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餘裕)

입춘도 지나고 내일 모레면 대동강물도 녹는다는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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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겨울이 이렇게 지나간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여라. 주(週)단위의 이 곳 생활이 시간의 빠름을 더욱 재촉한다. 엊그제가 일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그 빠른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엄벙덤벙 생활의 켜만 늘어간다. 한참 일할 나이에 삶의 여유 운운은 자못 사치일 수도 있지만 때론 조금은 쉬었다 갔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업종에 따라 생활양식과 시간 씀씀이가 다르겠지만 영세 소규모 업종이 주를 이루는 많은 동포들의 삶은 큰 차이없이 엇비슷 할 것이다. 세탁소 10년은 초등학교 시절 생활계획표보다 더욱 단순하게 하루를 묶고 생활에 틈을 주지 않는다.

급한 성정(性情) 탓도 한 몫이지만 눈뜨기 무섭게 고양이 세수하고 가게로 나가 보일러를 켠다. 빨래를 하고 뒷 일 처리하다 이따금 아내가 자리를 비우면 손님들과 싱갱이도 하다가 옷배달 하다보면 어느덧 하루가 맥없이 끝나 버린다. 게다가 동네 일 한답시고 이렇게 저렇게 나선 일에 짬을 내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 해가 눈 깜작할 사이다. 하여 이렇게 짬 내는 일조차 내겐 공연한 사치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가까이 계시는 부모님들께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매일 전화 인사드리는 것으로 자위하고, 결혼 15주년 때 아내에게 약속한 여행계획은 20주년으로 미루었건만 눈 앞에 다가 온 20주년도  무망할 것이라는 예감이고, 아이들 내 품 떠나기 전 함께 해야 할 일들도 그냥 늘 계획일 뿐 하루 해, 일주일과 함께 또 내일로 미루어지기 일쑤이다.

수녀 이해인 시집을 들척이다가 두 아이들을 부른 것은 달포 전 주일 저녁이었다. 그녀의 영역시 몇 편을 골라 아이들에게 타자를 부탁하였다. 잠시 후 아들 녀석은 제 애비 부탁이라 마다치 못하고 억지로 건성건성 타자한 시편들을 건냈으며, 딸아이는 제법 맵시있는 활자체까지 선택하여 예쁘게 일을 마치었다.

딸아이와 마주 앉아 포스터용지에 시편들을 오려 붙이고 지난 가을 앞뜰에서 주어 온 잘 마른 낙엽 두어장과 아내가 벽단장한 마른 장미 두 가지를 가지런히 붙여 근사한 시화지를 만들어 이튿날 가게 카운터 옆 빈 벽에 딸아이와 함께 만든 작품(?)을 전시했던 것이다. 간혹 손님들이 ‘누가 쓴 시냐?’, ‘참 좋다’며 복사해 달라고 하며 관심을 보일 땐 내가 제법 대견한 생각을 하였군 하며 자족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아내는 한국학교 교사 일로 자리를 비우고 빨래하랴, 손님 맞으랴 반은 얼 빠져 일하는데 손님 한 분이 기다리는 사이 그 시편들을 읽다가 <내 혼에 불을 놓아/ Kindle my spirit>라는 시를 가르키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어쩜 이렇게 맑은 영혼이 있을까? 이 시를 함께 나눌 수 있게 한 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네가 누리는 여유가 부럽다.”고 한 마디하고 떠난 후 그 여유(餘裕)란 말이 머리 속에 오래 남아 떠나지 않는다.

늘 정신없이 어지럽게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내 삶 속에도 이웃이 보기에 ‘여유’가 있다는데야?

그렇다. 스스로 눈치 채지 못하였을 뿐 내가 얼마나 많은 여유를 누리며 사는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이 내게 주신 ‘여유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 온 것이다.

구걸할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데 신이 주신 이런저런 작은 여유들을 찾아 감사해 보는 일도 바쁘고 바쁜 이민 생활을 이겨내는 삶의 한 지혜일 듯 싶다.

*** 오늘의 사족

내가 윗글을 쓴 것은 2001년 2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만 12년 일개월이 흘렀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변함없는 세탁소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두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였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병원출입이 잦으시다.

아내는 토요일이면 여전히 한국학교를 나가고… 교장을 맡고 있는데 이제 임기만료가 다 되어간다.

나는 여전히 손님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를 보낸다. 마치 삶의 여유가 있는듯이…

진달래와 개나리

“꽃샘추위” – 추위까지 사람인양 새암을 부려 꽃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 말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에 대응하는 영어라야 “March Wind”(삼월바람, 삼월에 부는 찬 바람) 정도랄까? 자연을 관리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동양사상 또는 도교사상을 깨놓고 비교할 수 있는 듯하다.

‘겨울 다 갔지!’하였더니 눈이 제법 내려 이틀 장사 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옷 배달 길, 그 잔설(殘雪)입은 나무가지에 봄눈 튀운 것 보았다. ‘꽃샘추위였군’ 혼잣말하며 이미 봄이 왔음을 느낀다. 이 눈 녹으면 우리집 앞뜰 관상수(?) 개나리 노오랗게 활짝 피고 뒷뜰 진달래 붉게 물들리라. 더하여 빨래감 잔뜩 쌓이는 세탁소 제 철 만나리라 꿈이라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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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 70년대 이후 한국 대학가에서 소위 데모노래로 유행했던 ‘진달래’의 가사이다.

‘가시는 걸음 걸음’ 뿌렸던 소월의 님에 대한 한이 젊음의 한, 민족의 한으로 나아가는 소재로 쓰인 진달래꽃이다.

70년대 한 때는 진달래를 노래하는 것조차 불온시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내 고향 서울 신촌 안산에 조차 흐드러지던 그 진달래를…

산철쭉, 참꽃나무, 두견화(杜鵑花), 영산홍(迎山紅) 등으로 불리는 진달래는 한반도 및 만주지방 산간 양지 바른 곳에 잘 자라 이른 봄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진달래 꽃으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탕을 만들어 먹거나 화전(花煎)을 부치거나 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삼월 삼짓날 음식은 이 진달래꽃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진달래로 만든 음식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진달래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술은 약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약용으로도 쓰여 민간 및 한방에서 강장, 이뇨, 건위 등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처방하여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달래는 봄이면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더불어 정신’ 곧 함께 뽐내는 자태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모진 추위와 가뭄에도 거뜬히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그 멋을 더해 준다 하겠다.

‘나리 나리 개나리’- 여기서 나리는 홀로 피는 서양꽃이요, 개나리는 무리지어 피는 우리 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인지 개나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이 개나리야말로 한국이 원산(김태정이 쓴 책 ‘우리꽃 백가지’에서)인 식물로 한민족이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특산물이다.

봄이면 어디서건 노오란 꽃잎 내밀어 제 있음을 자랑하는 개나리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해 가지가 땅에 닿기만 하여도 곧 뿌리가 내리고 가지를 잘라 놓으면 그 마디에서 뿌리가 나온다. 개나리 또한 한방이나 민간에서 약재로 써 종창, 임질, 이뇨, 치질, 부스럼, 해독 등에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여 쓴다. 이 또한 내 고향 신촌에 흐드러졌었다.

우리집 앞뜰 관상수라 했다.

이 땅에도 어디서건 볼 수 있지만 내 뜰 개나리는 신촌 안산의 개나리다. 뒷뜰 흐드러질 진달래는 소월의 진달래요, 그 묏등마다 스러져갔던 내 젊음의 이야기들이다.  더하여  그 끈질긴 생면과 이웃에게 베풀 약용, ‘더불어 함께 해야만’ 아름다움은 우리 다음세대에게 넘길 꽃의 아름다움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 우리 세대 아니면 다음 세대 아니 그 다음 세대라도 무리지어 필 진달래, 개나리꽃을 기다리며.

(2001. 3. 1.)

*** 오늘의 사족

이 땅, 이 이민의 땅을 살아가는 모오든 내 피붙이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개나리, 진달래처럼 생명력 강한 삶들을 이어 가길…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하루 저녁 술값으로 수백만, 수천만을 쓴단다. 천만 단위의 옷을 심심풀이로 산단다. 값비싼 외제를 제 때 손에 못 넣으면 비행기 타고 가서 사 온단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단다.

“IMF가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있는 놈, 없는 놈 구별이 확실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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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서울 강남을 활개치고 다니는 그들을 일컬어 ‘황금족;이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 제 놈 배부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 등가죽 붙는 꼴 보고 싶은 생각 들었을까? 분 삭히고 곰곰 생각하면 여기 사는 우리라서 자유로울까?

예수 살아 생전에 제일 미워하던 이들은 바리새인이었다. 오죽 미워했으면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 하였을까? 그들이 누구였나? 율법학자라고? 아니다. 이른바 소시민 계층으로 율법을 헌신적으로 따른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왜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을까?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율법 특히 안식일법, 십일조법은 밥깨나 먹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누렸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하였다. 그들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비정함과 교만이 예수의 미움을 샀다. 제 잘난 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보다 뒤쳐진 이웃을 뭉개려고 하는 그 맘보가 예수 보기에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한 것 아니겠는가?

그 보다 먼저 들사람 세례요한이 있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광야에서 외친 그 소리가 어디 그 곳으로 몰려든 지치고 찌든 인생들에게 한 소리였겠는가? 예의 그 바리새, 귀족, 제사장들 그 때 있고 누린다는 자들에게 한 소리였지.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갔다. 여우라 불렸던 헤롯이 그 광야의 소리 막고자 요한의 목을 친 것이다.

유대 역사의 기록자인 요세푸스는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2000년간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떠 돌게 된 원인(遠因)은 바로 이 들사람 요한의 처형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들사람 소리, 들사람 정신 죽이자 나라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역사 이래 930여 차례의 외침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반도에 한민족이 꿋꿋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들사람의 얼 곧 야인정신, 예언자정신과 함께 했던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해방 후 백범이 있었고, 죽산이 있었다. 장준하가 뒤를 이었고 늦봄 문익환이 그 길을 갔다.

그들이 외쳤던 소리는 “더불어 함께 가야만 하는 민족”이었으며, “사람이 사람됨 찾자”는 정신운동이었다. 그 소리 누가 없앴는가? 그 정신 누가 죽였는가? 그 얼 누가 땅에 묻었는가?

“오직 잘 살아 보자”는 구호와 “하면 된다”는 그 군대정신에 눈 먼 우리 모두가 죽였다. 무엇보다 본래 도둑심보인 정권이 죽였다. ‘때려잡자 공산당’과 ‘까부수자 미제 괴뢰’의 그 얼 빠진 구호에 혹했던 남북 우리 모두가 죽였다.  권력이 다 무엇인가? 허가낸 도둑 아니겠나? 오죽하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라 세우지 말라 일렀겠나? 그러면 백성(인민)들이 알아 차려야 할 일이다.

아직도 김씨정권, 노씨정권, 전씨정권 탓하는가? 이씨정권 아니 아무개정권이 들어선들 무에 달라지겠나? 거기 사는 백성(인민)들이 정신 차려야 할 일이다.

그 들사람, 그 얼, 그 정신 언론이 죽였다. 교묘한 언설로 무지한 백성들 눈 가리고 이리저리 우우 몰려 다니게 해 놓곤 제 몸둥이 키우기에 바빳던 언론이 죽였다. ‘민족이 하나여야 한다’는 들사람 소리를 ‘공산당과 하나 되잔다’고 나발불며 뻘건 칠해서 죽였다. ‘잘 사는 것 보다 옳게 사는 것이 먼저다’는 들사람 소리 뚝뚝 잘라 ‘잘 사는 게 나쁘단다’ 통단으로 뽑아 돌팔매 유도해 죽였다.

아니다. 그 소리 종교가 죽였다. ‘이 땅은 잠시 뿐’이라며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가르켜 모두 얼 빠져 쳐다보는 사이 제 놈 첨탑만 높이고, 국보급 사찰 소유에 급급했던 종교가 죽였다. 이 땅 별 볼 일 없으면 제 놈이나 하늘나라 먼저 가지 않고 이 땅에 발 붙여 살아야 할 백성들 홀려 구름같은 하늘타령이나 한 종교가 죽였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가 죽였다. 우리 모두가 죽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사생결단식으로 ‘잘 살아 보자’고 달려 온 우리 모두가 죽였다.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어디 ‘황금족’이 서울 강남 땅에만 활개 치겠는가? 한반도 전체 세계 구석구석 들사람 죽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이 황금족 되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위만 바라고 아래를 짓밟는 사람들이 ‘바리새’라  하였다.

나를 추스리고 내 민족을 추스릴 소리, 들사람 소리 살려 내야 한다.

모가지 드리워 붉은 피 흘릴지라도 크게 외칠 들사람 소리가 그립다.

한반도에.

여기서 한반도로 사는 우리에게.

(2001. 2. 22)

*** 오늘의 사족

그랬다. 2001년 어느 날 한국신문을 읽다가 황금족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써 본 글이다.

오늘 2013년 어쩜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한국이나 조선을 향해 무어라 할 처지와 입장이 아니다.

여기 이민의 땅에 뼈를 묻을 것이고, 이 이민의 땅이 내 나라인 사람이다.

어찌하리! 그럼에도 한민족인 것을.

여우 헤롯, 이천년 전에도 동물에 비교된 권력자가 있었고 그가 나라를 말아 먹었단다.

참 아프다. 때론.

포기하지 말자

DSC_0515_600w제 스스로에게 해보는 말입니다.

몇년 전 Daum에 블로그를 만들고 한 일년 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하다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답니다. 그래 그만 두고 그 뒤로는 주로 카페(http://cafe.daum.net/kimyoungkeun )와  종이잡지인  세탁정보에 글을 써왔답니다.

세탁인들을 상대로 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 업에 종사하는 분들 위주로 글을 쓰거나 연을 맺고 살아 온 것이지요.

이제 좀 자유롭게 하루의 일기를 기록하듯 편한 제 공간을 이 곳에 엽니다.

우선 지난 글들을 이 곳에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하려합니다.

Don’t give up! 제가 Daum 블로그를 접으며 마지막 쓴 글의 제목이랍니다.

살다보면 자의건 타의건 하던 일을 접는 경우가 생기는 법이지요.

모든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그 조차 그 길 밖에 없다고 단정질 수 없거나 시간이 흐른 뒤 후회하는 일도 있지만 – 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내 안의 마음이 먼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이제 다시 시작해 봅니다.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