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네 정원은 John을 쏙 빼닮았다. 이웃 집 염소들 까지. John이나 아들이나 이젠 함께 늙어 간다.
Jul. 29. 18 – John네 잔치에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
춘분(春分)날 눈에 갇히다. 눈이 12인치 이상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맞는가 보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시간의 여유는 게으름을 낳는다.
내리는 눈발도 그저 정물화다.
늘 그렇듯 뉴스들은 복잡하고 시끄럽다.
이런 날은 동화(童話)가 적절하다.
“사람들이 너에게 정답이라고 내미는 곳을 그냥 믿어 버려서는 안 돼. 언제나 네 스스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다듬어야 해. 그리고 네 믿음,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 네가 취하는 태도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
“하지만 그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래 당연히 힘들지. 하지만 그런 게 자유야.”
– 라이너 에를링어의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 빨개진다>에서
일요일 아침 산책길에 누리는 축복들을 눈에 담다. 내가 피울 봉우리들을 위하여. 그 맘으로 편지 한 장 띄웠다.
음지 곳곳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쌓여 있고, 쌩쌩 부는 바람에 아직 외투나 점퍼를 벗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도 눈이 한차례 내린다는 일기예보입니다. 봄은 아주 더딘 걸음으로 오나 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도, 눈이 더디 녹아도 이제 곧 크로커스, 수선화, 히야신스, 튜울립 같은 꽃들이 대지 위에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땅 속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애쓰는 꽃뿌리들의 노력을 저는 보거나 느끼지 못하지만, 시인들의 눈에는 그 애쓰는 모습들이 다 보이는 모양입니다.
봉오리는
모든 만물에 맺는다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도
모든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시인 Galway Kinnell의 시 <St. Francis And The Sow>의 일부입니다.
<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도/ 모든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라는 Galway Kinnell의 선언을 읽노라면, 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잡초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
화사하고 아름다움은 꽃들 뿐 만이 아니라 길가에 피어 오르는 이름없는 잡초일지라도 그 스스로 축복 속에서 뜻 깊게 삶을 노래한다는 시인들의 성찰입니다.
이제 곧 봄은 올 것입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게서 사랑스러움과 축복을 느끼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봄이 오는 길목, 당신의 세탁소에서
As snow in the shade still remains non-melt and the wind howls through the trees, I don’t dare to take off a thick coat or heavy jacket yet. According to the weather forecast, we’ll have snow once this week. It seems that spring comes at a slow pace this year.
However, no matter how hard the cold wind may blow and no matter how slowly snow may melt away now, spring flowers, such as crocuses, daffodils, hyacinths, and tulips, will come out of the soil soon. Though I cannot see or feel the great efforts to bud and bloom of those plants in the cold soils, poets seem to see them all.
The bud
stands for all things,
even those things that don’t flower,
for everything flowers, from within, of self-blessing;
This is a part of a poem, “St. Francis And The Sow,” written by the poet Galway Kinnell.
When I read Galway Kinnell’s proclamation, “even those things that don’t flower,/for everything flowers, from within, of self-blessing,” Ralph Waldo Emerson’s definition of a weed came across my mind:
“What is a weed? A plant whose virtues have not yet been discovered.”
Cheer and beauty can be found not just in flowers, but in any plants which sing their lives meaningfully, of self-blessing, though they may be unnamed weeds and may flower at the roadside. That’s poets’ reflection.
Spring will come very soon.
I wish that you’ll feel love and blessing from everything which is living and breathing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at the corner of spring’s coming.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 어제, 오늘 내 가게 손님들이 나를 깨우친 생각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를 정말 반갑게 맞아 준 이들은 내 가게 손님들이었다. 바로 우리 부부의 일상이었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경험으로 지난 시간들을 꺼내어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의 일상을 함께 했다.
“내 마누라에게는 너희들 여행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마누라가 또 가자고 할지 모르니…”
“거긴 아주 형편 없는 곳이었지, 이태리가 정말 좋았어!”
“출장 길에 딱 하루 들렸었지. 언제간 나도 시간 내서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야.”
아련하게 옛 기억을 떠올린 이는 1970년대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이젠 할머니가 된 옛 소련 출신 피겨 선수였던 그녀의 기억이다. “모나리자 앞에 서 있었단다. 마침 나를 알아 본 관광객이 있었단다. 그 이가 내게 사인 요청을 했단다. 모나리자 앞에서 사인을 해 주었었지”
그랬다. 무릇 여행이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내게 파리는 역사 속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내일을 꿈꾸게 하는 도시였다.
오후 4시가 지났을 뿐인데 밖이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흐린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간밤에 daylight saving time이 끝난 연유일게다.
엊저녁엔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다녀왔다. 두어 달 전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벗인 하나 아빠가 한나 아빠인 내게 제안을 했었다.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말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난 웃을 뻔 하였다. ‘내가 오페라 구경을…?’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오페라 공연 무대를 찾아가 구경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오페라 공연을 본 것도 경험이라치면 그 구경이 전혀 처음은 아니랄 수도 있겠다만, 하나 아빠의 제안은 웃음이 나올 만큼 내 격과 분수에 크게 지나친 것이었다.
제안과 함께 이어졌던 하나 아빠의 권유였다. “사는 게 뭐 있어? 이제 와이프랑 함께 이제껏 하지 못하고 산 일들 한번씩 해보고 사는거지!” 나는 그 소리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제안을 따랐다.
그리고 어제 우리들은 뉴욕 Metropolitan Opera House에서 오페라 ‘La bohème’ 구경을 하였다.
오페라 ‘La bohème’에 대한 이야기는 오페라 문외한인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한 후 잔상으로 남은 몇가지 간밤의 기억들이다.
‘뉴욕의 밤’, ‘도시의 밤’은 이젠 시골영감이 되어버린 내게 잠시 옛 생각을 즐기는 선물을 선사하였다. 그래 우리 부부도 한 때는 ‘도시의 밤’, ‘서울의 밤’을 누렸던 청춘이었다.
오페라 하우스에 간다고 나름 교회용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특히 구두를 신고) 나선 길이었다. 극장안엔 그야말로 선남선녀들이 오페라 하우스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들 오페라 연주보다 멋진 테를 뽐내었다. 그러나 예외는 늘 있는 법, 청바지에 캐쥬얼 차림으로 명랑한 젊음들도 보았다.
중간 휴식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좌석열 중간쯤에 위치한 자리를 찾아가는 노인 한 분을 위해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 부부를 비롯한 대여섯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 때 걸음걸이가 힘들어 보이는 그 노인이 한 말이다. ‘그대로 좀 더 서서 기다리쇼. 저기 내 친구 하나가 더 와요.’ 그래 우리들은 아직 젊음이었다.
극장 규모보다 더 큰 놀람은 관객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자막 시스템이었다. 오페라의 대사들을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 제공하는 자막이었는데, 각 개인 좌석에서 옆자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편함을 주지않고 누릴 수 있는 편의 제공이었다. 내가 오페라 ‘La bohème’을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는데, 내 스스로 시골영감임을 인증하는 것인 줄은 모를 일이로되 대단한 첨단 기술이었다.
무대의 정교함과 현실감 나아가 모처럼 들어보는 사람이 내는 소리의 완벽함 등은 내 눈과 귀의 수준에 비추어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도시의 밤’.
친구 잘 만나 강남 구경 멋지게 한 어제 일을 되새기는 사이 밖은 아주 이미 캄캄하다.
보헤미안(Bohemian)과 필리스틴(Philistine)들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세상에 대한 꿈은 내일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에 살아있는 자들이 할 일일 것이고, 친구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를.
칠순 나이에 산행을 즐기시는 이길영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신 분에게 사실 말도 안되는 부탁을 드린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산행은 좀 버거운 듯하니 이즈음에 걷기 좋은 산책코스 한 곳을 추천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가급적 왕복 하룻길이면 좋겠다고 덧붙였었다.
이선생님은 French Creek State Park에 한번 가보라고 즉답을 해주셨다. 지도를 검색 해보니 집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여서 솔직히 좀 실망이었다. 늘 보던 동네 풍경을 벗어나지 못한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집을 나선 후 약 10분쯤 지나자 네비게이션은 평소 전혀 다니지 않던 길로 접어 들라고 명령하였다. 그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이 선생님에게 대한 감사가 시작되었다. 가을걷이에 들어선 옥수수밭들과 목장 풍경들이 우리 부부의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가을 아침 한 시간여 드라이브 코스 눈요기만으로도 오늘 산책길 추천에 대한 감사는 모자랄 것이다.
French Creek State Park 호수를 끼고 돈 산책길과 덤으로 즐긴 사과 따기, 산속에서 만끽한 비빔밥, 돌아오는 길에 즐긴 샤핑까지, 오늘 하루에 대한 감사는 이 치부책에 남겨 갚을 날을 꼽아본다.
매 주일 아침에 가게 손님들에게 이 편지를 띄운 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한 주간 세탁소 일을 마치고 하루 쉬는 일요일 아침에 제가 느끼는 짧은 생각들을 손님들께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르는 것이 편지 말미에 첨부하는 시입니다.
제가 워낙 시를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제가 쓰는 편지 보다는 누군가의 시 한편으로 이 편지를 읽는 분들께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편안함과 삶에 대한 감사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를 고르곤 한답니다.
편지를 쓰고 시를 고를 때마다 제가 소원하는 마음이 있답니다. ‘단 한 사람만 이라도’ 제 편지와 제가 고른 시를 읽고 그 순간만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이랍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시 한편을 소개 드립니다. 해마다 이 맘 때 가을의 문턱에 이르면 제가 즐겨 읽는 시인의 시랍니다. 한국어로 쓰여진 이 시의 참 맛을 그대로 전해 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시의 느낌만이라도 전해 드리고 싶답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짧은 쉼을 누리는 시간들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늘 이어지기를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일요일의 미학(日曜日의 美學)
–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음부(音符)에다 불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 만에 편히 쉬던 神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 — 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와 한다.
I’ve been sending this letter to my customers every Sunday for quite a long while. In the letters, I have told you my small thoughts which came to my mind in Sunday morning, resting after a long week of work at the cleaners. In fact, I usually spend more time on selecting the poem attached at the end of the letter than writing the letter itself.
It’s not just because I like poetry so much, but because I wish that the poem, more than the letter, will give the readers comfort and gratitude for life, however short or long it may last. With this wish in my mind, I try to select a poem each week.
While I’m writing this letter and selecting a poem, I also have in mind a wish that the readers share gratitude for life with someone else in a feeling of peace and serenity, whether just one person, and whether just for a moment.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poem with you with my wishful mind. It is one written by the poet whose poems I like to read around this time of year, at the threshold of autumn, every year. I know that I cannot help you really appreciate the poem in translation, as it was written in Korean. But, still I want to impart its feeling to you.
I wish that at the beginning of fall, we can feel gratitude for a time of rest, whether it is Sunday or just some moments, and that it will always continue.
From your cleaners.
Aesthetics of Sunday
– Hyun-seung Kim
As work for rest, and
Fights were for freedom,
Like that, Sundays come to us.
As morning bread was baked
For a hot soup.
As mother for son,
Husband is happy for wife,
Like that, Sundays come to our house.
As May left,
Dropping off red wild roses in the green woods.
While I’m wearing a necktie somewhat tilting leftward,
While I’m occasionally mixing discordant notes in the music,
While I’m oversleeping this morning
Without feeling sorry to superiors at work,
I become lenient in living a life gradually.
The God’s will, who stopped His busy work and rested on the seventh day,
Now I think I know.
I, who used to be my other,
Give commands with a lash in hand,
Blow the shrill whistle,
I, who used to be others drawing a fastidious straight line,
Have become myself and have myself since the morning today.
On which I can become others,
Or become myself
Sundays has my country – born in this country
I always cherish it as beautiful.
따지고 보면 연휴를 맞은 느긋함 탓이었다. 크거나 작거나 장(場)을 볼라치면 사야할 물건 목록표를 들고 다녀야 마땅할 일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모처럼 대도시 나들이에 예정에 없던 장보기였으므로.
빵집 순례에서 넉넉히 장바구니를 채운 아내는 한국장을 보면서 내게 큰 선심을 썼다.
“여기 소주도 있고 막걸리도 있네, 골라보셔!”
그 소리에 내 머리 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막걸리로 40년을 되돌려 볼까, 아무렴 오늘 한 잔은 쐬주 아닐까 하는 생각은 돈 계산보다 빠르지 못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막걸리는 구경도 못하거니와 소주는 2홉들이 한 병에 거금 10불은 주어야 하므로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입에 대지 못하는데, 소주병에 붙여진 가격표에 우선 반할 수 밖에 없었다. 2홉들이 6병 한 박스에 24불 – 이건 거의 공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주병에 그려진 빨간 딱지라니! 이게 도대체 몇 십년 만이냐! 아내는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감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게다. 오호 빨간 딱지라니!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세 시간 드라이브 길에 아내는 물었었다. ‘쉬지 않고 그냥 가?
‘쉬긴 뭘…’하던 내 응답에는 예의 그 빨간 딱지의 유혹이 숨어있었다.
집에 돌아와 마주 앉은 늦은 저녁 상, 반주를 핑계로 뚜껑을 따, ‘크 한 잔’ 빨간 딱지의 소주를 입에 털어놓은 내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이런…..ㅉㅉㅉ “
30도 짜리 혀끝에서 목구멍까지 훅 쏘던 그 맛, 빨간 딱지 쐬주는 어디가고 복숭아 주스 맛 14도 가짜 와인 맛이라니! 오, 이 ‘처음처럼’의 사기 맛이란…
소주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처음’과 ‘지금’ 사이에.
아니면 ‘처럼’의 사기질일까?
아니다. 그 순간 내가 돋보기를 쓰지 않았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