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가 더위를 밀어내는 오후. 빗방울은 늘 순간일 뿐. 그저 스쳐 지나며 잊은 것들은 얼마일까. 이내 더위는 이어지고…. 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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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
폭풍우가 더위를 밀어내는 오후. 빗방울은 늘 순간일 뿐. 그저 스쳐 지나며 잊은 것들은 얼마일까. 이내 더위는 이어지고…. 여름에.
찌는 날씨가 이어진다만 내일이면 어느새 팔월이다. 귀뚜라미 소리 곧 듣게 될 게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내가 묻는다. ‘저녁 뭐 먹을까?’
내 대답 ‘글쎄… 한달 수고했으니… 사먹고 들어가?’
이미 동네 어귀에 다다라 나눈 이야기의 결론.
집 가까이에 있는 닭요리 전문 식당에서 시켜온 닭튀김 몇 쪽과 샐러드…. 그리고 라면 하나 끓여 나누어 먹는 맛도 제법이었나니.
닭튀김 몇 쪽 담아 온 포장 상자에 담긴 가게 홍보 문구에 배부르다.
낯설게 만나 벗이 되고 사랑이 되고 때론 덤덤한 이웃이 되고…. 적이 되기도 하고…. 뗄 수 없는 끈끈한 동지가 되기도 하고….. 다시 벗이 되고 사랑이 되는….. 낯설게 만나….
들판을 채우는 소리와 나비의 몸짓, 가만히 그 소리와 몸짓에 응답하는 꽃들과 풀잎들 – 산책을 통해 맛보는 조화다. 거기 내 마음도 어우러져.
참 이상한 일이다. 올들어 몸이 딱 반쪽으로 줄어드신 장인의 얼굴 크기는 예나 다름없다. 반면 한 두어 주 사이에 몸이 쫄아 드신 어머니는 얼굴도 그만큼 작아지셨다. 덩달아 아버지의 등도 딱 고만큼 더 휘어지셨다.
어깨수술 후 운동부족인 아내와 함께 하루 길 거리에 있는 강가 나들이에 나설 요량이었는데 간밤에 자꾸 노인들 모습이 눈에 밟혀 그만 두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두 주나 교회에 못 갔으니 주일예배 참석이 우선이라며 잘 되었단다.
나는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길을 좀 걷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쉬는 날, 길을 걸으며 만나는 숲과 나무들, 들꽃과 나비와 새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스치는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눈에 담는 순간들은 이즈음 내가 누리는 축복이다.
오늘은 유독 노란 들꽃들이 눈에 담긴다. 노란색은 돌아가신 장모가 참 좋아하셨다.
두어 시간 걸었는데 어느새 해가 몹시 따갑다. 생각해보니 걷다 마주쳤던 이들 거의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쳐간 생각 하나. ‘난 산책 뿐만 아니라 어쩜 아직 모든 일에 초보가 아닐까?’
등에 홍건한 땀을 배고 필라 한국식품점으로 달려 올라갔다. 어머니 좋아하시는 각종 젓갈 조금씩 담아 내려온 내게 하신 어머니 말씀. ‘그래 내가 며칠 전부터 짭조름한 게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장모는 여전히 노란색 꽃에 취해 계셨다.
먼 길 안 나서기 참 잘한 하루였다.
이제 겨울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아 인문학교실을 다시 여신다는 홍목사님께서 새 학기 첫 시간 강의 내용을 보내 주셨다.
‘우린 일주일에 이틀은 손녀를 봐주고 다른 날은 책 읽고 산책하고 사람들 만나서 수다 떨면서 늙어가면서도 아직은 그런대로 잘 지냅니다.’ – 아직도 추위가 머물고 있다는 호주에서 지내시는 목사님 내외분 일상의 안부만으로도 나는 푸근해진다.
목사님의 인문학 강좌는 아직 늙어 간다기 보다는 나이 들어 간다는 말이 좋은 내게 나이 들어 가기에 느낄 수 있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이번 강의에서 목사님은 인간의 본성과 우리들이 환경인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하시곤 이렇게 묻는다.
<우리에게는 이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인간의 본성을 극복해 내고 진정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적 세계는 불가능 할까요?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넘어서서 공동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진정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이겨 낼 수가 없을까요?>
나는 ‘인간’이나 ‘세계’가 버거워 ‘나’와 ‘오늘의 나의 삶’으로 그 말들을 대체해 그 질문을 받는다.
이어지는 목사님의 질문.
<아니 그 정도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적이며 야수적 인간성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은 정말 없을까요?>
그리고 목사님 스스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로 꼽으신 네 사람, 신영복과 막스 베버, 헨리 조지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그들이다.
그 중 눈에 새롭게 확 뜨인 막스 베버의 말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주의와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기 위한 처방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직업은 돈이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일에 부지런 하십시오. 많이 버십시요 그러나 검소하게 사십시오.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많이 버는 것과 나누는 것은 아직도 내 삶과 멀지만 내 직업이 하느님이 주신 소명으로 느끼고 부지런 하는 일과 검소하게 사는 일은 이 나이에 열심히 쫓는 일들이다.
이어진 그이의 물음들, 일테면 ‘함께’ ‘더불어’ ‘손잡고’ ‘소명’ ‘근검’ ‘절약’ ‘나눔’ ‘베품’ ‘필요한 만큼만’ ‘자연’ ‘자족’ 등은 끊임없이 흉내 짓이로라도 응답해야 하는데…
까닭없이 하늘 쳐다보던 날에.
올들어 제일 덥단다. 어제 오후 서두르다 가게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가게에 나가다. 이른 아침 가게 앞 주차장은 밤 사이 차려진 아침 밥상을 즐기는 새들의 잔치 마당이다.
해는 떠오르면서 이글거리기 시작했나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마트에는 이리 더운 날에도 눈에 늘 익은 일요일 아침 풍경 그대로다. 내 또래 중늙은이 또는 늙은 할배들이 장바구니 들고 물건 몇 가지 담는 모습들, 나도 이미 그 풍경에 잘 어울리는 소재다.
찌는 일요일, 수술후 회복 중인 아내와 함께 시원한 집에서 꼼작 않고 쉬기로 한다.
모처럼 책읽기 좋은 날, <미국 vs 유럽 – 갈등에 관한 보고서>를 재미있게 읽다. 저자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의 경력에 미 국무부 근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미국, 유럽 운운했지만 아무렴 미국에 치우친 시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다.
부시 부자와 그 사이에 끼었던 클린턴 시대를 중심으로 미국과 유럽의 역사적 경험들을 되짚거나 내일에 대한 생각들을 펼친 이야기라, 트럼프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일견 수긍의 고개 짓과 도리도리 거부의 몸짓이 함께 하였다만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어느 쪽에 그리 치우치지 않는 관점을 유지한 노력이 매우 돋보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몇가지 노트들.
<유럽과 미국이 다같이 당면한 과제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새로운 현실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다.>
<영토와 영향력 확대는 미국 역사에서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우연찮게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크나큰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야망은 미국인들의 특성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독립 이래 아닌 독립 이전부터….>
<미국인들은 언제나 국제주위를 지향했지만 이런 국제주의 또한 항상 내셔널리즘의 부산물이었다. 미국은 어떤 행동을 취할 때 그 정당성을 초국가적인 기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따르는 제반 원칙에서 찾았다. 미국의 이익을 증진시킴으로써 인류 전체의 이익을 향상 시킨다는 점을 수많은 미국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매우 쉽게 믿어 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표현처럼 ‘미국의 대의가 곧 모든 인류의 대의인 것이다.’>
<한마디로 건국의 주역들이 말한 이른바 ‘타인의 견해에 대한 적절한 존중’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이런 점은 언제나 가장 지혜로운 방책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지 근 60년이 지났음에도 프랑스의 한 관계자는 아직도 이런 조크성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다. “사람들은 ‘독일이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정말 그럴까?’라고 말한다. 독일이 움직이면 보통 6개월 뒤에는 상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고 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느끼는 독일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우스개란다. 그 공포를 누르고 있는 것이 미국의 힘이라는 Kagan의 말이고…. 이 대목에서 나는 문득 오늘의 일본과 미국을 떠올리기도 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의 모임에서 만난 후배가 책정리를 한다고 하여 얻은 책, <미국 vs 유럽 – 갈등에 관한 보고서>로 몹시 더운 날 내 생각을 살찌우다.
아침부터 찌는 날이다. 한 주간이 이리 긴 것은 딱히 날씨 탓만이 아니다.
아내는 의사가 minor surgery라고 했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그저 간단한 수술일 뿐이라는 말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루 일과 같은 것이거니 했었다.
주초,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 가기 전에 간호원은 아주 간략하게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아주 간단한 어깨 수술로 마취 후 한 시간 정도 내외의 수술 시간과 30분 정도 회복 시간이 걸릴 것이다. 수술 후 집도 의사가 수술 결과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라고…. 간호원의 설명을 듣는 시간에 아내는 이미 마취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넉넉잡아 두 시간이라…’ 나는 대기실에서 나른한 낮잠에 빠졌었다. 수술실에 들어 간 후 한 시간이 지나면서 연신 시계에 눈이 갔다.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는 앉아있지 못하고 오줌 마려운 노인이 되어 엉거주춤 대기실 안에서 서성거렸다.
두 시간 반쯤 되었을 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 온 의사는 말했다.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12시간 정도는 수술 후 통증이 이어질 것인데, 약이 처방될 것이고… 마취에서 깨어날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릴게고…’ 준비된 대본을 읊조리 듯 이어진 그의 말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내 이름이 호명되어 들어 간 회복실에서 만난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었다.
최근 이년 사이에 수술 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전에 보았던 장모, 장인 그리고 어머니의 낯 선 모습처럼 아내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minor surgery라는 말에 대책없이 느긋했던 내 탓이었다.
긴 한 주간 시간에 비해 다행히 아내의 회복 속도는 빠르다.
이른 아침 찜통 더위를 예고하는 아침풍경이 반가웠던 까닭이다.
어제 밤 On the Basis of Sex를 보다. 쉴 때 보라며 큰 처남이 권한 영화다.
미 대법원 대법관인 Ruth Bader Ginsburg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보고 난 후 첫 생각, 때론 처남 녀석이 참 기특하고 고맙다. 아직 환갑 전이니 어른 취급하긴 이르고…
‘On the Basis of Sex 성별에 따라’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단다.
영화 속 Ruth의 남편 Martin이 한 말 ; ‘법이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될 것이다. The law is never finished. It is a work in progress, and ever will be.’
또 하나 머리에 남은 Ruth의 말 ; ‘우리는 이 국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변화는 이 법정의 허가 없이도 이미 일어난 일이다. We’re not asking you to change the country. That’s already happened without any court’s permission.’
성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어느 시대이건 동등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Ruth Bader Ginsburg의 삶의 족적은 그의 동료이자 남편인 Martin과 부조리함 앞에서 그 시대 상식을 가진 인간의 용기를 대변하는 듯한 그녀의 딸 Jane이 함께 그렸다.
개개인의 삶이나 하루 하루 뉴스들에 빠져 세상을 바라 보노라면 변화는 참으로 더딘 듯 하다만, 사람이 모여 사는 모습은 어느 순간 급류를 탄 물살처럼 빠르게 변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 공동체들이 앓고 있는 문제들을 지난 세월 변화해 온 과정 위에 놓고 들여다 보노라면 내일은 늘 긍정일 수 밖에 없다.
나이 들수록 진보에 한 발 걸치고 사는게 좋다.
일요일 아침 개장 시간에 맞춰 찾은 Longwood Gardens은 정말 나만을 위한 정원이었다. 두어 시간 걷기 딱 좋은 곳이다.
정원안에 있는 Green Wall – 그 벽의 모든 문들은 화장실. 뒷간 경험이 또렷한 내 세대들이 곱씹어야 할… 진보에…
애초 세운 계획을 잊을 정도로 여러 번 생각이 바뀌었다. 모처럼 맞는 주중 휴일, 여느 해 같았다면 과감히 나흘 연휴를 즐길 법도 했다. 내 뜻 세우지 말아 할 나이에 이른건 노부모 뿐만 아닌 내 이야기다.
가까운 동네 공원을 찾아 걷다가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었다. 허나 일기예보는 그 계획조차 받쳐 주지 않았다.
하여 선택한 마지막 계획, 그저 먹고 쉬는 하루를 보내는 것.
아들, 며느리, 딸과 함께 홍합, 새우, 게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즐기다 다시 세운 계획, 간단한 바베큐 잔치.
부랴부랴 장을 보고 누이네들과 부모님 모시고 저녁을 즐기다.
운신 못하시는 장인에게는 식사 후에 아들녀석이 과자 하나 입에 물려 드리다.
십 수년 만에 딸과 함께 집 앞 공원에서 펼쳐 진 불꽃놀이 구경.
쉰다는 거, 참 별거 아니다.
그저 맘 가는대로 시간을 맡길 수 있음은 지금 내가 누리는 큰 복이다.
(오늘 일기예보는 완벽히 빗나갔다. 사람살이 계획을 바꾸게 하는 게 비단 일기예보 뿐이랴!)
2019. 독립기념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