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날에

아버지의 날입니다. 아주 편하고 여유롭고 마음 넉넉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뜰일도 하고, 책도 좀 읽고 낮잠도 한숨 늘어지게 잤습니다. 사이사이에 아들 며느리의 안부 전화도 받고, 독일 출장 중인 딸과 사위의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지난 일기들을 뒤적이다가 육 년 전 오늘,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냈던 이메일 편지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제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습니다. 두 해 전에 결혼한 아들은 가까운 필라에 살고, 딸 아이는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과는 일 년에 몇차례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 때 일들이 가물가물 먼 옛 일이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일 힘들었던 계절이 해마다 이 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지만, 우리 부부는 그 시간을 세탁소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론 아이들을 데리고 세탁소에 나와 함께 있곤 했었지만, 세탁소 특유의 여름 더위를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곤욕이었답니다.

제가 무지했던 탓도 있었고, 게을렀던 요인도 있었지만 제 형편에 맞게 아이들을 보낼 summer camp나 여름방학 프로그램을 찾아 아이들을 보내는 일도 참 쉽지 않았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던 기억도 없거니와, 하다못해 영화관을 함께 찾았던 일도 거의 없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엇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참 고맙습니다.

Father’s Day 아침에 제 두 아이들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보았답니다. 부끄러움으로 말입니다.

한가지 덧붙일 말이 있답니다. 제 부끄러움을 감싸는 감사함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아이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하루 하루를 즐기며 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아들로서, 딸로서 말이지요.

오늘, Father’s Day는 물론이거니와 한 주간 내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그 겨울, 일요일들 – − 로버트 헤이든

일요일에도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그 검푸른 추위 속에 옷을 입고는/ 한 주 내내 모진 날씨에 일 하느라/ 갈라져 쑤시는 손으로 재속의 불을/ 다시 살려 놓았다./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았음에도.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몸속까지 스몄던 추위가/ 타닥타닥 쪼개지며 녹는 소리를 듣곤 했다./ 방들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나는 그 집 구석구석에 배인/ 분노를 경계하며 느릿느릿 옷을 입고는

추위를 몰아내고/ 내 외출용 구두까지 윤기나게 닦아 놓은 아버지한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곤 했다/ 내가 그때 무엇을, 무엇을 알았을까/ 사랑이라는 엄숙하고 외로운 사명을.

Those Winter Sunday –   ROBERT HAYDEN

Sundays too my father got up early/ and put his clothes on in the blueblack cold,/ then with cracked hands that ached/ from labor in the weekday weather made/ banked fires blaze. No one ever thanked him.

I’d wake and hear the cold splintering, breaking./ When the rooms were warm, he’d call,/ and slowly I would rise and dress,/ fearing the chronic angers of that house,

Speaking indifferently to him,/ who had driven out the cold/ and polished my good shoes as well./ What did I know, what did I know/ of love’s austere and lonely offices?



그리고 오늘 읽은 책의 한 대목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렉산더 버트야니(Alexander Ratthyany)가 쓴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현재에(서) 우리의 과거를 만난다. 이 만남이 어떤 양상이 되는지는 현재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 중략 ——- 현재는 미래가 지닌 가능성처럼 활짝 열려 있으며, 우리는 오늘 그 가능성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양심과 싸우고 있다. ‘미래가 지닌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이상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특정한 운명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여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가능성은 —— 중략 ——– (오늘, 여기에서)우리가 발산(행)하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다.>

과거와 미래 모두 오늘의 나와 연관되어 있고, 오늘의 내 생각과 행동이 과거의 의미도 바꿀 수 있고, 미래의 가능성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나이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 아이들에게 대해 켜켜이 쌓여 있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까지도 오늘의 내 생각과 행함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세상과 연계된 모든 일도 그러하다는 말일 터이니 말입니다.

그래 또 오늘에 대한 감사입니다.

초여름 하루

하루는 늘 길거나 짧다. 또는 매우 더디거나 너무 빠르다. 모두 하루의 길이나 속도를 재는 내 잣대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하여 이젠 제법 노회해진 나는 하루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저 늘 쳇바퀴 속을 도는 일상에서 아주 작고 순간적인 느낌으로나마 단 한가지라도 마음 속에 이는 감사함 하나 붙든 하루면 족하다는 생각인데, 그조차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하루는 그저 감사가 넘치는 날이다.

아들 내외가 차려준 밥상으로 넉넉히 배 채우고, 맑은 눈빛만 마주쳐도 그저 좋은 손녀 안고 놀다 돌아오는 길, 아내와 둘이 마른 바람 그득한 초여름 공원 길 걸으며 보낸 하루 – 내 변덕이 끼어 들 틈이 없는 하루다.

걷다 땀 식히려 주문한 맥주 이름이 “Victory Summer Love”였다.

뒷뜰에 고추 모종 몇 개 심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추가 달렸다. 나리와 다알리아가 꽃망울 품은 여름이다. 여름 사랑 품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 고작 120쪽에 불과한 책을 두 주 째 손에서 놓치 못하고 틈나면 곱씹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에세이라고 했건만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곱씹어 읽을수록 이즈음 뉴스들을 보면 답답해지기 일쑤인 마음을 잘 다스려 준다.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이다.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라는 부제가 달렸다.

저자는 모든 분야의 권력 앞에 복종해 온 인류 또는 개인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복종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들은 항상 (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저질러졌”지만, 역사는 분명 사람들이 “복종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 간단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야말로 복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다.

거짓 앞에서(나 자신이 저지르는 거짓을 포함하여) 복종하지 않는 삶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멀리 홍목사님과 이어진 연대로 그 기도에 응답하려는 옛 벗들이 있어 나도 낙관주의에 빠져 보련다.

날씨에

똑 같은 일을 삼 십 수년 동안 이어오다 보면 대충 이골이 나도 단단히 나게 마련일 터입니다만, 해마다 맞는 첫 더위는 제겐 여전히 낯설고 일터의 하루는 몹시 길답니다. 제 일터의 환경은 예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기 그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보일러 스팀 열기에 끈끈하게 습도 높은 첫더위의 후끈한 바깥 바람이 들어와 함께 노는 날의 세탁소 하루 일은 늘 그냥 처음 겪는 일인 듯 하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 온 첫더위를 또 그렇게 맞았답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중얼거려보는 말이 있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느새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이강백이라는 떠오르는 신예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그의 작품 제목입니다. 그 제목의 연극 구경을 했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담고 있답니다. 솔직히 연극의 내용은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동 세실극장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비닐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겨우 머리나 적시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에서 신촌까지 걸었었답니다. 제 곁에는 그 무렵 막 연애를 시작했던 아내가 있었답니다. 78년도였으니  그 사이 마흔 여섯 해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날씨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들 하곤 합니다만, 따져 보면 그 보다 더 변덕스러웠던 게 제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뜰에 나와 앉아 오늘 하루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저녁바람은 아직은 시원합니다. 첫더위 타고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허나 이젠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꼽고 쫓는 때에 이른 나이가 되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경외와 사랑, 사람 사랑,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감사들.

24년 첫 더위에.

아내와 한국학교

비교적(?)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아내가 몇 년 동안 제가 노래를 불러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내가 35년째 하고 있는 주말학교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입니다.

‘이젠 그만 마쇼! 오래 했잖아! 이젠 젊은 사람들이 해야지!’하는 내 말은 족히 오 년은 이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아내는 그야말로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델라웨어 한국학교 종업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종업식 겸 학예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이런 저런 행사 영상을 보여주며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그저 좋아 보입니다.

이젠 전에 가르치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되어 데리고 오는 아이들과, K-pop과 K-drama에 빠진 비한국계 성인 학생들에게 한국말과 한국무용을 가르칩니다.

오늘 학생들에게 받은 한아름 꽃다발을 화병에 꽂은 후 좋아라 하며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하는 아내를 보며, 교육성과나 아내의 나이는 따질 필요 없이….

그냥 할 수 있는 날까지 제 말은 듣지 않은 게 좋을 듯 하답니다.

(학예회 한 장면과 한 학생의 가족소개 영상입니다.)

오! 늘~

어머니날이라고 딸아이가 꽃을 보냈다. 기억컨데 딸아이가 직장을 얻어 집을 떠난 이후 기억할만한 날이면 꽃 보내는 일을 잊은 적이 없다. 꽃 선물을 받을 때면 내가 늘 궁시렁 거리는 변치않는 소리다. ‘지 쓰기도 바쁜데 뭐 이런데 돈을 쓴 담!’ 허나 꽃배달이 조금 늦어지는 날이면 아내보다 내가 조바심을 내는 편이다.

한 두 해 전쯤이던가? 딸아이가 내게 물었었다. ‘아빤 이제 일 그만둘 때 되지 않았어? 일 언제까지 할꺼야?’, 잠시 머뭇거리던 내 대답이었다. ‘글쎄….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대답에 딸아이는 ‘왜?’라고 다시 물었다.

‘Why?’하고 묻는 딸아이의 몸짓과 얼굴 표정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색과 그런 나를 마치 나무라는 듯한 속내를 담고 있었다. 이어진 딸아이의 주문이었다. ‘일 많이 했잖아! 이젠 좀 쉬고 엄마랑 여행도 좀 다니고….’ 그쯤 나는 적당한 타협안을 내 놓았었다. ‘일 좀 줄이고, 일하며 여행 다닐 계획은 있어.’

딸아이는 어릴 적 내 세탁소를 ‘아빠 집’이라고 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아들과 딸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맘이 크게 저며온다. 아이들이 한참 자랄 나이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미안함이다.

그 무렵 내가 자는 시간 빼놓고 모든 시간을 보냈던 세탁소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빨리 세탁소 일을 벗어나고 싶었었다. 이따금씩 들었던 이웃과 지인들이 건넸던 뜻없이 지나가는 인사말, ‘당신은 세탁소 하기엔 참 아까운데…’라는 풍선 같은 말에 혹해 여러 해 들떠 지내다 낭패를 본 부끄러운 시간들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되새기면 무엇보다 난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세탁소에서 나는 내 천직을 받아 들였다. 그 이후 손님들에게 듣는 말들, ‘너희 세탁소가 우리 동네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너희 내외 웃는 얼굴 보러 온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랬다. 평소 성질 고약한 손님 하나 찾아와 눈물 흘리며 하던 하소연… ‘아이고 글쎄 내가 유방암이란다… 아이고 어쩜 좋니…’ 그 하소연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걱정마! 괜찮을거야. 기도할게’라는 말에 환한 미소 지으며 떠난 얼굴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려 보는 말, ‘그래 아직은 더 일 할 나이지!’

‘오늘’이라는 말을 ‘오! 늘~’이라고 풀어 주셨던 이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글쎄… 언제까지 내가 세탁소 일을 계속할 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다만, 하는 날까지는 ‘오! 늘~’이라는 맘으로 감사하며 할 일이다.

딸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한 번 떠나야 할 터.

아이가 보내 준 꽃이 시들 때까지 아내는 손님들에게 말하겠지. ‘제 딸이 제게 보내 준 꽃이랍니다.’

철들기

아직도 철들려면 멀었나 보다. 마음은 이미 저만큼 가 있건만 몸은 어찌 그리 더딘지. 이젠 몸 뿐 아니라 말조차 어눌해 진다는 느낌이 들 때면 공연히 맥이 풀리곤 한다. 다 철이 안든 탓일게다.

암투병으로 부쩍 늙어버린 오랜 단골 손님이 환하게 활짝 핀 얼굴로 가게를 찾아왔다. 세탁물과 함께 앙증맞은 호접란 화분을 선물로 주고 갔다. 맞아!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음에 틀림없다.

모처럼 개인 하늘 아래 오후, 서로들 이 계절의 주인이라고 뽐내는 내 뜰의 꽃들을 보며 몸과 맘의 속도를 맞추다. 신기하기도 하지. 물 주고 거름 주고 정을 준 꽃들보다 그냥 자란 꽃들을 보며 속도를 맞추었으니.  그래…. 나도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내 가게 뒤쪽으로 나들이 온 오리가족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하나. “흐음, 더는 새끼일 수도 없고…. 애비 애미도 아니고….”

난 여전히 뒤뚱거릴지라도 이젠 철들 나이임에 틀림없다. 삶에.

사람답게

편안하던 마음이 세상뉴스와 마주하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곤 한다. 특히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있던 말들이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는 소식들을 듣고 보노라면 참담한 마음으로 뉴스들의 속내를 파보곤 한다.

그런 오늘을 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손에 든 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슈미트 살로몬(Michael Schmidt Solomon)이 쓴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마라>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사람에 대한 저자의 사뭇 도전적인 단언적 주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화려한 별칭을 부여했던가. 호모 압스콘디투스Homo absconditus(신비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미학적 인간), 호모 크레아토르Homo creator(창조적 인간), 호모 이노바토르Homo innovator(독창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적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화자찬의 절정이자 고상한 우리 인간류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현명한 인간)가 있다. 별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인간에게 훨씬 적절한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인간의 하찮음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야기들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나처럼 교회 마당에서 뛰놀며 자란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듯.

그러나 그가 풀어내는 광기 서린 인간들이 만들어 냈던 지난 사람살이 이야기들에 빠져 들다 보면 밑줄 긋지 않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취하게 된다.

그가 광기 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분야의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종교다.

그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은 인간이 범하는 온갖 병폐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망상이라고 단언하다. 그가 예시로 들은 여러 종교적 광기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익히 듣고 보고 배운 사실들이다.

그 다음은 경제, 곧 소비지상주의 시대의 권력이 된 자본시장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광기, 곧 어리석음이다.

이어지는 광기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문화, 교육 분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인간들의 광기,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정치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했던 모든 형태의 바보 같은 짓, 이를테면 어리석은 종교, 어리석은 생태행위, 어리석은 경제행위가 정치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메가톤급 어리석음, 즉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통합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그의 고언이다. <씁쓸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모든 권력과 어리석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을 벗어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현명한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고 제시한다.

바로 어리석은 자들에게 종교, 경제, 문화 교육, 정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 분개가 아니라 문화적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탈피>를 외치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로  “지성의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수없이 퇴짜를 맞은 뒤, 마침내 지성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라는 프로이드의 성찰을 소개한다.

또한 <이제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에게 조종간을 넘겨주는 행위가 무책임한 일이 될 정도로 인류의 행보는 문화적으로 진보했고, 과학기술과 국제화를 통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권한다.

책을 덮으며 답답했던 마음들이 많이 사라졌다. 살아 숨쉬는 한, 어리석음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 *역자인 김현정이 번역한 책들 제목에 혹하여 몇 권을 주문하다.

이른 봄과 늦은 봄 사이를 가르는 비가 온종일 내리는 주일에.

흙과 재미

어느새 다섯 해 전 일이 되었습니다. 그 해 일월, 장인이 세상 떠나실 때만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장인의 장례는 준비했던 대로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떠나시는 어른께서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치루었지요.

이월이 되자 우리 동네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동네 신문을 크게 장식 했었답니다. 그리고 삼월이 되자 주를 넘나드는 여행에 이런저런 제약들이 생기더니만, 급기야 생활에 아주 필수적인 영업행위를 제외하곤 모든 영업을 중지하라는 주정부의 명령이 떨어졌지요.

그 해 이 맘 때인 오월 어느 날, 어머니께서 떠나셨지요. 아흔 세 해 여행길 마치시고 떠나시던 날, 어머니의 마지막 날숨은 아직도 제가 느낄 만큼 편안하게 다 내려 놓으신 듯한 여운으로 남아 있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치루어야 했답니다. 집례 목사님들과 가까이 사는 우리 남매들 부부들 그리고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던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 분들이 모여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었지요. 멀리 사는 여동생내외와 어머니의 손주들, 증손주들은 Zoom Meeting으로 , 장례예식을 마친 후, 교회당 앞에 세워 둔 어머니의 운구차를 향해 예식을 함께 하지 못한 교인들이 각 자의 차안에서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아주 독특한 사치까지 누리시며 어머니는 떠나셨답니다.

그게 벌써 다섯 해가 지난 일이랍니다.

제 삶의 재미가 바뀐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하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삶을 이어오던 제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무료하게 긴 시간을 던져 주었습니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게 차고 넘치는 것은 시간 뿐이었습니다.

특별히 가진 재능이나 취미 따위가 없는 제게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남는 시간들이 주어지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해 봄이 다 갈 즈음, 문득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흙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까지 전혀 몰랐었답니다. 한 뼘 땅속 흙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미를 미처 몰랐었답니다.

흙을 뒤엎어 숨 쉬시게 하고, 흙이 품을 씨앗과 모종과 묘목을 안겨 주고, 물을 주면 흙은 놀랄만한 창조물들을 보란듯이 내어 놓곤 하는 그 재미에 훅 빠져 다섯 해를 보낸 듯 합니다.

오년 전 갑자기 다가 온 남는 시간에 대한 불안은 이젠 부족한 시간에 대한 불만으로 바뀔 만큼 흙이 주는 재미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흙과 노는 사이에 점점 더 흙과 가까워지는 나이로 나아가곤 있지만, 이렇게 나이 들어 간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랍니다.

이른 봄꽃들을 거둔 흙들은 이젠 철쭉, 알리움, 라이락, 장미 등 늦봄과 여름꽃들을 내밀고 있답니다.

집 앞 꽃길도 따지고 보면 다 흙이 만들어 낸 놀이가 베푸는 재미일겝니다. 파 꽃은 일상의 작은 염려들을 재우는 재미까지 얹어 준답니다.

아침에

아침은 늘 새롭다. 아니 ‘늘 새로워야만 한다.’는 내 아집을 이 나이에도 버리지 못하는 내 고백이다. 아침 공기, 아침 바람소리, 아침 새소리 그리고 아침 하늘에 눈, 코, 귀를 맘껏 열어 제치는 내 습관에 대한 고백이다. 하여 아침은 늘 새로워야만 아침답다. 허나 내  주제에 어찌 그 욕심을 채우랴. 허다한 날 아침이 버겁고 이젠 그런 날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아직은 아침이 참 좋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내 가게가 있는 샤핑몰은 거의 삼 년 째 공사중이다. 몰 안에 많은 가게들 중 내가 두 번 째로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거의 24시간 영업을 하는 그로서리 체인점을 빼고는 내가 언제나 제일 먼저 가게 문을 연다.

그런데 이즈음 종종 나보다 먼저 공사판 일을 벌이는 일꾼들 모습을 보곤한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아침 새소리보다 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일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세탁소 일을 한지 거의 서른 다섯 해가 가까워 온다. 그 사이 별 일 다 겪었다. ‘겨우 이런 일 하려고 이민 왔나?’, ‘빨리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 할텐데…’ 등등. ‘혹’하는 생각에 빠져 이런저런 진창속을 많이 헤매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우리 내외 하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으로 그저 감사다.

오늘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얼마 안되었을 때 아주머니(할머니- 솔직히 나는 이제 구분이 잘 안된다. 내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이므로) 한 분이 예쁜 꽃바구니 하나를 건네 주셨다. <내 남편이 쓰러져 넘어졌을 때 도와주신 당신들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엊그제 일이었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가게 앞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고. 나가보니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괜찮냐?”는 내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보아 노인의 정신은 말짱했다. 꼼짝을 못하고 있는 노인은 다리통이 내 몸통보다 큰 듯한 거구였다.  우선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아내와 나는 거즈로 피를 닦고 붕대를 대며 물었었다. “911 전화를 해 드릴까요? 앰블런스 부를까요?” 노인은 연신 괜찮다며 자신의 차에 올라 앉게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운전해 병원을 가겠노라며.

순간 참 나는 난감했다. 내 힘으로는 그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웠으므로. 그는 거의 250파운드는 족히 넘지 않았을까?

하여 이웃가게 젊은이들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도와 줄 것을 요청했고, 노인을 겨우 겨우 그의 차에 태울 수 있었다. 노인이라고 했다만 나와 몇 살 차이나 났을까, 거의 내 또래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진이 빠진 나는 엉뚱한 감사의 맘이 일었었다. ‘아이고, 이렇게 작고 마르고 가벼운 내 몸에 대해 그저 감사. 어느 순간 내가 저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누군가의 진을 빼진 않을 터이니…’

바로 그 노인의 부인이 오늘 아침 꽃바구니를 들고 감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하여,  고백컨대…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어 감사다.

무엇보다 아직은 아침의 새로움 느낄 수 있어 감사다.

아침에.

<행복에>

아무 수식 없이 제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영근아’. ‘영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사는 동네에선 이젠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누워 지내시는 아버님이 유일한데, 아버지도 이젠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젠 제 이름 앞뒤로 이런 저런 수식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하다못해 ‘미스터’나 ‘씨’가 따라 다닙니다. 여기 친구들이 ‘Young’이라고 저를 부르곤 합니다만, 솔직히 ‘영근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답니다.

제 맨 이름 ‘영근아’나 ‘영근이’를 듣기 위해선 이젠 한국에 나가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반 년 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내 고향 신촌 친구들, 더더욱 대현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 옛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맨 이름들을 부르고 듣는답니다. 저는 친구들을 경자야, 경애야, 병덕아 라고 부르고 친구들은 저를 영근아 라고 부른답니다.

앞뜰 체리나무 꽃이 만개한 날,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과 함께 놀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 떨구며 지는 튤립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철 아름다움을 뽐냈던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각각 제 아름다움들이 다르더군요. 색깔과 모양들이. 튜립조차 다 같은 튜립들이 아니었답니다. 저마다 다 이름 하나씩 지어 주고 싶었답니다.

이제 저물어 가는 때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옛날 어릴 때처럼 제 맨 이름, ‘영근아’, ‘영근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