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 중간사 4

(당신의 천국 – 예순 아홉 번 째 이야기)

권력 특히 정치권력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로 먼저 있었던 권력에 대한 거부나  완전 부정이라는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일테면 미국의 부시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Clinton이라는 말은 그런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Roh,  곧 모든 일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일이 있었지요. 비단 이명박 전대통령만의 일은 아니였지요.  그의 도가 넘는 반노(反盧)정책을 전적으로 이명박이라는 개인 탓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랍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랍니다. 

아무튼 정권이 바뀌면 일단 전임 정권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전임 정권에서 쌓여 온 악화된 민심(民心)들을 푸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권의 힘(동력動力)을 얻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제껴놓고, 이후 권력승계가 선거에 따라 이어져 온 역사만 본다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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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고요, 김영삼은 전과 노 두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고요, 김대중은 워낙 다들 적이였거니와 전임이었던 김영삼은 이미 정리하지 않아도, 아니면 그걸 다 밟으면 제 목 날아갈까보아 두리뭉실, 노무현도 김대중을 정리했지요. 남북관계의 돈문제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신기한 게 박근혜랍니다. 통상 오년 임기 중 첫 일년 안에 이런 전임에 대한 거부 또는 부정의 정책들이 쏟아지는 게 정상인데, 제가 보기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권 변화사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녀의 인물 됨됨이가 아주 크거나 아니면 이제껏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민족들이 보아 온 정권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이해 못하는…그게 되어야 민주주의인데…)

다만 제 생각을 덧붙인다면 지금 권력의 중추인 김기춘이라는 이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 말이었다지요. “그럼 우리는?” – 이 질문을 던진 이가 권력에 중추에 있다는 말은 자기 식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뜻? 그 정도는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북의 장성택과 김정은 뉴스는 이번 주 미국 뉴스 가운데도 손꼽히는 메뉴 가운데 하나였지요. 마치 미개 문명 세상 소식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 멀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여기까지 온 것도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한 곳에서 만남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나라를 먼저 찾아갈 일이기에 이만 접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유다 땅의 모습도 똑 같았답니다.  Anything But Ptolemaios 였답니다. 왕조가 바꾸자 전임 왕조의 반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의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계 헬레니즘 왕국인 세류커스왕조는 전임 권력이었던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당근을 던집니다. 전임 왕조는 세금을 많이 매겼지만 우리는 아니다라는 정책을 폅니다. 셀류커스 왕조의 주인인 안티쿠오스 3세는 예루살렘의 전 주민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하고 성전과 성전관리를 하는 사제들의 세금은 영구 면제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답니다. 

유다 및 예루살렘이 쌍수를 들어 새로운 식민 지배자인 안티오쿠스 3세의 셀리큐스왕조를 반겼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돈 더 안내도 된다는데 말입니다. 

이게 사단의 빌미가 된답니다. 당연히 얻게 되리라는 당근 대신 채찍을 유대인들이 맞게 되는 것이지요. 

뭐 그 때나 지금이나…. 

또 쌓인 눈을 치우고나니… 내일 잇지요.

대왕 – 중간사 3

(당신의 천국 – 예순 여덟 번 째 이야기) 

기띰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립보의 아들인 알렉산더는 페르샤와 메대의 왕 다리우스를 쳐부수고 그 왕권을 차지하여 그리이스 왕국을 손에 넣은 다음, 수없이 전쟁을 하여 숱한 성을 점령하고 세상의 많은 왕을 죽였다. 알렉산더는 땅 끝까지 진격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다. 온 세상은 그 앞에 굴복하였고 그는 우쭐하여 오만해졌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고을과 나라와 왕국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는 앓아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어릴 적부터 자기와 함께 자라난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더는 십이 년 동안 통치하고 죽은 것이다. 그 장교들은 제각기 자기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알렉산더가 죽자 모두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도 뒤를 이어 오랜 세월을 두고 집권하였다.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온 세상은 그들의 학정에 몹시 시달렸다. – 마카베오상 1 : 1- 9, 공동번역에서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당시 도시국가들로 형성되어 있던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에게 사절들을 보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라는 친서와 함께 말이지요.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대제국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요구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아테네는 사절을 죽여 버렸답니다. 

이 일로 인해 벌어진 것이 마라톤전투로 잘 알려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제1차 전쟁이랍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6,4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그리스는 단지 192명의 전사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다리우스 1세의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260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격해 왔다고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후세의 사가들은 이 숫자는 허풍이고 대략 3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반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영웅적 싸움을 전하는 테르모필레 전투로 알려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 역시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인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기 동맹을 형성하고 약 30년간에 이르는 오랜 전쟁을 치릅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멸망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반도의 주인은 스파르타가 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기원전 400년에 주인은 테베로 바뀝니다. 

그 무렵 그리스 반도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왕국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으며 그리스 반도 안에 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그 세력이 미약하였습니다. 그 마케도니아에 필립 2세(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59년의 일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기원전 336년 암살당할 때 까지 그리스 반도는 마케도니아 수중에 놓이게 됩니다. 

필립 2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이 나이 스무살 때의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와 왕위 승계를 다투던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약관 스무 살 어린 왕을 우습게 본 그리스내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약 일년에 걸친 싸움에 모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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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23살 때 잇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24살 때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잽싸게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26살 때 페르시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동으로 동으로 전진하여 인도 접경까지 이릅니다. 이 때 동으로 전진하면서 많은 신도시들을 세우고 도시의 이름을 하나같이 알렉산드리아라고 명합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갈 곳은 이집트 북쪽에 있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더는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군대와 함께 수많은 비전투원들을 거느리고 다녔습니다.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운동선수, 배우, 심지어 매춘부들 까지 거느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점령하는 곳 마다 그 곳 문화를 받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민족간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면서 융합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넓은 땅을 점령해 나가던 알렉산더의 나이 34살 때 그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복지 바벨론에서 급서한 그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는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암살설, 지나친 음주 탓 설, 너무 빠른 성공으로 인한 의욕상실설 등이 있지만 대세는 말라리아 감염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기원전 323년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알렉산더 이후의 이 신흥 제국은 급격한 분열을 맞게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사이에 극심한 권력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들을 ‘디아도치(diadochi)’라고 하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랍니다. 서로 서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약 20년 넘게 투쟁을 벌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지역), 셀류커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의 시리아지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나누어집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류커스 제국입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페르시아 식민지 유다는 이 신흥제국에 항복을 합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에서 그리스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 사마리아에서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알렉산더의 강력한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대량학살 당한 사마리아인들의 유골이 발굴되어 그 때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답니다. 여타의 다른 유다지역에서는 알렉산더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 드렸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나누어진 세 개의 왕국들이 치열하게 세 다툼 전쟁을 벌일 때 팔레스타인의 유다는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여러 피해를 입게 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북부 지방이 이들 세 왕조의 세력이 맞붙은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은 이집트를 근거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습니다. 이집트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였을 때는 유대계 총독과 성전의 대사제가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사제를 명목상 유대의 수반으로 하고 이집트계의 민정관리인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 시절보다 가혹한 공물과 조세부담에 시달리는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물이나 세금 징수를 맡는 관리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같은 민족 안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주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유대 디아스포라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 운동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살며 이미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들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을 융합시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특히 이들은 정통 유대교가 형성되면서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랍비 유대교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고, 후에 바울의 기독교 선교 운동의 첨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항거들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기원전 198년까지 이어집니다. 

시리아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유지해 온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쿠오스 3세가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기원전 198년이고, 이 시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유대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징후는 성전 권력의 썩을대로 썩은 부패로 부터 나타납니다. 이 무렵(기원전 174년경)부터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만남 – 중간사 2

(당신의 천국  -예순 일곱번 째 이야기)

성서의 외경 또는 제2경전으로 부르는 책들을 빼놓고,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구약의 마지막책 말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까지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연대로 따져보면 대략 기원전 430년경부터 예수 탄생시기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대의 변화를 바로 보려면 바벨론 포로 귀환기(기원전 538년)부터 예수 탄생까지의 시기를 보아야합니다. 

유다의 역사로 보자면 이 시기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식민지시대(페르시아, 그리스)와 유다왕국시대,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로 말입니다. 

인류사 또는 세계사로 본다면 이 시기 곧 기원전 2,500년에서 예수 탄생 시기 까지 약 오백년은 그 이후로 부터 오늘날까지 약 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을 지배해 온 큰 생각들 곧 사상과 종교가 탄생한 시기입니다. 

유대교가 오늘날의 유대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이고,  싯다르타 고타마 또는 고타마 붓다라고  불리우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불교를 탄생시킨 것도 이 무렵(기원전 500년- 600년 경)이거니와 유교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가 살았던 때도 바로 이무렵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의 대명사이기도 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가 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먼저 용어 설명을 드립니다. 희랍, 헬라 , 그리스는 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희랍(希臘)은 중국인들이 그리스의 발음을 제 나라식으로 적은 것이고요.  영어권에서 South Korea로 부르는 나라 대한민국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Korea이고, North Korea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듯이 그리스(Greece)라고 불리우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Hellenic Republic이랍니다. 그리스어인Hellas라는 말은 반도라는 뜻이랍니다. 한반도처럼 반도(半島)라는 말입니다. 한자어’희랍(希臘)’은 바로 Hellas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랍니다. 

헬라, 희랍, 그리스 다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고요.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일컬어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하고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히브리즘 또는 헤브라이즘 hebraism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서양의 생각과 사상, 철학, 종교를 따져보면 이 두가지 기둥이 서로 엉기거나 분리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 두 개의 정신이 만나는 때가 바로 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변화와 성문서(시편, 잠언 등)들이 이루어진 배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시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한 당시의 유다역사를 정리하고 넘어가야만 하겠습니다. 

페르시아시대의 유다는 페르시아가 내세운 유다인 총독이 정치, 군사적 권력을 관할하고, 유다인 대제사장 및 제사장 그리고 레위 그룹들이 제사 권한 곧 종교적 권력을 쥔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왕정시대(다윗,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시대)를 이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체제에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체제 관리자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 군사적 체제에 순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미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디아스포라란 민들레 씨앗처럼 마구 퍼트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자의든 타의든 자기가 살던 고향땅을 떠나 살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외국 땅으로 떠나가서 정착한 유다인촌들이 생겨난 시대라는 것입니다. 

유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뭉친 유다인들과 디아스포라가 되어 외국에서 정착촌을 이룬 유다인들 사이에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뭉친 예루살렘 중심 정신과 “그 날이 오면”이라는 종말론적 정신입니다. 

이런 유다 정신 곧 헤브라이즘 또는 히브리즘을 상승시키면서 대립하는 헬레니즘이 서로 만나게 된답니다. 

기원전 333년에 시리아 북쪽에 위치한 잇소스라는 곳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오 3세와 그리스의 떠오른 별 알렉산더가 제국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렸습니다. 알렉산더의 완승으로 끝난 이 싸움으로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정말 간단히 먼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말씀드리면 히브리즘은 이제껏 우리들이 유다인들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확인한  “오직 하나님만(Mono-Yahwism)”이라는 정신과 신앙아래 생긴 것이랍니다. 신은 오직 하나이고, 신이 선택한 민족도 하나이고, 세계의 중심은 바로 그 신에게 있고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헬레니즘은 세계의 모든 것은 다 품는다는 정신이 우선한 것이지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좋은 게 다 좋은 것이랍니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말이지요. 

또한 히브리즘은 신 중심 그것도 오직 하나 뿐인 신 중심적인 세상과 감성과 영적인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헬레니즘은 인간중심, 사람중심, 이성과 지성 중심의 세상을 말하고 있답니다. 

이 두 개의 큰 생각이 만나게 되는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한국말을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생각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거니와 그렇게 가르치는 교계 지도자들이나 목사 또는 지도층 평신도들이 있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거니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훼방을 놓는 일이랍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서로 만나는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은 야훼 하나님의 일터를 보다 넓게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상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 시대 빠른 역사 이야기 한번 더 해야 마쳐질 것 같고요. 

이쯤 한번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답니다. “예수, 예수”하는 사람들, “교회, 교회”하는 사람들 정말 많지요. 

크게 무리를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지금 지구 어느 땅에 살더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한국말을 제일 언어로 사용하면서 한국말로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바로 크게 한무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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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엄청나게 다른 것 같을 때가 있답니다. 개신교, 카톨릭에서 부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등에서 또 그 안에서의 계파로 나뉘이고, 나아가 보수니 진보니, 자유주의니 다원주의니 정통이니 운운들 하지만 크게보면 다 똑같은 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즘, 헬레니즘, 불교, 유교, 선교 등 오늘 우리들이 선택한 믿음과 조상대대로 이어 온 알 수없는 종교적 인자들이 하나가 된 똑 같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믿습니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오늘의 나에게 참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골 아프지만 역사 이야기를 짚고 넘어 가야한다는 말씀이랍니다.

 

내일 잇겠습니다.

경전 – 중간사 1

(당신의 천국 – 예순 여섯 번 째 이야기) 

경전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상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해도, 경전을 경전으로 확정하고 경전을 그렇게 표시하며 제한하는 일은 교회의 행위요, 교회신앙의 행위이며, 교회적 인식과 교회적 고백의 행위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이 책들을 신성한 교리들이 담긴 책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항상 거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책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바칠 자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문’ 제1권 8장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1954년 6월 1일Wall Street Journal에 이런 광고가 하나 실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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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사본 두루마리 4개 : 기원전 200여년 경의 성서 필사본 팝니다.  (The Four Dead Sea Scrolls: Biblical manuscripts dating back to at least 200 BC are for sale. ) 

1947년 팔레스타인 사해 서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라고 불리우는 두루마리 성서 사본이 어찌어찌 돌고 돌아 미국 신문에 판매 광고로 등장한 것입니다. 자그마치 이천년이 넘는 고고학적 자료이자, 성서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을 풀어주게되는 이 사본들은 당시 미화 25만 불에 팔립니다. 

실제 구매자는 이스라엘 정부였고, 판매액의 대부분은 미국정부에 귀속되었습니다. 광고를 냈던 사무엘이라는 시리아 정교회 소속 감독은 손에 쥔게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00년 경과 그 이후 약 300년 사이에 쓰여진 히브리 성서 필사본과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서기 1947년에 발견된 일은 성서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읽고 보고 있는 성서의 원본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원 전 200여년 즈음에  헬라(그리스어)어로 번역된 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원본은 없다는 것입니다. 쿰란문서가 발견되기 전에는 히브리로 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후 약 700년 경에 펴낸 마소라 사본이라는 책이 있답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히브리어 성서의 원본에 가까운 시대를 약 900년 앞으로 당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알아보려는 시대는 바로 이렇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기원전 450여년 무렵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이 활동하던 구약성서의 마지막 기록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까지입니다. 

특히 말라기 이후부터 유대왕국인 하스몬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약 300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성서의 틀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서가 형성되고 헬라어 성서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 있어 신기원을 형성하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이 만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어지는 토대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에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의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예습은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이 시대는 성서의 완성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성서(구약)를 읽는 시각의 차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가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답니다. 

제2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식민지였습니다.  왕이 없는 식민지에서 사는 유대인들과 인근 각지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절실하게 찾아 헤매던 자기 정체성을 묻는  물음에 대한  결실이 바로 구약성서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유대교와 기독교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동방박사와 헤롯왕과 빌라도총독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세리와 열혈당원과 십자가 그리고 바울을 준비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제 그 시대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문서들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제 아버님께서 작은 책을 하나 엮어 내시는데,  오늘 최종 인쇄 승인을 해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거 좀 꼼꼼히 들여다 보느랴 시간을 내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저 신구약 중간사로 들어가는 글로 오늘의 글을 대신합니다.

권력 – 귀환 8

(당신의 천국 – 예순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을 공평 무사하게 다스렸다. 군 총사령관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 공보대신에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사제 일은 아히툽의 아들 사독과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 비서 일은 스라야,  그렛 외인부대와 벨렛 외인부대의 지휘관에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다윗의 아들들도 사제 일을 보았다. –사무엘하 8 : 15 – 18 

(솔로몬)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에비아달의 자리에 사제 사독을 앉혔다. – 열왕기상 2 : 35 

레위인은 예수아의 일가, 곧 카드미엘과 빈누이와 호다야의 일가 칠십 사 명이었다. – 에스라 2 : 40, 이상 공동번역에서 

그들은 그 동안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렸으며 바사(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율법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넘치는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이들은 귀족정치(aristocracy)에 과두 정치(oligarchy)가 가미된 정부 형태를 취했다. 과두 정치가 가미 되었다는 말은 대제사장이 정부의 수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11권 4장에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심을 바로 알고 이해하려면 예수가 일하고 말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일테면 백 이삼 년 전에 한반도에서 ’양천주(養天主) 곧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다 목이 잘린 해월 최시형을 바로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니와, 똑같이 ‘아간의 범죄’ 행위를 인용하였지만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촉발시켰던 길선주목사의 “내가 아간입니다.”라는 고백과 2013년 그 규모로는 세계적 순위로 꼽히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가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와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들과 형편을  잘 이해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약 2,500년 전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다보면 열 두지파, 대제사장, 제사장, 사제 , 레위 등등의 말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이스라엘의 12 부족을 나타내는 12지파 중 레위 지파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담당하는 지파였는데 왕국이 망하기 전에 남쪽에 속했을까요? 북쪽에 속했을까요?  남왕국은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둘이었으까 당연히 북쪽에 속했겠지요. 

남왕국 유다의 전통을 잇는 포로 귀환 후에 역대기 사가들이 생각했을 때 이 레위지파의 위상은 어떠했을까요? 

highpriest

또 한가지 혹시 “사독”이라는 이름 기억나시나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정권의 요직 개편을 하지요. 사무엘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왕 밑에 최고 권력자는 군 사령관 요압, 공보대신에 여호사밧, 두 명의 사제장에 사독과 에비아달이라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권력 순위 3 – 4위에 사독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다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에비아달이 숙청되고 사독이 단독으로 사제장 곧 대제사장 자리를 꿰어찹니다. 

그로부터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사독의 후손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 자리들을 독차지합니다. 이 말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곧 신권을 대행하는 권력이 사독 가문에 집중되었다는 말입니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주된 사람들 역시 이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가문과 이들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레위 가문들 가운데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으로 내려 온 많은 레위 가문 사람들이 있었고요. 주로 이들은 산당이라고 하는 지방에 산재된 야훼 하나님을 기리는 예배처소를 담당했을 것이라고들 추정한답니다.

사독가문의 제사장 그룹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주창한 것이고, 레위 가문은 후예들은 지방 예배처를 관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런데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모두 왕 아래에 놓인 계급이었습니다. 

바벨론포로기 이후로부터 하스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에는 약 400년 이상 왕이 없다고 헀습니다. 

왕이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이었답니다. 신권정치를 움켜 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권정치를 내세우고 권력을 잡은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철저히 친 페르시아 입장에 서서 그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요. 

솔로몬 제 2성전의 건축은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독가문인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 비록 위축된 형편이었지만 명맥을 유지해 오던 레위지파가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신권정치를 이어간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신앙고백은 성전 중심인 예루살렘의 새 날에 대한 기대였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그 고백을 축약한 것이고요. 

그로부터 약 오백 년이 흐른 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역사를 송두리채 뒤집어 엎어 버린답니다. 

이제 구약의 성문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에스더..)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짧게 살피고 신구약 중간시대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적통(嫡統) – 귀환 7

(당신의 천국 – 예순 네 번 째 이야기)

그 해 칠월 이십 일일, 주께서 예언자 하깨를 시켜 말씀을 내리셨다.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와, 그 밖에 살아 남은 모든 백성에게 일러라. ‘이 성전이 예전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웠더냐? 너희 가운데 그것을 본 사람이 더러 남아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 성전은 어떠하냐? 너희의 눈에도 이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하지 않으냐? 그러나 즈루빠벨아, 힘을 내어라. 나 야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야, 힘을 내어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학개 2 : 1 – 4 

오후 늦게 일인치 정도의 눈이 내릴 것이라던 일기예보는 빗나갔습니다. 오전부터 펑펑 쏟아지던 눈발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밤 늦게까지 약 6인치 이상의 눈이 내린다는 수정 예보가 나왔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전에 교회에 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눈길이었습니다. 모처럼 사람의 말로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말씀에 기쁨을 맛보고 돌아 온 주일이었습니다. 

집 앞 드라이브웨이 눈을 치우고  난 뒤 나무가지에 내려 앉은 눈 사진 몇 장 찍어보았답니다. 잦아들던 눈발이 다시 굵어지고 있답니다. 

DSC01575

DSC01574쌓이는 눈위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해오던 이야기를 이어가야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뒤돌아 보려고 합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바벨론에 살다가 예루살렘 땅으로 돌아 온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당시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살았던 유다인들이 모두 돌아 온 것은 아니라는것 쯤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겠거니와 당시의 유적들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는 사실이랍니다. 

아무리 주변 상황이 바뀌었더라도 거기(바벨론) 남아 사는 게 훨씬 나았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돌아 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뚜렷한 특징들을 찾아낼 수 있답니다. 한마디로 단정지어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야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나가는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외골수 믿음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최고의 우선 순위는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고 유지하고 이어나갈 증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파괴된 솔로몬의 성전 재건축이야말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야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건이었고, 스스로들이 생각하는 민족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달랐습니다.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고, 야훼 하나님을 똑같이  말하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삶의 모습들을 보면 자신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는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호히 이를 거부합니다. 사마리아인들과 70년 사이 바뀐, 그 땅의 주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너희와 우리는 다르다.”입니다. 고로 “성전 건축은 우리의 일이지 너희의 일이 아니다.”였습니다. 

이제 사마리아인들과 그 땅에서 여호수아(이 여호수아와 예수아로 불리는 귀환 시대 제사장 여호수아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점 기억하시고요.)이래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이어 그 땅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70년 동안 세월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근근히 또는 잘 살면서 그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느닷없이 70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돌아와서 옛 전통을 잇는다며 성전을 세운다는 소리에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우리도 함께 하지”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매몰차게 내민 손을 내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뿔 날 일이지요. 더더군다나 땅, 그 가운데 값나가는 땅은 예나 지금이나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70여년을 누리던 땅도 나누어야 하는 처지에서 본다면 열받는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감정 꾹꾹 숨기고, 같은 핏줄이니까하며 손을 내밀었더니 그 손을 내치다니! 돌이킬수록 분이 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땅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이 택한 방법이 정치, 군사적으로 그 땅의 주인인 페르시아 황제에게 “내 편 좀 들어 달라”는 장계를 올리게 되는 것이지요. 

자!  이런 이야기들을 이어가는 당시의 주인공들, 당시의 영웅들이 바로 페르시아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이었습니다. 

빠르게 성전터와 토대를 세웠지만 사마리아와 그 땅에 살던 이방인들 및 이방 종교에 물든 이들의 방해 공작 앞에 머뭇거리게 되는 스룹바벨과 예수아 그리고 그들을 향해 “너희야말로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할 영웅이다. 성전 건축에 온 맘과 힘을 다해라.”라는 부추김을 하던 사람들이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 

이제 당시 그 땅의 정치, 군사적 주인이었던 페르시아 입장이 되어서 그 시대를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보지못한 엄창난 땅을 지배하게된 페르시아왕 고레스는 점령지를 지속적으로 잘 다스리기 위한 정책으로 점령지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이어가도록 허용합니다. 이러한 정책의 혜택을 받은 족속 가운데 하나가 유다족입니다. 그런데 그 고레스황제가 죽고난 뒤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캄비세스는 고작  7년 동안 황제위에 있다가 후사(후계자)가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기원전 522년에서 기원전 521년 사이 약 일년 동안 페르시아는 극심한  왕위 쟁탈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혼란한 권력 다툼의 정세를 뚫고 이겨내 권력을 쟁취한 사람이 바로 다리우스 1세입니다. 

다리우스1세는 왕국의 시조인 고레스의 정책을 이어받는 동시에 지방 변방의 소국들을 이웃한 큰 나라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는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정책을 편답니다. 

이런 세가지 서로 다른 상황들이 맞물려 제 2 성전의 건축은 터를 세웠다가 잠시 중단되고  결국은 다시 이어져 완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 당시의 상황을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고백한 기록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서 라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이 완성되면서 새로운 전통이 하나 세워집니다. 바로 대제사장의 적통이 예수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왕이 없는 시대, 총독과 대제사장이라는 이원 체제가 자리잡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이어지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오면”이라는 대망이 깊어지고  있었답니다.

법칙 – 귀환 6

(당신의 천국 – 예순 세 번 째 이야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듯한 주일 아침입니다. 미국 전역에 때이른 한파가 몰려왔다는 아침 뉴스가 일요판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워싱톤 타임즈는 눈 구경하기 힘들다는 텍사스등의 남부에 쏟아진 눈소식을 멤피스발로 전하고 있습니다. 

날씨 변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는 합니다. 이럴 때면 사람들은  그 일을 해결해 줄 어떤 힘을 상상하거나 소망하게 됩니다. 일테면 슈퍼맨이라든지 스파이더맨 같은사람들 말입니다. 이른바 영웅입니다. 

영웅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시대가 지났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약 백년 전에 이탈리아에 살던 한 사내가 무리지어  움직이는 개미떼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답니다.  개미들은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열심히 개미집으로 운반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모든 개미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내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단지 20%의 개미들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답니다.  일하는 개미떼  20%와 왔다갔다 하면서 놀기만 하는 개미떼 80%로 나누어지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내는 20% 와 80%의 개미떼를 따로 모아서 서로 다른 곳에서 살게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더랍니다. 열심히 일하던 20%들 사이에도, 놀기만 하던 80%들 사이에도,  일하는 20%와 놀기만 하는 80%로 다시 나누어지더라는 말이지요. 

이번엔 벌들이 일하는 모습을 관찰했더니 개미에게 나타난 현상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더랍니다. 하나 새로운 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법칙을 사내의 이름(Vilfredo Pareto)을 따서 파레토의 법칙(Pareto Principle)이라고 부른답니다. 

파레토는 개미와 벌들 뿐만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에도 이 법칙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보았답니다. 그리고 20%에 해당하는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일컬어 엘리트(elite)라고 했답니다. 나아가 그는 역사란 엘리트가 바뀌고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는 건강한 사회란 엘리트가 제 몫을 잘 해내고 나머지 대중들인 80%가 잘 따라주는 사회라고 이해를 했답니다.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신영웅주의라고 할 만한 것이지요.  엘리트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대중 지향적, 곧 전체 그룹인 100%를 생각하며  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드문 일이지요.  뭐 말로써야 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longtail

그런데 약 십년 전인 2004년에 영국출신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이란 이가  롱테일(Long Tail)이란 말로써 파레토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트에 속하는 20%가 아니라 나머지 대중(mass)인 80%의 영향력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급격한 기술변화에 따라 바뀐 시대가 만들어 낸 법칙이지요. 이를 롱테일(Long Tail)법칙이라고 하지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긴 시장과 유통 형식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생긴 말이지만 사회구조 변화에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즈음 한국뉴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사 가운데 하나가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 논쟁이지요. 그 핵심이 바로 댓글이라고 말하는 인터넷 여론조작에 국가기관이 주도적으로 개입을 했느냐는 것이지요. 다른 여러가지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제가 잘 모르는 일이니 접고요. 

엘리트 중심사회로 굳어져 내려왔던 한국 사회체제가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 한 번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원인을 찾으려면 여러 분석들이 가능한 일이지만 그 중 하나가 롱테일법칙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지요. 

그래 엘리트 중심사회로 회귀하려는 집단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 동안 해오던 일들이 결집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국정원이라는 기관을 통해 롱테일 법칙이 통하는 사회를 지배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눈 이야기와 날씨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무릇 역사란 어떤 독립적인 사건 하나 하나를 이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前)과 후(後)라는 시간의 연속성, 여기 저기라는 공간의 상관성들이 어우러져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이 이어져 만들어지는 법이지요. 

그 사건들의 기록이 역사라면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의 생각을 사관(史觀)이 되겠습니다. 그 기록을 신, 곧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바라보면서 남긴 것이 신앙고백이고, 그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한 이는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쓰여진 책은 성서가 되겠지요. 

예루살렘 제2성전(제 1성전은 파괴된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정과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는  바로 이런 여러 사건들이 어우러져  담겨 있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2500년전의 이야기는 오후에 잇겠습니다.

복병 – 귀환 5

(당신의 천국 – 예순 두 번 째 이야기)

황제가 내린 회신은 다음과 같았다. “사령관 르훔, 비서 심새는 사마리아를 비롯한 유프라테스 서부지방에 있는 동료 관리들과 함께 평안하기를 빈다.  경들이 보낸 편지 읽는 것을 내가 똑똑히 듣고,   조사를 시켰더니 과연 그 성은 예전부터 반역 음모를 꾸미어 이 황실에 반기를 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예루살렘에는 일찌기 강한 왕들이 있어 유프라테스 서부지방을 모두 손안에 넣고 조공과 세금과 관세를 거두어 들이곤 하였다.  그러니 내가 다시 지시를 내릴 때까지 성 쌓는 일을 중지시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부디 명심하여 일을 소홀히 다루지 않도록 하여라. 사태가 악화되어 이 황실에 손실을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에스라 4 : 17 – 22 

내가 마음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째 번 것은 민족이라 할 수도 없다.  사마리아산에 사는 주민들과 불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들이다. – 집회서 50 : 25 – 26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성과 솔로몬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유다의 마지막왕 시드기야가 처참한 모습으로 바벨론으로 끌려 가면서 유다왕국이 무너졌었지요. 그리고 약 70년 후 바벨론 포로들이 귀환하였지만 나라를 되찾았다거나 왕을 새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를 거쳐 희랍의 식민지로 이어져 기원전 166년 하스몬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약 500년이 넘는 동안 유다인들에게는 “왕”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역사와 유다인들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점은 우리들이 만나고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만나기 위해서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전히 페르시아 지배 아래 식민지였던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의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환 이후 약 백 년 뒤인 느헤미야 시대까지 총독은 바벨론에 포로로 있던 유다인들 가운데 선정되어 파송된 듯 합니다.(성서의 기록으로 보아서) 

일제 시대 총독이 일본인이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체제였던 것입니다. 일테면 일본에서 교육받고 일본화된 한국인을 총독으로 세우는 정책을 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인데(에스라 1장) 그리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아니고요.(이 사람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답니다. 그 가운데는 스룹바벨과 동일인물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고요. ) 아무튼 그 다음 등장하는 총독인 스룹바벨(즈루빠벨)이라는 인물에 좀 주목할 필요가 있답니다. 

식민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임무 가운데 첫째는 본국(지배국)의 이익을 위하고 본국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스룹바벨은 한 때 유다인들이 메시아로 생각했을 만큼 카리스마가 있었던 사람이랍니다. 예언자 스가랴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등장하게 될 인물입니다. 스룹바벨은 분명 페르시아가 지명해 내린 사람이었습니다. 

자! 총독이 한 사람있습니다. 지배지의 정치 및 군사를 주로 담당했겠지요. 

그 다음에 유다인들을 유다인이게 한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사를 관장하는 사제 그룹이 있었지요. 이들의 중심은 이미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던 사람들에게 있었고, 당연히 귀환 이후에도 그들의 몫이었지요. 

그들 가운데 예수아(여호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의 종교를 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 두사람이 귀환 이후 예루살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정치, 군사, 종교의 최고 지도자 두 사람이 야훼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 두사람이 의기 투합하여 한 일이 바로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었습니다.  일을 시작하고 성전의 기초를 놓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곧 새 성전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방해하는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한 유다의 동족들과 인근의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동족인 사마리아인들과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는  계기인 동시에 유다의 정통과 제사장의 정통이 예수시대까지 이어지게 되는 시대가 바로 이 무렵입니다. 

또한 페르시아의 내부 권력 다툼과 권력을 움켜쥐는 승자가 결정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다리우스

그렇게 정통이 세워지고, 권력을 움켜지는 세력이 공고해지기 까지의 수 십년 동안의 혼돈의 시기였고, 불안한 시기였습니다. 마치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불안함이 사람들을 휘감고 있던 때였던 것입니다. 종말론이 등장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된 것이지요.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가 일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솔로몬 성전 재건축의 열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합쳐질 즈음  다리우스라는 페르시아 황제가 등장합니다.

고백 – 귀환 4

(당신의 천국 – 예순 한 번 째 이야기)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 사무엘하 24 : 9 

병적조사한 결과를 다윗에게 보고했다. 칼을 쓸 수 있는 군인이 이스라엘에는 백 십만이 있었고 유다에는 사십 칠만이 있었다.  – 역대상 21 : 5, 공동번역에서 

“하나님이 살아있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가 성서를 바르게 읽을 때는 거짓된 겸손,주저 , 냉정한 마음으로써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읽을 때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성서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The Strange New World within the Bible)에서 

어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신명기 역사가들과 역대기 역사가들의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다윗왕이 시행했던 병적(인구)조사를 시킨 주체에 대한 생각입니다. 

먼저 신명기 역사가의 기록을 보지요.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 사무엘하 24 : 1 

다음은 역대기 사가의 기록입니다.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 역대기상 21 : 1 

야훼 하나님께서 시킨 일이라는 고백과 사탄이 시킨 일이라는 고백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또한 인구조사를 하고 난 뒤의 결과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서 130만 명이라고 했고, 역대기 사가들은 남, 북 합쳐 157만으로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 이미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내 놓았고, 오늘날 이 순간에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동네 목사님들이 나름대로의 해석과 설명을 이어가고 있지요.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하하는 사람들이나, 신앙의 경전인 성서를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이것 봐라! 한 가지 사실 가지고도 전혀 다른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이란 헛된 것이다.”라는 주장의 도구로도 사용되고는 합니다.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옆길로 돌립니다.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창조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창조경제라는 게 뭔지 잘 모른답니다. 이따금 설명하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아도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 이 친구도 모르고 있구나”하는 생각 뿐이랍니다. 더더군다나 이걸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사용을 하시던데, 이 말을 만든 친구가 누군지 몰라도 참 불경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랍니다. 이왕 만들고 알려 주려면 제대로 잘 알려주어서 사용하시는 나랏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할 일이거늘, 그 말을 쓰실 때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참 딱하네”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이지요. 

아무튼 그 창조경제라는 소리에 창조과학이라는 말이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창조과학이란 한마디로 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부터 모든 이야기들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거니와 과학은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생긴 신흥종교 가운데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이 만든 제7일 안식교의 교인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라는 이가 쓴 책(새로운 지질학 The New Geology)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답니다. 

제가 여기 미국에서 사반세기 넘게 살아봐서 잘 아는데요, 이 땅에 또라이(乭아이)들 정말 많답니다. 1960대에는 이 창조과학에 빠진 사람들이 꽤 많았고요, 한 때는 창조과학이론으로 학교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운동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미국 국립 과학원(United State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이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다. Creation science is in fact not science.”라고 규정하고 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 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미국인들이 지금도 많답니다. 

그런데 또라이들이 여기만 있겠어요. 혹시라도 “미국서 한다더라…”라는 소리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에서도 자칭 과학자, 목사라는 양반들이 한국창조과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뭘 한다나하는 소리도 듣는답니다. 

저는 또라이라고 했지만 그 분들이야 그 분들 나름대로 다 신앙적 결단으로 하는 일일 터이니 그 이들 쪽에서 본다면 제가 또라이거나 사탄이겠지요. 

설혹 그네들 말마따나 지구의 나이가 성경의 역사대로 약 팔 천년 전후이고, 천지창조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들이 될까요? 종종 신앙을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이들을 보면, 모든 것을 “믿씁니까? 아멘”으로 끝내고마는 단순 복종형 무조건적인 신앙과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른바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인들)을 제가 비난하거나 비판을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아니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간다면 뭐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사회인데요. 물론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 곳들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아보거나 오늘날 세상을 돌아보아도 수많은 다툼과 전쟁을 유발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무조건적이거나 편협한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종교집단”이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연재글을 쓰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바로 성서를 하나님 뜻에 맞게 제대로 읽고 이해하자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일이며, 마침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이런 서로 다른 고백에 대한 설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자신의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그렇게 이해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과 그 일들을 통해 얻은 사람들의 생각을 기록한 책입니다. 다만 성서가 성서인 까닭은 그 기록에 관여한 사람들과 사용하는 말과 일어난 일들과 그를 통해 얻은 생각들 모두가 야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 안의 일부라는 믿음의 고백을 전재하고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고 쓰여진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창조과학을 말하는 사람이나 “무조건 믿씁니다. 아멘”하는 사람과 저같이 고백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고백

바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삶의 자리를 제대로 바라보자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들었거나 본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것이었느냐를 찾아보는 일입니다. 나아가 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그런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었을까? 왜 야훼 하나님은 그 때 그들에게 그렇게 일하고 계셨을까?라는 물음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해답을 찾는 일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린다면 성서는 사람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 책입니다. 다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록된 것이지요. 그 신앙의 기초는 “절대”라는 말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절대로 “절대”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서로 다른 기록이란 바로 그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지점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한계에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준답니다. 우리들이 그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사실을 볼 수가 있답니다. 

성서 기록의 다름을 그대로 보면서 다르게 기록한 당시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은 이야기가 좀 돌았습니다. 다시 역대기 사가들의 핵심 인물인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성전 재건 및 예루살렘성 개축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차이 – 귀환 3

(당신의 천국 – 예순 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 – 사무엘하 24 : 1 

사탄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였다. – 역대기상  21 : 1 

조선은 나라를 세운지 매우 오래다. 그렇지만 강역이 지나(중국)에 접근함에 따라 항상 그들의 견제를 받았다. 지나인이 혹은 와서 왕이 되었다. 혹은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또한 본국인으로 왕이 된 자도 대개 지나에서 봉작을 받았다. 조공을 힘쓰고 사대의 예를 하지 않는 자는 매우 드물다. 이것을 보면 조선은 거의 지나의 속국인 것과 같다. – 일본인 하야시(林泰輔)가 쓴 “조선사(1892)”에서 

조선 땅에 세계 열강들이 눈독을 들이던 1887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에 사학과가 개설됩니다. 그곳에서 일본역사를 비롯한 조선역사의 연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3년 후인 1890년 이 학과의 교재용으로 국사안(國史眼)이라는 교과서를 만듭니다. 

그 교과서에 담긴 내용들입니다. 

“일본 개국의 시조는 세 아들중 스사노오가 행동을 함부로 하여 出雲으로 쫓아내고 그곳을 다스리게 했는데, 신라 및 常世國과 교통을 했고, 나중 에 한국(가라쿠니)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에서 天孫이 강림한 곳은 日向 (휴가,  지금의 미야자키)의 高千穗(다카치호)  봉우리다.  日向에 도읍한 神代의 3세대 가운데 葺不合尊은 아들 五瀨命, 稻飯命, 御毛沼命, 磐余彦 尊을 낳았다. 이 중에서 稻飯命은 妣의 나라 海原에 있으며 新良國(시라 키)의 祖가 되었다. 稻飯命이 신라의 왕이 되고나서 왕자 천일창이 나라 를 知古에게 넘겨주고 寶器를 가지고 돌아와서 但馬(다지마, 지금의 효 고)에 거주했다.”

“韓의 대가라국이 신라와 三已汶의 땅을 놓고 다퉈 蘇那曷叱知를 보내 그 땅을 바치고, 鎭將을 요청했다. 朝議에서 鹽乘津彦彦을 파견하여 진수케 했다.” 

“태후가 섭정을 하면서……(중략)……백제를 綏撫하고 신라, 백제를 침 략했다. 荒田別, 鹿我別을 파견하고, 백제 卓淳과 함께 신라를 쳤다. 比 自㶱 등 7국을 평정했다. 應神帝 친정후는 武內宿禰를 보내 筑紫를 지키 게 했다.  筑紫都督府가 여기서 일어났다.……(중략)……신라 백제 등 여 러 나라에 관사를 뒀다. 임나일본부가 이를 총괄하고 도독부가 이를 控 制했다.  고구려 역시 來貢했다.” 

요약하자면 신라의 왕은 일본인이고, 신라와 가락국이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이 와서 평정하고 조공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 땅에 임나 일본부를 두었고, 신라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도 조공을 바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교과서 이후로 1892년에 일인 하야시(林泰輔)가 쓴 조선사를 필두로  조선관련 역사서들이 쏟아집니다. 이른바 반도사관(半島史觀), 식민지사관의 출발입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기 전에 역사를 보는 눈을 바꾸는 작업을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한반도는 일본의 영향아래 있다는 것, 조선인들은 반도적 성격이 뿌리박고 있어서 사대(事大)가 심하고, 역사 발전이 더디어서 일본보다 한 천년은 뒤져 있고, 파당을 지어 싸우기를 즐기는 등 민족성이 저열하기 때문에 일본이 보호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어 퍼뜨린 것입니다. 이른바 ‘일한동조론'(日韓同祖論),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입니다. 

일본인들을 이러 사관을 지닌 이들을 일컬어 국학파라고 불렀습니다. 

2013년 오늘날까지 한반도 남쪽에 이런 사관에 물든 무리들이 횡행하고 있음은 심히 불행한 일이지요. 

그렇다고 일본의 모든 역사학들이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학파 또는 신유학파라고 해서 조선이 일본보다 앞선 문화와 전통을 지닌 역사를 지닌 나라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만 이들이 소수일 뿐인 것이지요.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또는  ‘그게 다 나하고 뭔 상관이냐!’며 머리 내 저으신다하여도 제가 뭐라고 말씀드릴 처지는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떠나볼까요. 

바벨론 포로기 시절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인들은 “왜 우리들의 처지가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으로 기록을 남겼고, 그들을 일컬어 신명기 역사가들이라고 한다고 했고, 그들이 쓴 책들이 신명기, 여호수아, 사무엘, 열왕기 등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광야에서 야훼 하나님과 히브인들 사이에 맺었던 계약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계약을 위반한 민족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고, 회개하고 돌아가면 용서와 구원이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고향 땅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 온 사람들은 비록 많지 않은 숫자였지만 그들만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돌아 온 땅에는 자신들이 생각하고  믿었던 야훼 하나님의 믿음과 자신들만의 민족 전통과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예날 이스라엘 12지파의 후손들이었지만 다른 민족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섞여서 혼혈이 많았고, 종교도 조상들이 지켜왔던 것과는 다른 이방적 의식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롭던 조상들의 성전은 파괴되어 있었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성벽조차 제대로 된 곳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들이 했던 물음을 다시 꺼집어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해답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바로 역대기와 에스라, 느헤미야서 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신명기 사관에 동의를 합니다. 다만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주체를 자기들 나름으로 명확하게 규정을 한 것입니다. 바로 성전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예루살렘모형

그리고 그 성전 중심 공동체의 핵은 다윗과 솔로몬이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성이었고 솔로몬은 성전이었습니다. 

역대기 상  1장이 족보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이 족보는 태초의 아담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 야곱을 거쳐 유다지파를 통해 다윗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솔로몬에 이어 남왕국 유다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예 역사에서 제외를 시켜버립니다. 

그들에겐 예루살렘과 성전만이 야훼 하나님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들도 북왕국 이스라엘에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한민족, 한 계약 백성으로 이해한 반면 역대기 역사가들은 아예 거들떠 보지를 않은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 역사가들은 왕들이 행실이 야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했는지를 평가의 잣대로 삼은 반면에 역대기 사가들은 왕들이 성전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잣대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절실했던 것은 바로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도성의 새로운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 역사가 그룹의 사관을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기록에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지요. 

첫째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위해 받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먼저 신명기 사가가 쓴 장면입니다.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 그러나, 내가 일찌기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그에게서도 그처럼 내 사랑을 거두지는 않으리라.  네 왕조, 네 나라는 내 앞에서 길이 뻗어 나갈 것이며 네 왕위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 사무엘하  7 : 14 – 16 

다음은 역대기 사가의 기록입니다. 

나는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네 선임자에게서는 내 사랑을 거두었지만, 네 후계자에게서는 그렇게 사랑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세워 준 이 왕조, 내가 세워 준 이 나라를 다스릴 직책을 그에게 맡겨 끊어지지 않게 하리라. 그의 왕위는 길이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나단은 환상 가운데서 받은 이 모든 말씀을 다윗에게 전하였다 . – 역대기상 17 : 13 – 14 

어떤 차이가 있지요?  다윗과 자식들에 대하여도 징계하신다는 내용이 한 쪽엔(역대기 기록) 쏙 빠진 것이지요. 

또 하나 볼까요. 

신명기 사가의 기록입니다. 

또 다윗은 모압을 쳐서 이기고 그 사람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 줄로 재어 두 줄 길이 안에 든 사람들은 죽이고, 한 줄 길이 안에 든 사람들은 살려 두게 하였다. 이리하여 모압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  – 사무엘하 8 : 2 

똑같은 장면을 전하는 역대기 사가의 기록입니다. 

그는 또 모압을 쳐서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았다.  – 역대기상 18 :2 

여기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자칫 잔인해 보일 수 있는 다윗의 모습을 쏙 빼버린 것이지요. 

(아이고 너무 늦어서 내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