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에

손님 하나가 가게 한 쪽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보다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가족인가 봐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유독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를  가르키며 던진 말이었다. 그 물음을 던진 이도 얼굴이 까맸다.

“제 며늘아이지요. 그 옆에 제 아들, 그리고 이 쪽 옆으로는 제 딸과 사위랍니다. 제 가족들입죠.”

이어진 손님의 물음, “며느님 고향은 어딘가요?” 잠시 주춤거린 내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며느님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순간 나는 찔금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었다. 간신히 대답한 내 응답, “글쎄요? 며느리는 조상들이  이 땅에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아이라…” 그녀가 가게 문을 나서며 내게 던진 말, “한번 물어 보세요. 며느리께. 고향이 어딘지?”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며늘아이의 고향을.

내 우둔한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자 가르침이었다.

<아빠! 이미 몇 세대가 지난지도 몰라. 다만 조상의 누군가가 노예로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렸어. 아마 그 무렵 아프리카엔 나라라는 경계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은 틀린거야! >

순간 나는 많이 아팠다. 진보 흄내 내며 사는 내가 얼마나 가짜였는지…..하는 부끄러움으로.

파묘(破墓)에

간만에 속 ‘시원한 혁명적’ 한국 뉴스를 만나는가 했다. 결과는 분명 압도적이었건만 ‘시원한 혁명적’ 지점엔 도달하지 못했다.

‘시원답답’한 마음으로 필라에 올라가 영화 <파묘>를 보고 왔다. 아직 우리에겐 ‘뽑아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가장 앞에 서는 것 바로  ‘말’ 아닐까? 누군가의 ‘말’로 널뛰는 세상이 바로 정치요, 말이 세상을 세우는 명분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을 망치는 요설이 되기도 하므로. 그 위에 장난질 치는 으뜸 꼭두각시는 이른바 언론.

<언어가 없는 인간들에게 공동체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다는 점은 동물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합리적 사고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축복이고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저주이다.> –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남긴 말이다

하여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일시적인 욕망과 기호에 따라서나, 산만하게 언어를 사용하여 재앙을 초래하는> 저주들을 찾아 파묘하는 일에 나서는 일. 바로 요설들에 혹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대를 넓혀 가는 일.

사람들이 그 일에 매진하는 세상을 꿈꾸며.

영화 <파묘> 잘 보고 돌아온 날 밤에.

미술(美術)에

미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물론 아는 바도 관심도 전혀 없다. 어쩌다 미술 작품들과 마주할 때면 그저 내 느낌으로 받아드릴 뿐, 알고자 노력해 본 기억도 없다.

내 마지막 미술 교육 수업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상업고등학교라 교과목도 미술이 아닌 상업미술이었다. 내겐 참으로 재미없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학기 초 수업시간에 옆에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걸려 선생에게 오지게 맞았었다.

미술 선생의 수업은 독특했다. 그림에 대한 주제를 설명한 뒤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해당 시간에 다 그리지 못하면 그걸 완성해 오는 게 숙제였다. 그리고 그 다음시간 선생의 평가가 바로 내려졌다. 평가방식이 참 독특했다. 1번부터 10번까지 우루루 교단 앞으로 나가서 열명의 학생이 자기가 그린 그림을 가슴높이로 들고 서 있다가, 1번부터 한 명씩 순서대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자기의 그림을 얼굴 높이로 들면, 교실 끝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림을 쳐다보던 선생이 평가를 내린다. 우수, 가작, 입선, 낙선, 선외 등으로 차례차례….

선생은 그림을 보는 것인지 학생 얼굴을 보는 것인지 나는 번번히 낙선 아니면 선외 평가를 받았었다. 나는 장난을 쳐 보기로 했다. 몇 안 되는 중고 대학 동창인 친구 하나가 이웃 반이었는데 그는 늘 우수 판정을 받곤 했다. 다행히 그 친구 반수업이 내 반 보다 먼저여서 그 친구가 우수 판정을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내가 판정을 받아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영락없는 낙선이었다.

그날 이후 미술선생은 더는 내게 선생이 아니었고, 소심한 내 복수는 그날 이후 미술과는 영영 담벼락 쌓고 지내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이 나이에 미술사 책을 읽었다. 그것도 정말 재미있게 꼼꼼히 곱씹을 곳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말이다. 이따금 책이 소개하는 그림들과 설명에 전율까지 느끼며 책에 빠졌었다. 김태진이 쓴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이다.

고전주의,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추상, 전위 등등 살며 한번쯤은 들어 보았던 이야기들에 홀렸던 것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들어 본 화가들의 이름이 제법 많다는 사실에 내 삶이 그리 팍팍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감사도 일었었다.

아무튼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 글을 작자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눈을 들어 당신만의 밤하늘을 보라. 그리고 시대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이끄는 삶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보라. 오직 통찰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그 모든 순간 재미가, 그 좋은 재미가 늘 함께 하길 바란다.>

작자는 이 맺음 말 전에 예술과 가까워지기 위해, 통찰을 얻기 위해 책을 권한다. 그것도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권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

미술사는 곧 사람살이 성장사였다. “예술은 곧 인간 사랑이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하니까.”라는 쿤스의 말처럼 책을 읽으며 나에 대한 사랑, 사람 사랑 마침내 신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법을 안내에 준다. 무릇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미술 역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게 된 오늘을 이야기하며 이 책은 이런 물음으로 끝난다. <이제 미술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단편적으로는 내 삶의 내일, 나아가 내 자식들과 이웃들의 내일에 대한 물음에 가 닿을 수 있는 물음이었다.

** 재밌는 머리 속 그림 하나. 내 고등학교 일학년 상업미술시간 그 학급 모습. 킬킬거리며 얻어내 보는 은총 하나. 그가 참 미술선생이었는지도 모를 일. 그게 1969년도 일 터이니, 55년 전인데. 이제라도 미술사를 읽고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쩜 그의 덕일수도.

이 책을 권해 준 내 스승께도 감사를.

***개나리와 튤립에 길고 따스한 봄빛 내리며 저무는 하늘에 감사가 이는 저녁에.

관점에

오늘 손님 하나 가게로 들어서며 연신 내 뱉던 말, “Strange!  Strange! Unbelievable!

난 그의 말을 ‘이런 옘병할!’로 듣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도 아니고, 사월에 장마도 아닐 터인데… 지난 일요일부터 오늘까지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어제 밤엔 심하게 바람이 불더니만, 내 가게와 멀리 않은 곳으로 회오리가 지나가 곳곳에 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떳다.

손님의 날씨 불평이 어찌 그의 것이기만 하랴.

저녁에 비가 잦아든 창밖을 보니 그 빗속에서 튤립들이 배시시 얼굴들을 내밀었다.

하여 삶은 늘 익숙하고 믿을만한 것들의 연속이다.

기억에

한 시간 반을 달려가 두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들이 겪어 온 그리고 오늘도 겪어내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지난 십 년 쌓이고 쌓인 두 사람의 한(恨) 맺힌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오는 길, 곰곰 두 사람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니, 그들의 이야기는 맺힌 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네들이 아픈 마음으로 토해낸 이야기들은 한을 푸는 이야기들이었다.

십년 전 그야말로 허망하게 먼저 떠난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살며 그네들이 걸어 온 이야기들은, 생명을 생명으로 귀히 여기며 사는 공동체야말로 그들의 한을 풀어내는 세상이라는 고백이며 선언이었다.

멀리 한국에서 여기까지 그 피곤한 몸과 맘으로 지난 십년 그네들이 한풀이로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꼼꼼히 기록하고 정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자리에 함께 모인 내 오랜 벗들이자 반가운 얼굴들.

나는 다시 신(神)의 긴 호흡을 믿으며, 그 자리에서 불렀던 노래를 웅얼거리며 내려왔다.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절대로 잊지 않을게/ 꼭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아무도 외롭지 않게”

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

여행 – 성(聖)과 속(俗) -그 마지막 이야기

이른 아침 숙소를 나선 우리는 로마 구시가지로 향했다. 그리고 해가 질 때까지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오후 두어 시간은 골프 카트를 타고 안내자인 Willy에게 그 거리 구석구석에 담긴 이야기들 들으며 로마의 옛 모습들을 눈에 담았다.

비록 짧은 지식이지만 로마의 신화와 전쟁, 권력 암투, 정복, 제국이 품은 종교 또는 종교가 품은 제국에 대한 역사들을 떠올려 보며 그 거리들을 걸었다. 때론 영화 벤허와 로마의 휴일 등을 떠올리기도 했었다. 비록 그 유적지는 가보지는 못했다만 사람 베드로와 바울의 여정을 떠올려 보기도 했었다.

로마는 그야말로 이야기의 도시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 앞에서 겪은 일이다. 우리 일행은 사진도 찍고 남들처럼 분수를 뒤에 지고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며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애띤 얼굴의 젊은 한 쌍의 동양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한국분들 이시지요?” 누구랄 것도 없이 “예’라고 응답했더니, 아이들이 하던 말, “저희들 사진 좀 찍어 주실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준 후 물었었다. “어디서들 오셨나요? 서울 아님 다른 곳?” 그들이 한껏 웃음을 띠고 했던 대답이었다. “저희들은 일본사람이예요. 일본에서 왔어요.” 깜작 놀라 우리들이 물었다. “아니 어떻게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요?”  아이들의 이어진 대답. “한국 드라마 보며 배웠어요.” 그 순간 아내의 뜬금없이 빨랐던 반응, “아! 겨울연가?” 아이들이 웃으며 답했다. “아니 그건 오래 된 것이라 잘 모르고요…. 이즈음 거.”

그랬다. 한국 드라마와 K-pop의 위세는 최근 십 수 년 사이 한국을 새롭게 각인 시키는 촉매였다. 아내가 삼십 수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동네 한국학교의 큰 변화도 바로 한국 드라마와 K-pop이 만든 것이다. 이즈음 아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한국계 다음세대들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반한 비한국계 미국인들이므로.

“감사합니다”하며 떠나는 일본 아이들이 더 예뻐 보였다. 이즘 애들은 계집아이나 사내녀석이나 어찌 모두들 그리 예쁜지.

나는 그 분수 연못에 동전을 던지며 빌었었다. ‘그저 이 순간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봐주실 수 있다면, 우리들이 몇 번은 더 이런 여행을..”

카트를 운전하며 우리들을 안내했던 멋진 사내 Willy는 이태리인 아버지와 이집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그는 이태리에 대한 사랑 못지 않게 이집트에 대한 자부가 크게 드러나는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우리들의 여행의 준비자이자 이끄는 대장이자 일꾼인 최권사는 다음 여행 예정지로 이집트를 꼽곤 했었다. 그 말이 생각나 Willy 앞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들의 다음 여행 예정지는 이집트라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요리강습 이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권사의 뛰어난 발상이었고 우리들의 여행을 오래 간직할 수 있게 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들에게 파스타 만들기를 가르쳐 준 Romina 선생댁은 바티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학생들은 우리 일행 넷과 뉴욕에서 영화배우를 꿈꾸며 공부하고 있는 학생 한 명, 그렇게 다섯이었다.

우리들은 Romina 선생의 시범을 보며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반죽을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들거나 만두를 빗듯 라비올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저녁상을 함께 만들고 나누는 멋진 시간들을 즐겼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 시절만 하여도 교회는 ‘거룩함(聖)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었었다. 머리 굵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거룩함(聖)’과 ‘사람살이(俗)’가 구별되어 따로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 이후 참 오랜 세월 ‘사람살이(俗)’하며 줄곧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노년의 초입, 성(聖)과 속(俗)은 그저 늘 함께 하는 것임을 배운 여행이었다.

하여 또 감사! 오늘에.

여행 – 성(聖)과 속(俗) -7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지나치게 과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쩜 이번 여행 내내 곱씹어 본 사람살이 모습이었지만 종교, 정치,경제, 과학, 문화 이즈음엔 스포츠까지 모든 영역에서 권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잠시 하였었다.

그 어마어마한  전시물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그 재력과 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부질없는 생각이 오갔지만 박물관을 도는 내내 떡 벌어진 내 입을 닫지 못한 채 구경에 빠졌었다. 안내자 Alfredo는 전시물들과 교황청 또는 바티칸을 설명하면서 꼭  ‘우리(We)’ 또는 ‘우리의(Our)’ 라곤 했는데, 그게 또 내겐 제법 권위적으로 다가오곤 했었다. 족히 180센티를 넘었을 녀석의 키와 몸매 그리고 잘 생긴 얼굴도 녀석의 안내에 신뢰를 더하기도 했을 터였다.

모두가 다 허상인 줄 알면서도, 무릇 모든 권위와 그에 대에 허상은 ‘혹’하는 터무니없는 믿음의 크기를 더하는 법일게다.

그렇게 박물관 구경을 하다가 다다른 마지막 장소는 시스티나 성전 (Aedicula Sixtina)이었다. 안내자 Alfredo는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었다. “이 성전 안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못하고요. 말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그저 조용~”

박물관 뜰에서 설명을 들었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의 천장화가 있는 곳, 물론 조용하라는 것은 그 보다 더 종교적 의미를 더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너른 성전 안엔 이미 사람들이 차고 넘쳤었다. 그리고 조용히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들…. 그 소리들의 크기가 조금씩 더해지자 어디선가 낮고 묵직하게 들리는 소리, ‘쉬잇~’. 그 소리에 성전 안은 잠시 고요한 듯 하더니만 이내 다시 웅성웅성, 그리고 다시 ‘쉬잇~’, 조용, 웅성웅성이 되돌이표 처럼 이어졌었다.

이젠 내 나이 탓인지,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곳에 있으면 갑자기 멍해지며 졸음이 오가나 어지러운 증상이 오곤 한다. 그 순간 또 그런 증상이 밀려왔었다.

나는 사람들이 뜸한 성전 맨 뒤쪽 어느 문 앞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금줄을 쳐 놓은 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금줄을 쳐 놓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는 문이 열리더니 사제복을 입은 내 또래 사내가 미소년 세 명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왔다. 사제복 사내(노인이 맞겠다)는 한참을 미소년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더니(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였기에) 이내 문을 다시 열고 그 안으로 사라지려 했었다. 나는 신기하기도 했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도 몰랐기에 그저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 보고 있었고, 금줄을 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거리로 내 몸을 숙여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사제복 사내가 나를 바라보며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잠시 멍해서 가만히 서 있었는데, 사내는 내게 다가와 내 소매를 끄는 것이었다. 잠시 멈칫 거리고 있는데 안내자 Alfredo가 어느새 다가와 ‘With him!’하고 속삭였다.

그렇게 그를 쫓아간 곳은 텅 빈 거대한 응접실 같은 방이었고, 그곳엔 사진으로만 보았던 건장하고 젊고 멋진 바티칸 근위병이 조각처럼 서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그 구경을 하고 성전 안으로 돌아온 내게 Alfredo는 내게 말했었다. “어휴 이런 경우는 제가 처음 보내요. 그 문 안으로 들어 가려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초대 받은 사람을 보기는 오늘 처음이네요. 거긴 교황이 계시는 곳이거든요.”

그저 내 호기심을 가여이 여긴 은총으로 잠시 바티칸 시민이 되었었다는….

나 같은 속인이 단지 호기심으로 이른바 성전에 발도 디뎌 보았다는….

하여  성(聖)과 속(俗) – 그 여행에.

여행 – 성(聖)과 속(俗) -6

피렌체에서 로마로 향하는 열차안에서 바라본 농촌 풍경은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내게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느긋하고 조금은 여유로웠던 마음이 로마에 이르러 완전히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로마는 뉴욕이었고 서울이었다.

우선 숙소를 찾아 가는 길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온전히 구글신에게 의존하여 길 찾기에 나선 여행이었고, 거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향과 거리와 시간을 알려주는 구글신이였지만, 때론 길 찾는 신도의 아둔함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하는 법. 로마에 이른 우리 일행의 모습이었다.

어찌어찌 구글신과 사람들에게 물어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티켓을 구매하고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지하철 입구로 향하다가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뉴욕에서 리스본을 거쳐 베네치아로 오던 비행기에서 만난 두 노인들이었다.

우리들은 그 노인들이 친구 사이인 줄로 알았었다만, 알고보니 아버지와 아들 사이였다. 두 부자는 보스톤에 살고, 가늠컨대 아버지는 팔십 대 초 중반, 아들은 육십 전후 또는 초반의 나이인 인도계 미국인들이었다. 아들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다 얼마 전에 은퇴 하였다고 했다.

그들 부자와 함께 전철을 타기 위해 입구에 다달았을 때였다. 입구에 서있는 경찰에게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이 입구가 우리들이 가려는 숙소를 향해 가는 것이냐고. 그는 친절한 어투로 ‘그렇다’고 대답하며. ‘소매치기 조심하시오. 돈과 여권이 들은 가방은 앞으로 향하게 매시고 꼭 잡고 있으시오!’로 정말 친절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두 노부자와 우리 일행은 입구를 통과해 전철을 타기 위해 걸었다. 많은 사람들과 휩싸여 걷고 있는데 누군가 역무원 비슷한 처자가 우리들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안내를 했다. 사단은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다. 어디선가 젊은 처자들 서넛이 갑자기 나타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는 고작 대여섯명이 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었다. 더더군다나 우리들은 모두 끌고 다니는 짐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던 터였으니, 다같이 타기엔 무리였다. 갑자기 나타났던 젊은 계집들이 ‘밀어 밀어’하며 웃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우리 일행은 다음에 타자고 내렸고, 두 노부자와 젊은 아이들이 타고 내려갔다.

잠시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는데 그 계집 아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만 했었다만 … 우린 몰랐었다. 그렇게 다시 꽉찬 상태로 탄 엘리베이터 속, 나는 도둑 방지용 가방이라는 선전을 듣고 산 가방을 앞으로 매고 있었고, 그 가방안에는 우리 일행 네 명의 여권과 내 신용카드와 아직 환전하지 않은 우리들의 여행 경비가 들어있었다. 계집아이 하나가 나를 밀치는 통해 싸한 느낌이 들어 밀어내며 가방을 꼭 움켜 잡았었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문 앞에 서 있던 경찰 두 명이 물었다. ‘안전하신가요? 문제 없으신가요?’ 그 순간 계집아이들은 후다닥 튀였고 바닥엔 아내의 빨간 지갑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꼭 쥐고 있었던 도둑 방지용 가방은 약 1/3 쯤이 열려 있었다. 잠시 식은 땀이 주욱~  다행히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만, 그 노부자는 현금 이백달러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철을 타기 전 그 짧은 시간에 비명 소리를 지르는 피해자와 앞에 있는 이의 등짐 속에 손이 들어 갔다 나오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참 주저 않고 싶은 현장이었다.

로마역에서 내려 내 눈길을 처음 끈 것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황금빛 예수상이었고….. 그리고 소매치기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을 향하면서도 우리들은 그 소매치기 현장을 이야기하며 그저 조심 조심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안내하기로 한 안내원을 기다리며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초입 사거리에 위치한 식당 야외 테이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차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가 ‘어머~ 어머 !’를 연발하며 ‘저거 좀 보라!’고 다그쳤다. 우리 일행의 눈길이 닿은 곳은 바티칸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사거리 한쪽 끝에서 마치 소처럼 굵은 오줌발을 내갈기고 있는 사내였다. 사거리엔 오가는 차량 뿐만 아니라 박물관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우리처럼 식당이나 카페 바깥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냥 녀석의 튼실한 고추를 직관할 수 있는 거리였다. 차마 사진을 찍진 못했다만 녀석의 그 늠름한 못난 표정은 내 기억 속에…. 놈과 같은 놈들 소식을 뉴스 속에서 매일 매일 얼마나 많이 보고 사는지…

그야말로 댄디한 회색 양복 차림에 썬그라스를 낀 녀석은 오줌을 갈기며 사방을 천천히 휘둘러 보기도 했는데, 마치 제 놈이 다윗상인 듯 놀며 그 짓을 끝낸 녀석은 아우디 차를  몰아 휑하고 떠났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벌거벗은 아름다움을 돌에 새겼건만, 그걸 보고 자란 이즘 애들은 추한 것들만 보고 몸에 익혔나보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너무 노랭이 짓 하는 문화 탓일 수도 있겠고….

삼천 년 이어 온 이야기의 도시 로마를 만나기 전에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이야기들을 겪었다.

아하! 로마! 그 성(聖)과 속(俗).

여행 – 성(聖)과 속(俗) -5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란다. 젠장! 문을 잠그고 집을 나서 한참을 가다가 ‘잠궜었나?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하며 오던 길 되돌아 보는 일이 잦아지는 내게 그 이름은 너무 길었다.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으로 줄이면 아직은 기억할 만하다.

두오모(Duomo)라는 뜻이 대성당 또는 하나님의 집이란다. 하루 온 종일 하나님의 집 근처를 열심히 걸어 다녔다. 피렌체 대성당을 비롯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Opera del Duomo),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재래시장인 중앙시장(Mercato Centrale) 등 이었는데 그야말로 꽉찬 하룻길 걷기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거기에다 두오모 성당 꼭대기 까지 460여개 계단을 오르 내렸건만 우리 모두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아내나 나나, 최권사 내외나 아직은 괜찮은 나이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날 극도로 대비되는 두가지 모습들에 대한 생각은 아직 정리 중이며, 좀 공부를 해야겠다.

뭐 대단한 게 아니다. 대리석 한 장에 바들바들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그 수많은 대리석들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건축물들과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뭔가 뜻과 이야기가 있는 듯한 미술품들과 곧 숨을 쉴듯한 조각들,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듯한 작업으로 이루어진 천장화와 벽화들…. 도대체 어떤 열정과 무슨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하는 의문들.

그리고 충격적이었던 유물 하나. 그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정말 열악하기 그지 없는 도구들. 그 가늠할 수 없는 사이를 메꾸어 나간 노력은 오로지 누군가 바로 사람이 인내하지 못할 극도로 험한 노동이었을 터.

그렇게 피렌체는 내게 무겁게 다가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피렌체가 준 마지막 절정, 바로 미켈란젤로 그리고 다윗상(David of Michelangelo). 가히 창조에 버금 가는 듯한 사람의 솜씨. 쯔…. 내가 뭘 알까만.

대성당과 시장은 겨우 몇 걸음 떨어져 있었을 뿐. 하나님의 집은 늘 사람 사는 세상 가까이 있듯.

뿐이랴! 천재나 바보나 신의 잣대에 올라타면 다 거기서 거기일 터.

하여 피렌체 공부는 좀 해야할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