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Thanksgiving!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제 가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저처럼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의 손님들에게 짧은 편지를 띄우는 일을 계속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2007년 7월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단 한주도 쉬어본적 없이 이어져 온 일이랍니다.

매번 편지를 쓸때마다 제 맘속에 품는 생각이 하나 있답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라는 생각이랍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 제 생각이 이어져 단지 편지를 읽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삶에 대한 푸근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제가 하는 일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는 맘으로 이어온 일이랍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띄울 편지를 이 밤에 마무리지었답니다.

이 편지를 제 블로그에 올리는 까닭은 비단 제 손님들 뿐만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 아니 누군가 제가 모르게 저를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이 계절의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제 인사를 맘속으로 받는 단 한사람 있다면, 그 분에게 드리는 뜻으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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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Social Network Service)는 사람들의 생활을 아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이용자들의 증가와 무선 인터넷 서비스의 확장은 삶의 양식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진짜인지 우스개 소리인지 모르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문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물론 긍적적인 측면의 것들이 많지만 종종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곤 합니다.

일테면 페이스북 등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일반적으로 좋은 것들만 올리다보니, 나이 어린 친구들 가운데 “남들은 저렇게 즐겁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을 비하한다는 뉴스들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뉴스들을 보게될 때면 안타까움이 앞선답니다. 사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스스로 주눅들어하는 일은 SNS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보게되는 일들입니다.

자! 추수감사절 주간입니다. 약 오천만 명이 가족들과 함께 하려 길을 떠나고, 그만한 숫자의 칠면조들이 가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Thanksgiving Day가 있는 주간입니다.

얼핏 이 한주간을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기쁘게만 보내는 것 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이웃들을 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한 “오늘”을 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길 수 있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어떤 계획, 어떤 모습 누구와 함께 보내시더라도 즐겁고 풍성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빕니다.

SNS (Social Network Services) has changed people’s everyday lives so much. Especially, the explosion of smartphone users and the rapid expansion of wireless internet service have changed their life styles drastically and quickly.

Whether it is a joke or a fact, I’ve heard that people talk to others through texts on smartphones instead of looking at each other, even if they sit side by side.

While this kind of change in our lives brings about many positive aspects, it also gives rise to negative phenomena.

According to news reports, when people post their stories to share with others on SNS such as Facebook, generally they select only good and happy stories to post. So when youngsters see those posts, they think that “other people enjoy such a happy life… Why isn’t my life like that?” and put themselves down.

I feel sorry when I come across such news. As a matter of fact, social phenomena to compare oneself with others and to put oneself down are not limited to the SNS world, but are happening in the real world all the time. But still, that’s very unfortunate and sad.

Well! It is Thanksgiving Day week. About fifty million people will travel to join their families, and roughly the same number of turkeys will make dinner tables become delicious feast.

On a moment’s thought, we may assume that everybody will enjoy this week happily and delightfully. But, looking around with a little bit more caring mind, we will easily know that is not true.

Even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may not be in the same happy and delightful situation. All of them may not be enjoying only happiness “today.”

However, it is still Thanksgiving Day.

Whoever and in whatever situation you may be, it is a day which you can enjoy and celebrate with thankful and happy feelings.

I wish that all of you will have a happy and abundant Thanksgiving Day, whatever plan you may have, whomever you may be with, and whatever circumstances you may be under.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제밤 이후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그 생각을 무어라 불러야는지 딱히 이름지어 부를 수가 없었답니다. 제 머리속과 가슴을 꽉채운 어떤 생각이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이거다”라고 이름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이 그냥 느낌으로만 뱅뱅 돌 뿐이지, 생각이 영글어 표현에 이르는 지경에는 닿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이 밤, 옛 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문득 떠올리면서 그 생각을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하는지를 찾아내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랍니다.

저는 어제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이라는 온라인 화상 모임에 함께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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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임에는 한국에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19개 도시에서 참가하신 약 백여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함께 했답니다.

비록 컴퓨터나 휴대폰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댄 것이지만, 마치 실제 한 공간에서 만나고 느끼는 것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답니다.

어제밤, 거의 두시간을 넘긴 만남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마치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이어진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었답니다.

그 순간들의 느낌들을 하나로 엮는 생각이란  바로 “아름다움”이었답니다.

사실 어제밤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픔이었답니다.

그리고 어제밤 모임은 그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닌 ‘나’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던 동시에 그 아픔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저들을” 향하여  “끝내 너희들도 우리가 되리라”고 함께 외쳐보자고 만든 자리였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잃을 수 없답니다.

바로 어제밤, 아파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웃음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는 함석헌선생님이시랍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감격을 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비극이다.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는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세월호에 맺힌 한이 이미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한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걸음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까닭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앓고 있는 아픔이 이어지는 한, 우리라도 그들을 잊지말고 그 아픔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 보자고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모일 때마다 작은 주제를 정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왜 이민와 살면서 떠나온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미국에 온 햇수도 다르고 이제껏 살아온 경험들도 서로 다르거니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정주부로 자녀교육에 열심인 친구도 있으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있었답니다.

그날 모임은 일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 왜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전파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그렇듯 모임이 끝나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새롭게 눈뜨는 것들로해서 이 나이에 과한 즐거움을 얻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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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주말과 주초에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SNS라는 신종 대화 도구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카톡, 텔레그램 등등이 그것들이지요. 저는 제 또래 남못지않게  이런 신종 도구들을 먼저 사용해보는 왈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편입니다. 모든지 처음 나왔다하면 찝적거려보기는 하는 편이랍니다. 그런데 즐기는 쪽으로 접어들면 완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랍니다.

일테면 저는 제 소유의 셀폰(핸드폰, 스마트폰 무어라고 부르던간에)이 없습니다. 그저 PC와tablet을 가지고 놀 뿐입니다.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삽니다. 폰을 손이나 핸드백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보면 이따금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더러 “촌스럼의 극치로 산다”고 말한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랍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잉한다든가 페북에서 친구맺기를 신청한다든가,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일에는 거의 쑥맥에 가까운 촌스러움이 있답니다. 그저 수줍게 제 이야기를 올리고 그것으로 족한 편이지요. 당연히 팔로윙이니 팔로워니, 친구숫자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편이랍니다.

그러니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을 할 뿐이지 골방에서 제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수준에 불과한 진짜 촌스러움의 극치랍니다.

그런 제게 지난 주말과 주초에 댓글로 충고들을 남긴 이들이 있답니다. 한 친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야~ 쨔샤!”하며 반길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모르는 어찌 하다보니 페북에서 만난 분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는 현재 한국에 살고, 페북에서 만난 분은 미국에 사시는 이입니다.

먼저 헤어져 만나지 거의 40년이 넘는 제 어릴적 친구의 충고는 “떠났으면 지금 사는 곳의 삶에 충실하길 바란다. 여긴 사는 우리들이 꾸려나갈 것이므로…”하는 것이였는데, 그 충고를 남긴 시간과 그 친구가 누리고 있었던 형편으로 미루어 오랜 옛 벗인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사는 페북에서 알게된 이의 충고는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뭇 성난 투의 말이었답니다.

두 사람 다 제가 페북에 올린 한국관련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들이었지요.

그래 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랍니다.

먼저 최근에 제가 받은 이메일 몇 개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You’re welcome.  I’m glad you are here, and doing what you do, too. Very interesting article — research which reinforced my observations / perceptions in a few of the listed occupations. >

<Mr. Kim,

Thanks for your note. It reminded me of the African-American slaves, when the children and spouses were sold and they knew, chances were, they would not see each other again.  My Dad told me of stories where slaves who were able to escape to the north, who spent the rest of their days trying to find out where their kin lived and to reconnect.  Some stories ended right and others ended very sad.  To this day I cannot trace my family back to the slavery days.  However, my wife Mae can trace her descendants back to Nova Scotia, Canada and the slave ship that brought the family to Halifax from Jamestown, VA.

I always enjoy your notes: they make us think!>

<Mr. Kim,

I really like your note. I hope you are right about the move to the “HANGRY” Generation .  I see the “me first” in our national politics. Maybe that will change as the younger generation influences.>

<Dear Young Kim,

Thank you for another delightful letter from My Cleaners.  I agree the world is full of very diverse people with lots of differing attitudes and beliefs.  Your reminder to be open to others comes at a perfect time.  Well, any day would be the perfect time, wouldn’t it?

What transpires at your counter, everyday, is a wonderful example of openness and willingness to come into relationship.  One of my teachers would say that we move through a progression in knowing people.  We start as Strangers, move to Acquaintances, then to Rapport and finally into Relationship.

Strangers — we know nothing about each other

Acquaintances — we know some facts (name, address, phone number) about each other.

Rapport — we share similar feelings, are harmonious, we can get along

Relationship — we share and understand what to expect from each other, we share mutual expectations.

In my business (dental practice) we used to say, “Never treat a stranger.”

Of course, always started out as Strangers.  We easily became Acquaintances with a written intake form which shared the needed data.

Coming into Rapport was more time consuming, requiring some questions and answers, sharing of information, thoughts, feelings, opinions, experiences.

Relationship required a more complete discussion of what we each expected from each other.

Although not everyone wants to be in Relationship with every other person, or even with their healthcare providers, (or cleaners).  We all can easily move toward Rapport, starting with just a SMILE.  A welcoming, open attitude begins there and moves ahead with words and gestures.

Your “Letter From Your Cleaner” constantly reminds us what we can expect from you.  This is an open door for relationship building.  What you can expect from me, is to be paid for your service.  I also may provide a pleasant attitude, timely retrieval of my clothes, a sincere referral of a friend to your business.  Thus, we move into Relationship as we each fulfill our mutual expectations.  This is the basis of a trusting, respectful Relationship.

My wardrobe is improved by your cleaning service, and my life is improved by your letter and my spirit is lifted by our relationship.

Yours for a better world,>

제가 이 이민의 땅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이런 종류의 메일은 책으로 엮는다면 족히 몇권 분량은 된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제가 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일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저는 “괜찮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은 욕망도 있거니와 저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들의 좋은 점들이 드러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민의 삶을 이제껏 가꾸어 나왔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제게 늘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손가락질 받고 우스개 노릇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정말 아니랍니다. 그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제가 관심을 끊지 못하거니와 적극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제가 종북이니 반국가적(반정부라는  말은 그래도 들을만 하답니다.)이니 하는 말을 듣게되면 솔직히 분노가 치민답니다.

사르트르는 <유대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만약 유럽의 부르조아들은 그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던 때로부터 70년이 흘렀습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들이 옛날 유럽인 행세를 하고 있듯이, 같은 한인들끼리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혐오집단”과 “증오의 대상”을 찾는 못된 관습은 사라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더욱더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이랍니다.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

노동절과 중산층

월요일이지만 아침을 느긋하게 맞습니다. 늦잠의 여유도 누려봅니다. 노동절(Labor Day)아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영업자 주제에 누리는 혜택이야 전혀 없지만, 월요일 아침을 여유롭게 맞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감사랍니다.

커피 한잔과 함께 훑어본 뉴스에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답니다. 저희 동네 신문인 The News Journal에 실린 소상인 전문 리포터Scott Goss 의 “델라웨어주 노동조합원 숫자 줄다”라는 기사입니다.

지난해 델라웨어주 고용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노동조합 가입자인데, 이 수치는 지난 25년 이래 최저치이고 10% 미만으로 떨어진 첫번째 사례랍니다. 전체 수치로보면 델라웨어주내에는 38,000명에 조금 못미치는 조합원 숫자인데 이 역시 1989년이래 최저수치랍니다.

오늘 오후에 윌밍턴 시내에서 벌어질 노동절기념 퍼레이드를 이끌 노동조합 리더인Samuel E. Lathem이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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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노동조합이 필요한) 블루칼라의 정의는 새롭게 내려져야한다. 주지사를 비롯한 정치행정관료들은 그들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말하지만, 그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아마존이나 월마트 등의 저임금 서비스업에 치중되어있고, 그 일자리들은 불만족스럽고 블안정한 것들이다.”

Samuel E. Lathem의 말은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전통적 개념의 일자리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델라웨어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국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 전체 노동조합 가입자 비율은 11.1%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1950년대의 30%와 그리고 20%대를 유지했던 1980년대에 비하면 크게 위축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건강한 미국의 중추 역할을 했던 중산층들은 바로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임금을 바탕으로  일일 8시간 노동, 주말휴무, 아동노동법, 최저임금제, 고용 의료보험 등 이루어내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변화는 노동조합이 할 일들이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들에서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이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이 오늘날의 노동조건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젊은이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들이 공정한 임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그들이 만드는 노동의 가치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푸념하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염불일 뿐라는 점입니다.

실제 델라웨어주내 노동 일자리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90년 이래 지난 2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라인과  Dupont회사의 나이론 제조업체 생산라인의 약 1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델라웨어 주 전체 인구가 100만이 안된다는 점에 미루어 보면 이 수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노동조합들이 침체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공무원노조, 교원노조 등 공공노조들의 조직력과 확장력은 더욱 커져가고 있답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대학교수의 말이 재밌습니다. “자동차업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들은 보따리 싸서 타주나 다른 국가로 이동하면 되지만, 주정부나 학교 등은 이주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밥통을 위한 결속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랍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New Castle County Executive(뉴캐슬 군청장) Tom Gordon의 말입니다.

“노동조합이 미국의 중산층을 형성했지만, 더 이상 미국의 중산층은 없다. The union built the middle class in the country, but that middle class doesn’t exist anymore.”

바로 이 지점에서 갖는 질문 하나랍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는…

델라웨어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이모티콘)

제가 사는 델라웨어 지방 소식지인 News Journal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소개드립니다.
B9317996251Z.1_20150709151305_000_GM0BA7K6M.1-0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나 이메일에 ‘이모티콘(emoticon)’ 대신 얼굴 표정이나 사물을 단순화한 아이콘인 ‘에모지'(emoji)라는 것이 있지요.

델라웨어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를 만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하는 물음과 함께 글쓴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들을 소개하는 기사랍니다.

델라웨어라는 지역 특성 및 지역 사람들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상징을 꼽아보자는 것이지요.

글쓴이가 델라웨어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모지로 꼽은 내용들이랍니다.

  1. old bayOld Bay – 빨강 파랑 노랑색을 주조로 한 양념통에 담긴 양념 이름입니다. Delmarva(델라웨어, 매릴랜드, 버지니아)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지요. 주로 해산물(게, 새우 등등) 요리에 사용한답니다. 제 여름 보양식인 게찜에 많이 들어가는 양념입니다.

biden2. Joe Biden – 델라웨어가 낳은 인물이지요. 현 미국 부통령입니다.

 

lifeguard3. Lifeguard – 바다가 감싸고 있는 지역 특성과 여름철을 감안해 꼽은 듯. 물놀이에 필수적인 안전요원과 안전을 강조한 것이지요.

shopping bag4. Sopping bag – 델라웨어주는 판매세가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 tax-free shopping을 강조한 것이지요.

seagal5. Seagull – 역시 바다로 쌓인 특성상 흔히 볼 수 있는 꼽은 갈매기입니다. 제 가게가 있는 쇼핑센터도 종종 갈매기 떼들이 몰려와 주차지역을 덮곤 한답니다.

scrapple-header-ll6. Scrapple – 델라웨어 사람들의 흔한 아침메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크래플은 잘게 썬 돼지고기, 야채, 옥수수 가루로 만든 튀김 요리랍니다. 냉동 식품으로 판답니다. 물론 저는 안 먹지요. 차라리 콩나물 넣은 라면을 먹지요.

imagesC7SXMPX87. Marijuana leaf – 델라웨어가 마리화나 애용자들에게는 천국이 될 듯합니다. 약용으로  쓰는 것은 물론이고, 오는 12월부터는 개인당 1온스의 마리화나를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게 합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귀 솔깃 하신 분 있으려나?

bluehen8. Blue Hen – 델라웨어주의 상징 동물이자  University of Delaware 스포츠 팀들의 상징이랍니다.  Go! Blue Hen! 아주 흔한 스티커랍니다

capture-20150709-1739209. States – 워낙 주의 크기가 작다보니 조금만 달리면 이웃한 펜실바니아, 뉴저지, 메릴랜드가 된답니다.  때론 미국인들도 모르는 주이기도 하답니다 델라웨어를 크게해서 알리는 에모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horsecrabs10. Horseshoe crabs – 이거 되게 징그러운데 델라웨어 해변가에 널려있답니다. 자그마치  기원이450 million years ago(4억 5천만 년 전)으로 올라가는 바다생물이랍니다.

우린 여전히 미국인일까?

연휴로 맞는 주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신문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기사 하나입니다.

7-4-15제가 사는 동네 신문인The News Journal의 고정 기고가인John Sweeney라는 이가 쓴 “우린 여전히 미국인일까?(Are we still Americans?)라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해마다 맞는 독립기념일이면 동네마다 퍼레이드를 벌리고 불꽃놀이를 즐기고, 더러는 해변가를 찾아가 여름을 만끽하는 연휴를 보내곤 하는 모습은 올해도 여전하다며 이 글을 시작한답니다.

그런데 매해 시간이 흐를수록 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 날이 되면 펄럭이던 성조기의 빨강, 하양, 파랑 색깔은 거리마다 자동차나 침대 등의 광고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성조기는 더 이상 애국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그 뿐 만이 아니라 정치체제도 흔들리고 있고, 어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은 농담거리가 되었고, 미국의 역사를 아는 이들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도도 점점 낮아지고 있고, 정치적 견해들 역시 자기 쪽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주장되고 있거니와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는 모습은 찾을 수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좌, 우파 세력들은(미국에 좌, 우파가 있는지 의문이지만) 각기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조건들이나 법안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고치려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글쓴 이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에서 미국인으로 살려고 하는 것일까?( Do we still make Americans in this country?)”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런 해법을 제시합니다.

미국이 독립을 이루었던 세대로부터 10세대가 흐른 이 싯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1987년 교육학자Eric Donald Hirsch가 주장한 “문화 이해 능력을 고양하는 일 또는 문화 문맹 퇴치(Cultural Literacy)”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땅 미국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미국인들 끼리의 서로 다른 문화, 관습, 언어 등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이 여전히 미국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 John Sweeney의 주장을 읽으며 “어디 미국 뿐이랴”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 누가 먼저가 아니라 제 자신이 자신됨을 돌아보는 일에서부터 이웃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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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희 동네에서 있었던 퍼레이드 사진이랍니다. 이 길은 매일 제 출퇴근 길이기도 하답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제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 학생들인데, 저런 대열 속에 있었던 제 아이를 찍으려고 사진기 들고 기웃거렸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 빠름니다. 세월이.

 

참 씁쓸한 사진들

미국내 언론들이 한반도에 대한 뉴스를 전하는 빈도수에 있어 남쪽은 북쪽을 따를수가 없답니다. 그만큼 북한에 대한 뉴스를 많이 다룬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북의 김정은에 대한 뉴스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 류의 기사들 대부분이 김정은을 희화화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내용들입니다. 특히 기사에 달린 사진들이나 동영상들은 정상적인 미국인들에게 웃음을 주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수많은 사진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젊잖은 사진 두 장을 골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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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visits Mangyongdae Revolutionary School

저런류의 사진들이 미국인들의 눈에는 우수꽝스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겠지만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通)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제가 본 남쪽의 사진 한장이 어찌 그리 우스꽝스럽고 안스럽던지요. 아마 사진에 달린 설명과 사진에 대한 정황설명을 미국인들이 보거나 듣는다면 그 반응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진이 통(通)하는 남쪽 사회를 생각해 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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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리 남북이 닮아가는지요. 그나마 닮아가기라도 하니 좋다고 할까요?

답답함으로.

(혹시 제 느낌을 모르시겠나요? 그럼 어쩔까요? 정말 답답함으로.)

우리동네 뉴스

오늘 제가 사는 동네 사람들의 최고 관심 뉴스는Beau Biden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올해 46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Beau는 현 미국 부통령 Joe Biden의 장남이자 델라웨어주Attorney General(주 법무장관)이었으며, 내년도 선거에서 유력한 주지사 후보였습니다.

어제 오늘 지역 방송이나 신문에는 Biden 일가에 대한 뉴스가 넘쳐났답니다.biden

장례 행사를 치룬 Saint Anthony of Padua Church는 Wilmington시 downtown내 Little Italy라고 불리우는 이태리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곳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오늘 제 가게 손님 한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랍니다.

이 양반은 은퇴한 대학교수랍니다.

Saint Anthony of Padua Church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랍니다. 그 교회는 이번 주일(6월 7일)부터 일주간 동안 치루어지는Italian Festival 준비로 보통 분주한 게 아니었답니다. 교회 부속건물과 뜰에는 행사 준비로 각종 좌판들과 전시 및 판매용품들로 그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위해서 그 모든 준비물들을 치워야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한쪽 구석으로 다 미뤄 놓았는데 바로 전날 보안요원들이 현장 답사 및 준비를 하며 보안에 문제가 있다고 모든 물품들을 장례시장에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신나서 제게 전해준 손님은 걸음걸이도 시원치않은 노인이시랍니다. 그렇게 다 치운 물건들을 내일 오후에는 또 다시 다 정리해서 페스티벌 준비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내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답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마지막 말입니다.

“아까운 젊은 친구 먼저 간 길 배웅하는데 이 정도야….”

유월에

매 주일 아침, 제 가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저와 같은 업(세탁업)을 하시는 이들의 손님들에게 짧은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답니다. 내일이면  400번 째이니 거의 8년 가까이 잇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단 한사람만”이라도 주일 아침에 “사는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왔답니다.

400번 째 편지,  비록 제 손님은 아니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과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유월에!


 

bs-06-13-DW-Kultur-Gaienhofen오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입니다.

여름이 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찾아 나섭니다. 바닷가나 강가를 찾아 나서기도 하고 산과 공원을 찾기도 합니다.

자연과 함께 살았던 유명한 미국인을 꼽으라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강변 숲속에서 지내며 쓴 책인 Walden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진리들 –단순, 조화, 아름다움 등- 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소로우와는 반대로 자연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인 유명한 독일인이 있습니다. 데미안 황야의 늑대, 싯달타 등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입니다.

그는 처음 자신의 집을 갖은 이래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정원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에게 정원은 바로 자연이었답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가꾼 정원 속에서 얻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이렇게 적고 있답니다.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 그 능력은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고개를 높이 들어라. 한 조각의 하늘, 초록빛 나뭇가지들로 덮인 정원의 담장, 멋진 개 한 마리, 떼를 지어가는 어린아이들, 아름다운 여성의 머리 모양.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말자.>

<하루 중 한 한 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거나 활기에 찬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Hours in the Garden and Other Poems>에 있는 말들이랍니다.

작은 기쁨으로 활기차고 아름다운 유월을 맞이하시길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행복이란

– 헨리 데이빗 소로우

행복은 한 마리 나비와 같다. 나비를 잡으려 할수록 이리저리 빠져 달아나버린다. 그러나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보면, 어느새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800px-WaldenPondSpringIt is the last day of May. It will be June tomorrow in which the real summer begins.

In summer, many people go out to nature. They go to the beach, riversides, mountains, or parks.

Henry David Thoreau is one of the most prominent Americans who lived a life with nature. His best-known book, Walden, which he wrote while he was living in the forest around the shores of Walden Pond in Concord, Massachusetts, is still telling us that the true meaning of life, such as simplicity, harmony, and beauty, can be found in nature.

There is one famous German author who brought nature into his house instead of going out to nature, in contrast to Thoreau. It is Hermann Hesse, the author of many widely-read books, including Demian, Steppenwolf, and Siddhartha.

It is said that he had never neglected gardening since he had gotten the first house of his own, though he had to move many times. For him, his garden was nature itself.

He wrote life lessons which he had learned from his own garden in this way:

<The ability to enjoy ‘small happiness.’ That is like some pleasure, love and the delineation of feeling. Those don’t attract attention, don’t get praise, and don’t cost money. Raise you head high. A pick of sky, the garden wall covered with green leaves, a beautiful dog, a group of cheerful children, beautiful hairdos of women – never miss all these things.>

<There are none more pitiful than those who don’t look at the sky, nor come up with a spirited and good thought at least once a day.>

<Unfortunately I have never known the way to live easily and comfortably. However, I could always do one thing at my own will. It is no other than living beautifully.>

These words are from his book, Hours in the Garden and Other Poems.

I wish that you’ll greet spirited and beautiful June with small joy.

From your cleaners.

Happiness

–              Henry David Thoreau

Happiness is like a butterfly; the more you chase it, the more it will elude you, but if you turn your attention to other things, it will come and sit softly on your shou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