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4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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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 12

오늘 내가 사는 곳의 주지사는 학교 문을 일년 동안 닫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단다. 지난 달에 5월 15일까지 학교 문을 닫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온 주지사의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까지는 각급 학교가 문을 열지 않을 것 같다.

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가계 형편은 긴 겨울이 될 듯 하다. 살며 걱정 없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뒤돌아 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상업고등학교를 나왔건만 난 이재(理財)와는 참 거리가 멀다. 나를 조금만 아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다.

이제껏 살며 몇차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겠노라고 야심차게 일을 벌려 보았지만 그 때 마다 번번히 거의 만신창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나마 삼십 년 넘게 붙들고 있는 세탁소 하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아내가 버텨낸 산물이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 지 어느새 한달 째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의 가계를 재단해 볼 능력이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 온 나이 값은 하노라고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보는 이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는 주판알엔 관심 없고 그렇게 주판알을 튕기는 나를 기특히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돈이야 이 나이에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끝난 터이라 주판알 엎어 버리면 그만일 터이고, 문제는 느닷없이 남아 도는 시간이다.

남아 도는 시간 사이로 잽싸게 찾아 드는 놈은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 이겨보고자 손에 든 것은 삽, 바로 삽질이다. 집 앞뜰 화단을 뒤엎고, 지난 해 가을 몽땅 베어버린 뒤뜰 대나무 밭을 뒤집는 삽질이다. 꽃 심고, 채마밭 한번 일궈 보자고 작심하며 해 보는 삽질인데, 모를 일이다. 꽃을 보게 될런지 또는 우리 부부 저녁상에 올릴 푸성귀를 거둘 수 있을지도.

그냥 요 며칠  하루 하루 그 꿈으로  삽질하는 즐거움에 그칠지라도, 그 또한 하루의 즐거움이려니.

늦은 저녁, 뉴스들을 훑다 보게 된 동영상 속 장면 하나에 딱히 뭐라할 수 없는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 하나.

세월호 6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한 국회의원 당선자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흐른 눈물이었다.

이런 젊고 따듯하고 유능한 이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그려보는 재미라니.

욕심이 아니라 하루를 위하여 드는 모든 삽질엔 뜻이 있을 터이니.

또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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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10

TV에 빠져 있던 아내가 혼자 중얼거리며 숫자를 읊더니 ‘에고 오래 되었네’하며 한마디 던졌다. ‘벌써 사십 일 년 전 이네…’. ‘뭐가?’하는 내 물음에 대한 응답. ‘우리 만나 거…’

코로나 바이러스로 갑자기 차고 넘친 시간에 조금씩 적응되어 간다. 이젠 공원 출입 인원도 제한한다는 주정부의 발표 이후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뒷뜰에 텃밭이라도 만들어 놀아볼까 하며 세운 하루의 계획은 비바람 치는 날씨 탓에 내일로 미루었다.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오래된 서류 상자들을 꺼내 정리하다. 정리했다기 보다는 오래  묵혀 둔 쓰레기 파기 작업이었다. 종이 파쇄기가 온 종일 일을 참 많이 했다. 오래된 각종 기록들 일테면  내 잡기장이나 은행 및 세무 서류, 비지니스 관련 온갖 문서들 또는 동네 일하면서 쌓아 둔 각종 문서들을 파쇄하며 새삼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 마저 애써 지우다.

그러다 듣게 된 아내의 시간 ‘사십 일 년’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이라는 성서구절 하나. 그것이 어찌 새 하늘 새 땅을 주관하는 주(主, 神,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그 무어라 부르든)이거나 새 하늘 새 땅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자들 만이 누릴 몫이랴!

그저 오늘을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삶을 누리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진 물음이자 답인 것을.

마치 시간이 정지 되어 있는 듯한 이즈음 이야말로 사람살이가 왈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하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보니 부활주일이 코 앞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는 곳에서 더욱 가까워진 이웃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날 수 있기를.

사십 일 년이 이미 하루이고, 때론 하루가 사십 일년이 아닌 천년이 되곤 하는 우리 부부 역시. 사랑으로.

(어쩌다 찾아 낸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다.)

하루 – 8

‘주(州) 내 노인 요양원에 코로나 바이러스확산으로 가족들 임종 지키지 못해’ – 오늘자 동네 신문 온라인판에 오래 동안 걸려 있는 머리기사 제목이다.

오늘까지 주내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이 노인 요양원에서 나왔단다. 신문기사는 가족 면회가 차단된 노인 요양원의 현재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임종을 홀로 맞이해야만 하는 노인들의 모습과 빤히 알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가족들의 처지를  꽤나 장문으로 전하고 있다.

노인 요양원에도 여러 등급이 있고, 고급 요양원에서 확진자나 사망자가 발생한 일은 없단다. 비교적 저소득층이 가는 요양원에서 주로 확진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단다. 기사는 주내 요양원의 실태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기사를 읽으며 내 머리속은 여러모로 복잡해졌다. 약 일여 년 넘게 노양원에서 지내시다 지난 정월에 돌아가신 장인 생각과 치매기 날로 깊어지고 쇠해지시는 부모님을 할 수 있는 한 요양원에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지내는 내 형제들과 가족들 생각 때문이었다.

복잡한 머리 속이 내 맘대로 풀리지는 않을게다. 그저 하루 하루 시간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미 먼저 가신 장인이나 장모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저 모든 것 감사하므로 기억해야 할 터이다. 오늘 하루 내 삶을 감사할 수 있는 맘 하나, 먼저 가신 이들이 키워 준 것이다.

저녁 나절에 애기처럼 맛나게 드실 어머니 생각하며 우거지 갈비탕 진하게 우려 끓였다. 국을 끓이며 내일을 사는 힘을 얻다.

나는 그저 기억만 할 뿐이지만, 기억함으로 좋은 세상을 바꾸려고 늘 애쓰는 참 좋은 친구들의 삶을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그 정열이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고맙다. 그들로 하여 내일을 사는 내 힘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래, 모든 삶은 죽음에 닿아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기억을 통해 영생하는 삶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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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6

내 가게가 있는 샤핑센터 입주 업소들 중 지난 화요일 주정부가 내린 명령에 따라 현 상황에서 영업을 지속할 수 업소는 딱 세 군데 뿐이다. 큰 식품 체인점인 ACME 와 주류 판매업소 곧  liquor stores와 세탁업인 내 가게가 그것들이다.

나는 아직 여러모로 헷갈려하며 다음 주부터  당분간 주 사흘간만 하루에 여덟 시간 씩 영업을 하려한다.

오늘은 비록 가게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함께 가게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다음  주부터 원하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줄 수제 마스크를 만들었고, 나는 손님들과 우리 부부 사이의 거리를 서로간 모든 가능한 동선에서 일정 간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카운터 언저리를 재배치 하였다.

주차장에 차량은 평소보다 1/5 수준도 채 안되는 듯 했다. 좀처럼 보기 힘들던 마스크 쓴 샤핑객들을 이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내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식품점이야 꼭 필요한 것이고, 세탁소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치자고…. 근데 술 파는 집이 왜 꼭 필요한 업종이 되어야 하지?’… 내 대답, ‘글쎄???’

아내의 물음에 대해 해답을 준 이는 우리 동네 주지사이다. 오늘 동네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주지사와 일문일답을 하는 질문자가 물었단다. ‘주지사님, 술 판매 업소들은 여전히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왜 그 업종이 지금의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것인지요?’

주지사의 대답이란다. ‘불행하게도 우리 델라웨어 사람들 중에는 약물 중독자들(여기에 많은 알콜 중독자들이 포함 되는 듯) 이 많답니다. 만일 술 판매 업소를 닫아 버린다면, 중독자들이 갈 곳은 딱 한 곳이랍니다. 바로 병원이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이 병실을 차지하기 시작한다면,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관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이 사회의 바닥 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대답이 아닐까? 그러고보니 술 판매업 영업을 정지시킨 이웃 펜실베니아 거주민들이 아침 일찍 우리 동네 liquor stores 앞에서 길게 줄을 선 뉴스를 본 게 며칠 전이었다.

그래, 모든 일엔 다 까닭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런 저런 하루의 고민과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아내와 함께 오늘의 공원 길을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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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4

일하지 않는 하루는 여전히 길다. 이른 아침 가게로 나갔다. 당분간 영업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주정부가 내 업인 세탁업은 영업 가능한 업종으로 분류해 놓은 터라 만일을 대비해 놓자는 심산으로 가게에 나가 앉아 여러 궁리를 해 보았다. 우선 며칠 동안 손님들과 최소 9피트 정도를 유지하면서 영업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향후 며칠 간 그렇게 가게를 꾸며 볼 요량이다.

오후엔 목욕재계하고는 마스크에 장갑을 끼는 중무장 차림으로 노인들을 뵙다. 누군가 말했다지, ‘신은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이젠 애기가 되신 어머니는 돌아서는 내 등 뒤에서 읊조리셨다. ‘얘야, 얘야, 그저 조심하거라!’

저녁 나절 읽던 책들을 손에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신문들을 훑다. 그러다 눈 번쩍 뜨이게 한 컬럼 하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을 찾자는 글이다.

<올 가을에 투표할 때, 오늘을 함께 사는 공동체로서 우리는 누구인지 또한 사람들을 서로 돌보고 연결 시키는 이들은 누구인지를 기억합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어진 분열을 거부하고, 모두를 위한 굳건한 내일을 만들어 나가는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 나갑시다.

델라웨어인들은  이 질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내고 우리 공동체가 다시 번영할 수 있도록 내부적 결속과 창조적인 방안을 찾아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올바르게 함께 한다면, 우리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의지하고 그 연결의 고리를 단단히 한다면, 우리 모두는 오늘의 상황을 이기고 더 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

가을 선거를 앞 둔 여기나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한국 선거나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렴, 이 상황이 끝나면 사람살이는 또 한 발자국 성큼 진보적인 사회로 나아갈 터이니.

이렇게 또 하루에 대한 감사다.

 

하루 – 3

습관이랄까? 냉장고를 채워 놓고 살지 않는다. 그저 그날 그날 먹을거리를 사다 조리해 먹는 편이다. 노인네들 식사를 해 나르는 형편이 되면서 더욱 냉장고 신세를 지지 않으려 애쓰는 쪽이다. 신선한 게 좋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게 바로 코 앞에 큰 그로서리 체인이 있는 덕분이기도 하다.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땐 우리 두 내외가 외식을 하는 게 더욱 실리적일 수도 있다.

허나 세월이 하수상하여 간만에 냉장고를 그득 채웠다. 아내와 내가 당분간 장을 안 보아도 몇 주간은 너끈히 지낼 수 있을게다.

오후에 주지사 명령이 떨어졌다는 전화 알람 신호가 왔다. 모레 24일 아침 8시를 기해 전 주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집안에 머무르라는 명령이었다. 기간은 5월 15일 또는 지금처럼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 끝날 때 까지란다. 앞으로 최소 두 달 여, 장기간으로 보자면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다.

첨부된 화일에는 이 기간 동안 영업을 할 수 있는 업종과 반드시 영업을 중지하는 업종들을 상세히 분류해 놓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내 업종인 세탁업은 삶에 필수적인 업종으로 분류되어 이 기간에도 영업이 가능 하다고 되어 있다.

오늘 아침에 손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들의 주변 상황과 일상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시작으로 한 편지를 보냈었다. 솔직히 내 평생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 주변의 상황들이 바뀐 경험은 처음이다.

한국전쟁 후 모습에 대한 기억들은 어렴풋하지만 엄연히 전후 세대이고, 내가 군에 간 바로 그 시기에 월남전도 끝나서 전쟁에 대한 경험은 전혀 없다. 한국에 살던 젊은 시절엔 누구나 겪었던 만들어진 전쟁 위협 속엔 살았지만 그게 현실적 위협으로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저 몇 차례 당시 숱한 젊은이들이 겪었던 것처럼 체포 구금 고문 등의 아픈 기억을 채 지우지 못하고는 있지만, 내 주변이 모두 그 아픔을 함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이민 온 이후로는 내가 스스로 만든 어려웠던 상황들이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개인적 경험에 한한 것이고, 이번처럼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게 주변 상황이 빠르게 변한 일은 그야말로 처음이다.

아무튼 아침에 손님들에게 보낸 이메일 편지에 의외로 많은 손님들의 답장을 받았다.

우리 부부의 안녕과 무엇보다 내 세탁소가 동네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들을 전해 온 답장이었다. 우리 내외가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힘들어 세탁소를 접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Landlord에게 한 동안 가게 월세를 면제해야만 한다는 편지를 보내겠다는 열혈 손님도 있었다.

손님들에게 받은 답장들을 읽으며, 오늘 하루 어수선했던 내 마음의 주름이 쫙 펴졌다.

냉장고를 채운 것은 헛 일이었나 보다.

하루의 감사가 이리 큰 것을.

걱정에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사는 동네는 이른바 청정구역이었다. 미 동부 쪽에선 유이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없는 주로 메인 주와 델라웨어 주를 꼽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받은 경보 뉴스,  ‘왔다! It’s here.’ 였다. 내가 사는 동네 델라웨어 주에 첫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나왔다는 뉴스였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뉴스가 우리 부부를 놀라게 한 것은 감염자의 신분이었다. 그가 50대 델라웨어 대학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내 세탁소는 바로 델라웨어 대학교 바로 코 앞에 있고, 내 가게 손님들의 주 고객들 중 많은 이들이 대학교와 연관된 이들이다.

우리 부부는 이런 저런 염려와 걱정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곧 이어진 뉴스는 델라웨어 대학이 오늘부터 봄방학을 앞당겨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작 반시간 정도 지났을까? 내 이웃 가게인  liquor store에 학생 아이들이 줄을 이어 술들을 사가고 있었다.

마침 세탁물을 찾으러 가게로 들어 선 경찰 하나가 한 말, ‘에고, 오늘 밤 애들이 저리 마시면 밤 근무 하는 이(경찰)들이 고생 많겠네!’

그리고 늦은 밤, 필라에 사는 벗이 전해 준 성철 선사의 말씀 하나.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걱정할거면   딱 두 가지만 걱정해라.   지금 아픈가?  안 아픈가?   안 아프면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나을 병인가?  안 나을 병인가?   나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안 나을 병이면  두 가지만 걱정해라.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인가?  안 죽을 병이면  걱정하지 말고 죽을 병이면  두가지만 걱정해라.  천국에 갈 거 같은가?  지옥에 갈 거 같은가?  천국에 갈 거 같으면  걱정하지 말고, 지옥에 갈 거 같으면 지옥 갈 사람이 무슨 걱정이냐?>

가짜에

한국에서 갑자기 확산된 코로나 바이러스와 연계되어 듣게 된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에 대한 뉴스들을 보다가 다시 손에 든 유발 하라리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까닭은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부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자의 전작들에 대한 믿음도 한 몫 했다.

5부 21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저자는 17장과 20장에서 이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는 거짓 뉴스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 중 몇 대목들이다.

<우리는 요즘 ‘탈진실(post-truth)’이라 부르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듣는다. 사방이 거짓말과 허구로 둘러싸인 무서운 시대다. >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데서 나온다.>

이쯤해서 저자는 종교를  예로 든다.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반면에 10억 명의 사람들이 1,000년 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짜뉴스’라 불러서는 안된다는 충고를 들어왔다.>

신천지 뉴스가 다시 이 책을 들게 한 대목이다.

어찌 신천지 뿐이랴! 모든 종교와 이념과 오늘 내 삶 가운데 마주치는 정치 경제 언론 등등 모든 시장의 영역에서 마주치는 문제이다.

유발 하라리가 내어 놓는 가짜로 부터 해방되는 해결책이다.

<모든 가짜 뉴스의 기저에는 진정한 사실과 고통이 존재한다.>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 가장 좋은 출발점은 먼저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니다.

종교적으로는 참 평신도가 되는 일이고, 그저 일상에서는 깨어 있는 시민이 되는 일이다.

그저 내 식으로.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하여 고향생각에 젖어 보낸 한주간 생각을 내 가게 손님들과 함께 나누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의 피난지였던 부산이지만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없다. 유년의 첫 기억부터 청년의 끝물까지 아련한 세월을 묻어 둔 곳은 신촌이다.

문득 따져보니 신촌 (새마을 , New Village)에서 보낸 세월보다 이 곳 델라웨어 Newark(새 방주, New 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지낸 시간들이 더 길어졌다. 그 생각 끝에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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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가게 손님 몇 분들이 한국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셨답니다. 그 영화가 올해 4개의 오스카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는 그 수상 소식이 매우 큰 뉴스였답니다.

영화나 아카데미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깊지 않은 제가 영화나 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 영화 감독인 봉준호라는 이름 때문에 떠올린 제 고향 이야기를 드리려 한답니다.

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곳은 대한민국 서울시 신촌이라는 동네입니다. 지금은 시내 한복판이 되었지만,  제가 살 때만 하여도 서울 중심부에서 서쪽 외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신촌이라는 동네 이름의 뜻이 새마을이랍니다. 새로 생겨 도시와 시골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진 동네였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야기들을 풀어 놓으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제 블로그에  ‘신촌연가’(신촌을 그리워 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벌써 십 수년이 지난 오래 전 일이랍니다.

연재의 마지막 글에 ‘봉준호’라는 이름으로 댓글이 달렸었답니다. “글을 인상깊게 잘 읽었다. 신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듣고 싶다. 당신이 살았던 때의 거리의 풍경, 많이 보던 나무들 등등….”이라는 글과 함께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남겨 있었답니다.

저는 그 댓글을 남긴 봉준호라는 이가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제가 응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 이름이 유명한 영화감독 이름인지도 몰랐거니와 알았다한들 역시 응답은 하지 않았을겝니다.

그렇게 지난 주 봉준호라는 이름을 들으며 다시 떠올리게 된 제 고향이랍니다. 이따금 아주 이따금 내 고향 신촌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들이 그리울 때가 있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가 봐야겠다는 생각 위로 한 해 한 해 세월의 숫자만 쌓여가고 있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신촌에서 산 세월보다 Newark에서 세탁소를 하며 보낸 시간들이 더 길답니다. 세탁소는 현재 진행형이고, 언젠간 은퇴할 것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낼 계획이니 또 다른 고향이 Newark인 셈입니다.

신촌(새마을 , New Village)에서 Newark(새 방주, New Ark)까지의 내 삶을 추억하게 한 지난 주 다시 만난 봉준호라는 이름에 감사하며.

지난 일요일 아침 Newark 저수지 방죽길에서 찍은 내 제2의 고향 Newark 사진 몇 장 함께 나눕니다.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로 하여 새 힘이 솟는 시간들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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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week, some customers talked to me about the Korean movie, “Parasite.” That was because it won four Oscars this year. Of course, it was very big news to Korean people.

I don’t have much knowledge about movies and Academy Awards, and I’m not trying to talk about them.

The name of the director, Bong Joon-ho, reminded me of my hometown, and I’m going to talk about it.

The place where I spent my childhood and youth was Shinchon in Seoul, South Korea. Now it has become a part of the heart of the Seoul Metropolitan area, but when I lived there, it was like a village distant from the downtown of Seoul. The meaning of “Shinchon” is “new village.” As it was a newly developed village, it had the urban atmosphere alongside the countryside feeling.

If anyone starts to reel off a story about the hometown where he/she grew up, it would be endless. Like anybody else, I have lots of stories and memories about my hometown. I had posted a series of them at my blog site with the title, “Shinchon Yeon-ga (a song for missing Shinchon).” It was more than a decade ago.

At the last post of the series, a comment was written under the name of “Bong Joon-ho.” It said, “I read the series of your posts and was impressed. I’d like to hear more about Shinchon, such as scenes of trees, streets and so on when you lived there…” He also left his e-mail address.

I’m not sure whether the comment writer, “Bong Joon-ho,” and the director of the movie “Parasite” is the same person. That’s because I didn’t respond to the comment. At that time, I didn’t know that it was a famous director’s name. Even if I had known it, I would not have responded.

Like that, when I heard the name, “Bong Joon-ho,” last week, I recalled my hometown. Occasionally, really occasionally, I have missed faces sweeping across my memory along with my hometown. On the thought that I’d visit there sometime, the number of years has been heaping one by one.

After calculation, I realized that the years which I have spent in Newark running a cleaners are longer than ones which I spent in my hometown, “Shinchon.” Furthermore, I’m running a cleaners now, and I’ll retire sometime in the near future and spend the rest of my life here. So, Newark is definitely my second hometown.

Thanking the name, “Bong Joon-ho,” for prompting me to go on a trip down my memory lane from “Shinchon (New Village)” to “Newark (New Ark).”

I’m sharing with you some pictures of my second hometown, Newark, which I took at the causeway of the Newark Reservoir last Sunday morning.

I wish that you will be reinvigorated with thoughts of everything and everyone that you are missing.

From your clea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