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소식

1.  아침, 집을 나서는데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눈을 들어 나무를 쳐다보니 이젠 힘들어 좀 쉬어야 갰다는 듯 큰 숨 내쉬며 마른 잎 몇 장 붙들고 있었다. 때 아니게 봄날 같은 아침이었지만 이제 곧 서리가 내릴게다.
오후에 낙엽을 긁어 치우다. 내 어릴 적에 낙엽 떨어지는 나무 한 그루, 그 낙엽 받아 안을 마당 한 뼘 없던 시절에 읽었던 피천득 선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며’였던가? 아마 맞을게다. 아직도 남아있는 그 아련한 부러움.
아하, 그 부러움을 미처 채우지도 못한 채, 어느새 낙엽을 긁으며 그 일이 노동이 되어 버린 때에 이르렀다.

2.  아무렴, 그 조차 어떠랴! 여기까지 온 것만 하여도 그저 감사인 것을.
그리고 일터에서 만났던 아침 하늘에 나르던 기러기들을 보며 떠오른 말, 안서(雁書).
안서 – 기러기가 전하는 소식(글), 곧 옛 중국 고사에 나오는 편지를 일컫는 말이다. 어찌 중국 고사 뿐이었겠나? 멀리 떨어진 그리운 사람들끼리 전하는 소식이란 무릇 오랜 시간이 걸렸던 때가 여러 천 년이었다.
그저 같은 시간에 미국에서 한국 사이에 소식 주고 받는 이즈음 같은 세상 열린게 따져보면 몇 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안서- 그 기러기가 전하는 편지 만큼 절절한 기다림이 담긴 소식 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가족 연인 군신관계 등등…
허나, 곰곰 생각해 따져보면 까닭 없이 ‘나라’라는 이름으로 부역 또는 전장에 군사로 끌려간 이들의 소식이 가장 절절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머리가 깨우쳐 진다는 일이 뭐 별거이겠나? 기러기가 전하는 소식 말고, 사람이 서로 전하는 바른 소식 나누며 사는 세상 만드는 일.
허긴 이즈음엔 기러기 가족들도 많이 있고, 나 역시도 살아오며 한 동안 겪여 보았던 일이지만, 지나보면 다 추억이고 내일에 대한 약도 되는 일일 수 있는 법. 서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그러나 어느 날 날벼락 맞은 듯이 기러기도 소식 전하지 못하는 별천지로 서로 갈라진 가족들 소식 들으면 사람으로 아프지 않을 수 있나?
며칠 전 내 가게 손님 한 분이 아내에게 건넨 말이란다. “가족이나 친척 아님 아는 사람은 없지요?”
이태원 참사(이건 윤석열 참사라고 명명하자는 이들의 말이 맞다) 소식에 대해 미국 촌구석인 여기서 우리 내외가 들은 염려다. 이게 인지상정(人之常情) 곧 사람사는 마음이다.
허나 세월호 참사 때도 그러했듯, 사람 같지 않은 아귀들이 판치는 한국 뉴스들은 참 역겹다.
하아 참 쯔쯔쯧! 기괴한 모습의 윤석열과 김건희에게 느끼는 역겨움에 이른바 언론들은 늘 베이킹 소다를 더한다.
3. 그래도 또 나는 감사를 찾는다. 먼 듯 보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기러기가 물어다 주는 소식, 세 세상이 곧 열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내가 봄부터 노래 부르던 핑크 뮬리 몇 뿌리 뒷뜰 언덕배미에 심은 날에. 반갑게 맞을 기러기 소식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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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보고 돌아온 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귓가에 맴맴 돌며 떠나질 않는다.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사람이 되어 주시겠습니까?”라는 나를 향한 물음이었다.

<기억> – 내가 이해하는 한, 성서를 제대로 꿰뚫는 열쇠가 되는 말이 곧 ‘기억’이다. 다만 성서는 묻지 않고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모세의 마지막 말들을 전하는 성서 신명기는 ‘기억의 신학 책’이라 할 만큼 ‘기억하라!와  ’잊지말라!’는 명령을 반복한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넘긴 말은 바로 ‘기억하라!’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4절)

성서가 말하는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지 머리 속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뜻이 아닌 ‘삶’속에서 ‘함’을 이루라는 재촉이다.

일테면 ‘김복동을 기억하라!’는 말은 ‘김복동이 못 다 이룬 일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라!’라는 명령이라는 말이다.

영화 <김복동>이 던져준 마지막 물음이 그렇게 무겁게 다가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세월호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바로 엊그제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라는 물음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사람의 존엄을 망가뜨리는 숱한 행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산다는 일 역시 매 한가지일 터.

기억에 대한 물음과 명령은 바로 신 앞에 선 이들에게 던져지는 것, 하여 사람으로 제대로 살게 하는 일.

기억에,

***필라델피아 소녀상 건립 추진 위원회 위원들의 치열한 실천과 도전에 존경을 더해 격려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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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휴일 하루

지난 여름 내게 눈 호사(豪奢)를 누리게 했던 글라디오스 구근을 거두었다. 참 고맙기도 하여라! 올 봄에 심었던 구근 수에 비해 숱한 종근들은 차치 하고라도 내년 봄에 다시 심을 실한 녀석들을 거의 세배에 달하게 거두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했다.

화단과 뒤뜰 여기저기에 수선화, 무스카리, 아이리스, 튜립 등속의 알뿌리들을 심고 나니 갑자기 짧아진 하루 해가 저물었다.

낮에 호미와 꽃 삽질 하다 문득 바라 본 하늘, 수리 한 마리 나무 꼭대기에서 한참을 두리번 하더니만 솟구쳐 날았다. 먹이 하나 찾았나 보았다.

하! 그 순간 문득 떠오른 후회 하나. “왜 그리 조급 했었을까? 나는…. 그저 한 계절, 아니 한 나절, 어쩜 그도 아닌 한 순간을 준비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이룬 양 들떠 살았을까?”

한참을 하늘 바라보다 다시 호미를 들고 감사! 이제라도 이렇게 누리는 시간들에 대해.

** 씹는 맛의 즐거움 되찾은 날에. 먹는 즐거움이라니. 그저 넉넉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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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

길고 힘든 한 주간을 보냈다. 내 생업은 연중 이즈음이 가장 바쁠 때다. 비록 세탁업이 이젠 사양업이라도 하여도 나름 이 때가 되면 여전히 바쁘다.
바쁘면 늘 탈이 따른다. 잘 돌아가던 장비가 까닭 없이 속을 태우고, 도와주는 일손들에게도 개인적 일들이 생겨 자리를 비운다. 그런 일들이 함께 동시에 일어난 한 주간이었다.
그 중 최악은 내 틀니가 두 동강이 난 일이다. 비록 간혹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코로나를 넘지 못하고 며칠 앓은 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큰 병치레 한 적도 없거니와 복용하는 약 하나 없이 산다. 다만 윗 잇몸이 부실하여 틀니를 사용한지 제법 되었다.
그 틀니가 반쪽으로 딱 쪼개져 치과로 달려갔더니 다시 만드는데 두 주가 걸린단다. 하여 각종 죽 끓여 배 채워가며 종업원 빈 자리 몫 때우며 보낸 한 주간이 내 힘에 매우 부쳤다.
‘뭘 먹지?’하는 생각에 쌓여 하루를 보내던 틀니가 망가졌던 이튿날, 아주 아주 오래전 내가 작은 도움을 주었던 K가 농장에서 사왔다며 사과 한 꾸러미를 놓고 갔다. 아침마다 그 사과를 갈아 먹는데 어찌 그리 달던지!
그 맛을 오래 이어가고 싶은 생각에 길고 길었던 한 주간의 일을 마무리하고 가을걷이 한창인 과수원을 찾았다. 틀니를 다시 찾기까지 내 끼니를 위해 이런 저런 과일과 채소들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내 늙어가는 과정을 즐기며.
• 내 텃밭에 무는 튼실하게 크고 있다. 틀니를 찾는 그 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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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日常)에

전화벨이 울린다.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망설이다 받아 본다. 대뜸 들리는 소리 “저예요, 오랜만이죠!.” 내 응답, “누구신지?”. 큰 웃음소리와 함께 들여오는 소리, “아이~ 제 목소리도 기억 못해요?”

끝내 그가 이름을 대기까지 나는 스무고개를 넘어야했다. 참으로 내 감이 무뎌졌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에게 미안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내 응답, “뭐 그냥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뭐.”

오랜만에 만나거나 목소리 듣는 이들이 곧잘 묻는 물음, “이즈음 어떻게 지내느냐?”에 대한 내 응답은 마냥 같다.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둘 중 하나다.

나만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다 엇비슷하게 특별한 일 없이 똑같은, 지나가고 나서야 아쉬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닐까?

바로 일상(日常)이다.

누군가는 그 일상에 대한 도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하고, 때론 그 몸짓으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돌이켜보면 그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모습의 연속이었다. 내 지난 시간들은.

이즈음은 틀에 박힌  내 일상이  점점 다르게 다가온다. 그날 내가 누리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하여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내 응답,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 그 속내는 예와 지금이 사뭇 다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 오후, 아내와 함께 정원 길을 걷다.

이른 아침, 다시 첫 서리 하얗게 내린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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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 세탁소 한 쪽 벽면엔 가족 사진 몇 장과 내가 찍은 사진 몇 장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이 장식으로 걸려 있다.

오늘 거기에 작은 소품 몇 개를 더했다. 천조각들과 실을 이용해 만든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의 작품이다.

내겐 누나 하나 동생 둘 그렇게 누이가 셋이다. 부모들에게 아리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만, 우리 네 남매 가운데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아마도 세 째 였을 게다. 한국전쟁 통에서 다 키워 잃었던 맏딸 몫까지 온전히  받아 안았던 내 누나는 내 부모의 기둥이었고, 막내는 어머니 아버지의 재롱이자 기쁨이었고, 아들 하나인 나는 늘 걱정거리였다. 세 째에겐 늘 아린 구석을 내비치시던 내 부모였다.

거의 오 분 거리 한 동네에서 사는 나와 누나와 막내와 다르게 세째는 멀리 떨어진 남쪽에 산다.

그 동생이 나를 깜작 놀라게 한 것은 달포 전이었다. 바느질 일을 하며 살았던 동생이 가게를 접은 지도 꽤 오래 되어 그저 손주들 보며 사는 줄 알았는데, 천과 실을 이용한 작품들을 만들어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도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동생의 작품집을 받아 들었던 날, 나는 내 부모님들께 감사한 마음 일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 한 방울 찔끔했다.

동생의 작품집은 자연, 사계절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로 꾸며 있었다. 나는 그 주제들이 참 좋았다.

이젠 우리 남매 모두 노년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길목에서 조촐하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신이 내려 주신 은총과 살며 만들어 나가는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사를 드러내며 살 수 있다는 기쁨을 잠시라도 나눌 수 있음은 우리 남매들이 누리는 축복일게다.

아내와 매형, 매제들은 덤이 아니라, 이 관계의 실제 주인일 수도 있을 터.

*** 엊그제 막내가 내게 보낸 신문 기사 하나. 아틀란타 조지아 Gwinnett County 공립학교 올해의 교사상 semifinalist에 조카 아이 이름이 올랐다고.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게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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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추석 또는 한가위 – 이제 내겐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추석이예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그저 덤덤하실 뿐이고, 함께 명절 밥상 나누시던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겐 꽃 들고 인사 드리러 가는 날 일 뿐.

다들 살기 바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직은 살기 바쁜 탓에 한가위 명절은 그저 옛 생각 이나 더듬어 보는 시간일 뿐.

초저녁, 뒤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그저 차분히 고요할 뿐.

보름달을 향해 속삭이는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고 작은 기도소리로 들릴 뿐.

* 사위, 며느리 사돈들께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아직은 좋은 명절에.

** 단순함과 감사를 일깨우는 명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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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텃밭에서 놀며 즐기는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자면 단연 씨 뿌린 후 올라오는 새싹들을 바라 볼 때이다.

엊그제 처서處暑)도 지나갔다지만 내 일터는 여전히 찌는 더위였다. 하루의 피로를 안고 돌아와 며칠 전 뿌렸던 가을 채소 씨앗들이 파란 새싹들로 변신해 올라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인다.

이 나이에 철딱서니 없게 과한 말일지라도, ‘이 경이로움이라니, 아름다움이라니!’

살아오며 내가 누렸거나 내 곁을 스쳐간 경이로움과 아름다움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내 삶 속 느즈막한 순간일지라도 텃밭의 즐거움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 그 감사를 느끼는 내 대견함을 허락하심에 또 감사!

마치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가 된 듯이 읊조려보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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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세사모

토요일 오전, 필라 외곽의 작은 도시 Ambler의 거리 풍경은 마치 먼 나라에 여행을 온 듯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른바 Multiplex라고 하는 대형 극장에 이미 익숙해진 내게 Ambler 영화관은 젊어 한 때 즐겨 찾곤 했던 연극 소극장을 추억하게 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해 준 벗들에 대한 고마움이 참 컸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그대가 조국>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냥 가슴이 아렸다. 영어로 번역한 제목 <The Red Herring>이 원제보다 더 가까이 마음에 다가 온 영화였다. 돌아가신 노무현대통령 팔이를 하는 이들은 차고 넘쳐도 그 이를 닮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 않듯, 변혁의 깃발을 들어 흔드는 시늉만으로 뭇매와 화살비를 맞고 쓰러진 참 잘난 사내에 대한 저주와 비아냥은 아직도 이어지지만 그가 품었던 꿈과 이상을 말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자리를 준비했던 이들이 마련해 준 팝콘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일행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들렸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는데(글쎄… 이즈음 내가 종종 범하는 우(愚) 가운데 하나. 상대방의 나이 가늠을 잘 못한다는 점. 나는 늘 젊었다는 착각의 잣대질 때문.)… 아무튼 그이들의 이야기.

‘이건(이 영화 상영은) 누가 주최해서 이루어 진 일인가?’, ‘지금 한국정부 싫어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거 아닐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때, 뒷줄 좀 떨어져 앉아있던 젊은 여성 한 분(이 또한 내가 자주 범하는 우(愚)일 수도 있다. 여성들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므로.)이 어르신 일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글쎄…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필라세사모라고…. 세월호 참사…. 그거 아시지요…. 그 사건을 잊지말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래요…. 거기서 주관했다고 해요.’

이어진 어르신들의 질문, ‘거기 대표나 회장은 누구요?’ 젊은 여성분의 대답. ‘글쎄요? 잘은 모르겠고요. 아마 저기 저 앞자리에 계신 파란 점퍼입고 계신 분일거요…’

그러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필라세사모> – 내가 아는 한, 대표니 회장이니 하는 직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라고 하는 개념 조차 없는 그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나와 이웃들이 안전하게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뜻이 맞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8년 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이 모임의 동기가 되었다.

여남은 여명이 그 동안 꾸준히 이 모임을 함께 해 오고 있고, 나처럼 간혹 머리 숫자 채우고 박수치는 이들까지 합치면 사오십 여명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필라세사모 – 숱한 거짓 정보들과 자기 집단 이익에 사로잡혀 이웃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현실을 함께 직시하고 그저 각자의 삶 속에서 작게 나마 사람 답게 살아보고자 애쓰는 이들 정도로 나는 이 모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화 <그대가 조국The Red Herring>을 선택한 것은 참 걸맞았다.

조국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때를 기다리며…. 그날이 오면, 오늘도 꾹꾹 참아 삼키고 있을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삭힌 한(恨)들이 풀리지 않을까..

**** 영화를 보며 며칠 전 북의 김여정이 했다는 말. “남조선 당국의 대북정책을 평하기에 앞서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라는 말이 큰 공감이 되어 떠올랐는데…. 이름만 바꾸어 불러도 좋을 분(糞)들이 영화 속에 참 많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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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가게 문을 닫으려고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내용이 대개 뻔하다. ‘곧 문닫지요? 제가 맡긴 옷이 오늘 저녁 꼭 필요한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교통사정이 복잡해서…. 5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대충 그런 내용의 전화가 대부분이어서 때론 내 귀가길을 한참 동안 붙잡곤 한다. 하여 반갑지 않다.

아내가 전화를 받더니 한국말로 응대를 한다. “잠깐만요…”하더니만,  “한국인데…”하며 내게 전화기를 건넨다.

“예, 여보세요…”하는 내 말에 수화기에서 들려온 말, “야! 나야, 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대뜸 누군지 알아채곤 던진 내 말. “엉? 너 아직 살아있냐?” 중, 고, 대학교 동창인 박(朴)이었다.

얼굴 본 지 십 수년이 지나 목소리로 만나 떠든 그와의 수다로 아내의 귀가 길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도 정년으로 그만둔 지 벌써 다섯해가 되었단다. 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낯설단다. 백세를 넘기신 그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흔 여섯을 넘기신 내 아버지 이야기, 서로의 아이들 이야기…

“야! 니 목소리 들으니 넌 하나도 안 변하고 옛날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라는 그의 물음에 내가 던진 말, “글쎄… 아무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가?”

십 수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 혼자였던 그의 생활이 궁금해 내가 물었다. “그래, 누구랑 사니?”. 그의 대답, “응, 십년 됐어. 재혼한지.”

“그래, 잘 했다. 늙막에 함께 하는 동무 있어야지. 뭐 딴 거 있냐? 건강하자!”

집에 돌아와 저녁상 물린 후 뒷 뜰에 앉아 해질녘까지 시간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다가오는 꽃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려 이즈음 다시 넘기고 있는 책장들은 그대로 덮어 둔 채, 내가 맺어 온 짧은 연(緣)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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