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 – 기적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0

악령의 발작으로 그 아이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였읍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읍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마가복음 9 : 22 – 24

개인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처리해야 할 들이 있어 한 주간 글쓰기를 쉬었답니다. 게다가 하루 걸러 내리는 눈이  일상의 시간들을 마구 헝클어뜨린 탓도 한 몫했답니다. 아무튼 다시 시작합니다.

2012082741299465

 

음력 정월 대보름도 지나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엔 해마다 음력 정초이면 시장바닥이나 역광장이나  정류장 부근에 자리를 깔고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의 토정비결을 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고  기지, 예언, 술수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조선시대(1517-1578)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보는 책 토정비결을 쓴 점술가 정도로 토정선생을 생각하지만, 그는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낸 목민관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관내에 있는 굶주린 백성, 아픈 백성, 노인들을 돌본 일들에서 이즈음 사회적 화두인 “복지”를 실현한 선각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포천, 아산 두 고을 현감으로 있으면서 나라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서는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적어 올리며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는 백성 사랑하는 관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라는 비결서를 그가 썻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후대 사람들이 만든 비결서에 토정 행했던 여러 기행의 힘을 빌리고자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답니다.

아무튼 알수없는 내일에 대한 길흉의 점괘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또는 행운이나 길운을 꿈꾸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토정이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뭐 하늘의 이치를 알아서 사람들의 신수를 말하겠소. 하두 졸라서 보아준 게지. 또 그네들은 내가 신수를 안보아 주면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라도 기어이 신수를 보아야만 마음 편해질 것이니, 내나름대로 그들 사정을 들어 이리 저리 이야기하여 준 것 뿐이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했다고 전해오는 말이랍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함께  예수의 기록을 자신이 쓴 역사책에 남긴 사람으로 알려진 로마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기원후56년 – 117년)는 그의 책 <역사>에서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적을 행한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capture-20140216-145006

“알렉산드리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시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엎드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눈을 고쳐줄 것을 간청했다.  – 중략 – 그가 청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침을 자기의 뺨과 눈거풀에 문질러 달라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같은 신(세라피스 신)의 명령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서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일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병자들이 집요하게 매달리자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 중략 – 환자들의 간절한 바람도 있고 아부꾼들의 환호도 있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 중략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행운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다하여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 앞에 섰다. 문제의 그 손은 금방 정상으로 돌와왔고, 앞을 못보던 사람에게도 새로이 광명을 찾아왔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서는 이들을 볼 수 없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그 때 그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나 로마 베스파시아누스황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비결을 받고,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어떤 기원(祈願)과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Cosimo-Rosselli-The-Healing-of-the-Leper-detail-Cappella-Sistina-Vatican-1481-82

예수보다 먼저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던 요한이나, 당시 갈릴리를 근거로 해서 일어났던 갈릴리 유다의 반로마 봉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깊히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을 찾아 나섰거나 갈릴리 유다와 함께 반로마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함께 할만한 여건”들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거나, 반로마 항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지라도, 그 길이 원천 봉쇄된 처지로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병환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환자 등 각종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나 귀먹고 눈이 멀었거나 신체 이상이 있는 장애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 규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원 곧 소망은 병이 낫고, 장애로 부터 해방되어 자신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정상인으로서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줄 당시의 의술(醫術)은 그들이 기댈 곳이 못되었습니다. 값비싼 의약품들과 의술은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의 몫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댈 곳은 오직 ‘기적’뿐 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향해 나아간 것이고, 또한 그들이 찾은 이가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고, 그 기적을 본 사람, 베품을 받은 사람, 전해들은 이들의 반응들은 어떠했으며, 기적을 행한 후 예수가 보인 모습들을 두루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용 – 기적 – 2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은 법> – 29 

요한이 예수께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말리지 말아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 마가복음 9 : 38 – 41 

완전한 환상가(visionary)와 신비가(mystic)는 자신과 같은 환상가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의 영향은 곧 전해진다. 실천적 지혜의 사람은 이 세상일에만 민첩하며, 단지 머리에만 영향을 미칠 뿐 가슴에는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회오리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면, 결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신비적 신앙에 실천적 분별력이 동반될 때만,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나사렛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 또한 그 추종자들을 통해 그 다음세대들에게 끼친 영향이 바로 이런 성격의 것이었다.  – 죠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의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에서 

예수의 첫 사역으로 기적을 베풀자 떠돈 소문이 “미쳤다”는 것이었고, 그 소문에 놀라 예수를 찾으러 온  그의 가족들을 향해 “누가 내 가족(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고 되물었던 예수의 모습을 그린 마가복음의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마가복음 3: 31 – 35) 

가족에 대한 예수의 혁명적인 발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 누가복음 9 : 59 – 60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비단 유대인들의 전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도 우리들 실생활과 생각을 깊게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전통에서 보자면 거의 인간말종 수준의 선언인 것입니다. 

딱 예수의 말이였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으로 받을 일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나 당신 주변의 사람 누군가가, 아니면 당신이 참으로 신실한 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아무개가 만일 제 부모가 죽었는데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하나님 나라 소식을 전한다고  종로거리에 나가 “예수 천당”을 외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제정신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며 가족들을 심히 미워해서 전혀 돌보지않고, 자신마저 학대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으로서 할 일이겠습니까? 

가족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그야말로 가족에 대한 일반적 생각을 깨부수는 혁명적 선언이자 가히 급진적이었던 것입니다. 

Millais-christ-in-the-house-of-his-parents

그런데 꼼꼼히 다시 예수의 선포를 들여다보면 예수가 그의 선포를 통해 방점을 찍은 가족의 의미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범위를 끝없이 넓혀 확대한 것입니다. 

예수가 말한 가족은 핏줄 곧 혈연관계로 얽힌 관계가 아닌 그와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로 영역을 확대한 것입니다. 

먼저 예수가 찾아나섰던 갈릴리 마을의 살았던 사람들, 문둥병자를 비롯한 환자, 눈 멀고 귀먼 장애인들, 여자, 어린이, 사마리아인, 심지어 원수들 까지 예수의 가족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로마인, 헤롯일가, 제사장들, 레위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를 비롯하여 부자와 권력자들까지 예수의 가족일수 있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예수의 이러한 가족에 대한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예수는 비록 급진적, 혁명적 언사와 선언으로 가족을 정의했지만 그는 누구나 모두가 가족이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말씀이 바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마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가족에 대한 선언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폭넓고 깊이있게 하나님 나라를 만나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인 셈입니다. 또한 사랑의 범위를 넓히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비단 신앙적인 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진보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한반도의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 한반도 남과 북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 살던 한민족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면 반드시 곱씹어야할 예수의 가르침이랍니다. 

제 아무리 생각이 급진적이고, 제 잘난 구석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포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고 구원을 받는 전제가 바로 예수가 선포한 가족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랍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제대로 받아드리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가족 – 기적 1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8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출애굽기 20 :12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누가복음 14 : 26 – 27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35 

오늘은 시 하나 읽고 시작하지요. 

식구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다 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시인의 시집 <식구>에 실린 시랍니다. 그가 바라 본 식구들의 모습들 두어 개 더 보기로 하지요. 

뻘짓 

나가 시방 일흔인디 그기 다 헛으로 묵은 기라 돈 법네 시 씁네 바꺁으로만 사십 년을 나댕겨 부렀잖여 마누레고 자석이고 평생을 생과부로  생고아로 살았응께 타박을 받아도 싼 기라 그라도 남편이라꼬 애비라꼬 쪼까내지 안능 것만도 고맙제 

취한 노시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찌나 얼얼하던지요 집에 와서 잠든 아내와 딸을 와락 깨워, 이리 쪽 저리 쪼옥, 뽀뽀를 한참 해대고 나서야 얼얼한 게 조금 풀리더라구요 

거룩한 계보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어쩌랴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데우리 집 가계 家系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식구나 가족의 모습들도 많이 변했거니와, 가족이나 식구를 바라보고 느끼는 생각들도 많이 달라져가고 있습니다. 가족이지만 식구는 아닌 경우도 비일비재 하거니와 그 반대의 경우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 구성의 결합형태를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와 게젤샤프트(Gesellshaft)라는 말로 정의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F. Tönnies)입니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란 공동사회(Community)라는 말로써  인간의 본질의지(Wesenswille) 곧 타고난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말합니다. 가족이라는 최소단위의 사회로부터 시작해서, 지역적으로는 우리 마을, 우리 나라로 커져가고, 정신적으로는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 박제영이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들이야말로  게마인샤프트(Gemeinschft)의 원형일 것입니다.  

반면에 게젤샤프트(Gesellshaft)란 이익사회(Society)라는 말로써 인간의 선택의지(Kürwille) 곧 후천적 욕심에 따라 이루어진 사회를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틀입니다. 바로 이익추구를 위한 계약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최우선인 사회입니다. 

퇴니스(F. Tönnies)는 인류의 사회 발전은 공동사회 곧 게마인샤프트에서 이익사회 곧 게젤샤프트로 진행되어 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고독과 소외, 단절 등의 아픔을 겪게 됨으로 이 두 개념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해야 한다는 전망을 했답니다. 

그리고 작고하신 한국의 리영희선생은 그의 책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원리는 ‘인간의 가치’를 무시하고, 소유의 ‘물신 숭배’ 신앙으로 물적 생산과 낭비와 파괴를 인간 행복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어요. 그 대신 물질적 획득과 소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적 요소들은 손상되고 무시되고 파괴되는 위험도 정비례적으로 커집니다. 

자본주의사회 어디서나 그렇고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지요. 법률이나 종교가 아무리 해도 인간의 소유욕을 다스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인간화적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으로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현실적으로 결함과 약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인류사회의 현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유럽의 사회체제는 소련의 체제보다 훨씬 나은데다, 미국사회의 속성인 이기주의·폭력주의·극심한 빈부격차·범죄·타락을 상당한 정도까지 극복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구해도 이미 먼 옛날에 인류의 사회적 형태로 지나온 ‘게마인샤프트’(물질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유대가 기본원리인 공동체)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게젤샤프트’(서로의 이해관계의 계산을 매개로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와 적절히 배합된 인간 생활형태를 미래의 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겠어요. ” – 리영희의 ‘대화’에서 

자!  다시 예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 뿐만 아니라 당시 예언자나 메시야를 자칭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서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로 사람들을 불렀던 것처럼 어떤 이는 요단강가로, 어떤 이는 예루살렘성으로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들의 소리를 외치며, 때론 기적을 말하며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the poor

스스로 사람들이 있는 곳,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특히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각종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나, 장애자들을 가까이 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핸디캡 곧 장애나 각종 질환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과는 전혀 다른 사회법이 적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사람들은 격리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보통 일상적 삶을 사는 사람들 곧 자신들의 가족과도 격리된 삶을 살아야했던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니 이곳으로 오라!”고 목청껏 외쳐도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가 기본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 곁으로 나아갔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각종 기적을 베풉니다. 

그러자 떠돈 소문이 바로 “미친 놈”이었답니다. (마가복음 3 : 21) 

정작 문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놀란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를 찾아 집으로 끌고 올 요량으로 그를 찾아 나섭니다. 

이 때의 일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마가복음 3 : 31 – 35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통적 신념과 믿음을 뒤집어 엎는 반란이요, 신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미치지 않고 서는 감히 뱉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의 제 오계명을 송두리째 뒤엎는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광인(狂人) – 하나님 나라 3

<하나님 나라-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7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을 불러서 주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읍니까?” 하고 묻게 하였다. – 누가복음 7 : 18 – 19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 마가복음 3 : 21 – 22 

1991년 10월 30일 열린 한국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제 19차 임시 총회에서는 홍정수목사에 대한 교단축출 및 교수자격 박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에는 감신대 학장을 지낸 변선환목사의 교단 축출 및 교수직 박탈을 결정한 현대판 종교재판이 있었습니다. 

홍정수는 <베짜는 하나님 : 이단자를 위한 한국신학>이라는 그의 책을 통해 이른바 상생신학이라는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변선환은 그의 논문 <불타(佛陀, Buddha)와 그리스도> 등의 글을 통해 다원주의신학을 주장하여 이단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변선환은 그의 서서 10주기 행사에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복권선언을 받습니다.

“선생님의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해 출교시킨 후 과연 감리교회는 성장하고 풍성해졌나. 이제 사람들은 최고 심판관으로 변신한 교회가 무섭다고 한다. 종교는 무섭지 않은데 한국교회가 겁이 난다고 한다. 신학자들도 글 쓰거나 강연할 때 교회 눈치 살펴야 할 지경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기본적인 세상의 합리성과 상식이나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다음은 현재 LA 한아름교회에서 목회하는 홍정수목사가 최근에 한 말이다,

“언젠가 한번 지인들의 소개로 큰 부흥회를 가본적이 있다. 그 날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그리고 축복만 강조하지 예수란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번 붙잡고 물어봤다. 당신은 왜 예수를 말하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만 얘기하냐고. 그랬더니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그 사람 말인 즉, 하루 종일 지치고 힘들어 부흥집회를 와서 은혜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겪으신 예수 이야기를 하면 받을 은혜도 까먹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그 만큼 한국교회는 하나님은 찬양 할 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예수 하면 저마다 고개를 돌려 꺼려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말해도 마치 공식 처럼 ‘예수= 대속사건’이란 교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미신적인 신앙관에 안주하기에 십자가의 깊은 의미 그리고 부활에 대해선 일절 언급을 꺼려한다.” 

먼저 왜 이런 일들이 감리교단에서 일어났을까요? 감리교는 한국내 개신교 교단 가운데 세번 째로 큰 교단(장로교 합동, 장로교 통합, 감리교…순)입니다. 

감리교는 칼빈의 예정설을 기반으로 한번의 거듭남(예수를 구세주 곧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장로교와는 교리의 차이가 있답니다. 장로교가 예정설을 강조하는 반면 감리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에 따른 행위와 훈련의 과정을 통해 구원의 깊이가 깊어지고, 더욱 더 하나님 앞으로 완전하게 나갈 수 있다는 교리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만 보자면 장로교와 캐톨릭의 중간쯤에 있다고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는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곤 합니다. 그렇다고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다는 전통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국 감리교단에 속한 개교회들 – 특히 대형교회들은-은 거의 장로교, 특히 보수를 자칭하는 장로교회들과의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만큼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이랍니다. 이들이 교단을 장악하고 있기도 하고요. 변선환목사의 축출과정을 보면 그 배후에 명성(이즈음 아이들 인터넷 글쓰기를 흉내내자면 – 명성이라고 쓰고 악명으로 읽어야 하는) 드높은 김홍도같은 인물이 있답니다. 

제 삶의 반은 장로교 통합에 속한 교회에서 보냈고, 이민와서 인생의 반은 미국연합감리교단에 속한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한 교회, 이민와서 한 교회입니다. 제 경우에는 교회 뿐만 아니라 교단이 제가 예수쟁이로 사는데는 별반 주요한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연합감리교단에 속한 한인교회들 역시 한국내 감리교단과 마찬가지로 장로교단과 큰 차이가 없답니다. 한인교회에서 교리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징표이기도 하지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 복음주의(근본주의) 신앙 전통과 유교적 한국인들의 사회인식이 접목된 한국이나 미국 이민사회 한인교회들의 독특함은 따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하튼 홍정수목사와 변선환목사는 교단의 권세가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받은 바 있거니와, 깊은 물정이나 속내에 관심없는 이들에겐 “미친 놈”취급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Christ_Blessing_the_Children_Nicolas_Maes_1652-53

자 ! 이쯤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인식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성서의 말씀들 가운데 이사야서가 있습니다. 두 군데를 찾아 읽어 보도록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 – 이사야 9 : 5 – 6”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 이사야 52 : 6 – 7” 

새로올 메시야의 모습과 그의 오심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 헤롯왕가를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이 주인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줄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특히나 갈릴리인들 가운데는 무력투쟁을 통해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몰아내고 유대왕국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열심당(젤롯당)의 근거지가 갈릴리에 있었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향한  “당신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분이냐?”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은 비단 세례요한만의 질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가 이야기한 하나님나라 탐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서 마가는 예수가 본격적으로 그의 선교를 시작하려던 무렵 먼저 “미쳤다”는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고, 가족들이 미친 예수를 붙들러 나섰던 사실을 전하고 있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율법학자들도 예수가 베엘제불에게 사로잡혔다느니 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하고 떠들었다. – 마가복음 3 : 21 – 22” 

예수는 왜 그의 일을 시작하자마자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요? 이제 그 까닭을 찾아 함께 나서 보기로 하지요.

살아있음이 곧 힘

이곳에 정착한 이래 올 겨울 같은 날씨는 처음인 듯 합니다.  손님들 중   24년 전 겨울이  꼭 이랬었다고 하는 분도 계셨지만, 제 기억으로는 그땐 눈은 많이 내렸었지만  이렇게 춥지는 않았던 것 같답니다. 무릇 기억이란 자기 중심적이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올들어 빤작한 날들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랍니다. 눈과 진눈깨비,  추위가 번갈아  가며 되돌이표에 맞추어 계속되는 기분이랍니다. 어제는 온종일 눈이 내리더니 오늘 밤에는 진눈깨비와  얼음비가 내린다는 예보랍니다. 

제가 사는 곳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북부와 중북부를 비롯한 전역이 이상 기후로 몸살을 앓는 겨울인 듯 합니다. 

이상 기후로 인해 전체적인 국가 경제가 침체되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대부분 한인 이민 일세들의 주종목들인 구멍가게들(mom & pop store)의 고충이 만만치 않은 시절이랍니다. 여기 저기서 ‘힘들다’는 소리가 넘쳐난답니다. 

저라고 별 수 있겠어요. 가게 문 늦게 열고 일찍 닫고, 아니면 아예 문을 열지 못한 날들도 있는 것을요. 

이러 땐 쉬어 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입니다.  닦고 쓸고, 요리도 해보고… 무엇보다 글 한 줄 읽는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이지요. 

<숲은 가장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칠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부드러워진다. 나무가 벌거벗는 것은 실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의 몸짓이다.  그 자연의 모든 소리와 모습이야말로 내 정신에는 만병통치약. 신도 이보다는 건강하지 않으리라.> – 신이 만든 작품이 신보다 건강하다는 이 자연주의자의 목소리는 바로 헨리 데이빗 쏘로우랍니다. 

h d thoreau

제가 즐겨 읽는 글들 가운데 하나지요. 일상의 복잡한 것들이 엉긴 실타래 같을 때 뽑아 읽는 책이지요. 마음이 아주 편해 지거든요. 

그의 또 다른 글 하나1850년 저널지에 실렸던 글이랍니다. 

<당신이 언젠가 좋다고 고백했던 일을 좀 더 해보라. 이 사회와 가장 올바른 판관이 당신에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당신 자신을 개혁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하라. 

아무 이유없이 자신에 대한 만족과 불만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두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내게도 해당되는 얘기지만. 그 나무를 키우라. 당신의 토양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그 나무를.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모든 것은 실패이며 또한 성공이다. 만약 과거가 현재 당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아무리 희귀한 금시계라해도 당신보다 더 값지고 휼륭한 사고력을 지닐 수 있겠는가?

당신이 어떤 시험인들 통과하지 못하겠는가? 생각의 원천이 다시 솟아흐르지 않겠는가? 

한번쯤 처벌도 받아보라. 자신감을 가져라. 경건해지려고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그런다고 고마워할 사람도 없으니. 

만일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해보라. 실험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질러보라. 지금이 당신의 기회이다. 

의심을 품지말라. 그런 것은 여인숙으로나 보내버려라.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말라. 그럴 필요가 없다. 

신문을 읽지말라. 생각에 잠길 기회를 많이 만들라. 할 수 있는대로 우울해 보고 그 결과를 기록하라. 운명을 즐겁게 껴안으라. 

건강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일에만 전력투구하라. 속으로 이미 죽었다는 것을당신 자신말고 또 누가 알겠는가? 

쓸데없이 겁내서 멈추지 말라. 보다 무서운 일들이 계속해서 닥칠 것이다. 일찍이 오지 않았던 그런 일들이. 인간은 두려움으로 죽고 자신감에 차면 산다. 

야채들처럼 그저 유순해지기만 하지 말라.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라. ‘인간의 불복종과 그 열매의 달콤함이여!’ 

남들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지 말라. 당신말곤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라. 그밖의 것은 과감히 생략해 버려라.> 

-도서출판 이레. <소로우의 노래> 헨리 데이빗 쏘로우. 강은교 옮기고 엮은 글에서- 

이즈음 힘들다고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이지요. 살아있음은 늘 힘이고 고귀한 것이니까요.

1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주인 – 하나님 나라 2

<하나님 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26 

사무엘이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 주시오” 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아 야훼께 기도하니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에집트에서 데려 내온 이후 이날 이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어라.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 – 사무엘상 8 : 6 – 9 

나를 왕으로 세우시며 선포하신 야훼의 칙령을 들어라.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으로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철퇴로 짓부수어라.”  왕들아, 이제 깨달아라.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신을 차려라. 경건되이 야훼께 예배드리고 두려워 떨며 그 발 아래 꿇어 엎드려라. – 시편 2 : 7-11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 제왕들이 솟아 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 오는구나. 머리를 들고 사방을 둘러 보아라. 모두 너에게 모여 오고 있지 않느냐? 너의 아들들이 먼 데서 오고, 너의 딸들도 품에 안겨 온다. – 이사야 60 : 3 -4 

오 주여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왕 다윗의 아들을 세우소서…… 그에게 힘을 주사 불의한 통치자들을 물리치게 하시며 예루살렘을 밟아 멸망시킨 열국의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소서. 그는 열국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멍에 아래에서 그를 섬기게 하실 것이니이다. – 위경인 솔로몬의 시편 17 : 21-30 

지난해 필라델피아와 제가 사는 델라웨어에서 아주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하여 미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가진 중앙대 명예교수인 신창민의 강연회였습니다. 강연회 제목은 그가 쓴 책의 제목인  “통일은 대박이다.” 였습니다. 

모임을 주최한 이들과 이 지역에서 나름 진보운동을 하는 이들로 부터 몇 차례 모임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이 왔었답니다. 먼저 그의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책을 먼저 읽어보고 참석여부를 판단하려고 한 까닭은 신창민교수와 함께 그 강연회 강사로 나선 또 다른 이가 영 꺼림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는 이른바 6.3 세대에 속하는 이로써 1960대에 유학을 온 이곳 델라웨어 초기 한인 이민자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제법 오랜 시기를 이 동네에서 살다가 이젠 플로리다로 이주한 이였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 이의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도저히 “통일”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이였답니다. 오히려 “대박”쪽과는 연계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 강연회가 썩 내키지 않았었답니다. 그래 신창민교수의 책을 먼저 읽었고, 결국 참석하지 않았었답니다. 

까닭은 “통일은 대박이다.”는 강연회는 여기 미국이 아니라 한국내에서 할 일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강연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전해 들은 “한국내에서 자기 소리를 내기 힘들어서…”라는 신교수의 말을 들으며 안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학문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수준이 아니라 “운동”차원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려 했다면 그들의 행보는 그저 시간낭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초 박근혜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다”라는 깜작발언에 대한 신창민 교수의 응답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그저 웃고 말았답니다. 신교수의 반응을 전한 어느 신문기사 내용입니다. 

우리 역사상 이승만 대통령 이래 통일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는 대통령은 박 대통령이 처음”이라며 “늦었지만 다행이다”라고 밝혔다. 

통일에 대한 생각은 남과 북이 틀리고, 봉건 전제주의적 독재체제인 북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남쪽에서도 여러 갈래의 다른 생각들이 있거니와 해외 한민족들 사이에서도 정말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분들도 셀 수 없이 많고요. 

자!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던 그 시대 사람들 역시 오늘날 한민족들이 “통일”이라면 다가오는 여러가지 다른 생각들과 자기 의견처럼 다양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통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밑바닥에는 “남북은 하나였다”라는 역사적 경험에 따른 일치된 생각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 역시 다양하게 다른 생각들과 함께 일치된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 있었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양한 다른 생각들은 당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하는 자기 자리에서 보는 입장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테면 팔레스타인에서 사느냐, 해외(로마, 이집트, 시리아 등)에서 사느냐에 따라 생각의 차이가 있었거니와, 같은 팔레스타인에서 살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사느냐 갈릴리에서 사느냐에 따라 다른 생각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두개파냐, 바리새파냐, 에세네파냐에 따라 다르고, 경제적 빈부의 차이에 따라 다름이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히브리족에서 시작하여 다윗과 솔로몬왕국을 이어 남북으로 갈라졌다가 왕국의 멸망이후 포로신세가 되고 바벨론, 페르시아, 희랍, 로마로 이어지는 식민지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신앙적 공통의 고백인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의 생각속에는 자신들의 부모세대나 조부모세대에 누렸던 하스몬왕조라고 하는 유대왕국의 역사적 경험이 손에 쥘듯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오늘 예수시대 당시 예수의 선포를 들었던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노라고 우리민족의 “통일”이라는 개념과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를 대비시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한민족과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되새김일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따로 하도록 하고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들을 먼저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구약시대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먼저 사무엘이 최초의 왕 사울을 세울 때의 경험입니다. 처음 왕을 세운 일은 야훼 하나님이 마지못해 허락한 유대인들이 지은 죄였습니다. 하나님 왕국(여기서 부터 예수의 하나님 나라까지는 “나라”가 아닌 “왕국”이라는 말이 적절한 것인데요….)의 주인은 야훼 하나님이어야 마땅한데 거기에 중간자인 왕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간자인 왕은 야훼 하나님께서 부여한 권위가 있어 유대 뿐만 아니라 전세계, 전 우주를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었답니다. 그 정점에 다윗왕이라는 모델이 있고 그 모델과 함께 하는 야훼 하나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영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남북으로 왕국이 나뉘이더니 끝내 바벨론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경험을 합니다. 이 때부터 유대인들을 새로운 메시야가 반드시 온다는 메시야 신앙을 지니게 됩니다. 다윗의 뒤를 잇는 메시야가 나타나 유대왕국을 새로 세우고, 그 유대왕국이 전 세계의 주인이 된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여전히 야훼 하나님이 보내 주실 메시야가 다스리는 왕국이었습니다. 

다윗왕국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 가운데는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였던 헤롯일가의 왕국을 극복하고, 유대인들의 모델인 다윗같은 정치적 메시야가 나타나 유대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왕국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지녔던  일차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