇게 생일 축하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다면, 생일은 그 날에 대해 감사하는 단지 또 다른 하루, 또 다른 멋지고 경이로운 하루일 뿐이다. 1997년, 나는 과연 55회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생의 일흔 한 번째 해에 들어서고 있다.

 

이전에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때 부터 나는 “매일매일이 신의 선물이다”라는 말의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15년 동안을 통하여, 나는 하루하루의 가치와 삶의 소중함을 되풀이해서 배워 오고 있다. 내 병이 위대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 뿐이 아니다. 내 병만이 유일한 스승이 아니었다. 지난 11월 이러한 글을 쓰면서, 매일매일 내 삶을 스쳐가는 스승들에게 알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학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그것이 이 메세지를 받는 사람들, 이 “공유 모임”으로 이끌었다.

 

당신 모두가 이 수많은 해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나의 스승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어렸을 때 “Please”와 “Thank you”라는 말을 하도록 나에게 가르쳐준 나의 누이일 지도 모른다. 혹은 캐롤과 내가 처음 결혼하고 보살펴주었을 때 10대 소녀로서 내게 인내를 가르쳐 준 사랑하는 내 처제일 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중 일부는 내가 수강을 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들은 세상에 나가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내가 알도록 도와주신 카운슬러요, 강사요, 치료사 (therapist) 이었다. 더러는 치과의사로서 내 평생직업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 동료 전문가였다. 또한 내게 힘을 주는 그리고 너그럽게 보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저술가였다.

 

아마도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용기와 불굴의 인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신의 예를 보면서 관용을 배웠을 지도 모른다. 당신들 중 어떤 이들은 “자, 해봐, 힘내!”라는 말 혹은 행동으로 나를 격려했다. 당신에게서 봄으로써 나는 용서의 힘을 배웠다. 당신 신앙의 힘을 보면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신의 연민을 경험하고 나 자신의 연민을 강화했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직면하고서도 당신이 의연하고 심지어 영웅적인 것을 보았다.

 

당신 중 상당 수는 내가 치과 의사로 일하면서 내 환자였거나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당신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 힘, 고결함, 이기심없는 심정, 창조력, 좋은 유모어를 배웠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웃었고, 또한 그것으로 부터 배웠다.

 

이 메세지를 받는다면, 당신은 이 경이로운 여정 중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든 나의 스승이 되었다. 감사한다. 나의 인생여정은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나의 스승목록을 만들면서, “지금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고 있나?” “당신은 여전히 천부의 재능을 세상에서 발휘하고 있는가?” “가족들은 어떤가?” “당신은 내게 어떻게 스승이 되었는지 아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기원하며,

 

Jim,

Dr. Jim,

Jimbo,

Poppy

……….우리 서로의 관계에 의존하는

 

또래의 고민들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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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내기 아주 좋은 날이었지요. 

햇살은 조금 따갑게 느껴졌지만 이따금 장미 향기를 품고 건듯 부는 바람이 그 따가움을 실어가는 오후였답니다. 

야외결혼식에 안성맞춤인 주일 오후를 택한 신랑, 신부 애들의 안목이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랜 이 동네 벗이 아들을 장가 보내는 날이었답니다. 

모처럼 만난 얼굴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미는 아이들과 두 아이들을 키운 가정을 축복하는 마음들을 나누며 즐거운 주일 오후 한 때를 보냈답니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요. 

이제 곧 맞이 하게 될 자기 아이들의 결혼 이야기, 부모 또는부 나 모의 건강 이야기, 그리고 곧 맞이 할 은퇴 이야기 등등. 

무릇 사는 맛이 사람마다 다를 일이지만 또래의 고민들을 또래에 맞게 하고 사는 삶도 축복 받은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주일 밤이랍니다.

1과 99 사이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간에 100% 딱 맞아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 100% 없을겝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의 힘이 100%일 경우이겠지요. 그러니까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쪽의 힘이 0여서 100%의 힘을 갖고 있는 쪽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경우일 뿐이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무릇 사람사이의 의견이라는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걸 어느만큼 인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성장도를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SkyEarthMan

0과 100으로 나누이는 사회란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씀입지요. 

그런데 이런 사회를 흔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스”같답니다. 

특히 종교, 정치, 남북 뉴스 에서 말입니다. 

무릇 0과 100으로 나누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답니다. 

다 썩은듯한 우리나라(미국)도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랍니다. 

우리나라(미국) 그러니 “뭐, 이런 놈이 있나?”하는 분들도 계실겝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광선선생(대단한 양반 아니고요. 그냥 저처럼 세탁소하신답니다.)께서 가르쳐 주신 거랍니다. 

“내가 사는 곳은 ‘우리 집’입니다. 내가 밤이면 늘 편히 잠을 자는 곳입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내 이웃들이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지요. 바로 미국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계 이민들이 여기서 헷갈립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자! 이쯤.

열린 맘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무릇 열린 맘의 첫 걸음은 0과 100이 아니라 1과 99 사이에서 서로가 맘껏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아닐까요?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round table모처럼 반가운 선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했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이해의 폭이 엇비슷한 이들이랍니다.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등에 사는 지리상으로는 가까운 이웃들입니다만 일년에 한 두어차례 만나면 자주 보는 폭이랍니다.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의 단골메뉴들은 건강이야기, 음식이야기, 우리나라 이야기(미국), 조국 이야기(남, 북), 평화, 민족, 통일 등등 자잘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거대 담론까지로 이어진답니다. 

그리고 모여 작은 계를 함께 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계의 형태랍니다.

일반적으로 계란 먼저 돈을 탄 이들이 이자를 내고 나중에 타는 이들은 이자를 받고하는 구조이지만 우리들의 계는 이자는 내지만 이자돈은 받지 않는 계랍니다. 

1번 계돈을 받는 사람도 마지막 계돈을 받는 사람도 받는 돈은 똑같답니다. 다만 먼저 타면 이자를 순서에 맞추어 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자를 모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는 것이지요. 

제법 새 일을 할 만한 돈이 모여 비영리 단체로 등록도 마치었고, 오늘 모임을 통해 한걸음 썩 나아갔답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가 한마디랍니다.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우리들을 이해해 준다면… 우리들의 일이 헛되지 않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