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기

아직도 철들려면 멀었나 보다. 마음은 이미 저만큼 가 있건만 몸은 어찌 그리 더딘지. 이젠 몸 뿐 아니라 말조차 어눌해 진다는 느낌이 들 때면 공연히 맥이 풀리곤 한다. 다 철이 안든 탓일게다.

암투병으로 부쩍 늙어버린 오랜 단골 손님이 환하게 활짝 핀 얼굴로 가게를 찾아왔다. 세탁물과 함께 앙증맞은 호접란 화분을 선물로 주고 갔다. 맞아!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음에 틀림없다.

모처럼 개인 하늘 아래 오후, 서로들 이 계절의 주인이라고 뽐내는 내 뜰의 꽃들을 보며 몸과 맘의 속도를 맞추다. 신기하기도 하지. 물 주고 거름 주고 정을 준 꽃들보다 그냥 자란 꽃들을 보며 속도를 맞추었으니.  그래…. 나도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내 가게 뒤쪽으로 나들이 온 오리가족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하나. “흐음, 더는 새끼일 수도 없고…. 애비 애미도 아니고….”

난 여전히 뒤뚱거릴지라도 이젠 철들 나이임에 틀림없다. 삶에.

사람답게

편안하던 마음이 세상뉴스와 마주하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곤 한다. 특히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있던 말들이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는 소식들을 듣고 보노라면 참담한 마음으로 뉴스들의 속내를 파보곤 한다.

그런 오늘을 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손에 든 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슈미트 살로몬(Michael Schmidt Solomon)이 쓴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마라>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사람에 대한 저자의 사뭇 도전적인 단언적 주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화려한 별칭을 부여했던가. 호모 압스콘디투스Homo absconditus(신비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미학적 인간), 호모 크레아토르Homo creator(창조적 인간), 호모 이노바토르Homo innovator(독창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적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화자찬의 절정이자 고상한 우리 인간류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현명한 인간)가 있다. 별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인간에게 훨씬 적절한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인간의 하찮음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야기들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나처럼 교회 마당에서 뛰놀며 자란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듯.

그러나 그가 풀어내는 광기 서린 인간들이 만들어 냈던 지난 사람살이 이야기들에 빠져 들다 보면 밑줄 긋지 않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취하게 된다.

그가 광기 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분야의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종교다.

그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은 인간이 범하는 온갖 병폐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망상이라고 단언하다. 그가 예시로 들은 여러 종교적 광기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익히 듣고 보고 배운 사실들이다.

그 다음은 경제, 곧 소비지상주의 시대의 권력이 된 자본시장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광기, 곧 어리석음이다.

이어지는 광기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문화, 교육 분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인간들의 광기,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정치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했던 모든 형태의 바보 같은 짓, 이를테면 어리석은 종교, 어리석은 생태행위, 어리석은 경제행위가 정치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메가톤급 어리석음, 즉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통합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그의 고언이다. <씁쓸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모든 권력과 어리석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을 벗어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현명한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고 제시한다.

바로 어리석은 자들에게 종교, 경제, 문화 교육, 정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 분개가 아니라 문화적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탈피>를 외치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로  “지성의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수없이 퇴짜를 맞은 뒤, 마침내 지성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라는 프로이드의 성찰을 소개한다.

또한 <이제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에게 조종간을 넘겨주는 행위가 무책임한 일이 될 정도로 인류의 행보는 문화적으로 진보했고, 과학기술과 국제화를 통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권한다.

책을 덮으며 답답했던 마음들이 많이 사라졌다. 살아 숨쉬는 한, 어리석음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 *역자인 김현정이 번역한 책들 제목에 혹하여 몇 권을 주문하다.

이른 봄과 늦은 봄 사이를 가르는 비가 온종일 내리는 주일에.

흙과 재미

어느새 다섯 해 전 일이 되었습니다. 그 해 일월, 장인이 세상 떠나실 때만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장인의 장례는 준비했던 대로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떠나시는 어른께서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치루었지요.

이월이 되자 우리 동네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동네 신문을 크게 장식 했었답니다. 그리고 삼월이 되자 주를 넘나드는 여행에 이런저런 제약들이 생기더니만, 급기야 생활에 아주 필수적인 영업행위를 제외하곤 모든 영업을 중지하라는 주정부의 명령이 떨어졌지요.

그 해 이 맘 때인 오월 어느 날, 어머니께서 떠나셨지요. 아흔 세 해 여행길 마치시고 떠나시던 날, 어머니의 마지막 날숨은 아직도 제가 느낄 만큼 편안하게 다 내려 놓으신 듯한 여운으로 남아 있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치루어야 했답니다. 집례 목사님들과 가까이 사는 우리 남매들 부부들 그리고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던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 분들이 모여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었지요. 멀리 사는 여동생내외와 어머니의 손주들, 증손주들은 Zoom Meeting으로 , 장례예식을 마친 후, 교회당 앞에 세워 둔 어머니의 운구차를 향해 예식을 함께 하지 못한 교인들이 각 자의 차안에서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아주 독특한 사치까지 누리시며 어머니는 떠나셨답니다.

그게 벌써 다섯 해가 지난 일이랍니다.

제 삶의 재미가 바뀐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하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삶을 이어오던 제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무료하게 긴 시간을 던져 주었습니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게 차고 넘치는 것은 시간 뿐이었습니다.

특별히 가진 재능이나 취미 따위가 없는 제게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남는 시간들이 주어지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해 봄이 다 갈 즈음, 문득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흙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까지 전혀 몰랐었답니다. 한 뼘 땅속 흙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미를 미처 몰랐었답니다.

흙을 뒤엎어 숨 쉬시게 하고, 흙이 품을 씨앗과 모종과 묘목을 안겨 주고, 물을 주면 흙은 놀랄만한 창조물들을 보란듯이 내어 놓곤 하는 그 재미에 훅 빠져 다섯 해를 보낸 듯 합니다.

오년 전 갑자기 다가 온 남는 시간에 대한 불안은 이젠 부족한 시간에 대한 불만으로 바뀔 만큼 흙이 주는 재미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흙과 노는 사이에 점점 더 흙과 가까워지는 나이로 나아가곤 있지만, 이렇게 나이 들어 간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랍니다.

이른 봄꽃들을 거둔 흙들은 이젠 철쭉, 알리움, 라이락, 장미 등 늦봄과 여름꽃들을 내밀고 있답니다.

집 앞 꽃길도 따지고 보면 다 흙이 만들어 낸 놀이가 베푸는 재미일겝니다. 파 꽃은 일상의 작은 염려들을 재우는 재미까지 얹어 준답니다.

아침에

아침은 늘 새롭다. 아니 ‘늘 새로워야만 한다.’는 내 아집을 이 나이에도 버리지 못하는 내 고백이다. 아침 공기, 아침 바람소리, 아침 새소리 그리고 아침 하늘에 눈, 코, 귀를 맘껏 열어 제치는 내 습관에 대한 고백이다. 하여 아침은 늘 새로워야만 아침답다. 허나 내  주제에 어찌 그 욕심을 채우랴. 허다한 날 아침이 버겁고 이젠 그런 날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아직은 아침이 참 좋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내 가게가 있는 샤핑몰은 거의 삼 년 째 공사중이다. 몰 안에 많은 가게들 중 내가 두 번 째로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거의 24시간 영업을 하는 그로서리 체인점을 빼고는 내가 언제나 제일 먼저 가게 문을 연다.

그런데 이즈음 종종 나보다 먼저 공사판 일을 벌이는 일꾼들 모습을 보곤한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아침 새소리보다 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일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세탁소 일을 한지 거의 서른 다섯 해가 가까워 온다. 그 사이 별 일 다 겪었다. ‘겨우 이런 일 하려고 이민 왔나?’, ‘빨리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 할텐데…’ 등등. ‘혹’하는 생각에 빠져 이런저런 진창속을 많이 헤매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우리 내외 하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으로 그저 감사다.

오늘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얼마 안되었을 때 아주머니(할머니- 솔직히 나는 이제 구분이 잘 안된다. 내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이므로) 한 분이 예쁜 꽃바구니 하나를 건네 주셨다. <내 남편이 쓰러져 넘어졌을 때 도와주신 당신들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엊그제 일이었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가게 앞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고. 나가보니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괜찮냐?”는 내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보아 노인의 정신은 말짱했다. 꼼짝을 못하고 있는 노인은 다리통이 내 몸통보다 큰 듯한 거구였다.  우선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아내와 나는 거즈로 피를 닦고 붕대를 대며 물었었다. “911 전화를 해 드릴까요? 앰블런스 부를까요?” 노인은 연신 괜찮다며 자신의 차에 올라 앉게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운전해 병원을 가겠노라며.

순간 참 나는 난감했다. 내 힘으로는 그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웠으므로. 그는 거의 250파운드는 족히 넘지 않았을까?

하여 이웃가게 젊은이들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도와 줄 것을 요청했고, 노인을 겨우 겨우 그의 차에 태울 수 있었다. 노인이라고 했다만 나와 몇 살 차이나 났을까, 거의 내 또래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진이 빠진 나는 엉뚱한 감사의 맘이 일었었다. ‘아이고, 이렇게 작고 마르고 가벼운 내 몸에 대해 그저 감사. 어느 순간 내가 저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누군가의 진을 빼진 않을 터이니…’

바로 그 노인의 부인이 오늘 아침 꽃바구니를 들고 감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하여,  고백컨대…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어 감사다.

무엇보다 아직은 아침의 새로움 느낄 수 있어 감사다.

아침에.

<행복에>

아무 수식 없이 제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영근아’. ‘영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사는 동네에선 이젠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누워 지내시는 아버님이 유일한데, 아버지도 이젠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젠 제 이름 앞뒤로 이런 저런 수식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하다못해 ‘미스터’나 ‘씨’가 따라 다닙니다. 여기 친구들이 ‘Young’이라고 저를 부르곤 합니다만, 솔직히 ‘영근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답니다.

제 맨 이름 ‘영근아’나 ‘영근이’를 듣기 위해선 이젠 한국에 나가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반 년 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내 고향 신촌 친구들, 더더욱 대현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 옛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맨 이름들을 부르고 듣는답니다. 저는 친구들을 경자야, 경애야, 병덕아 라고 부르고 친구들은 저를 영근아 라고 부른답니다.

앞뜰 체리나무 꽃이 만개한 날,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과 함께 놀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 떨구며 지는 튤립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철 아름다움을 뽐냈던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각각 제 아름다움들이 다르더군요. 색깔과 모양들이. 튜립조차 다 같은 튜립들이 아니었답니다. 저마다 다 이름 하나씩 지어 주고 싶었답니다.

이제 저물어 가는 때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옛날 어릴 때처럼 제 맨 이름, ‘영근아’, ‘영근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에.

족보(族譜)에

손님 하나가 가게 한 쪽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보다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가족인가 봐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유독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를  가르키며 던진 말이었다. 그 물음을 던진 이도 얼굴이 까맸다.

“제 며늘아이지요. 그 옆에 제 아들, 그리고 이 쪽 옆으로는 제 딸과 사위랍니다. 제 가족들입죠.”

이어진 손님의 물음, “며느님 고향은 어딘가요?” 잠시 주춤거린 내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며느님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순간 나는 찔금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었다. 간신히 대답한 내 응답, “글쎄요? 며느리는 조상들이  이 땅에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아이라…” 그녀가 가게 문을 나서며 내게 던진 말, “한번 물어 보세요. 며느리께. 고향이 어딘지?”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며늘아이의 고향을.

내 우둔한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자 가르침이었다.

<아빠! 이미 몇 세대가 지난지도 몰라. 다만 조상의 누군가가 노예로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렸어. 아마 그 무렵 아프리카엔 나라라는 경계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은 틀린거야! >

순간 나는 많이 아팠다. 진보 흄내 내며 사는 내가 얼마나 가짜였는지…..하는 부끄러움으로.

파묘(破墓)에

간만에 속 ‘시원한 혁명적’ 한국 뉴스를 만나는가 했다. 결과는 분명 압도적이었건만 ‘시원한 혁명적’ 지점엔 도달하지 못했다.

‘시원답답’한 마음으로 필라에 올라가 영화 <파묘>를 보고 왔다. 아직 우리에겐 ‘뽑아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가장 앞에 서는 것 바로  ‘말’ 아닐까? 누군가의 ‘말’로 널뛰는 세상이 바로 정치요, 말이 세상을 세우는 명분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을 망치는 요설이 되기도 하므로. 그 위에 장난질 치는 으뜸 꼭두각시는 이른바 언론.

<언어가 없는 인간들에게 공동체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다는 점은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고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저주이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말이다

하여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는> 저주들을 찾아 파묘하는 일에 나서는 일. 바로 요설들에 혹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

사람들이 그 일에 매진하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파묘> 잘 보고 돌아온 날 밤에.

미술(美術)에

미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물론 아는 바도 관심도 전혀 없다. 어쩌다 미술 작품들과 마주할 때면 그저 내 느낌으로 받아드릴 뿐, 알고자 노력해 본 기억도 없다.

내 마지막 미술 교육 수업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상업고등학교라 교과목도 미술이 아닌 상업미술이었다. 내겐 참으로 재미없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학기 초 수업시간에 옆에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걸려 선생에게 오지게 맞았었다.

미술 선생의 수업은 독특했다. 그림에 대한 주제를 설명한 뒤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해당 시간에 다 그리지 못하면 그걸 완성해 오는 게 숙제였다. 그리고 그 다음시간 선생의 평가가 바로 내려졌다. 평가방식이 참 독특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우루루 교단 앞으로 나가서 열명의 학생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들고 서 있다가, 1번부터 한 명씩 순서대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기의 그림을 얼굴 높이로 들면, 교실 끝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던 선생이 평가를 내린다. 우수, 가작, 입선, 낙선, 선외 등으로 차례차례….

선생은 그림을 보는 것인지 학생 얼굴을 보는 것인지 나는 번번히 낙선 아니면 선외 평가를 받았었다. 나는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몇 안 되는 중고 대학 동창인 친구 하나가 이웃 반이었는데 그는 늘 우수 판정을 받곤 했다. 다행히 그 친구 반수업이 내 반 보다 먼저여서 그 친구가 우수 판정을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내가 판정을 받아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영락없는 낙선이었다.

그날 이후 미술선생은 더는 내게 선생이 아니었고, 소심한 내 복수는 그날 이후 미술과는 영영 담벼락 쌓고 지내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 나이에 미술사 책을 읽었다. 그것도 정말 재미있게 꼼꼼히 곱씹을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말이다. 이따금 책이 소개하는 그림들과 설명에 전율까지 느끼며 책에 빠졌었다. 김태진이 쓴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추상, 전위 등등 살며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이야기들에 홀렸던 것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들어 본 화가들의 이름이 제법 많다는 사실에 내 삶이 그리 팍팍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감사도 일었었다.

아무튼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글을 작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눈을 들어 당신만의 밤하늘을 보라. 그리고 시대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이끄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보라. 오직 통찰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그 모든 순간 재미가, 그 좋은 재미가 늘 함께 하길 바란다.>

작자는 이 맺음 말 전에 예술과 가까워지기 위해, 통찰을 얻기 위해 책을 권한다. 그것도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미술사는 곧 사람살이 성장사였다. “예술은 곧 인간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니까.”라는 쿤스의 말처럼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한 사랑, 사람 사랑 마침내 신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법을 안내에 준다. 무릇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게 된 오늘을 이야기하며 이 책은 이런 물음으로 끝난다. <이제 미술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단편적으로는 내 삶의 내일, 나아가 내 자식들과 이웃들의 내일에 대한 물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 재밌는 머리 속 그림 하나. 내 고등학교 일학년 상업미술시간 그 학급 모습. 킬킬거리며 얻어내 보는 은총 하나. 그가 참 미술선생이었는지도 모를 일. 그게 1969년도 일 터이니, 55년 전인데. 이제라도 미술사를 읽고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그의 덕일수도.

이 책을 권해 준 내 스승께도 감사를.

***개나리와 튤립에 길고 따스한 봄빛 내리며 저무는 하늘에 감사가 이는 저녁에.

관점에

오늘 손님 하나 가게로 들어서며 연신 내 뱉던 말, “Strange!  Strange! Unbelievable!

난 그의 말을 ‘이런 옘병할!’로 듣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사월에 장마도 아닐 터인데…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어제 밤엔 심하게 바람이 불더니만, 내 가게와 멀리 않은 곳으로 회오리가 지나가 곳곳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떳다.

손님의 날씨 불평이 어찌 그의 것이기만 하랴.

저녁에 비가 잦아든 창밖을 보니 그 빗속에서 튤립들이 배시시 얼굴들을 내밀었다.

하여 삶은 늘 익숙하고 믿을만한 것들의 연속이다.

기억에

한 시간 반을 달려가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들이 겪어 온 그리고 오늘도 겪어내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지난 십 년 쌓이고 쌓인 두 사람의 한(恨) 맺힌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오는 길, 곰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그들의 이야기는 맺힌 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네들이 아픈 마음으로 토해낸 이야기들은 한을 푸는 이야기들이었다.

십년 전 그야말로 허망하게 먼저 떠난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살며 그네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은, 생명을 생명으로 귀히 여기며 사는 공동체야말로 그들의 한을 풀어내는 세상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이었다.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그 피곤한 몸과 맘으로 지난 십년 그네들이 한풀이로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모인 내 오랜 벗들이자 반가운 얼굴들.

나는 다시 신(神)의 긴 호흡을 믿으며, 그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웅얼거리며 내려왔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