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

그들은 늘 무모했다. 역사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많은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꼴보수 매체에서부터 극좌빨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심지어 저 같은 골방 샌님까지 입가진 자들이 던지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그 숱한 소리들을 가로지르는 큰줄기가 하나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념논쟁입니다. 친일, 종북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허구입니다. 지금 왈 논쟁중인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성과도 그렇거니와, 2015년을 살아가는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에게 ‘한국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싯점은 바로 1970년대였습니다.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지금 여왕놀이에 빠져있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꼴보수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사관’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종북사관’으로 연결지어 매도하는 역사학적 연구들이나 그 결과물들이 대중전파하게된 까닭은 바로 박정희 탓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 반민주적 정권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 토양에서 ‘올바른 사관’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의 ‘역사 바로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김영삼의 군불때기를 시발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그 문제적 ‘사관’이 일반화된 시각이 될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공포수준에 이른 세력들이 일대 반격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는 것은 일개 샌님인 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이르러 향수에 젖어 옛노래를 부르는 세력들이 기승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유신의 시대를 돌아가신 리영희선생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세가지 부류의 지식인들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만 끊어서 본다면 아직도 제일부류들의 전성시대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허나 역사의 발전은 분명 제3부류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힘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답니다.

book리영희선생이 <우리의 상황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누군가 말해야 한다.(삼민신서, 1984년)”의 서문중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이 나라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명분이야 무엇이었던간에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변칙적’형태였고, 따라서 그 시대는 이 나라 지식인에게 특수한 마음가짐(사상)과 행동(실천)을 요구했던 상황조건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 한 시기를 살은 지식인에게는 세 가지의 태도가 있었다.(일반 대중의 경우는 굳이 여기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황에 순응 내지는 적극 호응하는 자세였다. 둘째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태도였고,  셋째는 그 상황을 과제로 인식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상과 태도였다.>

1970년대의 끝무렵였던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이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이들, 제일, 제이 부류의 사람들은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1930, 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1945년 8월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즈음 ‘역사논쟁’을 보면서, 이건 단지 1970년대 ‘공주놀음’하던 박근혜가 ‘여왕놀음’하는 2015년 버전이요, 그 주변에서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 혈안이 된 도적놈들의 날뜀, 그리고 눈먼 백성들의 완장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이런 놀음과 완장에 취한 이들 역시 도둑처럼 올 내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취해있을 터이지요.

무모하게 역사 앞에서.

관점(觀點) – 국사교과서 논쟁을 보며

제가 이따금 읊조리며 좋아하는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관점(觀點Point  Of  View)이라는 시입니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똑같은 사건이나 현상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칠면조 곧 머리 나쁜 경우를 빗대어 말하는 닭과 같은 목에 속하는 조류입니다. 이런 칠면조가 아닌 사람들의 관점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사관(史觀view of history )이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유심사관(唯心史觀)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 식민사관(植民史觀)이나 민족사관(民族史觀), 민중사관(民衆史觀)이나 영웅사관(英雄史觀) 등등은 모두 같은 역사를 보는 다른 관점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사람살이가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이 있을 수 있고, 그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서로 부딪혀 싸우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릇 역사란 그 다른 생각들끼리 다투고 충돌하면서 살아온 사람살이의 이야기인 셈이지요.

그 이야기들을 어떤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기록하여 다음세대들에게 가르쳐 넘겨 줄 것인가 하는 문제 이른바 교육, 바로 역사교육입니다.  다음세대들을 위한 역사교육을 위한 도구 가운데 하나가 역사교과서인데 이즈음 그 교과서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초중고 또는 대학시절 공부했던 한국사 교재 말고(물론 다 잊어버린 것들이겠지만) 어떤 종류의 한국사책이라도 최근에 읽어 본 책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최근 뉴스화 되고 있는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내용들을 접하고 있는 매체들 곧 신문이나 방송 나아가  SNS까지 어떤 성향의 매체들을 통해 이에 관한 소식들을 받아드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친일이니 종북이니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 각자 서로 다를 수도 있는 생각들을 굳히게 된 요인들을 찾아내 보자는 말입니다.

자! 이쯤 제 머리속에 굳은 생각들을 만들어낸 요인들을 먼저 밝혀봅니다. 이른바 제 나름의 사관(史觀)이요, 국사교과서 논쟁을 바라보는 생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년 전인 1887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은 사학과를 개설하고 조선사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하기 위한 사전 포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때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한반도 침략후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조선사(朝鮮史)》,《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등 역사서를 편찬 발간합니다. 이른바 식민사관의 역사서들입니다.

대단히 애석하게도 이런 역사인식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남쪽 역사 교육의 큰 줄기를 이루게됩니다.

해방 이후의 긴 이야기는 접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런 식민사관과는 다른 역사관이 있다는 소리들이 학계 또는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당연히 있어 마땅한 다른 소리들이 나타났던 시기입니다.

인식그런 소리들을 모아 펴낸 제법 방대한 결과물 중에 하나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일련의 저작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며 세상에 나온 책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입니다. 2006년도 일입니다.

재인식바로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필자 가운데 몇 분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또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 한 분과는 같은 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았고 함께 행동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두를 존경하고 서로 다른 생각들 역시 존중한답니다. 물론 제가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지만 말입니다.

사관은 다를수 있고, 다른 것이 존중 받는 동시에 서로 다툴 수 있어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가운데 그래도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는 까닭은 아직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민주주의와 인민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엔 그래도 아직은 민이 살아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는 나라가 건강한 나라입니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곧 단일한 사관을 만들어 다음세대를 교육(세뇌)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에서 자꾸 북을 쫓아가려는 종북분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안타까움으로 몇 자 적어보는 것인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모습은 130여년 전과 70여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랍니다.

너무나도 제 잘난 무지 탓으로.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2015년 추석 – 이야기 셋(秋夕三題)

1.

이민생활에서 한국명절은 그저 추억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는 그래도 명절 기분을 좀 맛보는 곳들도 있겠습니다만, 딱히 작정하고 만나지 않으면 한인들과 맞부딛히고 살지 않는 시골에서는 ‘오늘이 추석?’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다행히 친,처가 노부모님들이 모두 가까이 사시는 덕에 한국 명절이면 인사는 드리고 산답니다. 더더군다나 오늘처럼 일요일이나 여기 휴일이 명절과 겹치는 날이면 당연히 가족들이 모여 밥상을 나누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이런 저런 일들로 그저 ‘오늘이 추석이라네요.’라는 인사로 그냥 지나간답니다.

못내 송구스런 생각에 최근 수년래 제 취미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요리에 나서보았답니다. 엊저녁에 손질해 둔 쇠갈비와 사골들로 갈비찜과 사골국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오후에 아버지 어머니와 장인 장모를 찾아 갈비찜과 사골국으로 우리 내외 재롱 잠시 떨다가 돌아왔지요.

제 아무리 백세 시대가 눈 앞이라 하여도 제가 이미 환갑을 지나고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오는 길,  ‘내년 추석도…’라는 기도는 제법 절실한 것이랍니다.

2.

지난 일년 사이에 만난 벗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알던 친구들도 있지만 지난 일년 사이에 새롭게 만난 벗들과 함께 새로움을 느낀답니다.

딱히 단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저 우리끼리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 사람들’, 약칭으로는 ‘필라 세사모’라고 부르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랍니다.

일테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명’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 – 바로 제가 배우는 점들이랍니다.

지난 주간 전세계에 으뜸 뉴스들로 퍼진 것들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소식입니다. 교황의 방미 일정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가정 대회’였습니다.

교황의 필라 방문 일정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이들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베풀던 교황의 행렬을 되새기며, 2015년 오늘도 ‘여전히 아플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백만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SEWOL’이라는 피켓을 든 채 열명도 안되는 ‘필라 세사모’ 회원들의 기도와 외침은 교황의 행렬 속에서 모기소리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 제 믿음이랍니다.

제게 배움을 주는 이들의 몸짓이 비록 교황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제가 믿는 신 곧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들었다는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이 가족을 잃고 두번 째 맞는 추석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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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일입니다. 예수쟁이이므로 성서를 펼쳐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웅변해 주는 성경책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했던 신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에는 비주류였던 하갈의 소리를 듣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간에(유태, 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모든 아픈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추석 – 우리들이 조상을 찾는 까닭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릇 역사란  ‘그 들음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는 일일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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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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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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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제 고모부, 처고모부, 장모 – 이 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고향이 북쪽이고 한국전쟁 탓으로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고모부님과 처고모부님은 모두 세상을 뜨셨답니다. 두 분 모두 북에서 가정을 꾸리시다가 남으로 내려와 새가정을 꾸려 사시다 가셨답니다. 한분은 그 언젠가 북의 가족들을 만날 세월을 낚노라고 낚시에 말씀을 묻고 사시다, 다른 한분은 도수에 상관없이 소주잔 한잔이면 나오는 웃음에 세월을 얹혀 날리시다 가셔, 이젠 뵐 수 없답니다.

그래도 두분에게는 함께 남으로 내려온 혈육이 있었거나, 이북 오도민(五道民) 향우회에서 만난 고향분들이 함께 했던 삶이었지요.

아직 팔순이 안된 제 장모는 그야말로 남으로 내려온 홀로랍니다. 이북 오도민 향우회에 홀로 얼굴 내밀기도 뻘줌한 나이랍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오빠하고 단 둘이 내려왔던 남쪽살이였답니다. 전쟁통에 고향에 간다며 국군에 입대했던 오빠는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 없이 이북에 있던 가족들과는 영영 이별한 채 살아오셨답니다.

사람살이 길은 늘 열려있다고, 장인 어른 만나 가정을 꾸며 열 아홉에 제 처를, 이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오늘도 기도로 사신답니다. 행여 북에 살아있는 어릴 적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고 있답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남북 각기 100명씩 선정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신청자들의 반수 이상의 나이가 90대라고 하니 아직 팔순도 안된 창창하게 어린(?) 제 장모에게 순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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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년전 이맘 때, 장모에게 병이 찾아왔답니다. 담낭암이라는 이름의 손님이었지요. 그래 담낭을 떼어내고 전이된 간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난 후. 그 언젠가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잘 버티고 계셨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이 들리던 이지음 장모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손님이 아직도 몸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래 이 저녁, 모처럼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본답니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노동절과 중산층

월요일이지만 아침을 느긋하게 맞습니다. 늦잠의 여유도 누려봅니다. 노동절(Labor Day)아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영업자 주제에 누리는 혜택이야 전혀 없지만, 월요일 아침을 여유롭게 맞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감사랍니다.

커피 한잔과 함께 훑어본 뉴스에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답니다. 저희 동네 신문인 The News Journal에 실린 소상인 전문 리포터Scott Goss 의 “델라웨어주 노동조합원 숫자 줄다”라는 기사입니다.

지난해 델라웨어주 고용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노동조합 가입자인데, 이 수치는 지난 25년 이래 최저치이고 10% 미만으로 떨어진 첫번째 사례랍니다. 전체 수치로보면 델라웨어주내에는 38,000명에 조금 못미치는 조합원 숫자인데 이 역시 1989년이래 최저수치랍니다.

오늘 오후에 윌밍턴 시내에서 벌어질 노동절기념 퍼레이드를 이끌 노동조합 리더인Samuel E. Lathem이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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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노동조합이 필요한) 블루칼라의 정의는 새롭게 내려져야한다. 주지사를 비롯한 정치행정관료들은 그들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말하지만, 그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아마존이나 월마트 등의 저임금 서비스업에 치중되어있고, 그 일자리들은 불만족스럽고 블안정한 것들이다.”

Samuel E. Lathem의 말은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전통적 개념의 일자리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델라웨어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국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 전체 노동조합 가입자 비율은 11.1%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1950년대의 30%와 그리고 20%대를 유지했던 1980년대에 비하면 크게 위축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건강한 미국의 중추 역할을 했던 중산층들은 바로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임금을 바탕으로  일일 8시간 노동, 주말휴무, 아동노동법, 최저임금제, 고용 의료보험 등 이루어내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변화는 노동조합이 할 일들이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들에서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이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이 오늘날의 노동조건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젊은이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들이 공정한 임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그들이 만드는 노동의 가치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푸념하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염불일 뿐라는 점입니다.

실제 델라웨어주내 노동 일자리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90년 이래 지난 2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라인과  Dupont회사의 나이론 제조업체 생산라인의 약 1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델라웨어 주 전체 인구가 100만이 안된다는 점에 미루어 보면 이 수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노동조합들이 침체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공무원노조, 교원노조 등 공공노조들의 조직력과 확장력은 더욱 커져가고 있답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대학교수의 말이 재밌습니다. “자동차업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들은 보따리 싸서 타주나 다른 국가로 이동하면 되지만, 주정부나 학교 등은 이주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밥통을 위한 결속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랍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New Castle County Executive(뉴캐슬 군청장) Tom Gordon의 말입니다.

“노동조합이 미국의 중산층을 형성했지만, 더 이상 미국의 중산층은 없다. The union built the middle class in the country, but that middle class doesn’t exist anymore.”

바로 이 지점에서 갖는 질문 하나랍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는…

영화 “다이빙 벨”을 권하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 미국의 위치는 그리 내세울 정도가 못됩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명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가운데 몇몇 명함을 내놓을만한 분들 가운데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 1892. 6. 21.- 1971. 6. 1.)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교만(pride)”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사람의 교만(pride)에는 네가지 측면이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 둘째는 지적인 교만, 셋째는 도덕적 교만, 넷째는 종교적 교만>이라고 한 것이랍니다.

이즈음 제가 느끼는 사회적 현상은 바로 이런 교만들이 극에 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특히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드러내는 교만 가운데 하나이지요.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하여 남의 의견이나 남의 생각은 듣지 않으려하는 태도야말로 니버가 말한 교만의 집합체가 아닐까 한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가지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일테면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보도하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 오마이 때로는 일베와 고발뉴스 등을두루 살핀 뒤에 제 생각을 가름한답니다.

이 땅의 뉴스도 마찬가지랍니다. Fox 와 Washington Post와 함께 NewYork Times와 CNN과 동네 뉴스를 보고 나서야  생각을 가름하곤 하는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직도?”라고 묻는 분들을 위하여, 니버목사가 적시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영상 하나 소개 드립니다.

보시기 전과 후의 생각에 차이가 없어도, 아니 본래 생각하셨던 “그래서 왜 아직도인데?” 하셔도, 저는 절대 그게 교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니버목사가 말한 교만의 가장 큰 문제이자 죄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자신에게 갇힌 상태를 말한답니다. 그래 한번 보시라는 뜻으로 권해 드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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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 보시고 난 후, “좌파들이 꾸며 만든 이야기”라고 하셔도 저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