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샴푸

이제 제발 샴푸를 쓰라는 아내의 성화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답니다. 물론 샴푸를 사용한 것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다만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지요. 

그냥 세수비누를 사용해 왔지요.  한 삼십년 된 듯 합니다.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은 세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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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빨래비누를 사용했었지요. 거의 서른 나이까지 제가 머리감을  때 즐겨쓰던 비누였답니다. 누런색 사각 덩어리 빨래 비누였답니다.  그 놈으로 머리를 감고 나면 머리속까지 시원했답니다. 

그 빨래비누를 구할 수 없어서 사용한 것이 세수비누랍니다. 

샴푸는 영 제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아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약간의 세치라고 할만한 흰머리카락은 있지만 아직 검고 윤기있는 머리털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나이 육십에 이제 샴푸로 머리를 감습니다. 

저는 이게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내의 말은 듣는 게 편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누구는 새로 시작하는 나이라지만, 늙어가는 나이이기도 한 탓입니다.

합리적 의심 – 천안함 프로젝트

폭풍 전야라고 하던가요.

아주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겨울 눈폭풍의 이름은  Titan이라고 한답니다. 적게는 7인치에서 많게는 12인치까지 내린다고 합니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고 하고요.

전기나 물이 끊길 우려도 있다는 뉴스에 만일을 위해  휴대용 부탄가스 버너와 장작 등도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리고 즐긴 다큐멘타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입니다.

오늘 오전에 지인이 한번 꼭 보라는 메세지와 함께 보내준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원천 봉쇄되거나 “무조건적 믿음”이 애국이나 신앙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영상임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LFB2IW8Zmg#t=4438

위험한 이성(理性) – 영화 변호인을 보고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본 게 언제적 일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민(移民)온 이후 영화관을 찾아가 한국영화를 본 일이 이번이 처음이니 아마 족히 삼십 년은  넘은 듯 합니다. 

몇 년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가까운 필라델피아 영화관에서 김기덕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그 영화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가 끝내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고요. 나중에 집에서 다운 받아 보고는 김기덕감독의 영화들을 두루 찾아 보기도 했었답니다. 

아무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TV 모니터로 보는 맛은 좀 다르지요. 

그러다 엊그제인 월요일 밤에 마침내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보게 되었답니다. 영화 “변호인”을 필라델피아  Warrington에 있는  Regal Cinema에 가서 보고 온 것이지요.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아야 제 맛이더라고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의를 두 군데 다른 모임에서 받았답니다. 한 곳은 저와 세상 보는 눈높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고, 다른 한 곳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영화상영기간(2. 21- 2. 27 딱 일주일)이 짧아서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세상보는 눈이 비교적 저와 다른 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있고해서 두번 째 그룹인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이들과 영화를 같이 보았답니다. 

다들 가게들을 하고 있는 처지라 문을 닫은 후 함께  저녁식사도  한 뒤에 영화를 보기로 하고, 마지막 상영시간인 9시 50분에 시작하는 것을 택했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새벽 1시 반이 넘었답니다. 

그날 함께 영화를 본 이들의 평균 연령는 거의 육십에 가깝답니다.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일상의 일탈에서 일어난 피로가 계속되는 나이들이랍니다. 

아무튼 함께 영화를 본 아홉 명 가운데  여섯명은 이즈음 한국의 표준어가 된 듯한 경상도 말을 쓰거나  그 곳이 고향인 분들이었고요, 저도 태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났으니 그렇게 따지면 일곱이 영남이 되겠네요.  굳이 정치적인 성향이나 세상보는 눈으로 따져 보자면 저와 제 아내를 빼고는 아무래도 이른바 보수쪽(?)으로 기우는 분들이었답니다. 

모두 아이들이 거의 다 컸다는 공통점도 있겠군요. 우리 부부가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면서 함께하는 정말 참 좋은 한국인 이웃들이랍니다. 

그렇게 영화 변호인을 보았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이 탓도 있고, 밤 늦은 시간 탓도 있고, 함께 타고 간 ben 운전을 맡은 이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영화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답니다. 

다만 제 생각은 이 그룹과 영화를 함께 본 일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적 시각으로 영화  “변호인”을 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다른 그룹인 저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면 뭐 이데올로기까지 나아갈 정도의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라던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정치인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되씹음 등의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이 영화를 본 이들의 입장에서 느낌을 찾아보려고 하니 영화의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본 후 제게 크게 다가온 것은 두가지랍니다. 

주인공 송우석변호사에  대한 느낌은 이미 “느낌 아니까!”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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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중에 첫번 째는 악역을 맡은 배우들을 비롯한 조연들 곧, 검사역을 맡은 조민기배우와 고문경찰 차동영역의 곽도원배우, 판사역의 송영창배우, 사무장역의 오달수배우 등의 열연이었습니다.  그들의 연기를 보면서 “사람 일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이랄까, 또는 “이성(理性)”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의 한계랄까, 그것을 잘 전해주는 이른바 조연들의 열연이었답니다. 

사람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뛰어날 수 있는 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성(理性)이라는 것이지만 그  이성이란 것이 늘 잘못될  수가 있고, 때론 그 잘못된 이성은 짐승만도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 조연들이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답니다. 

무릇 신앙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이성 곧 사람들 생각에는 한계에 있다는 고백 끝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신앙을 마구 짓밟는 세력들은 늘 있어왔지요. 때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고문경찰 차동영의 이데올로기는 영화속 시대 상황인 1980년대가 아닌 영화를 돌리고 있는 바로 오늘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세지를 전해 준 영화랍니다. 

두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고 송우석을 변호하려고 그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하려고 했을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들 모두가  “변호사”라는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변호가 아닌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했거나 그렇게 노력해 왔다면 오늘 한국사회는 정말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으로… 

모처럼 즐긴 문화생활을 돌아보며…

시골영감

딸아이 서울 보내놓고 걱정 끊이지 않는 시골영감이 되었답니다. 영락없이 그짝이 되었답니다. 한때는 저도 참 모던(modern)?한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역시 제 생각일 뿐이겠지만 말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인턴쉽을 하노라고 뉴욕 맨하턴에 가있는 딸아이를 보고 돌아온 주일 밤입니다. 이젠 어쩔수 없는 촌로(村老)가 되었습니다. 

저는 가로등 하나없는 이 시골이 좋은데, 딸아이는 뉴욕이 좋답니다. 아이에 대한 제 걱정이 정말 쓸데없는 것이었음에 대해 감사하는 밤이랍니다. 

타임 스퀘어 건널목에서 만난 느닷없는 퍼레이드는 무슬림들의 종교행사였는데, 이만하면 미국이 아직은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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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벌어진 비보이 춤꾼들의 놀이를 보면서는 대도시의 애환과 잔재미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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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바켓이라는 빵집에는 제 딸아이 또래 아이들이 연신 쉬지 않고 드나들었는데 촌로인 제가 앉아있기가 참 부담스러웠답니다. 

역시 제게 딱 맞는 자리는 부글부글 찌게전골에 모처럼 참이슬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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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의 대화도 빠리 바켓보다는 찌게전골 자리에서 훨씬 부드러웠던 생각을 해보면 “아, 저는 이제 정말 시골 노인이랍니다.” 

아 참, 타임스퀘어 지하에서 돈통을 앞에놓고 마임으로 동상노릇을 하고 있던 이가 정말 작은 적선에 모델을 마다치 않아 딸아이와 아내가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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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딸아이를 보내고 맨하턴에 뜬 달을 보며 시골로 다시 돌아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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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저는 이 시골이 좋답니다.

길 – 쉬어가는 길

오늘 하루는 “하나님 나라 가는 길” 이야기 잠시 쉬어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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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가을 구경을 갔었답니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주립공원이었답니다.

사진 몇 장을 찍었는데,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 시 하나 읊을 분량도 안되었답니다.

신경림시인의 길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래의 고민들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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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내기 아주 좋은 날이었지요. 

햇살은 조금 따갑게 느껴졌지만 이따금 장미 향기를 품고 건듯 부는 바람이 그 따가움을 실어가는 오후였답니다. 

야외결혼식에 안성맞춤인 주일 오후를 택한 신랑, 신부 애들의 안목이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랜 이 동네 벗이 아들을 장가 보내는 날이었답니다. 

모처럼 만난 얼굴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미는 아이들과 두 아이들을 키운 가정을 축복하는 마음들을 나누며 즐거운 주일 오후 한 때를 보냈답니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요. 

이제 곧 맞이 하게 될 자기 아이들의 결혼 이야기, 부모 또는부 나 모의 건강 이야기, 그리고 곧 맞이 할 은퇴 이야기 등등. 

무릇 사는 맛이 사람마다 다를 일이지만 또래의 고민들을 또래에 맞게 하고 사는 삶도 축복 받은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주일 밤이랍니다.

10분의 여유

지금은 뉴욕에 계시는 문동환목사님께  기독교교육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벌써 35년 전 일입니다. 어느날 강의실에 들어 서신 목사님께서는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내방송이 나옵니다. ‘비행기가 심각한 이상이 생겨 추락하고 있습니다. 약 10분 후 이 비행기는 태평양상에 떨어 질 것 같습니다.’ 자 ! 여러분에게 10분의 시간을 주겠습니다. 내가 나누어 드린 종이 위에 글이든 그림이든 이 상황에서 여러분들의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적어 보십시요.” 

 

그리고 10분 후 목사님께서 다시 말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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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승객이 모두 죽은 비행기 사고가 있었습니다. 시신조차 찾기 힘든 사고이었지요. 그런데 사고현장에서 어느 일본인이 남긴 짧은 기록을 발견하였답니다. 거긴 이렇게 쓰여있었답니다. ‘내게 10분의 여유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감사한다. 사랑한다.’라고요. 자! 이제 여러분들이 남긴 것들을 공개해 볼까요.”

 

그렇게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던 우리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유서들을 공개했었지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 때 제가 무어라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네요.

 

지금의 내가 “10분의 여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내가 그 짧은 시간 사랑과 감사를 고백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무려 삼십 팔년간을 쫓겨 다니며 사셨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선생님 이야기지요.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선생님이시지만 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하지요.

 

어느날 멍석을 짜고 계신 해월선생님께 어느 도인(道人)이 물었답니다.

선생님 내일이면 또 떠날 길인데 멍석은 무어라 짜십니까?”

해월선생님 왈,

“내 몸이야 떠나지만 여기 멍석이 있으면 훗날 누구라도 이 곳에 와서 쉬지 않겠는가?”

 

늘 마지막인 순간에도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참 도인(道人)이겠지요.

쪼금 아는 체 하는 것 용서해 주시기 바라고요.

이러한 삶들을 일컬어 ‘종말론적(終末論的) 삶’이라고 하지요.

 

종말론적 삶에는 무엇보다 치열함이 있지요.

그 치열함 속엔 여유와 넉넉함과 사랑과 감사 그리고 나눔이 있게 마련이고요..

 

무엇보다 종말론적 삶에는 끝없는 희망이 살아 숨쉬는 것이지요.

 

봄, 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함을 느끼는 오월은 처음인 듯합니다. 생각의 한계인 줄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쩜 늙어가는 탓인 줄도 모를 일이고요.  저 뿐 아니라 지구도 함께 말입니다.

꽃과_등

중순으로 접어드는 오월, 여전히 꽃잎들이 날리는 봄이랍니다. 

꽃은 떨어지며 열매를 품습니다.

기억 용량이 그리 크지 않은 제 작은 머리속에도 수많은 꽃들이 떨어지며 품었던 열매들의 꿈들이 남아있답니다. 끝내 이루지못한 꿈들, 아직도 맺지못한 열매들이 말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오월- 그렇게 떨어진 꽃잎들이 품었으나 맺지 못한 열매들을 추억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밤입니다. 하루의 시작인 시간입니다. 구태여 유태인들의 시간관념을 빌어오는 까닭은 지금의 쉼이 곧 시작이고 싶은 꿈 탓입니다. 

봄 그리고  밤.

바로 봄밤이기에

비록 아쉬움 많아도 서두르지 않는답니다. 

 

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한계(限界)

노인이 하우에게 말했다.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고 있지?”

“태양이 하나라는 건 알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은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고 하우에게 내밀었다.

“자, 보게. 사진이라네.”

하우는 사진을 건네받았다. 두 장이었다.

언뜻 보기엔 꼭 같아 보이는 두 장의 사진. 수평선 너머에 있는 태양을 찍은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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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에 어떤 게 일출 사진이고 일몰 사진인지 분간할 수 있겠나?”

하우는 사진을 이리저리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딱히 일출과 일몰을 구분할 만한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둘 다 일출 사진이라고 해도, 둘 다 일몰 사진이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것 같았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만, 얼핏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르신, 분간하기가 어려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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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일출 사진이라네. 당연히 다른 사진은 일몰 사진이고.”

그 말을 듣고 사진을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노인은 말했다. “일출이건 일몰이건 똑 같은 태양이지. 어떤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야. 한계도 마찬가지지. 그걸 일몰이라고 보면 일몰인 거고 일출이라고 보면 일출인 거라네. 한계는 말이지, 꽉막힌 벽이 아니라 허들 같은 거라네. 뛰어넘으면 그만이지. 최선을 다해 뛰어넘어 보게.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 말이야.” 하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김현태 『향유고래이야기』중에서 – 

주일 오후에 읽은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한계는 뛰어 넘으면 그만이랍니다. 최선을 다해…

힘들면 가끔 숨도 돌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