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 지혜 2

(당신의 천국 – 일흔 네번 째 이야기)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나는 넋을 잃었다. 그대 눈짓 한번에 그대 목걸이 하나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아름다워라. 그대 사랑 포도주보다 달아라.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수가 어디 있으랴!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 아가 4 : 9 – 12, 공동번역 

이런 말들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 겝니다. “고사리도 꺾을 때 꺾어야 한다.”라거나 “썩은 새끼줄도 잡아 당겨야 끊어진다.”같은 말들 말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물려 준 지혜 곧 속담입니다. 이런 속담이나 격언들이 우리 민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요. 

일테면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도 있는 것이고,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단다.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살거라.”라는 인디언 속담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펄벅이 남긴 말 “힘은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고 용기는 속에 있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남겨놓은 명언들고 많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말들은 대대를 걸쳐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어 가며 제일 먼저 현지민들에게 전했던 성경책은 잠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세상 어느 민족에게나 인생 살아가는 지혜의 책은 낯설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을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 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잠언이란 책 이름은 중국어 성서이름 箴言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요. 영어성경의 이름 Proverbs는 물론이거니와 그 어원인 라틴어 역시 격언, 속담, 금언 등의 뜻으로 쓰인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어 번역 잠언이 더 뜻이 깊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잠(箴)은 바늘 또는 침(鍼)이라는 뜻이거든요. 바늘이나 침으로 꼭 찌르듯 정신을 일깨워주는 말씀의 책이라는 이름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잠을 부르는 책”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더군요. 

wisdom

구약성서에 있는 이른바 지혜서들은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등입니다. 이 지혜서들과 율법서와 역사서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을 내세우느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율법과 역사서의 기본은 계약정신에 입각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행위들과 계약백성들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인데 비하여 지혜서는 이런 계약사상 또는 계약정신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지혜라는 말이나, 속담과 격언 또는 금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사람들이 남긴 것임으로 야훼 하나님이 끼일 자리가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서고금 어느 민족에게나 전해오는 속담들과 격언들이 야훼 하나님 없이도 이어져 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지혜서들은 자칫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 빠질 수도 있는 지혜 이야기들을 비록 들어나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야훼 하나님의 계약정신과 계약법과 연결시켜 놓았답니다. 지혜의 근원이 사람이 아닌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으로 알려져 있는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가나안 정착 초기의 사사시대로 부터 입으로 전해져 오던 이야기들과 포로기, 포로기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모아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50년에서 35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가르침을 들어 학식이 더해지고 슬기로운 사람은 남을 이끌 힘을 얻어 잠언의 깊은 뜻을 풀이해 주고 현자의 말이 품은 뜻을 깨우쳐 준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어리석은 자는 교육을 받아 지혜로와지는 것을 멸시한다.”(잠언 1 : 5 – 7)는 말처럼 모든 지혜의 근본은 야훼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다는 잠언의 교훈들은 자칫 지혜 만능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 식의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부유함과 가난함에 대한 금언들은 그런 수렁으로 안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답니다. 잠언의 말들을 만들고 전해준 계층들이 초기의 사사(또는 씨족 부족의 족장)들로 부터 왕, 나중에는 궁중이나 성전의 서기관 등 부를 누리는 쪽의 입장에서 바라본 지혜의 결과물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짧고 간명하게 표현된 지혜의 말들 속에 자칫 당시의 부조리 또는 부정직한 현실들을 쉽게 감출 수도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잠언의 부족한 부분들을 매워주는 책들은 바로 욥기와 전도서입니다. 

욥기는 지혜서인 잠언이 야훼를 믿고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받고 잘 살고, 믿지 않고 악하고 게으르면 벌 받고 못산다는 일률적인 잣대의 도덕과 지혜 만능주의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는 모습이나 삶의 자세로 볼 때 도대체가 고난을 받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고난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을 엮고 믿었던 사람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에 대한 고발입니다. 고통이나 고난 또는 성공에 대한 사람들의 습관적인 믿음이나 단정적 결론에 대한 도전입니다. 

욥기는 왜 비교적 죄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욥기는 “사람은 사람일 뿐이고, 사람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러나 스스로 기꺼이 야훼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말로 시작되는 전도서는 자칫 회의주의자의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답니다. 우리 말로 “헛되다”로 번역된 말의 원뜻은 무의미하다, 무익하다, 공허하다라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자연이 시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지루한 반복을 이어가듯이 사람들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지혜, 쾌락, 수고, 부귀, 여자(남자) 등등 사람들이 욕심을 부리고 추구하는 것 모두 부질없으며, 불의, 억압, 위험, 죄악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이렇게 분명한 한계 속에서 사는 하루하루의 삶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일부터 모든 일상에 감사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또한 인과응보의 법칙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불확실한 상대적 가치들을 즐겁게 추구하며 살 것을 권유합니다. 

마지막으로 아가서에 대한 해석이나 주석들 역시 많습니다. 또한 해석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말들도 합니다. 신랑은 하나님, 신부는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유대의 전통도 있고,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부는 교회라는 바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신부는 신부, 신랑은 신랑으로 읽고 이해함으로 우리들 각자의 가정생활에서 사랑하는 부부관계를 일상화 시킬 것을 강조한 책으로 이해한다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지혜서 이야기 이렇게 맺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 이야기들의 마지막입니다. 종말론, 종말문학, 묵시문학, 묵시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참 노래 – 지혜 1

(당신의 천국 – 일흔 세 번 째 이야기) 

곤경에 빠져서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내 소리를 들어 주셨사옵니다. 야훼여, 나를 건져 주소서. 거짓된 입술과 사악한 혀로부터 건져 주소서. 너, 사악한 혀야, 너 무엇을 얻으려 하느냐? 너 무엇을 더 받으려 하느냐? 네가 받을 것은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노가주나무 숯불뿐이라. 오! 메섹인들에게 얹혀 사는 나의 신세, 케달인들 천막에서의 더부살이, 이 괴로움이여. 평화를 지겨워하는 자들, 그들 틈에 너무나도 오래 끼어 살았구나. 내 소망은 화평이다, 한 마디만 하여도, 그들에겐 싸움거리가 되는구나. – 시편 120장, 공동번역 

쎄시봉 열풍이 불었던 것이 지난 해 일이었나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등의 이야기와 노래가 제법 방송 시청율을 올렸던 때가 있었지요. 저 역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영시의 다이알’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나 출연자였던 그들이 전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과 노래를 들으며 공부했던 세대이므로, 늙으막에 들어선 그들의 이야기를 흥미있게본 기억이 있답니다. 

노래

그런데 시간을 돌려서 그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네들 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가수들의 있었답니다. 남자로써는 배호, 남진, 나훈아요, 여자가수로는 단연 이미자였답니다. 쎄시봉으로 표현되는 통기타그룹들의 쑈는 기껏해야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시민회관이나 대학교 강당에서 있었을 뿐이지만, 남진 나훈아 이미자쑈 등은 동네 곧곧 삼류영화관에 이르기까지 휩쓸고 다녔답니다. 물론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만당사례(滿堂謝禮)” 깃발이 나부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답니다. 

나훈아의 고향역과 남진의 님과 함께에 자지러지던 시대였답니다. 유행은 변하게 마련이고, 기억도 자기 좋을대로 생각해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이지요. 

이즈음 오십대 후반에서 칠십대에 이르는 세대를 제대로 알려면 지나간 세월을 자기식으로 기억할 일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로 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유행가로는 그렇고요, 교회 찬송가도 마찬가지랍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기타 반주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는 일은 매우 불경한 일로 치부되곤 하였답니다. 하물며 전자악기를 교회에서 본다는 일은 감히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답니다. 

이 점은 최근세사 한국교회에만 가진 경험이 아니랍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에서 피아노가 허락된 것이 고작 200여년이 지났을 뿐이랍니다. 피아노는 경망스럽다고 올갠만 사용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찬송 역시 유행은 세월따라 변한다는 것입니다. 

나훈아를 좋아하든 남진을 좋아하든 쎄시봉 가수들을 좋아하든 그 모두를 좋아하든 다 개인의 취향에 따른 일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다름과 취향의 차이에 대고 시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들를 종종 볼 수가 있답니다. 

교회 찬송도 마찬가지랍니다. 전자악기 반주에 손뼉치고 목청높여 할렐루야를 외쳐야 좋은 사람들도 있거니와 그저 조용히 흥얼거리는 것 만으로도 맘 한구석이 아려오거나 평안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강요하며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점은 이천 여년 전에 이미 바울이 결론을 낸 일이기도 하답니다. 다음은 바울이 한 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읍니까? 나는 심령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읍니다. 나는 심령으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이성으로도 찬미의 노래를 부르겠읍니다.”(고린도 전서 14:15),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에베소서 5:19) 

모든 장르 다 좋고, 악을 써도 좋고 조용히 음미해도 좋고 어떻게든 찬양하는 것은 다 좋은데 “진정한 마음’으로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유행가는 진정한 마음조차 변한답니다. 세월따라 진정함을 느끼는 대상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을 들었던 제 이십대와 지금의 느낌은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 고백으로써 올리는 찬양의 진정성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아니 한결 같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책이 바로 성서의 시편입니다. 

우리말로는 중국어 번역을 따라 시모음집이라는 내용으로 시편이 되었지만, 영어 Psalms와 원래적 의미는 찬양 모음집이라는 게 더욱 가까울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 가면서 읽고 생각해 본 성서들은 주로 율법, 역사, 예언서들이었던 것에 반해 시편은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는 개인 또는 공동체가 겪는 삶을 통해 느낀 감정들을 찬양으로 만든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복되게 잘 사는 일, 공동체적으로는 더불어 함께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분명한 목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현실적인 삶에서 개인적으로는 고통, 아픔, 실패, 좌절 등이 끊이지 않고 공동체적으로는 불의와 불공평과 불안이 결코 그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이 연속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삶,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매진해 나가는 모습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찬양들입니다. 

시편에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노래, 예배 의식을 위한 노래, 축복의 노래, 교훈과 명상의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탄식과 탄원을 올리는 노래들이 제일 많은 까닭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올리는 찬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질병, 마음의 아픔, 정치 사회적으로 받는 각종 차별과 억압 등의 고통들이 결코 그치지 않는 “오늘”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드리는 찬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읽는 개인이나 묵상하는 공동체나 어떤 정형을 찾기보다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이나 공동체를 대입시켜 읽고 묵상하는 방법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답니다. 

다만 시편의 편집 과정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편집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시편 역시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다윗과 그의 시대에 살았던 성전 예배 집례자들(성가대)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믿었답니다. 19세기 들어 시편은 포로기 이후부터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서야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옵니다. 20세기 들어서 많은 학문적 업적들이 이루어졌는데 이즈음의 학문적 대세는 다윗시대의 노래를 포함하여 주로 포로기 전후시대에 이루어진 노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형태의 시편이 만들어진 것은 마케베오 시대 이전인 기원전 약 200여년 경으로 추정을 하고 있고요. 

시편 전체는 5권으로 나뉘어 지는데 이는 토라 곧 모세오경의 다섯이라는 숫자에 부응하기 위해 그리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제1권(1-41편)은 인간의 행복, 타락, 및 회복에 대한 내용이고, 제2권(42-72편)은 이스라엘의 파멸과 구속(救贖)에 대한 내용이고, 제3권(73-89편)은 성전 중심의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4권(90-106편)은 광야 생활에 대한 내용이고, 제5권(107-150편)은 말씀 중심의 생활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주제와 내용에 맞추어 분류하기도 합니다. 

이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로는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1862 – 1932)과 그의 제자인 모빙켈 (S. Mowinckel, 1884 -1965)을 꼽는답니다. 

궁켈은 시편을 찬송시, 대관식의 시, 민족 탄식시, 제왕의 시, 개인의 탄식시, 개인의 감사시 이렇게 여섯가지 주제로 나눈답니다. 

그는 개인적인 성격의 탄식과 애원이 들어있는 유형의 시가 시편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속하는 시들을 다음과 같이 꼽고 있습니다. 

제1권 3,5, 6, 7, ,13, 17, 22, 25, 26, 27:1-14, 28, 31, 35,38,39

제2권 42, 43, 51, 54, 55, 57, 59. 61, 63, 64, 69, 70, 71

제3권 86, 88

제4권 102

제5권 109, 120, 130, 140, 141 

모두 40편에 달하는 이 시들은 모두 어떤 절박한 상황 아래 놓인 자신의 처지와 아픔들을 토로하며 구원을 기다리는데, 그 기다림은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으며 반드시 감사가 뒤따르는 것들입니다. 

시편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접고, 지혜운동의 결과물들인 지혜문학서들(잠언, 전도서, 욥기, 아가 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전야(前夜) – 중간사 7

(당신의 천국 – 일흔 두번 째 이야기) 

그 주변 이방인들은 유다인들이 제단을 다시 쌓고 성소를 복구하여 전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자기네들과 함께 살고 있던 야곱의 후손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유다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유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혀 오던 에사오의 자손들을 에돔의 아크라바테네에서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고 굴복시킨 다음 많은 전리품을 빼앗았다. – 마카베오상 5 : 1 – 3, 공동번역에서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던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난 뒤 이들이 벌여 온 전투의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이제껏 벌인 전투들은  광야로 도망가서 살기 위해 벌인 게릴라전이었는데, 이제는 유다의 전통과 신앙을 되찾고 원래 옛날 누리던 영토를 되찾는 정복전쟁으로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들이 탄탄대로를 걷듯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세력이 커갈즈음 셀류커스왕조의 대군이 밀려와 예루살렘성에 가두고 포위하여 전멸의 위기에 놓입니다. 

마사다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왈 풍전등화격이었던 마카베오군대를 살린 것은 셀류커스왕조의 왕위 다툼이었습니다. 마카베오 혁명을 유발시켰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죽자 셀류커스왕조은 극심한 후계 쟁탈전에 휩싸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셀류커스왕조의 군대들은 평화협상을 제의합니다. 

협상안은 “앞으로 내정 간섭 않겠다. 유대교의식을 억압하는 법령들은 철폐하겠다.대 제사장은 온건한 헬라주의자인  엘리아킴(헬라어로는 알키무스)으로 세운다. 유다 마카비우스와 그  추종자들을 처벌하지 않겠다.”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마카베오는 이 협상안을 거절하지만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던 하시딤 일파의 주장에 따라 이 협상안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양쪽 모두 위기를 넘긴듯 했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셀류커스왕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앞잡이였던 엘리아킴(알키무스)대제사장은 마카베오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하시딤일파를 처형해 버립니다. 

그제서야 마카베오가 옳았다는 생각으로 다시 뭉친 유다 독립군들의 재항거 운동이 벌여지는데,  재진압에 나선 셀류커스왕조의 의해 유다 마카베오가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를 이어 동생인 요나단이 독립군 대장이 됩니다. 

요나단 역시 형과 아버지의 용맹을 이어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새롭게 독립군의 세를 불리고 있을 즈음 , 셀류커스 왕조는 내분에 다시 휩싸이게 됩니다. 더더구나나 신흥 제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로마가 셀류커스왕조를 위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제국들이 다투고 내분에 쌓인 틈을 타서 요나단은 유다의 정치와 종교의 모든 권한을 쥐고자 유다의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 일이 유다의 종파 분열이 일어나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전통적 율법으로 보자면 레위지파의 아론계론이 대제사장직을 이어가야 하는데(비록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혁명의 주체였던 유다 마케베오나 그의 동생 요나단은 유다지파였답니다. 

게다가 왕권 다툼에 빠진 셀류커스 왕조는 여러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각기 다른 세력 어디에 선을 대고  완장을 차느냐에 따라 유대 종파가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우선 “이꼴 저꼴 다 보기싫다, 우린 야훼 하나님 신앙만으로 뭉쳐서 우리끼리 살겠다.”며 동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들만의 규율대로 살게되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들이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를 남긴 에세네파입니다.  약 250여년 동안 이 집단의 전통이 유지되며 이어진답니다. 

두번 째는 비록 대제사장의 승계권은 잃었을지라도 전통인 종교 귀족 계급들이 뭉쳐 하나의 집단을 이루게 됩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로 부터 내려온, 또한 바벨론 포로 후기부터 세를 불려온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로 사두개파입니다. 

세번 째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의 후예인 바리새파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 그들 나름대로의 노선과 신앙을 중심으로 뭉친 이런 종파들이 생기고  뭉쳐서 후대까지 기록과 이야기들을 남기게 되지만,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답니다. 예수시대에 바리새파의 인원이 대략 6,000여명, 에세네파는 약 4,000여명 정도로 추정되는 바, 귀족계급인 사두개파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수많은 유대인들과 모계나 부계로 유대의 혈통을 이어온 사람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거나  외국에 나가 살던 이들은 어디에 속해 있을까요? 하루 하루 일용할 양식에 매어 살던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무리가 크게 존재하고 있었겠지요. 새로운 시대는 바로 이들과 함께 열리게 된다는 점 기억하고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들이 권위를 이어가며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정치 종교적 독립을 이루며 왕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하스몬왕조라고 부른답니다. 

하스몬왕조는 시리아 헬레니즘 왕국인 셀류커스왕조가 저물고 로마왕조가 새롭게 들어서는 때에 복잡한 정세와 맞물려 위태위태한 독립왕국을 이어갑니다. 그 끝무렵에 헤롯대왕의 이름이 나오게 된답니다. 

이제 예수를 맞이하는 신약시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중간사 옛날 이야기는 마치고, 그 무렵 바벨론포로 해방기에서 마카베오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사이에 이루어진 성경책에 대해 간략히 짚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먼저 시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축제 – 중간사 6

(당신의 천국 – 일흔 한 번 째 이야기) 

셀류코스가 죽고 에피파네스라고 불리는 안티오쿠스가 그 왕위를 계승했을 때에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부정한 수단으로 대사제직을 손에 넣었다.   야손은 왕을 알현하고 은 삼백 육십 달란트와 또 다른 수입원에서 팔십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왕이 자기에게 경기장을 건축할 권한과 청년훈련소를 세울 권한과 예루살렘에 안티오쿠스 청년단을 결성할 권한을 준다면 백 오십 달란트를 더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   왕은 이것을 승낙하였다. 야손은 왕의 승낙을 받아 직권을 쥐자마자 자기 동족들의 생활을 그리이스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 마케베오 하 4 : 7 – 11, 공동번역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식민지배가 이어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식민지배를 참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정통치권을 인정 받은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에 대한 예배 의식과 전통을 인정한 식민지배 제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그런데 셀류커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이 다스리는 시대에 이르러 예루살렘의 신앙과 전통이 깡그리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리가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자리로 변하였고, 야훼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은 그리스 제우스 신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그리스 이름인 안티오키아라고 바꾸려하는 움직임까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의 전통들과 신앙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철저히 헬라문화를 받아드리는 것만이 팔레스타인과 유다가 선진화 되는 길이라는 강요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헬라문명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고 유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자에게는 죽음이 대가로 따르는 강요였습니다. 

이런 시대를 맞이하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시대의 물결을 맞이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결치는대로, 세월이 흐르는대로 그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 또는 평생 노예가 되는 길이라도 하더라도 생각없이 묻혀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대열의 선두에 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지요. 

또한 그 변화에 대해 목숨 걸고 항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을 앗기지 않으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보았지만 그 세가지도 강도의 세기와 그 길을 선택한 까닭에 따라 수많은 작은 종파들로 또 나누어지는 것이지요. 

뭐 멀리 갈 것 없지요. 다가오는 새해는 갑오년(甲午年)입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갑오 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딱 120년되는 해입니다. 그 무렵부터 일기 시작한 한반도의 수많은 종파들이 있답니다. 친로, 친청, 친일, 친미파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친일파 등을 비롯하여 민족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공산주의 국내파와 국외파 등 다양하게 시대에 대응하는 무리들이 일어났듯이 말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답니다.  세류커스왕조의 헬라화 정책의 전면에 나서서 유다의 전통인 야훼 신앙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완장을 찬 앞잡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대항하여 유대의 전통과 야훼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건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이였고요. 그런 사람들 가운데 아들 다섯을 둔 마따디아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양반이 바로 새롭게 세워지는 유다왕국의 시조가 되는 셈입니다. 

헬라신전에 머리를 조아린 동족을 때려 죽이고, 헬라 신전에 예배를 강요한 왕의 사신까지 때려 죽인 마따디아는 다섯 아들들과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함께 광야로 피신을 합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에서 게릴라전으로 항쟁을 합니다. 셀류커스의 군대를 피해 다니면서 틈을 보아가며 적군에게 크게 피해를 입히는 게릴라 전술로  이름을 떨치게 되고, 그의 휘하에는 날이 갈수록  항거하는 유대인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그러데 이 무렵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발생합니다. 이들이 지켜내려 했던 신앙과 전통에 대한 신념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 때의 일이 마카베오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 광야로 피해 가서 숨어 살고 있다는 보고가 다윗의 성 예루살렘에 있던 (셀류커스)왕의 부하들과 군사들에게 들어 왔다.  그래서 큰 군대가 그들을 쫓아 나섰다. 그들이 있는 곳에 다다라 맞은편에 진을 치고 안식일을 골라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는 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 이젠 그만두고 나와서 왕명에 복종하여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하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왕명에 굴복해서 안식일을 더럽힐 수는 없다. 우리는 나가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즉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돌을 던지거나 자기들의 피신처에 방벽을 쌓거나 하지도 않고  “우리는 모두 깨끗하게 죽겠다. 너희들이 죄없는 우리를 죽였다는 것을 하늘이 알고 땅이 증언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이렇게 적군이 안식일을 택해서 공격해 왔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처자와 가축과 함께 고스란히 죽어 갔고, 죽은 사람은 천 명이나 되었다.” – 마카베오상 2 : 31 – 38 

적군의 공격 앞에서 안식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전혀 대항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따디아는 비록 안식일일지라도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는 맞아 싸운다는 계율을 내린답니다. 그리고 이 무렵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유대의 전통을 경건히 받들어 지키는 무리들이 마따디아 무리와 합세를 하게 됩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무리가 바로 바리새파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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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따디아가 죽고 그의 아들 가운데 유다 마카베오(마카비)가 그를 계승하여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마카베오 역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셀류커스의 왕 에피파네스는 처음에는 이들 세력을 우습게 보고 소수의 병력들을 보냈지만 연전연패하자 자신이 제일 신임한  최강의 군대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마카베오는 야간기습 전략으로 이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맙니다. 그 기세를 몰아 마침내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때는 기원전 165년 12월 25일이었습니다. 이 날로 부터 여드레동안 유대인들의 축제가 연이어 벌여지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바로 하누카(Hanukkah) 축제입니다.

임계점(臨界點) – 중간사 5

(당신의 천국 – 일흔 번 째 이야기) 

몹씨 추운 겨울날입니다. “춥다”의 반대말은 “덥다”입니다. 사물이나 현상 또는 일에는 반대되는 말이나 개념들이 있습니다. 크다와 작다, 잘한다와 못한다, 참이다와 거짓이다 등등 말입니다. 

그럼 민주주의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전제주의나 독재주의가 되겠지요. 그런데 종종 그 반대 개념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고  말하거나 글을 쓰는 분들을 만날 수가 있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반대 개념은 자본주의겠지요. 

오늘날 한반도 남북이 겪고 있는 가장 큰 혼란과 슬픔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일겝니다. 전혀 엉뚱하게 제 멋대로 자신과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이런 개념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북쪽은 아무리 자신들의 이름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넣고 외쳐 불러보아도 그들이 민주주의 공화국인 것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이외에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한, 남쪽 사람들 99.99999…%는 북은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북은 그저 전제주의 독재국가일 뿐입니다.(남쪽 법으로는 국가라고 인정을 안하지만 국제법으로는 분명 국가임으로) 

남쪽 역시 아무리 민주주의 체제라고 말하여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랍니다. 도대체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른 생각과 사상들을 서로 인정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도 하고, 잘못되면 다시 그 잘못을 인정하고 토론하고 다시 묻고 하는 과정을 용인하는 것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종북인 나라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아이고 제 이야기가 왜 이쪽으로 흘렀을까요? 

복지 이야기 하려다 이렇게 되었답니다. 구약성서 전체를 일관하는 야훼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평등한 복지”라는 신앙이 있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빈부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부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반드시 돌보아야만 한다는 “복지”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신앙고백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 반드시 오고 가는 것은 “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갈리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국가권력이 이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하는 잣대에 따라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로 갈리면서 그 성패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경험해 온 결과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이고요, 자본주의 역시 아직은 시험중이고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된 형태의 국가들이 새로운 문제 해결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인 것 같지요. 

성서의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에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으시는지요? 

바로 성서가 던지는 이 질문 앞에 우리들이 서 있기 때문이랍니다. 

팔레스타인과 유다의 새 주인이 된 셀류커스왕조는 이전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뜻으로 조세 감면 정책을 폈답니다. 

세금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 정책으로 과연 식민지를 지배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저 식민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거짓이었을 뿐이었답니다. 일시적으로 시행했던 이 정책으로 셀류커스왕조는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더더군다나 당시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었던 로마의 도전 앞에 봉착한 셀류커스왕조는 급격한 정책의 변화를 꾀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식민지의 재산을 강탈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에피파네스라고 불리우는 안티쿠오스 4세가 등극하면서 이러한 정책이 강력하게 진행됩니다. 

이 지점에서 당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셀류큐스 왕조의 에피파네스왕 세력이 배포가 맞는 일이 벌어집니다. “돈이 최고다.”, “우리끼리 잘 살아 보자”라는 정신에서 서로 배포가 맞은 것입니다. 

이들이 첫번째로 벌인 일이 그리스 올림푸스산의 제우스신과 예루살렘의 야훼 하나님은 하나라는 신앙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었습니다. 기원전 174년에 야손이라는 사람이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산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세력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유대인들의 신앙과 제사의식을 무너뜨려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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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일을 성서 외경인 마카베오(마카비)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안티오쿠스왕은 온 왕국에 영을 내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방인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순종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의 종교를 받아 들여 안식일을 더럽히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본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왕은 그의 온 왕국에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고 국민을 감시할 감독관들을 임명하고 유다의 여러 도시에 명령을 내려서 각 도시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게 했다.   많은 유다인들이 율법을 버리고 그들에게 가담하여 방방곡곡에서 나쁜 짓이 마구 저질러졌다.  그 밖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 마카베오상 1 : 41 – 53, 공동번역에서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을 강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견디어낼 수 있는 인내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사백년 가까운 식민지배를 벗어나 종교적 신앙 전통을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독립을 부르짖고 싸우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일의 계기였답니다. 

이제 새로운 유대왕국이 그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라는 예수시대의 파당들이 만들어진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권력 – 중간사 4

(당신의 천국 – 예순 아홉 번 째 이야기)

권력 특히 정치권력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로 먼저 있었던 권력에 대한 거부나  완전 부정이라는 면을 들 수 있습니다.  일테면 미국의 부시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Clinton이라는 말은 그런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지요. 이명박  전대통령의 Anything But Roh,  곧 모든 일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반대로만 하면 된다는 일이 있었지요. 비단 이명박 전대통령만의 일은 아니였지요.  그의 도가 넘는 반노(反盧)정책을 전적으로 이명박이라는 개인 탓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랍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랍니다. 

아무튼 정권이 바뀌면 일단 전임 정권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전임 정권에서 쌓여 온 악화된 민심(民心)들을 푸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권의 힘(동력動力)을 얻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지요. 박정희는 제껴놓고, 이후 권력승계가 선거에 따라 이어져 온 역사만 본다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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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고요, 김영삼은 전과 노 두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고요, 김대중은 워낙 다들 적이였거니와 전임이었던 김영삼은 이미 정리하지 않아도, 아니면 그걸 다 밟으면 제 목 날아갈까보아 두리뭉실, 노무현도 김대중을 정리했지요. 남북관계의 돈문제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신기한 게 박근혜랍니다. 통상 오년 임기 중 첫 일년 안에 이런 전임에 대한 거부 또는 부정의 정책들이 쏟아지는 게 정상인데, 제가 보기에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권 변화사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그녀의 인물 됨됨이가 아주 크거나 아니면 이제껏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민족들이 보아 온 정권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이해 못하는…그게 되어야 민주주의인데…)

다만 제 생각을 덧붙인다면 지금 권력의 중추인 김기춘이라는 이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 말이었다지요. “그럼 우리는?” – 이 질문을 던진 이가 권력에 중추에 있다는 말은 자기 식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뜻? 그 정도는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북의 장성택과 김정은 뉴스는 이번 주 미국 뉴스 가운데도 손꼽히는 메뉴 가운데 하나였지요. 마치 미개 문명 세상 소식같은 느낌으로 말입니다. 

남이나 북이나 아직 멀었지만,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여기까지 온 것도 예사로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하나님 나라를 한 곳에서 만남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나라를 먼저 찾아갈 일이기에 이만 접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00여년 전 팔레스타인 유다 땅의 모습도 똑 같았답니다.  Anything But Ptolemaios 였답니다. 왕조가 바꾸자 전임 왕조의 반대로만 하면 다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입니다. 

새롭게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시아 일대의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계 헬레니즘 왕국인 세류커스왕조는 전임 권력이었던 이집트계 헬레니즘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부정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당근을 던집니다. 전임 왕조는 세금을 많이 매겼지만 우리는 아니다라는 정책을 폅니다. 셀류커스 왕조의 주인인 안티쿠오스 3세는 예루살렘의 전 주민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하고 성전과 성전관리를 하는 사제들의 세금은 영구 면제한다는 칙령을 발표한답니다. 

유다 및 예루살렘이 쌍수를 들어 새로운 식민 지배자인 안티오쿠스 3세의 셀리큐스왕조를 반겼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돈 더 안내도 된다는데 말입니다. 

이게 사단의 빌미가 된답니다. 당연히 얻게 되리라는 당근 대신 채찍을 유대인들이 맞게 되는 것이지요. 

뭐 그 때나 지금이나…. 

또 쌓인 눈을 치우고나니… 내일 잇지요.

대왕 – 중간사 3

(당신의 천국 – 예순 여덟 번 째 이야기) 

기띰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립보의 아들인 알렉산더는 페르샤와 메대의 왕 다리우스를 쳐부수고 그 왕권을 차지하여 그리이스 왕국을 손에 넣은 다음, 수없이 전쟁을 하여 숱한 성을 점령하고 세상의 많은 왕을 죽였다. 알렉산더는 땅 끝까지 진격하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재물을 약탈하였다. 온 세상은 그 앞에 굴복하였고 그는 우쭐하여 오만해졌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고을과 나라와 왕국을 굴복시키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 후 알렉산더는 앓아 눕게 되었는데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어릴 적부터 자기와 함께 자라난 장교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왕국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더는 십이 년 동안 통치하고 죽은 것이다. 그 장교들은 제각기 자기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알렉산더가 죽자 모두들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도 뒤를 이어 오랜 세월을 두고 집권하였다.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온 세상은 그들의 학정에 몹시 시달렸다. – 마카베오상 1 : 1- 9, 공동번역에서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는 당시 도시국가들로 형성되어 있던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에게 사절들을 보냅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공물(貢物)을 바치라는 친서와 함께 말이지요.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이 대제국의 요구에 무릎을 꿇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 요구를 거부합니다. 심지어 아테네는 사절을 죽여 버렸답니다. 

이 일로 인해 벌어진 것이 마라톤전투로 잘 알려진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제1차 전쟁이랍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6,4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그리스는 단지 192명의 전사자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다리우스 1세의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260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격해 왔다고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그의 책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후세의 사가들은 이 숫자는 허풍이고 대략 35만 명의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 반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의 영웅적 싸움을 전하는 테르모필레 전투로 알려진 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 역시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그리스 연합군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국인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각기 동맹을 형성하고 약 30년간에 이르는 오랜 전쟁을 치릅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기원전 431~404)이라고 불리우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테네는 멸망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되고 반도의 주인은 스파르타가 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 기원전 400년에 주인은 테베로 바뀝니다. 

그 무렵 그리스 반도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왕국은 페르시아의 식민지였으며 그리스 반도 안에 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에 비해 그 세력이 미약하였습니다. 그 마케도니아에 필립 2세(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359년의 일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기원전 336년 암살당할 때 까지 그리스 반도는 마케도니아 수중에 놓이게 됩니다. 

필립 2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이 나이 스무살 때의 일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와 왕위 승계를 다투던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약관 스무 살 어린 왕을 우습게 본 그리스내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약 일년에 걸친 싸움에 모두 알렉산더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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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23살 때 잇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24살 때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이 때 예루살렘은 잽싸게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합니다. 그리고 26살 때 페르시아를 점령합니다. 그리고 동으로 동으로 전진하여 인도 접경까지 이릅니다. 이 때 동으로 전진하면서 많은 신도시들을 세우고 도시의 이름을 하나같이 알렉산드리아라고 명합니다. 그 가운데 나중에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갈 곳은 이집트 북쪽에 있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더는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군대와 함께 수많은 비전투원들을 거느리고 다녔습니다.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운동선수, 배우, 심지어 매춘부들 까지 거느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점령하는 곳 마다 그 곳 문화를 받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민족간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기도 하면서 융합되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무서운 기세로 넓은 땅을 점령해 나가던 알렉산더의 나이 34살 때 그는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복지 바벨론에서 급서한 그의 죽음에 대한 설명에는 여러 설들이 있습니다. 암살설, 지나친 음주 탓 설, 너무 빠른 성공으로 인한 의욕상실설 등이 있지만 대세는 말라리아 감염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기원전 323년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알렉산더 이후의 이 신흥 제국은 급격한 분열을 맞게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 사이에 극심한 권력투쟁이 일어납니다. 이들을 ‘디아도치(diadochi)’라고 하는데 후계자라는 뜻이랍니다. 서로 서로 알렉산더의 후계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약 20년 넘게 투쟁을 벌인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305-30 BC, 주로 이집트지역), 셀류커스 제국(312-63 BC, 레반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의 시리아지역), 마케도니아 왕국의 안티고노스 왕조(306-168 BC)로 나누어집니다. 

이 가운데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과  셀류커스 제국입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페르시아 식민지 유다는 이 신흥제국에 항복을 합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에서 그리스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즈음 사마리아에서 신흥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알렉산더의 강력한 보복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대량학살 당한 사마리아인들의 유골이 발굴되어 그 때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답니다. 여타의 다른 유다지역에서는 알렉산더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 드렸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나누어진 세 개의 왕국들이 치열하게 세 다툼 전쟁을 벌일 때 팔레스타인의 유다는 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여러 피해를 입게 됩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북부 지방이 이들 세 왕조의 세력이 맞붙은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확보한 것은 이집트를 근거로 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습니다. 이집트 헬레니즘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식민지였을 때는 유대계 총독과 성전의 대사제가 다스리는 체제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대사제를 명목상 유대의 수반으로 하고 이집트계의 민정관리인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 시절보다 가혹한 공물과 조세부담에 시달리는 시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물이나 세금 징수를 맡는 관리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같은 민족 안에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나기도 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일어난 주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유대 디아스포라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유대인의 정체성 찾기 운동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살며 이미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버리고 헬라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 바로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이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이들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을 융합시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특히 이들은 정통 유대교가 형성되면서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 랍비 유대교로부터 배척의 대상이 되고, 후에 바울의 기독교 선교 운동의 첨병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항거들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기원전 198년까지 이어집니다. 

시리아지역을 기반으로 세를 유지해 온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쿠오스 3세가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차지한 것은 기원전 198년이고, 이 시대로부터 팔레스타인 유대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징후는 성전 권력의 썩을대로 썩은 부패로 부터 나타납니다. 이 무렵(기원전 174년경)부터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만남 – 중간사 2

(당신의 천국  -예순 일곱번 째 이야기)

성서의 외경 또는 제2경전으로 부르는 책들을 빼놓고,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구약의 마지막책 말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시대까지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연대로 따져보면 대략 기원전 430년경부터 예수 탄생시기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대의 변화를 바로 보려면 바벨론 포로 귀환기(기원전 538년)부터 예수 탄생까지의 시기를 보아야합니다. 

유다의 역사로 보자면 이 시기를 크게 세 시대로 나누어 보아야 합니다. 식민지시대(페르시아, 그리스)와 유다왕국시대,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시대로 말입니다. 

인류사 또는 세계사로 본다면 이 시기 곧 기원전 2,500년에서 예수 탄생 시기 까지 약 오백년은 그 이후로 부터 오늘날까지 약 이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을 지배해 온 큰 생각들 곧 사상과 종교가 탄생한 시기입니다. 

유대교가 오늘날의 유대교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이고,  싯다르타 고타마 또는 고타마 붓다라고  불리우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불교를 탄생시킨 것도 이 무렵(기원전 500년- 600년 경)이거니와 유교의 시조(始祖)인 공자(孔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가 살았던 때도 바로 이무렵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헬레니즘의 대명사이기도 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가 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먼저 용어 설명을 드립니다. 희랍, 헬라 , 그리스는 다 똑같은 이름입니다. 희랍(希臘)은 중국인들이 그리스의 발음을 제 나라식으로 적은 것이고요.  영어권에서 South Korea로 부르는 나라 대한민국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Korea이고, North Korea로 부르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듯이 그리스(Greece)라고 불리우는 나라의 정식 명칭은Hellenic Republic이랍니다. 그리스어인Hellas라는 말은 반도라는 뜻이랍니다. 한반도처럼 반도(半島)라는 말입니다. 한자어’희랍(希臘)’은 바로 Hellas를 중국어로 발음한 것이랍니다. 

헬라, 희랍, 그리스 다 똑같은 말이라는 것이고요. 그리스 정신과 문화를 일컬어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하고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다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히브리즘 또는 헤브라이즘 hebraism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서양의 생각과 사상, 철학, 종교를 따져보면 이 두가지 기둥이 서로 엉기거나 분리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 두 개의 정신이 만나는 때가 바로 이 신구약 중간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변화와 성문서(시편, 잠언 등)들이 이루어진 배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시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한 당시의 유다역사를 정리하고 넘어가야만 하겠습니다. 

페르시아시대의 유다는 페르시아가 내세운 유다인 총독이 정치, 군사적 권력을 관할하고, 유다인 대제사장 및 제사장 그리고 레위 그룹들이 제사 권한 곧 종교적 권력을 쥔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왕정시대(다윗,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시대)를 이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체제에서 그랬다는 말입니다.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체제 관리자들이 페르시아 제국의 정치 군사적 체제에 순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미 유다인 디아스포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디아스포라란 민들레 씨앗처럼 마구 퍼트려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요. 자의든 타의든 자기가 살던 고향땅을 떠나 살게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외국 땅으로 떠나가서 정착한 유다인촌들이 생겨난 시대라는 것입니다. 

유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뭉친 유다인들과 디아스포라가 되어 외국에서 정착촌을 이룬 유다인들 사이에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이 만들어진 시대입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뭉친 예루살렘 중심 정신과 “그 날이 오면”이라는 종말론적 정신입니다. 

이런 유다 정신 곧 헤브라이즘 또는 히브리즘을 상승시키면서 대립하는 헬레니즘이 서로 만나게 된답니다. 

기원전 333년에 시리아 북쪽에 위치한 잇소스라는 곳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오 3세와 그리스의 떠오른 별 알렉산더가 제국의 패권을 놓고 일대 격전을 벌렸습니다. 알렉산더의 완승으로 끝난 이 싸움으로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정말 간단히 먼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말씀드리면 히브리즘은 이제껏 우리들이 유다인들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확인한  “오직 하나님만(Mono-Yahwism)”이라는 정신과 신앙아래 생긴 것이랍니다. 신은 오직 하나이고, 신이 선택한 민족도 하나이고, 세계의 중심은 바로 그 신에게 있고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헬레니즘은 세계의 모든 것은 다 품는다는 정신이 우선한 것이지요. 더 쉽게 말씀드리면 좋은 게 다 좋은 것이랍니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라면 말이지요. 

또한 히브리즘은 신 중심 그것도 오직 하나 뿐인 신 중심적인 세상과 감성과 영적인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헬레니즘은 인간중심, 사람중심, 이성과 지성 중심의 세상을 말하고 있답니다. 

이 두 개의 큰 생각이 만나게 되는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한국말을 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생각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거니와 그렇게 가르치는 교계 지도자들이나 목사 또는 지도층 평신도들이 있답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거니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훼방을 놓는 일이랍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서로 만나는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의 만남은 야훼 하나님의 일터를 보다 넓게 바라보는 지혜를 얻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세상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이 시대 빠른 역사 이야기 한번 더 해야 마쳐질 것 같고요. 

이쯤 한번 깊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답니다. “예수, 예수”하는 사람들, “교회, 교회”하는 사람들 정말 많지요. 

크게 무리를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지금 지구 어느 땅에 살더라도 나이에 상관없이 한국말을 제일 언어로 사용하면서 한국말로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드러내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거나,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답니다. 바로 크게 한무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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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엄청나게 다른 것 같을 때가 있답니다. 개신교, 카톨릭에서 부터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등에서 또 그 안에서의 계파로 나뉘이고, 나아가 보수니 진보니, 자유주의니 다원주의니 정통이니 운운들 하지만 크게보면 다 똑같은 한 무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즘, 헬레니즘, 불교, 유교, 선교 등 오늘 우리들이 선택한 믿음과 조상대대로 이어 온 알 수없는 종교적 인자들이 하나가 된 똑 같은 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믿습니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오늘의 나에게 참된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골 아프지만 역사 이야기를 짚고 넘어 가야한다는 말씀이랍니다.

 

내일 잇겠습니다.

경전 – 중간사 1

(당신의 천국 – 예순 여섯 번 째 이야기) 

경전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상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해도, 경전을 경전으로 확정하고 경전을 그렇게 표시하며 제한하는 일은 교회의 행위요, 교회신앙의 행위이며, 교회적 인식과 교회적 고백의 행위이다. – 칼 바르트(Karl Barth)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유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이 책들을 신성한 교리들이 담긴 책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항상 거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이 책들을 위해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바칠 자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 요세푸스의 ‘아피온 반박문’ 제1권 8장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인 1954년 6월 1일Wall Street Journal에 이런 광고가 하나 실렸답니다.

wall_street_journal

“사해 사본 두루마리 4개 : 기원전 200여년 경의 성서 필사본 팝니다.  (The Four Dead Sea Scrolls: Biblical manuscripts dating back to at least 200 BC are for sale. ) 

1947년 팔레스타인 사해 서쪽에 있는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 또는 쿰란문서라고 불리우는 두루마리 성서 사본이 어찌어찌 돌고 돌아 미국 신문에 판매 광고로 등장한 것입니다. 자그마치 이천년이 넘는 고고학적 자료이자, 성서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을 풀어주게되는 이 사본들은 당시 미화 25만 불에 팔립니다. 

실제 구매자는 이스라엘 정부였고, 판매액의 대부분은 미국정부에 귀속되었습니다. 광고를 냈던 사무엘이라는 시리아 정교회 소속 감독은 손에 쥔게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200년 경과 그 이후 약 300년 사이에 쓰여진 히브리 성서 필사본과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서기 1947년에 발견된 일은 성서 연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읽고 보고 있는 성서의 원본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원 전 200여년 즈음에  헬라(그리스어)어로 번역된 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된 성서의 원본은 없다는 것입니다. 쿰란문서가 발견되기 전에는 히브리로 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후 약 700년 경에 펴낸 마소라 사본이라는 책이 있답니다.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히브리어 성서의 원본에 가까운 시대를 약 900년 앞으로 당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알아보려는 시대는 바로 이렇게 중요한 시기입니다. 바로 기원전 450여년 무렵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등이 활동하던 구약성서의 마지막 기록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까지입니다. 

특히 말라기 이후부터 유대왕국인 하스몬왕조가 들어서기까지 약 300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성서의 틀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서가 형성되고 헬라어 성서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입니다. 

또한 인류 역사에 있어 신기원을 형성하는 헬레니즘과 히브리즘이 만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나누어지는 토대가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에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시기의 변화와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예습은 필수적인 전제입니다. 

이 시대는 성서의 완성시기이기도 하거니와  성서(구약)를 읽는 시각의 차이로 인해 그리스도교 곧 기독교가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변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례요한과 예수와 바울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답니다. 

제2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식민지였습니다.  왕이 없는 식민지에서 사는 유대인들과 인근 각지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절실하게 찾아 헤매던 자기 정체성을 묻는  물음에 대한  결실이 바로 구약성서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유대교와 기독교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동방박사와 헤롯왕과 빌라도총독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세리와 열혈당원과 십자가 그리고 바울을 준비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이제 그 시대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문서들이 완성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 제 아버님께서 작은 책을 하나 엮어 내시는데,  오늘 최종 인쇄 승인을 해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거 좀 꼼꼼히 들여다 보느랴 시간을 내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저 신구약 중간사로 들어가는 글로 오늘의 글을 대신합니다.

권력 – 귀환 8

(당신의 천국 – 예순 다섯 번 째 이야기)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백성을 공평 무사하게 다스렸다. 군 총사령관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 공보대신에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  사제 일은 아히툽의 아들 사독과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 비서 일은 스라야,  그렛 외인부대와 벨렛 외인부대의 지휘관에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다윗의 아들들도 사제 일을 보았다. –사무엘하 8 : 15 – 18 

(솔로몬)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에비아달의 자리에 사제 사독을 앉혔다. – 열왕기상 2 : 35 

레위인은 예수아의 일가, 곧 카드미엘과 빈누이와 호다야의 일가 칠십 사 명이었다. – 에스라 2 : 40, 이상 공동번역에서 

그들은 그 동안 경비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렸으며 바사(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움직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율법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들은 하나님께 넘치는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이들은 귀족정치(aristocracy)에 과두 정치(oligarchy)가 가미된 정부 형태를 취했다. 과두 정치가 가미 되었다는 말은 대제사장이 정부의 수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 11권 4장에서 

우리들이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중심을 바로 알고 이해하려면 예수가 일하고 말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일테면 백 이삼 년 전에 한반도에서 ’양천주(養天主) 곧 우리 안의 하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다 목이 잘린 해월 최시형을 바로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니와, 똑같이 ‘아간의 범죄’ 행위를 인용하였지만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촉발시켰던 길선주목사의 “내가 아간입니다.”라는 고백과 2013년 그 규모로는 세계적 순위로 꼽히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가 “나는 아간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펴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당시와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들과 형편을  잘 이해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약 2,500년 전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다보면 열 두지파, 대제사장, 제사장, 사제 , 레위 등등의 말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이스라엘의 12 부족을 나타내는 12지파 중 레위 지파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를 담당하는 지파였는데 왕국이 망하기 전에 남쪽에 속했을까요? 북쪽에 속했을까요?  남왕국은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둘이었으까 당연히 북쪽에 속했겠지요. 

남왕국 유다의 전통을 잇는 포로 귀환 후에 역대기 사가들이 생각했을 때 이 레위지파의 위상은 어떠했을까요? 

highpriest

또 한가지 혹시 “사독”이라는 이름 기억나시나요?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정권의 요직 개편을 하지요. 사무엘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왕 밑에 최고 권력자는 군 사령관 요압, 공보대신에 여호사밧, 두 명의 사제장에 사독과 에비아달이라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권력 순위 3 – 4위에 사독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다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에비아달이 숙청되고 사독이 단독으로 사제장 곧 대제사장 자리를 꿰어찹니다. 

그로부터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사독의 후손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 자리들을 독차지합니다. 이 말은 바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권력 곧 신권을 대행하는 권력이 사독 가문에 집중되었다는 말입니다. 

왕국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주된 사람들 역시 이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가문과 이들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을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던 레위 가문들 가운데 북왕국이 망하고 남왕국으로 내려 온 많은 레위 가문 사람들이 있었고요. 주로 이들은 산당이라고 하는 지방에 산재된 야훼 하나님을 기리는 예배처소를 담당했을 것이라고들 추정한답니다.

사독가문의 제사장 그룹들은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를 주창한 것이고, 레위 가문은 후예들은 지방 예배처를 관장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랍니다. 

그런데 유다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모두 왕 아래에 놓인 계급이었습니다. 

바벨론포로기 이후로부터 하스몬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에는 약 400년 이상 왕이 없다고 헀습니다. 

왕이 없는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이었답니다. 신권정치를 움켜 쥔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권정치를 내세우고 권력을 잡은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철저히 친 페르시아 입장에 서서 그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지요. 

솔로몬 제 2성전의 건축은 이런 상황들이 맞물려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독가문인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룹들, 비록 위축된 형편이었지만 명맥을 유지해 오던 레위지파가 페르시아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신권정치를 이어간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의 신앙고백은 성전 중심인 예루살렘의 새 날에 대한 기대였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그 고백을 축약한 것이고요. 

그로부터 약 오백 년이 흐른 뒤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역사를 송두리채 뒤집어 엎어 버린답니다. 

이제 구약의 성문서(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에스더..) 이야기로 넘어 갑니다. 

짧게 살피고 신구약 중간시대 이야기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