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원 – 예언자 20

(당신의 천국 – 마흔 아홉 번 째 이야기)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예레미야 1 : 6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예레미야 12 : 1 – 2, 공동번역 

‘아무도 전적으로 고립해서는 못산다’고 한 쟌 돈(John Donne)의 명언이 옳다면 오직 우리에게 대한 불가피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 때에만 우리는 참된 실존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매 순간마다 소속 의식을 가지라는 요구가 아니다. 의식해야 될 것은 우리가 현재대로 곧 우리는 전체적인 인간 상황에 참여하는 자로서, 따라서 더불어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노먼 피텐저(Norman Pittenger)의 “사후(死後, After Death) – 하나님 안에서의 삶(Life in God)에서 

겨울이 성큼 다가온 주일 아침입니다. 

주일 아침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어가는 예레미야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봅니다. 그의 예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가 겪었던 삶에 고뇌, 고통, 괴로움들과 그런 아픔들을 어떻게 그가 받아 들이고 살아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바꾸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우리들이 만나 온 다른 예언자들 – 일테면 이사야, 아모스, 미가, 하바꾹 등 –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에게 받은 명령이나 신탁 등을 예언하고 선포하는 일에 거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야훼 하나님의 명령일지라도 묻고 따지고, 때로는 대들기도 합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회의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야훼 하나님께 매인 자로서 자신이 짊어진 짐을 지고 두벅두벅 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입으로 선포하다가 그 입을 막을 때 그는 글로써 예언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쓴 글들이 불살라지자 그는 또 다시 씁니다. 그렇게 죽는 순간까지 그 짐을 내려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때로 구약의 예수로 비유되는 삶을 살다 간 것입니다. 

그런 예레미야는 진정 외로웠던, 외로움을 심히 고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걷는 첫걸음부터 그리 흔쾌히 디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야훼 하나님이 주신 숙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입니다. 

“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 예레미야 1 : 5 

그러자 그가 보인 반응입니다.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 그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기에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였지만 야훼 하나님의 강권과 보여주시는 환상들(살구나무와 끓는 가마 환상)로 인해 예언자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그 길목에서 그가 만난 현실들은 그저 아픔 뿐이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영영 살아날 길이 막혔읍니다. 가슴은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습니다. ‘야훼께서 시온에 안 계시는가? 왕노릇 그만 하시려고 물러나셨는가?’ 이렇듯이 내 딸,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 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어찌하여 남의 나라 허수아비를 들여다가 섬기며 내 속을 썩여 주느냐?”  “여름도 지나고 추수도 끝났건만 우리는 이제 살아 나갈 길이 없읍니다. 

“내 딸 내 백성이 치명상을 입었는데 전들 어찌 아프지 않겠읍니까? 앞이 캄캄하고 마음은 떨립니다.  길르앗에 약이 떨어질 리 없고 의사가 없을 리 없는데, 어찌하여 내 딸, 이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합니까?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 예레미야 8 : 18 -23 

뿐만 아니라 그는 몸에 병을 얻기도 하고, 그런 그를 비웃거나 심지어 죽이려는 세력을 만나기도 합니다. 

“야훼여, 저를 어루만져 주시어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십시오. 저를 붙들어 주시어 성한 몸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 한 분만을 기립니다. 이 백성이 저를 비꼬아 말합니다. ‘야훼가 엄포를 놓더니, 어찌 되었느냐? 그렇게 야단치더니 어디 해보시지!’” – 예레미야 17 : 14 – 15 

“그 말을 듣고 이 백성은 수군거립니다. ‘예레미야를 없애야겠는데 무슨 좋은 계책이 없을까? 이 사람이 없어도 법을 가르쳐 줄 사제가 있고 정책을 세울 현자가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가 있다. 그러니 이자를 그가 한 말로 때려 잡자. 이자의 말마디마다 조심하여 듣자’ 고 합니다.” – 예레미야 18 : 18 

그러나 현실은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당당히 나가려는 예레미야의 힘을 번번히 빼 놓을 뿐이었습니다. 

“야훼님, 제가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그 때마다 옳은 것은 하느님이셨기에 법 문제를 하나 여쭙겠읍니다. 어찌하여 나쁜 자들이 만사에 성공합니까? 사기밖에 칠 줄 모르는 자들이 잘되기만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나무처럼 심어 뿌리를 박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군요. 그런 자들은 말로는 하느님과 가까운 체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떠나가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야훼여, 주께서는 제 속을 환히 들여다 보십니다. 제 마음이 주께 있다는 것을 시험하여 보아서 아시지 않습니까? 저것들을 양처럼 끌어다 죽여 버리십시오. 갈라 내었다가 그 날 당장 죽여 버리십시오.  언제까지 가뭄 든 이 땅을 내버려 두시렵니까? 들풀이 다 마르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잘못으로 짐승이나 새가 죽어 없어져서야 되겠읍니까? 어떤 일을 하여도 주께서 보지 못하신다고 저들은 떠들어 대고 있읍니다.”” 예레미야 12 : 1 -4 

착하고 의롭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데, 못되고 불의하고 거짓되고 사기를 일삼는 자들은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 속 현실은 도대체 뭐냐? 나쁜 놈들부터 먼저 죽여야만 되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안하니까 저들이 당신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니냐? 온 세상을 당신 손안에 넣고 계시는 야훼 하나님께서 한번 답을 내 놓아 보아라! 예레미야가 야훼 하나님께 던진 물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응답은 실로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 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편안한 곳에서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요르단강 가 깊은 숲 속에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의 집 식구, 너의 동기들이 너를 헐뜯으며 배신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그들이 정답게 말을 걸어 오더라도 믿지 말라.” – 예레미야 12 : 5-6 

“예레미야야, 네가 알면 뭘 그리 안다고 따지냐? 그저 나만 믿고 네 갈 길을 가라!”는 야훼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인 예레미야가 마주치고 있는 “옳은 사람들이 겪는 불행, 나쁜 놈들이 누리는 행복”이라는현실 속 모든 부조리와 불의에 대한 해결책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닌 삶의 수수께끼 전체 문제의 흐름과 해답은 야훼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인 너는 그 믿음 안에서,  나 야훼 하나님이 내린 명령에 온 몸을 바쳐 따르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야훼 하나님의 응답이 사람인 예레미야의 의문과 질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연이어 야훼께 울부짖습니다. “제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조름이었습니다. 

“야훼여,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원수들이 고발하는 저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 중략 – 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야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벗겨 주시지 마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도 마십시오. 분김에 해치우시어 거꾸러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 예레미야  18 : 19 – 23 

제발이지 나쁜 놈들, 원수되는 자들을 죽여 없애달라는 애원입니다. 이 원수들은 모두 그의 동족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참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동족조차 나쁜 놈들은 다 죽여 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예레미야가 넘거나 뚫지 못할만큼  여전히 높고 단단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인생 전체가 무의미함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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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저는 입을 열어 고함을 쳤읍니다. 서로 때려 잡는 세상이 되었다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였읍니다. 그 덕에 날마다 욕을 먹고 조롱받는 몸이 되었읍니다.” – 예레미야 20 : 7 -8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복과는 거리가 먼 날.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한 그자도 천벌을 받아라.” – 예레미야 20 : 14 – 15 

예레미아의 이 말들은 인생길 막장에 이르렀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거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더는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부터 야훼 하나님이 점지했다고 야훼께서 스스로 선포했었습니다. (예레미야 1 : 5) 이 장면에서 예레미야는 그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했던 모든 이들까지도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 하자면 “나를 낳고 미역국을 끓인 모든 자들조차…”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짊어진 짐과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어떤 신적 체험, 신기한 기적, 신비스런 어떤 징조들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체험한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체험들 뿐이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저나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그 누군가인 당신이 두 발 딛고 사는 세상에서 겪는 인간적인 체험들 말입니다.  저나 당신이 기도하고 바라는 일들에 대한 기적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고, 여전히 고통이나 아픔은 남아 있거나 오히려 깊고 아림이 더 하는 현실들 말이지요. 

예레미야의 예언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카리스마적 인간들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 인간적인,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체험을 안고 그의 사명을 다한 사람입니다. 

이제 그의 예언들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냄새 – 예언자 19

(당신의 천국 – 마흔 여덟번 째 이야기)

그래서 야훼께서 바빌론 왕을 끌어 들이시니, 바빌론 왕은 성소에서 장정들을 칼로 쳐죽였다. 그는 장정, 처녀, 늙은이, 약자 할 것 없이 모조리 쳐죽였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의 손에 붙이셨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 그릇들을 크건 작건간에 모두 쓸어 가고 야훼의 성전 창고와 왕궁 창고를 털어 갔으며 대신들도 바빌론으로 모두 붙잡아 갔다. 하느님의 성전을 불살랐고 예루살렘성을 허물었으며 궁궐들을 불살라 버리고 거기에 있던 값진 것을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느부갓네살은 칼에 맞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붙잡아다가 페르샤 시대가 되기까지 대대로 종으로 부렸다.   이리하여 이 땅은 긴 세월 동안 황폐되어, 밀렸던 안식을 다 찾아 누리며 칠십 년을 채우리라고 야훼께서 예레미야를 시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 역대기하 36 : 17 – 21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십 삼 년 되던 때의 일이었다.   야훼의 말씀은 그 후로도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유다 왕으로 있는 동안, 또 요시야의 다른 아들 시드키야가 유다 왕이 된 지 십 일 년 되던 해의 오월, 그의 통치가 끝나고 예루살렘 시민이 포로로 끌려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 예레미야 1 : 2 – 3, 이상 공동번역 

우리에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따르면 이같이 우리 히브리국가는 두 번씩 유브라데강을 넘어 포로로 잡혀가는 비운을 겪으면서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0권 9장에서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때 제가 가장 매료되었던 사람이 예레미아입니다. 제 나이 푸르던 때의 일입니다. 예레미아서와 애가를 읽고 또 읽고 했던 때가 있었답니다. 

예레미야를 읽다가 보면 정말 사람 냄새가 그득하답니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의 냄새가 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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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예레미야는 좀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겁도 많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는 눈물샘이 말라 울수 없을 때까지 울었던 사람입니다.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예레미아 8 : 23” 

그는 자기를 못살게 구는 자들을 없애달라는 기도를 자신있게 드린 사람입니다.

“저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야훼께서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죄를 벗겨 주시지 마시고 잘못을 용서해 주시지도 마십시오. 분김에 해치우시어 거꾸러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셔야 하지 않겠읍니까? 예레미야 18 : 23″ 

그는 야훼 하나님께도 마구 대들었던 사람입니다.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읍니까?  예레미아  15 : 10”,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 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예레미야 20 :7” 

그러나 그는 철저히 야훼 하나님께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갖은 고난과 감금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옳다는 것을 믿고 오직 외길만을 걸은 사람이었습니다. 갖은 수모 끝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맞아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실을 주저없이 선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야왕 때부터 유다왕국이 멸망하는 모든 과정을 겪으며 자기 백성들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잇기 전에 그가 살았던 시대를 한번 죽 훑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시리아의 급격한 몰락이 시작될 즈음 남쪽 이집트가 먼저 움직입니다. 요시야왕이 이집트 왕 느고에게 맞서다 죽은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아홉살 때의 일입니다. 정말 한참 나이에 불꽃처럼 살다 간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 유다는 급격히 무너집니다. 

요시야를 죽인 이집트 세력 아래 놓인 유다의 왕위를 이은 것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입니다. 그는 고작 삼개월 왕위에 앉아 있다가 이집트 세력에 의해 내쫓깁니다. 이집트는 그의 형 엘리아킴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부르지만 그는 십 일년 만에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단지 석달 열흘만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등극합니다.  그는 전왕인 여호야긴의 삼촌, 곧 요시야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그는 나약한 군주였고 국제정세에 매우 어두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대세가 바벨론에게 넘어간 시점에서 이집트의 원조를 꿈꾸며 바벨론에게 대항하였다가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을 불러 드립니다. 시드기야의 마지막 모습을 성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쇠사슬로 묶어서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열왕기하 25 : 7” 

요시야가 죽은 후 멸망하기까지 유다는 친 이집트파와 친 바벨론파 사이에 왕국의 생존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의 백성들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록 당시 자신의 동족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까지, 그가 믿고 의지한 야훼의 말씀을 선포했던 예레미야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꽃 – 예언자 18

(당신의 천국 – 마흔 일곱 번 재 이야기)

왕은 또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베델에 세웠던 산당과 제단도 허물고 돌들을 부수어 가루를 만들었으며 아세라 목상은 태워 버렸다. – 열왕기하 23 : 15 

야훼께서 오실 무서운 날이 다가 왔다. 득달같이 다가 왔다. 야훼께서 오실 날, 역마보다 날쌔게 오는구나. 군인보다도 잽싸게 닥치는구나.   그 날은 야훼의 분노가 터지는 날, 모두들 죽도록 고생하는 날, 폭풍에 휩쓸려 가는 날,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두운 날,  나팔소리 울리며 함성이 터지는 날이다. – 스바냐 1 : 14 –16

“야훼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 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언제 풀어 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졌읍니다.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 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읍니다.” – 하박국 1 : 2 – 4, 이상 공동번역 

스물 네 살에 비명횡사를 한 아버지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요시야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습니다. 혹시 여덟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이야기를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 없으신지요? 

조선시대 제 6대왕이었던 단종이 왕세손에 오른 나이가 여덟 살 때 였답니다. 아버지 문종이 임금노릇 한 지 이년이 조금 넘어 병으로 죽자 당시 왕세자였던 단종이 임금이 됩니다. 그의 나이 열 두살 때의 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어린 단종은 아주 영민하고 똑똑하여 할아버지 세종 임금의 사랑을 둠뿍 받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삼촌인 수양대군의 권력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열 일곱 살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이른바 단종애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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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 왕이 여덟 살에 즉위했을 당시의 일이 성서 열왕기하 21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몬왕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궁에서 죽였다.  그러나 지방민들이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왕자 요시아를 왕으로 모셔 대를 잇게 하였다.” 

역대기에서는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상황을 조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지방민들이 그 반란자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요시야를 왕위에 올렸다는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과연 “지방민들”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번역본들에는 “땅의 백성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답니다. 영어번역본 중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에는 “the people of Judah” 곧 유다의 백성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답니다. 

여기서 사용한 “땅의 백성들”  – 히브리말로  “암하렛츠(‛am ha·’a´rets)”라는 말 기억해  두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요시야왕은 지방민들 또는 땅의 백성들(암하렛츠)이라고 부르는 지원 세력에 의해 임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단종애사처럼 쉽게 왕위를 내주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이 성군이었던데 반해, 요시야왕은 그의 증조 할아버지 히스기야왕이 다윗에 버금가는 임금이었습니다. 증조 할아버지를 빼닮은 요시야 역시 야훼 하나님의 사랑을 듬북 받은 임금이 됩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 왕국으로 갈린 뒤 남, 북 왕국에 많은 임금들이 있었지만 단 두 사람만을 성서는 제대로 된 왕노릇을 한 임금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와 그의 증손인 요시야입니다. 

요시야왕이 막 왕위에 오르고 아직 어린 나이에 세상 물정 모를 때 예언을 했던 사람은 스바냐입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요시야왕이 아직 자신의 꿈을 펼치기 전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바냐의 족보를 보면 그의 증조 할아버지가 히스기야였습니다. 요시야왕과는 한 집안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유다는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고, 정치 지도자들은 강대국들을 등에 업고 속임수로 백성들을 쥐어 짜고 있었으며, 거짓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야훼 하나님을 우습게 여겼고, 판사들은 늑대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유다의 운명은 벌을 받는 일만 남았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 스바냐의 예언이 이어지던 때 요시야가 성년이 되어 그의 꿈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요시야는 대대적인 성전 정화 작업과 이방 신앙과 우상들을 척결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이 작업 과정에서 성전 안에 있던 야훼 하나님의 법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세와 야훼 하나님과 맺었던 계약법전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법전의 발견으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은 강한 힘을 얻어 박차를 가합니다. 

그가 실행했던 종교개혁의 상세한 내용들은 열왕기하 2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이방신들과 미신, 가짜 사제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성적 문란 등의 사회상도 잘 알 수가 있답니다. 

요시야왕이 이런 강력한 종교개혁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국제적 상황이 크게 한 몫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가 내분에 휩싸여 멸망의 길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고, 강국들인 바벨론과 이집트, 그리고 훗날 페르시아가 되는 메데 등등 주변 강국들은 아직 아시리아의 정황을 살피며 움추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강력한 외부의 적들의 힘이 느슨해진 상태에서 요시야의 국내 종교개혁 정책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아시리아에게 점령당한 옛 북왕국 이스라엘 영토 지경까지 요시아의 종교개혁의 손길이 뻗쳤다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가장 큰 세력 형성을 한 임금이 바로 요시야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요시야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훼의 눈에 들게 바른 정치를 폈다. 모든 일에 태조 다윗을 본받아 한 발짝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다. 

그러나 요시야왕의 불꽃같던 위대한 업적은 단명(短命)하였습니다. 국제 정세가 급격히 바뀌어 갔기 때문입니다. 아시리아의 세가 위축되면서 남쪽의 이집트 세력이 치고 올라왔습니다. 요시야가  이집트 왕 느고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활에 맞아 죽으면서 유다의 몰락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성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이미 요시야의 할아버지 므나쎄가 저지른 죄 때문에 정해진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하바국의 예언처럼 이미 정의가 짓밟혀진 나라의 죄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아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나훔, 스바냐, 하박국 예언자들의 예언서들을 읽으시면서 우리들의 머리 속에 꼭 담아 두고 가야할 것이 있답니다. 

성서가 누누히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이런 예언자들 말고 숱한 예언자들이 있었고, 대다수의 가짜 예언자들은 당시 유다왕국은 잘 나가고 있고 잘 나갈 것이라는 예언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성서에 기록을 남긴 예언자들은 “곧 다가올 심판”이 “가까웠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당대나 그 다음 대에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비단 야훼의 심판 뿐만이 아닙니다. 야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 역시 당대, 또는 다음 세대들이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는 현실적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자들에 대한 역사적 또는 신앙적 경험이 그대로 후대들에게 넘겨져 전해지는 그 연장선에서 예수를 만나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시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레미아 이야기입니다.

붕괴(崩壞) – 예언자 17

(당신의 천국 – 마흔 여섯 번 째 이야기)

오호라, 아시리아의 임금아, 네 목자들은 영영 잠들었구나. 네 용사들은 깰 수 없는 잠에 빠졌구나. 네 군대는 다시 모을 길 없이 이 산 저 산에서 흩어졌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네 상처는 나을 길이 없고 얻어 터진 자리는 아물 길이 없다. 내내 너의 행패를 당하던 사람들이 네가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손뼉을 치며 고소해 하리라. – 나훔 3 : 18-19 

대사제 힐키야는 야훼의 성전에서 헌금을 꺼내다가 모세를 거쳐 전해진 야훼의 법전을 찾았다. 힐키야는 곧 공보대신 사반에게 야훼의 성전에서 법전 찾은 일을 고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넘겼다. 사반은 그 책을 가지고 어전에 나아가 아뢰었다. – 역대기하 34 : 1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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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세기는 인류사에 있어 급격한 변화들이 마구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손꼽을만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소련의 붕괴일 것입니다. CCCP로 표시되었던 나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멸망과 해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할만치 급격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지구 육지 면적의 1/6을 차지했던 거대한 국가,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이차대전 이후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며 한 축을 이루었던 나라 소련이 급격하게 붕괴된 주된 요인은 경제 침체와 다민족 국가 연합체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 한민족에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세력의 한 축으로 영향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 거대한 나라 소련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5 – 6년 사이랍니다. 

그리고 약 2600여년 전 중동의 거대 제국 아시리아가 무너진 것도 그 나라의 역사로 비추어 볼 때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랍니다. 

약 2000년 동안 오늘날의 중동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대 강국으로 군림하였던 아시리아가 멸망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0여년 정도였답니다. 

소련이 약  74년 여간 존립하였고  망하는데  5-6년 정도가 걸린 것에 비한다면 아시리아의 멸망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망하기 약 백년 전 쯤부터 오십 여년간,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아시리아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당시 최대의 경쟁국들이었던 바벨론과 이집트 까지 아시리아의 영향 아래 둔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때였고, 남왕국 히스기야왕과 그의 아들 므나쎄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유다왕 므나쎄의 재위 기간 동안 아시리아의 국력은 국가 사상 최대의 영토를 지배할 만큼 대단하였습니다.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된 므나쎄는 남 북 왕국을 통털어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55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므나쎄는 십 이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 년간 다스렸다. 그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그릇된 정치를 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라,  부왕 히즈키야가 허물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웠고 바알 제단을 쌓았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하늘의 별들을 절하여 섬겼다.”- 역대기하 33 : 2 – 3 

55년이라는 장기 집권을 한 왕에 대한 기록치고는 아주 짧은 기록만 남기고 있고 그나마 야훼 하나님의 눈에 거슬렷다는 기록 뿐이랍니다. 

므나쎄왕 시대의 아시리아는 당시 중동에 있어 대적할 적이 없는 유일한 강국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직접 통치를 하고 있었고, 이집트 원정을 몇 차례나 성공적으로 치루어 이집트도 조공을 바치던 시절이었습니다. 

작은 나라 유다왕국의 므나쎄 역시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가를 뛰어 넘어 스스로 아시리아에게 충성을 받쳤던 므나쎄의 모습들이 실제 역사 기록에 남아 있고, 이런 행위들이 야훼 하나님 눈 밖에 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아시리아는 수많은 민족과 소국가들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영토를 넓혔던 탓으로 가급적 점령 국가들의 전통과 신앙을 존중하는 정책을 폈답니다. 그런데 므나쎄는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왕하고는 달리 적극적인 친 아시리아 정책을 펴면서 아시리아의 종교와 신을 받아드려 모셨다는 것입니다. 

유다왕국에는 다시 산당들이 세워지고 각종  이방신들이 넘쳐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시리아가 순식간에 멸망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멸망의 원인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내부적인 다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새로운 세력들의 등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시리아의 왕과 바벨론을 통치하던 동생 사이의 싸움,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의 반란 등이 이어진 내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아시리아가 급격히 무너져 가는무렵 유다왕 므나쎄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잇지만 이년 만에 죽고 맙니다. 성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는 신하들의 반란으로 자기 궁궐에서 맞아 죽었다.- 역대기하 33 : 24” 

역사는 아몬왕이 친아시리아 정책을 펴다가 반아시리아파 신하들에게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고려시대 말과 이조시대 초에 있었던 ‘원(元)나라냐 명(明)나라냐”하는 싸움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지요. 

아몬이 그의 아들 요시아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의 나이 여덟살 때의 일입니다. 이 요시아는 유다왕국의 아주 주요한 인물이자 구약성서 전체를 통해서도 아주 주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언자 나훔이 아시리아의 멸망을 예언한 시점도 이즈음입니다.

평화 – 예언자 16

(당신의 천국 – 마흔 다섯 번 째 이야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그렇다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 이사야 53 : 7 – 8, 이상 공동번역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였다.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것은 누구를 두고  말입니까자기를 두고  말입니까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말입니까빌립은 입을 열어서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예수에 관한 기쁜소식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 8 : 34 – 35

이사야가 살았던 당시 남왕국 유다의 형편(아사야 1장에서 39장까지의 이야기) 이사야가 죽은  일어난 바벨론 포로 시절(이사야 40장에서 55이야기그리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 재건을 하던 무렵(이사야 56장에서 66) 이야기가 합쳐진 책이 성서의 이사야서입니다.

그래 첫째 이야기를 이사야둘째 것을 2이사야,  세째 이야기를  3 이사야라고 부른답니다.

기간으로 보면  이백  정도의 역사적 사건들과 고백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백  동안은  유다인들에게는 간난(艱難) 질곡(桎梏) 세월이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히스기야왕 시절에 성서는 그가 다윗 못지 않게 복을 받은 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말년이 가까워 오면서  유다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예루살렘이 멸망 직전의 위기에 놓입니다이미 말씀드렸듯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정세는 북의 아시라아와 남의 이집트동쪽의 신흥 세력 바벨론과의 힘의 역학에 따라 땅의 주인이 바뀌던 때였습니다유다왕국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여러 약소 왕국이나 도시국가들은 살기 위해 줄을 서거나 힘을 합쳐 연합을 하되   강국이라고 생각되는 세력에 붙곤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히스기야도 독립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일견 이집트에 붙기도 하고바벨론과 붙기도 하고 왕국의 안녕을 도모하기 위해 갖은 외교적 수단들을 동원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시리아를 표방하던 때에 아시리아의 강력한군주가 나타납니자산헤립이라는 왕입니다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산헤립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인 상황들이 두번이나 연속됩니다이사야의 예언들이 쏟아지던 때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야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산헤립의 군사  팔만 오천 명을 야밤에   숨에 없어버립니다.(이사야 37 : 36)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이  이길  있었던 싸움을 앞두고 까닭없이 철군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사야 당대에는 멸망의 위기를 넘기지만 끝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  이후의 이야기는 예레미야 이야기를 하면서 잇기로 합니다.)

현실적으로보면 좋은 일이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그러한 때에 이사야는 메시아 왕국메시아가 통치하는 세상을 봅니다그리고  세상을 노래합니다.

이쯤이사야 시절부터 아주 오래  이야기를 되돌아 보기로 하지요 700 전의 일입니다.

히브리족들이 탈애굽을 하여 광야 사십년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는 것이지요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들이 광야에서 계약을 하고 들어  땅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곳이었다는이야기를 우리가 함께 했던 생각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히브리족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였지요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평등이 이루어지는 세상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사야가  메시아 왕국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사야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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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뗀 어린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 이사야 11 : 6 – 9”

사람과 사람사이의 싸움  전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만물들이 더불어 함께 누리는 평화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바로 뱀의 유혹이 일어나기 선악과에 대한 유혹이 일어나기  태초 에덴으로의 회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형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바로 하나님의 공의가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망해가는 시점그리고  망한 후의 시점남의 나라에 포로 생활을 하는 시점그리고 풀려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던 시점 이백 년의 세월 동안 유다인들이 꿈꾸었던 메시아 왕국하나님의 나라입니다바로 누구나 공평한 평화로운 세상 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그런 하나님의 나라메시아 왕국을 이루어  메시아가 온다는 예언을   사람바로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그린 메시아의 모습이 바로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는 온갖 고초와 멸시를 당하고 채찍질과 찔림을 당하여 죽습니다그의 죽음은 후손들이 오래 오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 위한 제물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00  이사야의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고,어떤 이해와 해석들이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예수의 생애와 바울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어질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우리들의 머리 속에 깊이 새기고 넘어가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바로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전쟁과 다툼이 없는 세상입니다.

히브리족들이 가나안에서 꿈꾸었던 젖과 꿀이 흐르는 평등한 세상은 정복과 전쟁을 전제로  세상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꿈꾸던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온갖 무기들이 생산의 도구로 바뀌어 평화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빈번한 모든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다툼싸움전쟁들이 얼마나 후진적 신앙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사야로부터    후에 오신 메시아 이야기를 향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면서 이제 우리들이 만날 인물들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멸망하는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발상의 전환 – 예언자 15

(당신의 천국 – 마흔 네 번 째 이야기)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뽑아 놓고 버리겠느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너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되고,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 중략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 준다. –이사야 41 : 9 -13, 공동번역 

신약은 구약을 전제로 하고 복음을 율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구약에 구현되어 있는 이 율법은 결코 구체적인 구약성서일 필요는 없다. 복음을 위한 선이해(先理解)가 구약에서 자라났지만, 신적 율법이 역사적으로 달리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이해가 자라날 수 있다.  – 루돒프 불트만의 ‘신앙과 이해’에서 

종종 쓰거나 듣게 되는 말 가운데 “생각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요. 똑같은 하루인데도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어 보면 아주 다른 일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컬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발상의 전환’의 상징인 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기원후 1473  – 1543)랍니다. 획기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지요. 바로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기원후 1564 – 1642)입니다.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정작 이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랍니다. 

갈릴레오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었지요.  그의 주장, 곧 “지구가 돈다”는 주장으로 교황청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 재판정에서 그는 그의 주장을 꺾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을 나오다 한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라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의 교황청만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을 정죄 했을까요? 개신교의 시조로 알려진 루터 역시 갈릴레오를 정죄하였답니다. 그가 갈릴레오를 정죄한 까닭은 교황청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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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갈릴레오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된다고 말한 근거는 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에 있는 “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 중략 –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 성서는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 –이 그 정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지동설 곧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교황청 및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었고, 중세 유럽을 무너뜨리고 르네쌍스 시대를  여는 인류사의 일대 전환의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세상을 주도해 오던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의 실세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근간을 흔드는 “이단”이었던 셈입니다. 

이쯤 우리들이 살고있는 2013년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동설은 과학적 진리이지요. 그렇다고 중세의 교회가 걱정했던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사라지기는 커녕 야훼(여호와) 하나님의 세상은 더욱 넓어졌지요.  – 제가 오늘 처음으로 야훼(여호와)라는 표기를 했습니다. 요것도 기억해 두시기를- 

사람들의 생각이 커갈수록 더 큰 야훼 하나님 곧 본래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쯤해서 제가 하고싶은 질문을 드립니다. 이사야서는 누가 썻을까요? 

혹시 제1이사야서,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들어보셨다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갈릴레오 이후로 성서의 무오설에 대해 마구 도전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서 300년 전의 일이랍니다. 

이사야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랍니다.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그것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거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답니다. 18세기 말엽에 이사야서는 최소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쓴 책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개의 다른 저자 그룹들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서 66장 가운데 1장에서 39장까지를 제1 이사야, 40장에서 55장을 제2 이사야,  56장에서 66장까지를 제 3 이사야로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 이후로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18세기 이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또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성서무오설이 무너지고 다양한 성서 연구 방법론들이 나오고, 19세기 이후부터는 고고학의 자료들이 마구 발굴되면서 이제껏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오던 믿음들이 무너지거나 오히려 확고히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답니다. 

수년천 사람들이 믿어왔던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그가 일하시는 지경이 넓혀졌듯이,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고 여러 연구 방법들로 인해 성서가 해부될수록 야훼 하나님으 역사와 그 지경이 또한 넓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시작으로하여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허와 실을 가려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히 그리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성서를 믿음의 눈으로 읽고자 하는 이들도 이런 흐름 또는 사조, 연구에 대해 귀를 활짝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렇게 열린 시각으로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 더 큰 야훼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 그걸 의심하면 믿는 게 아니다.”라는 18세기 이전의 옛날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씀이고요, 저 위에서 제가 인용한 불트만의 말처럼 그 어떤 사람들의 경험들을 예로 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 구원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메시아왕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런 이해는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곧 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그걸 깨우치기 위해 신이 내리는 기적들 역시 신이신 야훼 입장에서 보면 필요없는 일이지만 나나 당신의 입장 곧 사람에 입장에서는 때론 절실한 것이지요. 

성서를 합리적인 사고와 믿는 마음이라는 크게 열린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랍니다. 

이제 이사야의 메시아 복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산당(山堂)이 산당(産黨)? –예언자 14

(당신의 천국 – 마흔 세 번 째 이야기) 

오늘은 주일(일요일)입니다. 

이 날에 대한 의미와 뜻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일요일로 표시되는 날짜 색이 평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자신들의 전통적 달력이나 일력을 사용하는 민족 이외에는 21세기에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일요일이라고 표시된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않아도, 오늘날 대부분 국가들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천지창조니 유대교니 기독교니 그런 것을 따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오늘날 지키는 일요일 관습을 따져 올라가 보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만나게 되고 더 올라가면 창조신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고 이어 나가더라도 “일요일 하루는 쉬는 날”이라는 현실을 맞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요일조차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상에는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요일은 쉬는날”이라는 생각과 실현은 분명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고 제가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사야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뚱딴지인가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당신은 분명 저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이야기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이야기를 바로 이어가려다, 오늘은 주일 곧 일요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한번 짚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생각해 보는 이사야 시대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무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계속 들을 수 있었던 말 가운데 산당(山堂)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도대체 이 산당이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의 설명은 산에 있는 제사단, 높은 곳에 있는 제사단입니다. 이건 예루살렘 성전이 마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각자 편하게 야훼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던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는 이방신과는 관계없는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후 유일신이신 야훼 하나님은 오직 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는 선언과 함께 모든 제사를 일원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성전도 이전 모습인 산당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산당에는 이교적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자! 산당(山堂)이란 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단이었는데 중앙집권에 힘을 빼는 요인이 되었고 이방신들과 쉽게 결합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없앤 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일했던 히스기야왕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촛점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제가 오래 알고있는 어느 장로님께서 하셨던 이야기가 자꾸 머리 속에 생각난다는 말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사람도 좋은 분이시고, 이제는 은퇴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고 섬기고 하는데 정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좋은 신앙을 지닌 분이시랍니다. 대학은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출신이시고, 여기 미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종으로도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으신 분이시랍니다. 

참 본받을 것이 많은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엔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했답니다. “성서에 산당을 없애라고 했어요. 그거 안 없애서 심판 받았지요. 그거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공산당을 없애지 않아 우리 민족이 힘들다.” 

그 순간 저는 정말 놀랬었답니다. 정말 황망한 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 장로님과 같은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깊히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각자 믿는 삶에 프리즘으로 보는 세상은 때론 정말 황망한 것을 믿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엉뚱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야 후회하는…. 

이사야서를 바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를 읽는 일이고, 당신과 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은 일요일, 바로 주일입니다. 성경 한 장 같이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읽고보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지요. 

이사야서 53장입니다. 

23HolySepulchre12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 이사야서 53장, 표준새번역 

 

기본 정신 – 예언자 13

(당신의 천국 – 마흔 두번 째 이야기) 

그(아하스 왕)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을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서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역대기하 28 : 3-4 

그(히스기야 왕)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자기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마음을 다 쏟았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 역대기하 31 : 21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 중략 –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중략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야 1 : 11 – 17 

20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제 일장 ‘예수의 설교(The Message of Jesus)’에서 제 일과인 ‘종말론적 설교(The Eschatological  Message)’를 시작하는 첫 문장입니다. “예수 설교의 주요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The dominant concept of Jesus’ message is the Reign of God.)”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비단 불트만의 예가 아니더라도 신약성서 복음서에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말이 백번도 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예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단호하고 확실한 신앙 고백을 나누기 위해서 저는 지금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이야기 순례길에 동행하며 같은 신앙 고백을 나눌 수만 있게 된다고 하여도 이 순례길은 제게 아주 의미있고, 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믿는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사야가 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왕들 곧 아하스왕(주전 736년 – 주전 716년)과 히스기야왕(주전715년 – 주전 686년) 때의 역사적 사실들과 예언자 이사야의 당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잠시 언급했듯이 아하스왕 시절은 북쪽에서 강력한 군대를 밀고 남하하는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아하스왕의 행위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아시리아 왕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때였다.(역대기하 28 : 16)”, “아하스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들을 털어 아시리아 왕들에게 바쳤으니 헛된 일이었다.(열왕기하 28 : 21) 

강국 아시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길을 택했던 아하스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외세(外勢)에 대해 굴복하는 일은 정권 또는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하나 뿐인 신(神)  야훼만을 모셔야하는 유다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하스왕 당시의 야훼 신앙을 망가뜨리는 종교적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구들을 거두어 부수고 야훼의 성전 문들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모퉁이마다에 제단을 만들어 섬겼다. 또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남의 나라 신들에게 분향하게 하여 선조의 하나님 야휘를 진노케 하였다.(역대기하 28 : 24-25)” 

심지어 아하스왕은 이방 종교 풍습에 따라 친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기하 28 :3)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부름에 응답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 아하스왕 앞에 선 일입니다.(이사야서 7장) 

이사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두 번에 걸쳐 아하스왕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시리아 등의 침략이나 외세에 대해 두려워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믿으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에게 의지합니다. 결국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 유다도 침공을 받아 유린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아하스왕 앞에서 전하는 두번 째 경고에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이 행해집니다.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 : 14)라는 예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질 메시아왕국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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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의로운 왕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외교노선이었던 사대노선을 버리고 독립노선을 천명합니다. 그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주변 강국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남하하는 아시리아를 일시 저지하는데는 당시의 남쪽 강대국인 이집트의 힘이 컷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했던 히스기야왕은  외교정치는 독립노선을 구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강화합니다. 

그는 성전을 재건, 정화 시킵니다. 이교도적인 이방신들을 모두 제거, 배척하고 유일신 야훼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복원하고 유월절 등의 전통적 절기를 복원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 했던 야훼 신앙을 되찾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의식을 복원한 일입니다. 지방에 산재했던 산당들을 부수어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복원한 일입니다.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복원시킨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히스기야왕이 야훼 하나님께 복받는 위업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 다윗 못지 않게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역대기하 29 : 2)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제사의식과 의례, 전통 등은 야훼 하나님과 선조들이 맺었던 계약에 맞게 개혁하고 복원하고 실행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예배의 정신, 제사의 본래적 목적 곧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의 기본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하는 정신을 잃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드리는 제사는 가짜라는 예언들(이사야서 1 장, 10장 1-4절 등)입니다. 

이사야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 : 7)” 

그리고 그런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 “지혜있는 이들이라 자처하는 자들,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 독한 술에 빠진 자들, 뇌물에 눈이 어두어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이사야 5 : 20 -23)”이라고 선언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성전 정화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왕국이 맞게 될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끝은 파국이 아닙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야서 9 : 2)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입니다.

거룩 – 예언자 12

(당신의 천국 – 마흔 한 번 째 이야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 이사야 6 : 3, 공동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사야 9 : 6, 표준 새번역 개정판 

이제 우리는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구약성서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우는 책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인용한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 제일 많이 인용된 책도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나중에 만나게 될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잘 읽어 두고  머리 속에 새기고 가야할 책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환상, 메시아 시대, 메시아 왕국, 메시아의 통치, 주의 종, 야훼의 종, 메시아의 고난, 대속, 심판, 구원, 새 하늘 새 땅 등등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만났던 아모스, 미가, 호세아 등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입니다. 직선적이고 직정적인 예언자들과는 달리 때론 환상을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말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좀 어려운 책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들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이야기, 바울 이야기라고 하면 좀 쉽게 읽히지만 이사야 신학, 바울 신학 그러면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요.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이제 나중에 만나게 될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들여다 보면 아주 쉽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쉬운 말과 어려운 이야기의 차이는 가방의 끈 길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똑같은 “나무”를 설명하는 말도 어린아이 다르고 어른 다르고요. 어디 그 뿐인가요? 직업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고, 왈 배운 정도에 따라 또 설명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이지요. 

이사야서를 바로 읽는 눈과 생각을 세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해를 하게되면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지게 된답니다. 특히 가짜들과 사기꾼들이  이런 책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이건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가 증명해 주는 일이지요. 

자! 이제 서론 마치고, 이사야 이야기 서너차례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상황과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연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렵니다. 

그가 스스로 야훼에게 사로잡혔던 때가 우시야왕이 죽던 해(이사야 6 :1)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가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왕 아하스 때입니다. 이 때는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하던 시절입니다.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아하스는 자주냐, 사대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일테면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르(시리아) 등 약소국들이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와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아시리아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왕국을 유지하느냐에 대한 선택을 해야하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지요. 

아하스왕은 아시리아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드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성서는 아하스가 죄를 지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 처럼 아시리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남왕국 유다가 아주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궁중과 연관이 있는 많이 배운 자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왕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왕실의 기록관이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이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예언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이사야서 6장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입니다. 

환상

먼저 이사야의 환상입니다. 환상이 무엇일까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유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서 2 : 28, 사도행전 2 : 17에서 인용)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평시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예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상을 통해 이사야가 본 것은 한마디로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입니다. (6 : 3)이 때 ‘거룩’의 뜻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 땅을 밟고 살다 간, 또는 살고 있는,  또 살아 갈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주목해야 할 점은 이사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6 : 5)이건 다른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막바로 사회, 정치, 종교적인 죄들에 대해 비판과 선언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이사야는 “내 잘못이 크다”는 회개로 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스랍)가 나타나 이사야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합니다.(6 : 7) 

그리고 천사(스랍)들이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 6 : 8) 

“누굴 보낼꼬?” 라고 묻는 야훼께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제가 갑니다”라고요. 

이렇게 이사야 이야기를 시작하고요. “거룩”에 대한 기억 한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거룩하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기도 소리를 거의 모든 예배 때마다 듣곤하였답니다. 이즈음엔 조금 듣기 힘든 것 같습니다. 

뭐 제사의식이나 형식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제가 이즈음 박수치고 양 손 올리고 이른바 찬양 예배 형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까닭은 늙어가는 징조이기 때문일겝니다.

도낀 개낀 – 예언자 11

(당신의 천국 – 마흔 번 째 이야기)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미가  5 : 1 – 4, 공동번역 

성서와 예언사상이 겨냥하는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먼저 개조되고,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의 세력’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고 겸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된다. – 서인석의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에서 

앞선 글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다른 점들 몇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유다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다고 선언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야훼 하나님께 지은 죄를 놓고 보면 난형난제(難兄難弟)요, 오십보 백보이고, 도낀 개낀이라는 선언입니다. 

미가의 통렬한 비판과 공격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과 공격은 남과 북에게 똑같이 퍼부어졌습니다. 

전통적인 생계 수단이었던 소작농들이 무너지는 현상은 아마 농촌출신인 미가의 직접경험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고나  부정직한 상행위에 대한 고발, 돈에 매수된 사제와 예언자들의 타락에 대한 심판 예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거나 못본 체 하는 왕과 권력에 대한 심판 경고들을 남과 북을 향해 동시에 선언한 것입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하는구나!” – 미가 3 : 9-11 

“이 성읍에 사는 무리들은 들어아. 남을 등쳐 치부하는 것들아, 거짓말만 내뱉는 도시놈들아, 말끝마다 사기를 하는 것들아, 들어라. ‘천벌받을 것들, 부정한 되로 부정축재한 것들을 나 어찌 용서하겠느냐?’” – 미가 7 : 9 – 10 

또한 미가는 허례 의식만 남은  예배와 제사, 심지어 이방 종교의 의식까지 섞여진 제사와 그 제사를 집행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미가  6 : 8)고 말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선포가 심판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 미가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약의 마태복음(마태 2 : 6)이 인용하게 되는 미가서 5장 1절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미가와 동시대의 인물인 이사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미가 이야기를 마치면서 오늘 본  한국 뉴스 한 꼭지로 인해  제 머리 속에 이어진 생각 하나 덧붙입니다. 

경상도 구미시의 시장이라는 者가 “박정희는 반신반인(半神半人) 이었다”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내노라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박정희 역시 그 한가운데 있는 인물입니다. 극과 극을 이루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한국사회가 그만큼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증표일 것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호, 불호나 긍정 평가 또는 부정 평가는 보는 사람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런 다른 평가들이 자유롭게 논의되고, 떳떳하고 공정하게 서로 다른 의견들이 표출될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동상

그러나 죽은 귀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은 정신 나간 행위 곧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태양절이라며 죽은 김일성 귀신을 섬기는 북이나 탄신절이라며 죽은 박정희 귀신을 섬기는 남이나 정말 도낀 개낀인 셈입니다. 

성서적 관점, 적어도 미가 예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의 정권이나 남의 정권이나 죽은 귀신이든 산 귀신이든 사람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정권의 말로는 그야말로 임박한 붕괴 뿐입니다. 

미가의 예언대로 북왕국 사마리아와 남왕국 예루살렘이 결국은 모두 망했듯,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려지는 정권의 말로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로는 “이미 왔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진리입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  S J Samartha 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