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나이

제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절대 과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이 부부싸움을 해 보신 경험이 있다면(결혼경험은 있는데 부부싸움 경험이 없다고 하시면 그건 제대로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감히…) 아내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신 적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제 감탄은 그 누구라도 당신의 경험보다 열배는 더할 것입니다.(물론 거의 제 부류 모든 사내들이 같은 생각일지라도…)

제 가게 손님들에게 종종 듣는 이야기랍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들 이름 언제나 다 아는데, 너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답니다. 아내는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 이름들을 기억한답니다. 결코 작은 숫자라고도 할 수 없거니와 거의 세계 각국 여러나라 이름들을 그렇게 잘 외운답니다.

그에 반해 저는 조금전에 제 가게를 들어왔다가 나간 손님이 무언가를 잊고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도 또 다시 맞는 새손님이랍니다.

언젠가 어느 손님 한분이 놀랍도록 다른 저와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 물었었답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 이름들을 다 외우는데 너는 어떻게 손님 그것도 이십년된 손님 이름 하나를 못 외우냐?”고요. 그래 제가 한 대답이랍니다. “아! 그거. 지능지수의 차이야, 아마 너도 나와 똑 같을 걸. 지능이 낮을수록 단순한 것들을 잘 기억하지. 내 아내의 경우야. 아마 니 마누라도 마찬가질 걸. 그러나 나는 너를 알아.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바로 너처럼. 지능이 높거던.” 물론 그 손님은 저와 매우 친한 남자 손님이었지요.

뒤에 그 손님이 제 말을 제 아내에게 그대로 옮긴 탓에 제가 받았을 수모(?)는 당신이 생각한 이상이라는 말씀을 덧붙이도록 하고요.

그런 제 아내가 확실하게 기억력이 떨어진 현상이 오늘 나타났답니다.

“오마! 그럼 내가 몇살이야? 오마마…..”

14 정미생일

그런 아내를 위하여, 참 좋은 기억력으로 오래오래 살라는 맘으로 장모님이 끓여주신 갈비국에 넉넉히 넣은 당면국수를 점심에….

저녁에는 아직은 특별한 날에는 곁에 있는 아이들과 이태리 국수를….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이 어찌 알랴?

추수감사절 연휴를 참말 잘 쉬었습니다. Thanksgiving day 전날에 눈이 좀 오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집에 전기와 인터넷, 전화가 불통이 되었었습니다. 다행히 당일 늦은 밤 전기는 다시 들어왔지만 인터넷과 전화는 주일(오늘) 오후까지 나흘 동안이나 불통이었답니다.

다석강의전화는 휴대전화가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터넷이 끊어지니 저녁시간이 몹시 길었답니다. 컴퓨터나 TV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유영모선생님의 ‘다석강의’입니다. 제 정신 차리며 사노라고 틈나면 꺼내들곤 하는 책인데, 모처럼 사흘밤을 끼고 살았답니다.

유선생님의 말씀들을 읽으며 이즈음 두루 흐트러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생각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머리 속이 환해지는 참 쉼을 누렸답니다.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유영모님이 가르친 ‘뜻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맛의 믿음’만을 쫓게 되었을까?

왜 한인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뜻을 쫓아 살고자 했던 유영모’류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고, ‘맛 곧 돈과 권세의 누림만을 쫓는 이명박, 문창극, 이인호, 조용기, 김홍도……’류들이 창궐할까?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지금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 받고 조롱받는 이들에게  조용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 앞에서 조용히 가만있기만 하는 것일까?

왜? 자기 일에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들과 제 배불리우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내며 정, 경, 군, 관, 언, 학, 종교 등 제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악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시편 73:4)”는 세상이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마저 그들에게 솔깃하여 그들의 물에 흠뻑 젖어 들어서 한다는 말이,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고 할까?

왜?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시편 73 : 11-12)” 세상이 되었을까?

이제 저물어가는 2014년 오늘, 제 앞에 놓인 물음들에 대해 유선생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참 예수쟁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신 후, 유불선(유교, 불교, 선교)을 통달하여 꿰뚫고 그 곳에도 길이 있다하셨지만 끝내 참 예수쟁이로 살다가신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유, 독립, 통일, 공평, 평등 같은 거창하고 큰 것을 말씀 하시면서도 그것이 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발딛고 사는 현장에서, 내 가정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이루며 사는 예수쟁이가 되라는 권고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고 떠드는 이들이 세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모처럼 푹 쉰듯한 추수감사절 기간이었습니다.

인터넷은 다시 연결되어 이슬람 국가(IS), Ferguson사태, 세월호 유가족 등등 ‘하나님이 어찌 알랴?’는 세상은 다시 제 곁으로 왔지만 말입니다.

생애 최고의 가을

제목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대로 가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가을 오후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작은 사업체를 접고 은퇴 수순을 접는듯하던 벗이 땅을 일구기 시작한 것은 올 봄이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가 일구어 낸 농장에서 정말 찐하고 멋진 쐬주 한잔 붓고 마셨답니다.

가을, 맑은 하늘, 고추, 무우, 배추, 호밀 밭…

갓 따온 상추, 고추에 돼지 바베큐. 그리고 쐬주 한 잔!

정말 간만에 “Wolly Bully”에 맞추어 몸을 뒤튼 벗들의 모습이 아니어도 그저 좋은 가을 오후였답니다.

그 흥에 취해 있다가 상추 비닐 농장으로 들어가는 벗을 따랐답니다.

가을잠바로는 서늘한 기운이 도는 오후였는데 비닐농장의 거적을 벗기자 훅 다가온 열기를 맞으며 든 생각 하나랍니다.

오늘 쐬주 한잔은 환갑 나이에 허리 아픈 줄 모르고 한해 내내 땅을 일군 벗의 땀이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제가 정말 멋진 가을 오후를 즐긴 까닭이랍니다.

돌아와, 제 차 트렁크에 가득 실린 무우를 보며 벗의 한 해를 몽DSC01797땅 뺏어온 미안함으로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 생무우를 한 입 베어 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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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조선일보 – 그 야비함

주일 아침 이런 저런 지나간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변함없이 야비한 조선일보 글줄이 눈에 띕니다. <법정 소란이나 다를 게 없는 어느 판사의 막말>이라는 사설입니다.

‘어느 판사’가 전직 대통령을 죽이고, 현직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는 막강한 권력의 눈밖에 난 모양입니다. 바로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입니다.

사설의 내용인즉 김동진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유죄를 선고한 재판에 대한 의견을 법원 게시판에 올렸는데 읽어보니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거의 언어 테러 수준의 인신공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부 판사가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다.”며 “두려운 일이다.”고 맺음을 합니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옷 벗을 날도 얼마 안남은 듯 합니다. “두려운 일”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 조선일보의 행패가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어느 정도 두려운 일인지 김동진 부장판사가 올렸다는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답니다. 두렵기도 할 만한 글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 걸 보면 조선일보 아류의 권력이 아주 미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튼 김동진 부장판사의 글을 꼼꼼히 읽고난 후에 하고픈 말 한마디랍니다.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개 언론(인)이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는 사회야말로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모처럼 뉴스에 등장한 황석영선생 말마따나 아직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이 필요한 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은 김동진 부장판사가 남긴 글의 전문입니다.

K-48

<법치주의는 죽었다>

–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 김동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 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주일 아침, YAHOO 대문에 걸린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와 소개드립니다.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딱히 6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닐터이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닐겝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늘 가치 있는 것이거니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가능 또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메세지로 읽어 봅니다. 

소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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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60세 이상의 인구는 1980년 이래 두배로 되었고, 2050년도 까지 전세계 80세 이상인구는 3억 9천 5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장수한다는 것이 단지 숫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를 훨씬 넘어, 창조력과 야망으로 자신들의 삶을 부러움을 살 만하게 영위한 놀라운 10인을 살펴본다.

Frank McCourt, 문학

66세에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1996년에 발간된 책, “Angela’s Ashes”은 5백만 부가가 팔렸으며, 이 작품으로 McCourt는 퓰리처 상, ‘National Book Critics Award,’ ‘ABBY Award,’ LA 타임즈 ‘Book Award’를 수상했다.

A.C. Bhaktivedanta Swami Srila Prabhupada, 종교

69세에 ‘International Krishna Conciousness (ISKCON)을 창립했다.

Prabhupada는 1966년 7월 11일 ISKCON 조직을 뉴욕에서 등록했다. 그로 부터 11년 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세계를 14번 여행했다. 그 후 그의 저술은 76개국어로 번역되었다.

Mary Delaney, 예술

72세에 종이 콜라주(Paper Collage)를 발명했다.

그 후 10년 동안, Delaney는 식물학적으로 정확한, 종이를 잘라 만든 꽃 985점을 창작했다. 그녀는 조지 3세와 샬롯 여왕과 친분을 맺었으며, 이들은 Delaney의 말년에 윈저 궁에 처소를 제공해주었다. Delaney의 작품들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Laura Ingalls Wilder, 문학

65세에 선풍적 인기를 끈 ‘Little House’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Wilder는 “Little House on the Prairie (1935),” “On the Banks of Plum Creek (1937),” “By the Shores of Silver Lake (1939)”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책들은 원조 TV 시리즈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Estelle Getty, 연기

63세에 ‘The Golden Girls’에서 대대적인 명성을 성취했다.

그 때까지 연기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가, 쇼가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를 치면서, 7년 동안 방송되어 Getty는 일약 유명해졌다.

Fauja Singh, 체육인

89세에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을 달렸다.

Singh은 총 10번 마라톤 경주를 했으며, 100세때 토론토 마라톤에서 최고령 마라톤 완주자가 되었다. 2014년 나이가 102세 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7-8 킬로미터를 달리고 있다.

Clara Peller, 대중 문화

“Where’s the Beef?”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Wendy’의 얼굴이 되고, 대중 문화의 스타가 되었다.

1984년 81세의 나이에, 그녀는 ‘웬디’ 광고에 상징적 데뷰를 했다. 경쟁사의 빵은 크고 고기 덩이는 작은 것을 보며, 그녀는 큰 소리로 “Where’s the Beef?’ 라고 물었다. Clara와 그 캐치 프레이즈는 수지맞는 대중문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Grandma Moses, 예술

78세에 민속 예술가이며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1938년, 여행하던 한 예술품 수집가가 어떤 상점 창가에 있던 Moses의 그림에 주목했다. 그는 그 그림들을 뉴욕의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 전시했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녀의 그림은 연하장(greeting cards), 포스터, 자기 접시에 등장했다. TV 전기영화가 방송되었고, Grandma Moses는 1953년 타임지 표지 인물로 게재되었다. 101세로 타계했을 때, 그 소식은 미국과 유럽에서 전면 뉴스로 보도되었다.

Harry Bernstein, 문학

96세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수십년 동안 출판사의 거절 통지를 받은 후, 그의 회고록, “The Invisible Wall: A Love Story that Broke Barrier”은 영국 북부지역의 한 가난한 공장지역에서 유태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마침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Colonel Harland Sanders, 패스트 푸드

65세에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식당을 창업했다.

창업 9년이 지나 프랜차이즈가 600개에 달했을 때, 그는 KFC의 지분을 2백만 달러에 팔았다. 현재 그의 초상은 치킨 버켓과 전세계에 있는 KFC 상점 수천개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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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알렌이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불후의 명성을 성취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성취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예들이 보여주듯이, 적절한 나이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보기 

봄나물

지난 해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즐기는 줄 알았던 벗이 보낸 봄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릅, 부추, 취나물 등 그가 키워 거둔 봄나물들이었습니다.

봄나물

한국에서 오랜기간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온 이 벗에게 이민생활 초기는 그리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다 십 수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집 뒤뜰 텃밭 농사를 제법 규모있게 지었답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대폰도 잘 안터진답니다. 그 뒤뜰에 제법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각종 푸성귀 농사를 지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면 봄맛을 보곤 했었답니다.

그의 손길로 이룬 기름진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들로 식탁이 풍성해지는만큼 벗의 이민생활도 웃음 가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예쁜 며느리도 들인 후, 미련없이 사업체를 딱 정리한 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도 듣곤 하였지만 직접 연락은 두절한 상태로 지냈답니다.

한 두어 주전에 어느 식사자리에서 제법 도인(道人)이 된 그를 만났답니다. 머리를 길러 꽁지머리를 묶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농사짓고, 도기(陶器) 굽고, 분재(盆栽)를 키우며 살고파하던 그의 꿈들을 이루며 사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봄나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주일 아침입니다. 농사짓는 벗 덕분에 어머니와 장모에게 봄소식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참 좋은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두 어머니에게 봄나물 드리는 일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수영과 만세

지난 주일 오후에 정말 잠시 한순간,  그야말로 채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았던 책의 표지와 목차들이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답니다. 

필라에서 아는 이들끼리 저녁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답니다.(이 모임은 제법  뜻이 있다는 생각이라 언젠가는 따로 소개드리려 한답니다.) 

아무튼 그 모임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제 눈길을 끈 책이었답니다. 모임의 멤버 가운데 인쇄업을 하는 벗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쓴 이는 필라 지역 사람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만큼 제법 지역사회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하품을 할만큼 딱하게 생각했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김수영 문학상”에 출품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김수영그  책을 쓴 이의 평소 글로 보아 도대체 김수영시인하고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공화당 티파티(Tea Party)에 속한 이가 오바마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격이랄까, 아니면 만년 새누리당 지지자가 진보당 이정희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그런 참 맞지 않는 그림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이가 과연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사람인 줄은 알고 있는지,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수영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런게 두루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세월따라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1960년대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뒷걸음친 모습으로 변한 한국사회(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갈수록 점점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바로 비추어 보자는 생각으로 김수영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번째는1960년 9월 20일에 쓴 그의 일기이고, 두번 째는 그의 유고시 “김일성 만세”입니다. 

1.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2.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어준과 변희재

주말이라 좀 쉬노라고 여기 저기 온라인 사이트를 뒤적이다가 든 생각 하나랍니다.

김어준과 변희재. 

썩 다른 듯 하지만 아주 똑같은 캐릭터를 보면서 이즈음의 한국 사회를 쉽게 조망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저야 뭐 세상사  성서적 시각으로 보자는 쪽이니까, 그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지요. 

김어준과 변희재같은 젊은이들이 뉴스가 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가 아닐까요? 

두 사람의 생각과 삶의 방식, 그들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집단들을 보면 전혀 다르지요. 

그런데 살아가는 방식은 똑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바로 “뻔뻔함”, “상대 무시하기”, “유아독존” , 나아가 “소설쓰기로 덮어 씌우기” 등등 

이즈음의 한국사회를 표현하는 정형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시대정신까지 이런 예능인들에게 비추어보아야 하는 세상이 서글프답니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과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하고요,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해 가며 사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겠지요. 

한국(한인)사회 전반에 만연된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 속에서 ‘김어준과 변희재’ 같은 류의 “뻔뻔함”이 뉴스가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아무리 예능천국인 세상이라도, 예능화 시키지 말아야 하는 구석은 있는 것이겠지요.

(참과 거짓의 대척을 자꾸 예능화 시키는 이런 두 아이의 꼭두각시 놀음에 대해  “이 눔아!”하며 큰 소리칠 어른조차 없는 사회를 탄하며.)

아내와 샴푸

이제 제발 샴푸를 쓰라는 아내의 성화에 샴푸로 머리를 감았답니다. 물론 샴푸를 사용한 것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다만 거의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지요. 

그냥 세수비누를 사용해 왔지요.  한 삼십년 된 듯 합니다. 세수비누로 머리를 감은 세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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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는 빨래비누를 사용했었지요. 거의 서른 나이까지 제가 머리감을  때 즐겨쓰던 비누였답니다. 누런색 사각 덩어리 빨래 비누였답니다.  그 놈으로 머리를 감고 나면 머리속까지 시원했답니다. 

그 빨래비누를 구할 수 없어서 사용한 것이 세수비누랍니다. 

샴푸는 영 제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답니다. 아내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약간의 세치라고 할만한 흰머리카락은 있지만 아직 검고 윤기있는 머리털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나이 육십에 이제 샴푸로 머리를 감습니다. 

저는 이게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아내의 말은 듣는 게 편할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랍니다. 

누구는 새로 시작하는 나이라지만, 늙어가는 나이이기도 한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