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투쟁과 쟁취를 위한 행동을 늘 앞세웠던 선배는 나를 가르쳤다. ‘희망이란 약자들과 패자들의 언어’라고. 나는 그 가르침을 거절했었다. ‘투쟁과 쟁취를 위한 행동은 희망에서 시작된다’며.

아침과 저녁을 자주 헷갈리시는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한 시간은 마치 하루처럼 길지만, 새해 첫 날 아버지에게 드린 선물로 그만한 것은 없었다.

뉴스나 내일에 대한 전망들이 내 맘에 든 적은….. 거의 없지? 아마.

그래도 나는 새해 아침 희망을 품는다. 그 생각으로 손님들에게 새해 첫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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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New Year!

2021이라는 숫자가 우리들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하루 하루가 똑같은 날들이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뀜으로 오늘 누리고 있는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한해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팬데믹으로 하여 어려움들이 많았습니다. Time지가  2020년은 “역대 최악의 해”라고 선언할 만큼 어렵고 힘든 한 해였습니다. 저 역시 한 해를 보내며 2020년을 정리하면서 한숨을 그칠 수가 없었답니다. 30년 넘게 세탁소를 해오지만 지난 해처럼 어려웠던 것은 처음이었답니다. 한 해 동안 들어오고 나간 돈들을 계산해보니 그저 한숨이 절로 나왔답니다.

제 말을 믿거나 말거나 그 한숨 속에서도 제가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있는 생각과 말은 바로 감사입니다.

비록 가게 매상이 팬데믹 이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져 지금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이런 현상은 새해에도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감사를 놓치지 않는 까닭은 아직은 우리 부부가 건강히 일 할 수 있음이 첫 째고, 비록 지난 해나 오늘이나 걱정들이 넘쳐나지만 우리 부부가 여전히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산다는 것이 둘째입니다.

건강은 스스로 늘 조심하고 잘 보살피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세상 일이 어디 다 자기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니므로 건강한 하루 하루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고 산답니다.

희망이야말로 어제와 오늘의 걱정들과 아픔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으로 희망을 품고 사는 오늘에 감사를 이어간답니다. 희망이란 저절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걸어 나가 잡을 수 있는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 감사의 크기가 커진답니다.

2021년, 우리 모두가 처음 맞는 시간들을 맞습니다.

태양과 희망을 홀로 차지할 주인은 없지만, 태양과 희망은 그것을 품는 자의 것이라는 말을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무엇보다 희망을 품어 웃음과 기쁨이 끊이지 않는 한 해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2JFn7Rr

사는 맛

이름이 뭐냐고 묻는 손님들에게 하는 내 답은 ‘Young’이다. 내 이름 김영근을 그리 줄인 것이다. Young- keun 이라고 하면 서로 복잡하고 그저 간단히 Young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간혹 ‘Young’이라는 성씨와 헷갈려 성씨 말고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또 친절히 내 이름을 다시 가르쳐 준다. 내 성씨는 Kim이고 이름은 Young이랍니다. Young, 바로 forever young입죠.

오늘 내 이름을 멋지게 불러준 손님 한 분의 편지를 받고 사는 맛을 즐기다.

매주 일요일 아침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지난 주 추수감사절날 내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적어 보냈더니 그 응답으로 보내온 것인데, 자신의 지인들 열 댓 명에게 보낸 편지였다.

<부디 아래에 소개하는 글을 읽어 보시길. 아니, 김영근이 말하는 것을 느껴보시길. 내가 최소한 십여 년 동안 그리했듯이. 내 이메일주소를 그의 리스트에 약 20년 전에 올렸는데, 그는 사진과 자신의 생각을 담은 단체 이메일을 매주 일요일 오전 8시에 정확히 보내고 있지요. 정말이지 그는 그가 할 일에 철저합니다.

그는 또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곱씹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선 (善)”에서 출발합니다. 읽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쯔쯔, 아마 원한다면 구글링으로 검색하면 그가 예전에 보냈던 글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싶은 것을 하시길. 옷장에 오래된 코트가 있는데, 세탁을 해야합니다. 헌데 이 코트 세탁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고, 더구나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간 상태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이번 주에 그에게 맡기려 합니다. 그의 세탁소 문이 닫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게 문 닫을지 말지는 요술 처럼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요.(장사란 손해나면 닫는 것이고, 남으면 계속되는 것일 뿐). 모두들 생각할 두뇌가 있을 것이니, 생각들 해보시요.(나는 코트를 들고 가지만 당신도 그에게 들고 갈 세탁물이 있을 터이니.)

어떤 이들은 이즈음 온라인 소통이 인간적 온기가 없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꽤 따뜻합니다. 직접적으로 그를 도울 수 없다면, 정말이지 무언가라도 해보시요. 김씨는 당신이 시간을 쓸 가치가 충분한 사람입니다. 영(젊은) 김 (Young Kim).

이제는 아무도 나를 젊은 죠 (Young Joe)라고 부르지 않는데.>

Please read below.  No.  Please feel what Young Kim, who has at least ten years on me, is saying.  I got on his mailing list about two decades ago and every Sunday, at 8 AM, he has sent out a mass email with photos and thoughts.  Duty is key with him.

But the man is also a philosopher; he thinks and feels, and it all originates from a kind of “goodness”.  You’ll see as you read.  Hell, you could probably google his old postings, if you wanted to.

Here’s what I’m going to do.  You do what you want.  But I have an old coat in my closet.  It needs a cleaning (way beyond my capabilities – need expert help here) and it’s missing a button.  Mask wearing, I’m delivering it this week.  I hope his doors are not locked.

There is no magic closing here.  You all have big brains.  Use ’em.

Some people think that electronic communication is cold.  Actually, the wires heat up a bit.  If you can’t help him directly, start a freaking revolution.  Kim would be worth your time.  Young Kim.

Nobody’s calling me Young Joe.

어릴 적 한 때 너무도 흔한 이름 영근을 지어준 아버지를 탄한 적도 있었는데…. 오늘은 아버지께 감사를.

https://conta.cc/2HNGree

추수감사절 이야기 셋

  • 하나.

“어제 어떻게 지냈니?” 가게 손님 한 분이 내게 던진 물음이다. “아내와 딸과 함께 아주 조용히… 당신은?”. 내 응답에 그녀의 이어진 질문, “나도 남편과 단 둘이 조용히… 우리 가족들 하고는 Zoom으로 함께 두루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졌는데… 넌 그렇게 하진 않았니?” 유태계 은퇴 변호사 마나님의 연세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 그리고 내 응답, “그랬구나, 우리 가족들도 그렇게 Zoom으로 함께 했단다.”

어제 추수감사절 오후 한 때, 필라델피아에 아들 내외와 아틀란타에 있는 동생 내외와 조카 조카손주들 그리고  사촌 동생네,  시카고와 워싱톤에 사는 조카들 조카 손주들, 우리 동네에서 함께 사는 누이네들과 조카들 모두 Zoom으로 추수감사절을 함께 했다.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는 늦은 저녁 아이들 전화 인사로 흡족해 하셨다.

지난 일요일 거의 아홉 달 만에 집으로 모셔온 내 딸아이는 거의 상전이다. 뉴욕 맨하턴에서 차를 태운 순간부터 마스크를 써라 창문을 열어라 쉬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갔음 좋겠다 등등. 집으로 돌아와서도 따로 밥상 받기, 거리 유지 하기, 마스크 쓰기 등등 까탈스럽기 그지 없다. 재택근무 중인 아이는 연말까지 내 집에 머무를 요량인데 아내와 내게 내리는 명령들이 단호하다. 나는 그런 딸애가 참 좋다.

어제 추수감사절 밥상은 딸아이 혼자  다 차렸다. 고모들네 저녁까지 넉넉히. 아이의 손 솜씨가 제법이었다.

이젠 시집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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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

추수감사절 앞에 받은 옆서 한 장. 우리 부부에겐 영원한 우체부인 Johnson씨가 보낸 은퇴 인사였다.

내 세탁소 바로 뒤편에 있는 Newark 우체국에서만 만 36년동안 일했던 그가 은퇴한다는 인사 엽서를 보며 한 동안 찡한 생각들이 오고 갔다.

이즈음은 검은 얼굴에 허연 머리털과 풍성하고 흰 수염으로 마치 산타가 다 된 노인이 되었다만 참으로 억척스런 사내다. 나보다 몇 살 아래이긴 하지만 아이들 나이가 서로 비슷해 친구 같은 이다. 한참 아이들 키울 땐 우체국 일이 끝나면 그로서리 생선 가게에서 생선을 다듬는 등 억척스레 애비 노릇을 다했던 사람이다. 보답이랄까? 아이들 모두 정말 잘 컷다.

그가 일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좋은 소식 나쁜 소식들을 전하는 일에 충실했다 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 그는 좋은 소식보다는 귀찮고 듣기 싫은 소식들을 더 많이 전했었다. 내가 가게에서 주로 받는 편지들이란 거의 대부분 각종 공과금 고지서나 공공 기관들에 서 보내온 서류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런 소식들에게 응답했기에 내게 오늘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감사로 응답하는 일은 당연할 터.

그의 은퇴에 박수를, 그가 만들어 나갈 새로운 삶을 위해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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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아침에 읽은 블룸버그 발 뉴스 하나.  <정말 힘든 시간들- 재택근무 시대가 세탁업을 조이고 있다. ‘Ugly, Ugly Time’: Work-From-Home Era Crushes U.S. Dry Cleaners>라는 제목의 기사다.

팬데믹 이후 자영업들이 겪어 오는 어려움들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백신이 개발되어 공급되고 치료제가 일반화 되면 식당업이나 호텔 여행업 등등은 다시 호황을 맞을 가능성이 있지만, 세탁업은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상당 부분 나는 그 기사 내용에 동의한다. 지난 구 개월 사이 6개 중 한개의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거나 도산하는 업체들이 줄을 이을것이라거나, 여전히 평상시의 반도 못 미치는 매출을 기록하는 업소들이 대부분 이라는 상황 인식에도 동의한다.

오랜 재택근무의 경험들로 사람들의 의복 습관이 달라져 세탁업이 예전으로 돌아가긴 힘들 것이라는 전망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한가지.

추수와 절기는 때가 있듯, 모든 업종 역시 부침의 때가 있겠다만, 감사란 늘 나에게 달린 일.

뉴스가 내 추수감사절을 범하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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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단풍놀이 길 나서려 했었다. 오늘 지나면 올 가을도 제 길 찾아 떠나려 할 듯 하여서 였다. 나서려던 길 막은 놈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고 온종일 비가 추적일 것이라고 떠드는  일기예보였다. 때때로 예보는 정확하기도 하다. 먼길 나서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씨였다.

집에 머무는 덕에 모처럼 참 좋은 친구 내외가 방문하여 이 심상찮은 세월에도 감사히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쩌다 내가 온종일 집에 있을 때면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고구마를 굽거나 찌기도 하시고,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치시기도 하셨고, 쑥 갈아 개떡을 만드시거나 바람 떡을 만드셔 내 입이 심심치 않게 하시곤 했다.

딱하게도 나는 입이 짧았고 성격도 모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머니께 던졌던 말이다. ‘에고, 제발 그만 두세요.’

어머니 생각하며 떡을 빚어 본 하루다. 팥소와 녹두소 넉넉히 만들어 저장도 하고, 콩가루, 녹두가루도 준비해 두었다. 올 겨울엔 옛 생각나면 떡을 빚어 볼 요량이다.

그렇게 콩가루와 녹두가루 입힌 인절미도 만들고, 녹두와 각종 너트 갈아 넣은 소에 단호박 쪄 넣은 찹쌀떡과 계피가루 입힌 옷에 팥소 넣은 찹쌀떡을 만들어 보았다.

아내가 제법 맛있다며 칭찬을 보탰다.

아버지와 두 누이들에게도 배달해 맛을 보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시 전 일년 여 알츠하이머 병세로 시간을 마음대로 넘나드시곤 하셨다. 그 무렵 종종 어머니는 육이오 전쟁통 피난길에서 떡장사 하셨던 때로 돌아가 계시곤 하셨다. 어머니가 절박한 기억에 휩싸이곤 할 때였다.

어머니 흉내 내며 떡을 빚은 하루. 어머니와 내가 다른 것 하나. 어머니는 절박했고 나는 여유롭다는.

그저 고마움으로, 어머니 덕에.

*** 오늘 동네 뉴스 하나. 우리들 실생활에 직접 다가오는 변화는 대통령 선거보다는 지역사회 일꾼들 선택에서 먼저 온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사를 마무리하는 말. ‘유권자들은 어차피 지역사회 일꾼들이 내세우는 정책보다 자신들의 선입견이 우선’한다는…

내 책상 위에서 나를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오늘도 ‘쯔쯔쯔’와  ‘그래 고맙다’를 반복하신다.DSC01266A

선거에

아침 일 나가던 길에 눈에 들어온 선거용 입간판들,  이즈음 사거리 마다 놓여있는 풍경이다.  이른바 선거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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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서 대통령 후보들 홍보 입간판을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주로 연방 의회 의원 및 주지사를 비롯한 주정부 관리와 의회 등에 입후보한 사람들의 홍보 입간판들이 주를 이룬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죠 바이든의 고향이고 보니 이 곳 판세는 워낙 뻔해서 일게다.

죠 바이든의 집과 내 집과의 거리는 10여분 안팎이다. 왈 동네 사람이다. 이 곳에서 오래 산 한인 치고 그와 악수 한번 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랜 세월 의원 생활을 하면서 한인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왔다. 나 역시 몇 번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함께 식사도 하고 걷기도 하고,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 기억들이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의 보좌관과 행사를 함께 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일이 그리 마뜩잖다. 물론 트럼프는 더더욱 아니다.

엊그제 아내에게 들은 말이다. 내 오랜 단골인 윌리암슨 할머니가 세탁소를 들어섰는데 그녀가 쓴 마스크가 기이했단다. 비닐 마스크 였단다. 아내가 물었단다. ‘천 마스크가 없어요? 그 마스크는 숨 쉬기가 매우 힘들거 같아요.’ 오랜 학교 교직을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그녀가 한 대답이란다. ‘에고, 내 남편이 이젠 귀가 어두워 잘 못들어요. 그래 내가 말하는 입 모양을 보고 소통을 한다우. 그래 생각 끝에 이 마스크를 쓴다우.’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람살이 시작한 이래 손 꼽아도 좋을 만큼 몇 안되는 큰 변화의 시대를 너나없이 겪어내는 이즈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시절에 바이든과 트럼프를 놓고 선택해야 하는 선거판은 좀 불편하고,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불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선거란 어차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에 솔깃해 나도 한 표는 던진다마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면 한반도 남북문제를 위해서 트럼트가 낫지 않은가 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는 한다만 그 역시 난 동의할 수 없다. 누가 되어도 마찬가지거니와 대한민국은 이젠 홀로 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즈음 뒤뜰에서 저녁 노을이 만들어내는 하늘에 홀려 오래 앉아 있곤 한다. 하늘에 빠져 있다보면 사람살이엔 분명 그 살이를 다스리는 힘이 있는 듯 하다. 그 힘을 무어라 부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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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또 사는게다.

2

딱따구리가 내 집 나무에서 노는 걸 보니 나무를 자를 때가 되었나 보다.

우정(友情)으로

살며 잠시라도 스쳐 지나간 연이라도 닿았던 이들이 세상 뉴스를 달구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무래도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이즘 세상에선 아직 노년이라고 말하기엔 이르고, 그렇다고 중년이라고 말하기엔 겸연쩍은 나이여서 조심스럽다만 이쯤 살다보니 누군가의 삶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에 대한 잣대는 굳어진 상태이다.

나는 옛 친구들이 옛날 내가 알고 있는 모습대로 늙어가는 소식을 듣거나 보노라면 참 좋고, 그가 잘 살았다는 느낌을 받는 편이다. 물론 사람 냄새가 나는 옛 추억에 근거해 하는 말이다.

며칠 동안 이일병이라는 이름이 한국뉴스로 내게 다가왔다. 어릴 적 캠퍼스에서 잠시 알고 지낸 친구다. 하여 뉴스들을 두루 훑어 보았다. 그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극히 자신에게 충실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매달려 사는 소시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잘 살아왔고,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답게.

솔직히 그 때나 지금이나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만, 그게 무슨 문제랴! 그는 그 답게 나는 나 답게 살면 그만인 것을.

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들이 어렸던 시절 그는 프로파간다적 행위나 행태들을 매우 싫어했던 매우 자유주의적인 친구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놀랄 만한 변화를 겪어왔다. 그 변화에 걸맞게 그저 옛 모습 간직하며 사는 그의 오늘에 화살을 쏘는 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좀 불편하다.

그의 노년이 그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시간들이 되길 빌며… 옛 우정으로.

유혹에

살며 내겐 전혀 걸맞지 않는 유혹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그 유혹의 소리들이 진짜 내 것인 줄로 알고 착각했던 때들이 있었다. 돌이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게 다 오늘의 나를 만든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언제나 소중하고 감사의 시원(始原)이라는 생각으로.

내 세탁소 카운터 한 쪽 벽면엔 몇 개의 사진들과 시를 새겨 놓은 나무 판넬들이 걸려 있다. 사진들은 내가 찍은 풍경들이거나 가족 사진들이다. 딱 한 개는 야구의 전설적 영웅인 Babe Ruth가 빨래를 담은 hamper에서 낮잠을 즐기는 사진이다. 생각할수록 아린 옛 벗이 세탁소 잘 되라고 주고 간 것이다. 그리고 시 몇 편들은 내가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영역해 걸어 놓은 것들이다.

종종 손님들은 시와 사진들에 대해 묻곤 한다. 카메라의 기종을 묻기도 하고, 렌즈에 대해 묻기도 하며, 시인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때 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그저 취미이고 좋아하는 것들인데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답니다. 그저 제 격에 맞는 싼 카메라이고, 시도 그저 제가 좋아할 뿐이지요.” 때론 그걸 팔라고 하는 이들도 있어 아주 난감할 때도 있다.

내가 또 하나 즐기는 취미 하나는 매 주 일요일 아침에 세탁소 손님들에게 띄우는 편지 쓰기다. 거의 15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일이다. 이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다. 언젠가 이 편지들을 정리할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 보다 아직은 편지 쓰기가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이 더 크다.

아무튼 그 편지 마무리에는 시를 한 편 씩 달려 보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편들이다. 때때로 편지를 쓰는 시간 보다 시를 고르는 시간에 몇 배나 많은 시간들을 쓰곤 한다. 주로 영미 시인들의 시편들이지만 때론 한국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보내주기도 한다. 아주 이따금 씩은 내가 쓴 것을 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족을 반드시 붙인다. ‘ 시(詩)가 아닌 제 낙서’라고.

그리고 어제 어느 손님에게서 받은 제안이다. 자신을 계간지 Dreamstreets의 편집장이자 시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내 가게를 드나들고 내 주말 편지를 받아 읽으며 생각 끝에 내게 제안한다고 하였다. 델라웨어 인근의 시인 등 예술가들이 함께 하는 동호인지 같은 것인데 오는 12월호인 겨울호에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제안과 함께 시인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 참여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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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그저 세탁소 일을 할 뿐이랍니다.’

사실 이런 제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세탁소를 시작한 이래 종종 내가 걸려 넘어져 크게 낭패를 본 사건들은 대개 ‘아이고 세탁소 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유혹에 혹한 결과였다.

오늘 저녁 그가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왔다. 그가 쓴 시 몇 편들과 함께.

유혹에.

노동에

“미쳤어, 미쳤어, 모두가 미쳤어!” 가게 문을 들어서며 Rose  할머니가 내게 던진 말이다. 내 가게 30년 단골인 할머니는 부부 모두 유태계이고 남편은 은퇴 의사이다. “내가 여기로 오는 길에 바닷가로 가는 1번 도로를 거쳐왔는데 엄청 막히더라고… 아니 지금이 바다로 놀러갈 때냐고… 암튼 다 미쳤어!” 바닷가에 부부 소유 콘도가 있는 할머니의 코로나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적당히 눙치며 대꾸해 주고는 그녀의 세탁물들을 차에 실어 준 뒤 눈에 들어 온 이웃 그로서리에 자리잡은 가을을 만났다. 누런 호박들과 장작들, 그래 어느새 구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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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드니 하늘빛도 이미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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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엇비슷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생각은 정말 저마다 다르다. 그래 아직은 사람인게지.

‘공감’ – 그 폭과 크기의 확대를 위해 누가 더 최선을 다하나 하는 싸움을 보는 이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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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조촐한 아침 식사에 감사하며 내 노동의 한계를 측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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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r Day 연휴에.

예수쟁이

누가 하라고 시켰다면 손도 대지 않을 일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 벌린 일이다. 그저 작게 시작한 일이었다. 헌 것 뜯어내고 새 옷을 입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생각치 않던 일에 더해 욕심이 자꾸 보태진다.

애초 세웠던 계획은 어느새 기억조차 없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면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땅을 파고 땅을 다지며 높이를 맞춘다. 자갈을 덮으며 또 생각이 달라진다. 어느새 그냥 즐기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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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뉴스들을 보며 드는 생각 하나.

믿음 또는 교회, 사찰, 종교기관, 조직 또는 체제, 아니 이념 사상 그 무엇이라 부르든 모두 저마다 제 머리 속 크기만한 신들을 안고 살며 벌이는 일들 아닐까?

저마다 제 욕심과 이기 –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 그것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탁소에서 손님들을 맞으며 날아갈 듯 기쁨에 겨워 내 삶에 크나큰 자긍을 맛 볼 때가 있다.

일테면  ‘You have contributed to the health, welfare, and happiness of each person with whom you have come in contact here in Newark. The beautiful photographs you share with us, the poems, both those translated from Korean and those already written in English give comfort, knowledge, and enrichment to all who receive them.’ 인사치레도 기분 좋은 것이지만, 가장 큰 것은 ‘너 예수 믿지!’하는 말이다.

어쩌다 그 말을 들을 때면 하기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잘 살고 있구나’하는 맛을 느끼곤 한다. 나는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한땐 거창하게 허황된 꿈도 많이 꾸고 살았다만, 신이 내게 허락하신 재주 안에서  하루를 그렇게 꾸려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산다.

그렇게 난 예수쟁이이고 싶다.

뭐 특별히 큰 생각 없다.

예수가 선포했듯이 신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고 중간자로 사기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이 믿음, 교회, 종교, 이념, 사상 그 무엇으로 불리우던 간에.

신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것을 가르쳐 준 내 신앙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본회퍼를 능멸한 수준 이하의 잡사기꾼 전광훈이라는 놈 뿐만이 아니다. 교회와 사찰의 크기가 문제도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신과 나 사이에서 착취하는 중간자에게 정신 빠뜨리는 일이 바로 죄이고 악이다.

중간자에게 얼 빠뜨리면 사람이 망가진다. 망가지는 게 나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우리가 망가진다.

예수가 저주하며 혼낸 이들은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 만이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에게 얼빠져 노는 게으른 자, 무지한 자, 오만한 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내 믿음이다.

날 좋은 일요일, 땅을 뒤집으며 고집으로 부려보는 욕심 하나.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그냥 소소한 내 일상 속에서.

물소리

반 년 만에 주(州) 경계를 넘나들었다. 주 경계를 넘었다 했지만 고작 집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뉴저지 남단이었다.

이제 세월은 쏜 살이 아니라 방아쇠 당긴 탄환이다. 그가 떠난 지 어느 새 일년이 되어 조촐히 한 번 모이자는 후배의 전언을 받은 것은 두어 주 전 일이다.

장광선선생님은 뉴저지 남단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호수를 낀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Lake Park Cemetery 선생의 쉼터는 그에게 참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에는 오랜 동지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선생님을 먼저 보내신 사모님의 지난 일년 여 시간들이 고스란히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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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했던 벗들에 비하자면 내가 그를 안 세월은 짧다. 벗들은 그를 형님 또는 선배라고 부르지만 내가 그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를 안 세월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가 진정 내 삶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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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짧은 이력이다. <김대중 구출위원회, 5.18 진상규명, 전두환 독재타도 위원회 조직,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수난자 가족 돕기회 간사, 해외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민주연합총무, 재미한국청년연합, 국제평화대행진 활동, 재미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필라델피아 녹두회 등등>

그는 조국의 통일과 민주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깊이 알게 된 때는 고작 스무 해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내가 아주 짧은 세월 잠시 동포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매 주 그의 컬럼을  신문에 싣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의 컬럼이 신문의 얼굴이었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과 강진에서 유소년과 초기 청년기를 지냈던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남도의 바람과 물결, 그리고 사람들 그 터 위에 세우고 꿈꾸어 온 그의 세상을 풀어 놓은 글들이었다.

그가 꿈꾸던 통일과 민주는 모두 함께 주인 된 사람들이 사람처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향하는 도구였다. 그즈음 나는 그의 남도 억양에서 나는 진한 사람 냄새를 맡곤 했다. 때론 그의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많이 뒤쳐진 생각들이 그가 풍기는 사람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두 해 전에 후배들의 성화로 그가 남긴 글들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 책을 여는 그의 말이다.

<밀려가는 물>

나는 델라웨어강 하구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강변에 마을사람들을 위한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해 두어 차례 나는 그 곳에 나가 강변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젖어 봅니다.

어제 지나던 물은 오늘의 물에 밀려 떠나고, 오늘의 이 물은 내일의 물에 밀려 바다로 사라지리라.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 그리고 내일의 물은 지나간 물, 지금의 물, 새로운 물과 다른가 같은가? 다르다면 하염없이 다른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어찌 그 많은 양의 물을 품을 수 있을까?

이제 그는 먼저 바다 되었다.

그가 흐르는 물이었던 시절에 소리쳤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며 오늘의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벗들과 후배들이 있다.

그의 고향 남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을 넘어 전 세계에서 한국어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해 오늘을 흐르는 물결같은 삶을 생각하며.

딱히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늘 문제일 뿐. 그가 오늘 다시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들이 묘지에서 머무르는 내내 매 한 마리  높은 나무가지 위에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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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선생님 일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