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을 보고 돌아온 밤,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귓가에 맴맴 돌며 떠나질 않는다.
“김복동, 그 이름을 기억해 주시는 사람이 되어 주시겠습니까?”라는 나를 향한 물음이었다.
<기억> – 내가 이해하는 한, 성서를 제대로 꿰뚫는 열쇠가 되는 말이 곧 ‘기억’이다. 다만 성서는 묻지 않고 ‘기억하라!’고 명령한다.
모세의 마지막 말들을 전하는 성서 신명기는 ‘기억의 신학 책’이라 할 만큼 ‘기억하라!와 ’잊지말라!’는 명령을 반복한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넘긴 말은 바로 ‘기억하라!’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 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4절)
성서가 말하는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지 머리 속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는 뜻이 아닌 ‘삶’속에서 ‘함’을 이루라는 재촉이다.
일테면 ‘김복동을 기억하라!’는 말은 ‘김복동이 못 다 이룬 일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라!’라는 명령이라는 말이다.
영화 <김복동>이 던져준 마지막 물음이 그렇게 무겁게 다가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세월호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바로 엊그제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라는 물음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사람의 존엄을 망가뜨리는 숱한 행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산다는 일 역시 매 한가지일 터.
기억에 대한 물음과 명령은 바로 신 앞에 선 이들에게 던져지는 것, 하여 사람으로 제대로 살게 하는 일.
기억에,
***필라델피아 소녀상 건립 추진 위원회 위원들의 치열한 실천과 도전에 존경을 더해 격려를 드리며.
가을, 휴일 하루
지난 여름 내게 눈 호사(豪奢)를 누리게 했던 글라디오스 구근을 거두었다. 참 고맙기도 하여라! 올 봄에 심었던 구근 수에 비해 숱한 종근들은 차치 하고라도 내년 봄에 다시 심을 실한 녀석들을 거의 세배에 달하게 거두어 갑자기 큰 부자가 된 듯 했다.
화단과 뒤뜰 여기저기에 수선화, 무스카리, 아이리스, 튜립 등속의 알뿌리들을 심고 나니 갑자기 짧아진 하루 해가 저물었다.
낮에 호미와 꽃 삽질 하다 문득 바라 본 하늘, 수리 한 마리 나무 꼭대기에서 한참을 두리번 하더니만 솟구쳐 날았다. 먹이 하나 찾았나 보았다.
하! 그 순간 문득 떠오른 후회 하나. “왜 그리 조급 했었을까? 나는…. 그저 한 계절, 아니 한 나절, 어쩜 그도 아닌 한 순간을 준비하지 않고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이룬 양 들떠 살았을까?”
한참을 하늘 바라보다 다시 호미를 들고 감사! 이제라도 이렇게 누리는 시간들에 대해.
** 씹는 맛의 즐거움 되찾은 날에. 먹는 즐거움이라니. 그저 넉넉한 감사!
틀니
일상(日常)에
전화벨이 울린다.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망설이다 받아 본다. 대뜸 들리는 소리 “저예요, 오랜만이죠!.” 내 응답, “누구신지?”. 큰 웃음소리와 함께 들여오는 소리, “아이~ 제 목소리도 기억 못해요?”
끝내 그가 이름을 대기까지 나는 스무고개를 넘어야했다. 참으로 내 감이 무뎌졌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에게 미안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내 응답, “뭐 그냥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뭐.”
오랜만에 만나거나 목소리 듣는 이들이 곧잘 묻는 물음, “이즈음 어떻게 지내느냐?”에 대한 내 응답은 마냥 같다.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둘 중 하나다.
나만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다 엇비슷하게 특별한 일 없이 똑같은, 지나가고 나서야 아쉬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닐까?
바로 일상(日常)이다.
누군가는 그 일상에 대한 도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하고, 때론 그 몸짓으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돌이켜보면 그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모습의 연속이었다. 내 지난 시간들은.
이즈음은 틀에 박힌 내 일상이 점점 다르게 다가온다. 그날 내가 누리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하여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내 응답,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 그 속내는 예와 지금이 사뭇 다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 오후, 아내와 함께 정원 길을 걷다.
이른 아침, 다시 첫 서리 하얗게 내린 날에.
가족
내 세탁소 한 쪽 벽면엔 가족 사진 몇 장과 내가 찍은 사진 몇 장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이 장식으로 걸려 있다.
오늘 거기에 작은 소품 몇 개를 더했다. 천조각들과 실을 이용해 만든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의 작품이다.
내겐 누나 하나 동생 둘 그렇게 누이가 셋이다. 부모들에게 아리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만, 우리 네 남매 가운데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아마도 세 째 였을 게다. 한국전쟁 통에서 다 키워 잃었던 맏딸 몫까지 온전히 받아 안았던 내 누나는 내 부모의 기둥이었고, 막내는 어머니 아버지의 재롱이자 기쁨이었고, 아들 하나인 나는 늘 걱정거리였다. 세 째에겐 늘 아린 구석을 내비치시던 내 부모였다.
거의 오 분 거리 한 동네에서 사는 나와 누나와 막내와 다르게 세째는 멀리 떨어진 남쪽에 산다.
그 동생이 나를 깜작 놀라게 한 것은 달포 전이었다. 바느질 일을 하며 살았던 동생이 가게를 접은 지도 꽤 오래 되어 그저 손주들 보며 사는 줄 알았는데, 천과 실을 이용한 작품들을 만들어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도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동생의 작품집을 받아 들었던 날, 나는 내 부모님들께 감사한 마음 일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 한 방울 찔끔했다.
동생의 작품집은 자연, 사계절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로 꾸며 있었다. 나는 그 주제들이 참 좋았다.
이젠 우리 남매 모두 노년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길목에서 조촐하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신이 내려 주신 은총과 살며 만들어 나가는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사를 드러내며 살 수 있다는 기쁨을 잠시라도 나눌 수 있음은 우리 남매들이 누리는 축복일게다.
아내와 매형, 매제들은 덤이 아니라, 이 관계의 실제 주인일 수도 있을 터.
*** 엊그제 막내가 내게 보낸 신문 기사 하나. 아틀란타 조지아 Gwinnett County 공립학교 올해의 교사상 semifinalist에 조카 아이 이름이 올랐다고.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게 그저 감사!
명절
추석 또는 한가위 – 이제 내겐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추석이예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그저 덤덤하실 뿐이고, 함께 명절 밥상 나누시던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겐 꽃 들고 인사 드리러 가는 날 일 뿐.
다들 살기 바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직은 살기 바쁜 탓에 한가위 명절은 그저 옛 생각 이나 더듬어 보는 시간일 뿐.
초저녁, 뒤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그저 차분히 고요할 뿐.
보름달을 향해 속삭이는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고 작은 기도소리로 들릴 뿐.
* 사위, 며느리 사돈들께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아직은 좋은 명절에.
** 단순함과 감사를 일깨우는 명절에.
텃밭에서
텃밭에서 놀며 즐기는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꼽자면 단연 씨 뿌린 후 올라오는 새싹들을 바라 볼 때이다.
엊그제 처서處暑)도 지나갔다지만 내 일터는 여전히 찌는 더위였다. 하루의 피로를 안고 돌아와 며칠 전 뿌렸던 가을 채소 씨앗들이 파란 새싹들로 변신해 올라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인다.
이 나이에 철딱서니 없게 과한 말일지라도, ‘이 경이로움이라니, 아름다움이라니!’
살아오며 내가 누렸거나 내 곁을 스쳐간 경이로움과 아름다움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내 삶 속 느즈막한 순간일지라도 텃밭의 즐거움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 그 감사를 느끼는 내 대견함을 허락하심에 또 감사!
마치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가 된 듯이 읊조려보는 날에.
필라세사모
토요일 오전, 필라 외곽의 작은 도시 Ambler의 거리 풍경은 마치 먼 나라에 여행을 온 듯한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른바 Multiplex라고 하는 대형 극장에 이미 익숙해진 내게 Ambler 영화관은 젊어 한 때 즐겨 찾곤 했던 연극 소극장을 추억하게 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고 초대해 준 벗들에 대한 고마움이 참 컸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그대가 조국>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냥 가슴이 아렸다. 영어로 번역한 제목 <The Red Herring>이 원제보다 더 가까이 마음에 다가 온 영화였다. 돌아가신 노무현대통령 팔이를 하는 이들은 차고 넘쳐도 그 이를 닮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 않듯, 변혁의 깃발을 들어 흔드는 시늉만으로 뭇매와 화살비를 맞고 쓰러진 참 잘난 사내에 대한 저주와 비아냥은 아직도 이어지지만 그가 품었던 꿈과 이상을 말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쉽지 않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그 자리를 준비했던 이들이 마련해 준 팝콘과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일행들이 나누는 대화들이 들렸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는데(글쎄… 이즈음 내가 종종 범하는 우(愚) 가운데 하나. 상대방의 나이 가늠을 잘 못한다는 점. 나는 늘 젊었다는 착각의 잣대질 때문.)… 아무튼 그이들의 이야기.
‘이건(이 영화 상영은) 누가 주최해서 이루어 진 일인가?’, ‘지금 한국정부 싫어하는 사람들이 준비한 거 아닐까?’ 그런 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가던 때, 뒷줄 좀 떨어져 앉아있던 젊은 여성 한 분(이 또한 내가 자주 범하는 우(愚)일 수도 있다. 여성들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므로.)이 어르신 일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글쎄…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필라세사모라고…. 세월호 참사…. 그거 아시지요…. 그 사건을 잊지말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래요…. 거기서 주관했다고 해요.’
이어진 어르신들의 질문, ‘거기 대표나 회장은 누구요?’ 젊은 여성분의 대답. ‘글쎄요? 잘은 모르겠고요. 아마 저기 저 앞자리에 계신 파란 점퍼입고 계신 분일거요…’
그러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필라세사모> – 내가 아는 한, 대표니 회장이니 하는 직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이라고 하는 개념 조차 없는 그저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나와 이웃들이 안전하게 건강한 삶을 살고자’하는 뜻이 맞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8년 전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이 모임의 동기가 되었다.
여남은 여명이 그 동안 꾸준히 이 모임을 함께 해 오고 있고, 나처럼 간혹 머리 숫자 채우고 박수치는 이들까지 합치면 사오십 여명은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필라세사모 – 숱한 거짓 정보들과 자기 집단 이익에 사로잡혀 이웃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현실을 함께 직시하고 그저 각자의 삶 속에서 작게 나마 사람 답게 살아보고자 애쓰는 이들 정도로 나는 이 모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영화 <그대가 조국The Red Herring>을 선택한 것은 참 걸맞았다.
조국이 꿈꾸었던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때를 기다리며…. 그날이 오면, 오늘도 꾹꾹 참아 삼키고 있을 그와 그의 가족들의 삭힌 한(恨)들이 풀리지 않을까..
**** 영화를 보며 며칠 전 북의 김여정이 했다는 말. “남조선 당국의 대북정책을 평하기에 앞서 우리는 윤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라는 말이 큰 공감이 되어 떠올랐는데…. 이름만 바꾸어 불러도 좋을 분(糞)들이 영화 속에 참 많더만.
시간에
가게 문을 닫으려고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내용이 대개 뻔하다. ‘곧 문닫지요? 제가 맡긴 옷이 오늘 저녁 꼭 필요한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데…. 교통사정이 복잡해서…. 5분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대충 그런 내용의 전화가 대부분이어서 때론 내 귀가길을 한참 동안 붙잡곤 한다. 하여 반갑지 않다.
아내가 전화를 받더니 한국말로 응대를 한다. “잠깐만요…”하더니만, “한국인데…”하며 내게 전화기를 건넨다.
“예, 여보세요…”하는 내 말에 수화기에서 들려온 말, “야! 나야, 나!”, 그 목소리만으로도 대뜸 누군지 알아채곤 던진 내 말. “엉? 너 아직 살아있냐?” 중, 고, 대학교 동창인 박(朴)이었다.
얼굴 본 지 십 수년이 지나 목소리로 만나 떠든 그와의 수다로 아내의 귀가 길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일도 정년으로 그만둔 지 벌써 다섯해가 되었단다. 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낯설단다. 백세를 넘기신 그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흔 여섯을 넘기신 내 아버지 이야기, 서로의 아이들 이야기…
“야! 니 목소리 들으니 넌 하나도 안 변하고 옛날이랑 똑같은 것 같은데…”라는 그의 물음에 내가 던진 말, “글쎄… 아무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가?”
십 수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 혼자였던 그의 생활이 궁금해 내가 물었다. “그래, 누구랑 사니?”. 그의 대답, “응, 십년 됐어. 재혼한지.”
“그래, 잘 했다. 늙막에 함께 하는 동무 있어야지. 뭐 딴 거 있냐? 건강하자!”
집에 돌아와 저녁상 물린 후 뒷 뜰에 앉아 해질녘까지 시간에 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롭게 다가오는 꽃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오래된 삶의 이야기들을 들으려 이즈음 다시 넘기고 있는 책장들은 그대로 덮어 둔 채, 내가 맺어 온 짧은 연(緣)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