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이민 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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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노동력이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인 이민들은 노동집약적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탁업에 이르면 그야말로 노동이 곧 돈인 비지네스입니다. 하여 “이민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돈 곧 자본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임으로 일괄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에서는 일곱개의 시간 낭비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갑자기 불쑥 걸려오는 전화, 예기치 못한 방문객, 회의, 긴급상황, 연기, 사교활동과 잡담, 우유부단함과 미룸’  하지만 필자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가장 큰 시간 낭비 요소는 위의 낭비 요소를 허락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가 전화를 받는가?  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가? 누가 긴급 상황을 만들고, 누가 연기를 하는가? 누가 사교 활동에 참가하고 잡담하며 우유부단하게 미루는가?  

바로 자신이다.>  – 양정훈지음 , <9 to6 혁명>에서-

 

시간 씀씀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옳은 일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 – Randy Paush 라는 교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골프, 한국비디오(이즈음엔 컴퓨터에 앉아 즐기시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무슨 무슨 각종 회합들… 거기에 얹어 자신의 게으름까지…. 시간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똑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요. 바로 올바른 정보를 갖고, 바르게 활용한다면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남보다 좀 더 앞서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이른 아침

버섯공장 거름냄새

앞뜰

파랗게 물오른 버드나무 아래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떨어진 잔가지들

뒤뜰

흐드러진 개나리 사이

겨우내

숨 져 마른 관목

아래

볼품없이 누워있는

내 머리만한

돌멩이 하나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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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 부활도 끝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이후(以後)입니다. 탐스런 목련, 뒷뜰에  흐드러진 서울 개나리, 하얀 배꽃, 날렵한 더그우드 꽃잎들… 봄 꽃으로 꽉찬 세상만이 봄이 아닙니다.

제 딸년이 코끝에 사래질 치는 버섯공장 거름냄새도 주워 내다 버려야 할 떨어진 버드나무 잔가지들도 앙상히 말라 톱질 기다리는 죽은 나무도 일 년 내내 그 자리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어 본 적 없는 못생긴 돌덩어리도 봄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한 자리 꿈꾸었던 제자들…

부활이후에도 여전히 한자리 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인이었다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베드로는 바울에게 밀려 났고, 야고보, 요한 역시 한 자리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뭐 크게 출세했나요. 발품 팔아 돌아 다니며 멍석 짜는 일에서 벗어 나지 못한 삶이었지요. 봄은 그렇게 오는 것이지요. 부활 이후 말입니다.

“위로자로서

화의 축원자로서

삶의 조언자로서…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로서”

이따금 슬퍼지는 까닭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며 목청꺽어 노래한 사람은 나훈아요, ‘사랑사랑 누가 말했나’ 떨리는 고음으로 호소한 이는 남궁옥분이었다. 어디 유행가 뿐이겠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래와 무용, 미술과 건축, 문학 나아가 종교까지 ‘사랑’을 뺀다면  아마 인류사는 적막했을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은 이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나 아무리 사랑이 이것이다고 가르쳐 주어도 모르는 사람이다’ – 기독교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다. 사랑에 대해 이보다 뛰어난 해석이 있을까? 사랑이란 말이 머리 속 또는 가슴 속에 있는 바로 그 순간이 사랑일 것이므로. 

그 사랑을 주제로 이 땅을 열심히 살다가 서른 셋의 나이로 육()의 삶을 끝낸 이는 바로 예수다. 그는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당신’을 묶는 ‘우리’에 대응하는 ‘그들’까지 모두 사랑으로 묶고자 서른 세해를 살다 살다 ‘사는 것’으로 아니되자 자기가 죽음으로 그 본 보이고자 하였다. 

어디 죽음으로 사랑을 이야기한 이들이 예수 뿐이겠나? 서로 사랑하다 하다 미칠 것 같이 사랑하다 끝내 죽은 연인들의 이야기는 부지기수요, 조금 넓게는 제가 사는 마을을 사랑하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널려 있고. 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린 이들의 이야기도 숱하다.  

그들과 예수의 이야기는 무엇이 다를까? 예수는 스스로 신이었고. 그의 사랑은 신의 사랑임을 확신하고 선포한 것이 다르달까? 그러나 어디 스스로 신()임을 자처한 이가 또 예수뿐이겠나? 오늘 이 순간에도 스스로 신이라 칭하는 미치광이들이 널려있거늘. 

예수는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쉬운 말을 썼다. 비록 깊은 비유로 숨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가 사용한 말들은 당시 하루 먹고 살기 바빳던 사람들의 일상적 언어였다. 소위 갈릴리 말, 아람어였다.  일테면 요새말로 어려운 신학적 용어, 책에서나 읽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나와 당신들이 폼 잡지 않고 쓰는 말들을 사용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을 전했다는 이야기다.    

사랑그가 쉬운 말로 전했던 사랑이야기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대한 신의 절대적 사랑과, 서로 사랑하라는 인간 사이의 상대적 사랑을 말했다고 믿는다.  

어려운 말 하지말고 쉽게 쓰자.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상대적이란 말이다. 모든 사람 사이의 사랑이란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백 퍼센트 전폭적으로 나는 사랑을 베푼 사람이고 너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직 신 뿐이란 이야기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사람 사이의 사랑이야기다. 

행여 “나는 너와 너희를 위해 절대적 사랑을 베풀었건만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직업이 어떤 것이든 이미 그는 예수의 사랑과는 동떨어져 있다.  

살며 ‘나는 주기만 했고, 너는 받기만 했다.’며 우기는 얼굴들을 보면 왜 이리 슬퍼지는지.

 

삶의 정치 – 그리고 인생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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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와 좌파의 논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까닭은 그들이 삷의 정치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Anthony Giddens이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갈파한 말이다.

그는 급진과 보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모델이 필요하고 이는 이미 이행되어 가고 있다고 주창한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모든 부문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좌파와 우파는 대립과 투쟁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솔직히 좌로 조금 기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적인 틀(일테면 미국과 세계, 한반도의 남북 또는 남쪽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좌로 좀 더 기울 것이다. 수년동안 내가 고뇌하고 있는 이민신학(移民神學)은 기실 정치, 해방, 민중신학과 십 수년래 미국에서 풍미한 예수세미나 회원들의 고뇌의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른바 거룩한 보수정통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해란 예수쟁이와는 거리가 꽤 먼 것으로 비췰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케리그마, 말씀의 선포 곧 설교자들의 설교도 토론이 병행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 바 이런 생각들은 좌의 끝자리쯤일 것이다. 

이런 내가 아주 꼴통보수우익으로 수성(守城)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찬송가 부르기다. 내 주는 방패되시니’, ‘죄짐맡은 우리구주’, ‘뜻없이 무릎꿇는’같은 고전적인 찬송에는 함께 하다가도 이즈음 유행하는 복음성가에는 도대체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다. 특히 이즈음엔 생업(生業)으로 하는 복음성가 가수들도 있어서 어쩌다 그 이들의 노래를 들을라 치면 왠지 노래하는 기교와 가락이 배어 있는 듯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민기보다도 덜 종교적이란 생각이 들곤하는 것이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어쩌다 참석한 집회에 찬양과 경배 그런 순서가 있어서 박수치고 율동하고 그러면 참으로 나는 좌불안석이 되곤 한다. 게다가 찬양 인도자가 ‘박수치세요’, ‘율동하세요’, ‘!자 함께 은혜 받아요’ 하기라도 하면 왜 집을 떠났던고, 성경 한 줄 읽고 고민할 걸 가히 후회막급이라! 이 아니 꼴통보수 아니랴! 그러나 교회사에는 피아노도 경망스럽다하여 금기했던 세월도 있었으니 원조보수는 아닌 셈이다. 

그런 나도 이따금 흥얼거리는 복음성가가 하나 있다. 이것 역시 고전이다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열고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하는 노래이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지 좌편 끝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우편 끝 모서리에서 뒤뚱거릴 때도 있으며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서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세상 내 손 안에 쥘 때도 있고 시궁창에 빠져 숨조차 내쉬기 힘든 때도 있기 마련이지 어찌 바른 길로만 올곧게 걸을 수 있겠는가? 돌아볼수록 부끄러운 걸음이지, 오직 떳떳함 뿐이로다할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하늘문 열고 말한다지 않는가? 예수가 여기 인도했노라고 그게 믿음이지, 당당한 믿음이지. 

여기까지 온 것도 예수 인도하신 까닭이요, 피안(彼岸) 저 편에 다달아 예수가 인도하였다는 고백을 하려면 지금 오늘을 예수 안에서 살아야 되는데 거기 무슨 우파와 좌파가 있으랴! 뛰어 넘어야지. 어찌 삶의 정치뿐이겠나? 하여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를 노래하는 한 진정 좌파와 우파의 자리는 없다. 

그래, 봄으로 찾아오는 이 사순절 그렇게 살자. 내 인생 여정 끝내어…

신앙의 이름으로

어느 동네 양반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을 듣고 혼자 혀를 끌끌 차다가, 문득 예전에 긁적여 놓은 글이 생각나 찾아보니 삼년 전 딱 오늘인 2010년 2월 4일에 낙서처럼 남긴 것이더군요. 그런데 그게 오늘도 딱 유효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안 바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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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재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의 넓이가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스물 네해 째 살고 있는 곳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해 보았던 것입니다.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라는 곳입니다.

County 면적이 1,278 km²랍니다.

 

이게 어느 정도될까?

그래 서울시와 한번 비교해 보는 것이지요.

서울시 면적이 605.41㎢이라고 하니 약 두 배 정도입니다.

인구는 약 60만명정도이고요. 한적한 시골입지요.

한인인수는 고무줄 통계이지만 약 4천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요.

 

교회 수는 캐톨릭교회 한 곳을 포함하여 8곳이지요.

8곳의 등록교인 수 얼추 천 오백여명.

 

재미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싸우고 있다는 것…

신앙의 이름으로…

늘 신앙의 이름으로…

 

이 너른 이민의 땅에서…

오직 신앙의 이름으로…

 

오늘도…

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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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

죽 한 그릇

조선조 말기 사람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일명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경래가 일으킨 난리가 나자 당시 선천부사로 있던 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에게 항복한다. 이 죄로 김익순은 죽고 그 후손들은 벼슬 길이 막히는 폐족(廢族)을 당한다.

벼슬길도 막히고 심한 차별을 느낀 김병연은 스무 살 무렵부터 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그가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시(詩)들을 모은 ‘김립시집(金立詩集)’ 한 권을 남긴 채 쉰 여섯 나이에 그답게 객사(客死)하고 만다.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며 조롱하는 그의 시들로 인해 오늘날 그를 조선시대 민중시인이라 부른다.

예의 그 방랑길의 김삿갓,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여러 날 산길을 걸어 기진한 삿갓의 눈에 외딴 오두막집이 들어온다.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오두막 집에 다다른 김삿갓이 끼니 구걸을 해 보지만 그 집 주인 역시 이 떠돌이 삿갓만큼이나 찢어지게 궁기든 사람인지라 변변히 나그네를 대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리 뻗을 오두막집이라도 가진 이 집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할 요량으로 소반 위에 멀건 죽 그릇을 내밀고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말이 죽이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비칠 지경이니 낟알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맹물같은 죽이었다.

이 맹물죽 한 그릇 대접받은 김삿갓 그냥 있을 수 없어 시 한 수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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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엔 머얼건 죽이 한 그릇/ 뜬구름 그림자가 함께 오가네/ 주인은 미안해서 쩔쩔매나니/ 나야 본시 풍류객 상관이 있오> <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이름하여 ‘죽 한그릇(粥一器)’이라는 시이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정경인가? 이 얼마나 사는 맛 나는 장면인가? 내 입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에 지친 나그네 그냥 보낼 수 없어 낟알 몇 알 두고 끓인 멀건 죽 한 그릇 내 놓고 미안해 쩔쩔매는 주인의 훈훈한 마음, 그 죽사발을 하늘로 받고 감사하며 또 다시 하늘을 담아 주인에게 바치는 김삿갓의 시 한 수.

풍류하면 제 밥벌이 걱정없이 펑펑 돈 깨나 뿌리며 주지육림에 빠져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것으로나 아는 사람들에겐 이런 풍류의 맛이 시원치 않겠다만 이것이 진짜 세상 살아가는 풍류이다.

주린 배 참다 참다 기진한 채 오두막 등불 하나 만나길 고대하며 발길 옮기는 사람들이 어디 김삿갓 뿐이겠나? 결코 수월치 않은 삶의 길목들, 더하여 때론 산길을 헤매는 듯한 이민(移民)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그 지친 삿갓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경제의 궁핍뿐이랴! 겨우 몸과 마음의 다리 뻗을 오두막 한 채 가졌으나 여전히 궁기에 빠져 있는 모습 또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이런 모습들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주인과 나그네가 멀건 죽 한 그릇 사이에 두고 하늘을 나누어 갖는 정겨운 모습에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듯 오늘 여기 우리 한인 이민 사회가 서로의 하늘을 나누어 갖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사회가 되길 꿈꾸어 본다.

그것이 비록 멀건 ‘죽 한그릇’일지라도…

*** 오늘의 사족

나는 오늘도 죽 한그릇은 나누었다. 좋다.

골프와 장치기(杖球)

지나간 십 수년  동안 이 곳 지방 신문인 The News Journal지에 한국관계 기사나 한국인을 다룬 기사가 1면이나 2면을 장식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기억하기로는 전두환, 노태우씨의 구속기사, V자로 꺽였던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기사,  “정부 수립 후 첫 정권 교체”라는 제목을 단 김대중대통령 당선 기사와 그의 노벨상 소식 그리고 이 곳 DuPont Country Club에서 있은 맥도날드 컵 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선수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판 스포츠면에 박세리의 사진과 함께 그녀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골프채를 잡아 보기는 커녕 “골프는 이민(移民)을 망치게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내가 골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다. 이젠 많이 숙련되어 어떤 모임이건 의례 나오는 골프 화제에 입 꼭 다물고 들을 수 있게까지 되었지만 한 때는 어떤 모임이건 화제가 골프로 옮겨지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하였다.  어쨋거나 남한(the South Korean)의 박세리”로 소개 되었지만 그녀로 하여 가게 손님들과의 화제거리가 되니 반가운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골프는 15세기 무렵에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어 스코들란드로 전래되어 퍼졌다고 한다. 경기의 규칙이 성문화되기는 1754년의 일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구와 규칙이 적용되기는 19세기 중엽부터라고 한다.

오늘날의 골프와 아주 흡사한 경기가  한국에 있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 역사기록인 <태종실록: 13년(서기 141년)>, <세종실록 : 3년(서기 1421년)>, 세조실록: 1년(서기 1455년)>등에는 뚜렷한 경기법칙 아래 행해졌던 장구(杖球)경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구는 몇 사람이 좌우 두 편으로 갈라서서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공을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과 같으며, 공을 치는 끝은 손바닥처럼 넓적한데 이것은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아 오르고, 가죽이 두터우면 공은 멀리 가지 않는다. 또한 곤봉(袞俸)도 사용하는데 공같이 둥그런 것이 달려있는 이 곤봉으로 공을 치면 공이 뱅글뱅글 돌면서 뛰어 오르지 않고 자리만 이동한다. 이 모두 두텁고 얇은 정도와 크고 작은 모양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한다.

공은 나무로 만들거나 차돌을 사용했고 그 크기는 계란만 했다 한다. 땅을 파서 주발 모양같은 구멍을 만드는데 이것을 와아(窩兒)라 불렀다. 이 와아는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파 놓기도 하고, 층층대 위에 파 놓기도 하며 또는 평평한 땅에 얼마만큼 동떨어지게 파 놓아 공이 들어 갈 자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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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쳐서 구멍에 들어 가면 2점을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했으면 공이 멈춘 곳에서 다시 쳐 들어가면 1점을 얻는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세종 때와 세조 때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엇비슷한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주로 궁궐 안에서 임금과 종친들이 즐기던 것이었다. 일반 서민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기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얼레공치기라 하였다.

이 얼레공치기는 최근세까지 전래되어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그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1931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장구 얼레공 대회 개최”라는 제하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그 장구경기, 얼레공치기의 기술이 살아나 박세리, 김미현등의 별들이 한국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아닐런지.

***오늘의 사족

당시의 박세리는 오늘날 김연아였다.

아니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오늘의 김연아 이상이었다.

한반도나 한인들의 긍정적 뉴스를 듣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날은 참 기분 좋다. 이민 이후 줄곧….

 

 

(2001. 4. 26)

진달래와 개나리

“꽃샘추위” – 추위까지 사람인양 새암을 부려 꽃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 말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에 대응하는 영어라야 “March Wind”(삼월바람, 삼월에 부는 찬 바람) 정도랄까? 자연을 관리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동양사상 또는 도교사상을 깨놓고 비교할 수 있는 듯하다.

‘겨울 다 갔지!’하였더니 눈이 제법 내려 이틀 장사 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옷 배달 길, 그 잔설(殘雪)입은 나무가지에 봄눈 튀운 것 보았다. ‘꽃샘추위였군’ 혼잣말하며 이미 봄이 왔음을 느낀다. 이 눈 녹으면 우리집 앞뜰 관상수(?) 개나리 노오랗게 활짝 피고 뒷뜰 진달래 붉게 물들리라. 더하여 빨래감 잔뜩 쌓이는 세탁소 제 철 만나리라 꿈이라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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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 70년대 이후 한국 대학가에서 소위 데모노래로 유행했던 ‘진달래’의 가사이다.

‘가시는 걸음 걸음’ 뿌렸던 소월의 님에 대한 한이 젊음의 한, 민족의 한으로 나아가는 소재로 쓰인 진달래꽃이다.

70년대 한 때는 진달래를 노래하는 것조차 불온시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내 고향 서울 신촌 안산에 조차 흐드러지던 그 진달래를…

산철쭉, 참꽃나무, 두견화(杜鵑花), 영산홍(迎山紅) 등으로 불리는 진달래는 한반도 및 만주지방 산간 양지 바른 곳에 잘 자라 이른 봄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진달래 꽃으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탕을 만들어 먹거나 화전(花煎)을 부치거나 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삼월 삼짓날 음식은 이 진달래꽃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진달래로 만든 음식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진달래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술은 약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약용으로도 쓰여 민간 및 한방에서 강장, 이뇨, 건위 등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처방하여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달래는 봄이면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더불어 정신’ 곧 함께 뽐내는 자태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모진 추위와 가뭄에도 거뜬히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그 멋을 더해 준다 하겠다.

‘나리 나리 개나리’- 여기서 나리는 홀로 피는 서양꽃이요, 개나리는 무리지어 피는 우리 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인지 개나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이 개나리야말로 한국이 원산(김태정이 쓴 책 ‘우리꽃 백가지’에서)인 식물로 한민족이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특산물이다.

봄이면 어디서건 노오란 꽃잎 내밀어 제 있음을 자랑하는 개나리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해 가지가 땅에 닿기만 하여도 곧 뿌리가 내리고 가지를 잘라 놓으면 그 마디에서 뿌리가 나온다. 개나리 또한 한방이나 민간에서 약재로 써 종창, 임질, 이뇨, 치질, 부스럼, 해독 등에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여 쓴다. 이 또한 내 고향 신촌에 흐드러졌었다.

우리집 앞뜰 관상수라 했다.

이 땅에도 어디서건 볼 수 있지만 내 뜰 개나리는 신촌 안산의 개나리다. 뒷뜰 흐드러질 진달래는 소월의 진달래요, 그 묏등마다 스러져갔던 내 젊음의 이야기들이다.  더하여  그 끈질긴 생면과 이웃에게 베풀 약용, ‘더불어 함께 해야만’ 아름다움은 우리 다음세대에게 넘길 꽃의 아름다움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 우리 세대 아니면 다음 세대 아니 그 다음 세대라도 무리지어 필 진달래, 개나리꽃을 기다리며.

(2001. 3. 1.)

*** 오늘의 사족

이 땅, 이 이민의 땅을 살아가는 모오든 내 피붙이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개나리, 진달래처럼 생명력 강한 삶들을 이어 가길…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하루 저녁 술값으로 수백만, 수천만을 쓴단다. 천만 단위의 옷을 심심풀이로 산단다. 값비싼 외제를 제 때 손에 못 넣으면 비행기 타고 가서 사 온단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단다.

“IMF가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있는 놈, 없는 놈 구별이 확실할 테니까”

wild

2001년 서울 강남을 활개치고 다니는 그들을 일컬어 ‘황금족;이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 제 놈 배부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 등가죽 붙는 꼴 보고 싶은 생각 들었을까? 분 삭히고 곰곰 생각하면 여기 사는 우리라서 자유로울까?

예수 살아 생전에 제일 미워하던 이들은 바리새인이었다. 오죽 미워했으면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 하였을까? 그들이 누구였나? 율법학자라고? 아니다. 이른바 소시민 계층으로 율법을 헌신적으로 따른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왜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을까?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율법 특히 안식일법, 십일조법은 밥깨나 먹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누렸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하였다. 그들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비정함과 교만이 예수의 미움을 샀다. 제 잘난 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보다 뒤쳐진 이웃을 뭉개려고 하는 그 맘보가 예수 보기에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한 것 아니겠는가?

그 보다 먼저 들사람 세례요한이 있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광야에서 외친 그 소리가 어디 그 곳으로 몰려든 지치고 찌든 인생들에게 한 소리였겠는가? 예의 그 바리새, 귀족, 제사장들 그 때 있고 누린다는 자들에게 한 소리였지.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갔다. 여우라 불렸던 헤롯이 그 광야의 소리 막고자 요한의 목을 친 것이다.

유대 역사의 기록자인 요세푸스는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2000년간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떠 돌게 된 원인(遠因)은 바로 이 들사람 요한의 처형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들사람 소리, 들사람 정신 죽이자 나라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역사 이래 930여 차례의 외침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반도에 한민족이 꿋꿋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들사람의 얼 곧 야인정신, 예언자정신과 함께 했던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해방 후 백범이 있었고, 죽산이 있었다. 장준하가 뒤를 이었고 늦봄 문익환이 그 길을 갔다.

그들이 외쳤던 소리는 “더불어 함께 가야만 하는 민족”이었으며, “사람이 사람됨 찾자”는 정신운동이었다. 그 소리 누가 없앴는가? 그 정신 누가 죽였는가? 그 얼 누가 땅에 묻었는가?

“오직 잘 살아 보자”는 구호와 “하면 된다”는 그 군대정신에 눈 먼 우리 모두가 죽였다. 무엇보다 본래 도둑심보인 정권이 죽였다. ‘때려잡자 공산당’과 ‘까부수자 미제 괴뢰’의 그 얼 빠진 구호에 혹했던 남북 우리 모두가 죽였다.  권력이 다 무엇인가? 허가낸 도둑 아니겠나? 오죽하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라 세우지 말라 일렀겠나? 그러면 백성(인민)들이 알아 차려야 할 일이다.

아직도 김씨정권, 노씨정권, 전씨정권 탓하는가? 이씨정권 아니 아무개정권이 들어선들 무에 달라지겠나? 거기 사는 백성(인민)들이 정신 차려야 할 일이다.

그 들사람, 그 얼, 그 정신 언론이 죽였다. 교묘한 언설로 무지한 백성들 눈 가리고 이리저리 우우 몰려 다니게 해 놓곤 제 몸둥이 키우기에 바빳던 언론이 죽였다. ‘민족이 하나여야 한다’는 들사람 소리를 ‘공산당과 하나 되잔다’고 나발불며 뻘건 칠해서 죽였다. ‘잘 사는 것 보다 옳게 사는 것이 먼저다’는 들사람 소리 뚝뚝 잘라 ‘잘 사는 게 나쁘단다’ 통단으로 뽑아 돌팔매 유도해 죽였다.

아니다. 그 소리 종교가 죽였다. ‘이 땅은 잠시 뿐’이라며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가르켜 모두 얼 빠져 쳐다보는 사이 제 놈 첨탑만 높이고, 국보급 사찰 소유에 급급했던 종교가 죽였다. 이 땅 별 볼 일 없으면 제 놈이나 하늘나라 먼저 가지 않고 이 땅에 발 붙여 살아야 할 백성들 홀려 구름같은 하늘타령이나 한 종교가 죽였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가 죽였다. 우리 모두가 죽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사생결단식으로 ‘잘 살아 보자’고 달려 온 우리 모두가 죽였다.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어디 ‘황금족’이 서울 강남 땅에만 활개 치겠는가? 한반도 전체 세계 구석구석 들사람 죽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이 황금족 되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위만 바라고 아래를 짓밟는 사람들이 ‘바리새’라  하였다.

나를 추스리고 내 민족을 추스릴 소리, 들사람 소리 살려 내야 한다.

모가지 드리워 붉은 피 흘릴지라도 크게 외칠 들사람 소리가 그립다.

한반도에.

여기서 한반도로 사는 우리에게.

(2001. 2. 22)

*** 오늘의 사족

그랬다. 2001년 어느 날 한국신문을 읽다가 황금족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써 본 글이다.

오늘 2013년 어쩜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한국이나 조선을 향해 무어라 할 처지와 입장이 아니다.

여기 이민의 땅에 뼈를 묻을 것이고, 이 이민의 땅이 내 나라인 사람이다.

어찌하리! 그럼에도 한민족인 것을.

여우 헤롯, 이천년 전에도 동물에 비교된 권력자가 있었고 그가 나라를 말아 먹었단다.

참 아프다. 때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