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밤에

밤 사이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쉬는 날 저녁, 가게에 나갔었다. 날씨 온도 9도에 체감온도 -11도면 섭씨로 영하 12도에 체감온도 영하 24도, 경험상 세탁소 보일러가 얼기 십상인 터라 보일러를 켜 놓고 돌아오는 길, 전에 없이 큰 보름달이 먹구름을 타고 놀았다.

까닭없이 긴 밤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꽂힌 대목을 곱씹다.

<이데올로기에는 치료약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똑똑하게 만드는 여러 인지 능력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 중략 –

이런 능력들이 유해하게 조합될 때,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얼마든지 분출한다. 누군가 어떤 집단을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한 뒤, 그들만 제거하면 무한한 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한 줌의 추종자들은 불신자를 처벌하는 방법으로 그 발상을 퍼뜨린다.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발상에 휘둘리거나, 일신의 위협을 느껴 별수 없이 지지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침묵을 강요 당하거나 고립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의 논리에 따르기 마련이라, 내면의 현명한 판단에 위배되는 계획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다.

온 나라가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전염되는 현상을 확실히 막을 방법은 없지만, 예방책은 하나 있다. 바로 열린사회이다.>

치료약이 없는 것은 비단 이데올로기 뿐만이 아닐게다. 일테면 신앙이나 자잘한 일상의 인간 관계에 이르기까지 치료약이 없기는 매양 한가지다.

다만, 천천히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사람들은 열린사회로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 그것이 역사일 터.

갇힌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앞서갈 터이고.

때론 쳇바퀴 도는 세상처럼 보여도 사람사는 세상은 늘 어제보다는 조금은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지? … !

창문 밖 나무가지 우는 밤에.

소리에

내겐  매우 특별한 저녁이었다.  Delaware Art Museum에서 열린 한국 국악 그룹 Black String 연주회는 분명 내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연주회 시작을 알리는 이의 일성은 좀 과하다 싶었다. ‘델라웨어에서 한국의 전통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이 내겐  ‘이런 시골 델라웨어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의 소리, 한국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거슬렸던 것은 Korea가 아닌 South Korea라는 지칭이었지만 이내 수긍하였다. 현실이었으므로.

Delaware Art Museum의 메인 홀 150여 좌석을 메운 청중들은 연주회 시작과 동시에 소리에 빠져 들었다.

신기한 것은 다른 청중들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반응이었다. 나는 음악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오늘 같은 행사(내겐 그저 행사일 뿐이었다)는 그저 아내의 채근으로 따라 나섰을 뿐이다. 그런 내가 연주와 함께 내 속의 나와 함께 고개를 까닥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발장단을 맞추곤 했던 것이다.

매료!

난 매료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오늘 밤 느낌으로 깨달았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서였다.

우리 안에 내제된 힘이 비단 소리 뿐은 아닐 듯.

Korea를 다시 생각해 보는 밤에.DSC04709 DSC04710 DSC04715 DSC04718 DSC04720 DSC04760

눈을 치우며

‘이젠 이 집을 떠나야지…’ 눈 치우는 일이 온전히 내 몫인 된 어느 해 겨울부턴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다행히 호들갑스런 일기예보와 달리 운동삼아 눈 치우기에 딱 적합할 만큼 내렸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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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먼저 이사를 하게 된 곳은 내 가게다. 지난 주에 새 가게 꾸미는 일을 시작하였다. 가게 간판을 주문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DSC04677정말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세탁소였다. 세탁소 일에 대한 경험이라곤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탁소 안에 들어가 구경해 본 적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리 세탁소 간판만 내걸면 먹고 산다던 호시절 옛일이어도 무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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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른 해가 흘렀다. 그 동안 다섯 군데 세탁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30년 꾸준히 해 온 곳은 지금의 세탁소 한 곳이다. 한 때 우후 죽순으로 생겨났던 주변 세탁소들이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이즈음엔 30년 전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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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이젠 일에서 손 놓을 때까지 떠날 수 없는 내 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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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새로 가게를 꾸미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기도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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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드나들며 기분 좋은 세탁소로 꾸미기, 우리 부부 일터와 쉼터가 공존할 수 있게 꾸미기, 언제든 손 놓을 때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넘길 수 있는 세탁소로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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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내 욕심이 드러나는 기도임에 틀림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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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리, ‘이젠 이 집을 떠나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쩌다 한 번 묵어가는 아이들 방을 치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더 큰, 내 본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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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어느새 맞은 올해의 마지막 일요일 밤, 간만에 나와 마주해 앉아 본다.

지난 두어 주 동안 장인 누워 계시는 병원을 오가는 길, 어느 순간 문득 아내에게 던진 말이 있었다. ‘행여 내가 아파 눕거든 당신이나 아이들이나 딱 두 번만 찾아오셔! 병원을 찾는 첫 날과 퇴원하는 날 아니면 그냥 가버린 날, 그렇게 딱 두번 만. 나중에 내가 딴 소리하더라도 듣지말고…’ 이 말은 오래된 내 진심이다.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도 이미 웃으며 던졌던 말이다.

이즈음 시간에 대한 생각이 많다. 장인과 부모님 특히 내 아버님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게다가 올해가 다 저물어 가는 때이고 보니 그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아내가 주일예배에 참석한 시간, 모처럼 즐긴 산책길에서 떠올린 ‘홍목사의 잡기장’에서 읽었던 글 한 줄. “늙으면 외롭게 사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홍목사, 그와 내가 인생 길에서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채 이년을 채우지 못한 세월이었다만 그는 내 평생 잊지못할 선생 가운데 하나이자 벗이자 감히 말하건대 신앙의 동지이다.

나 보다 무려 열 살이나 위인 그가 연말 소식을 이렇게 전해왔다. “우린 함께 늙어가는 사이가 되었네요….” 그렇게 시작되는 편지였다.

나는 아내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 양반이 이젠 나하고 맞먹으실려고 하네! 내가 왜 함께 늙어? 난 아직 청춘인데!”

오늘 산책길에서 마주 친 내게 내가 던진 말, “그래, 이젠 자네도 진짜 익숙해질 나이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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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자

단언컨대 내 장모는 여전히 꽃이다. 오늘도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 목사님의 기억이 그러하였고, 그 기억에 고개 끄덕이는 공동체들로 하여 오늘 장모는 여전히 꽃이 되었다.

장모 돌아가신 지 두 해, 이홍목사님과 교회는 잊지 않고 이 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는 목사님과 그 교회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사실 돌아가신 장모나 점점 기력이 쇠하여 지는 장인에게나 딸인 아내나 사위인 나보다 그 교회 식구들이 더욱 가까운 가족이어서 우린 그저 부끄럽고 미안해야 마땅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까닭은 잊혀진다는 것 아닐까?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여인, 미운 사람을 안고 살지 않았던 여인으로 기억하는, 그리고 그런 여인과 함께 했던 세월에 감사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내 장모는 여전히 꽃다운 삶이다.

살아 생전 장모가 유일하게 미워했던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나와 동갑내기 이홍목사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우스개에 이목사를 향한 내 존경은 더해졌다.

예배 후 찾은 장모 계신 곳. 내 어머니와 아버지, 장인, 아내와 나의 자리가 모두 예약되어 있는 곳을 두루 둘러보다.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꽃같은 삶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를 느끼게 해 준 이홍목사님과 침례교회 식구들을 생각하며.

특별히 장모의 그림자를 아름답게 수놓아 주신 이목사님께 감사를.

12/ 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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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그리고 고향

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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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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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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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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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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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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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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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

  • 첫눈 오는 날 가게 앞에서 담은 사진들

세탁쟁이

‘언제 어디로 옮기느냐?’ – 이즈음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우리 부부의 대답은 ‘아직..’이다. 이래 저래 생각이 많은 이즈음이다. 은퇴하려니 아직은 아니고, 어느 정도 더 일을 할 것인지, 가게 이전에 어느 정도 비용을 투자해야 적절한 것인지, 이전 장소로 어디가 가장 적합할 것인지 등등 모두가 ‘아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올 겨울이 지나면 가게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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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치에서 30년 세탁소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우리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건물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만, 리모델링 후 우리에게 이전할 장소를 권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렌트비 30% 인상은 분명 내 감사의 크기를 뛰어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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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아내와 나는 틈나면 근처 건물이나 샤핑 센터 빈 자리를 찾곤 했지만 눈에 딱 들어오는 장소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군데 현재 위치에서 약 5마일 떨어진 곳에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어 그 곳 건물주에게 여러 번 연락을 해 보았지만 무응답이었다.

그리고 몇 주 전에 손님 가운데 한사람, 일흔을 코 앞에 둔 꽃 가게 주인이 던진 말로 상황이 급전하였다. 그는 이따금 그가 꽃배달 하면서 겪은 이야기들로 우리 부부 배꼽을 빼곤 하는 사내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하나 – 뉴저지 어느 곳에 꽃배달을 갔었단다. 주말 오후, 배달 간 곳은 한적한 마을 개인 주택이었는데 차들이 꽤 많았더란다. 도어 벨을 누르니 한 사내가 문을 열어 주는데, 얼핏 눈에 들어 온 집안 풍경에 아연했었단다. 남녀들이 모두 벌거 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좀 더 자세히 볼려고 고개를 내미는데 사내가 급히 문을 닫더란다. 그 때의 아쉬움을 말하며 킬킬거리는 그런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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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가 우리 부부에게 던진 말 – ‘이제 너흰 어디로 옮기니? 혹시 우리 건물로 올 마음 없니?’ 늘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작업복 세탁이나 맞기며 킬킬거리던 노인이 말한 ‘우리 건물’은 바로 내가 건물주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연락을 해 보았지만 무응답이었던 바로 그 샤핑센터였다. 약 30만sf(약 8,500평)면적의 제법 규모 있는 건물주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몇몇 손님들이 자기 소유 건물로 이전이나 매입을 권유하였지만 세탁소 장소로 적합하지 않거나 내겐 다소 버거운 곳들이었다.

그 이튿날, 그는 그 건물 관리 직원을 보냈고, 이후 몇 차례 리스 조건들 조정에 대한 이야기들 오갔다. 그리고 며칠 후 꽃가게 주인은 우리에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 우리를 혹하게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손님들에게 설문조사를 시작하였다. 리모델링이 끝난 후 현 샤핑센터내로 이전하는 것과 꽃가게 주인 소유의 샤핑센터로 이전하는 것 중 어느 곳이 당신에게 편리한가? 라는 질문과 만일 우리가 당신이 편리하지 않다고 대답한 곳으로 이전한다면, 그래도 내 세탁소를 이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 이외에 몇 가지 물음을 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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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간 동안 실시한 이 조사에서 응답한 이들은 편리한 쪽을 묻는 질문엔 정확히 반반으로 갈리었고, 나머지는 어느 쪽이나 같다는 선택을 하였다. 어느 쪽으로 가든 내 세탁소를 계속 찾겠노라는 응답은 거의 100%였다.

지난 주에 우리 부부는 현 샤핑센터 주인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꽃가게 주인 소유의 건물로 이전할까 한다고 전했다. 젊은 주인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 30% 인상은 없던 것으로 하고, 그 쪽에서 제시한 조건에 걸맞는 조건으로 우리 건물에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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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부부의 결정은 ‘아직’이다.

젊은 건물주를 만나고 돌아 오는 길, ‘이거 다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 아닐까?’하는 내 말에 아내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내의 웃음은 비웃음이었고, 내 웃음은 가당치 않은 내 말이 겸연쩍어 터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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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곳 건물주와 내 세탁소 손님들이 같은 목소리로 우리 부부에게 크레딧을 부여한 첫 번 째 조건은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세탁소를 이어 왔기 때문이란다.

딱히 특별한 재주와 능력이 없어 한 자리에서 고만한 세탁소를 꾸려온 이력도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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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평생 동네 세탁쟁이 이다.

  • 주말, 동네 Winterthur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들

우리 부부가 미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그녀는 실제 미술 선생으로 오랜 교단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다.

그녀의 남편 역시 미술 선생이었고 우리 두 아이 고등학교 시절의 미술선생님이기도 하다. 내 눈에 미술에는 영 재간이 없어 보이는 우리 아이들을 많이 부추겨 주신 선생님이다. 그 시절 내 아이들이 그린 소묘들은 지금도 내 방에 걸려 있다. 내 아이들 만큼도 못한 내 눈에는 그게 참 대견해서이다.

다시 그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 70대인 미술선생님은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늘 화장기 없는 민낯이다. 까맣던 머리칼들은 이젠 백발이지만, 한번도 그녀가 염색을 한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런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답다. 내가 어릴 적 한국에서 미모로 이름 꽤나 날리던 여배우의 친 언니라는 수식어는 그녀에게 가당치도 않은 아름다움이다.

어제 낮에 그녀가 내 가게에 들렸었다. 그녀는 최근 십 수년 만에 방문했던 한국에 대한 이야기들과 여기 사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말했고, 우리 부부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차이와 다름과 낯설음 등에 대해 더욱 강조했던 것은 오히려 내 쪽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엊저녁에 필라델피아 작은 소극장 Painted Bride Art Center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필라델피아 한국문화 재단과 남부 뉴저지 한국학교가 공동 주관한 Heart of Korea라는 연주회 공연에서였다. 우리 부부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였다.

집단 북 치기 공연을 시작으로 한복 패션 쇼, 태평무, 홀로 큰 북 치기, 판소리, 진도 북 춤, 가야금, 칼춤, 사물놀이 등이 이어졌는데, 역시 우리넨 흥으로 타고 났나 보다.

그 곳에서 생각지 않던 얼굴들도 몇 만났다. 그 중 하나 이즈음 한국 현대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었다. ‘남편은 어쩌고 왜 혼자시냐?’는 내 물음에 그녀가 한 대답이었다. ‘함께 하려 했는데 남편은 피츠버그에서 일어난 유태계 참사 추모하느랴 그 곳에 가서요….’

그랬다. 역사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의 남편은 유럽계, 내 며늘 아이는 아프리카계… 우린 모두 이따금이지만 한국계로 서로 통한다. 어쩜 흥으로… 모든 길들이 서로 만나곤 헤어지듯이.

공연이라 카메라를 들고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어, 오늘 오후 동네 공원길을 걸으며 어제 생각으로 길들을 담았다.

이제껏 걸어 왔고, 지금 걷고 있고, 언제 일지 모를 그날까지 걸으며 만났거나 만나거나 만날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위하여

10/2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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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에

시월 초하루이자 월요일.

하루 노동의 피로 위에 짜증을 더하는 뉴스를 접다. 신앙이나 신념의 이름으로 이웃을 해치는 일들을 보면 사람 본성이 진보하는 속도는 참 더디다. 그래도 나아가기는 하는 법. 아무렴 그래서 믿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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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박물관 산책길에서 만났던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찾은 위로 한마디.

‘하찮은 일을 가지고 심각한 일인 것처럼 다루는 자들 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

에라스무스 였다던가

팔불출

세상 많이 바뀌었다해도 참 창피한 일이다만 오늘은 팔불출이 되련다.

아무리 불출(不出)이어도 감사해야 할 얼굴들은 먼저 기억해 두어야  눈감아 줄 사람 하나 둘은 있지 않을런지.

내가 오늘 감사를 드려야 할 이들은 델라웨어 한인회와 델라웨어 한국 학교를 섬기고 봉사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두 단체의 이름을 이어 온 이들이다. 오늘 면면을 보니 어느새 이민 삼, 사대에 이른다. 참 고마운 일이다.

추석을 즈음하여 열리는 델라웨어 한인 축제를 우리 마을에서 빼놓지 못할 연례행사로 자리매김 해 준 한인회장 김은진님과 한국학교장 조수진님께 드리는 고마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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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사에서 마주하는 올드 타이머들의 얼굴들은 더할 수 없이 반갑고 고맙다. 초대 한국학교 교장이신 배성호 목사님 내외분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렴, 진짜 고마운 이들은 이세, 삼세, 사세 아이들이다. 눈에 띄는 스물 서른 안짝 나이에 이 행사를 위해 뛰는 아이들을 보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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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특별히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두 사람이 있다. 이 감사를 드린 후에야 나는 불출 노릇을 할 수 있을 터.

뉴저지의 안젤라 정 선생과 필라델피아의 케이트 김 선생이다. 두 분은 오늘 아내와 함께 소고춤을 추었는데, 두 분은 선생님이고 아내는 학생 사이인 셈이다. 몇 번의 연습과정과 오늘의 공연을 보며 내가 두 분, 정선생과 김 선생에게 드리는 감사는 정말 커야 마땅하다. 우리 마을 행사에서 내 아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두 분의 애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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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나는 팔불출.

애초 나는 ‘하겠나?’ 싶었다. 돌고 돌고를 반복하는 춤사위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소고춤을 아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동작이 느리거나 여유와 쉼이 있는 춤사위가 아니어서 아내에겐 참 버거워 보였다. 게다가 최근 서너 달 어깨 통증으로 물리 치료를 받고, 침을 맞고, 약을 먹는 처지라 되겠나 싶었다.

아내가 춤을 출 때, 내 머리 속 생각 하나. ‘에이고, 제발 넘어지지만 말아라!’

안젤라와 케이트 두 분 선생 덕에 아내의 꿈은 또 하나 이루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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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팔불출인데…

내 아들이다. 제 어멈 행사라고 열 일 제치고 함께 해 주었다. 내가 뭘 더 바라랴!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문 앞에 꽃 병이 배달되어 놓여 있었다. 오늘 직장 일로 함께 못한 며늘아이가 보낸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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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길에 완벽히 불출로가자,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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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사하는 딸아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