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지에 대한 소망

ㄱ씨 – “그 소식 들으셨어요? 아, 글쎄 아무개가 알고보니 이런저런 사람이래요”

ㄴ씨 – “에이 설마요? 그 사람이 아무렴 그럴까요? 잘못 들으셨겠지?”

ㄱ씨 – “아니 뉴스에 나왔다니까요. 신문, 방송 할 것없이 다 나왔어요. 그게 사실이래요.”

ㄴ씨 – “그래요? 뉴스에 나왔어요. 그럼 뭐….”

일테면 이런 대화를 나누었거나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물론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은 진실일 수도 있다. 다만 이 때의 진실은 누군가의 주관적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을 객관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hope많은 이들이 “뉴스는 진실보도를 해야한다”는 말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진실이란 <객관적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엄밀한 뜻에서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백명이 있다고 할 때 그 백명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지난 해 4월 16일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 300일 째 되는 날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실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바다 속에 잠기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뉴스로 넘어오면서 진실은 여러가지로 갈린다. 날씨가 나쁜 탓에 일어난 단순 해상 사고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국가가 일으킨 집단 생수장 사건이라고 믿는 사람들까지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의 차이는 현격하다. 때론 물리적인 사실 조차 주관적 해석이 난무하기도 한다.

이쯤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신문학자인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가 그의 고전적인 저서 <신문학(新聞學)>에서 한 말을 곱씹어본다. “뉴스란 ‘알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주관을 통해 흐르며 이와 같은 전달자의 주관적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는 우리들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명확하게 짚어 알려준다. 바로 우리들이 이른바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관이 개입된 주관적 사실이라는 말이다.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죤 나아가 이즈음 유행인 각종 SNS(Social Network Service)망의 정보들이 전하는 뉴스들이란 객관적 진실이 없다는 주장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송하지만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뿐이다.

그럼으로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넘쳐나는 뉴스들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부터 버려야만 한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에 대한 뉴스들은 접하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뉴스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어떤 뜻”이 담긴 주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필라델피아 인근지역에 살며 알음알음으로 뜻이 엇비슷한 이들이 모여 소식지 “희망”을 세상에 던지게 되었다.

지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보유통 기술 발달로 인하여 이젠 모국(母國)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동포라는 가름이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적어도 정보에 관한한 동일한 공간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어를 제일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희망”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는 뉴스들이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전하고 싶은 주관적 진실”임을 알리되, 그 “누군가”의 실체를 알려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바른 판단을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이달 말경에 필라델피아 인근에 배포할 예정으로 시작하는 소식지 월간“희망”에 보낸 원고입니다.

녹두죽

저는 1남 3녀 외아들로 자랐답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올해 70주년 결혼기념을 맞게 되시는데 아버님께서는 손수 밥을 지어 드신 경험이 거의 전무할 정도로 어머님께서 수발을 들어오셨습니다. 이즈음에는 아버님께서 이따금 설거지 정도는 하시지만 말입니다.

이쯤이면 대충 짐작하실 일이겠지만 제가 부엌일을 할 수있다는 생각조차 안하고 산게 거의 50여년쯤 된답니다. 그러나 한 십여년 전부터 밥도 하고, 반찬도 하고 심지어 요리에도 도전하는 일들을 시작했었답니다.

그 무렵에 부엌에 드나들게 된 계기는 맛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도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고, 아내의 손맛에도 질려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래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 손으로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두아이들과 아내가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기쁨이 제법 쏠쏠했답니다.

그러나 사는게 바쁘다보니 제가 시간이 날 때 그리고 제 맘이 내킬 때에만 했던 일이랍니다. 제 마음대로였던 셈입니다.

그러다 지난 해 어느 순간부터 종종 그냥 음식 만드는 재미에 빠진답니다. 김치 깍두기에서부터 각종 국과 찌개 나아가 왈 요리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혀가며 재미의 폭을 키워나간답니다.

이런 낯선 제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늙막에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쓴다”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남성 호르몬이 다되어 여성화되기 시작했다는 말도 하지만, 다 그 재미를 느껴보지 못한 탓이랍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정말 쏠쏠한 재미를 느껴 본 사람은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겝니다.

그 재미란 바로 제 어머님께서 누려오신 평생의 재미요, 행복이셨답니다. 손도 크시지만 정갈한 서울 음식을 내 놓으시곤 식구들과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 어머님께서 느끼셨던 재미와 당신 손 맛에 대한 자부, 정말 대단하셨답니다(아니 대단하시답니다. 아직도 종종 현재진행형인 때가 있으시므로)

녹두죽이즈음 제 음식솜씨는 맛에 대해서는 어머니에게 차마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조악한 초보 수준이지만 느끼는 기쁨은 어머니에게 견줄만 하답니다.

올 겨울을 잘 넘기시던 어머님께서 요 며칠 감기 기운에 입맛을 잃으셨답니다. 그래 오늘 저녁엔 어머님 흉내를 내보았답니다.

제가 아플 때 어머님이 끓여 주시던 녹두죽을 끓여 본 것이지요.

음식에 재미 붙인 일은 제 삶에서 몇 안되는 썩 잘한 선택같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겨울, 빙판 운전 요령

Charlie는 거의 말수가 없는 제 가게 손님입니다. 그런데 어제 장문의 이메일을 제게 보냈습니다. 제가 매주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제가 지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올라가면서 빙판길 운전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겨울철 빙판길 운전의 베테랑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요령을 설명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겨울철 빙판길 운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Charlie 편지의 번역과 원문 그리고 제가 보낸 편지의 번역과 원문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 시간에도 제가 사는 곳에는 눈이 내리고 길은 빙판이랍니다.

drive on ice

Young에게

지난 주에 사고없이 뉴욕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은 침착하게 (운전에)집중할 수 있는 당신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나는 버팔로 지역에서 29년간 살았고, 내 어머님께서 내가 15살 되던 해, 영하의 온도에서 2-3인치 두께의 거울 같은 얼음으로 완전히 뒤덮힌 우리가 살던 (공공이 아닌) 도로에서 내게 첫 번째 운전교습을 시켜주셨다.

이 (교습)초대에 대해 어머님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대한 대답으로 어머님께서는 “만일 네가 거울 같은 얼음에서 운전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나 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가자!” 라고 하셨었다.

그래서 나는 8기통 엔진이 장착된 5,000 파운드가 넘는 닷지 세단 운전석에 앉았고, 가속 페달을 빨리 밟고 떼는 것은 아주 좋지않다는 사실과 브레이크 페달은 거울 같은 얼음에서는 단지 미끄러지게 만드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바로 배웠다.

뉴잉글랜드 인근 언덕이 많은 농장지역에서 성장하셔서, 어머님은 겨울에 아버님 보다 겨울 운전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든 기상 상황에서도) 기술이 더 뛰어나셨고, 내게 우리 도로에서 가속시켜 올라가고, 진입로(driveway) 끝에 도달할 때 차를 옆으로 미끌어지게 하며, 그리고 나서 가속 페달과 핸들을 사용해서 진입로로 빨리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11월과 12월에 우리 집에서 진입로 끝까지 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그 이후 나머지 겨울 동안은 눈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진입로가 얼음판이 되어 차를 도로변에 주차시켜야 했고, 나는 겨우내내 눈을 치워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아버님은 그 (운전) 기술에 결코 성공하지 못하셔서, 차를 두번이나 도로변 깊은 고랑에 처박고 나서야 (견인 트럭을 불러야 했다) 배우려는 시도를 포기하셨다.

나는 아나폴리스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열 다섯 해 겨울 동안 운전을 했으며, 버팔로에서 지냈던 겨울 중 몇 해는 지난 세기 중 최악의 상황으로 꼽혔었다.

나는 또한 스포츠카 경주를 몇 번 했으며, (내 차의 엔진이 고장이 났고, 모든 부품은 아파트에 두고 와서) 차동호회 친구로 부터 빌린 차로 내 겨울 운전 지식을 이용하여 얼음 운전 대회에 참여했고, (일반 대중에게) 차단된 도로 코스에서 (그 친구의 차로) 첫 번째 시도에서 그의 기록을 18초 단축시켜 의도치 않게 그 친구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대회에서) 1분 8초라는 내 기록은 그에게 2등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내가 탑승객으로 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를 더 무안스럽게 만들었지만, 이후 우리는 계속 친구로 지냈다.

내가 유리했던 점: 그는 겨울 환경에서 운전하는 방법을 내 어머님께 배우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처음 ‘Delmarva Power’에 취직을 했을 때, 겨울 운전에 대한 한 시간 길이의 교습을 해줄 것을 부탁받고, 최소한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내 교습으로 사람들이, Young, 당신이 본 것 같이, 겨울 폭풍으로 연쇄충돌 차더미에 쌓이지 않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겨울 운전의 관건은 침착을 유지하고, 어리석게 운전하는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며, 브레이크는 마지막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관성과 엔진 브레이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며, 걷지도 못할 정도의 얼음판에서는 운전하지 마라.

당신이 Exit 5에서 뉴저지 턴파이크 북쪽 끝까지 무사히 운전해 갔다는 것은 당신이 이런 것들을 최소한 일부를 따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잘했다! 이곳에서 사는 2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필요한 (운전) 기술을 알지 못해서, 동네 자동차 정비공장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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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To have successfully completed your journey to NY last week without incident is a testament to your ability to stay calm and focused.

I lived in the Buffalo area for 29 years, and my mother gave me my first driving lesson when I was 15 on a sunny winter day with the temperature below freezing and the (non-public) road we lived on covered entirely with 2-3 inches of glare ice.

My look at my mother upon this invitation was answered with “If you can learn to drive on glare ice, you can drive on anything.  Let’s go!”  So I climbed behind the wheel of a Hemi V8 engine Dodge sedan weighing over 5,000 lbs, and quickly learned that getting on and off the gas pedal quickly was a very bad idea and brakes are merely a mechanism that puts you into a skid on glare ice.

Having grown up in a hilly farming region near New England, my mother was more skilled at winter (and truthfully, all weather) driving than my father, and taught me how to accelerate up our road, kick the car sideways when approaching the end of the driveway, and then shoot into the driveway by using the gas pedal and steering.

That was the only way to be able to drive all the way up the driveway in November and December at our home before the snow became so deep and the driveway so icy that we had to park the cars on the road for the rest of the winter and I had to shovel a walkway for the rest of the winter.

My father was never successful at that technique, and put his car into the road’s deep ditch twice (requiring a tow-truck to remove it) before giving up on trying to learn.

I drove through fifteen winters up there before moving to the Annapolis area, some of them among the worst Buffalo saw in the last century.

I also did some sports car racing, and used my winter driving knowledge in an ice driving competition using a car I borrowed from a fellow car club member (my car’s engine had failed, and I had it all apart back in my apartment) and managed to unintentionally embarrass the car’s owner on my first attempt by undercutting his time on the closed course by 18 seconds.

My finishing time of 1 min 8 seconds gave him the second place trophy.  It was doubly embarrassing as I had never even ridden in his car as a passenger, but we remained friends afterward.

My advantage: He had never had the benefit of my mother teaching him how to drive in winter conditions.

When I was first employed by Delmarva Power, I was asked to give an hour-long course on winter driving, and did so in at least three years.  I hope that saved other people from winding up in pileups in winter storms, such as you saw.

The keys to this driving is to be patient, stay away from others driving foolishly, use your brakes only as a last resort, use momentum and engine braking to your advantage, and do not drive on ice on which you cannot even walk on.

For you to successfully drive from Exit 5 northward to the end of the turnpike indicates that you must have been following at least part of this approach.

Well done!  I have noticed over twenty nine years of living here that many people in this area do not understand the techniques needed, much to the happiness of the auto collision shops in the area.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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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다녀왔답니다. 평소 그리 자주 가지 않는 편이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오고 가는 길의 날씨는 어떨지 등등 미리 확인을 하고 집을 나섰답니다.

비는 좀 오겠지만 낮기온이 40도에 이른다고 해서 그리 걱정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답니다. 집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넉넉하게 약속시간보다 4시간 전에 떠났답니다.

뉴저지 턴파이크에 들어서자 비가 오기 시작했답니다. 평시처럼 차들은 60-70마일로 달렸답니다. 그러다 Exit 4와 5사이를 지날 무렵부터 차들은 35마일 미만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답니다.

비가 내리면서 얼어서 도로가 빙판이 된 것입니다. 제 앞에서 가던 차가 스스르 미끄러지더니 갓길에 처박히는 것도 보았답니다.

겁이나서 service area로 들어서 쉬어갈까 했지만 ramp를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 어떤 차도 service area를 들어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6시간이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6시간 동안 분리대를 박고 부서진 차, 서로 부딪혀 부서진 차들, 20-30대가 넘게 연속 충돌된 차들 등등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100여대가 넘는 사고차들을 보았답니다.

무사히 도착한 후에 저는 “아무 사고없이 운전하는 것이 바로 기적이야,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오래 전에 중국에 있었답니다. 약 1200여년 전에 살았던 임제라는 불교 스님이랍니다.

그가 한 말이랍니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 이라고요.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손님들의 옷에 스테인들을 없애는 일에 감사하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한답니다.

Last Sunday, I went to New York City. As I don’t go there often, I checked the weather forecast and expected road conditions before I left home.

As the weather forecast said that though it would rain, the daytime temperature would be 40 degrees, I could leave home without concerns about the trip. Since it takes about three hours under normal conditions, I left four hours before the appointment to have the extra room of one hour.

As soon as I entered the NJ Turnpike, rain started. Vehicles were moving at the speed of 60-70 mph as usual. But when I was passing somewhere between Exit 4 and Exit 5, all the cars dropped their speed to under 35 mph.

The temperature was lower than expected and the rain was frozen as soon as it touched the ground. Yes, it was freezing rain! A car in front of me slid off the road.

I was somewhat afraid and thought about taking a break at a service area. But the ramp to the service area was icy and no cars could go there. I had to just follow the traffic and keep going.

I managed to reach my destination after six tense hours. During the trip, I saw so many accidents: cars which hit the median strip of the road and collided with other cars, and piles of cars crashed. I’m pretty sure that I saw more than 100 cars which were involved in accidents that day.

After I arrived at the appointment place, one thought came to my mind: “It is a miracle. Just to drive without getting involved in an accident is really a miracle.”

A long time ago in China, one Buddhist monk made a statement similar to this thought. He was Rinzai (or Linji, 臨濟) who lived around 1,200 years ago.

He said: “A miracle is not to walk on water, but to walk on the ground.”

What he meant is that to live every day uneventfully is nothing but a miracle. If we would understand this, we could not but live in gratitude, I think.

I wish that you will have a week which is full of things for which you are grateful.

For myself, I hope that I’ll have a week during which I get rid of all the stains from my customers’ clothes and feel grateful for that.

무우말랭이

무우말랭이를 만들어 보았답니다. 머리털나고 처음 해 본 일이랍니다. 정말 간단하고 쉬운 일인데 신기하기도 하고 제가 한 일이 대견하기도 하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튼실한 무우 세 개를 손가락 크기로 썰어서 채반과 oven grill pan에 널어, 부엌 바닥에 있는 air duct vent 위에 올려 놓았을 뿐이랍니다. 그런데 하루 반나절만에 아주 잘 마른 무우말랭이가 되었답니다.

무우말랭이농사짓는 벗이 보내준 무우는 아주 잘 생겼답니다.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도 제법 많이 남은 것들을 어떻게 보관할까를 고민하던 차에 짜낸 생각이 무우말랭이였는데 썩 잘한 생각 같답니다. 나머지 무우들도 모두 말랭이를 만들려고 한답니다.

제가 무우를 썰고 말리기까지 하게된 까닭은 아주 엉뚱하답니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문득 든 생각 하나는 시간을 나눈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것이었답니다. 2014년 12월 31일과 2015년 1월 1일의 차이라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었지요.

그저 제가 살아가며 흘려 보내는 시간들의 연속일 뿐인데 거기 숫자를 부여하고 나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뭐 그런 생각에 빠져 새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그래도 명색이 예수쟁이인데 구태여 사람들이 나누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 시간에 대해 예수가 던지는 질문 하나 정도는 찾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답니다.

그 생각들 끝에 “가라”라는 뜻을 찾아냈었답니다.

예수 당시 사회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왕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민재판으로 돌맹이에 맞아 죽을 환경에 놓였던 사람도 있었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용서해 주고 고쳐주면서 그들이 살던 공동체로 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다시 돌아간 사회공동체를 예수는 바꾸어 주지도 않았고, 왕따였다가 돌아간 이들의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예수는 책임지지 않았답니다.

2015년 이라는 새로운 숫자가 제게 준 의미였답니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주인은 “바로 너”라는 선언을 예수식으로 하면 ‘가라!’라는 명령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 본 것이랍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새해맞이를 하던 제게 아주 엉뚱한 일이 느닷없이 다가왔답니다.

늘 밝고 젊은 생각으로 사는 제 아내가 그 생각이 지나쳐 자신의 나이를 잊은채 운동을 한답시고 뛰다가 그만 뒤로 정말 오지게 넘어지고 말았답니다. 한동안 꼼작을 못하는데 정말 제가 오지게 놀랬었답니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려다 잘 아는 정형외과 의사에게 조언을 구했답니다. 사태와 증상을 두루 듣던 의사 양반이 뼈에 이상은 없는 듯 하니 응급실에 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처방하는 약을 먹고 하루 두어 본 뒤 가정의에게 응급상담을 해서 그 때 문제가 있으면 병원행을 하는 게 덜 고생할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답니다.

다행히 아내는 처방해 준 약과 이틀 동안 안떨어지고 벗이 되어 준 침대 덕분에 이젠 걸을만한 지경에 이르렀답니다.

누워있는 아내는 제 일상을 조금 흩트려 뜨렸답니다. 그렇게 흩트려진 일상을 서성이다가 제 눈에 뜨인 것이 창고방에 놓인 무우들이었고 그 무우들이 하루만에 말랭이가 된 것이랍니다.

아마 이번 주말엔 무우말랭이 무침이나 무우말랭이 속이 든 만두가 우리 부부 식탁에 오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2015년 문을 열었답니다.

게으른 아침, 뉴스 셋

성탄절 아침입니다.

오랜 습관에 나이 탓까지 얹혀져 이른 시간에 침상을 벗어나기 마련이지만 모처럼 게으른 아침을 맞았답니다.

늦은 아침 커피를 즐기며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먼저 눈에 뜨인 소식은 제가 사는 동네 신문 온라인판 뉴스 헤드를 장식한 기사입니다. 말많았던 영화 The Interview 개봉소식과 우리동네 어느 극장에서 상영하는지 또 이후 영화를 상영할 극장수들이 어떻게 늘어갈 것인지 등에 대한 내용입니다.

interview

미국내 온라인 신문 거의 대부분들이 초기 화면에 이 영화에 대한 소식을 싣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 눈에 뜨인 이에 관한 다른 기사랍니다.

뉴욕 기반으로 발행되는 온라인 신문 The Daily Beast에 실린 기사입니다. 제목이 “아니, 북한은 소니를 해킹하지 않았다. No, North Korea Didn’t Hack Sony”입니다.

이 기사는 FBI가 북한을 소니 해킹 범인으로 지목한 이유들을 조목조목 반박을 하며, 북한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폅니다.

FBI가 내세운 주된 요인 두가지들, 곧 이번에 사용된 악성코드와 IP주소에 대한 것들은 범행의 증거로 삼기엔 너무 빈약한 것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명확하게 북한이 아니라는 논증을 펼치며 (의도된) 여론몰이는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무튼 영화는 흥행 성공을 거둘 듯 합니다. 영화에 대한 노이즈 마케팅은 확실히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지 때문입니다. (The Daily Beast 기사보기)

안산한국뉴스로는 기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 오마이뉴스 기사가 눈에 뜨였답니다.

<성탄절 예배로 하나 된 ‘세월호 안산’>이라는 큰 제목아래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주제로 2014 성탄절 연합예배 열려>라는 기사입니다.

“첫째, 우리가 떠날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는 아기예수처럼 ‘세월호 유가족들과 끝까지 함께해 주십시오’.

둘째, 가족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고 용기를 내어 일상의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명명백백 밝혀질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십시오’.

셋째, 생명경시와 황금제일주의, 권력독점욕 이 세 가지 구조적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참사는 되풀이 되는 만큼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누가 아무리 무어라해도 제가 예수쟁이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밝혀주는 기사입니다.(오마이뉴스 기사보기)

마지막으로는 사실과 다르게 신문쟁이들이 조작한(?) 것으로 믿고 싶은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와 읽어 보았답니다. <진보 진영 “종북 뺀 새 정당 만들자”>라는 제목을 단 국민일보 기사입니다.

<이른바 ‘종북 세력’을 배제한 진보 진영 인사들이 ‘진보적 대중정치 복원’이라는 목표 아래 새로운 정치세력화에 나섰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모임’(국민모임)은 24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진보적 대중정당 창당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정동영 상임고문도 참여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고문은 “이분들의 선언이 시대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고 본다”며 “저를 아끼고 성원하는 분들의 말씀을 듣고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정 고문이 탈당할 경우 야권에 큰 파장이 일 수 있다.>

설마 스스로를 미리 종북 프레임에 가두어 놓고 진보정치를 말했을까?라는 물음이 드는 기사랍니다. 만일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른바 국민모임은 쓰레기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탄의 참 의미는 “사랑”에 있을 것입니다. 저물어가는 2014년 현재 “사랑”을 어떤 의미로 새겨야할지…

집안청소를 하고 가족들과 함께할 오늘 만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잔치와 분단

어제밤엔 Gaskins씨네 크리스마스 파티에 다녀왔답니다. 지난 시월초에 초대를 하였고, 그 사이 Gaskins씨의 몇 차례 확인이 있었답니다. “꼭 와야한다”며 말입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 파티에서 입을 그들 부부의 빨간 셔츠를 찾으러 제 가게에 들렸던 그가 한 말이랍니다. “올해가 여덟번 째 파티이고 해마다 약 백여명을 초대하면 연말이라 바빠서들 대개 60-70명 정도가 오는데 이번에는 못온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한 90명은 올것 같아. 오늘 새벽부터 마누라와 함께 이리뛰고 저리뛰고 정신이 없단다. 아무튼 이따 보자구.”

1220141906지난 해에 가보았던 자리라 낯선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오밀조밀 집안 구석구석을 치장하고 있었는데, 어느 것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답니다. 식전 다과상과 술상에서부터 저녁 테이블 그리고 후식까지 모든 상차림은 Gaskins 부부의 큰손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는 정말 넉넉한 것이었습니다.

1220141958잔치 개회사(?)를 하는 고등학교 교장선생이신 Mrs. Gaskins이 오늘 파티 참석자들에 대한 소개를 통해 잔치자리에 모인 이들과 Gaskins씨 부부와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은퇴후 Gaskins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인 악기 연주를 통해 알게 된 밴드동호회원들과 Mrs. Gaskins이 근무하는 학교의 사친회원들(PTA members) 그리고 동네 분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물론 Gaskins씨 부부의 단골 세탁소 주인인 저희 부부도 있었고요.

1220142010b쉬지 않고 늙은 젊음을 과시하는 밴드동호회원들의 연주에 맞추어 먹고 마시고 춤추고 즐긴 멋진 파티였답니다.

옥에 티랄까요?

자기 마누라가 밴드동호회에서 건반을 치고 있다는 사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갑자기 제게 던진 질문과 제 답이었답니다. “너 일본사람?”, “아니 한국인”, “남? 북?”, “남” 그렇게 교차문답이 끝난 후 그가 제게 던진 물음이랍니다.

“북한이 했다는  ‘디 인터뷰(The Interview)’의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 어떻게 생각해? 진짜 개네들이 했을까? 우린 지금 IS만으로도 충분히 골 아픈데 말이지.”

속으로 “하필 이런 친구를…”하는 생각을 하며 제가 던진 답이랍니다. “개네들이 무슨 그런 능력이 있겠어? 옛날 후세인의 이라크 같은 거 아닐까?”

찜찜해하는 제 표정에 재치있는 제 마나님이 나섰답니다. “정치나 이념, 뭐 이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파티 분위기를 깬다고들 하지요. 부인께서 건반 치신지가 오래 되셨나요?”

무릇 분단(分斷)이나 통일(統一)은 거대 담론(談論)만이 아니랍니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불편일 수도 있답니다.

이 이민(移民)의 땅에서도 말이지요.

홀로 아리랑 – 그 느낌에 대하여

한국학교 교사는 제 아내가 25년 째 계속해 오고 있는 일입니다. 아내는 이 일을 즐기는 동시에 일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답니다. 봉사를 전제한 일이므로 재미와 자부심 없이 즐기기만 하기는 힘들겝니다.

그런 아내를 따라 어제는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지역에 있는 한국학교 연합체인 동중부협의회가 주최한 2014년 교사 송년의 밤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내를 따라 이런 한국학교 연합체 행사에 가본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시는 분들의 애씀과 참석한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밤 그 모임에서 제게 특별히 새롭게 다가 온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평시엔 쉽게 듣거나 부를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노래들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거나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애국가와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애국가를 부르면서는 참으로 뜬금없이도 울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마 세월호 이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모국(母國)과 한인사회에 대한 생각들이 겹쳤기 때문일 겝니다. 새삼스럽게 한물 간 민족주의 감상에 젖었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그래도 쉽게 연결해 주는 도구로써 애국가라는 노래에 잠시 빠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날, 홀로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몇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리랑이야말로 애국가를 넘어서는 한국어 사용자들을 이어주는 끈일 것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을 비롯하여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를 연결해 주는 노래인 동시에 한반도 남과 북을 이어주는 노래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홀로 아리랑은 홀로 외롭게 부르는 아리랑이 아니였습니다. 홀로일 수 밖에 없는 개개인들 뿐만 아니라 생각과 이념과 신앙이 서로 다른 공동체는 물론이고 빈부의 차이, 지식의 차이, 권력이나 권위를 누리거나 못 누림의 차이로 벽을 쌓고 홀로 섬이 되어 사는 모든 세력들이 적어도 손을 서로 맞잡을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무릇 노래란 느낌이고 감성입니다.

하나되는 일은 이론이나 이성으로는 힘들지만 느낌과 감성으로는 쉬운 일입니다.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란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감성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성(理性)이나 이론(理論)이라는 허울을 쓰고 사람들을 편가르고 서로를 증오하도록 부추기는 일이 넘치는 세상에서 홀로 아리랑이 제게 새롭게 다가온 저녁이었습니다.

아리랑을 이민의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 갈 우리 후대들을 위해 가르치는 제 아내를 비롯한 한국학교 교사들에게 제 느낌과 감성으로 치는 박수를 보내며…

아내의 나이

제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서는 그 어떤 칭찬도 절대 과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이 부부싸움을 해 보신 경험이 있다면(결혼경험은 있는데 부부싸움 경험이 없다고 하시면 그건 제대로 삶을 살아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감히…) 아내의 놀라운 기억력에 감탄하신 적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제 감탄은 그 누구라도 당신의 경험보다 열배는 더할 것입니다.(물론 거의 제 부류 모든 사내들이 같은 생각일지라도…)

제 가게 손님들에게 종종 듣는 이야기랍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들 이름 언제나 다 아는데, 너는….”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답니다. 아내는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 이름들을 기억한답니다. 결코 작은 숫자라고도 할 수 없거니와 거의 세계 각국 여러나라 이름들을 그렇게 잘 외운답니다.

그에 반해 저는 조금전에 제 가게를 들어왔다가 나간 손님이 무언가를 잊고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도 또 다시 맞는 새손님이랍니다.

언젠가 어느 손님 한분이 놀랍도록 다른 저와 아내의 기억력에 대해 물었었답니다. “니 마누라는 손님 이름들을 다 외우는데 너는 어떻게 손님 그것도 이십년된 손님 이름 하나를 못 외우냐?”고요. 그래 제가 한 대답이랍니다. “아! 그거. 지능지수의 차이야, 아마 너도 나와 똑 같을 걸. 지능이 낮을수록 단순한 것들을 잘 기억하지. 내 아내의 경우야. 아마 니 마누라도 마찬가질 걸. 그러나 나는 너를 알아.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바로 너처럼. 지능이 높거던.” 물론 그 손님은 저와 매우 친한 남자 손님이었지요.

뒤에 그 손님이 제 말을 제 아내에게 그대로 옮긴 탓에 제가 받았을 수모(?)는 당신이 생각한 이상이라는 말씀을 덧붙이도록 하고요.

그런 제 아내가 확실하게 기억력이 떨어진 현상이 오늘 나타났답니다.

“오마! 그럼 내가 몇살이야? 오마마…..”

14 정미생일

그런 아내를 위하여, 참 좋은 기억력으로 오래오래 살라는 맘으로 장모님이 끓여주신 갈비국에 넉넉히 넣은 당면국수를 점심에….

저녁에는 아직은 특별한 날에는 곁에 있는 아이들과 이태리 국수를….

아내를 위하여!

하나님이 어찌 알랴?

추수감사절 연휴를 참말 잘 쉬었습니다. Thanksgiving day 전날에 눈이 좀 오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집에 전기와 인터넷, 전화가 불통이 되었었습니다. 다행히 당일 늦은 밤 전기는 다시 들어왔지만 인터넷과 전화는 주일(오늘) 오후까지 나흘 동안이나 불통이었답니다.

다석강의전화는 휴대전화가 있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터넷이 끊어지니 저녁시간이 몹시 길었답니다. 컴퓨터나 TV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유영모선생님의 ‘다석강의’입니다. 제 정신 차리며 사노라고 틈나면 꺼내들곤 하는 책인데, 모처럼 사흘밤을 끼고 살았답니다.

유선생님의 말씀들을 읽으며 이즈음 두루 흐트러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생각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머리 속이 환해지는 참 쉼을 누렸답니다.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유영모님이 가르친 ‘뜻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맛의 믿음’만을 쫓게 되었을까?

왜 한인교회와 한국교회에는 ‘예수의 뜻을 쫓아 살고자 했던 유영모’류의 사람들을 보이지 않고, ‘맛 곧 돈과 권세의 누림만을 쫓는 이명박, 문창극, 이인호, 조용기, 김홍도……’류들이 창궐할까?

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는 “지금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 받고 조롱받는 이들에게  조용하라고 윽박지르는 권력 앞에서 조용히 가만있기만 하는 것일까?

왜? 자기 일에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들과 제 배불리우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내며 정, 경, 군, 관, 언, 학, 종교 등 제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악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시편 73:4)”는 세상이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마저 그들에게 솔깃하여 그들의 물에 흠뻑 젖어 들어서 한다는 말이,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고 할까?

왜?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시편 73 : 11-12)” 세상이 되었을까?

이제 저물어가는 2014년 오늘, 제 앞에 놓인 물음들에 대해 유선생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참 예수쟁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신 후, 유불선(유교, 불교, 선교)을 통달하여 꿰뚫고 그 곳에도 길이 있다하셨지만 끝내 참 예수쟁이로 살다가신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자유, 독립, 통일, 공평, 평등 같은 거창하고 큰 것을 말씀 하시면서도 그것이 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 제가 발딛고 사는 현장에서, 내 가정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이루며 사는 예수쟁이가 되라는 권고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고 떠드는 이들이 세상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모처럼 푹 쉰듯한 추수감사절 기간이었습니다.

인터넷은 다시 연결되어 이슬람 국가(IS), Ferguson사태, 세월호 유가족 등등 ‘하나님이 어찌 알랴?’는 세상은 다시 제 곁으로 왔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차이

제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주는 한적한 시골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캄캄하답니다. 가로등을 거의 볼 수가 없답니다. 물론 시내 중심가나 상점가들에는 가로등이 밝게 빛나지만 저녁 9시즈음이면 대부분 상가들이 문을 닫고 조용하답니다.

그저 무덤덤하게 이번 분위기에 맞추어 살다보니 이런 풍경이 몸에 아주 익숙하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웃 대도시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제가 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답니다.

그러다보니 아주 급격한 변화도 없는 곳이랍니다. 미국 남부 여행을 하다가 돌아오면 이 곳 사람들도 급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긴 합니다만, 1970년대 서울 풍물에 익숙한 제 눈에는 여전히 느긋한 촌냄새가 풍기는 곳이랍니다.

이 마을에서 제가 세탁소를 하며 밥먹고 살기 시작한지도, 거하게 말씀드리자면 사반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답니다. 손님들의 모습들과 그들이 맡기는 세탁물 역시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행의 변화는 있어왔지만 그저 이 곳 분위기(제 가게가 위치한 동네 분위)에 맞을 성 싶은 가격대의 옷들을 세탁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젠 제법 경륜이 쌓인 세탁소 경험 가운데 딱 두번 제 세탁소와 이 지역 형편에 맞지않는 고가품의 옷들을 세탁한 때가 있답니다.

한 때는 약 십오륙 년 전의 과거 일이고, 또 다른 한 때는 바로 이즈음이랍니다. 제 가게 근처에 대학교가 있고 이 대학교의 어학연수원에 해마다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들어와 배우고 간답니다.

십 오륙년 전, 한국에 IMF사태가 터지기 직전 한 때 한국에서 온 어학연수원 학생들이 들고 온 세탁물들은 동네 사람들의 세탁물과는 차원이 다른 가격의 옷들이었답니다. 한 때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이즈음에 세탁료는 묻지도 않고 고가의 옷들을 맡기고 가는 젊은이들의 거의 백프로가 중국에서 온 연수원 학생들이랍니다.

“중국” – 이제 가히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는 세력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오늘 CNBC 뉴스는 그런 중국에 대해 다루는 프로를 내보냈답니다. 초강대국인 중국이 이미 경제, 군사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세계는 물론 아시아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에 비해 아직은 20년 이상 쳐져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그 뉴스를 보다가 생각난 미국과 중국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한국, 한국민에 대한 생각 하나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중국의 영향을 받는 문화 관습속에서 자라고 사고하며,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사는 한국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중국적 사고와 미국적(또는 서구적) 사고방식의 근원적인 차이는 “신(神)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일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독교 영향 아래서 역사발전을 이룩한 서구 및 미국적 사고의 바탕에는 창조주(創造主)이자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신(神)이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은 자연에 대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수준의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고의 틀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에 반해 중국의 전통적 사고에는 이런 서구적 개념의 신(神)이 없습니다. 물론 하늘(天)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역시 서구적 신의 개념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것들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중국적 사고의 시발입니다. 해, 달, 별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소, 개, 말에서 신(神)조차도 자연를 이루고 서로 상생하는 일부분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의 중심에는 바로 그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습니다.

서구적 사고의 윤리 또는 도덕적 기준이 신(神)에게 있다면, 중국적 사고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바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윤리(倫理)의 윤(倫)이 사람 인(人)변으로 시작하는 것이나 도덕(道德)의 덕(德)이 마음 심(心)변으로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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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흐름과 믿음이 바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것이 중국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을 상대하며 세계를 이끌었던 시대와는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군사, 경제적인 힘으로만 양국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생각의 바탕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적인 틀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벼락부자들의 천민 자본주를 신이 주신 복으로 믿고 사는 일부 한국인들도 곁들여 생각해 보면서…

촌구석 세탁쟁이가 모처럼 중국 아이들이 맡긴 고가의 옷들과 CNBC의 방송을 생각하며 몇 자 적어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