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

하늘 맑은 날에 노란 가을 길을 걷다.

정신 말짱하신 어머니가 ‘너 자꾸 어딜 가니?’라고 묻고,
방긋 웃는 장인이 ‘김서방, 미안해…’ 하시는 날에.

후유…

아내가 선물한  모자를 벗고 땀을 닦다.

참 아름다운 구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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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에 자문자답自問自答

어제 밤 미국의 검사 제도에 대해 배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크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 살며 검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내 삶과는 특별한 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솔직히 이제껏 이 땅의 검사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몇 차례 법정에 서 본 경험은 있다. 삼십 년 넘는 이민 생활에서 손 꼽아보니 거의 열 번 가까이 법정에 가 본 듯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대부분이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일들이다 . 막 장사를 시작하고 손님들과의 분쟁으로, 또는 사업체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서 보았던 법정 경험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두 차례 변호사를 선임했었다. 나머지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 부부가 함께 법정에 섰었다. 겁날 게 없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변호사, 의사를 만나지 않고 사는 삶이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물론 손님들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노회하기도 하거니와 사업체를 사고 파는 일을 만들 여력이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땅의 검사제도에 대한 배움이였다. 배심원으로 불려 나갔거나 선거에서 Attorney General를 뽑거나 하면서도 솔직히 미국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주 정부의 사법체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게 뒤늦게 미국 사회를 새롭게 알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어제  가르쳐 준 변호사 선생님과 함께 배운 십 여명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시간을 나누는 이들이다. 그 이름은 ‘필라 세사모’다. 필라델피아 인근에 살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살자는 뜻으로 함께 하는 이들이다.

몇 주 전에 이 모임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우린 아직도 세월호인가?” 질문만 던져 놓은 채 우린 아직 그에 대한 공동의 답을 마련하진 못하고 있다.

오늘 낮에 일을 하면서 문득 내게 떠오른 질문이었다.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 아마 어제 밤 공부 탓이었을 게다.

어제 밤 선생님은 미국의 형사 사법 제도에 있어 피고인과 검사가 다투었을 때, 만일 일심에서 검사가 패소하면 검사는 항소권이 없다고 했다. 다만 피고인이 패소했을 때는 항소권이 부여된단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룰이란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법칙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지속적인 싸움이야말로 바로 세월호 참사 가족들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러 그 숙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 째 한(恨)으로 맞는 한가위 명절을 보내는 가족들에게 아무 것도 못하지만 그저 함께 기억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만으로…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에 대한 소심한 내 응답.

 

정의에

일요일 하루 집에서 푹 쉬는 축복을 누렸다. 연휴로 내일도 쉴 수 있다는 여유에서 온 생각이리라. 창문들을 여니 상큼한 바람이 집안에 가득하다. 새들도 오늘은 노는 날인가 보다. 마냥 즐거운 새소리도 바람과 함께 집안을 들락인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 집어 든 책, 마이클 샌델이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샌델이 이 책에서 말했던 미국 교육 제도 특히 미국 대학의 입학제도에 나타난 정의 문제를 찾아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샌델은 이 책 제 7장에서 미국 대학들이 취하고 있는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논쟁을 다룬다. 이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논쟁 중인 미국 사회의 한 과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이미 다 커 버려 내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여전히 내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내 후대들이 겪어 내야 할 이 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책을 다시 꺼내든 까닭은 한국 뉴스 탓이었다. 이른바 ‘조국현상’ 때문이랄까.

나는 이명박시대에 교육부 수장이었던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가 펼쳤던 교육 정책 기반의 지식을 쌓은 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미국 교육에 대한 신봉자였다.

조국 교수의 딸이 전형을 치루었던 당시의 대학 입시 제도는 그렇게 철저히 미국 대학 입시 제도를 본뜨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조국 현상이 일기 전 까지 그 제도에 대한 논쟁이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심지어 ‘기여 입학제’ 도입 운운하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터진 문제인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국 교수 딸의 입장에 서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샌델은 제 7장에서 미국 입시 제도를 다루기 전에 그 앞 장인 제6장에서 미국 정치 철학자 존 롤스가 말한 평등과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상술하고 있다.

그는 제 6장의 글을 마무리하면서 존 롤스의 말을 인용한다.

<자연의 배분 방식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갖고 태어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실일 뿐이다. 정의냐 부정의냐는 제도가 그러한 사실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샌델은 이렇게 글을 맺는다.

<롤스는 우리가 그런 사실들을 다룰 떄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 , 사회적 여건을 (공동체를 위해) 이용하자”고 제안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 철학이 지금까지 내놓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이 분명하다.>고.

나는 오늘날 한국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뭐라 딱히 표현할 수 없지만,  한 세기 넘는 세월 동안 그 땅을 지배해 온 친일, 친미 등의 주장으로 제 배 불려 온 세력과 싸우며 평등한 사회를 위해 고뇌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맥주 몇 캔에 거나해 책을 덮다.

저녁 나절 호박 썰어 새우젓 넣어 볶고, 가지를 무치다.

하루 잘 쉬었다.

십구 년 구월 초하루에

 

구월 아침

연휴를 맞아 느긋하게 늦잠을 즐겨야지 했다만, 습관 탓인지 여느 때처럼 잠을 깨 일어나다. 하릴없이 집안을 서성이다가 동네 한바퀴를 걷다. 동네 어귀에는 어느새 가을이 다가 섰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9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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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새 장소로 옮긴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정말 시간 한번 빠르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유난히 빨리 지나가는 듯하다. 가게를 옮기고 자리를 잡아가는 지난 반년 사이, 이런 저런 걱정들에도 불구하고 새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가 아주 크다. 무엇보다 내 가게 손님들에게 드리는 감사이다.

이른 아침 산책 길에서 만나는 꽃들에 대한 고마움도 크다. 꽃들은 오늘 하루 누리는 삶에 대한 감사를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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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하늘거리는 강아지풀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추억들을 지난 날에 대한 감사로 이어보는 느긋한 연휴 아침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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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앞에 서 있는 밤나무엔 밤들이 무성하게 여물어 가고 있다. 모든 열매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는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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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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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가 9월을 연다. 멈춤 신호와 전기줄과 나무들이 어지러워도, 때론 먹구름이 가리울지라도 모두의 지붕 위로 아침 해는 늘 저렇게 밝게 떠오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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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맞은 구월 아침, 한국 창원에서 영어 교사를 했었다는 시인의 구월 노래를 읽다.

Simply September
— David Kowalczyk
A world made
more of music
than of flesh.

Sunflowers
ablaze in
the autumn wind.

Memories
set free
by the mind.

비겁함에

오늘 낮에 내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탁 재료 판매상인 Mr. 강이 내게 뜬금없는 인사를 건넸다. ‘형님은 유튜브 안보시나 봐요?’내가 스스럼없이 말 놓는 한인 몇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 세탁소들을 두로 돌아다닌다. 나와의 거래는 거의 삼십 년이 되어 간다.

내 대답 – ‘그건 왜?’  이어진 그의 말. =  ‘장사가 안되는지 가는 곳마다 사장님들이 유뷰트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다시 물었다. ‘유튜브로 주로 뭐를 보던?’ 막 바로 받은 그의 응답이었다. ‘요즘 핫한 거 있잖아요! 조국 뉴스… 거기에 빠져들 계시더라고.’

‘쯔쯔쯔… 일터에서 뭐라고 한국 뉴스에 뺘져 있노…’ 혼잣 말 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거 보는 사람들 의견들은 대충 어떻디?’ 그의 의견이었다. ‘한 8대 2쯤이요. 조국 No! 에 8, 청문회 보고 나서 판단하자는 쪽 2정도요.’

그가 내게 물었다. ‘형님 의견은 어때요?’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나는 8대 2 속에 들지 않는구나.’

솔직히 나는 일터에서 유튜브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social networking 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한국뉴스를 보거나 검색하는 일도 거의 없다. 내 일 곧 세탁업과 관련된 일이거나 내 손님들과 소통하는 일 이외에는 인터넷이나 cell phone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일들은 거의 대부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한다. 하여 한국뉴스들을 섭렵하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거나 휴일이다. 그래 이따금 바뀐 세상을 뒤늦게 접하곤 한다. 그러나 관심있는 뉴스에 이르면 여러 매체들(뭐 다 엇비슷하지만)을 두루 돌아 다니거나 뉴스를 소비하는 커뮤니티들을 순례하기도 한다.

내가 이즈음 핫하다는 법무장관 후보자 조국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은 ‘비겁함’이다. 조국 후보자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다. 조국 후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비겁함이다. 그런데 그 비겁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답답한 이즈음이었다.

그러다 엊그제 받은 호주에서 보내온 홍길복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을 찬찬히 읽다가 그 비겁함의 본질을 만났다. 그의 강의록 일부이다.

<니체는 지난 날 유럽을 지배해 온 온갖 전통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예술, 관습 등 모든 ‘전통적인 것들’에 대하여  그는 ‘아니다!(Nein)’이라고 부르짖으면서 그것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정과 파괴가 가장 강한 긍정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유럽의 정신사에서 가장 강력한 이단자였고 반항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약자들이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규정 하면서 이를 ‘비겁한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겁한 자들의 비겁한 도덕율은 인간을 결코 더 좋은 방향으로 전진 시키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는 선하려는 의지, 나아지는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가 없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본질적으로 자아를 실현해내고 환경과 사회를 변혁 시키고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가려는 힘의 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노예의 도덕, 기독교의 도덕은 그런 의지를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런 의지를 꺽어버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자유, 평등, 정의, 민주의 이름으로 누군가 하나를 제물 삼아 해소하려는 집단 의식을 전하는 뉴스 속엔 분명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일은 바로 그 비겁함을 떨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의 대상은 어느 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여론 또는 국민 정서라는 정체 불명의 권력일 수도 있는 법이다.

강남 좌파

한국뉴스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누이 생각.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누이는 이십 대에 유학 길에 올랐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누이에 대한 기억은 거의 그 이전 세월 뿐이다. 물론 서로 간에 소식은 듣고 살았다. 오랜 유학 끝에 누이가 한국에 돌아 가 정착했을 때는 나는 이민을 온지 이미 오래 된 후이기에 그저 소식만 듣고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누이를 만났었다. 이명박 시절이었을게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했었다. 이 자리에서 나보다 몇 살 위인 사촌 매제와도  인사를 나누었었다.

이런저런 살아 온 이야기들과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누이가 제 남편인 사촌 매제를 일컬어 ‘강남 좌파’라 했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강남 좌파’하는 지칭을 들어 본 첫 자리였다. 그 지칭을 들었던 사촌 매제는 당시 강남에 사는 독일 법학박사 학위를 지닌 대학교수였다.

‘강남 좌파’의 얼굴 격처럼 알려진 조국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사들을 보다가 떠오른 내 누이에 대한 기억이다. ‘강남 좌파’ 내 사촌 매제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다는 이야기들도 그 기억 속에 함께 한다.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강남’과 ‘좌파’이다. 뉴스들은 그 사이를 파고들며 마구 그 간격을 벌리고 있다. 그 놀음에 ‘강남’과 ‘좌파’는 물론 ‘강북’과 ‘우파’ 아니 그도 저도 아닌 이들 모두 달려 들어 정신들이 나간 형국이다.

그 날 이후 누이와 ‘강남 좌파’인 사촌 매제를 본 적은 없다. 예전처럼 그저 소식만 전해 들을 뿐. 나는 한번도 ‘강남 좌파’인 누이 내외가 자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다만, 여전히 그렇게 불리우며 살아가기를 빈다.

더하여 ‘강남’과 ‘좌파’사이를 헤집는 난도질에 휘청거리는 조국이라는 사내가 지금의 형국을 잘 이겨 내기를 바란다.

아직은 ‘강남 좌파’가 절실히 필요한 그 쪽 상황인 듯 보여서이다.

참 사람 장광선선생

죽음이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떠난 사람, 장광선 선생.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다. 그의 가족들 모두 어쩜 그리 그를 닮았을까. 치열했던 삶을 그리 담백한 화폭에 남기고 떠나고 또 보낼 수 있었을까. 참으로 부러운 삶 한 획 굵게 남기고 떠나셨다.

선생과 가족들은 그저 일상처럼 떠나고 보냈다. 나머지 조촐하기 그지없는 추모 행사란 그를 따랐던 이들이 치장한 군더더기였을 뿐.

함께 모인 이들이 그를 추모하며 남긴 말들 가운데 귀에 꽂혀 윙윙거리는 말 하나.

‘내가 사람 냄새 그렇게 물씬 풍기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선생의 영원한 동지 가운데 한 분이신 최종수 목사가 살아있는 내게 던진 화두이다.20190818_105728a

살아 생전 장광선선생이 치열하게 고뇌했던 화두이기도 하다.

<사람, 사람살이, 지금 여기에서 발 딛고 사는 사람살이와 무관한 신은 아무 뜻 없는 신이다.>라는…

선생이 가꾸었던 앞뜰 배나무는 실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선생를 따르던 후배의 맏형인 김경지형이 무심케 배를 따다 ‘달다’며 건네 주었다. 작고 단단한 배는 달고 넉넉한 즙을 품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선생께서 수없이 건너 다니셨을 다리를 건너며 새겨 본 생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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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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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장광선선생과 통했던 그의 하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따듯한 품으로 그를 안고 계실 터.

어느 소천(召天)

‘손할머님께서 7월 18일 소천하셨습니다.’

오늘 필라델피아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화방에서 본 공지다.

이즈음 나는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산다. 노부모들의 이즈음 생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이젠 남 일만이 아닌 가까이 다가오는 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 손정례. 전남 강진 사람. 세월호 참사 이후 그녀를 만났을 때 나이 구십이었다.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 몇몇이 모여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되새기는 날, 그녀는 한풀이 춤을 추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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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얼핏 그녀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스치듯 들었다만, 내 기억에 깊이 새겨진 것은 그녀의 춤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그녀가 병원과 양로원을 오가며 마지막 길에 접어들 무렵 양로원에서 잠시 함께 했던 시간,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이 오롯이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춤사위로 풀어낼 수 있었던 까닭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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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또는 기억들.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에 담긴 아픔들을 잊지 말자며 함께 해 온 이들의 기억 속에  세월호 아픔과 함께 남을 여인 손정례.

그녀의 못다 푼 한들과 지금 살아 기억하는 자들이 풀어야 할 한들이 얽혀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녀의 꿈들이 이어지기를….

 

길을 걸으려 두어 시간 길을 달렸다. 한때 뻔질나게 달렸던 길이다. 신문을 한답시고 뉴욕, 필라, 볼티모어, 워싱턴을 무던히도 돌아다녔었다. 북쪽 길인 뉴욕, 필라는 지금도 여전히 오가곤 하지만 남쪽인 볼티모어나 워싱턴 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버지니아 쪽 나들이는 거의 십여 년 만이다.

낯익은 표지판 지명들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로 십 수 년 전 세월이 나와 함께 달렸다.

생각할수록 낯 뜨거운 내 치기(稚氣)였다. 이민(移民)과 한반도 그리고 통일과 평화를 운운하며 다녔던 길이었다. 내 치기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다. 다만 그 길을 쉽게 접을 수 밖에 없었던 내 한계에 대한 부끄러움은 여전하기에  분명 치기(稚氣)였다.

옛 생각으로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한 곳, 버지니아 Potomac 강변 Great Falls 국립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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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風光)은 이름처럼 대단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매료시킨 것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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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길, 숲길, 오솔길, 자갈길, 모랫길, 돌길 등 걷는 맛이 정말 쏠쏠한 곳이었다. 바위 길을 걷다  문득 휘어잡은 나무가지가 그리 반들거릴 수가 없었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손을 빌려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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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주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숨쉬는 생명들에게 눈인사 건네며 걷는 길에서 느낀 즐거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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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사과 몇 쪽, 포도 몇 알과 빵 한 쪽… 그 달콤함을 만끽한 길 걷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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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로 들어서서 땀 닦으며 벗은 모자, 평소 모자를 써 본 적 없는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옷장에서 눈에 띄어 집어 든 것인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들은 모자의 내력. – 이젠 장성해 서른을 바라보는 처 조카딸 아이가 초등학교 때 잠시 내 집에 머무를 때 쓰던 모자라고…. 무릇 모든 것에 연(緣)이 없는 것은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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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일요일 오후 교통 체증은 두 시간 거리를 세 시간으로 늘여 놓았지만 그 길에서 되짚어 본 생각 하나. 사람 살이는 때론 정말 더디지만 결국 옳은(또는 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뭐 내 믿음 같은 거.

딱히 통일 평화 운운 하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그저 그런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오늘, 되돌아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게 해 준 이길영 선생에게 감사를…

***때론 아내가 동행하지 않는 길이 편할 때도 있다. ‘더불어 함께’란 ‘홀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서 있기에.

 

 

 

아침에

봄,  여름, 가을, 겨울… 해 뜨는 아침이 감사했던 날들은 얼마나 될까?

토요일 아침, 일터 가까이 제약회사 굴뚝 연기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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