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

델라웨어주 부지사를 지낸 S. B. Woo는 팔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현역입니다. Woo씨는 현실정치에서 은퇴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단체 80-20 Initiative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이즈음 정열을 쏟고 있는 분야는 아시안 아메리칸 다음세대들이 교육 현장에서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가 의장으로 있는 80-20 National Asian American Educational Foundation(80-20 전국 아시안 아메리칸 교육재단)은 아시안계 다음 세대들이 교육현장에서 받고있는 다양한 차별들에 대한 보고서들을 내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대학입학 과정에서 아시안 학생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차별에 관한 글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이웃과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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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추수감사주일에 한 해를 돌아본다.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선 내게 한 해는 참 짧다. 그저 모든 일들이 어제 같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적을 둔 교회가 아닌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인 장모가 적을 둔 교회이다. 지난 해 장모께서 떠나신 후, 나는 그 교회 목사님께 약속을 드렸다. 일년에 네 번 쯤은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우리 내외는 침례교회 목사님 내외분을 비롯하여 교우들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 참으로 작은 신앙공동체이지만 공동체의 제 멋과 맛이 도두라져 내놓을만한 교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장모에게나 홀로이신 장인에게 딸, 사위보다 사뭇 가깝고 정겨운 교회 식구들이다. 감사 주일에 느끼는 감사의 크기가 남다른 까닭이다.

구순(九旬)을 코 앞에 둔 장인은 오늘 하모니카를 부셨다.

노인의 하모니카 소리에 함께 화답해 준 공동체 식구들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늪이 있는 공원에서 머물고 있는 가을의 마지막 풍경들과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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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어찌 성장하는 젊음만이 감사이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감사인 것을.

거짓에

뜰에 낙엽이 수북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지러울 지경이라고들 하지만, 계절의 변화처럼 때론 순차적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매양 한가지다.

모처럼 게으른 아침에 복잡한 세상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꺼내든 생각들은 노자와 예수이다.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僞위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 <신영복의 ‘강의’에서>

관습의 수호자는 항상 인간의 행동을 일반화하려고 애쓴다. 이 때 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 사용하는 끈은 거짓됨이다. – 중략 – 그들은 내적인 덕을 배양하는 대신에 사회를 보다 더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애쓴다. – <마틴 아론슨(Martin Aronson)의 ’예수와 노자의 대담’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  < 성서 누가복음 12장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일요일 아침에.

감과 ‘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지났다.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들고 우리 부부를 찾아온다. 십여년 이어져 온 일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Bill은 내 가게가 있는 델라웨어주 Newark 토박이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이 동네의 옛모습을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무우밭과 배추밭을 지나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 고향 신촌을 떠올리곤 한다.

무우밭과 배추밭이 있던 서울 신촌을 말하면 옛사람이듯, 옥수수밭과 한참을 가야 집 한채를 만나던 Newark을 이야기하는 Bill을 이해하려는 요즘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를 일이다.

Bill을 안지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보다 먼저 안 사람은 그의 부인 Mrs.민이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른다만 그때만 하여도 국제결혼이라고들 하였다.

Mrs.민은 거셌다. 그녀가 ‘뵤’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미군에 복무하던 Bill이 한국에서 근무할 때 만나 결혼한 Mrs.민은 그의 남편 Bill을 늘 ‘뵤’라고 불렀다.

Mrs.민은 거셌지만 여렸다. 같은 한국인들이 가까이 하기엔 거셌지만, 분명 Bill에게는 여렸다. 딱히 내가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Bill과 Mrs.민은 친구가 되었다. 세상 뜨기 전에 Mrs.민이 무당 내림 굿을 받았을 때도 나는 그의 집을 찾기도 하였다.

Mrs.민이 세상 뜬지도 벌써 십 수년이 흘렀다. 먼저 떠난 아내가 좋아하던 감나무의 감이 익을 때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따서 나를 찾아온다.

지난해에 얻은 외손녀 이름을 지으며 middle name에 Min을 넣었다며 좋아라 하던 ‘뵤’는 외손녀가 자라면서 어찌 제 마누라 ‘민’을 닮아가는지 놀랍단다.

늘 그렇듯 나는 한 바구니의 감을 가까운 ‘한인’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다.

오페라 구경

오후 4시가 지났을 뿐인데 밖이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흐린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간밤에 daylight saving time이 끝난 연유일게다.

1104172311_Burst01엊저녁엔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다녀왔다. 두어 달 전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벗인 하나 아빠가 한나 아빠인 내게 제안을 했었다.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말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난 웃을 뻔 하였다. ‘내가 오페라 구경을…?’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오페라 공연 무대를 찾아가 구경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오페라 공연을 본 것도 경험이라치면 그 구경이 전혀 처음은 아니랄 수도 있겠다만, 하나 아빠의 제안은 웃음이 나올 만큼 내 격과 분수에 크게 지나친 것이었다.

제안과 함께 이어졌던 하나 아빠의 권유였다. “사는 게 뭐 있어? 이제 와이프랑 함께 이제껏 하지 못하고 산 일들 한번씩 해보고 사는거지!” 나는 그 소리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제안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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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 우리들은 뉴욕 Metropolitan Opera House에서 오페라 ‘La bohème’ 구경을 하였다.

오페라 ‘La bohème’에 대한 이야기는 오페라 문외한인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한 후 잔상으로 남은 몇가지 간밤의 기억들이다.

‘뉴욕의 밤’, ‘도시의 밤’은 이젠 시골영감이 되어버린 내게 잠시 옛 생각을 즐기는 선물을 선사하였다. 그래 우리 부부도 한 때는 ‘도시의 밤’, ‘서울의 밤’을 누렸던 청춘이었다.

오페라 하우스에 간다고 나름 교회용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특히 구두를 신고) 나선 길이었다. 극장안엔 그야말로 선남선녀들이 오페라 하우스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들 오페라 연주보다 멋진 테를 뽐내었다. 그러나 예외는 늘 있는 법, 청바지에 캐쥬얼 차림으로 명랑한 젊음들도 보았다.

중간 휴식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좌석열 중간쯤에 위치한 자리를 찾아가는 노인 한 분을 위해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 부부를 비롯한 대여섯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 때 걸음걸이가 힘들어 보이는 그 노인이 한 말이다. ‘그대로 좀 더 서서 기다리쇼. 저기 내 친구 하나가 더 와요.’ 그래 우리들은 아직 젊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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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규모보다 더 큰 놀람은 관객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자막 시스템이었다. 오페라의 대사들을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 제공하는 자막이었는데, 각 개인 좌석에서 옆자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편함을 주지않고 누릴 수 있는 편의 제공이었다. 내가 오페라 ‘La bohème’을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는데, 내 스스로 시골영감임을 인증하는 것인 줄은 모를 일이로되 대단한 첨단 기술이었다.

무대의 정교함과 현실감 나아가 모처럼 들어보는 사람이 내는 소리의 완벽함 등은 내 눈과 귀의 수준에 비추어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도시의 밤’.

친구 잘 만나 강남 구경 멋지게 한 어제 일을 되새기는 사이 밖은 아주 이미 캄캄하다.

보헤미안(Bohemian)과 필리스틴(Philistine)들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세상에 대한 꿈은 내일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에 살아있는 자들이 할 일일 것이고, 친구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를.

두드림의 아름다움

독특한 연주회에 다녀왔다. 음악과 거리가 먼 내가 평일 저녁에 음악회는 솔직히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리, 이즈음 사물놀이에 흠뻑 빠져있는 가까운 후배 내외가 우리 동네에 와서 공연을 한다는 데야 안 가볼 수 없는 일이었다.

델라웨어 대학교 타악기 앙상블(UD PERCUSSION ENSEMBLE) 공연이었다. 음악회의 타이틀은 “EAST MEETS WEST”, 그야말로 동서양의 각종 두드리는 악기들이 모두 모인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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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한 무식을 그대로 드러내듯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난생 처음 본 타악기들의 소리들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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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막바지에 등장한 steel pan이라는 악기 소리에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솥 아니면 커다란 냄비라고 할까, 그걸 두드리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소리들이 터져 나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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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후배 안사람이 두드리는 우리 소리 바로 북과 장고였다.

아무렴 두드리며 두드리며 한을 풀어온 우리들의 소리인 것을.

이 가을에 두드림 소리로 만끽한 아름다움이라니!

말(言)에

  • 같은 말을 쓴다는 괴로움에 대해

내가 사는 동네에 한국식당이 세 곳 있다. 그 곳에 대한 연혁을 나는 꾀고 있다. 모두 내가 이 곳에 이민 온 이후에 생긴 식당들이기 때문이다. 거쳐간 주인들에 대해서는 더하고 뺄 것 없이 그저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다 들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저 들을 뿐, 돌이켜 식당에 대한 이야기를 좋고 나쁨을 이야기 해 본 적은 없다.(없는 것 같다.)

그 동안 세 집 모두 여러 주인들이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크게 돈을 벌어 그 업을 그만 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최근에 세 집 모두 성황 중이라는 이라는 이야기가 들려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세 집 모두 나름의 특성을 살려 독특한 한국식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한다. 한 집은 전통적인 한국 음식으로, 또 한 집은 일식 전문으로, 다른 한 집은 중식형 한식으로 잘 나간다는 소문이다. 너나없이 소규모 장사꾼들이 힘들어 한다는데 듣기만 하여도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 저녁, 모처럼 정말 모처럼 중국식 한식으로 이즘 잘 나간다는 식당에서 겪었던 일이다.

비록 내가 외식을 즐기지 않아 잘 가지는 않지만, 그 식당 주인은 내가 잘 아는 이다. 그러나 종업원들이야 잘 모른다.

아무튼 난 종업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시켰다. 그런데 잠시 후 내 귀에 들린 소리, “우리 지금 그런 거 안해, 바뻐 죽겠는데 뭐야…”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다.

‘아뿔사! 저 이는 우리 부부가 중국인들로 알았나 보다.’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몹시 불쾌했다. 나는 주인을 불러 내 불쾌함을 전하려 했는데, 아내는 참자 하였다.

내 기억 속에서 최근 이처럼 불쾌한 식탁은 얼마만 이던가? 참 꼽기 힘들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았더라면.

가을 산책

칠순 나이에 산행을 즐기시는 이길영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었다. 히말라야 베이스캠프까지 다녀오신 분에게 사실 말도 안되는 부탁을 드린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 산행은 좀 버거운 듯하니 이즈음에 걷기 좋은 산책코스 한 곳을 추천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가급적 왕복 하룻길이면 좋겠다고 덧붙였었다.

이선생님은 French Creek State Park에 한번 가보라고 즉답을 해주셨다. 지도를 검색 해보니 집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여서 솔직히 좀 실망이었다. 늘 보던 동네 풍경을 벗어나지 못한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집을 나선 후 약 10분쯤 지나자 네비게이션은 평소 전혀 다니지 않던 길로 접어 들라고 명령하였다. 그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이 선생님에게 대한 감사가 시작되었다. 가을걷이에 들어선 옥수수밭들과 목장 풍경들이 우리 부부의 시선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가을 아침 한 시간여 드라이브 코스 눈요기만으로도 오늘 산책길 추천에 대한 감사는 모자랄 것이다.

French Creek State Park 호수를 끼고 돈 산책길과 덤으로 즐긴 사과 따기, 산속에서 만끽한 비빔밥, 돌아오는 길에 즐긴 샤핑까지, 오늘 하루에 대한 감사는 이 치부책에 남겨 갚을 날을 꼽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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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든 생각이다. 그랬다. 일년에 몇 차례씩 전화 안부를 묻곤 한 게 벌써 십 수년이 지났건만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인 그의 목소리는 늘 넉넉했고 여유로웠다.

내가 사는 곳과 그가 사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사이의 간격이란 따지고 보면 서울과 뉴욕 사이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다. 다만 그와 내가 같은 업을 하고 있다는 까닭으로 연을 맺고 지내온 사이이다. 늘 넉넉하고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는 타고 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비즈니스나 가정사 더하여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일 터였다.

오늘 아침 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없었다. “아이구, 김사장님 이즈음 어찌 지내십니까?”라는 인사에 이어 그가 내게 전한 말들이다.

산불이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바로 그가 사는 동네를 덮쳤단다. 그 불로 집이 완전히 다 타버렸단다. 며칠 동안 교회와 몇 시간 거리에 있는 따님 집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오늘 가게인 세탁소로 나왔단다. 다행히 세탁소는 큰 피해는 없지만, 세탁소 손님들 대다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은 터라 가게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어허,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예의 그 넉넉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기도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나는 위로라고 할 만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온종일 마음 한구석을 딱히 무어라 할 수 없는 묵직한 것에 억눌려 지냈다.

때론 캘리포니아나 서울이나 모두 내 곁에 있다.

이웃의 생각

“알 수 없는 김정은, 더 알 수 없는 트럼프” – 가게 손님 한 분이 내게 던진 말이다. 연일 이어지는 한반도 뉴스들을 보다가 가게 손님들에게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하나가 제법 긴 답을 보내왔다. 내 나이 또래인데, 전력공급회사의 중견 간부로 있다가 최근에 은퇴한 이이다. 우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신중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경험과 생각을 이 곳에 오는 이들과 함께 한다. capture-20171008-085658

너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내 생각엔 만일 북한 지도자가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향후 몇 년 내에 한반도에서 (아마 다른 곳에서도) 죽음과 파멸의 시기가 올 가능성이 점차 커지는 것 같다. 만일 그(김정은)가 사람들의 거주지역 내에 핵폭탄을 폭발 시킨다면, 내가 어렸을 때 지녔었던 공포를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핵폭탄 대비 훈련을 여전히 기억한다. 기본적으로 그 훈련은 경보가 울리거나 버섯구름이 보이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일단 모두가 얼굴을 감싼 채 책상 밑에 들어가 있으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핵폭탄이 실제로 폭발하면,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부 과학자들과 그 프로젝트를 관장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영상물을 직접 본 군사지도자들만이 상황이 얼마나 참혹할지를 인식할 뿐이었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으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의 희망에 한 마디 덧붙인다. — 나는 평양의 미치광이가 자신이 택하고 있는 진로가 자기 나라의 주요 하부구조 상당 부분과 자신의 국민 (자신의 강제노역자들) 다수를 불타버리게 만들 가능성이 아주 높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일본과 남한의 수많은 사람들 또한 고통과 손실을 겪게 되고, 생활양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변하게 되거나, 혹은 잃게 될 것이다. 북반구의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들이 식량공급 영향, 질병, 불필요한 고통 등의 측면에서 수십년 동안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북한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에서 위대한 명예와 중요성을 이룩한 사람이기 보다는 자신의 나라를 파멸시킨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내 조상의 대다수는 네델란드에서 왔으며, 나머지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거의 반반이었는데, 우리의 마지막 이민 가족은 1884년에 도착했다. 미국 거주 나의 가족은 열 한 세대에 걸쳐 살았거나 살고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고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 또한 그들 국가들이 이후 379년에 걸쳐 상당히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떠나기 전 고국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신이나 나나 ‘어디에서 왔는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인간들은 같은 것들을 – 음식, 평안, 안정, 선택한 분야에서의 성공, 우리 지역사회에서 승인, 그리고 자녀들이 번창할 수 있는 좋은 기회 –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겠지만,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그러한 모든 행복의 수단을 성취할 가능성이 이 나라에서 보다 훨씬 낮다. 3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상당 부분뿐 아니라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도 파멸시킬 수 있다. 대규모의 전쟁은 피해야 하겠지만, 그 못지 않게 두렵다. 세번째 전쟁에는 모두가 잃게 될 것이다.


 

I hope your wish comes true, but my sense is that it is becoming increasingly likely that there will be a period of death & destruction on the Korean peninsula (and possibly elsewhere) in the next few years if the leader of North Korea doesn’t change course.  If he detonates a nuclear device within range of human habitation, it will bring home the fears that I grew up within as a small child to very many people.  I still remember doing the atomic bomb preparation drills in elementary school, which essentially was crawling under our desks when the alarm sounded or a mushroom cloud was seen.  Of course, once we were all under our desks with our faces covered, nobody had an answer for what would happen next and how we would stay alive.  If a bomb actually went off, only government scientists in the Manhattan Project and military leaders who had overseen that program and viewed the films of Hiroshima and Nagasaki realized just how bad things might become.  Crawling under a desk wouldn’t have saved anybody.

So I would add another line to your hope — I hope that maniac in Pyongyang comes to realize that the path he is taking will most likely incinerate much of the critical infrastructure of his country and many of its people (his forced labor).  Many people in Japan and South Korea will also suffer pain and loss, changing or losing what they know of a way of life.  The people and all other living things in the northern hemisphere will be affected for decades in terms of food supply impacts, sickness, and unnecessary suffering.  IF that is of no importance to the person who is responsible for the future of North Korea, then he will be remembered as the man who destroyed his country rather than someone who achieved great honor and importance in the world.

A majority of my ancestors came from the Netherlands, and the rest are fairly evenly split between Ireland and Scotland, with the last our our immigrant family arriving in 1884.  Eleven generations have lived or are living here in my family of American residents, and we have lost any detailed knowledge of what our homelands were like before we left simply because we have never been back for extended visits and those countries have changed quite a bit in the subsequent 379 years.  But I have learned that it doesn’t really matter where you or I ‘come from’, nearly all of humanity want the same things:  a supply of food, comfort, stability, success at our chosen endeavors, acceptance in our community, and good opportunity for our children to thrive.  Koreans are no different than anyone else, but in many of the countries of the world the chance of achieving all those measures of happiness is much slimmer than in this country.  A third world war could ruin that for not only a large portion of humanity but also many other species on this planet.  That scale of war needs to be avoided, but I fear it may not be.  Everyone will lose in the third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