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동네 뒤쪽에 있는 체육공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걸어서 고작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지난 해에는 펜데믹으로 불꽃놀이를 열지 못했다. 올핸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전제로 불꽃놀이가 있었다. 일테면 일정한 거리두기, 벤더 또는 푸드 트럭 영업금지, 가급적 차량 안에서 구경하기 등의 주의사항들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산지 얼추 25년이니 그 세월 동안 불꽃놀이를 즐겨온 셈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이들 손잡고 좋은 자리 찾아가 구경을 했고, 아이들이 머리 굵어진 이후엔 우리 내외만 구경을 나서기도 했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집을 떠나고, 우리 내외도 다리 품 팔면서 구경 나서지는 않는다. 그저 윗층 창문을 통해 바라보거나, 집 앞뜰에 서서 불꽃놀이를 즐긴다.

뜰에서 덤덤하게 불꽃놀이를 바라보다가 들어와 앉아 지난 시간들을 두서없이 곱씹는다.

그러다 문득 떠올린 Walt Whitman의 선언.

<억겁을 거쳐 나에게 까지 다다른 이 시간 이보다 더한 좋은 때는 없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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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참 좋은 벗들이 있음은 내가 살며 누리는 복 가운데 하나다. 더더구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엇비슷한 시각과 시선으로 함께 바라보며, 그 뜻을 헤아리는데 다툼이나 삐짐 없이 훅 또는 맘껏 제 속내 들어낼 수 있는 벗들임에랴! 그저 만나서 참 즐거운 일이다.

펜데믹 탓으로 거의 일년 반 만에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그저 소소한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우리들의 공동 목표에 대한 이야기들로 모처럼 만남의 기쁨을 한껏 즐겼다.

나야 어쩌다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끼여들은 처지이지만, 함께 한 벗들은 지난 삼, 사십 년 동안 필라델피아를 근거로 평화, 통일, 민주, 인권 등등 거대 담론에서부터 그저 사람 답게 하루를 살아가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에 이어진 행동들을 함께 해 온 이들이다.

벗들은 지난 수 년 동안 한 푼 두 푼 작지만 뜻있는 종자 돈을 모아왔다. 이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우리 세대 보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만드는 일에 나설 수 있도록 기반을 닦고자 함이었다.

앞으로의 일이야 어찌 알겠느냐만, 그저 나름의 역사성을 곱씹으며 오늘에 충실한 벗들이 참 좋다.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한 친구가 아직은 검은 머리인 내게 물었다. ‘염색 안하시죠? 어떻게 아직도…’. 이어진 내 짧은 대답, ‘아! 머리를 안 쓰고 사니까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거나 머리털이 아직은 까만 것은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그저 타고난 체질일게다. 그렇다하여도 이즈음 거의 머리를 안 쓰고 사는 것은 사실이다.

어찌보면 내 일상과 세상사(事)는 내가 살아 온 지난 시간들과 다름없이 혼돈(渾沌)의 연속이지만, 그냥 그대로 그 혼돈을 받아 들이며 그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즐기려 하는 편이다. 머리 쓰지 않고.

그러다 이 나이에 장주(莊周)를 만나면 그 또한 복일 터이니.

이즈음 내 삶의 또 다른 참 좋은 벗들, 내 뜨락에 푸성귀와 꽃과 풀잎들.

벗들로 하여 누리고 있는 내 복에 대해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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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

외식(外食)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니 가히 15개월여만이다. 간혹 take-out한 경우는 있었지만 식당 테이블에 앉아 본 일은 참 오랜만이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이웃 마을을 찾아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누리다. 작은 마을 금요일 저녁은 팬데믹과는 상관없는 해방구였다.

거리 구경을 하며 걷는 우리 내외를 향해 누군가 전하는 인사말. “아유~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차안에서 소리치는 귀에 익은 한국어였다.  연(緣)의 끈들이 이어져 있기에 살아있음이다.

“우리가 부모님들 처럼 함께할 수 있을까?” 아내의 물음에 나는 차마 강한 부정은 못하고 웃었다. 내 부모는 70년, 처부모는 60년 해로를 하셨는데… 우리 부부가 그걸 넘으려면 내 나이가?… 쯔쯔쯔…. 하여 웃다.

바라기는 이렇게 저렇게 얽힌 연들과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이런저런 소소한 시름과 걱정들 속에서도, 우리 내외가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고 감사하는 날들이 어제보다는 넉넉해지기를.

모처럼의 외식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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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밑의 개들

글의 시작은 삶의 처절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내려 가는…그러나 꾹 참고 써야했습니다. – 7쪽,  기막히고 황당했다. – 22쪽,  (그들은)야비했다. -81쪽>

글은 벼랑 끝에 선 절박함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이어 전한다.
<서둘러야 했다. 집중해야 했다. …버텨야 했다.  237쪽>

글 곳곳에는 곤고한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 같은 고백이 이어진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 101쪽, 고마웠다. 239쪽, 가슴 찡하게 감사했다. 278쪽>

그리고 글 말미에 적힌 주인공의 다짐이다.
<‘불씨’ 하나만 남아 있으면 족하다. 이 불씨 하나를 꺼뜨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며 주어진 삶을 살 것이다. 280쪽>

그렇게 책 <조국의 시간>을 덮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던 장면, 바로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이었다.

<형벌의 수단으로써 십자가는 고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 그것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형벌이었으며 또 그런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무엇보다도 … 특히 유대의 불순분자들에게 과해졌다. 그것을 사용한 주된 이유는 소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억제력으로서의 탁월한 효과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십자가들에 달린 희생자들이 야수들과 새들의 먹이로 제공된다는 것은 일반화된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십자가에 달린 이)의 수치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졌다.> – 마틴  헹엘(Martin Hegel) 이 쓴 <고대 십자가 처형과 십자가 메시지의 오류Crucifixion in the Ancient World and the Folly of the Message of the Cross>에서

<로마의 극형 세 가지는 십자가와 화형과 야수였다. 이것들을 최악의 것이 되게 한 것은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잔인성이나 공개적인 명예 실추 때문이 아니라, 이런 처형의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매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십자가형에 대하여 우리가 흔히 잊어버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나 죽어 가는 자들의 위에서 울어 대고 밑에서 짖어 대는,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와 개의 존재이다.> –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에서

나는 글의 주인공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길 ‘불씨’ 하나 품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

다만 십자가 밑에서 침 흘리는 개떼들 같은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할 터이다. 비록 내 초라한 일상 속에서만이라도.

*** 책 <조국의 시간> 마지막 표지에 실린 도서출판 한길사 광고에 ‘한나 아렌트’의 명저들이 실린 발상에 탄성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쉽게 십자가 밑의 개떼들로 변할 수 있다는 아렌트의 가르침과 이어져 참 좋았다.

족(足)함

피할 수 없이 맞을 매라면 몰아서 맞는 편이 낫다든가? 한 주 사이에 여러 대 맞았다. 누군가 아내의 차를 박는 접촉사고로 일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일주일 이상 차수리를 받아야 한단다. 보험회사, 딜러 수리센터, 렌트카 등등 안해도 좋은 일들로 시간을 뺏겼다.

세탁업이 내 천부의 업이거니 치부하고 산 이래 오늘까지 손님들과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손님과 몸싸움을 벌리고 경찰을 부르는 일을 겪었다. 몸싸움이라고 했지만 나이 들고 왜소한 내가 까만 얼굴의 이십 대 젊은 아이와 무슨 싸움을 했겠나, 그저 당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마스크를 벗어도 좋은 시절이 다가와 가게 매상이 좀 나아지려니 하는 부풀었던 꿈은 중장비가 내 가게 바로 앞에서 요란한 굉음과 먼지를 만들어내는 통에 사라졌다. 내 세탁소가 있는 샤핑센터 한 쪽엔 이즈음 아파트 건립공사가 한창이다. ‘너희들 이젠 대박나겠네!’하며 손님들이 건네는 덕담이 무색하게도 공사의 일환으로 내 가게 앞 도로와 주차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글쎄? 얼마나 걸릴런지… 건물주의 계획은 믿을 것이 못되니, 아마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내 가게 팬데믹은 이어질 듯 하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잘 버티어 오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저녁진지를 들고 아파트에 들어서자 조용하였다. 거실문을 열자 아버지는 침대 곁에 쓰러져 계셨고 “어,어,어…”하시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응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기셨다.

결정타를 맞은 것은 이튿날이었다. 두 해전에 아내가 어깨 수술을 받았는데 시술한 병원으로부터 날아 온 거금의 청구서였다.

그렇게 맞은 메모리얼 연휴였다.

매를 맞기 전 연휴계획은 내 집 driveway seal coating을 하고, 아들 며느리와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샤핑을 즐길 생각이었다.

차수리에 연관된 일들은 모두 예약을 마쳤으니 시간이 흐르는 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고, 가게 앞 공사야 내 뜻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 역시 시간의 흐름에 맡길 일이고, 병원에서 날라온 청구서에 대해서는 그 수술을 받은 이후 우리 내외가 받은 보험회사 및 병원의 모든 서류들을 정리하여 다툴 준비를 끝내었으니 그 또한 시간이 흐르면 정리될 터. 다만 하지 않아도 좋을 헛수고와 시간을 빼앗기는 게 크게 아쉬울 뿐.

그리고 아흔 다섯 내 아버지.

병원은 여전히 팬데믹으로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라,  환자 면회는 아침 11시에서 7시 사이 일일 딱 한사람만 허용이 되는 상황이어서 토요일엔 누나, 일요일엔 누이동생, 그리고 오늘은 내 차례였다.

왼쪽 뇌로 통하는 혈관이 거의 막혀 갑자기 닥친 stroke으로 언어마비증세와 몸 오른쪽 마비 증상을 보이셨던 아버지의 증세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놀랄만한 호전이 일어났다. ‘어어어’만 하시던 첫날 밤이 지나자 누나는 단어를 말하시는 아버지 모습을 전해왔고, 이튿날 누이동생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시는 아버지 목소리를 듣게 하였다. 그리고 오늘 아버지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실 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에게는 영어를 내겐 한국말로 갈라 말씀하실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 모습을 보이셨다.

끼니 때 마다 잘 잡수셨고, 잠도 잘 주무셨다. 그런 아버지 덕에 그 곁에서 책 한권 읽었다.

게자 버미스(Geza Vermes)가 쓴 <유대인 예수의 종교(The Religion of Jesus the Jew)>다. 내 삶에서 예수를 놓지 못하게 하는 그의 생각들은 그저 곱씹어 살 뿐.

그로 인해 다시 곱씹어보는 성서 구절 하나.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마태 6장 34절

아버지 덕에 나는 하루 도(道)를 닦고,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는 족(足)한 하루를 보내다.

뒷뜰엔 내 수고 없이 핀 꽃이 나를 토닥이고…하여 나는 오늘도 예수쟁이…. 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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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冊

워낙 이렇다하게 가진 것 없는 삶인데도 집안을 휘이 돌아보면 온통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 중 하나가 책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갖다 버리자’라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곤 했던 녀석들이 바로 책이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행여 우리 부부 노년을 위해 이사라도 할라치면 가장 크게 힘들일 듯 하기도 하거니와, 이젠 제 아무리 선견(先見)이라도 남의 소리에 귀 기울일 나이는 지난 듯하다는 건방진 생각도 들고하여 일곤하는 충동이다. 그보다 가장 큰 까닭은 이젠 책장을 넘기는 지적 사치보다는 그저 시간 나는대로 나와 이야기하는 순간들을 즐길 때가 아닐까 하는 겉늙은 생각 때문이다.

허나 아직은 차마 책들을 싣고 가까운 재활용품 쓰레기 처리장을 찾는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다만 새로 책을 구입하는 일은 극도로 자제 한다.

며칠 전 필라 세사모(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모임) 이야기방에 멤버 한 사람이 공지 글을 남겼다. 그이의 사정상 갖고 있는 책들을 정리해 처분하고자 하는데 혹시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나누어 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꼼꼼히 정리해 놓은 거의 오백 여권에 달하는 그이가 처분하려고 하는 책 목록을 보면서 혹 하는 책들이 몇 권 있었다만 아니다 싶어 참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야기방에는 하나의 제안과 그 제안을 구체화 하는 의견이 올라왔다. 그이가 정리하려고 하는 책들을 한 곳에 모아 도서관을 만드는 시초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었는데,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단체 ‘우리센터’가 그 일을 맡아서 해보자는 의견이었다.

<저소득층, 이민자, 영어 구사가 제한적인 이들, 서류 미비자, 여성, 노인 및 청소년을 포함해 우리 사회 내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겪는 문제들의 해소를 위해,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의 주인의식과 역량을 강화하고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우리센터’가 그 일을 맡기엔 아주 적합하다는 생각에 나도 적극 동의하였다.

그 동의의 뜻으로 그 동안 억제하고 있었던 책 구입을 서둘렀다. 재활용품 쓰레기장이 아닌 누군가 다른 이들의 손에 들려 책장이 넘어가는 일이 일어난다면  오늘의 내 욕심이 과한 것만은 아닐 듯하다는 자족으로.

그 구입 리스트에 신간으로 하나. 조국이 쓴 <조국의 시간>을 더하다.

오후에 뒷뜰 언덕배기 잡풀들을 베다가 자칫 다칠 뻔한 이름 모르는 꽃과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처마 끝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보며 든 생각 하나.

‘이왕 사는 거, 사는 날까지 나와 이웃과 선견 소리에 세심하게 그저 듣고 보기만이라도 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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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이제 그만 둘 만도 한데 아내는 지치지도 않는지 그 일을 여전히 즐기며 좋아한다. 만  31년 째 이어가는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 일이다.

아내는 이즈음 성인반을 맡고 있다. 학생들은 이십 대에서 환갑에 이르는 나이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비한국계 미국인들과 부모 한 쪽이 한국계인 이들이다. 학생들은 K-pop이나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몇몇은 한국여행도 다녀왔다.

지난 일년 동안 팬데믹 영향으로 온라인 수업을 이어오다가 다음 학기부터는 대면 수업을 하게 되어 학생들이나 선생이나 이즈음 새로운 기대가 넘치는가 보다. 온라인 수업을 정리라도 하는 듯,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의 재능들을 모아 아주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각자 녹음한 파트별 음원을 모아 믹싱을 하고 수화자막도 만들고 그렇게 비록 지극히 어설프지만 나름 대단하게(?) 만들어낸 ‘어머니의 은혜’ 동영상이다.

감자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살아 온 서울 촌놈인 내가 감자를 심어 꽃을 보는 신기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즈음, 아내와 내가 여전히 즐기며 좋아하는 일들이 있고 그를 누릴 수 있음은 감사다.

그 감사의 바탕에 내가 미안하고 부끄러워야 마땅할 얼굴들을 지울 수 없다만.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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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어머니 살아 생전에 남기셨던 말씀 가운데 하나. “네 딸 웨딩 가운은 내가 꼭 맞춰주마. 내가 할 일 중 하나다.”

어머니는 말씀처럼 언제 시집갈 지도 모를 손녀 딸 웨딩 가운 맞출 돈을 따로 남기고 떠나셨다. 그 일을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 본 적은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즈음 딸아이는 바쁘다. 오늘, 몇 벌의 웨딩 가운을 입은 사진들을 보내며 아내와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보라고 하였다. 우리 내외는 그 중 하나로 같은 마음이 닿았다. 그러자 딸아이가 하는 말, “그 중 제일 비싼데…” 아내가 물었다. “얼만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딸아이가 말한 가격은 정확히 어머니가 남기신 돈과 일치했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사뭇 간절한 기도를 이어갈 듯 하다. 어머니를 위해 해 본 적 없는 기도를… 딸을 위해.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듯 똑같이 말씀하실게다.  “이 눔아! 아무렴 네 자식 위한 일인데… 그래야  당연하지!”

나이 들어도 신기한 일은 늘 이어진다.

그렇게 삶에 감사도 이어지는가 보다.

오늘

오늘 델라웨어 주지사는 질병관리통제센터(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새로운 지침에 따라 다음 주 금요일인 5월 21일부터 야외는 물론 대부분의 실내 모임에 이르기까지 백신 접종을 완전히 끝낸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거리두기 역시 제한을 두지 않고, 식당, 상점 교회 등 실내모임의 제한 인원 규제 등도  해제한다고 덧붙였다.

만 일년 이 개월 동안 이어져 온 주민들의 생활양태가 완전히 바뀌어 옛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문이 전하는 주민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다. 환호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이른 처사이어서 당분간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겠다는 이들도 많단다.

이대로 팬데믹 이전의 생활을 누리게 될런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하지는 못할게다.  다만 늘 그래왔듯 사람들은 바뀐 생활양식에 쉽게 적응해 나가리라.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를 읽다가 생활양식이라는 말에 꽂혀 몇 번이나 곱씹어 본 문장 하나.

<그것(하나님의 나라)은 미래를 향한 삶의 희망이라기 보다는 현재를 위한 생활양식이다. It(Kingdom of God) is a style of life for now rather than a hope of life for the future.>

온전히 제 뜻으로 만들어 나가는 생활양식을 통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말.

저녁나절 새소리 들으며 마음 다스리는 짧은 시간을 누리는 이즈음의 축복이 그저 감사하고 때론 미안하다.

오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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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주일 아침에

어머니 일주기에 맞는 어머니 주일 아침, 어머니 생각하며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제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거나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에 충실했던 분이셨습니다. 때때로 엉뚱한 당신의 고집조차 상식적인 사람살이라고 우기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우시고 난 뒤인 쉰 넘은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셔서 성경도 읽게 되셨고, 영어로 당신의 이름 정도는 쓰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으뜸가는 관심은 가족이었습니다. 평생 제 아버지의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이 가장 우선하는 그녀의 관심사였습니다. 세 딸들은 비교적 그런 어머니의 바램대로 잘 살아온 듯 합니다만, 아들인 저와는 그렇게 잘 맞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저는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썩였었습니다. 제 꿈이 너무 컷던 탓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제 꿈들을 헛 꿈이라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어머니의 초청으로 내가 크게 내키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오던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이놈아! 이젠 헛 꿈들일랑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어! 작업복 몇 벌만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그렇게  시작된 세탁소랍니다. 그 무렵 윌밍톤과 뉴왁시 일대에는 70군데 가까운 세탁소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서로 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보자는 생각으로 세탁인 협회를 만들고, 나아가 델라웨어 한인 사회 일을 맡아서 하고,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저를 보며 어머니는 혀를 차셨습니다. “쯔쯔, 네 팔자다! 아직도 헛 꿈을 버리지 못하니… “

그런 어머니를 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나이 60이 거의 다 되어서 였습니다. 세탁소가 제 천직임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젠 그 세탁협회도 없어지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직도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오늘 저녁 어머니를 뺀 저희 모든 가족들이 함께 한답니다. 비록 모두 함께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Zoom Meeting으로 함께 한답니다. 아버지와 제 형제들과 어머니의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한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헛 꿈이라고 말씀하신 그 꿈은 버리지 못했답니다. 다만 더 이상 그 꿈을 쫓지는 않는답니다.

어머니가 살아 생전 지켜왔던 상식들에게 만이라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직 세탁소의 하루 하루를 즐거워 하며, 오늘 아침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제 어머니 덕입니다. 그래 감사하는 하루랍니다.

그 맘으로 당신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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