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성(聖)과 속(俗) -그 마지막 이야기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로마 구시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두어 시간은 골프 카트를 타고 안내자인 Willy에게 그 거리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 들으며 로마의 옛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로마의 신화와 전쟁, 권력 암투, 정복, 제국이 품은 종교 또는 종교가 품은 제국에 대한 역사들을 떠올려 보며 그 거리들을 걸었다. 때론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비록 그 유적지는 가보지는 못했다만 사람 베드로와 바울의 여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도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겪은 일이다.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고 남들처럼 분수를 뒤에 지고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애띤 얼굴의 젊은 한 쌍의 동양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분들 이시지요?” 누구랄 것도 없이 “예’라고 응답했더니, 아이들이 하던 말, “저희들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준 후 물었었다. “어디서들 오셨나요? 서울 아님 다른 곳?” 그들이 한껏 웃음을 띠고 했던 대답이었다. “저희들은 일본사람이예요. 일본에서 왔어요.” 깜작 놀라 우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아이들의 이어진 대답. “한국 드라마 보며 배웠어요.” 그 순간 아내의 뜬금없이 빨랐던 반응, “아! 겨울연가?” 아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건 오래 된 것이라 잘 모르고요…. 이즈음 거.”

그랬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의 위세는 최근 십 수 년 사이 한국을 새롭게 각인 시키는 촉매였다. 아내가 삼십 수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동네 한국학교의 큰 변화도 바로 한국 드라마와 K-pop이 만든 것이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한국계 다음세대들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반한 비한국계 미국인들이므로.

“감사합니다”하며 떠나는 일본 아이들이 더 예뻐 보였다. 이즘 애들은 계집아이나 사내녀석이나 어찌 모두들 그리 예쁜지.

나는 그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빌었었다. ‘그저 이 순간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봐주실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몇 번은 더 이런 여행을..”

카트를 운전하며 우리들을 안내했던 멋진 사내 Willy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이태리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이집트에 대한 자부가 크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우리들의 여행의 준비자이자 이끄는 대장이자 일꾼인 최권사는 다음 여행 예정지로 이집트를 꼽곤 했었다. 그 말이 생각나 Willy 앞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들의 다음 여행 예정지는 이집트라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요리강습 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권사의 뛰어난 발상이었고 우리들의 여행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에게 파스타 만들기를 가르쳐 준 Romina 선생댁은 바티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 넷과 뉴욕에서 영화배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 한 명, 그렇게 다섯이었다.

우리들은 Romina 선생의 시범을 보며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들거나 만두를 빗듯 라비올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저녁상을 함께 만들고 나누는 멋진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만 하여도 교회는 ‘거룩함(聖)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었다. 머리 굵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룩함(聖)’과 ‘사람살이(俗)’가 구별되어 따로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 이후 참 오랜 세월 ‘사람살이(俗)’하며 줄곧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노년의 초입, 성(聖)과 속(俗)은 그저 늘 함께 하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하여 또 감사! 오늘에.

여행 – 성(聖)과 속(俗) -6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농촌 풍경은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내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긋하고 조금은 여유로웠던 마음이 로마에 이르러 완전히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뉴욕이었고 서울이었다.

우선 숙소를 찾아 가는 길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온전히 구글신에게 의존하여 길 찾기에 나선 여행이었고,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향과 거리와 시간을 알려주는 구글신이였지만, 때론 길 찾는 신도의 아둔함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법. 로마에 이른 우리 일행의 모습이었다.

어찌어찌 구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티켓을 구매하고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지하철 입구로 향하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리스본을 거쳐 베네치아로 오던 비행기에서 만난 두 노인들이었다.

우리들은 그 노인들이 친구 사이인 줄로 알았었다만, 알고보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두 부자는 보스톤에 살고, 가늠컨대 아버지는 팔십 대 초 중반, 아들은 육십 전후 또는 초반의 나이인 인도계 미국인들이었다. 아들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 얼마 전에 은퇴 하였다고 했다.

그들 부자와 함께 전철을 타기 위해 입구에 다달았을 때였다. 입구에 서있는 경찰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이 입구가 우리들이 가려는 숙소를 향해 가는 것이냐고. 그는 친절한 어투로 ‘그렇다’고 대답하며. ‘소매치기 조심하시오. 돈과 여권이 들은 가방은 앞으로 향하게 매시고 꼭 잡고 있으시오!’로 정말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두 노부자와 우리 일행은 입구를 통과해 전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휩싸여 걷고 있는데 누군가 역무원 비슷한 처자가 우리들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를 했다. 사단은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젊은 처자들 서넛이 갑자기 나타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는 고작 대여섯명이 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더더군다나 우리들은 모두 끌고 다니는 짐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던 터였으니, 다같이 타기엔 무리였다. 갑자기 나타났던 젊은 계집들이 ‘밀어 밀어’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일행은 다음에 타자고 내렸고, 두 노부자와 젊은 아이들이 타고 내려갔다.

잠시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는데 그 계집 아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만 했었다만 … 우린 몰랐었다. 그렇게 다시 꽉찬 상태로 탄 엘리베이터 속, 나는 도둑 방지용 가방이라는 선전을 듣고 산 가방을 앞으로 매고 있었고, 그 가방안에는 우리 일행 네 명의 여권과 내 신용카드와 아직 환전하지 않은 우리들의 여행 경비가 들어있었다. 계집아이 하나가 나를 밀치는 통해 싸한 느낌이 들어 밀어내며 가방을 꼭 움켜 잡았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찰 두 명이 물었다. ‘안전하신가요? 문제 없으신가요?’ 그 순간 계집아이들은 후다닥 튀였고 바닥엔 아내의 빨간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꼭 쥐고 있었던 도둑 방지용 가방은 약 1/3 쯤이 열려 있었다. 잠시 식은 땀이 주욱~  다행히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만, 그 노부자는 현금 이백달러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비명 소리를 지르는 피해자와 앞에 있는 이의 등짐 속에 손이 들어 갔다 나오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참 주저 않고 싶은 현장이었다.

로마역에서 내려 내 눈길을 처음 끈 것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황금빛 예수상이었고….. 그리고 소매치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을 향하면서도 우리들은 그 소매치기 현장을 이야기하며 그저 조심 조심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안내하기로 한 안내원을 기다리며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초입 사거리에 위치한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차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 ‘저거 좀 보라!’고 다그쳤다. 우리 일행의 눈길이 닿은 곳은 바티칸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사거리 한쪽 끝에서 마치 소처럼 굵은 오줌발을 내갈기고 있는 사내였다. 사거리엔 오가는 차량 뿐만 아니라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우리처럼 식당이나 카페 바깥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냥 녀석의 튼실한 고추를 직관할 수 있는 거리였다. 차마 사진을 찍진 못했다만 녀석의 그 늠름한 못난 표정은 내 기억 속에…. 놈과 같은 놈들 소식을 뉴스 속에서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이 보고 사는지…

그야말로 댄디한 회색 양복 차림에 썬그라스를 낀 녀석은 오줌을 갈기며 사방을 천천히 휘둘러 보기도 했는데, 마치 제 놈이 다윗상인 듯 놀며 그 짓을 끝낸 녀석은 아우디 차를  몰아 휑하고 떠났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벌거벗은 아름다움을 돌에 새겼건만, 그걸 보고 자란 이즘 애들은 추한 것들만 보고 몸에 익혔나보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너무 노랭이 짓 하는 문화 탓일 수도 있겠고….

삼천 년 이어 온 이야기의 도시 로마를 만나기 전에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이야기들을 겪었다.

아하! 로마! 그 성(聖)과 속(俗).

여행 – 성(聖)과 속(俗) -5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란다. 젠장! 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 한참을 가다가 ‘잠궜었나?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하며 오던 길 되돌아 보는 일이 잦아지는 내게 그 이름은 너무 길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으로 줄이면 아직은 기억할 만하다.

두오모(Duomo)라는 뜻이 대성당 또는 하나님의 집이란다.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집 근처를 열심히 걸어 다녔다. 피렌체 대성당을 비롯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재래시장인 중앙시장(Mercato Centrale) 등 이었는데 그야말로 꽉찬 하룻길 걷기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거기에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 까지 460여개 계단을 오르 내렸건만 우리 모두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나 나나, 최권사 내외나 아직은 괜찮은 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극도로 대비되는 두가지 모습들에 대한 생각은 아직 정리 중이며, 좀 공부를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게 아니다. 대리석 한 장에 바들바들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그 수많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들과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뭔가 뜻과 이야기가 있는 듯한 미술품들과 곧 숨을 쉴듯한 조각들,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듯한 작업으로 이루어진 천장화와 벽화들…. 도대체 어떤 열정과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유물 하나. 그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정말 열악하기 그지 없는 도구들. 그 가늠할 수 없는 사이를 메꾸어 나간 노력은 오로지 누군가 바로 사람이 인내하지 못할 극도로 험한 노동이었을 터.

그렇게 피렌체는 내게 무겁게 다가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렌체가 준 마지막 절정, 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윗상(David of Michelangelo). 가히 창조에 버금 가는 듯한 사람의 솜씨. 쯔…. 내가 뭘 알까만.

대성당과 시장은 겨우 몇 걸음 떨어져 있었을 뿐. 하나님의 집은 늘 사람 사는 세상 가까이 있듯.

뿐이랴! 천재나 바보나 신의 잣대에 올라타면 다 거기서 거기일 터.

하여 피렌체 공부는 좀 해야할 터.

여행 – 성(聖)과 속(俗)-4

화분이 아닌 땅에 뿌리를 내린 화초나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돌의 도시 피렌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갈릴레오의 도시이며 마키아벨리의 도시이기도 했던 피렌체. 피렌체는 돌의 도시이자 ‘거대한 돈과 권력의 도시’, 그 돈과 권력에 항거하는 ‘풍자의 도시’로 내게 다가 왔다.

우피치 미술관(Uffizi Gallery, Galleria degli Uffizi)을 안내해 준 RaFael은 그야말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단지 우리 일행 네 명을 위해 그는 정성껏 피렌체와 우피치와 메디치 가문과 르네상스와 신이 된 종교와 돈과 권력 나아가 그것들을 풍자하는 예술에 대한 설명에 온 열정을 다했었다. 그는 피렌체를 휴머니티(humanity)와 휴머니즘(humanism)의 도시로 소개하려고 많은 애를 썻다.  나는 그런 그의 노고 덕에 종교와 돈과 권력의 역사 그리고 그에 항거하는 사람 사랑 곧 진정한 신의 역사를 이루고자 한 옛 사람들의 노고를 맛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참 재밌었던 사내 RaFael을 만난 것은 이번 여행에서 맛 본 은총 중 하나다.

미술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설명하던 RaFael의 말이었다. “저기 가면 금, 은, 다이아몬드 등 보석상들과 유명 시계점들이 저 다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실거예요. 근데요. 처음에 저 다리엔 정육점 등 서민들이 찾는 음식점들이 많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런 가게들이 모두 문닫고 보석상과 시계상으로 바뀌었데요. 왜냐하면요. 도시의 돈을 다 움켜잡고 있는 메디치 가문에서 그랬데요. ‘돈 많은 우리 가문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가게만 장사하게 하자’고요.” 물론 우스개 소리였겠다만 나는 사람사는 세태를 풍자한 그의 우스개가 단지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았었다.

미술관과 베키오 다리 등을 구경 한 후 저녁식사를 위해 어느 골목의 그럴싸한 식당문을 두드렸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작지만 잘 꾸며진 식당이었다. 분명 영업시간 중이었는데 가게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을 흔드니 종업원이 문을 열며 물었다. “예약 하셨나요?” ‘아니’라는 우리들의 응답에 잠시 난색을 표하는 듯 하더니, “몇 분이지요?”라고 물었다. ‘넷’이라는 응답에 또 잠시 멈칫 하더니만 “들어 오시지요.”했다.

그렇게 들어 간 식당엔 우리들이 첫 손님인 듯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들어오는 손님들 마다 우리와 똑 같은 대화와 종업원의 표정과 몸짓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작은 가게 안은 이내 만석이 되었는데 내가 들은 한, 딱 한 팀만 예약 손님이었을 뿐, 나머지 모두는 우리처럼 지나가다 들어 온 손님들이었다. 참으로 뻔뻔한 상술이었늗데, 면벌부(또는 면죄부) 상술로 도시를 이룬 후예들 답다는 생각으로 그냥 많이 웃었다. 그 날 저녁 음식도 참 맛있었다.

여행의 참 맛은 밤거리에 있다던가. 그 날 피렌체의 밤거리에서 우리 일행은 잠시 청춘이었다. 거리의 악사들 연주에 맞추어 무리 지어 춤을 추던 한 떼의 젊은이들을 보며 몸에 시동을 걸던 아내가 그 무리에 섞여 춤을 추고 악사들과 함께 북을 두드렸고 우리는 한껏 즐거웠었다.  

허나 참 바보같기도 하지. 기껏 사진을 찍다가 흥에 취한 아내 모습을 담을 생각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으니. 쯔쯔…본래 바보였는지도.

하여 잊지 못할 피렌체의 밤.

길동무- 그 은총에

생업을 내려놓는 은퇴는 아직 계획에 없다만 사회적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쪽으로만 본다면 일찌감치 은퇴한 셈이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고, 이런저런 세상일에 나서기 좋아했던 시절을 마감한 때는 기억이 가물 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 그런 쪽으로 보자면 조기 은퇴한 편이고, 어쩌다 사람들이 제법 모인 곳에 갈라 치면 입 꾹 다물고 있자고 다짐을 놓곤 한다.

이즈음 들어 딱히 한인들을 여럿 만나는 경우라야 필라델피아에 올라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나 윤석열 무리들을 몰아내자는 마음으로 모이는 ‘필라 민주 동포 모임’ 뿐이다. 이 모임에서도 그저 머리 수 채우고 박수 칠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없다.

아내는 아직 사회적 인간관계가 나보다는 넓은 편이다. 교회 생활도 꾸준하고 한국학교 선생도 열심이고 아직은 활발히 지내는 편이다.

나는 이런 생활이 두루 편하고 좋다. 아니 편하고 좋다기 보다는 내 나이, 내 수준, 내 형편에 여러모로 내게 걸맞은 생활이라는 생각으로 산다. 비록 시늉 짓일지라도 이런 생활에 감사를 곱씹으려 노력하는 쪽이다.

내 값싼 감사의 댓가로 누리는 신의 은총은 늘 지나치게 크다. 짧은 여행길을 돌아보니 그 은총의 크기는 가히 가늠 못할 만큼 크다.

오랜만에 만나 함께 여행길을 걷고, 더불어 먹고 마시며, 어제 오늘 내일의 이야기들을 서로 고개 끄덕이며 듣고 나눌 수 있는  길동무가 있다는 사실 – 이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그 보다 큰 은총이 또 있으랴!

그저  감사 또 감사.

-2023 퀘벡 여행 후.

<자연(自然)에>

짧은 여행 후 맞은 일상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그래도 여행을 즐긴 까닭인지 그 분주함 조차 여유로웠다. 주말에는 아들, 딸 내외까지 찾아와 마치 긴 여행이 이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을 타고 논 듯하다.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하다 절로 읊조려지는 감사, 자연(自然)에 대한 감사다.폭포와 깊은 숲 – 계곡과 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와 숲과 물과 구름과 안개가 서로를 품어 만들어 내는 자태에 홀렸던 시간들, 그저 감사다.

<이 대지(大地) 자체인 자연만이 유일한 만병통치약(Nature, the earth herself, is the only panacea>이라는 Henry David Thoreau의 노래가 오늘 내 것이 된 듯.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몸과 맘을 위한 만병통치약을 흠뻑 들이키며 즐긴 여행길에 다시 감사!

이틀 연휴 잘 쉬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랬다. 일주일에 72시간은 그저 평범했거니와,  84시간 아니 아흔 시간 까지도 일하며 그러려니 하며 살았던 이민 세대다.

딸아이는 어릴 적에 내 가게를 ‘아빠 집’이라고 했었다. 그나마 내 업은 일요일 하루는 쉬었다만, 일년에 쉬는 날이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일에 매어 사는 이들이 넘쳐났던 이른바 이민 일 세대 친근했던 얼굴들은 이젠 떠나고 없거나, 은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업으로 한정 짓자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오래된 현업 일꾼인 듯하다.

딱히 특별한 재능도 없거니와, 이렇다할 취미나 즐기는 놀이조차 없는 나는 그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다만 일하는 시간은 할 수 있는 한 줄일려고 하고, 내 몸과 맘에 맞게 쉬며 즐길 수 있는 일을 찾고는 있다.

에미 애비 된 마음이 다 엇비슷하듯 나 역시 우리 애들만은 우리 세대처럼 일에 매달리지 않고도 삶을 즐기며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암튼 오늘 내게 주어진 이틀 연휴 하고픈 일 다하며 잘 쉬었다.

그 중 하나, 검사 진혜원이 쓴 <검사의 검찰일기, 진실과 정의에 대한 성찰>을 차분히 완독한 일이다. 대충 한번 훑었다가 틈나면 완독해야지 미루어 두었다 마친 일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언제나 그렇듯 내가 놓치지 않는 희망을 보았다.

글쓴이 진혜원이 이 책에서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화두((話頭) 둘은 사람과 민주주의였다. 책에 상당 부분이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풀고 있었는데 그 근본은 바로 사람에 대한 통찰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 그는 몇 번에 걸쳐 이렇게 강조헀다. “귀찮아야 민주주의고 꼼꼼해야 속지 않는다.”

튜립 구근들을 거둔 자리에 다알리아 구근들을 심고, 진혜원의 책장을 덮은 후 바라 본 하늘, 내 눈이 닿는 끝에서 끝 까지가 모두 내 땅인 양 부자가 된 듯한 쉬는 날에.

5.29.23.

동무에게

시간이 바뀌어 낮시간이 사뭇 길어진 날, 흙과 함께 놀았다.

비록 두 내외가 일구는 농원이지만 내겐 대농장 주인인 벗이 한 번 심어 보라고 건네 준 묘목들을 심었다. 매화, 무궁화, 배나무, 블랙베리, 오미자 등속들이다.

‘비록 작은 텃밭이지만 흙과 놀 때 잡념이 없어 참 좋다’는 내 말에 벗이 내게 건넨 가르침이다. ‘진짜 잡념을 없애려면 잡초를 뽑아! 그게 잡념 떨쳐버리는 지름길이지!’

오늘 흙과 놀다가 문득 그의 교훈을 되씹어보니 그게 삶의 진리였다.

곡식이든지, 푸성귀든지 아님 꽃이나 나무든지 일테면  그게 사는 멋 또는 맛이라고 한다면 그를 방해하는 잡초의 훼방은 얼마나 끈질기고 강하더냐!

그저 무심히 그 잡초 없애는 일을 동무 삼는 일, 그게 바로 흙과 진정 어울려 노는 일이 아닐까?

그 한 해의 동무 찾아 텃밭에 올해 첫 씨앗도 뿌렸다. 상추, 케일, 시금치, 고들빼기 등이다.

늘 함께하는 깨동무가 있다는 생각으로 걱정없이 씨뿌리는 하루 하루를 누릴 수 있기를…

벗에게 그리고 내게.

+

연휴(連休)에

지난 주초 사나흘 이어진 폭염과 예기치 않게 쌓인 세탁물 처리로 온몸에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삼십 수년 간 이어져 온 일이지만, 세탁소의 첫 무더위는 아직도 여전히 힘들다.

그렇게 맞은 연휴 이틀, 틈나면 누워 쉬었다. 오라고 했던 아이들에게는 다음 기회로 하자고 미뤘고, 초대받은 곳에는 미안함을 전했다. 아직 재활원에 계신 아버지 찾는 일도 큰 맘 먹고 걸렀다.

토요일부터 누워 긴 잠을 누렸으니 가히 사흘을 쉰 셈이다. 내가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지만 아직은 복용약이 전무하여 약과는 친숙하지 않아서인지 진통제 한 알 먹고 모처럼 제법 긴 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주 깨끗하게 가뿐하지는 않았으나 견딜 만 하였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연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런 저런 계획했던 일들에 빠져 보았다. 될 수 있는 한 더디게 천천히 그저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맘으로.

저녁상을 물리고 뒤뜰에 나앉아 새소리 들으며 오늘에 이어진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며 한참을 보내다.

그저 감사다.

연휴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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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축복

노동절 연휴가 끝나간다. 여느 해 같았다면 세탁소가 활기를 띄는 계절을 맞아 마음이 분주해지는 시기이지만 올해는 그럴 기미가 전혀 없다. 가게 일은 그저 강태공이 되어 세월을 기다릴 뿐이다.

연휴 사흘 동안 빡센 몸 노동을 즐겼다. 나 혼자 들기 버거운 나무 목재들과 자갈과 모래 그리고 돌덩어리들과 땀 흘리며  씨름하며 보냈다.

지난 한달 동안 틈 나는 대로 땅을 파고 고른 땅에 지주를 세워 deck을 만들고, 자갈과 모래를 다진 땅 위에 pavestone을 깔아 patio 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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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계획대로 정말 잘 쉬었다.

삼시 세끼와 간간히 특식까지 내 쉼의 원천이 되어준 아내에게 감사다. 한국학교 동료가 주었다는 포도는 쉼의 농도를 더해주는 설탕물이었다.

체질에 맞지 않아 잘 입에 대지 않던 맥주의 시원한 참 맛도 많이 즐겼다.

노동이 곧 쉼이고 창조이자 사랑이어야 한다고 외쳤던 이가 있었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다.

신과 내가 노동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뭔 크고 엄청난 일들이 아니다. 신과 나 사이에 중간자 없이 일에서 쉼을 맛보고 그 일을 통해 사람살이 기쁨을 맛본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다.

쉼이든 일이든 신 앞에서(또는 신 앞에 선 내 모습에서) 하루의 즐거움을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