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8

해 아래

선잠이 들다 깨다 새벽을 맞았다. 아내는 한밤중이다. 깰세라 조용히 방을 나와 lounge 칸으로 갔다. 동트는 지평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lounge에는 불은 꺼져 있었고 여기저기 장의자와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반 좌석 손님들이 누워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 책을 한권도 가져 가질 않았다. 공연히 짐만 될듯도 하였고, 테블릿 하나면 충분할 듯해서였다. 열차 안내 광고에도 와이파이가 연결된다고 하였고, 뉴욕을 오가는 기차처럼 당연히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차 전구간에 걸쳐 와이파이는 터지지 않았다.

대평원과 높은 산악지대를 오가는 기차안에서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것은 이해를 할 수는있겠으나 열차광고에 제공되는 서비스에서 이는 삭제해야 마땅할 듯하였다.

그러나 책 한권 없이, 인터넷이 연결안되는 상황은 오히려 내게 여행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나는 어둑한 lounge에 앉아 테블릿에 여행 메모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새벽 4시 30분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떠오르는 해를 보기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넘게 걸렸던 듯하다. 지평선 저쪽 동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인 후 태양은 제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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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던 시간에 지나친 네브라스카 Hastings는 꼭 가보고 싶었던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백 여년 전에 여기 네브라스카 평원에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며, 조국 광복을 무장투쟁으로 이루고자 꿈꾸었던 사내들이 살았던 곳을 언젠가는 밟아보고 싶었다. 우성 박용만과 소년병학교 생도들이다. (오래전에 박용만선생에 대해 썻던 글 :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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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나 한듯이 하나네와 아내는 해가 떠오르는 시각에 lounge로 왔다. 우리는 해돋이의 장관을 보며 이른 아침을 탄성으로 맞이하였다.

열차내 아침식사도 우리를 든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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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열차는 네브라스카를 달리고 있었다. 콜로라도주로 넘어서기 직전 넓은 평원에 세워진 공화당 후보 Trump 선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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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럼프 선전 간판을 보며 이 땅에서 내몰렸던 인디언들과 맥없이 땅을 빼앗겼던 멕시칸들을 생각했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은 테네시,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의 개척자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 중략 – 멕시코는 미국인 Stephen Austin에게 거주지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다. 성문화된 이 조건은 토지 소유자는 카톨릭교도여야 한다는 것과 멕시코의 법률을 지키며 자치를 시행한다는 것 뿐이었다. 사실 영국계 미국인 중에는 카톨릭교도가 거의 없었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던 이주자들은 필요한 증명서를 얻는데 드는 10분 동안만 카톨릭교도 행세만 하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렇게 우물쭈물 넘어갔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그때가 1821년 즈음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인 1834년 멕시코는 그곳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이 멕시코 법률을 심히 위반하므로 그 땅에서 내쫓고자 하였으나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고, 그렇게 맥없이 텍사스를 빼았기고 만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원주민들 곧 인디언들에 대한 약탈과 살육의 참혹함에 이르면, 이 땅을 일군 초기 개척자들의 후손들은 아직 씻어야할 손에 대한 생각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열차는 콜로라도 덴버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여행 – 7

하늘 그리고 한울

열차는 어둠이 덮힌 네브라스카 대평원을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역마다 안내를 해주던 안내방송도 끊겼다. 어둠속을 달리는 기차안에서 승객들이 편안한 잠을 잘수 있도록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는 Omaha시를 지난 후에야 잠을 청했다. Omaha는 내 아들녀석이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모두가 내 욕심 탓이었다. 욕심은 아이 이름을 너무 버겁게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한울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는지 아이는 좀 늦되게 컷다. 제 자식 착하다하지 않을 애비가 어디 있겠느냐만 아이는 정말 착했다. 아니 지금도 착하다.

다만 아이는 느렸다. 게다가 덩치는 애비의 두배나 되는 녀석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성적표를 받아오더니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여러 차례 아내와 나는 학교의 부름을 받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니었고 느려서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나마 대입학력고사인 SAT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아 맘먹고 찾아나서면 갈만한 대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또 다시 내 욕심이 발동하였다. 아이에게 군대를 권한 것이었다. “지금 네 상태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를 다녀 오는게 어떠냐?” 내 권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내 핑계이지만, 아이가 좀 단단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착한 아들은 내 말에 순종했다. 아들녀석은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고 네브라스카 오마하로 배속받아 4년을 근무하였다. 당시는 이라크 파병 숫자가 가장 많을 때여서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몇주 만에 훈련생활을 끝낸 아이를 텍사스에서 만났을 때 내 느낌은 “아이고, 내 욕심이었구나” 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4년 동안 오마하 군생활을 마치고 돌와왔다. 아이의 군 제대를 앞두고 내 욕심은 또 다시 발동했었다. “얘야! 그냥 군생활을 계속하는게 너에게 좋을 것 같은데….” 녀석은 그 때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다. “아빠! 아빠는 군대가 얼마나 나쁜덴 줄 몰라! 난 제대할거야!”

그렇게 아들녀석이 자신의 황금시간을 보낸 곳 오마하를 지나며 난 잠이 들수가 없었다.

제대후 녀석은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를 얻었다. 박봉이지만 자기처럼 늦된 아이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로 일을 재밌어 한다. 그런데 좀처럼 집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여섯 살 아래 제 동생이 하는 “오빤 나이 스물 넘은지가 언젠데…”하는 비웃음을 못들은체 하면서까지 좀체 나가서 살려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날 부터인가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내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기 시작하더니 대답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녀석에게 여자가 생겼다. 어느날인가 얼굴 까만 여자 아이와 아들 녀석이 함께 있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두 아이는 “우리 결혼해요!”라며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나는 많이 아파했다. 처음엔 아이가 내게 만들어준 아픔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픔은 내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픔의 크기는 커져갔다.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의 배우자를 얼굴 색깔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왈 진보연하며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아픔이었다.

얼굴 까만 여자아이는 내 아들녀석을 더 이상 한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Han 이다.

그렇게 오마하를 지나 기차는 달렸다.

나는 새벽녘에 지평선 넘어 떠오르는 해와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오마하를 지나 자정이 넘어서도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여행이 끝난 후 하나엄마는 하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 주었다. “여행중에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요, 하늘을 그렇게 많이 찍었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하늘을 많이 찍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까요, 평소에 바쁘다고 하늘 쳐다보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들이 매일 매일 내 앞에 있었을텐데요….”

언제가 나는 얼굴 까만아이에게 말할 것이다. Han이 아니라 한울이라고 부르라고. 비록 또 다시 내 욕심일지라도.

기차여행 – 6

행복이란

하나네는 열차 맨 앞칸, 우리는 끝에서 두번 째 차량에 있는 객실로 떨어졌다. 예약 이후 같은 차량에 있는 객실 두개로 바꾸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만석이어서 애초 배정받은 객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 식사 때마다 만나 함께 식사한 후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방으로 헤어지곤 하였는데, 이 방배정은 긴 여행에서 오히려 잘된 선택 같았다.

객실 안에는 기차노선 안내 설명서가 꽂혀 있었는데 이는 여행에 아주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비록 서지는 않더라도 열차가 지나가는 모든 기차역들과 그 지역에 대한 안내를 견하고 있었으며, 시카고 기점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와 지나가는 시간들을 잘 안내해 주고 있었다.

안내서는 시카고를  “미국의 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미 전역으로 뻗어가는 기차노선 및 각급 교통망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시카고를 출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끝없는 옥수수밭이었는데, 일리노이주를 지나 아이오와주를 건널 때까지 이어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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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주로 들어서기 직전에 지나간 곳은 일리노이 Galesburg였는데 안내서에는 아주 낯익은 이름을 소개하고 있었다. 바로 그곳 출신인 시인 Carl Sandburg였다. 나는 그가 쓴 “행복”이라는 시를 아주 좋아해서 종종 내 가게 손님들에게 소개하곤 한다.

Happiness

I ASKED the professors who teach the meaning of life to tell me what is happiness. / And I went to famous executives who boss the work of thousands of men. / They all shook their heads and gave me a smile as though I was trying to fool with them / And then one Sunday afternoon I wandered out along the Desplaines river / And I saw a crowd of Hungarians under the trees with their women and children and a keg of beer and an accordion.

행복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 수천명의 사람들을 지휘하는 유명한 사장들에게도 물어보았다. / 그들은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내가 장난이나 치고 있다는 듯 웃기만 했었다. /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데스플레니스 강에서 강을 따라가니 / 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맥주통과 손풍금을 곁에 둔 한 무리의 헝가리인들을 보았다.

**** Desplaines river(데스플레니스강) – 일리노이주에 있는 강이름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 대부분들이 그렇지만 특히 헝거리 이민자들은 가난을 피해 온 바닥 인생들이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이 땅에서도 고된  노동자였다. Carl Sandburg는 돈과 지식과 명예를 지닌 사람들에게서 찾지 못했던 행복을 잠시의 쉼을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헝가리 노동자들에게서 찾았다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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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미시시피강을 건너며 아이오와로 들어섰다. 미시시피강은 탁하고 거칠게 다가왔다. 미국 중부지역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있는 미시시피에는 미국내에서는 두번 째, 세계로는 네번 째로 긴 강이라고 한다. 인디언들이 ‘큰 강’, ‘위대한 강’이라는 뜻으로 불렀다는 미시시피강에는 아직 바다로 흘러가지 못한 인디언들과 흑인들과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강바닥에 묻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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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는 옥수수밭의 연속이었다. 아이오와 코커스로 유명한 아이오와 땅넓이는 한국보다 큰데 인구는 한국의 1/15 수준이란다. 아무튼 미주, 공화 양당의 대통령 경선이 제일 먼저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 경선에서 이기는 사람이 그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여 유명한 것인데, 공화당 경우는 그리 맞지 않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번 선거에서는 트럼프가 아닌 테드 크루즈가 이겼었으니.

침실객차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무료가 아니라 기차값에 포함) 식사 시간은 저녁식사에 한해 세 차례 스케쥴 중 시간을 선택해야 했다. 우리는 마지막 서빙 시간을 택했다.

식사 하기 전에 지나친 역 이름이 Ottumwa 였는데 이 역에 대한 설명에 또 낯익은 이름이 하나있다. 우리 또래쯤 되는 사람들은 AFKN이라는 방송을 통해 익은 M*A*S*H라는 드라마 이름이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이동외과병원 부대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보고 욕 한번 안해본 한국 사람이 있을까? 돌이켜볼수록 이제 한국은 아주 다른 나라가 되었다. 아무튼 이 드라마 주인공 가운데 Radar” O’Reilly(드라마 주인공 이름이고, 실제 배우 이름은 Gary Burghoff) 의 고향이 이곳이라는 설명이다.

열차안에서의 첫 식사는 대단히 만족한 것이었다. 물론 전문 스테이크 하우스와 견줄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치는 넘어선 것이었고, 게와 새우 등을 넣은 해물요리도 즐길만하였다. 각종 음료와 맥주는 제공되지만 와인이나 liquor는 제외(물론 돈주고 사먹으면 된다).

식사후 라운지에서 바라본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끝을 볼수 없는 목축장 그리고 천하태평으로 노니는 검은소들, 그리고 이내 지평선 넘어로 숨는 해를 보며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기차 아래층에 있는 샤워룸은 아주 깔끔하였다. 샤워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오니 기차는 미조리강을 건너 네브라스카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차여행 – 5

촌스러움

‘촌스럽다’는 말이 딱히 부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시대에 좀 뒤쳐진 모습을 표현할 때 흔히들 쓴다. 그런점에서 나는 충분히 촌스럽다고 할만하다. 실제 촌에서 산지도 삼십년이 되었다.

가까이 필라델피아를 나갔다가 돌아오면서도 내 촌스러움을 느끼곤하지만, 뉴욕이나 워싱톤을 다녀오는 날이면 그 느낌의 크기가 제법 커지는 것이다. 뉴욕이나 워싱톤보다 더 큰 느낌으로 내 촌스러움을 확인했던 때는 한국방문 후의 일이였다.

촌에 살아서 갖는 촌스러움에 위에 내 쓸데없는 고집이 그 촌티를 더하곤 한다. 일테면 아직도 cell phone 곧 손전화없이 산다는 것이랄까, 삼십 수년전 결혼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다닌다거나, 아직도 아내에게 머리깍는 일을 맡긴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렇다.

툭하면 아내가 내게 던지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촌스럽다”이다.

미국 기차에는 바로 그런 촌스러움이 함께 한다. 그러나 나의 촌스러움과는 다르다. 나는 한때 잘 나갔거나 최첨단 유행의 첨병이었던 때란 꿈에도 꾸어보지 못한 처지지만 미국의 기차는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기차는 한때, 그러니까 서부개척시대였던 19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여년간 신흥제국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주자였다.

그러다 1940대 이후 미국에 자동차들이 덮히기 시작하고, 1970대 이후에는 비행기가 미국 하늘에 사통팔달로 길을 내기 시작하면서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KTX를 타본 사람이 워싱톤 dc에서 보스톤까지 오가는 기차를 타본다면 아마 “아이고, 이게 무궁화호냐? 통일호냐?”냐고 할지도 모르며, 그 라인이 미국내 철도에서는 그나마 현대식이란 사실을 알면 아마 크게 놀랄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통일호, 무궁화호를 모르는 세대도 있겠지만)

화물은 그런대로 기차가 유용한 편이 많이 있겠지만 여객 운송에 있어 기차는 자동차와 비행기에 대부분 그 역할을 뺏긴지 오래되었고 이즈음에는 버스에게도 그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일테면 내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Penn station 까지 기차로는 편도 100달러 정도인데 이즈음 Greyhound(왕복 50달러 정도)와 경쟁하는 Megabus를 잘 골라타면 1달러에  편도 이용할 수도 있기에.)

통상 한나절이나 하루 길이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편이고, 그 이상의 거리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기차는 점점 교통수단으로 후순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심지어 기차는 생활인들의 교통수단이라기 보다는 시간과 돈의 여유있는 사람들이 이따금 이용하는 교통수단 정도로 인식되기까지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열차여객사업이란 곧 적자사업이었다. 그것이 개별 회사에서 운영하던 전국의 열차운행 사업을 연방정부가 받아 Amtrek이라는 공기업으로 묶고 열차여객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게 된 연유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기준치로 보면1억3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

capture-20160825-200417우리가 탓던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달리는 관광열차 California Zephyr 역시 바로 이런 적자를 면하려고 내놓은 상품 가운데 하나이다. 다행히 우리가 탓던 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지만 Amtrek 웹사이트에 나타난 이 관광열차의 정시 운행율을 보면 여전히 촌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할만하다.

그렇다하여도 이번 기차여행은 내겐 거의 100% 만족한 것이였으며, 이점에는 아내나 하나엄마 아빠도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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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실 침대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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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펴서 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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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침대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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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lounge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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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내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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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봉으로 처음 찍은 사진 – 이 촌스러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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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이…(노란 세월호 팔찌를 차고 다녔다)

기차여행 – 4

<시카고 – 편견 또는 선입견에 대해 – 2>

지난 7월1일자  Chicago Tribune은 “시카고 총격 피해자 수가 3년 연속 두자릿 수 이상 증가했다”며 199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전했다. 또한 “인구 비례로 볼 때 살인율이 더 높은 도시들이 있지만, 총기 사고와 살인 사건 발생 규모로 치면 전국 최악 수준”이라며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두 도시 피해자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참고로 미국내 도시규모 1위는 뉴욕, 2위는 로스앤젤레서, 3위가 시카고)

올해 1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시카고에서 모두 1천930명이 총에 맞고, 315명이 살해됐다고 하는데 이는 하루 평균 10명 이상이 총에 맞고, 1.7명 이상이 살해당한 셈이라고 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총격은 50.5%, 살인 사건은 49% 늘어난 셈이라고 한다.

또한 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 유명한 벤자민 바버(Benjamin R. Barber)는 한국어로 <뜨는 도시 지는 국가>로 번역된 그의 책 “If Mayors Ruled the World”에서 시카고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폭력은 거리를 활보하며, 시카고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이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보면 마치 멀리 떨어진 전혀 다른 세상같이 느껴진다.”

비단 알카포네 같은 옛날 인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시카고는 웬지 어둡고 음습한 이미지로 그려졌던 까닭은 아마 이런 정보들이 내 머리속에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 다운타운을 걸으며 내가 본 시카고는 정말 아름답고 멋진 도시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시카고의 모습일까?

나는 그 거리를 걷는 순간만큼은 내가 보는대로 느끼기로하였다. 시카고 강변을 따라 옛것과 새것들이 잘 어우러진 도시풍경들, 도시의 바쁜 직장인들이 누리는 점심시간의 모습들, 그리고 동부 도시들에서 느끼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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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 거리를 걷는 순간 부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시카고에 대한 평판은 내 머리속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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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으며 보았던 곳은 시카고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평가되는 다운타운 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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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칸이 하는 일식당에서 스시와 우동으로 배를 채운후 우리는 union station lounge 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Amtrak unveiled the new Metropolitan Lounge at Union Station. The lounge features double the space for customers ticketed in sleeping cars and business class. The lounge is located above and behind one of the grand staircases in the Great Hall. | Rich Hein/Sun-Times
Amtrak unveiled the new Metropolitan Lounge at Union Station. The lounge features double the space for customers ticketed in sleeping cars and business class. The lounge is located above and behind one of the grand staircases in the Great Hall. | Rich Hein/Sun-Times

lounge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다과와 과일 그리고 각종 음료와 와인 등을 무료로 서비스했다. 기다리는 여행객들을 둘러보니 우리 일행이 제법 젊은축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거의 백인 일색이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후 2시,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2447마일(약 3938 km, 참고로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거리는 680km)을 2박 3일 약 50시간동안 달리는 열차 California Zephyr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였다.

많은 역사책에서 초기 미국이 거둔 위대한 성과라고 평하는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탓던 것이다. 누군가는”도둑질 위에 건설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에는 인디언들과 멕시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백인들’의 땀과 피와 이야기들이 깔려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차여행 – 3

<시카고 – 편견 또는 선입견에 대하여 1>

“하나아빠가 여행일정을 진짜 완벽하게 짜서 아주 편한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내가 하는 말에 하나엄마는 예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담고 답했다. “글쎄요? 그게 다 계획대로 잘 될까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와 심한 천둥 번개로 예정된 모든 비행기는 일기가 좋아질 때까지 지연될 것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다행히 천둥번개는 오래가지 않아서 시카고행 비행기는 약 40여분 늦게 출발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하나아빠가 세운 모든 계획은 거의 한틈 착오없이 일정대로 이루워졌지만, 단 한가지 비행기 스케쥴만은 예외였다. 떠날 때 조금 늦은 출발은 돌아올 때에 비하면 정말 소소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기차 California Zephyr를 타기 위해 필라델피아 공항을 이륙한 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였다. 시카고 Chicago O’Hare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시간은 시카고 시간으로 7시 40분이니 두어시간 비행거리였다.

곧 시카고에 도착한다는 기내안내 방송을 들으며 내려다본 미시건호수는 그냥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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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역인 Chicago Union Station으로 가는 지하철 Chicago L은 공항청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크게 헤매지 않고 지하철 blue line에 오를수 있었다. 때마침 아침 출근시간이어서 러시아워의 시카고 지하철 풍경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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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풍경부터 시카고에 대한 내 오래된 선입견 또는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동부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의 지하철 풍경에 견주어 너무나 산뜻했기 때문이다. 미국 넘버 3라는 대도시답지않게 다소 느긋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들도 조금은 상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Chicago Union Station은 웅장한 Philadelphia 30가 기차역이나 복잡하고 뭔가 질서없는 뉴욕 맨하턴의 Pennsylvania Station에 비해 아주 고풍스럽게 다가왔다. 그러나 역 안의 구조는 세군데가 거의 같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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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안에 있는 lounge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과 느긋한 마음으로 시카고 도시 구경에 나섰다. 기차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고 우리들이 그때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었으므로.

역사를 나와 우선 배를 채우기로 하였다. Corner Bakery Cafe에서의 아침은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이 한끼를 시작으로 우리는 여행 내내 여유롭고 풍성한 식탁을 즐겼다. 딱히 찾아서 간 곳들은 아니었지만 끼니 때마다 우리들은 맛과 양과 값에 있어 모두 충족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 때마침 시내 관광버스가 우리 앞을 지나고 있었고, 버스티켓 매표소가 코앞에 있어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걷기로 하였다. 아직 우리는 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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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cago

우리가 걸었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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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우연치 않게 볼수 있었던 NBC 인기드라마 Chicago Fire 촬영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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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ingham Fountain에서

기차여행 – 2

<하나와 한나>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서 하나네로 향했다. 하나는 이번 여행을 함께할 친구 부부의 맏딸이다. 내 딸아이 이름은 한나인데, 같은 영어 이름을 서로 다르게 불러 그렇게 굳었다. 하나 아빠와는 한 이십년 가까이 한 사이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여도 우리 모두 아직은 청춘이었다. 동네에서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협회를 만들어 서로 도우며 커가자는 생각으로 처음 의기투합했던 우리들은, 당시만해도 몸과 마음 모두 청춘이었다. 그렇게 협회와 한인회 일을 함께하며 가까워졌고, 세상을 보는 눈높이가 많은 부분에서 엇비슷하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이다. 물론 하나엄마와 한나엄마도 가깝다. 제법 긴 세월을 가까이 지낸 뒷면에는 조금은 뾰족하고 협량한 우리 부부를 언제나 가까이 받아주는 하나 엄마, 아빠의 넉넉함이 있었다.

손에 잡힐 듯한 저쪽 세월인데,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뜬 사람들도 있거니와  은퇴하여 두분불출인 사람들도 많고, 더러는 노환으로 앓는 이도 있다. 그 중 많은 이들이 은퇴 일시를 저울질 하고 있는 가운데, 당시 젊은 축이었던 하나 아빠와 나는 아직 씩씩한 현역이다. 물론 하나 아빠도 업을 바꾸어 세탁업보다는 조금 규모가 큰 세차업을 하고 있기는 하다.

우리집에서 하나네까지는 약 20여분, 하나네에서 필라델피아 공항까지 역시 20여분 걸리는 거리이므로 그곳에서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네와 우리가 함께 이번 여행을 함께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내 딸아이 한나 덕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6월 중순에 아내와 함께 딸아이 얼굴을 보러 갔었다. 그동안 몇번의 시행착오 덕으로 이젠 맨하턴 지하철 노선이 낯설지가 않다. 그날 우리는 Ground zero를 갔었는데 그곳을 가는 길에 한나가 물었던 것이다. “올해 한국갈 계획이 없냐?”고. 15일 정도 쓸 수 있는 휴가일이 있는데 엄마, 아빠가 한국 나갈 계획이 있다면 함께 나갔다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 대답은 아내와 딸아이에겐 사뭇 뜬금없었겠지만 그 무렵 내 생각을 아주 솔직히 던진 것이었다.

“엄마는 내년에 한국 나갈 계획이 있고, 그 때 아빠도 함께 갈려고 했는데…. 이러면 어떨까? 한국은 내년에 엄마랑 한나랑 함께 갔다 오고, 올 여름엔 한나랑 아빠랑 기차타고 미국 횡단을 한번하면 어떨까?”

머뭇거리는 딸아이를 나는 밀어부쳤다. “어때? 좋지? 한나야! 내가 구글에서 좀 조사를 해보았는데 열차여행이 아주 멋있겠더라고. 네 휴가 기간에 맞추어 한번 계획을 짜보자구? 아빠가 열차정보 링크 알려줄 테니까, 한번 계획을 짜볼래?”, 그렇게 다구치는 나에게 딸아이는 웃음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엉”

딸아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게 던진 말이다. “아이고, 그렇게 자기 딸을 몰라요? 행여 한나가 아빠랑 여행을 가겠다?  꿈깨세요!”

늘 그렇듯 아내는 정확했다. 내가 사랑하는 딸 한나는 그날 이후 열차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7월초쯤에 특별한 일없이 우리부부는 하나네 집에 들려 차 한잔 나누게 되었는데, 그날 나는 이번 여름에도 그저 꿈으로 남게된 기차여행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난 하나아빠는 아주 간단히 대답하였다. “그럼 우리끼리 한번 갑시다!”

고향이 충청도인 하나아빠는 말이 어눌하고 느린 편이지만, 내가 운전해 가면 한 시간이 걸릴 거리를 반 시간이면 족히 갈만큼 행동은 빠른 편이어서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완벽한 여행계획을 짯던 것이다.

우리 부부가 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선 것 역시 하나아빠가 세운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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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nd zero를 찾았던 날, 새로 조성된 World Trade Center Transportation Hub에 걸린 성조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십수년 전 했던 내 생각 하나가 떠올라 여기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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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ell W. Peterson은 올해 여든 네 살의 노인이다.

그는 지난 해,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러쎌 피터슨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그는 1996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며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지금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다. 나는 지금 친부시, 반부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양쪽 모두 의견이 다른 우리들, 바로 미국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논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이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미국뿐만 아니다. 어디에서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그 가치를 호도하고 왜곡하는 세력은 타도해야만 할 대상이다. 그러나  미국이든 한국이든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은 늘 희망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한다.

역사란 인류의 보편적 자유확대사라는 헤겔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2004. 3. 26)

<후기> – Russell W. Peterson은 지난 2011년 2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차여행 – 1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짝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여 땅따먹기나 못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쎄벼)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 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탓었다.

열 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하턴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일랄까?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번 계약기간이 끝나면 서른 해가 되어가는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 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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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하얀 천같은 것이 덮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이후, 우리는 그것이 “눈이다! 아니다!”로 서로의 생각을 세웠었다.>

거한 생일상

냉이무침, 가지무침, 가지튀김, 사골 도가니탕, 녹두빈대떡, 아구찜, 마파두부, 깐풍기, 깐쇼새우, 유산슬, 난자완스 – 지난 주말에 제가 만들었던 요리들입니다. 요리의 완성도나 맛에 대한 평가는 접어 두고, 제 손으로 만든 음식들로 누군가를 대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주말이었답니다.

이따금 음식 만드는 일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한 오륙 년 전부터 입니다. 누가 시켜서는 아니고, 그저 제 스스로 내켜서 시작한 일이랍니다.

지난 주말에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에게 한 오륙년 전에 제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 연유를 설명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며 웃음을 끊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제 두아이들 이었답니다. 아들과 딸아이는 아마도 애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아니면 엄마를 위해서 음식을 시작한 일이거니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깊은 뜻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고, 입이 짧은 제 식성 때문이었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식투정이나 부리는 사내는 아니었답니다.

아마 그 무렵의 일이었을텐데 어머님께서 이따금 만들어 보내주시는 음식들에서 제가 어릴 적 느꼇던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지 못하곤 하였답니다. 어머니께서 늙으신 탓도 있겠지만 제 입맛이 그만큼 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내의 손맛에 만족하기에는 제 입맛은 늘 까탈스러웠답니다.

그러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 본것이 오늘에 이르른 것이랍니다.

제가 음식 만드는 일을 크게 고무시키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도전을 겁내지 않게 해 준 이들은 다름아닌 제 아내와 아이들이랍니다. 식구들이 던지는 “맛있다”는 한마디에  설거질도 당연한 일이 되곤 하였답니다.

그리고 한 달포 전 일이랍니다.

부모, 처부모를 비롯하여 누님댁, 여동생네, 조카들 등등 대가족이 가까이 모여 살고 있는 덕에 가족 대소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이랍니다. 이런 연유도 있거니와 제 별난 성격 탓도 한 몫하여 이제껏 제 생일상은 차려 본 적이 없답니다. 해마다 아내가 던지는 “어떻게?”하는 물음에 “그냥 넘어가!”하는게 제 대답이었답니다. 비록 환갑, 진갑 다 넘긴 나이지만 “아직 애인데… 무슨 생일상을…”하며 넘어가곤 했답니다.

그러다 달포 전에 제가 아내에게 던진 소리랍니다.

“생각해 봤는데….이번 내 생일은 내가 상차려서 부모님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어.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나이로 모두 구순을 넘기셨고, 장인도 그만 하시고, 장모도 병 잘 이겨 내시고 있고…. 나도 이즈음엔 늙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고….. 모두들 아직 건강할 때…. 내가 만든 음식으로 상 한번 차려서 보내는 것도 뜻이 있겠다 싶어서….”

IMG_4889a아내는 스스로에게 모험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건만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답니다.

그래 토요일에는 처부모님과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 내외분을 모시고 제 생일상을, 이튿날인 일요일에는 부모님들과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들 내외분들을 모시고 제 생일상을, 그 다음날엔 형제들과 함께…. 그렇게 거한 생일을 보냈답니다.

이런 저런 뒷일들을 도와준 아들딸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평소 교회도 잘 나가지 않는 저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저희 가족들을 위해 귀한 시간 내주신 목사님들 내외분께 감사를…무엇보다 진짜 모처럼의 효도를 흡족하게 즐겨주신 부모님들께 감사를…

한 삼주 동안 독감으로 고생을 했었는데, 때 맞추어 감기도 떨어져 계획대로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주신 제가 믿는 신(神)에게도 감사를…

(딸아이가 일주일이 지나서야 보내준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부모님들이 아니라 제가 좋았나봅니다.)

재미있게 살기 위하여

독감(毒感)이라더니 정말 독한 놈에게 걸려들었습니다.

약병은 커녕 바이타민 조차 곁에 두고 살지않던 제가 딱 두주째 약기운으로 지낸답니다. 초기 사나흘 앓고 하루 반짝해서 ‘감기가 그렇지 뭐’ 했었는데 웬걸, 그후 꼬박 나흘을 누워지냈었답니다. 그리고 또 하루 멀쩡해서 ‘어이구 독한 놈 만났었네’하고 이튿날이면 털고 일어날 줄 알았답니다. 헌데 정말 독한 놈을 만난 것입니다. 다시 눕고 사흘이 지났답니다.

가벼운 폐렴 증세까지 보이며 급기야 항생제를 넘기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충분한 수면과 휴식 뿐”이랍니다.

노인네들 한겨울 보내고 새 봄 되어 만나면 겨우내 폭싹 늙었더라는 말이 가히 남 이야기가 아닌 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비록 양은 평소 절반이라도 정상적인 식사를 즐길 수는 있게 되었으므로 하루 이틀 후면 독감과의 동거 이야기를 추억 삼을 수 있게 될 듯합니다.

누워 지내며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신영복선생님께서 남기신 “강의”와 의사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이근후선생님의 책은 사실 암투병중인 장모님께 드리려고 구입한 것인데 제가 먼저 읽고 말았답니다.

신영복선생님의 고전강의인 “강의”를 읽으며 유영모, 함석헌, 김용옥, 강신주 등의 고전 강의와는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 배우고 깨닫고 행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으므로 우선 건강하고 볼 일입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 이근후선생님의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를 읽은 아주 짧은 느낌을 적어 제 가게 손님들에게 이메일 편지를 보냈었답니다. 그리고 제법 많은 분들께서 동감이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책 제목이 좋다고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고 볼일입니다. 무릇 “재미”란 주관적인 것임으로  각자 “스스로”들을 위하여.

(아래글은 손님들에게 보낸 편지)


이근후지난 주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책 제목이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싶다.”입니다. 50년 동안 정신과 의사로 일해오다 은퇴한 올해 81살인 한인 의사 이근후라는 이가 쓴 책입니다. 누구나 읽기 쉽게 쉬운 말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며 느낀 점들을 기록한 책입니다.(아쉽게도 영문본은 없으니 제가 소개해 드립니다.)

저자 이근후씨 내외는 12여년 전부터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의 제일 어른이랍니다. 2남 2녀인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다들 각자 따로 살다가 12여년 전에 모두 함께 모여 살면 어떻겠냐?는 생각으로 한집안에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답니다.

이 제안은 그의 장남 내외가 먼저 꺼냈고, 다른 자녀들이 동의를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박사 내외는 끝까지 망설이다가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5 가정이 함께 사는 이 집의 구조는 매우 독특하답니다. 출입문이 각기 다를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구조를 지녔다고 합니다.

이근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족들은 내 인생이다.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바로 내 인생이다. 칙구, 제자, 동료, 환자들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나고, 산에서 만나고, 봉사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수많은 인연들이 모두 나의 인생이었다.”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누구라도 얼굴을 떠올리면 그가 가진 장점이나 좋은 기질 달란트를 기억해 낼 수 있다. 내 인생이기에…”

저는 그처럼 대가족을 이루고 살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의 삶을 흉내낼 처지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내 가족 얼굴 하나 하나마다 내 세탁소 손님 한분 한분에게마다 그들을 떠올리 때면 내가 좋아지는 이미지나 의미를 새겨넣는 훈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재미있는 하루 하루들은 매일 새롭게 시작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I read a book, entitle “I Want to Live a Fun Life until I Die.” It was written by Keun-hoo Lee, MD, who is an eighty-one year old retired neuropsychiatrist and professor.

It is a book in which he recorded what he felt, looking back over his life, in plain terms to make it easy to read. (Unfortunately, as it has not been translated into English yet, I’ll introduce it to you.)

The author, Dr. Lee and his wife head a family of three generations. His two sons and two daughters got married and moved out. But about twelve years ago, he, his wife and his children talked about an idea that all of them would live together in one house and decided to do so.

His oldest son and his wife brought up the idea, and the other son, daughters and their spouses supported it. Initially, his wife and he hesitated to consent to it, but then decided to go along.

The house in which five families live together has a unique structure. The entrance for each family is separate and different and no one interferes in what the others do.

Dr. Lee said:

“My family is my life. Not just my family, but all the people who I have met in my life are my life. Friends, students, colleagues, patients, those who I have met in traveling, hiking, and volunteering ― all those countless encounters were my life.”

“I don’t remember all of their names, but if I recall any of their faces, I can recollect his/her virtue, good disposition, or talents. Because they are my life…”

I don’t think that I can afford to lead an extended family in a house like him or to imitate his extraordinary life.

Having said that, I think that I can train myself to carve in my mind the good perceptions and images which match every face of my family and every customer of mine.

I wish that you will have a fun lif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