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유 – 약속 2

(당신의 천국 – 일곱번 째 이야기)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 5-6)

백성들은 일제히 “아훼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출애굽기 19:8)

구약 성서 전체의 내용을 정말 짧게 요약한다면 위에 인용한 두 성경 구절이 될 것입니다. 

야훼 신과 히브리 민족간에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잘 이행되던 때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 히브리족들이 겪는 일들과 그 겪고 경험한  일들에 대해 어떻게 고백했느냐에 대한 기록이 바로 구약 성서입니다. 

아무튼 노예 처지에서 이즈음 아이들 말로 하자면 꿈도 없이 개고생하던 히브리족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모세의 말을 믿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이후 사십년 동안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비록 모세가 대행을 했을망정 이들을 다스린 이는 야훼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 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제일 마지막인 신명기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두 번 다시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야훼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사귀는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  모세가 야훼의 사명을 띠고 에집트 땅으로 가서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온 땅에 행한 것과 같은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한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처럼 강한 손으로 그토록 크고 두려운 일을 온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이루어 보인 사람은 다시 없었다.”

모세는 곧 야훼 하나님의 대행자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애굽 탈출 후 석달 째 되는 초하룻날, 탈출무리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 민족간에 계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른바 율법이라는 약속이 신과 인간들 사이에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3,500 여년이 지난 지금, 오늘 여기(지구상 어디에 있건간에 )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연관되는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물론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고 믿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거나 또는 지금 오늘이 천국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거나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분이라면 분명 연관이 되어진 약속입니다. 상관없는 분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부분은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다름의 차이입니다. – 요거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 고딕처리합니다. 따로 상당 부분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자! 간단하게 요약하면 “개고생하던 너희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 세상 천지에서 제일 잘 살고 멋진 무리로 만들어 줄려고  하는데… 그 곳으로 데려가기는  데려가는데 그렇게 될려면 요것들은 나하고 약속해야 되거던…. 이제 어쩔래?”하고 묻는 신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말이지요. “당근이지요. 그걸우리들이 왜 약속하지 않겠어요? 손가락걸고 약속할께요!”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약속들을 했을까요? 바로 모세 오경이라고 일컬는 성경의 다섯 책 가운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네 권의 책들이 바로 그 약속들에 대한 기록이랍니다. 한번들 시간내서 읽어들 보시길 권합니다. 천국같은 삶을 살려거나 죽어 천국을 가려면 말입니다.(필요 충분조건은 아니랍니다. 꼭 읽어야만 된다는 조건이 아니라는 말씀)) 

저는 그 약속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왜 그런 약속을 해야했는지라는 원인, 그리고 그 약속들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진전시키기 전에 단 한분이라도 읽는 이들을 위해 권유와 당부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읽는 이들의 시간과 생각을 절약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남의 시간 도둑놈이 되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왈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어지는 제 글을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교육되어지고 믿는 환경에서 그렇게 믿는 분들은 그렇게 믿다가 믿는 천국으로 가시는 것이 훨씬 편하고 바람직하다는 제 생각 때문입니다. 

성서의 무오성(성서는 한 점도 오류가 없다는 믿음), 문자적 영감(성서의 문자 하나 하나 모두가 신이 주신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믿음)에서부터 모세 오경의 모세 저작설, 더 크게 나가자면 동정녀 탄생, 예수의 기적, 육체의 부활 등등을 문자 그대로 믿는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 보다는 그 믿음대로 믿고 기쁨으로 사시는 것이 천국에 가까울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믿기는 하는데 죽어 가는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믿는 구원의 확신, 나아가 오늘 하루 사는 기쁨이 없는 분들이시라면 조금 거슬리더라도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시기를 권유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바로 누군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오늘 하루 누리는 참 기쁨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하고자 함이요 나아가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간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 기쁨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리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모세오경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세오경을 모세가 썻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애둘러 드린 것입니다. 복음주의니 근본주의니 하는 여러 드릴 말씀은 차고 넘치지만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하도록 하고요, 모세오경은 대략 기원전 7-8세기 경에 쓰여진 것이라는 게 학문적인 믿음이랍니다. 

애굽탈출이 기원전 15세기 경 정도였으니 대략 사건이 일어난 지 칠, 팔백년 이 지난 후 입에서 전해지던 이야기들을 모아 만들어진 책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썻고, 언제 썻느냐를 알아야하는 까닭은 바로 “약속”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을 위해서랍니다. 

오늘 이야기를 대충 끝내려다가 문득 제 머리를 치는 생각 하나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2007년 남북대화 정상 대화록 사건입니다. 이른바 NLL 사건입니다.(여기서부터는 안 읽어도 제 이야기의 주제를 아는데 아무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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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년 전에 있었던 기록물에 대한 사건입니다. 

혹시 지금 제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대화록 전문을 읽어 보신 분들이 계시는지요? 물론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다 읽어 보았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읽었답니다. (대화록 전문보기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100816

처음엔 그냥 죽 한번 읽었는데 약 한시간 이십 분 정도가 걸렸고요. 두번 째는 찬찬히 시간 따지지 않고 노무현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읽어 보았답니다. 

읽고 난 후의 제 생각이랍니다. 두 양반 모두 한 시대를 이끌만한 분들이었다는 생각, 노무현 대통령이 좀 더 준비를 했었고 뛰어났었다는 생각이었고요. 왈  NLL 포기라던지, 굴욕이라던지 하는 한국내 일부 보수 언론들의 보도나 새누리당 등의 주장등은 참 터무니 없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마구 밀어 붙일까요? 

딴 거 없답니다. 다 까서 발겨도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너나없이 먹고 살기 바쁜데 한 두시간 동안 꼼작않고 앉아서 그거 읽을 사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설혹 읽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두가지 부류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두가지 부류란 바로 어차피 내 편이 될 수 없는 사람들과 내 편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인데요. 진실을 아는 두 부류 가운데 어차피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은 소수라는 것이고요, 진실을 알아도 내 편을 벗어나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알아보았자 그 뿐이라는 자신감에서 참 우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요. 

이쯤 역사이래 가장 많이 찍고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고, 팔린 부수에 비해 가장 안읽는 책도 성경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면서…뭐 이런 이야기가 제 이야기의 본류의 아니니 대충 접고요. 

모세오경에서 시작되는 약속 가운데 이런 류의 사건에 대한 경고도 있기에 드려보는 이야기랍니다. 

자! 그 약속들에 대한 이야기 앞으로 대충 서너번에 걸쳐 이어집니다.

악몽 – 약속-1

(당신의 천국 – 여섯번 째 이야기)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출애굽기 3:7-8. 공동번역) 

아직도 징병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으로 자란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군복무를 마치게 마련입니다. 군복무에 적응할 수 없을 정도의 심신허약자이거나 사회부적응 경험이나 판단으로 징역형을 받았거나  국가가 면제하는 조치에 해당되는 자가 아닌 정상적인 젊은이라면 누구나 일정기간의 군복무를 해야만 하지요. 물론 군복무를 직업으로 선택할 수도 있지요. 

근데 내노라하고 이름이 알려진 이들 가운데  제법 많은 이들이 군복무 경험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들을 종종 듣는답니다. 왈 특권층이지요. 아마 그런 사람들은 이런 꿈을 꾸어 본 경험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꿈이냐고요? 

10-7

징병제도 아래서 군대를 다녀 온 이들이 꾸는 아주 전형적인 나쁜 꿈 바로 악몽은 군대 다시 끌려가는 꿈이랍다. 분명히 제대를 했는데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하여 다시 새롭게 군복무를 해야만하는 꿈을 꾸는 것이지요. 이런 꿈을 꾸다가 깨고나면 정말 기분 더럽답니다. 

이런 기분을 꾸어 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뭐 요즘에야 군 복무 기간이 짧으니, 우리 때와 비하면 두 번 갔다와도 된다고 한다면 아마 지금 군대 복무하는 젊은이들에게 매맞기 십상일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의 만기는 약 34개월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대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은 당시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군생활을 하는 말딴 졸병들이 즐겨 쓰던 말 가운데 “뭣으로 뭉개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는 말이 있답니다.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살아서 분명히 그 끝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란 제대라고하는 군복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게 종말의 역사관에 대한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 제대를 했는데 또 다시 군에 끌려가는 꿈을 꾸다니!  개뿔! 무슨 종말! 

악몽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서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3500여년전 이집트로 돌아가 봅니다. 

출애굽기 3장 첫 부분을 보면 야훼신이 모세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야훼신을 찾은 것이 아니고 야훼신이 모세를 먼저 부른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바로 출애굽기 3장 7, 8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너희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 슬픔, 두려움 등등 사람으로서 피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겪고 있는 모습을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구원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내주마라는 말이지요. 

약속입니다. 

다시 군대이야기. 

징병제도 아래서 징집기간이 정해지지 않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일테면 일단 징집이 되면 죽기 전엔 나올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징병제가  제대로 실시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징병제는 끝이 보이는 약속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500여년 전 모세에게 야훼가 한 약속은 분명 징집기간을 정해 놓은 약속이었답니다.  바로 가나안이라고 하는 확정된 땅을 약속했다는 말입니다. 넉넉잡아 한 달이나 달 포 반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약속이었다는 말씀이지요. 

그 약속을 믿고 애굽의 노예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 보장될 것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모세와 히브리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나섰지요. 

그리고 배가 고팠고, 맛난 것도 먹고 싶었고, 목도 말랐었던 가운데  약속의 신이 이런 아픔과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는 경험을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비록 달 포를 넘어 삼개월이 되었을 무렵 “이제부터 시작하는 계약서를 쓰자”라는 야훼신의 요구(십계명 사건)를 무리(민족)들이 이것만이  오직 살 길이라고 고백하는 것도 이제 바로 도달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 포를 넘어 일년이 지나 사십년이 흐른 후 다달은 땅, 가나안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답니다. 

다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고대하며 걸어 온 사십년의 세월과 그 시간 속에서 맺었던 약속들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지요. 

이번 한 주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평등 – 신(神)의 무상급식법-4

(당신의 천국-  다섯 번 째 이야기)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 3-4, 공동번역) 

탈애굽한지 달 반이 지나서부터 탈출 노예부족인 히브리족들은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메추라기 고기가 곁들여진 만나로 차려진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밥상 메뉴는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출 16:35)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는 누구도 굶어 죽지 않도록 먹을 것을 거저 주는 나라라고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거저 주되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절대 공평한 밥상에 둘러 앉는다는 것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히브리족들에게 보여주신 천국 곧 신의 나라 모습입니다. 

equality-and-diversity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의 수는 당시 군인이 되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수만 약 60만이 넘는 무리였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민수기 1:46) 민수기의 기록에 따르면 12지파별로 수를 셉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11지파의 군대 종사 가능한 인력들의 수를 세고 대표를 뽑습니다. 

무리들 가운데 총 우두머리인 모세와 부장이자 최고 참모이자 대변인이었던 아론을 위시한 지도부가 있었고 그 아래로 12지파로 나누인 지파 지대장들과 참모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분명 야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권력 소유의 차이가 존재했고, 지위의 차이가 존재했고, 권력 소유와 지위 차이에 따른 해야 할 일들의 명확한 규정과 책임들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먹는 것에 관한한 누구도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는 절대 평등의 밥상을 나누었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음식의 질 뿐만 아니라 먹는 양에 이르기까지 하루 하루 각자가 배부를 정도까지만 똑같이 먹을 수 있는 무상급식을 신이 베풀었다는 애굽탈출 노예들의 고백이 바로 성서의 기록입니다. 

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두번 째 모습은 바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밥상입니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이런 아주 공평한 밥상의 모습을 두군데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나 이야기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에서 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행전 2장 44-46, 공동번역) 

여기에서 우리가 아주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 바로 출애굽기 16장 35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다.” 

끝나는 기간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기간이 사십년이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 이후에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의 모습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 곧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먹고 나누는 모습도 한정적인 기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내산 십계명과 광야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신과 히브리족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들과 신약시대 초대교회 신도들의 공동생활이 한세대나 두세대에 걸쳐 철저히 믿고 지켜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거니와 저 역시 그랬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일정 기간이 지나서 사람사는 사회에서 이런 절대 평등의 모습은 사라졌다는 성서의 기록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이 두가지 경우의 절대평등의 모습 이외에도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가운데는 유사 절대평등의 노력들이나 시도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어떤 노력과 시도들도 한세대나 두세대를 넘어선 경우는 없습니다. 

이 절대평등의 역사적 경험은  종말론적 삶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기에서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종말론적 삶의 공동체가 무엇일까? 

우리들이 나누어야 할 다음 이야기입니다. 

신의 무상급식법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밥상을 지배하는 법입니다. 바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짜와 절대평등의 밥상법이랍니다. 

이제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믿음 – 신의 무상급식법 -3

(당신의 천국 – 네번 째 이야기)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성서를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 안병무 

수년 전에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생각납니다. 호주에서 삼십여년 이민 목회를 담당하시다가 이제는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흰 눈이 내리는 계절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에 감사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시월의 주일 아침, 창밖을 내다 보다가 문득 떠오른 카드에 대한 추억입니다. 

가을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들의 천국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 이왕이면 꼭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앙, 종교라고해도 좋겠습니다. 글을 쓰는 저나 단 한 분이라도 제 글을 읽는 누군가나 서로 불편한 마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대해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나 “맞다, 틀리다”의 잣대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제입니다. 다만 “같다, 다르다” 라는 관점으로 읽어 주시면 편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요. 

일테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탈애굽을 한 일단의 히브리 노예족들이 광야로 나와서 한달 반 쯤 이후에 터져나온 불평과 불만들을 출애굽기와 민수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12, 17:1-7, 민 11:1-6, 14:1-3 등등) 

불평과 불만의 주된 내용들은 “배고프다, 고기 먹고 싶다, 목마르니 물 달라” 라는 사람들이 살기 위한 아주 기본적 욕구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훼 신은 만나와 메추라기와 므리바 반석의 물로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 성서의 기록입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을 보면서 해석하고, 따지고, 묻는 사람들의 성향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믿음, 신앙, 종교 등에 대한 태도들 역시 비슷할 것입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또는 종교 무관심자론자들은 별 뜻없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모양이라는 게 다 저마다 다른 법이니, 관심있는 이들을 이렇게 세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는 것이지요. 

Point of View

첫째는 있는대로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겠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다 주시고, 반석에서 때아닌 생수를 쏟아내 주신 분은 야훼 하나님이시고, 성서의 기록은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동시에 오늘날 자신들이 신뢰하는 과학이라는 것으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두번 째는 그런 기록들은 다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테면 당시 탈출 노예들의 수를 다 먹일만한 메추라기떼가 날아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학적 이론을 들이대거나 지금도 시내광야에 가면 연지벌레로 인해 생기는 만나와 똑같은 먹을 거리를 볼 수 있음으로 만나란 단지 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 째로는 신앙적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현상이던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던 그것의 중요성 곧 역사적 사실 여부의 중요성 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경험을 어떻게 고백했는냐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그 고백을 믿고 공유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서로 다른 입장은 비단 종교적 관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문득 재미난 예가 생각납니다. 나이들수록 점점 더 확고해 지는 생각 가운데 하나가  한민족은 참 종교적인 인자의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한국인의 종교성을 떠올린 것이지요. 

지난해 12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의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후보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일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이에 토론 상대인 문재인후보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세금은 더 걷지 않겠다면서 돈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근혜후보가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대통령 되려고 한다.” 

그리고 박근혜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무리들에게 야훼는 “내가 준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모세를 비롯한 지도부나 불평을 늘어놓던 무리들 누구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내린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며 야훼가 일하셨다고 믿습니다.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행히도 박근혜가 신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왜?”라는 물음이 필요치 않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신처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말한(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나,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이나 저는 종교적 신앙행위로 해석해 본답니다. 

신앙 또는 믿음에 대한 세 부류의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쯤 제 믿음의 방법과 제가 글을 쓰는 관점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의 행위와 고백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고, 이후로도 만날 신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 연재를 이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공짜- 신(神)의 무상급식법-2

(당신의 천국- 세번 째 이야기) 

야훼의 명령이니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여라. 한 사람에 한 오멜씩 식구 수대로 거두어 들이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다. 많이 거두어 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덜 거두어 드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결국 저마다 먹을 만큼씩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출애굽기 16장 16-19절, 공동번역) 

제 나이 어렸을 때의 기억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입학 전후 무렵일 터이니 1950년대 말에서 1960대 초 쯤의 제 기억일 것입니다. 친가보다는 외가 친적들이 많았답니다.  특히  한남동 토박이 외할아버지의 권위가 대단한 시절이어서 명절이면 외가에 모인 친척들이 수십명이 넘었답니다. 

제가 한 살 터울 외사촌 형과 막걸리에 취해 어른들의 놀림을 받던 시절이었답니다. 

잔치상에 한 잔 얼근해 지신 어른들의 이야기는 한 곳으로 모이곤 했답니다. 대청 마루에 진을 치셨던 외할아버지 항렬의 할아버지들이나 건너방의 외삼촌들과 큰 형님들 사랑채 차지였던 아버지나 이모부들 예외가 없었답니다. 

이야기의 꼬리가 물려 이어지던 이야기는 바로 6.25 전쟁 때 이야기였답니다. 

6.25a

할아버지들의 피난 이야기나, 큰 외삼촌의 국민방위군 시절 이야기, 아버지와 둘째 외삼촌의 전쟁 이야기, 막내 삼촌과 큰 형님의 피난 이야기 등등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리 만큼 듣고 또 들은 이야기들이랍니다. 

외가 일가들이(당시 용산 미군 부대에서 일하시던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들도 한남동 외가의 일원이었답니다.) 피난 행렬에 합류한 것은 한강다리가 끊어진 이후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한강을 접하고 있는 한남동의 특성상 배를 타기가 쉬었기에 한강을 쉽게 건넜다고 합니다. 

외가의 피난 행렬이 천안을 지날 무렵 이고 지고 온 먹을 거리들이 동이 났고, 가락지들을 팔아야 하는 끼니를 때우는 처지들이 되었답니다. 그리고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지게 되고 부산에서 다시 합류하여 한남동으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그 긴 소설들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국민방위군_징집자들

제 외가의 피난 이야기를 돌아보면 급하게 짐을 꾸려 떠났지만 서울서 천안까지는 먹을 만큼의 양식을 이거나 지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양식이면 바로 돌아 올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들도 조금은 했을 것이고, 당시 지니고 떠날 양식의 전부가 그 것 뿐이었을 수도 있겠고, 운반 수단상 그 이상은 짊어지거나 이고 갈 수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겝니다. 

그 피난 대열에서 외가의 모든 식구들은 무사했고, 다시 다 한남동으로 모였다고 합니다. 다만  저 보다 일곱 살 위인 누님이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와  제일 거지 차림으로 해골만 남은 모습으로 돌아 온 가족은 국가에서 불러서 동원되어 국민방위병이 되었던 큰 외삼촌이었다는 이야기가 아직 생생하답니다. 

자! 3500여년 전으로 중동의 시내 광야로 돌아가봅니다. 

탈애굽을 한 백만(사실 이 숫자는 아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에 이르는 노예 무리들이 강을 건너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이들이 애초 목적지로 정한 가나안은 무리들이  약 한달 정도 걸으면 도착 가능한 거리였습니다. 적어도 한 달 정도 먹을 양식은 탈애굽을 할 때  너나없이 챙겨왔을 것입니다.  한 달 반쯤 지났을 때 굶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무리의 우두머리인 모세를 비롯한 왈 지도부에게 원망의 소리를 드높혔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먹는 것으로 걱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출애굽기 16장의 기록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노예들이 원망하고 항의하는 대상은 모세와 지도부였습니다.(출애굽기 16장 3절) 모세와 지도부가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대책 마련을 하고 어쩌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무리들의 원망에 바로 야훼 신이 개입해서 해결책을 내어 놓습니다.(출애굽기 16장 4절) (모세와 지도부는 허당이었다는 것인데요. 요거 나중에 또 이야기 합니다.) 

“내가 먹을 것 준다”는 약속입니다. 

야훼라는 신이 개입하는 세상, 곧 야훼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본은 “먹을 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나라는 음식이건 햄버거건 육개장이건 아니, 하다못해 풀죽이건 굶어죽이지는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성서 이 부분에 대한 뛰어난 주석들도 많고, 오늘도 많은 설교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남기지만 신의 선언은 “내가 다스리는 한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서 이야기에서 실락원 이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하나님의 나라 바로 천국의 모습입니다.  제가 죽음 이후에 만날 천국의 첫 모습인 동시에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첫 번째 동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공짜로 먹을 거리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확대사”야말로 인류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대사가 인류 역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  곧 절대 기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10억에 가깝다고 하지만 그 퍼센테이지는 인류 역사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줄어왔습니다. 

성서 이야기에 나오는 신(神)의 무상급식법 제 일장 제일조는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것입니다.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한달 정도 걸릴 거리를 사십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히브리족의 숱한 사연들 처럼 아주 간단할 것 같은 “누구라도 굶어 죽지 않을 먹을 거리는 공짜로 준다.”는 신의 선언은 ‘하나의 조건’으로 하여 35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미완성의 선언으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답니다. 

하늘나라의 두번 째 모습,  바로 평등의 문제랍니다.

만나 – 신(神)의 무상급식법-1

(당신의 천국 – 두번째 이야기)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않은지 시험해 보리라.”(출애굽기16장 4절, 공동번역)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이야기는 대충 기원전 1500년경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조선시대 쯤일 것입니다. 인류의 발전과정으로 보면 아직 철기시대는 꿈도 꾸지 못한 청동기 시대쯤이 될 것입니다. 피라밋 제국인 이집트의 중간왕조 시대이니, 우리들이 아주 먼 서양역사로 생각하는 그리스 로마는 아직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동양으로치면 중국의 은 (殷)나라 시절쯤입니다. 은나라는 실제로 존재했다는 역사학자들의 이야기이고 보면 중국 역시 그 때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때이랍니다. 

인류의 역사시대가 막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라는 말씀입니다. 

시각을 잠깐 돌려 3500여년 후의 한국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1세기 고도의 문명을 구가하는 시대에  단지 7년전 있었던 기록에 대해 진실여부를 따지고 존재 여부를 따지는 2013년 10월 현재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신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이시라면 한번 눈감고 잠시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 7년도 지나지 않는 문서의 내용과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3500년의 이야기들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바로 그 지점에서 제 이야기는 시작된답니다. 

“진짜 일어나고 있었던 사실”과 “믿고 이야기(고백)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관없음은 결코 옳고 그름의 싸움으로 딱 잘라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진실입니다. 

일테면 진짜 일어 났었고, 있었던 사실이라도 그 사실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에 따라 그 내용의 진실이 달리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들이그렇게 믿거나 역사가 그랬다고 기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 이집트 노예 무리들이었던 히브리족이 출애굽을 합니다.  출애굽이라지만 사실은  탈애굽입니다. 수십만 거의 백만에 육박하거나 그 수를 넘었다는 한 무리들이 애굽을 탈출한 것이지요. 

그들의 목적지는 분명했습니다. 가나안이었습니다. 야훼라는 신(神)의 계시를 받아 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모세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신과의 직통대화가 가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과 직통대화가 가능한 수많은 인물들이 전 세계에 널려 있지만, 모세가 누렸던 특권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가 없을겝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정상인의 걸음걸이로 약 보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아! 물론 저도 걸어보진 못했지만 그냥 남들 이야기랍니다.) 백만명 정도가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건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는 시간이랍니다. 여러가지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축하연

제가 한국군대 생활을 한게 1970년 초중반 일인데요. 그 당시 육군 보병으로 100Km 완전군장 행군을 분기마다 했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령도 많이 피어서 다 하지는 않았답니다만.)  아마 대대별 시간 측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답니다. 그 때 우리부대 사단장님의 존함이 장태완장군님이었는데 전두환 반란 사건 이후  저는 그 분을 진짜 장군으로 생각하지만 제가 100Km 행군을 했을 당시의 장태완님은 제겐 미친 개또라이였답니다. 

아무튼 장장군님의 훈련 효과 때문이었던지 처음 100Km 행군에서 24시간 정도 걸렸던 대대행군 속도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스무시간 이내로 단축시켰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답니다. 

하물며 3500년전 백만명의 탈출행로에 있어서 모세와 그의 수족들이 자신들이 계획대로 된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가라! 모세!”라는 신의 명령으로 백만여명의 노예들의 탈출 대열에 선봉이 된 모세와 그의 측근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야훼를 믿는 마음으로”만 그 길을 떠났을까요? 거의 백만명에 달하는 노예들이 단 하나의 이견(異見)조차없이 보따리를 쌓았을까요? 

만나이야기는 애굽 탈출 후 약 한 달 반이 지난 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랍니다. 

자! 이쯤 아주 중요한 지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했던 탈출 노예들이 배고픔을 호소하고 그 호소를 신이 들어 응답했던 시점 말입니다. 탈출 후 한달 반 쯤 지난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걸릴 것이라고 오늘날 우리들이 예상할 수 있는 시간 약 한 달 전후고요. 

이야기의 진행상 최소 한 달 반 정도 탈출 무리들이 먹을 식량은 준비하고 떠난 일이라는 것 쯤은 상상이 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 한 달 반은 커녕 사십년이 지난 이후에야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이고요. 

탈출 후 약 한 달 보름 후 최소한 배고픔을 면할 정도의 먹을거리가 없었던 탈출 노예들인 히브리족에게 나타난 것이 바로 ‘만나’라고 하는 식사입니다. 

 

당신의 천국 -1

<세계사의 모든 새로운 단계는 옛 것들의 마지막 융성 이후에 나타났다. – Paul F. Knitter> 

2013년 10월 1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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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정부의 shutdown 소식과 한국의 국군의 날 퍼레이드 기사를 보다가 글 하나 써보자는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제 머리 속에 있는 세개의 서로 다른 생각들을 이야기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려합니다. 

<첫 번째 생각> 

ObamaCare라는 이름의 의료개혁안이 끝내 오늘 연방정부의 shutdown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서는 기초노령연금에 대한 정책 문제로 며칠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두 문제 모두 복지에 대한 또는 돈에 대한, 나아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최소한 서로 누리고 사는 하한선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사회복지나 평등에 대한 문제들이  감히 저처럼 소시민이 감놔라  배놔라 할 정도로 쉬운 것들이 아님은 잘 알고 있답니다.

 

단지, 복지와 평등의 문제를 제 알량한 수준에 맞게, 아니 제 수준의 이해 정도가 이런 것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한 번 정리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두 번 째 생각> 

여름 내내 글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할 만큼 답답한 시간들을 보냈답니다. 그래 모처럼 아내 치마 폭에 쌓여 교회 나들이도 다녔고, 모임들에도 참석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소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구순(九旬)을 넘기신 시아버님을 걱정하는 참 맘씨 고운 며느님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 머리 속에 맴맴거린답니다. 

“시아버님이 하늘나라 가셔야 하는데 천주교인이라….”

그날 이후 제 머리 속에 떠나지 않는 생각 하나가 바로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세번 째 생각> 

어느 날엔  앞으로 십년은 넉넉할 것 같고, 또 다른 날엔 바로 내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답니다. 

바로 제 부모님과 처부모님의 모습이랍니다. 

제가 네 분들에게 이즈음 웃으며 드리는 말씀 가운데 이런게 있답니다.

“이젠 몰라요. 진짜 몰라요. 누가 먼저인지는… 저까지요. (죽음은 그저 과정일 따름이예요. 우리 모두는 참 축복받은 편이잖아요.)” <괄호 안은 입밖에 못 내놓는 제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부모, 처부모 네분들의 성격과 특성들이 다르다보니 그 표현 방법들 역시 조금씩 다르답니다. 

아무튼 역사 이전이나 이후나 모든 생명체들이 피해 갈 수 없었던,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에 대한 생각이지요. 

이렇게 세가지의 다른 생각들이 마구 머리 속에 오고가는 시월 초하루에 “하늘나라 이야기”를 시작해 보렵니다. 

무릇 모든 생각들은 그 생각의 주체 곧 생각하는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 교육, 문화, 종교, 특히 인간관계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법이지요. 

그런 전제 아래 “하늘나라 이야기”를 풀어가는 제가 성서 이야기로 시작하는 점에 대해 넉넉한 이해를 부탁드린답니다. 

첫번 째 이야기 – 

하늘나라의 첫번 째 그림 –  “만나 이야기” 

역사 이야기가 먼저일겝니다.

예수쟁이들, 기독교인들, 믿음의 사람들, 천국에 속한 사람들 – 무어라고 당신이 불리우기를 원하시건 역사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이왕 알려면 바로 알아야겠고요. 두 가지를 함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랍니다. 

먼저 두 가지란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역사와 각자 믿고 있는 신에 대한 역사라는 관점입니다. 

뭐 어렵게 이야기하는 건 늘 질색인지라 제 이야기로 쉽게 말씀드리지요. 

기독교인인 한국계 미국 이민자인 제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역사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 미국, 기독교의 역사를 훅 한번 훑고 지나가는 일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첫번 째 그림에 대한 이야기입니. 먼저 성서를 보겠습니다. 

출애급기 16장과 민수기 11장 한번 읽고 다음 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좀 더 쉽게  제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겝니다.

-계속…

낙엽에

구월의 마지막 주일도 저뭅니다.

지난 유월 이래 긴 여름을 보내며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서서 뱅뱅 돌며 길을 찾노라 애쓰다, 끝내 어지러운 현기증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답니다. 

한 끼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어도 아직 하루 삶의 무게는 짊어져야만 하는 나이에 자꾸 그 짐의 무게가 버겁다는 생각과 이런 저런 연으로 이어진 이들의 똑같은 고민과 걱정들을 해결해 줄 능력의 부족, 아래로는 아직 짝짓지 못한 아이들의 미래와 위로는 돌아가야만 할 본향길이 썩 내키지 않으실 내 부모님들에 대한 연민, 오지랖이지만 육십여 년 나를 떠받쳐 주었던 역사의 바른 방향이라는 믿음들이 깡그리 무너져 버리는 현실들 – 그냥 아프기만 할 뿐 단 한 줄의 글조차 사치스럽던 2013년 여름이 낙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one leaf오늘 아침, 앞뜰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으음, 다음 주엔 낙엽을 쓸기 시작해야겠네.” 혼자소리를 하다가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랍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낙엽을 태우며”라는 어느 수필가의 글을 배울 무렵 제 맘에 있었던 기억이지요. 

1960년대, 집 뜰의 낙엽을 태우는 가을을 맞았던 서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수필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답니다. 

지금은 제게 집뜰의 낙엽이 그 옛날 수필가의 마음으로 다가오지만 말입니다. 

너무 큰 것 붙들지 않고, 하루 하루 숨쉬듯 작고 자연적인 것들부터 한걸음씩 이어가야겠습니다. 

낙엽이 주는 교훈일겝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는 인도의 신학자 S J Samartha 의 말로 2013년 제 여름의 고민들을 텁니다.

여유 – 그 사람 냄새

연휴 첫날 아침에 전혀 계획에 없던 얼굴을 만났습니다.

물론 저를 만나기 위해 그가 불쑥 찾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만든  14년 만의 계획 속에 제가 우연히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14년 만이라고.

 

그가 서부 어느 곳인가에서 살고 있고, 그를 만나려고 맘만 먹으면 대여섯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탓에 제 기억 속에 그는 대여섯 시간의 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14년이 흘렀다고 그가 말했답니다.

이제 손주가 셋, 곧 넷이 된다고 했답니다.

 

모처럼 그가 던진 메세지가  참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답니다.

평안함.

사람 냄새나는 평안함.

내 또래인 그의 몸에 배인 냄새였습니다.

 

강가를 거니며 그가 읊조린 노래가락입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를 “예순 즈음에”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는 그 이별 위에서 자유하는 진리를 툭 던지고 갔답니다.

“자비를 간구” 할 수 있는 바로 그 여유,

바로 그 진리 말입니다.

 

참 좋은 벗과 함께 했던 2013년 메모리얼 데이 연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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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철 들까?

이순(耳順) 나이에 이르르면 매사 넉넉히 듣는다던데, 쉽게 발끈하여 속내를 드러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性情)은  고칠 수 없는 병인듯 합니다. 어제, 오늘 아내의 이어지는 잔소리를 ‘허허’웃으며 감내하는 까닭은 제 고질병을 익히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위한답시고 올들어 몇 번 참석한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어느 해부터인가 제가 피하는 자리가 있답니다. 정치 이야기, 종교 또는 믿음 이야기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어야 하거나, 또는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저와 성향이 다른 이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때  애초 자리를 피하거니와, 마지못한 자리라도 슬그머니 피하곤 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올들어 몇 번 아내와 함께 참석했지만 그 때마다 후회를 안고 돌아 온 자리였답니다. 끝내 제 병이 도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연인즉  <‘하나님의 사람’과 ‘보통  나 같은 사람(제가 아니고  말을 하던 화자랍니다)’과는 확연한 어떤 차이가 있어서 비교 불가하고 그렇게 될 가능(하나님의 사람)이 ‘나같은 사람(화자)’에겐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만 제가 발끈해 버렸다는 이야기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분은 중절모가 정말 잘 어울리는 멋진 노년이시랍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기시고  칠순을 바라보시며 조곤조곤 삶을 즐기며 정리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썩 매료되는 멋진 양반이시랍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양반의 이야기 허리를 뚝 끊고 “그건 아니오!”라고 선언을 해 버렸으니 아내의 걱정이 이틀이나 이어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터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잔소리에 ‘허허’거리며 눙치는데는 내심 ‘내 고질병은 나름 옳은 구석이 있다’는 고집이 꽈리틀고 앉아있거니와  ‘요기서 밀리면 또 그 모임에 이끌려 나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을 피해 보자는 꼼수도 곁들여 있는 것이랍니다.

자! 이쯤 제 이야기입니다.

<역사 이래, 살다 죽은 또는 지금 살고 있는,  아니 앞으로 나올 세상 사람 누구나 다 100%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없고, 100% ‘평범한 사람’도 없다. 신 앞에서는…. 다만 1-99% 사이의 ‘하나님의 사람’, ‘평범한 사람’을 범위를 나누며 상대 우위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평범한 사람’을 쫙 줄 긋듯 가르는 것은 참 위험하다. (지배의 논리, 죄의 온상이 거기서 싹 트므로…)>

그렇게 운운 했던 것인데….

아무튼 아내의 이야기는  “니가 잘난 척”했다는 것인데 일견 수긍하는 부분도 있고, 그래 허허거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다 어제 바티칸 뉴스 하나에 오늘 제가 힘을 다시 얻어 “그려, 모임을 피할 까닭은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Francis 교황께서 미사를 통해 하신 말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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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를 제가 읽은 까닭은 <Confession is not like dry cleaners, but is encounter with Jesus (신앙고백 또는 고해란 세탁소에 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라는 기사 제목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 내용 가운데 하나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용기 나아가 기쁨으로 “죄인이라는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야한다고, 교황은 말했다.  “우리가 겸손하고 친절하며” 진실된 것을 “요구하시는 신 앞에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않된다.” (However, people must go before the Lord with courage, even joy, “with our truth of being sinners,” he said. “We must never disguise ourselves before God,” who “asks us to be humble and kind” and truthful.)>

결코 100%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용기, 그 안에서의 기쁨 – 바로 신앙이요, 믿음이지요.  역사이래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요. 단 하나 신과 신이였던 사내 빼고 말입니다.

거기 누구라도 사람이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걸 용인하거나 사칭한다면 그게 바로 죄요, 신에 대한 모독인 셈이지요.

그래 발끈했던 것이지만, 암튼 아내의 걱정을 듣는 한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은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