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광장(廣場)으로

광장을 찾아 헤매다 끝내 바다에 투신하여 죽는 이명준.

단지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경찰서를 드나들던 명준은 “밀실만 충만하고 광장은 죽어 버린” 남쪽에 구토를 느끼며 월북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직 “복창만 강요하는 구호”만 있을 뿐 북에도 광장은 없었다.

명준은 ‘광장’이 없는 조국 한반도를 등지고 중립국 인도로 향해 가던 배위에서 바다로 뛰어 내린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게 죽는다.

우리에게 축제의 광장은 없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1960년 4월(당시에는 4월에 학기를 시작했었다), 나는 왼쪽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달고(이즈음 아이들은 모를 수 있겠지만,당시엔 아이들이 코를 줄줄 흘리고 다녔으므로 손수건을 가슴에 달게 하였다) “서둘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한 채 오후반 등교길에 나섰다. (당시 전후-戰後:한국전쟁- 첫 세대인 우리에게 교실은 턱없이 부족하였기에 통상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때로는 삼부제 수업을 하곤 하였다.)

그날은 두어 주간 동안 운동장에서 있었던 유희와 이즈음으로 말하면 집단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는 첫 날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채근은 대단하였다. 서둘러 나선 등교길, 신촌 노타리를 가로 지르는 길목에서 나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집 앞에서부터 들었던 함성이 이제 바로 내 앞에서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걸이를 한 대학생들은 “문(門)안으로, 문안으로(당시 우리는 광화문이나 시청을 문안이라고 불렀었다. 사대문안이라는 뜻으로.)” 노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시청과 광화문 ‘광장’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경무대(청와대)로 향했던 1960년 4월 19일이었다.

그 저녁, “총소리… 피…. 죽음…” 등등의 어른들 말사이로 이웃집 형이 끝내 돌어오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리를 들으며 우리 코흘리개들은 여느 날처럼 “다방구와 술래잡기”놀이로 그 밤을 보냈다.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우리도 시청앞으로 광화문으로 내달리곤 했다. 그 광장을 향해 달리다 더러는 징역을 살았고, 더러는 군대에 끌려 갔으며, 더러는 목로주점에서 얻은 취기로 골방에서 악을 쓰고는 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우리는 서울역 광장에 악을 쓰고 모였고, 효창운동장에 군부대가 집결했다는 소문이 돌던 밤, 우리들은 ‘밀실’에 갇혀 모진 매를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그 해 오월, 마침내 ‘광장’은 피로 얼룩졌다. 붉은 피, 총소리, 군화소리, 죽음 – 광주 전남도청앞 광장은 우리시대 ‘광장’의 극명한 모습이었다.

오누이 월남하여 홀로되신 장모와 함께 평안도 정주출신을 찾아 여의도 만남의 광장을 헤맨던 일을 몇 해 뒷 일이었다.

ggg최루탄에 맞아 한 젊은이가 죽고, 광장은 만장과 항쟁의 깃발을 든 시민들로 들끓었다. 1987년 6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광장을 뒤로 하고 돌아온 밤, 이민 보따리를 꾸렸다.

그랬다. 우리에게 광장은 분노와 항거와 저항의 분수대였다. 그곳은 끝내 눈물이었고 패배의 아픔 뿐이었다. 그곳에서의 평화와 안정은 오직 관제(官製)이었다.

워싱톤 광장과 서너 블럭 뒤에 빈민 우범지대의 공존이 더는 낯설지 않은 이민(移民)의 세월을 보내며, 더러는 아슬아슬하지만 내가 살던 때보다는 나은 축제의 광장을 누리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던 때도 있었다.

오롯이 삼 사십년, 아니 최인훈의 광장 오십년을 넘어 백 이십여년 전 고부장터의 원성이 고스라니 다시 살아 울리는 소리 들리는데,  2014년 내 모국의 광장에는 다시 관제(官製)의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으니 어찌하리!

가자! 다시 광장으로!

환갑(還) 젊은 나이로 자유의 광장으로 나서나니, 젊은이들이여 광화문으로 시청으로 도청앞으로 광장으로 나설진저.

더는 바다에 떠도는 그 숱한 이명준의 넋을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아니 이명준처럼 자기 길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다만 “가만 있으라”는 명령에 순종한 그 숱한 넋들을 위하여…

가자, 광장으로!

 

우리 것

오늘 낮에 제 가게에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오셨답니다. 평소 제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이 아니셨답니다. 아직 걸음걸이는 건강해 보이셨지만 연세가 꽤 드신 어른이셨답니다. 머리에는 “Korean War Veteran”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자 그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이거 작은 건데 네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 받아주겠니? 우리 이웃집에 사는 아무개가 말하던데 네가 한국에서 왔다며?” 

dish

이게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이라니요? 무슨….”하며 주저하는 제게 그 어르신이 내미신 것은  구리로 만든 동그란 작은 접시였습니다. 접시 안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답니다. 

“아니,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라는 질문에 그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네. 한국에 대한 추억이 있다네. 보다시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하나하나 정리하며 살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한국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거는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낯선 할아버님께 받은 구리접시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는 한국학교 아이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미술 박물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다녀왔답니다. 저는 다음 달에나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전시회랍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전회되는 전시회입니다. 이곳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해서 LA와 휴스톤에서 이어져 열리게 된답니다. 

“한국의 보물, 조선시대의 예술과 문화 1392 -1910 (Treasures from Korea: Arts and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랍니다. 약 150여점의 조선시대 예술품들이 전시되는 이 전시회를 엊그제 NewYork Times도 “극도로 절제된 우아함(minimalist elegance)”이라는 말로 소개했답니다. 

<“우리 것”을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 것”을 바라보는 “이웃들” >이라는 생각에 잠시 젖어보는 주말 저녁입니다.

모국(母國)을 위하여

이민이라는 게 살면 살수록 살던 곳이 그리워 지는 삶이랍니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참된 이민이겠지요.

페이지__중장편(상-최종)-3-1

게다가 나이까지 들고보면 그 그리움의 크기는 더해가기만 한답니다. 

그리움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아마 저는 여기 뼈를 묻을 것입니다. 

제 자식들도 어디서 어떤 일을 하며 살더라도 이미 한국인은 아닙니다. 그저 한국계 미국인 뿐이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오늘은 모국을 위한 정말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답니다. 

저도 이젠 정치에서 무슨 도덕을 찾을 나이는 이미 지난 늙은이랍니다. 

<광장>을 잃고서도 그를 느끼지 못한 <시대>는 아직도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그 역사를 꾸미고 있는 것은 바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겠지요.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동시대에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지요. 

반세기 전에 작가 <최인훈>이 서있던 그 <광장>이 2014년 오늘 현재 내 모국에  아직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은 저를 기도하게 만든답니다. 

그냥 웬지 모를 슬픔이 밀려오는 밤에….

새 방주(方舟 New Ark)

눈이 내리고 추워진다는 일기예보 탓도 있거니와 오늘은 각급학교와 관공서들이 쉬는 Martin Luther King Day인지라 가게 드나드는 손님이 뜸합니다. 

몇 분 손님들이 제 아버님과 한국 역사에 대해 묻고, 자신들의 부모 이야기를 꺼내고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하루랍니다. 손님들과의 화제가 그리로 흐른 까닭은 어제 제 가게 손님들께 보낸 이메일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아래는 어제 제가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의 한글 번역과 영문 편지입니다. 이곳을 방문해 주시는 당신과도 함께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오늘은 제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제 아버님은 1926년생이고 어머님은 1927년생이십니다. 1946년에 결혼하신 두 분은 올해 67주년 결혼기념을 맞이합니다. 두 분은 Pike Creek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계시답니다. 

제 아버님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적부터 가난과 함께 고생을 많이 하셨답니다. 

그러다 17살 때 일본의 탄광노동자로 끌려갔다가 그 곳을 탈출하여 일본에서 떠돌던 중인 1945년 이차대전에서 패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으로 돌아갔답니다. 

독학으로 영어를 깨우치신 후 서울에 주둔하던 미군부대에서 잠시 일을 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이 되어 참전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다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는 부상을 당해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이후 아주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며 저의 형제들 1남 3녀를 다 교육시킨 후인 1984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당시 Newark에 있는 인쇄소(후에 Glasgow로 이전) 공원으로 취직이 되어 일하시다가 은퇴를 하셨답니다. 

그런 아버지가 어찌보면 크게 감사할 것도 없는 당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말 감사하고 기뻣던 삶”이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셨답니다. 

A Veteran’s Living Stories라는 제목인데 한국에서 한국말로 출판된 것입니다. 한국말 제목은 “바람에 날려 멀리퍼지는 민들레처럼”이라고 지었답니다. 

출판사에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대답이었답니다.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입니다.” 

1991년 제가 K&L Cleaners를 시작할 때 제 아버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너의 새 방주(方舟 New Ark)이다. 평안한 마음으로 네 일을 즐기며 살아라.” 그 때에 태어난 제 딸아이가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었습니다.(***제 가게가 있는 동네 이름이 Newark이랍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넘치는 감사들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한주간 당신이 보내는 시간들이 늘 New Ark이 되시길 빕니다.

parents

Today I would like tell you about my father. My father was born in 1926 and my mother in 1927. This year they will have their sixty-seventh anniversary as they got married in 1946. They are living in an apartment in Pike Creek now. 

My father was born as the son of a poor peasant,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Four years in an elementary school was all the education which he ever got. As his mother passed away when he was very young, he grew up suffering from all kinds of hardships and abject poverty. 

291

When he was seventeen years old, he was forced to be taken to Japan as a coal miner. After he escaped from a mine, he drifted from place to place in Japan. Then, as Japan surrendered in 1945, he could come back to Korea which had become independent from Japan. 

After he learned English by teaching himself, he worked for the American military which was stationed in Seoul at that time. When the Korean War broke out, he joined the Korean army. During the war, he was wounded by shrapnel from a hand grenade and was discharged honorably as a wounded soldier. 

Then, he ran a small print shop and reared his children, three daughters and one son, me. In 1984, after my sisters and I finished school, he moved to America. 

In America, he worked at a print shop which was located in Newark at that time (it has since moved to Glasgow) and retired later. 

My father, whose life can hardly be happy and grateful to my eyes, looked back over the past years of his life and published a book in which he declares his life as “a really grateful and joyful life.” 

Its title is “A Veteran’s Living Stories” and is published in Korea. Its Korean title is named “Bah-rahm-e Nahlyu Muhli Pu-ji-neun Min-deul-e Churuhm (Like a Dandelion Spreading its Seeds Widely with the Wind).” 

The publisher asked my father: “What made you write this book?” My father answered, “I want to express joy and gratitude for my life.” 

I still remember what my father told me when I started K&L Cleaners in 1991. He said, “From now on, this is your New Ark. Enjoy your work and live your life with a peaceful mind.” And my daughter, who was born around that time, is a senior in college now. 

I feel overflowing gratitude which I’m blessed to enjoy. 

I wish that every moment you spend will always become a New Ark this week and beyond.

된 사내

나흘 전

미처 구순(九旬)을 못 채우고 떠난

어머니가

못내 아팟던

이제 곧 칠순(七旬)이 될 사내가 남긴 말.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제 육순(六旬)이 된  내가 들으며  하는 말.

“참 된 사내구먼!”

밤새 안녕하셨어요?

교회에 속한 작은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송년회를 겸한 모임이었습니다. 제 엉덩이가 좀 가벼운 탓에 어느 모임에 가던 진득히 앉아있는 편이 못됩니다. 제 아내의 한결같은 불만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오늘은 거의 다섯시간 넘는 시간을, 그것도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도 않고 쏟아내며 앉아있었답니다. 편하고 즐거웠다는 말씀입지요. 

집으로 돌아와 이즈음 일상 가운데 하나인 “당신의 천국” 이야기를 쓰려다 접고,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대자보

이즈음 한국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 하나가 뉴스의 촛점이 된 소식을 듣고 보고 있답니다.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자보입니다. 늦게 본 제 딸 아이가 대학 졸업반이랍니다. 아이들 말에 귀 솔깃할 나이는 이미 지났답니다. 제가 그 뉴스를 보고 대자보의 내용을 찾아 읽으며 든 생각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사실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은 우리 세대에겐 아주 낯익고 입에 배인 인사말이랍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으며 자란 세대랍니다. 저도 어느새 육십줄에 걸친 세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 땐 그랬다는 말씀입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는 인사는 6.25 전쟁 때 생긴 인사법입니다. 남쪽 군대, 북쪽 군대가 오르락 내리락 밀고 밀리던 일들이 계속 되는 전쟁을 치루면서 밤새 목숨을 잃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일상 속에서 사람들 입에 배이게 된 인사말이랍니다. 

50년대 말, 60대 초까지 제가 어릴 때 입에 붙어있던 한국인들의 인사말이었답니다. “밤새 안녕하셨어요?” 

또 다른 입에 달고 살던 이삿말이 “진지 잡수셨어요?”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세월에 생긴 인삿말입니다. 끼니를 때우는 일이 모든 일에 최우선이던 시절에 생긴 말이었겠지요. 

적어도 우리 아이들 입에서는 이런 인삿말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살아왔겠지요. 너나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젠 그런 인삿말들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에 살고 있지 않으니 잘은 모릅니다만 “밤새 안녕하셨어요?”라든지, “진지 잡수셨어요?”라는 인사는 거의 하지 않거니와 설혹 하더라도 옛날과는 그 뜻이 다르게 사용되는 세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물음이 공감을 얻는 사회를 바라보며, 그 물음에 답을 할 사람들은 젊은이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인사법을 없애려고 애써온 우리 세대들 곧  1950년대생들이 대답을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제 블로그의 이름이 “1950대생들을 위하여”랍니다. 

2013년 겨울, 성탄절 즈음에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던진 “당신은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의 핵심은 “당신은 이웃의 아픔에 저려오는 맘 하나 가지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이랍니다. 

그걸 아이들, 바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 우리 세대들을 향한 물음이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들어 줄 수 있었던 제가 속한 교회의 작은 모임에게도 감사하며…

1과 99 사이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간에 100% 딱 맞아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 100% 없을겝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의 힘이 100%일 경우이겠지요. 그러니까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쪽의 힘이 0여서 100%의 힘을 갖고 있는 쪽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경우일 뿐이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무릇 사람사이의 의견이라는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걸 어느만큼 인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성장도를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SkyEarthMan

0과 100으로 나누이는 사회란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씀입지요. 

그런데 이런 사회를 흔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스”같답니다. 

특히 종교, 정치, 남북 뉴스 에서 말입니다. 

무릇 0과 100으로 나누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답니다. 

다 썩은듯한 우리나라(미국)도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랍니다. 

우리나라(미국) 그러니 “뭐, 이런 놈이 있나?”하는 분들도 계실겝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광선선생(대단한 양반 아니고요. 그냥 저처럼 세탁소하신답니다.)께서 가르쳐 주신 거랍니다. 

“내가 사는 곳은 ‘우리 집’입니다. 내가 밤이면 늘 편히 잠을 자는 곳입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내 이웃들이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지요. 바로 미국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계 이민들이 여기서 헷갈립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자! 이쯤.

열린 맘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무릇 열린 맘의 첫 걸음은 0과 100이 아니라 1과 99 사이에서 서로가 맘껏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아닐까요?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round table모처럼 반가운 선후배들과 저녁을 함께 했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이해의 폭이 엇비슷한 이들이랍니다.

필라델피아, 남부 뉴저지, 델라웨어 등에 사는 지리상으로는 가까운 이웃들입니다만 일년에 한 두어차례 만나면 자주 보는 폭이랍니다.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의 단골메뉴들은 건강이야기, 음식이야기, 우리나라 이야기(미국), 조국 이야기(남, 북), 평화, 민족, 통일 등등 자잘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거대 담론까지로 이어진답니다. 

그리고 모여 작은 계를 함께 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계의 형태랍니다.

일반적으로 계란 먼저 돈을 탄 이들이 이자를 내고 나중에 타는 이들은 이자를 받고하는 구조이지만 우리들의 계는 이자는 내지만 이자돈은 받지 않는 계랍니다. 

1번 계돈을 받는 사람도 마지막 계돈을 받는 사람도 받는 돈은 똑같답니다. 다만 먼저 타면 이자를 순서에 맞추어 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자를 모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는 것이지요. 

제법 새 일을 할 만한 돈이 모여 비영리 단체로 등록도 마치었고, 오늘 모임을 통해 한걸음 썩 나아갔답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가 한마디랍니다.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우리들을 이해해 준다면… 우리들의 일이 헛되지 않을터…”

내래 뭘 알겠노?

글 한 줄 쓰자하고  앉으면 나오느니 육두문자 뿐입니다. 그래 차마 글 한 줄 못쓰고 한 주가 지나갑니다. 

“내래 뭐 알겠노.”하시며 평생 소주잔에 몸과 맘을 담고 사시다 가신 피양도 피난민 처고모부가  아마 이즈음 제 심정으로 세상을 사셧을 겝니다. 

떠나온지가 한 세대에 이르러서인지 도대체 “내래 뭐 알겠노”의 연속입니다. 그냥 모르고 안보면 되는 일인데 세상사는일이 어째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딱 그 나이의 딸아이를 키우는 아비로서  늘 아이에게 하는 말이 있었답니다. 건강한 미국시민으로 살되 한국인임을 잊고 살지 말라는… 

51754466_1-51743968_2

처음 윤모라는 자의 뉴스를 접했을 때는 “참 철따구니 없는 놈일세”하며 끌끌 혀차고 말았답니다.  이즘 세상에 미친 놈들이 한 둘도 아니고, 그 놈도 그 중 하나겠거니 했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폼새가 그게 영 아닙니다. 

윤모라는 놈은 바로 지금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라는  게 이즈음 제 생각이랍니다. 

거기까지 이르니 이제 제가 정신병자가 됩니다. 

하여,  제 정신건강을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내래 뭘 알겠노?”

두려움에

어제  일어난 보스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의 참사 보도를 보며 떠오른 것은 9.11 당시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실시간 중계되는 TV 모니터를 보면서 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쌓였던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겪여낸 일들을 돌아보노라면 그 두려움이 까닭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boston-marathon-010-b88c4f75e9626d3144e527bc1f85a8d9581ebe66-s6-c10

 

이 시각 현재 아직 사건의 배후나 범죄 소행자들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가지.

 

한글로 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인데요.  추측성 기사에 대한 것이랍니다.  이 점 긴 말씀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두려움 곧  fear요 공포입니다. 무릇 대개의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바로 “나에게만 다가온 두려움”이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 또는 ‘나’와 ‘두려움‘이라는 놈은 아마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딱 지금 “비정상적인 불확실성”앞에 놓인 미국민들만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뭐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에 수많은 신의 명령들이 나오지요. 일테면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무수한 신의 명령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신의 명령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이랍니다. 뭐 약 360번 정도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360번 – 바로 일년 365일에 대응하는 숫자랍니다. 사람이란 매일 매일 두려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꼭 껴안아라.>라는.

 

진정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인데요, 그걸 껴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만들 우둔한 사람이나 세력은 없겠지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땅, 미국을 위해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