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신촌기(脫新村記)
대야성, 복지, 캠퍼스, 독수리…
찻값 꽤나 부조했던 다방 이름들입니다.
누나네 집, 페드라, 태정식당…
막걸리값 수월치 않게 건네 주었던 술집들 이름이지요.
꽉 찬 10년, 제 대학생활은 그렇게 신촌과 함께 했었지요.
대학을 다니던 그 어느 한 해도 제대로 수업을 다 해 본적 없는 학교생활이었지요.
큰 딸은 간호대학 나와 조신하게 있다가 시집 보내고, 아들놈은 대학교수를 시키고… 아버지의 소박한 꿈을 허문 것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나와 제가 거의 동시에 벌린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코 앞에 두고 있던 누나는 탈신촌(脫新村)을 선언하였습니다.
“전 졸업하면 미국으로 취업이민 가요.”
고집 세신 어머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누나는 그렇게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칼이 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형사들이 아들을 찾을 때만 하여도 아버지는 “큰 일 아니겠지”하셨답니다. 아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유치장으로 구치소로 들락거리시던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셨습니다.
학교도 짤리고 골방에서 쳐 박혀 있는 아들을 보시며 아버지는 아직 꿈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버지의 꿈을 다시 살리시던 1980년 5월.
피신한 아들 덕에 평생 처음 무서운 곳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셨던 아버지는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시던 화랑무공훈장을 탓하시며 이민짐을 꾸리셨습니다.
그 해 벌어진 어머니, 아버지의 탈신촌입니다.
이따금 신촌거리를 배회하던 제게 신촌은 이미 제 어릴 적 신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촌을 떠나신 지 7년 후.
요식행위일 뿐이라며 내어민 종이에 각서라는 것을 쓰고 받아 든 대한민국 여권이었지요. 그날 밤 미국에 계신 어머니는 전화통에 대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이 눔아! 책 같은 걸랑 하나도 갖고 오지 말어! 일할 수 있는 작업복만 챙겨 가지고 와!”
그렇게 신촌을 떠났답니다.
<그리고 13년 후>
11박 12일.
13년만의 귀향이었다. 아기자기한 반도의 산하(山河)모습을 한 창 밖 구름들을 보며 서울이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크고 깨끗한 영종도 새 공항과 빠르고 친절한 입국절차에서 엄청나게 변한 도시를 예감할 수 있었다.
새벽, 시원히 뚫린 공항로를 달리며 바라 본 낯 익은 산들과 거기 휘며 춤추듯 자라는 나무들이 열 세해의 공백을 메워버렸다. 김포쯤해서 눈에 들어 온 거대한 아파트군(群)들은 한강 호위병처럼 서서 강변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강 건너 난지도에 솟아 오른 두 개의 산봉우리는 흐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잘 꾸며진 강변 고수부지 공원들과 제법 푸른 도시 녹지공간들은 남산을 가로 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들의 삭막함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 뿐이랴! 짐을 풀기 바쁘게 나선 서울거리는 정말 깨끗하였다.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찾을 수 없는 거리는 매우 낯 선 것이었다. 시내는 물론 외곽도시까지 잘 연결된 깨끗하고 시원한 지하철은 그 끈끈하고 무더운 날씨를 잊게하기에 충분하였다. 모든 거리를 뒤덮은 자동차의 행렬은 이미 나를 주눅들게 하였지만 그 복잡함에 비해 제법 질서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튿날, 내 고향 신촌을 찾아 가는 길에서 나는 급작히 무너지고 말았다. 지하철 신촌역에서 내리자 이십대 아니 십대들의 물결에 휩쓸리고 말았는데 그들을 뚫고 친구들과의 약속장소로 가는 채 1Km도 안되는 그 짧은 거리에서몇 번이고 주저앉고 싶었다. 아아! 내 유년과 소년, 청년을 보냈던 그 거리 어디에서도 낯 익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스무명 남짓한 옛 벗들의 만남의 장소로 갈비집을 택한 까닭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그 곳을 떠나 사는 친구들모두가 기억할 수 있는 장소란 스무 해 넘게 한 곳에서 장사하는 그 갈비집밖에 없었으므로.
완전히 변모한 거리 모습에 비해 벗들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은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더러는 흰머리를 이고 더러는 대머리를 겸연쩍어 하며 악수를 나누었지만 세월의 두께로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잊게 할 수는 없었다. 바쁜 서울생활에 나 뿐 아니라 그 곳에 사는 친구들끼리도 오랜만인지라 서로의 근황과 옛 시절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그 도시의 복잡함을 쉽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리들이 어린시절 드나들던 목로주점이 그 시절 그 모습대로 있다는 것을 떠 올렸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야고 되묻곤 일어나 우르르 그 집을 찾아 나섰다.
그랬다. 이제는 없어진 신촌시장 한 귀퉁이 바로 그 자리에 옛날 모습을 안팎으로 고스란이 간직한 채 막걸리와 소주그리고 동태찌게 안주를 파는 목로주점이 있었다. 그 밤 우리는 “이 곳을 역사 보호구역으로 정하자”는 흰소리를 해가며 마시고 마시고 그렇게 취했다.
그 밤 그 곳에서 함께 취했던 벗들은 모두 서울을 버티는 중년들이었다. 정치인, 회사중역, 대학교수, 행정가, 변호사,목사, 성공한 자영업자 – 서울을 버텨 내야만 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그 밤 나는 그들이 지쳐 있음을 보았다. 그들의얼굴 어디에고 서울의 버팀목으로서의 자부나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모습, 채울 수 없는 허탈, 마지못해 버티는 무력감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랬다. 그 밤 서울은 내게 내 벗들의 지친 얼굴처럼 다가왔다. 헤어져 돌아가는 길, 그 거리를 사랑하는 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고향이므로. 내 조국이므로. 내 어머니의 땅이므로.
문질러도 문질러도 희어 질 수 없는 피부색처럼 끈질긴 인연의 땅이므로.
(2001. 7. 17)
그리고 다시 십년 후인 2011년의 추억들은 이어집니다.
2011년 딸과 함께 옛 추억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