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수염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2

1. 그의 수염에 대하여

조르즈~1

그는 아비의 일을 도왔다. 맏아들이었던 사내는 아비를 돕고 그 가업을 잇는 일에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시골 마을의 목수노릇이 다 그렇듯 넉넉한 부를 누릴 만한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은 꾸준하였으므로 삶이 궁핍하지는 아니하였다. 놀고먹는 땅 부자나 침략군의 앞잡이 노릇으로 떵떵거리는 권세가들에 비하면 하챦았으나 결코 기죽지 않을 수공업자로서의 아비의 직업에 그는 늘 당당하였다. 장인(匠人)으로서의 자부도 남 못지 않았다.

실내 가구라야 고작 돗자리 하나와 땅바닥에 놓인 방석 몇 개, 두어 벌씩 식구들의 옷가지를 가지런히 챙겨넣은 날렵한 채색무늬로 조금은 가벼운 느낌의 나무 옷장, 사내의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투박한 점토 화병 두어 개가 눈에 띄는 침실이자 부엌, 아니 작업장이기도 한 나사렛의 오두막은 사내가 평생 가져 본 단 하나의 집이었다. 온통 돌쩌귀 울퉁불퉁한 오솔길도 사내에겐 추억이었다. 깡촌이었던 사내의 고향 나사렛은 그의 추억보다 더욱 질기게 그를 따라 다녔다. 그는 “나사렛 예수”로 불리었으므로.

조숙하였던 사내는 열 살 무렵부터 그가 고향을 떠나 떠돌 것을 예견하였다. 끝내 사내는 아비의 가업을 잇지 못하였다. 그는 이미 다른 세상 사람이라는 미치도록 큰 꿈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마침내 사내의 꿈이 그의 삶을 이끌고 갔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고향을 등진 사내는 갈릴리 호수가 바람맞으며 집 없이 떠돌았다. 때론 홀로 그 호숫가를 배회하기도 하였고 이따금은 수많은 군중이 그를 따르기도 했으며, 그와 함께 떠돌기로 작정한 몇몇 수행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날밤을 세우기도 하였다. 떠돌이였던 사내의 일행들은 먹고 마시고 하늘나라 이야기 곧 딴 세상이야기를 즐겨 떠들곤 하였는데 그것은 사내가 죽음에 이르게되는 빌미가 되었다. 사내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그는 그의 말과 행위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예수” –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서른 세 살 사내의 처음 초상화엔 수염이 없었다. 셈족 특유의 털도 서른 셋 젊음에는 어울리지 않았을 듯 싶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거룩”이란 이름으로 그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 구렛나루가 덧붙여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수염은 길어만 갔다. 짙고 긴 수염은 시퍼런 젊음을 어둡게 가리며 보다 거룩하게 길어갔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초상속에서 사람이 아닌 신의 얼굴이 되어갔다.

내가 그의 수염에 이리 매달리는 까닭은 거룩하게 거룩하게 박제된 초상속 그의 길고 탐스런 수염탓에 신음하는 그의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왕실 전용 이발소에서 잘 다듬고 향수까지 칙칙 뿌린 듯한 그의 초상속 수염이 대체 나사렛 촌사람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집을 나와 그가 줄곧 헤매던 갈릴리호수 갯 냄새 배인 수염이 어찌 그리 고울 수 있겠는가? 갈릴리 촌놈들 한 떼 거느리고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그가 성문앞 이발소에 들려 분장이라도 하였단 말인가? 그렇다. 수천금 장식장 속에 고이 모셔둘 거룩한 잔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숨이 코 끝에 달려 허덕이는 내 영혼과 이 땅의 삶, 나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고뇌하는 이웃에게 한 모금 물 쏟아 부을 쪽박을 찾아 내는 일, 그것은 갈릴리 호수가 거친 촌사람속에서 신바람나게 일하며 즐겨 하늘나라 이야기하던 예수의 모습을 찾아 내는 일이다.

긴네롯호수, 게네사렛호수, 디베랴(티베리아스)호수등으로 불리는 갈릴리호수는 동서 7마일, 남북15마일에 이르는 가히 바다같은 호수다. 최고 수심이 150야드나 되는 깊은 호수는 짠 맛나는 담수이어서 정어리, 자리돔, 자바리등의 바닷고기와 메기 돌잉어등의 민물고기가 공생하는 풍부한 어장이다. 겨울 평균기온이 화씨 60도 정도일 만큼 온화한 기후는 호수면을 평온케 하다가도 이따금 요르단 침하지대에서 불어오는 돌풍에 미친 듯 요동치기도 하는 바다, 그 호수가를 약간의 소금기 엉기고 비린내 밴 수염 날리며 떠돌던 예수를 찾아 내는 길을 떠난다.

“조심스럽게 예수의 행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특징적인 것은 귀신추방, 안식일 금기의 파괴, 정결법의 침범, 유대인의 율법성에 대한 논쟁, 세리나 창기들과 같은 소외된 사람들과의 연대, 아이들과 부인들에 대한 관심 등이다. 또한 예수는 세례자 요한같은 고행주의자가 아니라 먹기를 탐하고 약간의 술도 마셨다는 것이 인정된다. 이에 더해서 그는 작은 추종자들의 무리를 모았다는 사실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적 예수 곧 이 땅을 살았던 예수의 모습을 찾는 일은 공허하다고 설파한 당대의 뛰어 난 신학자 불트만의 말이다. “성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케리그마의 집산”이란 불트만의 어려운 정의을 쉬운 말로 쓰면 “성서와 교회는 오직 거룩한 수염이 달린 예수만 말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 불트만이 그려 본 실제 예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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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나는 갈릴리 호수가 비린 바람 맞으며, 가끔은 씻지도 않은 손으로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함께 먹고 마시다 턱수염에 손닦는 예수를 찾아 나서련다. “그이는 자신을 밥이라고 했어요. 먹히는 밥 말이예요. 호구요. 호구. 우리에게 먹힐 밥이라고 했다니까요.” 그렇게 증언하는 그와 함께 했던 갈릴리 무리들을 찾아 나선다.

나는 그들을 만나기 전 먼저 해야할 일이 있다. 거친 수염으로 일하던 예수가 어떻게 거룩한 수염으로 제사상에 앉아만 있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보는 일이다. 그래야만 예수와 함께 떠돌던 그 갈릴리 촌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들어가는 글>

예수 – 제가 글을 깨우치기 전에 만난 이름입니다. 성장하면서 십대 후반까지 제 주된 놀이터는 교회 앞마당이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에 전혀 새로운 모습의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십대 중반에 평생 그를 쫓기로 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고 이르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를 쫓기엔 이젠 나이가 너무 들었습니다.

제 나이가 너무 젊었을 때부터 늙은 이 순간까지 여전히 예수는 제 삶의 주된 화두였습니다.

올해 정초에 문득 든 생각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간 머리글을 제대로 얹힐 날이 있기를 바라면서… 제가 이 글을 연재하는 뜻입니다.

크게 이야기를 셋으로 나누려 합니다.

머리로 만난 예수 이야기(밥이 된 사내 이야기), 가슴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신이 된 사내 이야기), 사람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부활한 사내 이야기)

그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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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된 사내 이야기 – 1

세 개의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자.

첫 번째 이야기.

<본디오 빌라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께 문안드립니다.

최근에 제가 직접 알아낸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심 때문에 자기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잔인한 심판을 가했습니다. 그 조상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늘로부터 거룩한 존재를 내려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왕이라 불려 마땅하며, 하나님은 그를 처녀의 몸을 통해 이 땅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유대지방에 나타난 것은 제가 그곳에 총독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주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해주고,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고, 악한 영을 쫓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바람에게 명령을 내리고, 물결이 이는 바다위를 맨땅을 걷듯 걸어 다니며, 그외의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에 사로잡힌 대제사장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체포하여 나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덧붙여가면서 그가 마술사(사기꾼)이며, 자신들의 율법을 위반했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고소가 사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는 병사들을 시켜 그에게 채찍질을 가한 뒤에, 그를 유대인들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는 그 무덤에 파수꾼을 세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제 휘하의 군사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을 때 다시살아 났습니다.

그런데 사악함에 이성이 마비된 유대인들은 저의 군사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하시오” 병사들은 돈을 받긴 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그가 살아났고, 자신들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으며, 자신들이 유대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까지 증언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보고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을 왜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혹여라도 폐하께서 유대인들의 거짓말을 신뢰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이른바 빌라도문헌(Pilatusliteratur)으로 외경(外經)인 베드로행전과 바울행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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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한편 바로 이 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제18권 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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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이스라엘 북동쪽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약 2000년 된 유골은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에 같은 십자가 처형을 받았던 ‘여호하난’이라는 청년의 것으로 밝혀졌다는데 복숭아뼈 부근에 박혀 있던 쇠못을 가족들이 빼어내질 못해 그냥 그대로 안장한 듯. 박아 놓은 십자가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끝을 구부려논 못이 복숭아뼈에 그대로 박혀있는 참혹한 모습.>

 

 

세 번째 이야기

<1968년 6월에 지금까지 발견된 것중 유일하게 십자가에 달려죽은 유골이 북동 예루살렘 지역 나불로스도로 바로 서쪽의 기브앗 하 미브타르에 있는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모두 서른 다섯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중 남자가 11명, 여자가 12명, 어린아이의 것이 12명이었다. 아이들은 생후 6개월에서 여덟 살까지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굶주려 죽었고, 어른들은 불에 타 죽었거나 철퇴 같은 것에 맞아 죽었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흔적이 드러났다. 그런데 하나의 유골은 나이 스물 넷에서 스물 여덟 사이로 추정되며 키는 약 165cm정도인데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여호하난이다. 그러나 지금은 I/4A라고 불린다.

즉 무덤번호 I, 납골함 제 4번, 유골 A를 합친 고고학적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과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하사다 의과대학 교수들이 감정하고 다시 감정한 결과 십자가 처형방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팔은 못으로 박힌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가로 막대에 묶여 졌는데, 아마도 팔꿈치까지 가로 대 위로해서 뒤로 넘겨 팔을 묶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두 다리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의 양쪽 측면에 놓여졌는데, 별개의 못으로 각 발 뒤꿈치의 뼈를 기둥 측면에 박아 고정시켰다. 처형된 사람이 발을 비틀어 못에서 빼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올리브 나무로 된 작은 판이 못의 머리 부분과 발뒤꿈치 뼈 사이에 끼워졌다. >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된 사람의 유골 발굴 이야기를 하였다.

빌라도의 편지는 대략 서기 100년 전후에 나온 문서들에 기록된 것이고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서기 93년이나 94년에 기록된 것들이다. 성서에 나오는 이른바 바울문서들이 대략 서기 5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므로 약 반세기 뒤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나마 빌라도의 편지와 요세프스의 유대고대사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기록은 사실 이즈음 대다수의 학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하면 그 두가지의 기사는 후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첨가 삽입하거나 수정하였다는 말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경건한 정통 보수 예수쟁이 양반 한마디 할 것이다. “거룩한 성서의 기록을 나두고 왠 쓸데없는 이야길… 쯧쯧쯧…”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나는 이제부터 성서를 말하고자 함이니. 또 한가지 예로 든 것은 십자가에 처형된 유골이야기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한꺼번에 많게는 이천 명 정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단 한 구의 유골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역사속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다가 죽은 예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뒤로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죽었을까?

엄숙한 죽음, 그것도 예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우스개 소리 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그냥 머리속에 스쳐감으로 쓰는 것이니, 또한 삶과 죽음에 웃음이 좀 있어야 넉넉하지 않겠는가?

오래 전 일이다. 터놓고 지내는 이 하나가 어느 날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김형, 예수가 왜 죽었는지 아시오?” 이럴 때 해답은 간단 명료하지. “그야, 나와 당신을 위해서지” 이 양반 껄걸 웃으며 “아니야. 목사님들 밥 먹여 살려 주시려구 죽으셨데” 너무 썰렁했나. 나는 많이도 웃었구만.

자 우스개 소리 접고, 내가 풀어 가는 예수의 죽음 아니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야기인데 제목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붙인다. 이 이야기는 성서를 교과서로 하고 약간의 신학서적들을 참고서로 하여 내 작은 상상력도 조금 붙이고 하여 해 보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