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호흡

신(神)의 한 호흡은 몹시 더디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다. 이미 노년의 길에 들어선 내 지난 세월을 돌아보아도, 신이 과연 숨을 쉬기나 할까?라는 의심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 그 모두 내 무도와 무지 탓.

그 눈트임을 가져다 주는 이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신 앞에 서있는 사람들.

겪은 아픔과 겪고 있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자신의 일처럼 듣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란 신 앞에 드리는 기도. 나와 우리들이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이 다시 겪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

천년 같았을 그들의 십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더디고 긴 신의 호흡을 함께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잠시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내 짧은 쉼에 매달리지 않고 신의 긴 호흡을 느끼는 은총의 자리일 듯.

말표 운동화

운동화를 하나 샀다. 딱히 내가 가난하거나 검소한 때문이 아니라, 입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편인지라 옷이나 신발 등속은 그저 편하면 대만족이다. 한번 좋다 싶으면 다 헤어져 꿰메 입고 걸칠만큼 가까이 두고 사는 편이다.

지금 신고 다니는 운동화는 뒷굽이 거의 달아 없어질 만큼 신었으니  족히 오년은 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내가 검소하거나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사이 몇 켤레 새 것들을 사놓고도 신지 않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불편해서다.

오늘 산 운동화는 제법 마음에 들게 편하다.

새로 산 까만색 운동화를 신고 떠오른 아주 오래된 옛 생각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줄곧 신고 다녔던 운동화는 말표 운동화였다. 고등학교 때는 학생화라고 해서 가죽구두를 신고 다니던 아이들도 있었다만, 나는 줄곧 까만색 말표 운동화였다. 학교에서는 그런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교회였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달랐다. 다니는 학교들도 서로 달랐고, 아무래도 편한 일요일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입성들 차이가 눈에 띄곤 했었다.

그 때만 해도 나이키 등속의 외국 브랜드는 커녕 국제상사의 프로스펙트 등의 국산 브랜드도 나오기 전이었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겠다만, 그런 브랜드 제품을 흉내낸 유사 제품 운동화를 신고 교회에 오는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또래 계집아이 하나가 제 친구에게 나직히 소근거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재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 운동화야!” 나를 향한 소리였다.

예나 지금이나 ‘촌스럽다’는 말이 내겐 거슬리지 않아, 까만색 말표 운동화를 신고 다니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아이와 같은 대학교를 다니며 때때로 흰색 말표 고무신을 신고 다니곤 했었다.

오십 년 세월도 훨 지난 옛이야기다.

어찌어찌 오십 년 전 그 옛 친구들을 한 번 만날 요량이다.

말표는 아니다만 까만 운동화를 신고.

  • 지난 주일에 거둔 글라디올러스 구근들을 말리고 정리하여 보관하다. 내년 여름을 위하여.
  • 올 늦봄에 거둔 튤립 구근들을 심다. 내년 봄을 위하여.

한恨의 사제(司祭)

이즈음엔 그리 많이 듣지 못하겠다만 내 스물 나이 시절이었던 1970년대엔 한(恨)에 대한 이야기들이 차고 넘쳤었다.

한을 품고 사는 사람들, 맺힌 한을 부둥켜 안고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들, 피를 토하며 쌓인 한들을 외치며 하소연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이른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되어 떠돌던 시절이었다.

흘러간 시간들을 돌이켜 따져보니 오늘날 가짜 뉴스들이라고 일컫는 당시의 유언비어들은 거의가 진실이었으며, 그 시절 맺힌 한들을 푸는 일은 여러 갈래 방법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한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 시 등의 문학적 방법 뿐만 아니라 사회학의 구조로 또는 철학으로 나아가 신학적 방법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들로 이어졌었다.

그런 이야기를 풀어 냈던 한 사람 가운데 서남동 목사님이 계셨다. 그는 살아 생전 한 맺힌 사람들의 응어리를 풀어 주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던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도 그렇고 삶 속 행동으로  그를 온전히 실천하며 떠난 사람이었다.

오늘 밤, 한국 뉴스 한 꼭지를 보다가 <한의 신학>을 설파하셨던 서남동 목사님을 기린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주창과 그의 신학적 고뇌와 그의 외침이 2023년 오늘,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땅에 절절하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한(恨)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러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無名)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

사람 조국(曺國)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실로 다양할게다. 나는 그에게서 한 맺혀 오늘을 사는 반도 남쪽 민중들의 모습을 본다.

그를 다루는 숱한 이야기들 속에서 비겁, 야비, 질투, 시기, 모함, 집단 린치 등등 오늘날 반도 남쪽의 어둡고 음습한 가진 자들의  모습과 할 수 있는 한 그 가진 자들과 함께 해보려는 그저 그런 이들의 모습들을 보곤 한다.

서남동 목사님은 지식인(지식인을 자처 하는 한)은 민중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주창을 종종 하셨다.

나는 사람 조국이 뱉아 낸  단말마(斷末魔)를 통해 그에게서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을 만난다.

그와 그의 가족들의 한풀이가 이루어지는 날을 위하여! 함께 나아가는 이들과 작은 몸짓일지라도 이어갈진저.

*** 어쩌다 이리 무지, 무식에 야비함과 비겁함을 더한 사기, 도둑, 강도떼들의 전성시대가 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는 구석 하나. 이 땅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한을 풀고 이웃의 한을 풀고자 애쓰며 함께 하는 한의(한풀이) 사제들이 늘 함께 한다는 사실 더하여 진실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조국 “차라리 옛날처럼 나를 끌고 가서 고문하라” < 사회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경칩에

지난 삼 년 기승을 부릴 때도 잘 넘어 갔건만 이젠 막판 이라고들 하는데…. 아내가 덜컥 그 떠나가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열흘간 고생을 하였다.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는 독감처럼 우리와 함께 가려나 보다.

아내가 털고 일어난 날, 나는 나무 묘목 몇 그루를 심었다.

겨우내 계획했던 일로 특별한 능력이나 경험도 없거니와 이렇다할 취미도 없고 더하여 넉넉하게 부를 쌓아 놓지도 못한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된 노년의 첫 걸음이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그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린다들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그 나이에 이를 수 있는 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그저 여기까지 이르러 다만 몇 년 앞날을 준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넘치는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터.

그 맘으로 목련, 백일홍, Redbud 그리고 수국 몇 뿌리를 심었다.

내 노년의 봄, 경칩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