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임 – 새 부족(部族) 2

(당신의 천국 – 열 세번 째 이야기) 

이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을 했을 경우에 피신하도록 지정된 성읍들이다. 그들은 회중 앞에 출두하기까지 피살자의 앙갚음을 할 근친의 손에 죽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 20: 9, 공동번역)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의 일입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버스를 타고 좌석에 앉았다가 체포되는 일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흑인 해방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타는 버스를 탈 수 없다는 당시의 몽고메리시 법안에 대해 항거하는 일에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있는 시대에서 보자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느껴지지만 고작 오십년 전의 일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함흥냉면

제가 냉면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 본 것은 대학을 막 입학하고 나서의 일입니다. 학교 앞 식당에서였습니다. 

그 때까지 저희 집에서는 어머니께서 냉면이라는 국수를 만들어 주신 적이 없었답니다. 한남동 토박이 경기도 사람이었던 어머니에겐 냉면은 타지의 음식이었을 뿐입니다. 어쩜 그 당시까지 어머니는 냉면을 전혀 모르시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냉면은 이북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토속 지방 음식의 벽이 허물어진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6.25 전쟁입니다. 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마구 섞이게 되면서 지방 토속 음식 문화 역시 한정된 지역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지역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사건이 발단이 되어 역사의 흐름이 바뀌거나 전쟁이나 천재지변이라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경험은 인류 역사 가운데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이나 제가 처음 먹었던 냉면의 경험처럼 말입니다. 

히브리족이 가나안에  정착하는 처음 이야기들을 보노라면 바로 이러한 바뀌는 경험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섞임입니다. 

히브리족이 들어간 가나안에는 이미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야훼라는 신의 깃발 아래 뭉쳐져 침략(? – 원주민의 관점으로 보자면)한 히브리족 보다 먼저 그 땅을 차지하며 살았던 그 땅의 본래 주인인 셈입니다. 가나안족, 모압족, 미디안족, 블레셋 등등 숱한 그 땅의 먼저 주인들이 도시국가나 부족국가 또는 왕권국가로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히브리족을 기다리며 “어서오십쇼”하고 반기는 아무도 없는 땅이 아니라 이미 살던 주인이 있는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족이 그 땅에 있던 원주인들을 밀어내고 새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정의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이름으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하는 히브리족은 가나안 도시와 성을 하나 하나 점령해 나갔던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히브리족에서 이스라엘족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답니다.  바로 도피성을 기록한 저 위에 인용한 여호수아서 기록에서 그 단면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속에 들어 와 몸붙여 사는 사람이…”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는 무리들과 원래 그 땅 가나안에 살았거나 다른 지방에서 유입된 무리들이 섞인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여호수아와 판관(사사기)의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 부족 동맹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들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 계약의 중심엔 역시 야훼 하나님이 있는 것이고요. 애굽으로 부터 온 노예 무리인 히브리족과 본래 가나안 땅에 살았던 종족, 그리고 타지에서 흘러 들러 온 종족들이 야훼 이름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

다름(Difference) – 새 부족(部族) 1

(당신의 천국 – 열 두번 째 이야기) 

야훼의 종 모세가 죽은 다음이었다. 야훼께서 눈의 아들이자 모세의 부관인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 종 모세가 죽었다. 그러나 너는 이제 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떠나 이 요르단강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 가거라. 너희 발바닥이 닿기만 하면 어디든지 그 곳을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여호수아 1: 1-3, 공동번역)  

이제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뒤로 하고 여호수아와 사사기(판관기)를 중심으로 한 주간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광야 시대를 접고 야훼 신이 탈출 무리들인 히브리족들에게 주마고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끝내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한 달에서 한달반 사이면 충분히 들어 갈 수 있었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삼십 년 한 세대보다 더한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세를 비롯한 탈출 1세대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성서는 카데스 땅에서 있었던 히브리족들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리 되었다는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민수기 20장, 신명기 1장을 읽어 보시길) 

그리고 이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가나안을 정복해 나가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성서 여호수아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을 부족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한마디 여담을 드립니다. 얼마 전 제 가게 손님과 아내가 나눈 대화입니다. 

아내 : 많이 피곤해 보여요.

손님 : 어제 밤에 잠이 안 와서 혼났다구. 거의 잠을 못잔 거 같애. 그래서인지 아주 피곤해.

아내 : 아, 그럴 땐 저는 성경을 읽으면 그냥 잠이 오던데요.

손님 : 아이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해지. 다음엔 나도 꼭 그래야겠네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읽기에 좀 졸린 부분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 이르면 흥미진진이랍니다.  마치 삼국지를 보는 것 처럼 땅따먹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삼국지 이야기 좀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삼국지 몇 번이나 읽어 보셨는지요?  제가 어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이상 읽었던 책들을 꼽자면 성서, 삼국지, 수학 1의 정석 등이 생각난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중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었다는 말은 100% 거짓말이랍니다. 제가 삼국지를 네 다섯번 읽은 것은 사실이랍니다. 그런데 진짜 제가 읽은 것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소설책일 뿐 삼국지(三國志)라는 역사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은 전혀 없답니다. 

역사서 삼국지는 중국 서진 나라의 진수라는 이가 쓴 서기 184년의 후한 시대부터 280년 진나라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96년 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 이렇게 총 65권으로 된 책이랍니다. 

특히 삼국지 위서(魏書) 마지막 책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부여, 고구려 등의 한반도 나라들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당연히 이 역사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위나라이고, 위나라를 세운 조조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으니까요. 

거기에 비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한참 뒤인 1522년 명나라 때 나관중이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이랍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유비와 제갈 공명이지요. 

삼국지연의는 소설이니까 당연히 역사적으로 있지 않았던 사실이나 사람들이 많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역사책 삼국지는 한 번도 다 읽어 보지 못했지만 삼국지연의는 몇 번이나 읽었던 고로 제 머리 속에 실제 상황인 것처럼 남아있는 사실은 소설 속 이야기들인 셈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돌아가 보는 히브리 족의 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 일이란 실제적 사실과 고백이 반드시 똑 같을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더더우기 신앙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서는 실제적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따지는 일은 실로 무의미한 일이 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족의 가나안 땅 정착과 그들이 왕을 세워서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모습을 돌아보는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의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서 읽으며 마치 야훼 하나님의 약속처럼 여호수아가 앞장 선 무리들이 거의 일거에 가나안을 점령하고 12부족이 그 땅을 나누어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꼼꼼이 다시 들여다보면 매 순간 순간, 매 장면마다 우리들이 한번 곱씹어야만 할 장치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답니다. 

바로 사실과 고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백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을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기록자들의 노력을 읽게 된답니다. 

가나안 정복 이야기인 여호수아와 사사(판관)기를 통해 그 이전(광야 시대)과 그 이후(가나안 정착 시대)의 완벽한 다름 곧 차이는 민족의 이름이 바뀌는 것입니다. 

히브리족에서 12지파 부족 공동체인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잇겠습니다.

뿌리– 약속 6

 (당신의 천국 – 열 한번 째 이야기)

위서(魏書)에 이런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계서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불렀는데 요(堯)나라와 같은 때였다고 한다. – 중략 –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1908살이었다고 한다. – 삼국유사에서

오늘은 역사 이야기 좀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제 이야기의 방향을 좀 알고 계시는 것이 이 연재 글을 계속 읽기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한 까닭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두 가지의 확실한 믿음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오늘이라는 ‘시간’과 각자가 발딛고 있는 현장인 ‘여기’에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이요, 두번째는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반드시 꼭 들어가기 때문에 죽음이란 단지  삶의 한 과정이다라는 믿음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물론 이런 제 글쓰기는 제 자신이 누가  뭐라하던 예수쟁이라는 확실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하는 작업입니다. 나아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제 신앙적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자! 오늘의 글로 돌아가지요. 역사이야기입니다.

먼저 한국 역사 조금 둘러 볼까요.

단군1

단군신화가 있지요. 기원전 2333년의 일이라고 이야기하지요. 학교에서 배웠던 인류역사에서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의 일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기록에 처음 나오는 것은 중국의 ‘관자’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실제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700 – 800년이 아닐까 하는 추정들을 한답니다.

그리고 부여라는 나라가 세워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5세기경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으로 알려져 있답니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에 자리 잡았던 삼한이 있습니다. 세개의 한나라 곧 마한, 진한, 변한이 세워진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기원전 4세기 정도로 본답니다.

그러면 실제 역사 기록에 나와있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 신라는 서라벌, 계림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다가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쓴게 기원 후 307년이랍니다.

자! 이쯤 생각해 봅니다. 기원이라는 말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했다는 것 아시지요.

예수가 이 땅에서 살았던 시기는 우리나라 삼국시대가 막 시작하던 무렵의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습들이 좀 다르잖아요? 어떻게 다른가요? 머리 속에 다른 상상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당신의 출생지에 따라 그 모습들이 달리 그려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일테면 경상도 출신인 당신이 그리는 백제나 신라의 모습, 또는 전라도 출신인 당신이 그리는 신라나 백제의 모습, 그도 아님 서울(신촌이지만 엄밀하게 경기도) 출신인 제가 그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습 – 아마 조금씩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통일신라가 되고 다시 후삼국 시대로 이어지다가 불교의 전성시대였던 고려시대가 약 500년, 이조시대가 뒤를 이어 약 600년입니다.  그리고 일제를 거쳐 해방,  남의 역사, 북의 역사가 따로 있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거의 남일터이니, 6.25, 4.19, 5.16, 유신, 5.18, 3당 합당,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등의 대통령 시대로 이어져 온 것이지요.

또 이즈음엔 다문화 가족이 많아서 배우자가 자란 환경이 또 다를 것이고요.

한민족이라고 불리우는 한반도 출신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또 만일 내가 삼국시대나 이조시대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요?

이쯤 중동으로 넘어가서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쭉 훑어 보지요.

창조설화가 있고 아브라함 등의 족장 설화에 이어져서 모세가 나옵니다. 기원전 1500- 1300년 사이에 일어난 일로 알려져 있답니다.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때입니다.

히브리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12부족 중심의 신정체제 공동체가 사사시대라는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 사울 시대는 기원전 1000년쯤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울, 다윗, 솔로몬 단지 세 왕의 시대를 지나자마자 남북으로 갈라집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시리아에게, 남쪽 유대는 568년 바벨론에게 침공을 받고 무너집니다.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랍니다.)

약 30년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다시 그 땅으로 돌아오는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돌아와봤자 그 유명한 알렉산더대왕에게 다시 망하고 뒤이어 로마의 속국이 되었지요.

그리고 예수가 그 땅에 임하고, 기원후 66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후 세계 각처로 떠도는 민족이 됩니다. 그렇게 나라없이 살다가 1948년 지금의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건국합니다.

이제 지루한 역사 이야기를 거두고 오늘의 이야기 핵심을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든 한국이든 역사적 경험에 따라 그 시대의 생각들이 달랐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라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모습이 달랐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싯점인 모세의 광야시대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그들을 인도하는 오늘이라는 시점과 가나안이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 숨쉬며 사는 하루 하루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연장을 맞는 것은 자신들의 아들 딸이었습니다. 삼대, 사대에 걸친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 후의 천당의 모습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일컬어 히브리적 사고라고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이해입니다.

구약의 상당부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나중에 이어지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와 그를 설명하는 바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쉽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모세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나아가 모세 이야기가 주된 신앙의 조건인 유태교와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한국계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며 한가지 아주 중요한 모세와 그 시대 히브리족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인류 역사상 그 누구와 비교해도 모자랄게 없는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바로왕과는 뛰어난 협상가였고, 지팡이 하나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었으며, 백만 명이 넘는 무리를 사십년 동안 광야를 인도한 지도자였으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계약 중재자였고, 율법을 제정한 법률가였으며, 전투에서는 최고의 지휘관이었고, 제사장을 임명하는 절대 종교 권위자였고, 백성들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관인 동시에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예언자였습니다.

실로 거의 신의 반열에 이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당시 주변의 대다수 나라들이 왕을 세우고 있었지만 모세는 결코 왕이 아니었습니다. 왕은 야훼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족의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가나안에 들어가 다윗왕권이 세워질 떄까지 이어진답니다.

하나님의 직접 통치시대인 셈입니다.

저는 이 시대를 우리들이 누리고 가야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의 첫번째 모형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절대 복지가 이루어지는 사회,  공평이 정의가 되는 사회, 사회적 약자가 이해되고 거두어지는 사회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믿음입니다.

이제 가나안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제 이야기는 앞으로 가나안의 이스라엘 부족동맹, 왕국시대 또는 예언자시대, 포로시대, 귀환시대, 신구약 중간시대, 예수시대, 성령시대 – 바울, 초기 교회, 교회시대, 한국교회, 우리들 그리고 나와 천국의 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계약 – 약속 5

(당신의 천국 – 열번 째 이야기) 

이스라엘의 희망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의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유태인들을 괴롭혀온 참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최근사 아우슈비츠와 그 외의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근절되고, 탈출할 수 있는 모든 출구가 닫혀진 것처럼 보였던 나치 횡포의 무시무시한 시절까지도… (John Macquarrie  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십계명과 율법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상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과 모세 오경이 쓰여진 시대가 언제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이미 제가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실제 모세가 기록을 한 것이든 후대에 편집된 것이든 제가 지닌 생각과 믿는 신앙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보다 크게 일하시고  우리들의 머리속 능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이 큰 것을 품으시는 신의 세계를 이해하면서 믿으려면 우리들의 생각이 보다 합리적인 게 옳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모세 오경 및 십계명을 비롯한 초기 율법에 대한 기록은 이야기(설화)와 몇가지(주로 J, E, D, P라고 이름지어진 네개의 문서를 위주로 한) 문서들로 따로 전해 오다가 출애굽이후 약 6-7백년 뒤에 문서 곧 모세오경으로 틀을 잡았다는 것이 많은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라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까지 이르는 기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들을 옳게 이해하고 우리들이 바르게 배우고 생각하며 믿기 위해서 이런 학문적 사실들을 먼저 소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은 출애굽이후 광야에서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 사이에 맺은 약속의 원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기타 제사, 사제들의 법규, 사회경제적인 관습법, 여러가지의 종교적 법률들은 시내산 광야에서 맺어진 것이라기보다 그 후 수 백년간의 경험들을 토대로 후대에  그 민족이 약속으로 고백한 것이라는 게 제대로 된 이해일 것입니다. 

조금 쉽게 예를 들어 말씀드리지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한 게 139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칠백년이 좀 넘은 때의 일입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요즘말로 하면 성공한 구테타를 일으켜 집권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테면 위화도에서 어떤 신의 계시를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이성계가 말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런 기록을 명확하게 남겨 놓았다고 합시다. 

칠백년 동안 한반도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백성들이 그 기록과 계시는 만들어진 것이고 거짓이었다고 주장하고 한 쪽에서는 아니다 하고 싸웠다면 제 아무리 이성계가 받은 계시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칠백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이 사실로 믿고 있을까요? 

그와는 반대로 이성계가 받은 계시와 기록이 명확한 거짓이고 사실이 아님에도 칠백년 동안 한반도에서 산 사람 누구나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믿고 고백하고 살았다면 어떠 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이성계가 받은 계시와 기록도 사실이고 모든 민족들이 역사를 이어가며 사실이었다고 고백을 했다면? 

자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어떤 경우의 수가 확율적으로 높을까요? 

히브리족의 후예들은 확율적으로 가장 낮은 모두가 사실이라는 야훼신이 하신 일이라는 믿음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언제 그것을 기록했느냐는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10계명

자! 이쯤 그 무렵의 유사한 법전이나 규율과 십계명이 근본적인 차이 곧 완연히 다른 모습 두가지를 말씀드리지요. 

첫째는 일반적인 고대사회(탈애굽시대를 전후 한 때)의 법전이나 규율들은 이미 왕권화 되었거나(왕이 나라를 나스리는 국가체제)  계급화된 사회로 접어들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글에서 우리들이 읽어 보았듯이 “어떤 나쁜 짓을 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된다.”는 형벌의 원칙이 세워져 있답니다. 

그런데 히브리족과 야훼사이에 맺은 것은 법전이나 규율이라고 정의내리기 보다는 계약이라는 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신과 사람 사이에 조정 가능한 계약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형벌의 원칙이 없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 집을 탐내지 말라.는 등의 “말라” 하는 규정은 있지만 “하면 이런 벌을 받는다”는 규정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차이인지 아직 모르시겠는 분들은 제 바로 전 글 “불변”을 참조하시길) 

두번 째 일반적 율법 정신 바탕입니다. 이른바 신명기 법정신입니다. 

철저히 약자 보호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였던 히브리족을 해방시켜 주신 야훼의 줄기찬 선포이자 신의 법정신입니다. 

노예였던 히브리족을 해방시킨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족을 향하여 줄기차게 너희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살피고 돌보라는 명령을 내리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정신의 바탕에는 강자인 신 곧 야훼가 약자인 히브리족 곧 사람인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사람 사이에서 통하게 하라는 명령이 깔린 것이지요. 

신이 사람이 된 세상이 아니라 사람을 신으로 끌어 올리려는 세상을 꿈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3500여년 전 히브리 노예족이 만난 신이었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과 맺은 계약이 바로 십계명이지요. 

저도 이젠 가나안 이야기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광야에서 두어번 더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불변(不變)– 약속 4

(당신의 천국 – 아홉번 째 이야기)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출애굽기 3: 13-15, 공동번역) 

세상이 바뀌는 속도는 해가 갈수록 빨라집니다. 특히나 지난 이십 여년간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바꾸어 놓은 사람들의 일상은 가히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통이었던 세대간의 소통은 바뀐 언어 습관으로 인해 이젠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통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세대들도 젊었던 시절엔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비하면 그 간격이 그리 넓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이제는 이즈음 젊은 세대들의 사고와 생활행태를 이해하기 힘든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런 21세기 문명의 시대에 느끼는 제 감정은 그대로 3000여년 전에 살았던 노인들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것이었답니다. 그 당시의 노인들이 그즈음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록이 남아 있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상은 바뀌어 가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거의 바뀌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본성입니다. 

몇 가지 기록들을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르남무의 법전(法典, Code of Ur-Nammu)이라는 현재 알려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법전입니다. 기원전 2100년에서 2050년 사이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1952년에 발견된 이 법전은 총 57개항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입니다. 

1.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사형되어야 한다.

2. 절도를 하면 사형될 것이다.

3. 어린이를 납치하면 그는 수감되고 은 15 쉐켈을 치러야 한다.

4. 또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하고, 젊은이의 처녀 아내를 겁탈하면 그들은 그 남자를 죽일 것이다.

5. 남의 아내가 다른이를 따르고 동침하면, 그들은 그녀를 처형하지만 그 남자는 놓아줄 것이다.

6. 다른 이의 눈을 상해하면 은 1/2 미나를 물어야 한다.

7. 다른이의 이빨을 부르뜨리면 은 2쉐켈을 지불해야 한다.

8. 증인이 위증을 하면 은 15 쉐켈을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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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우리들이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배운 함무라이 법전입니다. 함무라비왕(1792∼1750 B.C.)이 만들었다는 법전입니다. 나중에 발견된 수메르의 우르남무의 법전보다 300여년 정도 후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우리 세대가 학교에서 배운 게 사실이 아닌 것이지요. 아무튼 그 함무라이 법전에 나오는 것 몇 가지 보지요. 

1.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2.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3.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4.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5.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6.     농민이 과수원을 소작하면 수확의 2/3를 주인에게 바친다. 만약 수확고가 줄어들면 그 책임을 농민에게 돌려 소작지 주변의 수확고 표준에 따라 농민에게 소작료를 바치게 한다. 

세번 째는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에 법률이었던 팔조지교(八條之敎)입니다. 팔조법금(八條法禁)이라고도 불리우는 여덟개로 된 법률인데 그 중 세가지 조항만 중국의《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세가지 항목입니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해(傷害)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3.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단, 자속(自贖)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기원전 1000여년 전후부터 내려온 법률로 알려져 있는데 고조선 후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법률 조항들이 60여개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기적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인, 절도, 강도, 강간, 위증 등의 죄는 단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법령등이 예나 지금이나 그 규제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끊이지 않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알아보려고 하는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 간에 시내산에서 맺은 계약과 율법들 역시 이런 고대 법전들과 얼핏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고대의 법전들과 히브리족의 율법 사이에 확연히 다른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계약의 당사자들 즉 율법 제정자와 그 규율의 제재 아래 놓인 사람들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그 율법 제정의 밑바탕 정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본성을 규제하는 똑같은 법률이지만 그 제정자와 그 제정 정신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 다름에 대한 이야기는 또 내일 잇기로 하고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장면이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맨 위에 인용한 성경구절) “나는 곧 나다”라는 선언이지요. 그리고 이어서“야훼”라는 이름을 알려 줍니다. 

야훼 또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들이 구구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해석은 “ 지금 나(우리)와 함께 있는 그가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 개인적으로 제가 드리는 기도의 첫문장은 늘 “여호와,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랍니다. 

그럼 또 다음 글에서….

갑과 을 – 약속 3

(당신의 천국 – 여덟번 째 이야기)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출애굽기 20: 1, 공동번역) 

노벨상의 계절입니다. 이맘 때이면 늘 한국계 가운데 수상자가 나오기를 소원한답니다. 물리나 화학, 경제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문학부분에서 이제 한 명 정도 나올만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노벨상하면 유태계가 대세이지요. 현재까지 역대 수상자 가운데 유태계가 35%에 달한다고 하지요. 경제학상에 이르면 65% 정도 된다고 하고요. 

미국 경제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들은 거의 유태계라는 말이 있을만큼 유태계의 힘은 막강하지요. 심지어 수년 전에 대한민국 서해 바다에서 일어났던 천암함사건에도 이스라엘 잠수함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그것이 사실인지 낭설인지는 모르겠으나) 전세계에 그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자들도 많고 천재들도 많은 유태인들의 교육과 축재 방법들에 대한 책들도 전세계적으로 넘쳐나지요.

 그게 엄청 부러웠던지 자칭 타칭 식자(識者)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 우리 한국계를 일컬어 동양의 유태계라고 하는 이야기나 글을 말하거나 쓴 것을 듣거나 볼 때면 쓴 웃음을 짓곤한답니다. 

유태인들의 잘난 모습만 보면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들의 숫자는 대략 1700만 정도라고 이야기들 합니다. 최근세사에서 나치정권 아래서 학살 당한 유태인들의 수는 600만 이라고 하고요. 

우리들이 지금 이야기하는 출애굽 시점인 3500여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태인들 가운데 똑똑하고 잘나고 떼부자였던 사람들의 수보다 수 천배, 수 만배, 아니 수 백만배의 사람들이 자기 나라 땅이 아닌 떠돌던 땅에서 진짜 맥없이 이름없이 죽어 간 족속이 바로 유태인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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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붕 위에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이나 앤소니 퀸의 영화 “25시(The 25th Hour)를 보셨거나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들의 모습을 그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똑똑하고 잘나고 엄청 떼부자이거나 맥없이 이름없이 죽어갔거나 그 모든 유태인들의 조상 히브리족과 야훼 하나님이 계약을 맺는 35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무릇 모든 약속이나 계약은 상대방이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자기 스스로 혼자 하는 약속도 있고 계약도 있겠습니다만 이 경우는그 결과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거나 판단할 방법은 없는 것이지요. 다만 이 경우에도 자신을 객관화 시킬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따라 그 약속이나 계약 이행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여러 과학적 검증들이 확인시켜 주고 있지요. 

3500여년전 시내산에서 맺어진 야웨신과 히브리족 간에 약속 곧 계약은 오늘날 모든 계약이나 조약 또는 일반적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갑(甲)”과 “을(乙)”의 정의로  시작됩니다. 

계약과 약속의 한 축인 갑(甲)이 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정의(定義)와 또 다른 한 축인 을(乙)이 된 히브리족의 정의가 계약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갑인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히브리족을 해방시킨 해방자이고요, 을인 히브리족은 노예였다가  갑에 의해 해방된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갑, 을 관계의 정의에 의해 맺어진 계약이 바로 십계명을 비롯한 하위의 율법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조상은 노예였다. 그리고 내가 해방 시켰다.”는 이 명제는 지난 3500여년 동안 유태인들을 지탱시켜준 지주인 것입니다. 

“내 뿌리는 노예였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께서 나를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는 고백은 우리들이 오늘 누릴 수 있고, 죽어서 가게 될 천국 곧 하늘나라에 이르는 구원(救援) 역사의 원형이 되는 고백입니다.  

유태인들이 자그마치 이천여년 동안을 남의 나라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도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첫번 째 요인은 바로 “을”이었던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45년 해방의 경험이 고작 70년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격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식민지 노예였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정당화하는 2013년 오늘날 교학사 역사교과서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극히 일부 철딱서니 없는 부류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을”의 처지를 간직하고 역사를 이어 온 족속이 바로 히브리족이랍니다. 

디아스포라 곧 흩어지고 나누어지고 퍼져나가는 자신의 고향 땅을 등지고 삶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의미의 이 말이 유태인들과 연결되어진 역사는 정말 오래된 것입니다. 바베론 포로 시대부터 따진다면 자그마치 2600여년이 넘은 일입니다. 

한민족과 디아스포라가 연결된 일은 고작 백 년 전일입니다. 간도로 나갔다가 조선족이 된 이들 블라디보스톡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고려인이 된 이들, 징용 등의 수단에 의해 재일동포되어 버린 이들 – 바로 일본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한인들입니다. 

제 나라 땅에서 먹고 살 만한 처지에 있는 배 부른 놈들이 제 뱃속 더 불려보자고  식민지 식민이었던 제 조상의 역사를 뒤바꿈질하려는 소식들을 듣노라면 일제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백만이 넘는 한민족들을 이렬로 세워 그 한가운데를  걸어가게 하고 싶습니다. 그 길을 걷는 그들에게  양 귀싸대기를…  

신(神) 앞에서 갑과 을의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고  이해하고 어느 순간에도 잊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일이 바로 천국으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된다는 이야기의 시초쯤 된다는 이야기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이제 그 약속의 뜻, 약속의개념이랄까 본질이랄까 아무튼 그 약속에 어떤 뜻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권유 – 약속 2

(당신의 천국 – 일곱번 째 이야기)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 5-6)

백성들은 일제히 “아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출애굽기 19:8)

구약 성서 전체의 내용을 정말 짧게 요약한다면 위에 인용한 두 성경 구절이 될 것입니다. 

야훼 신과 히브리 민족간에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잘 이행되던 때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히브리족들이 겪는 일들과 그 겪고 경험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고백했느냐에 대한 기록이 바로 구약 성서입니다. 

아무튼 노예 처지에서 이즈음 아이들 말로 하자면 꿈도 없이 개고생하던 히브리족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모세의 말을 믿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이후 사십년 동안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비록 모세가 대행을 했을망정 이들을 다스린 이는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제일 마지막인 신명기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모세가 야훼의 사명을 띠고 에집트 땅으로 가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온 땅에 행한 것과 같은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처럼 강한 손으로 그토록 크고 두려운 일을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이루어 보인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는 곧 야훼 하나님의 대행자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애굽 탈출 후 석달 째 되는 초하룻날, 탈출무리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민족간에 계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른바 율법이라는 약속이 신과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500 여년이 지난 지금, 오늘 여기(지구상 어디에 있건간에 )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연관되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물론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고 믿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거나 또는 지금 오늘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거나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분이라면 분명 연관이 되어진 약속입니다. 상관없는 분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부분은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다름의 차이입니다. – 요거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 고딕처리합니다. 따로 상당 부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자! 간단하게 요약하면 “개고생하던 너희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 세상 천지에서 제일 잘 살고 멋진 무리로 만들어 줄려고  하는데… 그 곳으로 데려가기는  데려가는데 그렇게 될려면 요것들은 나하고 약속해야 되거던…. 이제 어쩔래?”하고 묻는 신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말이지요. “당근이지요. 그걸우리들이 왜 약속하지 않겠어요? 손가락걸고 약속할께요!”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약속들을 했을까요? 바로 모세 오경이라고 일컬는 성경의 다섯 책 가운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네 권의 책들이 바로 그 약속들에 대한 기록이랍니다. 한번들 시간내서 읽어들 보시길 권합니다. 천국같은 삶을 살려거나 죽어 천국을 가려면 말입니다.(필요 충분조건은 아니랍니다. 꼭 읽어야만 된다는 조건이 아니라는 말씀)) 

저는 그 약속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왜 그런 약속을 해야했는지라는 원인, 그리고 그 약속들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전에 단 한분이라도 읽는 이들을 위해 권유와 당부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읽는 이들의 시간과 생각을 절약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남의 시간 도둑놈이 되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왈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어지는 제 글을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교육되어지고 믿는 환경에서 그렇게 믿는 분들은 그렇게 믿다가 믿는 천국으로 가시는 것이 훨씬 편하고 바람직하다는 제 생각 때문입니다. 

성서의 무오성(성서는 한 점도 오류가 없다는 믿음), 문자적 영감(성서의 문자 하나 하나 모두가 신이 주신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믿음)에서부터 모세 오경의 모세 저작설, 더 크게 나가자면 동정녀 탄생, 예수의 기적, 육체의 부활 등등을 문자 그대로 믿는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 보다는 그 믿음대로 믿고 기쁨으로 사시는 것이 천국에 가까울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믿기는 하는데 죽어 가는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믿는 구원의 확신, 나아가 오늘 하루 사는 기쁨이 없는 분들이시라면 조금 거슬리더라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시기를 권유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바로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오늘 하루 누리는 참 기쁨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고자 함이요 나아가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모세오경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썻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애둘러 드린 것입니다. 복음주의니 근본주의니 하는 여러 드릴 말씀은 차고 넘치지만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하도록 하고요, 모세오경은 대략 기원전 7-8세기 경에 쓰여진 것이라는 게 학문적인 믿음이랍니다. 

애굽탈출이 기원전 15세기 경 정도였으니 대략 사건이 일어난 지 칠, 팔백년 이 지난 후 입에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모아 만들어진 책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썻고, 언제 썻느냐를 알아야하는 까닭은 바로 “약속”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위해서랍니다. 

오늘 이야기를 대충 끝내려다가 문득 제 머리를 치는 생각 하나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2007년 남북대화 정상 대화록 사건입니다. 이른바 NLL 사건입니다.(여기서부터는 안 읽어도 제 이야기의 주제를 아는데 아무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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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년 전에 있었던 기록물에 대한 사건입니다. 

혹시 지금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대화록 전문을 읽어 보신 분들이 계시는지요? 물론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다 읽어 보았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읽었답니다. (대화록 전문보기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00816

처음엔 그냥 죽 한번 읽었는데 약 한시간 이십 분 정도가 걸렸고요. 두번 째는 찬찬히 시간 따지지 않고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읽어 보았답니다. 

읽고 난 후의 제 생각이랍니다. 두 양반 모두 한 시대를 이끌만한 분들이었다는 생각, 노무현 대통령이 좀 더 준비를 했었고 뛰어났었다는 생각이었고요. 왈  NLL 포기라던지, 굴욕이라던지 하는 한국내 일부 보수 언론들의 보도나 새누리당 등의 주장등은 참 터무니 없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마구 밀어 붙일까요? 

딴 거 없답니다. 다 까서 발겨도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너나없이 먹고 살기 바쁜데 한 두시간 동안 꼼작않고 앉아서 그거 읽을 사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설혹 읽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두가지 부류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두가지 부류란 바로 어차피 내 편이 될 수 없는 사람들과 내 편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인데요. 진실을 아는 두 부류 가운데 어차피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소수라는 것이고요, 진실을 알아도 내 편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알아보았자 그 뿐이라는 자신감에서 참 우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요. 

이쯤 역사이래 가장 많이 찍고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고, 팔린 부수에 비해 가장 안읽는 책도 성경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뭐 이런 이야기가 제 이야기의 본류의 아니니 대충 접고요. 

모세오경에서 시작되는 약속 가운데 이런 류의 사건에 대한 경고도 있기에 드려보는 이야기랍니다. 

자! 그 약속들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대충 서너번에 걸쳐 이어집니다.

악몽 – 약속-1

(당신의 천국 – 여섯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출애굽기 3:7-8. 공동번역) 

아직도 징병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군복무를 마치게 마련입니다. 군복무에 적응할 수 없을 정도의 심신허약자이거나 사회부적응 경험이나 판단으로 징역형을 받았거나  국가가 면제하는 조치에 해당되는 자가 아닌 정상적인 젊은이라면 누구나 일정기간의 군복무를 해야만 하지요. 물론 군복무를 직업으로 선택할 수도 있지요. 

근데 내노라하고 이름이 알려진 이들 가운데  제법 많은 이들이 군복무 경험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답니다. 왈 특권층이지요. 아마 그런 사람들은 이런 꿈을 꾸어 본 경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꿈이냐고요? 

10-7

징병제도 아래서 군대를 다녀 온 이들이 꾸는 아주 전형적인 나쁜 꿈 바로 악몽은 군대 다시 끌려가는 꿈이랍다. 분명히 제대를 했는데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하여 다시 새롭게 군복무를 해야만하는 꿈을 꾸는 것이지요. 이런 꿈을 꾸다가 깨고나면 정말 기분 더럽답니다. 

이런 기분을 꾸어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뭐 요즘에야 군 복무 기간이 짧으니, 우리 때와 비하면 두 번 갔다와도 된다고 한다면 아마 지금 군대 복무하는 젊은이들에게 매맞기 십상일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의 만기는 약 34개월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대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은 당시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군생활을 하는 말딴 졸병들이 즐겨 쓰던 말 가운데 “뭣으로 뭉개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살아서 분명히 그 끝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란 제대라고하는 군복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게 종말의 역사관에 대한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제대를 했는데 또 다시 군에 끌려가는 꿈을 꾸다니!  개뿔! 무슨 종말! 

악몽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3500여년전 이집트로 돌아가 봅니다. 

출애굽기 3장 첫 부분을 보면 야훼신이 모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야훼신을 찾은 것이 아니고 야훼신이 모세를 먼저 부른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바로 출애굽기 3장 7, 8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너희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슬픔, 두려움 등등 사람으로서 피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모습을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내주마라는 말이지요. 

약속입니다. 

다시 군대이야기. 

징병제도 아래서 징집기간이 정해지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일테면 일단 징집이 되면 죽기 전엔 나올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징병제가  제대로 실시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징병제는 끝이 보이는 약속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500여년 전 모세에게 야훼가 한 약속은 분명 징집기간을 정해 놓은 약속이었답니다.  바로 가나안이라고 하는 확정된 땅을 약속했다는 말입니다. 넉넉잡아 한 달이나 달 포 반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약속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 약속을 믿고 애굽의 노예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될 것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모세와 히브리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나섰지요. 

그리고 배가 고팠고, 맛난 것도 먹고 싶었고, 목도 말랐었던 가운데  약속의 신이 이런 아픔과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비록 달 포를 넘어 삼개월이 되었을 무렵 “이제부터 시작하는 계약서를 쓰자”라는 야훼신의 요구(십계명 사건)를 무리(민족)들이 이것만이  오직 살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제 바로 도달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 포를 넘어 일년이 지나 사십년이 흐른 후 다달은 땅, 가나안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답니다. 

다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고대하며 걸어 온 사십년의 세월과 그 시간 속에서 맺었던 약속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지요. 

이번 한 주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평등 – 신(神)의 무상급식법-4

(당신의 천국-  다섯 번 째 이야기)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 3-4, 공동번역) 

탈애굽한지 달 반이 지나서부터 탈출 노예부족인 히브리족들은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곁들여진 만나로 차려진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 메뉴는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거저 주는 나라라고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거저 주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 공평한 밥상에 둘러 앉는다는 것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히브리족들에게 보여주신 천국 곧 신의 나라 모습입니다. 

equality-and-diversity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의 수는 당시 군인이 되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만 약 60만이 넘는 무리였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민수기 1:46)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지파별로 수를 셉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11지파의 군대 종사 가능한 인력들의 수를 세고 대표를 뽑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총 우두머리인 모세와 부장이자 최고 참모이자 대변인이었던 아론을 위시한 지도부가 있었고 그 아래로 12지파로 나누인 지파 지대장들과 참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분명 야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권력 소유의 차이가 존재했고, 지위의 차이가 존재했고, 권력 소유와 지위 차이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의 명확한 규정과 책임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한 누구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는 절대 평등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음식의 질 뿐만 아니라 먹는 양에 이르기까지 하루 하루 각자가 배부를 정도까지만 똑같이 먹을 수 있는 무상급식을 신이 베풀었다는 애굽탈출 노예들의 고백이 바로 성서의 기록입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두번 째 모습은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밥상입니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아주 공평한 밥상의 모습을 두군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나 이야기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장 44-46, 공동번역)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3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끝나는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간이 사십년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곧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고 나누는 모습도 한정적인 기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과 광야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신과 히브리족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들과 신약시대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한세대나 두세대에 걸쳐 철저히 믿고 지켜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거니와 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서 사람사는 사회에서 이런 절대 평등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두가지 경우의 절대평등의 모습 이외에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가운데는 유사 절대평등의 노력들이나 시도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과 시도들도 한세대나 두세대를 넘어선 경우는 없습니다. 

이 절대평등의 역사적 경험은  종말론적 삶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기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종말론적 삶의 공동체가 무엇일까? 

우리들이 나누어야 할 다음 이야기입니다. 

신의 무상급식법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밥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짜와 절대평등의 밥상법이랍니다. 

이제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믿음 – 신의 무상급식법 -3

(당신의 천국 – 네번 째 이야기)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년 이민 목회를 담당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월의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 보다가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 이왕이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 종교라고해도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나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나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달 반 쯤 이후에 터져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 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자론자들은 별 뜻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Point of View

첫째는 있는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 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 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 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는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문득 재미난 예가 생각납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확고해 지는 생각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은 참 종교적인 인자의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을 떠올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후보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일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이에 토론 상대인 문재인후보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세금은 더 걷지 않겠다면서 돈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근혜후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한다.” 

그리고 박근혜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행히도 박근혜가 신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왜?”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신처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한(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나 저는 종교적 신앙행위로 해석해 본답니다. 

신앙 또는 믿음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쯤 제 믿음의 방법과 제가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고, 이후로도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