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과 한국교회

대한민국 전 대통령 이명박이 출간한다는 회고록에 대한 뉴스들이 넘쳐납니다. 그에 관한 뉴스의 분량보다 몇 수십 또는 수백 아니 수만가지 보고 듣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느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숱하게 다른 느낌들 가운데 하나, 바로 제 생각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델라웨어주에는 델라웨어 대학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 대학교에 수십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학교수들과 공무원 또는 정치인 등이 교환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석, 박사 과정으로 짧게는 일년에서 수년 동안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한국에 돌아간 그들은 정, 관, 학계를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나름 중추 역할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장차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등을 위시해 제법 이름 꽤나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가 수인사를 나누었거나 밥 한끼, 술 한잔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교회를 통해 만난 이들입니다.

델라웨어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로드 아일랜드 다음으로 두번 째로 작은 주이고, 델라웨어대학은 (참 무의미한 짓이지만) 미 전국 대학순위로 따져 60-70위 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그나마 지금의 부통령인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의 모교로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미국 촌구석에 있는 대학에 왔다간 사람들을 위시해 이른바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부터 미 전역, 각 대학에 해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연구원, 교환교수 또는 석박사 과정으로 이 땅에서 머물다 한국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수많이 이들이 한국사회의 중추 역할들을 했거나, 하거나,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교회를 통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몇곱이나 많은 이곳 이민자들과 영주자 또는 방문자들과 교류를 나누거나 연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이곳 미국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영국, 동서 유럽, 중동, 러시아, 중국, 일본, 호주,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이젠 쉽게 볼 수 일들입니다.

한국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부터 사기꾼, 도둑놈 등의 범죄자들에 이르기 까지) 가운데는 해외에 있는 교회를 통해 얼기설기한 연을 맺고 있다는 말씀이고, 그 고리는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생김새가 비슷하다기 보다는 같은 언어 곧 한글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 동포를 가름하는 일이 이젠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점입니다. 게다가 ‘웨이보’가 중국을 대표하듯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써도 한글을 이용하고 카톡을 쓰며 대용으로 텔레그램을 써도 한글로 쓰는 이들만의 세상에서는 한반도와 전세계란 지역적 나눔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로 존재하는 곳이 바로 한인교회입니다.

한인교회란 한국내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한글을 사용하는 교회를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올해는 조국 광복(해방- 이런 똑같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써야만 하는 세월이) 70주년되는 해입니다.

이런 때에 이명박과 그의 회고록이 뉴스의 헤드를 장식하면서 든 생각이란 바로 지난 70년 동안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 믿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 낸 죄의 결과물이라는…

101207_6강_김정욱_(13)

이곳 델라웨어 대학에서 잠시 머물던 이들 가운데 서울대 김종욱교수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 이의 말로 이 글을 접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나 울분이 치솟는다. 몇몇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고, 다른 생명과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복원할 수조차 어렵게 만들어 놨다. 다 돈 때문이다. 뭐 그럴싸한 이유를 덮어씌우는데, 실상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일어난 일이다.

4대강 사업은 사기다. 전 국토를 이렇게 졸속으로 파헤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는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있다고 세계를 상대로도 거짓말했다. 그런 엉터리 거짓말로 상도 많이 받았다. 이런 사람이 교회의 장로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패했으면 이런 장로를 배출했을까.

한반도 대운하 얘기 나오고 4대강 사업 진행할 때 목사들이 칭송 많이 했다. 성경적이라든지 문명사적이라든지 무슨 거창한 말 갖다 붙이고. 조금만 살펴보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그걸 믿는 사람들을 보면 참…. 사기꾼들 보면 욕심 많은 사람을 이용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욕이 많기 때문에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간다고 본다. 교회가 물욕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4대강 사업이 좋은 거라고 떠들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도 장로 대통령이라고, 잘못이 있어도 지적하면 안 된다고 두둔한 게 교회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잘 봐야 한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했다. 식민지이기는 했어도 헤롯은 어쨌든 당시 유대인들의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초대교회는 절대 권력자들을 떠받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한 것과 같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는 안 된다. 권세에 따르라는 성경 말씀은 권력에 굽신굽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족 : 문제는  이명박 뿐이 아니라 한인교회마다 차고 넘치는 이명박 아바타들.

어떤 감사 – 홍길복목사님께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홍길복-2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

그 놈들 2

no 2오늘(2014년 12월 4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날이라는 기사가 경제 전문 온라인 신문인 MarketWatch에 실렸습니다.

이제 미국은 공식적으로 세계 제 1위의 자리를 오늘로 중국에게 넘겨준 날이라는 기사입니다. 2000년도에 중국의 3배 규모였던 미국경제 규모가 2014년 12월 4일자로 중국보다 적어졌다는 내용입니다.

세계경제 지표를 발표하는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상품과 서비스 생산규모에 있어 올해 17.6조 달러를 기록한 중국이 17.4조 달러를 기록한 미국을 앞섰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계 경제 점유율로 따지면 중국이 16.5%로 16.3%인 미국을 앞선 결과라고 합니다.

세월앞에 장사없다는 말이 딱히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제대로 적응못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 기사였답니다.

그리고 어제 한국의 ‘일등 인터넷 뉴스’라고 자처하는 조선닷컴에 한때 탑뉴스로 떠있던 기사의 제목입니다. <탈북여성 5人 “신은미·황선 끝장토론하자”> 그리고 그 아래 붙어있던 소제목들입니다. “재미 교포 관광객 오면 한달간 수업 중단하고 연습”, “’평양 원정 출산’ 황선씨는 최상류층 이용 평양산원… 난 보일러실서 몸 풀었다”

기사의 내용인즉은 최근 남한에서 통일토크 콘서트를 하는 연사들인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 황선씨는 탈북여성 5인의 시각으로 보니 영락없는 종북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북에서 살다가 남으로 온 자신들(탈북자들)의 시각으로 보면 겨우 북한에 여행이나 다녀온 주제에 북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니 우습다는 것이고, 그들(신은미, 황선)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 탈북여성 다섯 명은 2002~2007년 사이에 탈북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황선씨는 2005 10월 북한에 방문했고 당시 평양에서 출산을 해 화제가 됐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신은미씨는  2011년 10월 첫 방문을 시작으로 2013년 9월까지 여섯번 북한 여행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그런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바라본 북한에 대한 느낌을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콘서트를 진행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들이 영락없이 종북주의자로 낙인이 찍힌 듯 합니다. 아무렴 그들이 틀림없이 종북주의자들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미 꽤나 많을 것입니다. 일등 신문인 조선일보가 발벗고 나섰는데 그 정도야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한편 오마이뉴스는 이런 상황을 맞게 된 당사자인 신은미씨와 황선씨의 기자회견 현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신은미씨가 말한 한 대목입니다.

“종편에서 저를 난도질하고, 이렇게 빨갱이, 종북이 곧 빨갱이더라고요. 빨갱이로 몰아부쳐서 친정, 시댁, 친구, 친지 다 관계가 단절됐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 민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언론이십니까… 이렇게 (제가) 그대로 가면 ‘(종편 등 보수언론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간다’고 박수하겠죠.”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이 일상적인 관계에서 단절당한 왕따가 되어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와 오마이뉴스가 보도하고 있는 각기 다른 두개의 뉴스야말로 “종북주의자”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나 한인 동포 사회나 일단 “종북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왕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어떤 사람이 종북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 종북적 사고를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단지 “종북주의자”라는 낙인은 어떤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왕따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누군가 또는 특정한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를 종북주의자 또는 종북단체로 만들기는 아주 쉽습니다. 왕따를 시켜버리면 그만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다섯명의 탈북여성처럼 일단 왕따로 찍힌 사람이나 단체에게 화살을 날려줄 전위대들은 차고 넘칩니다. 일부 탈북자들을 위시해 어버이연합 등 실체가 빤한 실로 딱한 이들로 부터, 김영환, 하태경, 김지하류의 자기상실 환자들, 국회의원 김진태 부류의 완장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완장들을 부리는 그 놈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자 MarketWatch 보도에 따르면 당장 내일, 내년 또는 수년래에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200년 동안 지구상 최강대국이었던 미국이 옛날 영화를 누렸던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덧붙입니다.

중국보다 세 배나 앞서있던 미국이 중국에게 추월을 허용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4년입니다.

남한보다 세 배나 앞서 달리던 북한이 남한에 비해 40분의 1 수준으로 몰락하는데 걸린 시간은 50년입니다.

도대체 있지도 않는 종북주의자들을 양산해 내어 왕따군(群)들을 키우는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겝니다.,

“오늘 왕따로 사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진저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므로”라는 믿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유치해서 아름다운 어느 목사의 청원

어느 사이에 서른 다섯해가 지났습니다. 간간히 소식은 주고 받았지만 얼굴 뵌지가 그리 되었답니다. 홍길복목사님이십니다.

조만간 뵈올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변함없이 여전하신 목사님의 올곧게 고집센 모습을  뵈었답니다. 홍목사님의 고집센 모습을  이곳을 방문해 주신 분들과 함께 합니다. 다음은 홍목사님께서 교회에 청원하신 글입니다.

—————————————————————————–

홍목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빕니다.

항상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베풀어 주시는 크신 사랑과 기도에 마음 속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교회의 신구목사 이 취임식을 앞에 두고, 몇 일 전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의 ‘원로목사 추대 사양’의 글월을 드렸습니다. 하오나 지난 주일 1부 예배 후, 배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는 저를 따로 만나 아주 간곡한 마음으로 저의 사양하는 그 뜻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또 어제는 배목사님 내외분께서 제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 심방을 오셨다가 제가 꼭 원로목사로 그냥 남아 있어서 원로와 후임 사이에 후배들과 시드니 교민 교회에 좋은 모델을 보여 주십사 하면서 아주 간곡히 부탁 하셨습니다. 정말 그 사랑과 진지함과 겸손함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월을 다시 드리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귀 교회의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번 더 확고하게 전해 드리고자 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배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간곡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홍목사가 마음을 돌이켰으리라고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는 뜻은 이미 지난 번 글월에서 다 말씀 드렸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시 반복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좋은 의도를 갖고 드린 말씀이 다시 반복되어서 오히려 말 만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시드니 우리교회 원로목사추대를 사양합니다.

아울러 한가지 더 간절히 부탁 드리옵기는 오는 4월 신구목사 이 취임식은 시드니 우리교회 제 2대 담임목사 취임에 촛점이 마추어지기를  바랍니다. 은퇴하는 사람은 조용히 떠나가는 것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저는 정말로 이제 무대의 중앙에 서서 조명을 받아서는 않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제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부터 정말로 존경 받을 수 있는 한가지 길이기도 합니다. 좀 유치하기는 하지만, 그러니 제가 마지막으로 받을 수 있는 존경의 기회를 막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백방으로 원로목사 추대를 간청하였고 본인은 진심으로 사양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제 이후 촛점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젼, 새로운 목사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이제 무대의 뒷 편에서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제발 부탁 드립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예배와 예식 역시 취임식에다 초점을 마추어서 준비 해 주십시요.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람을 위하여 지난 날 온갖 섬김과 헌신, 사랑과 기도로 지원 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더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제는 이 원로목사추대 건을 가지고는 다시 말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일도 자꾸 말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마음에 상처를 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미 우리 배진태 목사님의 깊은 마음과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장로님들께서는 지난 날 저에게 해 주셨던 것 처럼 배목사님을 대해 주시고 목사님을 중심 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시어서 끝까지 주님과 우리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홍길복드림

홍목사님 참조기사 : 시드니 예수마을 강연회

빈들에서 보낸 초대장

<바닥이 하늘이다. 빈들이 희망이다.> – 주초에 받아 본 어느 초대장에 적힌 첫 글입니다.

해마다 받는 초대입니다. 대한민국 대전시에 있는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 빈들교회에서 보낸 초대장입니다.

김규복목사가 그 공동체를 일구어온지 올해 서른해가 되었답니다. 올곧게 외길을 걸어온 벗을 생각하며 이곳을 방문해 주신 당신에게도 초대장을 나눕니다.

—————————————————————————–

모시는 글

예수와 함께  민중과 더불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하여

섬기고 나누고 희생하는 공동체

 

낮게 작게 느리게,

가난하고 겸손하고 소박하게,

그러나 참되고, 끝까지 기쁘게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 존귀한 것이고

작은 것이 아름답고,

바닥이 하늘이다.

 

가난이 축복이고, 고난이 영광이고

죽음이 생명이고, 희생이 영생이다.

 

대전 대화동 빈들교회가

30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며 춤추며 불렀던 노래입니다

 

아무에게나 손벌리지 않고

꼬리표 붙은 나쁜 돈 바라지 않고

힘있는 자에게 기대거나 줄서지 않고

사람과 조직과 인기에 집착하지 않고

 

날마다 바닥을 긁어 나누고

차라리 자신의 살과 피를 떼어 주고

땀과 눈물을 함께 흘리며

강물이 흐르듯 한눈 팔지 않고

앞만보고 달려온 길 위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

눈을 뜨고 귀가 뚫리고

손발에 힘을 얻고

희망과 감사를 가득 안고 돌아갔으나

 

어떤 이는 힘들어서 돌아가고

어떤 이는 이해못해 돌아가고

어떤 이는 상처받고 돌아서고

어떤 이는 실망하고 돌아서고

 

어떤 이는 마리아가 되고, 니고데모가 되고, 베드로가 되고

어떤 이는 삭개오가 되고, 마르다가 되고, 가롯 유다가 되고

어떤 이는 구레네 시몬이 되고, 막달라 마리아가 되고, 백부장이 되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라합처럼

남은 자는

오직 12척의 배와 같은 작은 사람들

 

승리한 패배자들

성공한 실패자들

지혜로운 바보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진리와 자유와 평화와 생명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갈 남은 10년의 힘찬 시작을 위하여

 

얼굴 한 번 보고

손 한 번 잡아주길

차 한 잔 정성껏 차려놓고

함께 부를 노래 몇 곡 준비하고

님들을 기다리겠습니다.

 

1. 빈들교회와 함께 하는 날 – 사랑의 찻집

2014년 10월 20일(월) 10-22시

까페 수다떠는 도서관 (한밭도서관 앞)

 

2. 빈들의 열린 문화제 – 섬김과 나눔과 십자가의 노래

2014년 10월 28일(화) 저녁 7시

한남대 56주년기념관 서의필홀

 

3. 빈들교회 창립 30주년 감사예배

2014년 11월 23일(일 오후 4시

대화동 빈들교회당

 

빈들바람 김규복 목사

빈들교회 창립 30주년 감사마당 준비위원회

 

<공동체 후원하기

천사계좌:우리은행(김규복)

563-039690-02-004

www.seomna.or.kr >

초대1

초대2

매국?

매국(賣國) : (명사)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음 

모처럼 한국어 사전을 들추어 그 뜻을 찾아 보았습니다. 한국을 떠나온지도 벌써 한 세대가 흐른  시간이 되었으니 행여 제가 뜻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매국에 대한 예제로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는 매국 친일파의 후손이다.”

종일 일을 하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말 “매국”이었습니다.

졸지에 제가 매국하는 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국하는 놈, 곧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넘기는 것,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익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역적을 일컬어 매국적(賣國賊)이라고 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남의 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매국노(賣國奴)라고 한다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국적 또는 매국노라고 불리우는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 된 까닭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씨(또는 양 孃(계집 양)가 미국을 방문하는 시점에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랍니다.

그렇게 제게 매국이라는 딱지를 붙여준 이들은 대한민국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대변인이라는 이와 조선일보입니다.

애초 종북이니 좌파니 하는 매도는 예측해온터라 전혀 새로울 일이 아니었답니다. 제 나라 대통령을 지낸 이까지 나라 땅과 바다를 북에 상납한 종북 좌파라고 우기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이름조차 내밀 건덕지없는 평범 이하의 사람 하나 종북 좌파로 만든다 한들 그게 무슨 큰 사건이겠습니까?

북의 김정은 입장에서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한순간에 삼백명이 넘는 종북 좌파가 뉴욕 맨하턴을 휘젓고 다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새누리당과 조선일보가 있으니 말입니다.

종북 좌파라는 소리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매국”은 참 생소하기도 하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박근혜씨가 사개국어인가 육개국어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는 못한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진 터에 이른바 종박주의자들이 그것조차 따라하느랴고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매국

“제 나라의 주권이나 이권을 남의 나라에 팔아먹는 행위”가 곧 매국입니다.

매국 운운하는 이들이 말하는 교통사고가 나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 교통사고가 일어났는지, 그 사고로 인해 꼭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었는지, 행여 그 모두를 살릴 방법은 없었는지, 살릴 수 있었는데 그대로 죽음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아무리 단순사고라고 하여도 그 사고를 예방, 수습, 처리하는 정부기관들이 있는 법이고, 그들이 그 때 제대로 대응을 한 것이지를 묻는 일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여러차례, 하물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까지 “왜?”에서부터 “어떻게?”까지 해결하겠노라 했으면 그거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지으라는 주장이 매국이 되어야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자기 나라 말 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위인들이 정치를 하고, 신문을 만드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무릇 언어습관은 제 버릇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이 모두가 아마 새누리와 조선, 매국(賣國)을 밥 먹듯 해 온 “매국 친일파”라는 자기네들 가계(家系) 탓일 겝니다.

자유하고자

자유

–       김남주(1948-1994)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함께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세월호- 뉴욕시위

어제 큰 맘 먹고 뉴욕 맨하턴을 다녀왔습니다. 맨하턴을 오고가는 길이 꼭 큰 맘을 먹어야만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뜸해졌지만 아직 인터넷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90년대 까지만 하여도 한국소식을 좀 제대로 듣거나, 신간서적이라도 한 줄 냄새를 맡으려고 틈나면 오고가던 길이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서 한때는 한던 일 때문에 거의 매주 한차례씩 오고가던 길이었답니다.

큰 맘 먹었다고 운을 띄운 까닭은 이번에 맨하턴행을 하게 된 연유때문입니다. 다름아닌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행진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1987년 이민을 올 때 여느 이민들과는 다르게 제가 한 일이 하나 있었답니다. 대한민국 정부 앞으로 “나가서 절대 대한민국을 위해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물론 정확한 문구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는 내용의 각서를 쓴 일입니다.

그 조건으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이곳 델라웨어라는 작은 마을에 살아 오면서 내 모국인 대한민국을 위해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제 능력껏 이곳에서 더불어 사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알리기 위해 작으나마 노력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큰 일은 하지 못했어도 이곳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 뿐만 아니라 아시안계 이민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작은 노력도 기울여 왔습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대한민국 정부를 향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시위에 참가 권유를 받은 적은 여러번 있었어도 단 한번도 참여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쓴 각서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여기에 뼈를 묻을 사람이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종 글이나 말은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것 뿐이지 어떤 운동으로써 행위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려면 다시 보따리 싸서 한국행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월호집단 생수장 사건은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참담한 사건은 어디에 살건 오늘날 한국어를 쓰거나 한국적 사고를 지닌 모든 이들의 문제입니다.

그 맘으로 다녀온 길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였습니다. 오늘은 사진으로 이야기 합니다.

제가 사는 동네 기차역과 시외버스 정류장(Greyhound)입니다. 조용하지요. 늘 이런 풍경으로 한산한 동네랍니다.

DSC01741DSC01743

델라웨어 메모리얼(한국전쟁 참전용사를 기념하는 다리)브리지를 건너며 찍은 델라웨어강입니다. 가끔 이곳이 한강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delaware river

세시간 사십분만에 도착한 맨하턴입니다. 타임 스퀘어 광장 앞 도로에 엄청난 인파가 시위 중에 있었습니다. 이날 약 31만명이 참여했다는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였습니다. 마치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DSC01746

우리 부부가 함께해야 할 시위대열에 참여하기 위해 바쁜 걸음을 옮겼습니다. 대한민국 뉴욕 총영사관앞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먼저 만났던 시위대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DSC01753

그 대열에 섞여 함께 걸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때 신촌에서 시청앞을 걸었던 이래로 처음이었습니다.

DSC01755

DSC01762DSC01772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아내와 함께 맨하턴 거리를 거닌 이야기는 뒤로 미룹니다.

주(主)떠난 주일아침

주일 아침입니다. 아니 일요일 아침입니다. 이즈음 주(主)가 떠난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청운효자동이 아침에 “자식이 살려달라 애원하는데 그걸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울분에 찬 목소리를 전하는 뉴스를 봅니다.  137일 째 이어지고 있는 한 서린 목소리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그들의 목소리는 열흘째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어릴 적 그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까닭으로  6년 동안을 걸어 지나 다니던 동네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동네의 상징이었던 곳입니다. 단지 평온한 세월이었을 때 말입니다.

1960년 4월 민(民)을 향해 첫 총알이 날아간 곳이 그 동네 거리였으며, 6-70년대 툭하면 쳐지던 군대의 바리케이트와 탱크, 자동화기 등이 가장 먼저 포진했던 곳도 바로 그 동네였습니다.

청운 효자동은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인 동네입니다.

2014년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그 곳에 갇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애써 듣지 않으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거니와 그 소리를 죽이고 차단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소리를 비틀어 왜곡하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 소리와 함께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갇힌채 새어 나오는 한맺힌 소리를 듣는 교회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는것은  비단 오늘이 주일아침 -제 입에 달린 말이라 스스로 나오는 主(주)입니다.-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137일 동안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거기에 생각이 닿으면 실망과 분노를 넘어 거의 체념에 이르게 됩니다. 과연 2014년 이 지점에서 한국(인)교회에 구원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체념 말입니다. 물론 제가 개신교인이므로 개신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잠잠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입니다. 마치 “가만 있으라!”라는 어떤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듯한 모습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나마 “정의”라는 화두를 던지고 간 천주교황의 행위에서 종교적 위로를 느낀 시간들이있긴 했습니다.

필리핀 빈민 선교에 헌신한 비브 그릭 선교사는 그의 책 “가난한 자들의 친구”에서 정의를 이루는 네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관계에서(곧 일대 일의 사람 사이에서) 정의를 이루는 일 둘째는 쌍방간에(곧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화평과 화해를 이루어 정의를 이루는 일 세번째는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의 운동 단체를 설립하여 정의를 확산 시키는 일 네번 째로는 사회 상류층(사회 모든 분야의 기득권 계층)들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여 정의를 이루는 일이 바로 그가 말한 네 단계입니다.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든 정의(正義)는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사이에서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한 신(神)은 그저 공허할 뿐입니다. 신의 뜻, 신의 개입이란 바로 사람들의 행위가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브 그릭 선교사는 이 지점에서 <만인을 위한 정의>를 외친 존 퍼킨스 목사를 인용합니다.

존 퍼킨스는 보안관 총에 맞아 죽어가는 형을 부뚱켜 안으며 “정의”에 대한 화두를 풀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존 퍼킨스의 말입니다.

“우리의 권리요구는 우리가 희망했던 것처럼 백인공동체를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백인 공동체는 굳게 반대했다. 침대 위에 누워서, 백인들에 대해 적의를 갖고 맞서는 것은 전쟁만 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그것은 사랑 가운데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역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아니 적어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또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써의 행위를 성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 에스겔 45: 9, 공동번역

바로 권력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일인 동시에 갇히고 한 맺힌 이들의 목소리를 포악스럽게 짓누르고 한맺힌 소리의 뜻을 왜곡시켜 겁탈하려는 통치자들을 바르게 세워 주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이 그리운 일요일 아침입니다.

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