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정리를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내 서재 한구석에 쌓아 둔 상자 두개가 있다. 제법 많은 양의 VHS 테이프들이다.

당시만 하여도 제법 큰 돈을 들여 만들었던 우리 부부 결혼식 영상을 비롯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담아두었던 기록들, 부모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담긴 테이프들이다. 80년대에 비디오를 찍는 가정용 카메라는 가히 이즈음 방송용 카메라 정도의 크기였거니와 한국과 미국을 왕복할 수 있는 비행기 값보다도 비쌀 만큼 내겐 고가(高價)였다. 과감히 그 돈을 들여 담아 두었던 기록들이다.

그냥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쌓아 두자니 부피도 크거니와 딱히 누가 시간 내어 볼 일도 아니어서 그냥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다.

VHS테이프를 디지털화해서 CD나 USB 등에 담아 준다는 광고들은 이따금 보았지만 또 다시 돈 들여 그렇게 남겨둔 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야말로 유기상태로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자들이다.

그러다 맘먹고 내 스스로 VHS테이프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  USB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구글에게 묻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경험들을 찾아본 뒤 파일 변환기와 편집기를 구입해 작업을 시작한다. 따져보니 128기가 USB 하나나 두개면 족할 듯 하다.

저 큰 상자 두개를 내 새끼 손가락 하나 크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세상이다. 물론 이즈음 젊은이들에겐 싱겁지도 않은 일이겠다만.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아직도 날은 뜨겁다. 이제 겨우 팔월 초입이니 이 더위는 한동안 이어질 게다.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큰 변화없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이미 다시 느슨해졌다.

또 다시 찌는 오후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우리 부부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와 장인 장모는 아직 살아 계신다. 우리 부부의 삶에서 느껴야 할 족(足)함이다.

DSC00776 DSC00779 DSC00781 DSC00784 DSC00786 DSC00788

세상은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놀랍게 바뀌고 변하게 마련이지만 아주아주 오래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민들은 여전하고 답(答)도 이미 정해진 그대로다.

누구에게나 똑 같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시간 또는 신(神)의 간섭은.

하여 오늘 하루 누린 시간에 대한 감사다.

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흉내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를 보내고자 했다. 공연히 내 감정에 기복을 일으키는 뉴스들도 보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아무 일도 않고 일요일 하루를 보내자 했다.

늦잠을 즐기는 맛도 보자고 간밤에 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만 눈 뜨는 시간은 매양 같은 시간이었다. 뜰로 나가니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새들의 아침 수다가 한창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평생 처음 뿌려 본 씨앗들이 꽃이 되어 아침인사를 건넨다. 괜히 겸연쩍어 카메라를 찾아 들고서 꽃들의 인사를 받는다.

DSC00628 DSC00631 DSC00634

하늘은 맑고 아침이라지만 여름바람 치곤 기분 좋게 마르다. 모처럼 근처 공원이라도 찾아 걸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재촉하다.

공원길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 간 십여 걸음 가까워지면 마스크를 쓰곤 하는 모습들을 보면 뉴스들은 사뭇 딴 세상이다.

DSC00653DSC00656DSC00659DSC00678DSC00681DSC00687

DSC00688

DSC00691DSC00699DSC00705KakaoTalk_20200712_121731706

느긋하고 여유로운 공원에서의 아침 시간들을 즐기고 돌아와 아내가 준비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운 몸 식히고 달고 단 낮잠의 여유까지 누리다.

일요일 오후 뒷뜰엔 여름의 열기가 가득하다. 부지런히 고추와 깻잎을 따다가 두부와 간돼지고기, 당면, 양파, 당근 등속을 다져 넣은 고추튀김과 깻잎 튀김을 만들다.

어머니 떠나신 후 감정 기복이 심하시다가 이즈음 조금 평정심을 찾으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맛있다’를 이으셨다. 누나와 막내동생도 ‘덕분에’라는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재주 없는 내가 늙막에 이런 어머니 흉내라도 낼 수 있어 참 좋다.

늦은 저녁, 임어당(林語堂) 선생이 전해주는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근심하거나 탄식하고, 때로는 변덕을 부리거나 고집을 부리고, 때로는 경망스럽거나 방종하고, 때로는 터놓거나 꾸며댄다. 이런 것들은 마치 텅 빈 악기의 구멍에서 나오는 음율처럼, 또는 습기처럼 돋아나는 버섯처럼 밤낮 교대로 눈 앞에 나타나지만 어디서 싹트는 지는 모른다.

아! 어디서 생기는지는 모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연유한 바가 있으리라. 감정의 변화가 없다면 ‘나’도 없는 것이며, ‘나’가 없다면 이러한 감정을 취할 수 없다.>

아무 계획 없던 하루해가 저문다. 계획을 세우고 보내는 하루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게 마련인데, 어쩌다 계획없이 보낸 하루는 알찬 듯하다.

오늘 내가 만든 허상(虛像) 하나일 수도. 비록 그렇다 하여도 오늘 하루에 감사.

나이에

독립기념일 연휴 이틀 동안 무념무상으로 일에 빠져 지냈다. 일을 마무리 짓고 나니 온 몸이 천근 만근 이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했다.

이 집에서 산 지 만 23년이 지났다. 이 집에서 내 두 아이들이 학교를 다녔지만 이젠 아이들이 머무르는 일은 거의 없다. 매해 때 되면 어머니 아버지와 장모 장인 모시고 밥상을 나누던 추억들도 쌓인 곳이지만 이젠 다 떠나시고 아버지 홀로 신데 거동 불편하셔 내 집에 오실 일은 없다.

올 초만 하여도 나는 조만간 우리 부부가 조촐히 살기 적합한 작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 맞이한 팬데믹 상황에서 내 일상도 바뀌고 계획도 바뀌었다.

갑자기 넘쳐난 시간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일들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텃밭과 화단을 가꾸어 보는 일을 시작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카펫을 들어내고 마루를 깔기 시작한 일도 그 중 하나이다. 그저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하자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자꾸 늘어져 아니되겠다 싶어 연휴 이틀간 맘먹고 마무리를 지었다.

카펫을 들어내면서 방안의 물건들을 옮기다가 시작한 또 하나의 일은 버리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이 버렸다. 버리면서 든 생각 하나, 쓸데없거나 과한 것들 정말 많이도 끼고 살았다.

마루를 새로 깔며 마주했던 격한 감사들도 있다. 묵은 카펫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먼지처럼 나와 더불어 함께 지내온 세월에 대한 감사와 아직은 이만한 노동이 그리 버겁지 않은 오늘의 내 나이에 대한 감사, 그리고 어느 날 모처럼 하루 밤 자고 갈 아이들이 변한 방 모습에 웃는 얼굴을 그려보며 느끼는 감사였다.

일을 마무리 짓고 가구들을 원래의 위치로 놓으려 하다 바뀐 생각 하나가 있다. 방 하나는 그저 텅 빈 채로 나두자는 것이었다. 뭐 딱히 법정스님을 흉내 내어 보자는 뜻은 아니다만 문득 텅빈 방을 바라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한 것이다.”라는 법정의 말이 그대로 내 마음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나는 이를 즐길 것이다. 또 어떤 변덕이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만.

어쩌면 텅 비우는 연습이 아니라 실전을 해야만 하는 나이에 들어섰는지도 모르기에.

딸아이에게 바뀐 딸아이 방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보내온 답신이다. ‘다음엔 뭐해? 아빠!’ 나는 즉시 응답했다. ‘물론 계획이 있지! 또 보여 줄게.’

DSC00571 DSC00574

뉴스에

뉴스들은 언제나 흉흉하다.

매일매일 호들갑스럽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하루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짧게는 내가 살아 온 세월이 그러하고, 길게 보면 사람들이 사람살이를 시작한 이래 변함 없었다.

다만 오늘만 사는 우리들에겐 오늘도 호들갑스럽게 흉흉하다.

내 가게가 있는 도시에는 인종 혐오 특히 동양인 혐오 전단지가 뿌려져 범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나같이 동네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은 점점 힘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뉴스들도 제법 그럴싸한 자료들을 내밀며 다가서고, 총기사고 등의 사고사건 기사들은 어제만큼 여전히 이어진다.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재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노인들이 얼굴로 나선 선거판도 그렇고, 한반도 뉴스들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허나 따지고보면 이게 어제 오늘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늘 그렇게 이어져 온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유일한 사실 하나는  사람 또는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고 느린 걸음으로 사람다워 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 믿음일수도 있다.

하늘에는 여느 해 유월과 다름없는 초여름 구름들이 나른하게 흐르고, 뜰에는 여름 꽃 봉우리가 트이고, 새들이 노닌다. 뒷뜰 언덕배미에서 풀 뜯던 노루 한 마리 나와 함께 눈싸움하다 슬며시 피해 달아나다.

뉴스들이 여전히 흉흉한 하루가 진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또 하루를 맞는다.

DSC00470 DSC00478 DSC00480 DSC00482 DSC00493

관점(觀點)에

이른 아침 첫 손님으로 맞은 Susan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어떠니? 이즈음 뉴스들이 너희 가족들에겐 좀 힘들지 않니?’ 내 짧은 물음에 그녀의 대답은 제법 오래 계속되었다. 다음 손님이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그녀는 내 물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내 세탁소를 떠났다.

Susan의 남편은 쌍동이다. 남편과 시동생, 쌍동이 형제들의 직업은 경찰이다. 형제 모두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경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두 집안의 아들들은 모두 현역 경찰이다. 이른바 경찰가족들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왈 백인들이다.

그녀는 이즈음 경찰관련 뉴스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섭단다.

한가해진 시간에 옛 생각을 더듬는다. 어느새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그즈음만해도 내가 참 꿈이 많았었다. 당시만 하여도 내가 사는 동네 다운타운으로 일컫는 윌밍톤시에는 장사하는 한인들이 제법 많았었다. 물론 지금도 여러 분들이 계시지만 그 때에 비하면 많이 쇠락한 편이다.

왈 흑인 거주 지역인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피해와 사건 사고들이 종종 일어나던 때여서 그 일을 의논하고자 시장과 경철서장을 만났었다.

그 때 시장이 내게 했던 말이다. ‘왜 한인들은 흑인 밀집지역인 시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기는 왜 여기서 안 살죠?’  내 체구에 비해 거의 세 배나 되는 인자한 모습의 흑인 시장께서 내게 던진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었다. ‘제 가게가 시내에 있고요, 제 장인 장모가 가게 이층에서 산답니다. 모든 한인이 다 그런 건 아니랍니다.’

생각해 볼수록 비겁한 대답이었다.

물론 내 장인 장모가 당시 시내에 있던 작은 건물에 있었던 내 세탁소를 돌보면서 이층에 살고 계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물음에 대한 응답은 적절치 않았다. 그곳에서 장인 장모는 두 번에 걸쳐 권총 강도를 만났었다. 건물을 처분한 지도 오래이고 두 분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때 일들을 생각해면  장인 장모에게 지은 내 죄가 크다.

그리고 몇 년 전 아들녀석 장가갈 때 이야기다. 느닷없이 결혼날짜를 잡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아들녀석에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다스리지 못했었다. 그렇게 갑자기 만나게 된 며느리는 정말 새까만 얼굴의 흑인이었다. 아마 내 화를 더욱 키운 까닭이었을게다.

몹시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아들녀석의 가출이 이어졌고, 어느 날 아들놈의 연락이 있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아빠를 한 번 보자는 데 한 번 만날 수 있어?’ 나는 녀석에게 말했었다. ‘이눔아!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지, 목사님이 해결해 주는 게 아니야!’

그 여름에 우리 부부는 기차를 타고 서부 여행을 했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몹시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만났었고 그 해 늦가을 나는 까만 얼굴의 며느리를 맞았다.

그 어간에 아주 엉뚱한 자리에서 아들 녀석이 말한 그 한인 목사님을 만났다. 그의 이름 이태후 목사. 만난 곳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다.

며칠 전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으며 내 마음에 넘치는 감사 하나.

내 아이들이 이런 목사님 영향을 잠시라도 받고 자랄 수 있었다니…. 그저 감사다.

이즈음 나는 며늘아이 얼굴을 보며 아들녀석 걱정을 잊는다. 덤으로 신앙과 교회관 나아가 정치적 관점 역시 엇비슷한 오리지널 까만 얼굴들인 사돈에게 얻는 감사까지.

그리고 이젠 점점 굳어져 가는 생각 하나.

무릇 관점의 핵은 인종도 신념도 이념도 사상도 더더구나 신앙도 다 헛것이라는 것. 다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람의 관점,  그 마지막 하나 아닐까?

더운 날, 마루 새로 깔다 허리 피며 만나는 새 생명들을 보며.

DSC00450 DSC00455 DSC00458 DSC00463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803

벗에게

내게도 양복 정장이 몇 벌은 있다만 양복을 입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물론 한복도 몇 벌이 있다만 그걸 입을 기회는 거의 없다. 그저 늘 캐쥬얼 차림이다.

양복은 거의 사십 년 전에 맞춘 것들이다. 나는 아직도 그 무렵 결혼 예복으로 맞춘 양복을 입는다. 지난해 아내가 큰 맘 먹고 사준 양복 한 벌이 있는데 아직 입어 볼 기회가 없었다.

뭐 내가 검소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아주 비정상적으로 작고 마른 체구이다. 그 어떤 기성복도 나를 위한 것은 없다. 특히 팔길이도 짧아 어쩌다 몸에 맞는 옷을 찾는다 하여도 아내가 꼭 팔 기장을 줄여 주어야만 한다.

그런 일들이 번거로워 그저 한 번 몸에 익은 옷을 다 떨어질 때까지 입고 산다. 아내는 내가 입는 옷들을 일컬어 제복이라고 부른다.

캐쥬얼 옷들은 비교적 고르기도 편하기도 하고 싸서 좋다. 때론 아동복(?) 코너에 가서 고르면 맞춤 옷 같은 것을 만나기도 한다.

암튼 옷에 대해선 나는 거의 무관심하다.

친구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내 친구들은 거의 모두 오래 전 친구들이다. 물론 얼굴 보거나 만난 지도 몇 십년 된, 그저 그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내가 딱히 의도한 일도 아닌데 그리 된 것을 보면 다 모자란 내 성격 탓일게다.

이젠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길어졌지만 여기서 친구라고 부를 사이는 딱히 없다. 하여 때론 슬프다.

이민 초기 몇몇이 있었는데 다들 초라하게 멀어졌다. 이젠 어디 사는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이들 하고만 가까이 지냈다. 다 내 탓이다. 그게 또 내겐 이상한 일도 아니다. 모두 내겐 참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오늘 옛 친구 P가 소식을 전해왔다. 걸쳐 걸쳐서.

내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소식 전해 듣고 그가 보내 온 인사 가운데 멋진 가죽 점퍼가 있었다. 도대체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죽 점퍼라니? 게다가 정말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전해 전해서 들은 그가 했다는 말이다. ‘이건 딱 맞을거야!’

그랬다. 가죽 점퍼 사이즈는 내게 딱 맞았다. (물론 소매 기장이야 줄여야 하지만… 이건 누구도 맞출 수 없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내 아이들은 나를 닮지 않았다. 그래 또 감사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이제야 내가 철드나보다. 느닷없이 눈물 한 줄기 뚝.

내게도 친구가 있었구나. 아! 이 행복이라니.

오늘 밤 P에게 내 행복의 90%는 나누어 주고 싶다. 나도 10%쯤은 간직하고….

벗에게

하루 – 22, 그리고 다시 일상

어머니 마지막 길 배웅하고 돌아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내가 어머니 속 끓이는 일을 하곤 하면 어머니는 머리 싸매고 곧잘 누우셨다. 그렇게 몇 끼 식사 거르시곤 당신 스스로 제 풀에 일어나 ‘이 눔아!. 이눔아!’하시며 일상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내 일탈된 일상을 적어 놓고 싶어 하루를 세기 시작했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할 무렵 어머니가 더는 일상을 이어가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 떠나시고 오늘 장례를 치루었다.

이제 어머니가 늘 그러하셨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오늘 예식에서 내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그린 이야기다.
DSC00168
어머니의 증손들은 제 어머니를 왕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집안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연세가 제일 많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저희 집안에서 실제로 왕이셨습니다.

왕은 왕이로되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넉넉치 않은 소농의 6남매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딸로서 동생으로 언니로 누나로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왕처럼 친정가족들을 돌보셨습니다.

시집와서 꽉 찬 30년, 홀 시아버님 한복 계절마다 시치시고 다려 준비해 올리셨습니다. 제 할아버지 마지막 임종을 지키신 이도 어머니입니다.

저희 네 남매를 섬기는 일은 그냥 어머니의 즐거움이셨습니다. 딱 일년 전 아흔 둘 연세에도 저희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맛있는 것 먹일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늘 분주하셨습니다.

손주들과 증손자들을 위한 축복의 기원과 기도는 그냥 어머니의 일상이었습니다.

73년 함께 사신 제 아버님 삼시 세끼 어머니 손 안 거친 음식 잡수신 횟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섬기셨습니다.

어머니의 93년 한 평생은 온전히 가족들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저 감사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에 더해, 제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어머니만의 아픔과 슬픔 모두 가슴에 묻고 오직 그저 감사로 당신의 삶을 정리하신 어머니셨습니다.

하여 오늘은 어머니처럼 모든 게 감사입니다.

먼저 어려운 때에 제 어머니 마지막 환송예배를 집례해 주신 송종남 목사님과 배성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믿음의 성도 여러분들께 드리는 감사도 큽니다.

저나 저희 가족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어머니 살아 생전 제 어머니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속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제 가족들에게 보내는 감사도 큽니다. 어머니께서 누리신 마지막 일년은 제 누나의 극진한 정성 덕입니다. 외조 해 주신 매형과 누나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전화 인사 이어와 어머니의 한 주간을 즐겁게 마치게 해 준 아틀란타 동생 내외에게 어머니가 전하는 감사 위에  형제들의 감사를 덧붙입니다. 우리 집안에 웃음과 활력을 도맡아 준 막내동생 내외 특히 우리 집안의 기도 담당 막내 매제 덕에 어머니 편하게 떠나셔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말 잘 안 듣는 집안의 유일한 골치거리이자 걱정거리였던  제가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아들 노릇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제 아내에게 드리는 감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73년 만에 맞는 아버지의 새로운 일상에 이어질 감사의 몫은 이제 왕을 잃은 우리 모든 가족들이 나눌 일입니다. 어머니처럼.

마지막으로 오늘 온라인으로 함께 한 저희 아이들에게 주는 감사 인사입니다.

In memory of your grandmother or great-grandmother, what I want to say is two things. The first is that she lived a life of dedication and sacrifice for her family; that is, your grandfather or great-grandfather, your uncles and aunts, me, and of course, all of you. The other one is that what she said most often in her lifetime was “Always and simply be grateful.”

I believe that she will reach heaven comfortably, thanks to you all being with me today.

Thank you all.

이 모든 감사를 오늘과 어머니와 우리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천수(天壽)

‘이눔아! 넌 맨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많냐?’ 어머니에게서 자주 듣던 핀잔이다. 그러고보니 참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하고 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어머니 곁에서 정말 모든 쓸데없는 생각 내려놓는 맛을 보았다.

어머니의 숨소리에 얹혀져 전해 온 어머니의 세월과 나의 세월들이 그 숨소리의 강약과 편함과 힘듬과 거침과 고요함에 따라 내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오갔지만 결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시간은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의 마지막 편안함을 위해 모든 쓸데없는 생각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숨 쉬었던 시간이란 따져보면 고작 몇 시간.

그 시간들을 허락해 주신 어머니와 신께 드리는 감사가 크다.

천수(天壽)를 누리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고요함과 평안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 성격에 얼마나 갈 줄 모를 일이다만 쓸데없는 생각 들 때마다 어머니 생각 하련다. 나 사는 날까지.

어머니 떠나신 밤에.

*** 어머니 마지막 숨 내쉬기 전에 아버지와 누이들과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기도했다. 구십 삼년 일 개월 어머니와 함께 해 주신 신에게 감사를 그리고 어머니의 영혼에 그 감사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고집 센 내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 내 아버지를 위하여.

천수(天壽)에 그리고 감사에.

하루 -15

바람과 꽃비와 새소리에 홀려 아침 한 때를 보내다.

이젠 곡기 끊으신 어머니는 내내 주무시다가도 내가 찾아 가면 가는 눈 뜨시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시곤 다시 눈을 감으신다. ‘아이고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왜 이리 오랜만에…’

덩달아 급속히 오락가락이 심해지시는 아버지는 며칠 전 당신이 꼭 움켜쥐고 계셨던 몇 가지 기록들과 물건들을 내게 건네시며 말씀 하셨다. ‘나도 이젠 다 놓아야겠다.’

오후 들어 비바람이 거세다.

딱히 손에 잡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꺼내 들었다. 문득 생각난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소제목 탓이었다. 언제 읽었더라? 가물하다. 옛날식 번역은 이제 내게도 낯설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자기 자신 삶의 관객으로 살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그 삶을 완성해 주는 꿈을 보태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꿈으로 꾼다.  – 최초의 인간 ‘노트와 구상’에서>

누구에게나 하루는 최초의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간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