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복권(Green Card Lottery)

매주 제 세탁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제게 의뢰한)한인 세탁인들의 가게 손님들에게 매주 일요일 아침 짧막한 이메일 편지를 보내는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일곱해가 지났습니다.

us-dv-lottery-2014-300x218단 한차례도 쉰 적이 없으니 제법 오래 이어져 온 일입니다. 편지를 띄우고나면 이런 저런 답신들을 많이 받게됩니다.

오늘은 이번 주에 제가 받은 답신 가운데 하나를 여기에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 제가 띄운 편지 내용은 <미국 복권 이민 비자(American Green Card Lottery)>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답니다.

복권 사보신 적 있으신지요? 복권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요? 어떤 종류의 복권을 사보셨는지요? 그 런데 혹시 복권 이민 비자(American Green Card Lottery)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말 그대로 미국에서 살 수 있는 비자를 복권 추첨을 통해 발급해주는 것이랍니다.

로또 이민 비자의 정식명칭은 ‘다양성 이민 비자 (Diversity Immigrant Visa)’랍니다.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매년 최대 55,000명에게 미국 이민 비자를 발급해 주는 제도랍니다.

지난 6일 월스트리트 저널 온라인판에 실린 이 로또 이민 비자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저는 깜작 놀랐답니다.

올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비자를 얻기 위해 응모한 사람들의 숫자가 1,100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추첨을 통해 55,000명이 미국 이민 비자를 얻게된다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놀란 사실은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나라들, 일테면 멕시코, 브라질, 캐나다, 영국, 중국, 인도, 한국, 필리핀, 베트남 등등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로또 응모 자격조차 주지 않는답니다. 이미 그 나라 출신의 이민자들이 미국내에 많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 만일 세계 모든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권에 응모할 자격을 준다고하면 아마 응모자가 몇 천만명이 될 지도 모를 일인 것이지요.

제가 무슨 이민제도나 이민비자발급 제도 같은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저도 이민 일세이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다만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거나 미국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복권을 사보신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쉽게 이해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이민 일세는 저는 이미 복권에 당첨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건강한 미국시민이 되는 일, 우리 동네에서 꼭 필요한 세탁소 주인이 되는 일은 이미 제가 당첨된 복을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감사의 계절입니다. 이 땅에서 뿌리 내리고 사는데 가장 크게 도와 주시는 우리 세탁소 손님들에게 드리는 감사가 매우 큰 계절입니다.

그리고 Driggs씨에게서 받은 편지 번역과 원문입니다.

영에게,

당신이 이곳에 와서 기쁘다. 당신 아내와 당신은 분명히 열심히 일하고, 지역사회에 참여하며, 하는 일을 통해 가치를 더하고 있다.

대형 함선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새 삶을 일구려는 다양한 사람들을 데려오기 (시작한 때로부터) 대략 6만년 전에, 머나먼 그리고 아마도 험난한 여정을 통해 걸어서 원래 이곳에 도착한 아메리칸 인디안들만이 부족 시민인 나라가 바로 이 미국이다. 하지만, 아마도 “불과” 10만년 전에는 이 땅에 인간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재 불법적인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남부 국경을 넘어 도착하는, 그들 중 상당 수는 범죄 전력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를 의도가 있는 이민자들에게는 “당신이 이곳에 와서 기쁘다”는 말을 나는 할 수가 없다.

다행히도, 그들은 최근 까지 남서부 지역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인들의 99%는 이민자였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오래 살았을 뿐 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런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 아니면 초등학교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애당초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선조들이 전쟁에서 싸웠으므로, 그들은 이곳에서 살 권리를 획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부계와 모계 쪽 모든 내 선조들은 프랑스와 인디언간의 전쟁 (French & Indian War),’ ‘미국 독립전쟁,’ ‘1812년 전쟁’에 참전했지만, 나는 그것을 이 나라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데 내 조상들이 기여한 것으로 보며, 또한 그것이 내게 특별한 특전을 수혜할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조상들의 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를 뜻하는 것으로 여긴다.

보다 최근에 낙원에 온 이민자들은 찾은 것을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지키기 위해, 그들 보다 후에 오는 사람들에게 문을 닫고 싶어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자신 보다 나중에 오는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려 하지 않고,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려 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과 재능을 들여오려 하거나, 이 땅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데 조력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에 한해, 그 생각이 공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경제학을 수년 동안 공부한 바에 따르면, 우리가 기술과 재능을 소지한 이민자들을 지역사회에 들이면, 모두가 보다 나은 상태가 되며, 그것은 보통 모두의 삶이 개선되는 결과를 낳게된다.

 현재 처한 불쾌한 또는 희망이 없는 상황이 어떻던지 간에, 단순히 해를 끼치기 위해, 사람들이 이곳에 오고 싶어하는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겠지만, 만일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처한 특별한 상황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이유가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도 남서부 국경지역 주(州)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만일 기꺼이 지역사회의 건설적 일원이 되려한다면, 그렇다면 어디지역에 살고 있든지, 모두에게 (이민비자) 복권추첨에 신청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뉴스 레터를 계속 보내도록하라. 시사하는 바가 많은 내용들이다!

Charlie

그리고 편지 원문입니다.

Young,

I am glad you came here.  You and your wife certainly work hard, participate in the community, and add value by what you do.

As this is a country in which only the Native American tribal citizens originally arrived by a long and possibly torturous journey on foot before large ships started showing up, bringing a variety of people wanting to make a new life here some 60,000 years later.  But we do know that perhaps “as little” as 100,000 years ago, there were no people here at all.

I cannot say “I’m glad you came here” about some of the immigrants currently arriving by unauthorized means across the southern borders of our states, as a few too many of them have criminal backgrounds or a criminal intent for being here.

Fortunately, they have tended to stay in the Southwest until recently.

But the truth is that 99+% of Americans were immigrants; some have just been here longer than others.  A few too many Americans tend to forget that — or didn’t pay attention in grade school and learn it in the first place.

Some of us think that because their ancestors fought in a war, they earned a right to be here that others didn’t earn.

My ancestors on both my father’s and my mother’s side of the family did fight in the in the French & Indian War, the American Revolution and the War of 1812, but I look at that as their contribution to helping make this country a place people can live in relative freedom — not a grant of special privileges for me, but an obligation to live up to their example.

I have learned though that more recent immigrants coming into paradise have a habit of wanting to slam the gate on those coming in behind them, to protect what they’ve found all for themselves.

To me, that only seems fair if those coming in next are not willing to work hard, be a part of the community, bring some skills or talents we don’t need or want, or are unwilling to help make this a better place.

Several years of studying Economics taught me that we are all better off when we let immigrants with skills and talent into the community, as normally doing that results in everyone’s lives improving.

It is unusual for people to want to come here from whatever unpleasant or hopeless situation they are in simply because they want to do harm here, but when that is the situation, whatever that unusual reason might be is never going to be seen as a good reason to keep the door open for them.

I wish we would fix the problem in the southwestern border states for that reason alone.

Everyone else from wherever they come from — if they are willing to be constructive part of the community, then they should have a chance in the lottery!

Keep up the newsletters.  Good thought provoking stuff!

Charlie

우리는 이 땅에 최근에 이주한 이민자들입니다. 한국(남한)사회도 이즈음에 들어 다문화사회로 막 진입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Driggs씨는 이 땅을 살아가는 한 건강한 중년 사내이며, 그 역시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그의 생각에 귀기울여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올려봅니다.

생애 최고의 가을

제목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대로 가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가을 오후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작은 사업체를 접고 은퇴 수순을 접는듯하던 벗이 땅을 일구기 시작한 것은 올 봄이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가 일구어 낸 농장에서 정말 찐하고 멋진 쐬주 한잔 붓고 마셨답니다.

가을, 맑은 하늘, 고추, 무우, 배추, 호밀 밭…

갓 따온 상추, 고추에 돼지 바베큐. 그리고 쐬주 한 잔!

정말 간만에 “Wolly Bully”에 맞추어 몸을 뒤튼 벗들의 모습이 아니어도 그저 좋은 가을 오후였답니다.

그 흥에 취해 있다가 상추 비닐 농장으로 들어가는 벗을 따랐답니다.

가을잠바로는 서늘한 기운이 도는 오후였는데 비닐농장의 거적을 벗기자 훅 다가온 열기를 맞으며 든 생각 하나랍니다.

오늘 쐬주 한잔은 환갑 나이에 허리 아픈 줄 모르고 한해 내내 땅을 일군 벗의 땀이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제가 정말 멋진 가을 오후를 즐긴 까닭이랍니다.

돌아와, 제 차 트렁크에 가득 실린 무우를 보며 벗의 한 해를 몽DSC01797땅 뺏어온 미안함으로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 생무우를 한 입 베어 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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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로 정치를?

Ahmad실리콘 밸리 시의회와  San Carlos시의 시장을 지냈던  Omar Ahmad가 제안하는 정치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바로 종이와 펜을 이용해 손편지를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방안입니다.

이런 일이 정치를 바꾸는 방안 가운데 하나로 작동하는 사회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회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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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조선일보 – 그 야비함

주일 아침 이런 저런 지나간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변함없이 야비한 조선일보 글줄이 눈에 띕니다. <법정 소란이나 다를 게 없는 어느 판사의 막말>이라는 사설입니다.

‘어느 판사’가 전직 대통령을 죽이고, 현직 검찰총장의 옷을 벗기는 막강한 권력의 눈밖에 난 모양입니다. 바로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입니다.

사설의 내용인즉 김동진 부장판사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 무죄, 국정원법 유죄를 선고한 재판에 대한 의견을 법원 게시판에 올렸는데 읽어보니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거의 언어 테러 수준의 인신공격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부 판사가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다.”며 “두려운 일이다.”고 맺음을 합니다.

김동진 부장판사가 옷 벗을 날도 얼마 안남은 듯 합니다. “두려운 일”을 결코 두고 보지 않는 조선일보의 행패가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어느 정도 두려운 일인지 김동진 부장판사가 올렸다는 글을 찾아 읽어 보았답니다. 두렵기도 할 만한 글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줄 아는 걸 보면 조선일보 아류의 권력이 아주 미친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튼 김동진 부장판사의 글을 꼼꼼히 읽고난 후에 하고픈 말 한마디랍니다.

“인격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완숙하지 않은 일개 언론(인)이 개인의 운명이나 사회의 갈 길을 결정하는 막중한 권한을 갖고 있는 사회야말로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모처럼 뉴스에 등장한 황석영선생 말마따나 아직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이 필요한 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은 김동진 부장판사가 남긴 글의 전문입니다.

K-48

<법치주의는 죽었다>

– 수원지법 성남지원 부장판사 김동진

판사와 검사의 책무는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것이다. 선거에 의하여 다수의 지지를 얻은 정권은 때때로 힘에 의한 ‘패도정치(覇道政治)’를 추구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국가의 핵심기능을 좌지우지하고, 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권력자들의 마음 내키는 대로 통치를 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다수결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정신의 한 축인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유린하는 것이다.

헌법이 판사와 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면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하라”고 하는 준엄한 책무를 양 어깨에 지운 것은, 판사와 검사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아니한 채 묵묵히 ‘정의실현(正義實現)’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대의명분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판사와 검사에게 ‘신뢰(信賴)’를 부여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의 심연(深淵)에 있는 출세욕, 재물욕, 공명심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사심(私心)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는 상황을 보고 있다.

2013년 9월부터 올해의 이 순간까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정권은 ‘법치정치’가 아니라 ‘패도정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孤軍奮鬪)한 소수의 양심적인 검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관하여 의연하게 꿋꿋한 수사를 진행하였던 전임 검찰총장은 사생활의 스캔들이 꼬투리가 되어 정권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2013년 9월부터 10월까지 검사들을 비롯한 모든 법조인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밝히려고 했던 검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오히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덮으려는 입장의 공안부 소속 검사들이 국정원 댓글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재판이 한 편의 ‘쇼(show)’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각종 언론은 이런 상황을 옹호하면서 나팔수 역할을 하였다. 내가 바라본 2013년의 가을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어가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였다.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였다.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해 보면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에서 현 정권이 승리하면서 이런 기세는 한풀 꺾였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아직도 민간기구(특별조사위원회)에게 수사권과 공소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는 어제 국정원 댓글 판결을 선고하였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개입’을 한 것은 맞지만, ‘선거개입’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공직선거에 관한 무죄판결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위법적인 개입행위에 관하여 말로는 엄벌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동기참작 등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슬쩍 집행유예로 끝내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판결문을 찾아 출력한 다음 퇴근시간 이후에 사무실에서 정독을 하였다. 판결문은 204쪽에 걸친 장문(長文)인데, 주로 개별적인 증거들의 취사선택에 관하여 장황하게 적혀 있고, 행위책임을 강조한다는 원론적인 선언이 군데군데 눈에 띄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선거개입의 목적』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공직선거법위반죄를 무죄로 선고하였다.

판결문을 모두 읽은 후에, 나는 이런 의문이 생겼다.

(1) 2012년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원세훈 국정원장의 계속적인 지시 아래 국정원 직원들이 조직적인 댓글공작을 했다면, 그것은 ‘정치개입’인 동시에 ‘선거개입’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도대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이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 이렇게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가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일까? … 이것은 궤변이다!

(2) 판결문의 표현을 떠나서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독백을 할 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까? 『원세훈 국정원장에게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니…』 허허~~ 헛웃음이 나온다.

(3) 재판장은 판결의 결론을 왜 이렇게 내렸을까? 국정원법 위반죄가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원세훈 국정원장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였으니, 실질적인 처벌은 없는 셈이다.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에 국정원장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저버리고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것인가? 이 판결은 ‘정의(正意)’를 위한 판결일까? 그렇지 않으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앞두고 입신영달(立身榮達)에 중점을 둔 ‘사심(私心)’이 가득한 판결일까? …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다시 돌아와서, 판사님들과 법원 가족들에게 고사 성어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사 성어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는 권력을 잡고서 허수아비 왕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치면서 “말(馬)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인 호해는 “왜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이 조고의 편을 들면서 “말이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단지, 몇 명의 신하들만이 “말이 아니라 사슴입니다.”라고 진실을 말했는데, 환관 조고는 나중에 진실을 말했던 그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하겠다. 나는 어제 있었던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은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원이 2012년 당시 대통령선거에 대하여 불법적인 개입행위를 했던 점들은 객관적으로 낱낱이 드러났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자명(自明)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백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담당 재판부만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2013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성인남녀 17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법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3%가 “돈과 권력이 많으면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법(法)”을 꼽은 응답자는 43%로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 전국의 성인남녀 2937명을 대상으로 한 법률소비자연맹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가 “법을 지키면 손해”라고 대답해 법치주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4. 3. 26.자 세계일보 참조).

사법부가 국민들의 상식과 순리에 어긋나는 『지록위마의 판결』을 할 때마다, 국민들은 절망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제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국민들은 더 큰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제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 논어에 ‘무신불립(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는 곳에는 국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에 여당/야당 중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았다. 누군가 “편 가르기” 풍조에 입각하여 나를 향하여 “좌익판사”라고 매도한다면, 그러한 편견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나는 판사로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 몰락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뿐이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마법사 전성시대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 못하는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중국 문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혀차는 일이 어느 특정한 시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종종 제가 이해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건 세대나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상” 특히 “한인 사회 – 딱 한국이라고 특정짓지 않는 까닭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에 만연한 어떤 풍습입니다.

바로 세상사는 방법을 재는 잣대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크게는 국가나 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부르든, 집단 이익이라고 부르든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 우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누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돈과 권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틀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졌던 화두(話頭)  “정의(正義, justice)” 는 언제적 이야기인지 다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는 방법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즈음에는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한 때 한국에서 정치평론가라는 직업을 내세운 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직업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철들어 한국 땅에서 산 세월보다  이민의 세월이 길다보니 낯설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거기도 그런 세월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못 기쁜 마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이들이 평론을 펼치는 잣대야말로 “돈과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수, 진보 또는 여, 야 아니면 친미, 종북 –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평론가들이 어떤 블럭에 속해있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잣대는 똑같이 “돈과 권력”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오늘도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우고 마치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양 싸우고 다투는 척을 합니다.

거짓에 둘려 쌓여, 아니 스스로 쳐 놓은 거짓의 거미줄을 자신들의 밥상으로 여기며 말입니다.

저라고 뭐 별반 다를게 있겠습니까만 그저 느낌 하나 적어보자는 생각이랍니다.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크리스티안 안코비치( Christian Ankowitsch)가 쓰고 박정미가 번역한  리더스 북 발행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제 밥그릇을 더챙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이 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 책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마법>이라는 소제목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명확한 경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는 문제를 연구했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곧바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실험결과 피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주장이 엄연한 사실로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경고를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사실로 새겨지는 현상은 중년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기억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근거 없음!’이라는 경고보다 더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부분 기억 속에 아무 문제없이 저장되는 반면 메시지의 앞뒤 맥락, 즉 경고에 대한 기억은 소실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녹인다는 주장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튼 주장을 의심스러운 홈페이지나 허접한 잡지에서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

이 글을 읽다가 제가 무릎을 쳤답니다.

아하! 우리는 지금 마법에 걸려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답니다.

그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데 능숙한 마법사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그래 제가 예수를 믿는답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살 수 있는 힘이 그 믿음에서 나오므로.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요즈음 젊은 것들은….” 혀를 하며 나무랄 용기 역시 솟는 것입니다.

show must go on

하루 일을 마치고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눈에 딱 들어오는 기사말고는 그저 제목이나 축약기사 몇 문장 읽다 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입맛에 맞는 뉴스들을 척척 꺼내 읽을 수 있는 참 좋은 세상(?)입니다. 그게 정말 좋은 세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끝난 한국의 보궐선거 이야기와 뒷이야기들 그리고 향후 전망에 대한 기사들도 차고 넘칩니다.

저야  뭐 이미 그쪽 사람도 아니거니와, 공화당과 신민당이 다투던 시절 정치에 익숙한 사람인지라 고물도 이만한 고물이 있을까 싶은 사람인데 감히  2014년 문명의 한국정치를 이야기하는 일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일 겝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대한민국 군대 삼년을 복무했던 한때 “민족 중흥의 역사적사명을 띄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치판 훈수 한자락 정도는 가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몇자 적어봅니다.

대부분의 기사에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래, 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지.”하며 넘어가는 것이지만 도대체 몇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래 그 이야기 몇자 적어 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여 11석, 야 4석에 대한 결과입니다. 압승과 참패라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뭐 그렇다고 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한 수많은 해설과 논평, 전망 가운데 딱히 동의할 만한 것이 없었답니다.

열 다섯 곳에서 실시된 보궐선거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던 곳들은 서울 동작, 전남 순천.곡성, 울산 남구을 등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곳들은 지난 몇개월 동안 뉴스를 제대로 훑어 본 이들이라면 가히 짐작 가능한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관심을 주었던 세 곳의 결과를 보면서 제 머리속에 든 생각들이랍니다.

아주 간략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은 진보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사람들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바로 표심입니다.

그 표심이란 넘쳐나는 뉴스와 평론과 논설들이 분석하고 서로 제 잘난 말장난 하듯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배 부르고, 내 등 따스면 그만”이라는 표심의 밑바탕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 유권자 또는 주권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곳의 유권자나 주권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유권자들의 생각이  명하게 드러난  것아 바로 동작구와 전남 순천.곡성의 결과입니다.

“내 배 부르게, 내 등 따습게”에 표를 던진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순천,곡성을 두고 지역주의 타파라고 거품무는 말들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입니다. 그 곳은 다만 “자기 동네사람이라는 혈연, 지역, 계파로 뭉뚱그려져 거기에 우리끼리 걸지게 먹고 마시고…”라는 생각들이 뭉쳐진 결과일 뿐입니다.

동작구는 왈 “강남 4구”가 먹힌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유권자들의 표심이 결코 나쁜게 아니라는 지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이런 유권자들의 생각 곧 민(民)의 생각의 흐름을 잘 읽고 뒷생각이나  아무런 책임감 없이 감언이설로 거친 말로 하자면 유권자 상대로 사기에 능한 세력들이 이겼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뭉뚱그려 여권에 속한 정당 및 사회 제반 세력들이라고 한다면 반대 쪽은 정말 초라하답니다.

어찌보면 11대 4도 정말 선전한 것이란 생각도 든답니다.

상대는 민(民)을 알고 민(民)을 속이는 방법에 통달하고 있는데, 이쪽은 자기들이 민(民)을 아직도 가르친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답니다. 단지 한편일 수도 있는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친다고 다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비단 야(野)라고 불리우는 정당 뿐이 아닙니다. 이른바 언론, 대안매체, 스스로 진보연 하는 제반 단체들 아니 개인들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생각을 해봅니다.

이 글을 쓰다가 “안철수 1기…”운운하는 기사 제목을 보면서 기사가 아닌 사기는 이 바닥에서 언젠가일지 모르는 그날까지 show must go on 일 것 같습니다.

세월호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학살사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세력만 있다면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나아가 한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떳떳한 미래가 열린다는 생각으로….

그런 내일을 준비하는 정치집단이 다음 권력의 주인이기를 빌며….”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주일 아침, YAHOO 대문에 걸린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와 소개드립니다.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딱히 6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닐터이고,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닐겝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나 늘 가치 있는 것이거니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가능 또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메세지로 읽어 봅니다. 

소개 드립니다. 

at 60

환갑에 인생을 시작한 열 사람

60세 이상의 인구는 1980년 이래 두배로 되었고, 2050년도 까지 전세계 80세 이상인구는 3억 9천 5백만 명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장수한다는 것이 단지 숫자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를 훨씬 넘어, 창조력과 야망으로 자신들의 삶을 부러움을 살 만하게 영위한 놀라운 10인을 살펴본다.

Frank McCourt, 문학

66세에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1996년에 발간된 책, “Angela’s Ashes”은 5백만 부가가 팔렸으며, 이 작품으로 McCourt는 퓰리처 상, ‘National Book Critics Award,’ ‘ABBY Award,’ LA 타임즈 ‘Book Award’를 수상했다.

A.C. Bhaktivedanta Swami Srila Prabhupada, 종교

69세에 ‘International Krishna Conciousness (ISKCON)을 창립했다.

Prabhupada는 1966년 7월 11일 ISKCON 조직을 뉴욕에서 등록했다. 그로 부터 11년 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세계를 14번 여행했다. 그 후 그의 저술은 76개국어로 번역되었다.

Mary Delaney, 예술

72세에 종이 콜라주(Paper Collage)를 발명했다.

그 후 10년 동안, Delaney는 식물학적으로 정확한, 종이를 잘라 만든 꽃 985점을 창작했다. 그녀는 조지 3세와 샬롯 여왕과 친분을 맺었으며, 이들은 Delaney의 말년에 윈저 궁에 처소를 제공해주었다. Delaney의 작품들은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Laura Ingalls Wilder, 문학

65세에 선풍적 인기를 끈 ‘Little House’ 책들을 쓰기 시작했다.

Wilder는 “Little House on the Prairie (1935),” “On the Banks of Plum Creek (1937),” “By the Shores of Silver Lake (1939)” 등의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 책들은 원조 TV 시리즈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Estelle Getty, 연기

63세에 ‘The Golden Girls’에서 대대적인 명성을 성취했다.

그 때까지 연기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가, 쇼가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를 치면서, 7년 동안 방송되어 Getty는 일약 유명해졌다.

Fauja Singh, 체육인

89세에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을 달렸다.

Singh은 총 10번 마라톤 경주를 했으며, 100세때 토론토 마라톤에서 최고령 마라톤 완주자가 되었다. 2014년 나이가 102세 이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 7-8 킬로미터를 달리고 있다.

Clara Peller, 대중 문화

“Where’s the Beef?”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Wendy’의 얼굴이 되고, 대중 문화의 스타가 되었다.

1984년 81세의 나이에, 그녀는 ‘웬디’ 광고에 상징적 데뷰를 했다. 경쟁사의 빵은 크고 고기 덩이는 작은 것을 보며, 그녀는 큰 소리로 “Where’s the Beef?’ 라고 물었다. Clara와 그 캐치 프레이즈는 수지맞는 대중문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Grandma Moses, 예술

78세에 민속 예술가이며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1938년, 여행하던 한 예술품 수집가가 어떤 상점 창가에 있던 Moses의 그림에 주목했다. 그는 그 그림들을 뉴욕의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 전시했다. 그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녀의 그림은 연하장(greeting cards), 포스터, 자기 접시에 등장했다. TV 전기영화가 방송되었고, Grandma Moses는 1953년 타임지 표지 인물로 게재되었다. 101세로 타계했을 때, 그 소식은 미국과 유럽에서 전면 뉴스로 보도되었다.

Harry Bernstein, 문학

96세에 성공한 작가가 되었다.

수십년 동안 출판사의 거절 통지를 받은 후, 그의 회고록, “The Invisible Wall: A Love Story that Broke Barrier”은 영국 북부지역의 한 가난한 공장지역에서 유태인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마침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Colonel Harland Sanders, 패스트 푸드

65세에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식당을 창업했다.

창업 9년이 지나 프랜차이즈가 600개에 달했을 때, 그는 KFC의 지분을 2백만 달러에 팔았다. 현재 그의 초상은 치킨 버켓과 전세계에 있는 KFC 상점 수천개에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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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알렌이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 불후의 명성을 성취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죽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성취하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예들이 보여주듯이, 적절한 나이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원문보기 

봄나물

지난 해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일찌감치 은퇴생활을 즐기는 줄 알았던 벗이 보낸 봄소식을 받았습니다. 두릅, 부추, 취나물 등 그가 키워 거둔 봄나물들이었습니다.

봄나물

한국에서 오랜기간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온 이 벗에게 이민생활 초기는 그리 만만한 세월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다 십 수년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집 뒤뜰 텃밭 농사를 제법 규모있게 지었답니다.

펜실베니아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서는 휴대폰도 잘 안터진답니다. 그 뒤뜰에 제법 훌륭한 비닐하우스를 짓고 각종 푸성귀 농사를 지었답니다. 덕분에 해마다 봄이면 봄맛을 보곤 했었답니다.

그의 손길로 이룬 기름진 텃밭에서 자란 푸성귀들로 식탁이 풍성해지는만큼 벗의 이민생활도 웃음 가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아들 하나 잘 키워 예쁜 며느리도 들인 후, 미련없이 사업체를 딱 정리한 후 한국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도 듣곤 하였지만 직접 연락은 두절한 상태로 지냈답니다.

한 두어 주전에 어느 식사자리에서 제법 도인(道人)이 된 그를 만났답니다. 머리를 길러 꽁지머리를 묶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농사짓고, 도기(陶器) 굽고, 분재(盆栽)를 키우며 살고파하던 그의 꿈들을 이루며 사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서 봄나물을 받은 것입니다.

어머니주일 아침입니다. 농사짓는 벗 덕분에 어머니와 장모에게 봄소식 선물을 드릴 수 있어 참 좋은 아침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면 두 어머니에게 봄나물 드리는 일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가자! 광장(廣場)으로

광장을 찾아 헤매다 끝내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이명준.

단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명준은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 버린” 남쪽에 구토를 느끼며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직 “복창만 강요하는 구호”만 있을 뿐 북에도 광장은 없었다.

명준은 ‘광장’이 없는 조국 한반도를 등지고 중립국 인도로 향해 가던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게 죽는다.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1960년 4월(당시에는 4월에 학기를 시작했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고(이즈음 아이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당시엔 아이들이 코를 줄줄 흘리고 다녔으므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게 하였다) “서둘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한 채 오후반 등교길에 나섰다. (당시 전후-戰後:한국전쟁- 첫 세대인 우리에게 교실은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통상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때로는 삼부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그날은 두어 주간 동안 운동장에서 있었던 유희와 이즈음으로 말하면 집단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는 첫 날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채근은 대단하였다. 서둘러 나선 등교길, 신촌 노타리를 가로 지르는 길목에서 나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집 앞에서부터 들었던 함성이 이제 바로 내 앞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걸이를 한 대학생들은 “문(門)안으로, 문안으로(당시 우리는 광화문이나 시청을 문안이라고 불렀었다. 사대문안이라는 뜻으로.)” 노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던 1960년 4월 19일이었다.

그 저녁, “총소리… 피…. 죽음…” 등등의 어른들 말사이로 이웃집 형이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으며 우리 코흘리개들은 여느 날처럼 “다방구와 술래잡기”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우리도 시청앞으로 광화문으로 내달리곤 했다. 그 광장을 향해 달리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 갔으며, 더러는 목로주점에서 얻은 취기로 골방에서 악을 쓰고는 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악을 쓰고 모였고, 효창운동장에 군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이 돌던 밤, 우리들은 ‘밀실’에 갇혀 모진 매를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해 오월, 마침내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붉은 피, 총소리, 군화소리, 죽음 –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은 우리시대 ‘광장’의 극명한 모습이었다.

오누이 월남하여 홀로되신 장모와 함께 평안도 정주출신을 찾아 여의도 만남의 광장을 헤맨던 일을 몇 해 뒷 일이었다.

ggg최루탄에 맞아 한 젊은이가 죽고, 광장은 만장과 항쟁의 깃발을 든 시민들로 들끓었다. 1987년 6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광장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밤, 이민 보따리를 꾸렸다.

그랬다. 우리에게 광장은 분노와 항거와 저항의 분수대였다. 그곳은 끝내 눈물이었고 패배의 아픔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오직 관제(官製)이었다.

워싱톤 광장과 서너 블럭 뒤에 빈민 우범지대의 공존이 더는 낯설지 않은 이민(移民)의 세월을 보내며, 더러는 아슬아슬하지만 내가 살던 때보다는 나은 축제의 광장을 누리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오롯이 삼 사십년, 아니 최인훈의 광장 오십년을 넘어 백 이십여년 전 고부장터의 원성이 고스라니 다시 살아 울리는 소리 들리는데,  2014년 내 모국의 광장에는 다시 관제(官製)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으니 어찌하리!

가자! 다시 광장으로!

환갑(還) 젊은 나이로 자유의 광장으로 나서나니, 젊은이들이여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도청앞으로 광장으로 나설진저.

더는 바다에 떠도는 그 숱한 이명준의 넋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니 이명준처럼 자기 길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만 “가만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그 숱한 넋들을 위하여…

가자, 광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