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문득 생각난 박상원 선생이 떠나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바로 엊그제 처럼 느끼지는 것은 나이든 탓일게다.

한 동안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박상원 선생은 조금 외로운 분이셨다. 얼핏 날 선 듯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한 몫 한 탓이었기도 하지만, 그의 환경이 그리 만든 연유도 있었다.

그는 나보다 거의 한 세대 나이차를 이를 만큼 까마득한 대학 선배였는데 나를 늘 ‘영근씨’라 불렀었다. 아마도 다 그의 외로움 탓이었을 게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미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꿈을 키웠던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의 장조카였다. 한 때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의 의형제이자 열성 지지자였던 박용만선생이 이승만의 정치적 천적이 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겪어 낸 이야기들을 나는 박상원 선생을 통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김대중대통령 시절 우성 박용만 선생께 추서된 훈장을 가족 대표로 받고 돌아 왔던 날, 상기된 모습의 박선생은 어린 아이 같았었다.

그는 은퇴 후 우리 동네를 떠나 따님이 사는 코네티컷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에도 이따금 서로 간 전화 안부는 이어졌었다.

아이고, 세어보니 벌써 십 오년이 지난 저 쪽 세월이야기가 되었다. 그와의 마지막 통화가.

그가 노환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어느 날, 그의 전화를 받았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 쇳소리가 났었다.

“아니, 영근씨! 어째 이런 일이… 그런 쥐새끼가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다니! 아니 5,6,7십년대 건설 노가다판에서 출세했다는 것은 바로 부정 부패 비리에 쩔었다는 이야긴데…그런 사기꾼이 어떻게 나라의 대통령이…”

그의 분노는 한동안 이어졌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그 무렵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박상원 선생을 생각하며 혀를 찼었다. “쯔쯧, 박선생님 먼저 잘 가셨지 이 꼴 안보고…. 이 꼴 보셨으면 또 속 끓이며 전화 하셨을텐데…”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며 자꾸 돌아가신 박상원 선생이 떠오른다.

‘설마…’하는 마음이 크게 앞서기는 한다만, ‘설마…’하는 염려가 쉽게 가시지도 않는다.

문과 무를 겸비했던 <문무쌍전(文武雙全)>박용만선생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듯 지난 백 수십년 사이 아쉽게 저물어 간 뜻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즈음 답답한 한국 뉴스들을 훑어보다 떠오른 박상원 선생.

무릇 한(恨)을 품고 살았던 우리들의 선대들이 비관적인 삶은 살지는 결코 않았으므로.

설마 이명박에 박근혜를 더해  수십 년 도둑질에 이골 난 놈들이 채워 준 완장 찬 텅 빈 머리 무당까지…

그리 부끄러운 일이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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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박용만에 대한 글보기

두어 주전에 영화 <미나리>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아내가 물었었다. ‘영화 평(評)은?’. ‘글쎄… 그저 덤덤허네,  딱히 미국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을 바꾼 이들이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 아닌가? 뉴스 주목도는 한국 영화나 문화 전반 또는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자체에 상품성이 생긴 탓은 아닐까?’ 내 대답이었다. 물론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안목이 천박하리 만큼 지극히 낮은 내 수준이 드러난 응답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제 들은 그의 부음(訃音)으로  인해 오늘 하루 영화 <미나리>를 곱씹었다.

정세영.

그와 내가 깊은 교분을 나눈 적은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한 차례 식사를 함께 나눈 적이 있고, 몇 차례 스쳐 지나며 눈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을 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해 마다 새해를 맞으면 그는 짧은 새해 인사를 먼저 보냈고 나는 늘 뒤늦게 그 보다 더 짧은 응답으로 서로의 연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올 새해 인사는 나누지 못한 채 그가 떠났다.

정세영.

그의 이름은 필라델피아와 한인 그리고 국악(國樂)과 함께 한다. 아니 국악 이라기 보다는 ‘우리 가락’, ‘우리 소리’가 더 맞을 게다.  자칫 한(恨)을 쌓아 가기 십상인 이민의 삶에 흥(興)을 돋아 내는 가락과 소리를 지켜내려 애 쓴 사람 – 내가 그를 기억하는 고리다.

정세영.

이제 막 필라에 사는 한인 노인들 가장 말석에 얼굴 내밀어 노인들을 위한 마당쇠 노릇 마다치 않고자 했던 애기 노인. 그가 … 쯔쯔… 하수상한 세월 버티지 못하고 너무 일찍 장구채 놓았다.

그가 놓은 징 채, 장구채 아래 때없이 자라는 <미나리> 밭을 본다.

필라델피아, 한인사회 아니 그를 뛰어 넘어 흥을 북돋을 정세영의 미나리 밭, 우리 소리 우리 가락.

정세영형.

이제 내가 가늠할 수 없던 신산했던 삶도, 그 흥 속에 은밀히 감추었을 한도 다 내려 놓고 편히 쉬시길.

정세영형에게 보내는 가장 긴 새해 인사로.

한국학교

물론 내가 ‘싫다’하면 나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만, 구태여 후환을 만들어 가며 살 나이는 아니기에 한주간 노동의 피로에 절은 토요일 오후 아내를 따라 나섰다. 뉴저지 Hamilton은 처음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에서 열린 ‘제 4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한 길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가 주최하고 한국의 재외동포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로써 입양되었거나 다문화 가정 자녀들 또는 비한국계 현지 시민들이 참가해 한국어 말하기 경연을 펼치는 잔치였다.

지난해 이 행사에 내 며늘아이가 경연에  나섰음에도 함께 하지 않았었는데, 올해 꼼작 없이 함께 한 까닭은 그만큼 무언(無言)의 재촉을 하는 아내의 힘이 강한 탓이었을게다.

거의 끌려 가다시피  했던 자리였는데,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돈내면서 함께 했어야 할 행사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입양 및 다문화 가정 자녀를 비롯해 인디언 아메리칸, 코카시안, 평화봉사단으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이까지, 모두 현재 미 동중부  저마다의 동네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잔치마당이었다.   DSC08518 DSC08529 DSC08539 DSC08548 DSC08553 DSC08567 DSC08577

이경애선생의 지도로 모두 함께 한 복주머니 색종이 접기에 열심히 따라 하는 전혀 나 같지 않은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아내는 춤을 추었다. 아내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 드리는 내 기도는 오늘도 통했다. ‘제발 넘어지는 실수만 아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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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톤 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은 강남옥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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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행사를 밀고 나가는 힘일게다. 그의 시편들은…

일주일에 고작/ 세 시간 하는 우리, 토요일 한국학교/ 빠진 이처럼 몇은 결석/ 띄워쓰기 다 틀린 작문같이 몇은 지각/ – 중략- 화분에 물 주듯 몇 년 같이 뒹굴었더니 / 철자법 다짜고짜 다 틀린 카드도 건네주고/ ‘썽생님, 나 누구게?’/ 일찌감치 방귀 트듯 선생한테 말 트며/ 뒤에서 슬쩍 가린 눈 풀고 지긋이/ 날 안아 주기도 한다 – (강남옥의 시 ‘토요일 한국학교’에서)

내 모국어의 속 깊은 품은 언제나/ 삶 앞에 진술 긴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언어의 진국이다 – (강남옥의 시 ’깊고 넉넉한’에서)

돌아오는 길,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와 격려를….

*** 아내는 이 자리에서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동창 얼굴을 보다. 사십 이년 만이란다.

불편한 진실

델라웨어주 부지사를 지낸 S. B. Woo는 팔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현역입니다. Woo씨는 현실정치에서 은퇴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단체 80-20 Initiative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이즈음 정열을 쏟고 있는 분야는 아시안 아메리칸 다음세대들이 교육 현장에서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가 의장으로 있는 80-20 National Asian American Educational Foundation(80-20 전국 아시안 아메리칸 교육재단)은 아시안계 다음 세대들이 교육현장에서 받고있는 다양한 차별들에 대한 보고서들을 내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대학입학 과정에서 아시안 학생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차별에 관한 글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이웃과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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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과 ‘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지났다.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들고 우리 부부를 찾아온다. 십여년 이어져 온 일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Bill은 내 가게가 있는 델라웨어주 Newark 토박이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이 동네의 옛모습을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무우밭과 배추밭을 지나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 고향 신촌을 떠올리곤 한다.

무우밭과 배추밭이 있던 서울 신촌을 말하면 옛사람이듯, 옥수수밭과 한참을 가야 집 한채를 만나던 Newark을 이야기하는 Bill을 이해하려는 요즘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를 일이다.

Bill을 안지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보다 먼저 안 사람은 그의 부인 Mrs.민이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른다만 그때만 하여도 국제결혼이라고들 하였다.

Mrs.민은 거셌다. 그녀가 ‘뵤’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미군에 복무하던 Bill이 한국에서 근무할 때 만나 결혼한 Mrs.민은 그의 남편 Bill을 늘 ‘뵤’라고 불렀다.

Mrs.민은 거셌지만 여렸다. 같은 한국인들이 가까이 하기엔 거셌지만, 분명 Bill에게는 여렸다. 딱히 내가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Bill과 Mrs.민은 친구가 되었다. 세상 뜨기 전에 Mrs.민이 무당 내림 굿을 받았을 때도 나는 그의 집을 찾기도 하였다.

Mrs.민이 세상 뜬지도 벌써 십 수년이 흘렀다. 먼저 떠난 아내가 좋아하던 감나무의 감이 익을 때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따서 나를 찾아온다.

지난해에 얻은 외손녀 이름을 지으며 middle name에 Min을 넣었다며 좋아라 하던 ‘뵤’는 외손녀가 자라면서 어찌 제 마누라 ‘민’을 닮아가는지 놀랍단다.

늘 그렇듯 나는 한 바구니의 감을 가까운 ‘한인’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다.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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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누님댁에 들르다. 코스모스가 이웃집과 담장이 되어 춤춘다. 강원도 평창 사람 매형이 고향 생각으로 심었을 터이다. 나도 잠시 내 고향 신촌으로 돌아간다. 고향은 그리움으로 가꾸는 지금 여기에 있다.

한국 대통령의 방미 뉴스에

당신이 뉴욕 또는 LA, 아니면 시카고 어디쯤 살고 있다 치자. 그런데 텍사스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여럿 다친 큰 사고가 났다고 하자. 그리고 며칠 후 당신은 한국에 있는 지인이나 친척의 안부전화를 받는다. ‘미국에서 사고가 났다는데 괜찮으냐?’고 묻는 전화 말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아제 개그를 하느냐고 나무라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만, 실제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게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살아온 연식이 제법 되시는 분들은 한국에서 있었던 이런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 갔다가 한 두어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한국 말하는 코미디 말이다. 코미디가 아니라 실제 그런 이들도 있었다. 1960, 70년대 쯤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내가 이즈음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최근 한국 뉴스를 보면서 이런 옛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믿게 된 것인데, 특히 한국 TV 뉴스 가운데 해외 특파원들의 말투를 유심히 듣고 난 후에 굳힌 생각이다. 내 믿음이 옳고 그름을 당신이 판단하고 싶거든 한국 TV 뉴스 중에 해외 특파원들(일테면 뉴욕, 워싱톤, LA, 런던, 파리, 동경 등등 어디라도 좋다)의 말투와 억양을 유심히 들어 보시라.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눈치채게 될 것이다. 뭐가 다르냐고? 일반적인 한국인들의 말투와 억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더구나 한국내 아나운서나 앵커들의 말투와 억양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다시 옛날 코미디로 돌아가자. 당시 이어지던 우스개이다. 김포공항에 내려서 빠다 바른 소리로 한국말하는 이의 뺨을 치면 바로 김치 냄새나는 한국말이 튀어 나온다던 이야기인데, 그 우스개 역시 지금도 여전히 통하지 않을까 싶다. 분명 연습했다 싶은 해외 특파원들의 말투와 억양 역시 뺨 한 대만 치면 그들의 평시 억양과 말투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때 언론사를 기웃거렸던 경험 탓에 워싱톤 주재 특파원들의 취재환경이나 그들의 행태에 전혀 문외한은 아니다. 단언컨대 현지인 출신이 아닌 한 평소 억양과 말투가 한국인들과 다른 이들은 없다.

그런데 왜 특파원 뉴스를 전하는 그들의 말투가 독특할까? 답은 간단하다. 뉴욕, LA, 시카고, 텍사스를 뭉뚱그려 동일한 미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저 친구는 전문가이므로 나와는 다른 말투와 억양을 써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다. 해외 특파원쯤 되면 뭔가 달라도 크게 다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이들도 있다. 더하여 의도적으로 그런 독자나 시청자들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언론사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사실 억양이나 말투 같은 형식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그 형식 속에 담긴 내용들이 가짜이거나 거짓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인데, 이때 형식은 거짓이나 허위를 위장하는 수단이 된다.

한국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 행사를 앞두고 수많은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늘 그렇듯 한국의새로운 권력자가 첫 번 째 방미를 하면 동포사회도 이런저런 이야기거리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 사람들이란 수십년이 지나도 매양 한가지 타입의 얼굴들이다.

이제 앞으로 두어 주 동안 이른바 특파원들이 전하는 무수한 뉴스들이 쏟아질 것이다. 때론 빠다칠한 억양과 말투로 사실이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이해에 맞춘 소설들이 뉴스로 둔갑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빠다 칠한 소리로 한국말하는 이들의 뺨을 후려치는 시민들이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197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기 때문이다.

문재인 한국 대통령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돌출행동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양국 정상의 첫 만남이 한반도와 미주에 사는 동포들에게 위안이 되는 뉴스들이 넘쳐나기를 빌며.

나는 오로지….

가게 손님들과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겝니다. 세상 어디서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제가 손님들에게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정치 이야기(?… 딱 정치 이야기랄 수는 없지만, 이즈음 내가 살고 있는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한국과 유사한지라 )로 오늘 아침에 편지를 띄워 보았답니다.

행여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현재 이메일 응답만으로는 긍정적 느낌의 답이 대세랍니다. 새로 맞는 한 주, 제 가게 손님들과 나눌 한국상황에 대한 응답들이 자못 궁금하답니다.

3-12

지난 주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이야기는  한국대통령 탄핵에 대한 것이었답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온지도 벌써 30년이 넘어가니 사실 오늘날 한국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제게  한국의 정치상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뉴스에 관심을 안가질 수가 없었답니다.

저는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한국에서 살았답니다. 그 이름이 박정희였는데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저는 초, 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를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답니다. 그가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통치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이십대 나이였던 그 때에 겪었던  정말 웃지못할 일들이 많았답니다. 일테면 남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를 못하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되는 것들이었답니다. 제가 스무살 무렵의 일이었는데 거리에서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이들을 경찰들이 잡아 머리를 가위로 짧게 짤라버리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들을  경찰들이 붙잡아 치마를 가위로 자르는 일도 있었답니다.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었지요.

그 무렵에 제가 읽었던 책 가운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답니다. 그 책에 있는 말 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 중략-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국뉴스를 보면서 떠올린 오래 전에 읽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랍니다.

좋고 나쁘건 여기 살려고 온 내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삶에 큰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여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당신의 세탁소에서


It was the impeachment of the Korean president that became a much-talked-about issue among Korean people last week.

As I came to America over 30 years ago, I cannot say that I know well about the situation in Korea at the present day. And, as you may know, I’ve been busy at the cleaners so that the political situation in Korea has not attracted my attention particularly. However, I cannot but pay attention to the news about the impeachment of the president of Korea.

I lived in Korea during the reign of the impeached Korean president’s father. He is President Park Chung-hee.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I went through the elementary, middle, high school and the university. I even completed my military duties,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All these were possible because his reign lasted for no less than 18 years.

When I was in my twenties, many things about which I could not laugh happened in Korea. For example, they restricted men from having long hair and women from wearing a short skirt. Around the time when I was about twenty years old, the policemen caught young men with long hair and cut their hair short with scissors. They also caught young women with a short skirt and cut the skirt. This kind of unthinkable things had happened when the father of the president who was impeached the other day had been the president of Korea.

One of the books which I read in those days was “Civil Disobedience” by Henry David Thoreau, which was banned in Korea at that time. The following is from the book:

We should be men first, and subjects afterward. It is not desirable to cultivate a respect for the law, so much as for the right. The only obligation which I have a right to assume is to do at any time what I think right… I came into this world, not chiefly to make this a good place to live in, but to live in it, be it good or bad.

Those words came to my mind, while I was watching news about Korea.

If we can do something, however small it may be, “to make this world a good place to live in, be it good or bad,” wouldn’t it be meaningful in life?

I hope that this world will become one in which every single individual as oneself, instead of the mass, is valued and respected.

From your cleaners.

이민(移民)과 시민(市民)

초기 미국의 정신 가운데 한 사람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그의 글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에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군인들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저주받을 짓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존재인가? 도대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어떤 사악한 자가 부리는 움직이는 작은 요새나 탄약고인가?

이 나라 국민은 노예 소유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하여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마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목숨을 걸지나 하지는 않는다. 옳은 쪽에 투표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내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힘을 통해 승리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며 그 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우리들은 이 땅의 이민자이자 이 땅의 시민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다양한 처지와 모습으로 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든 마땅히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를 위해 따르는 의무 또한 다하며 삽니다.

우리 시대의 자유인 작가 유시민이 최근 개정판을 낸 <국가란 무엇인가>에 쓴 맺음말 가운데 남긴 말입니다.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정의를 실현할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혼자 힘으로 훌륭한 국가를 만들지는 못한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다. 어떤 시민인가? 자신이 민주공화국 주권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대통령이 된 것과 같은 똑 같은 무게의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이다. 주권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이며 어떤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아는 시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면서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고 행동할 줄 아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이라야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 시대를 고민하며 사는 필라델피아 친구들이 뜻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정학량변호사가  이 땅을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늘 우리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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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피해자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너무나 적게 기억한다. –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오늘 동네에서 저와 같은 업종인 세탁업을 하는 이에게 들은 말입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칸들이 이번 주 목요일에 모두 일을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7명의 멕시칸 종업원들이 모두 그 날 하루는 쉬겠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이지요. 사연인즉 Wilmington시내에 있는 St Paul’s Church에서 이번 목요일에 열리는 트럼프의 이민자들에 대한 행정명령을 규탄하는 모임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들이 떠도는 이즈음이지만, 사실 저처럼 촌에 살고 있거나 이 땅의 시민이 된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사람들에겐 솔직히 무관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정황이었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광기가 이렇게 우리들의 생업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요. 실제 히스패닉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인들은 걱정이 많다고들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 신문인 News Journal은 어제  Newark시에서 있었던 행사 하나를 제법 크게 소개했답니다. Newark시는 제 가게가 있는 곳이고, 행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였답니다.

newark march

신문은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양성이다. Diversity is what makes America great.”,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영한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We welcome that stranger. We fight for that stranger, no matter where that stranger is from.”,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We are going to win this battle.”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앓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계 시민으로서 멕시칸들을 비롯한 이민자들과 이 땅의 건강한 시민들과 손잡고  승리하는 대열에 함께 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