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 – 예언자 15

(당신의 천국 – 마흔 네 번 째 이야기)

‘너는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뽑아 놓고 버리겠느냐? ‘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너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되고,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 중략 –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와 준다. –이사야 41 : 9 -13, 공동번역 

신약은 구약을 전제로 하고 복음을 율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구약에 구현되어 있는 이 율법은 결코 구체적인 구약성서일 필요는 없다. 복음을 위한 선이해(先理解)가 구약에서 자라났지만, 신적 율법이 역사적으로 달리 구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선이해가 자라날 수 있다.  – 루돒프 불트만의 ‘신앙과 이해’에서 

종종 쓰거나 듣게 되는 말 가운데 “생각이 바뀌면 달라진다’는 말이 있지요. 똑같은 하루인데도 바라보는 생각을 바꾸어 보면 아주 다른 일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컬어 ‘발상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인류사에 있어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발상의 전환’의 상징인 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기원후 1473  – 1543)랍니다. 획기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지요. 바로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天動說)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地動說)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기원후 1564 – 1642)입니다.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정작 이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랍니다. 

갈릴레오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었지요.  그의 주장, 곧 “지구가 돈다”는 주장으로 교황청의 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요. 그 재판정에서 그는 그의 주장을 꺾습니다. “지구가 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을 나오다 한 말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이라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의 교황청만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을 정죄 했을까요? 개신교의 시조로 알려진 루터 역시 갈릴레오를 정죄하였답니다. 그가 갈릴레오를 정죄한 까닭은 교황청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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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갈릴레오는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된다고 말한 근거는 성서 여호수아 10장 13절에 있는 “ 그러자 원수들에게 복수하기를 마칠 때까지 해가 머물렀고 달이 멈추어 섰다.  – 중략 – 해는 중천에 멈추어 하루를 꼬박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 성서는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다 –이 그 정죄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지동설 곧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은 교황청 및 교회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었고, 중세 유럽을 무너뜨리고 르네쌍스 시대를  여는 인류사의 일대 전환의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세상을 주도해 오던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의 실세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근간을 흔드는 “이단”이었던 셈입니다. 

이쯤 우리들이 살고있는 2013년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지동설은 과학적 진리이지요. 그렇다고 중세의 교회가 걱정했던 신에 대한 믿음과 신앙이 사라지기는 커녕 야훼(여호와) 하나님의 세상은 더욱 넓어졌지요.  – 제가 오늘 처음으로 야훼(여호와)라는 표기를 했습니다. 요것도 기억해 두시기를- 

사람들의 생각이 커갈수록 더 큰 야훼 하나님 곧 본래적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쯤해서 제가 하고싶은 질문을 드립니다. 이사야서는 누가 썻을까요? 

혹시 제1이사야서,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들어보셨다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요? 

갈릴레오 이후로 성서의 무오설에 대해 마구 도전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은 18세기,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에서 300년 전의 일이랍니다. 

이사야서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랍니다. 18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그것에 대한 의문조차 없었거나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답니다. 18세기 말엽에 이사야서는 최소 두 명의 다른 사람이 쓴 책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 개의 다른 저자 그룹들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이사야서 66장 가운데 1장에서 39장까지를 제1 이사야, 40장에서 55장을 제2 이사야,  56장에서 66장까지를 제 3 이사야로 부르는 까닭입니다. 

그 이후로 이사야서 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18세기 이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또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성서무오설이 무너지고 다양한 성서 연구 방법론들이 나오고, 19세기 이후부터는 고고학의 자료들이 마구 발굴되면서 이제껏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오던 믿음들이 무너지거나 오히려 확고히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답니다. 

수년천 사람들이 믿어왔던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그가 일하시는 지경이 넓혀졌듯이, 성서 무오설이 무너지고 여러 연구 방법들로 인해 성서가 해부될수록 야훼 하나님으 역사와 그 지경이 또한 넓혀져 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시작으로하여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연구하고, 허와 실을 가려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히 그리 해야 할 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성서를 믿음의 눈으로 읽고자 하는 이들도 이런 흐름 또는 사조, 연구에 대해 귀를 활짝 열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렇게 열린 시각으로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면 더 큰 야훼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썻다. 그걸 의심하면 믿는 게 아니다.”라는 18세기 이전의 옛날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것을 믿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씀이고요, 저 위에서 제가 인용한 불트만의 말처럼 그 어떤 사람들의 경험들을 예로 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 구원에 대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메시아왕국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런 이해는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란 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곧 나나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지요. 그걸 깨우치기 위해 신이 내리는 기적들 역시 신이신 야훼 입장에서 보면 필요없는 일이지만 나나 당신의 입장 곧 사람에 입장에서는 때론 절실한 것이지요. 

성서를 합리적인 사고와 믿는 마음이라는 크게 열린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랍니다. 

이제 이사야의 메시아 복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산당(山堂)이 산당(産黨)? –예언자 14

(당신의 천국 – 마흔 세 번 째 이야기) 

오늘은 주일(일요일)입니다. 

이 날에 대한 의미와 뜻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일요일로 표시되는 날짜 색이 평일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자신들의 전통적 달력이나 일력을 사용하는 민족 이외에는 21세기에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일요일이라고 표시된 달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않아도, 오늘날 대부분 국가들에서 일요일은 쉬는 날입니다. 천지창조니 유대교니 기독교니 그런 것을 따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쉬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런 오늘날 지키는 일요일 관습을 따져 올라가 보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만나게 되고 더 올라가면 창조신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전통과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고 이어 나가더라도 “일요일 하루는 쉬는 날”이라는 현실을 맞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요일조차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지구상에는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요일은 쉬는날”이라는 생각과 실현은 분명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고 제가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랍니다. 

이사야 이야기를 하다가 무슨 뚱딴지인가 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당신은 분명 저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이야기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메시아 이야기를 바로 이어가려다, 오늘은 주일 곧 일요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한번 짚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읽고 생각해 보는 이사야 시대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무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계속 들을 수 있었던 말 가운데 산당(山堂)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도대체 이 산당이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의 설명은 산에 있는 제사단, 높은 곳에 있는 제사단입니다. 이건 예루살렘 성전이 마련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각자 편하게 야훼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들었던 제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는 이방신과는 관계없는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후 유일신이신 야훼 하나님은 오직 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는 선언과 함께 모든 제사를 일원화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성전도 이전 모습인 산당으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그 산당에는 이교적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입니다. 

자! 산당(山堂)이란 본래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단이었는데 중앙집권에 힘을 빼는 요인이 되었고 이방신들과 쉽게 결합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히 없앤 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일했던 히스기야왕 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촛점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제가 오래 알고있는 어느 장로님께서 하셨던 이야기가 자꾸 머리 속에 생각난다는 말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사람도 좋은 분이시고, 이제는 은퇴하셨지만 교회를 세우고 섬기고 하는데 정말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좋은 신앙을 지닌 분이시랍니다. 대학은 자그마치 서울대학교 출신이시고, 여기 미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종으로도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으신 분이시랍니다. 

참 본받을 것이 많은 분이시랍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느 날엔가 모임에서 이런 말씀을 했답니다. “성서에 산당을 없애라고 했어요. 그거 안 없애서 심판 받았지요. 그거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어요. 공산당을 없애지 않아 우리 민족이 힘들다.” 

그 순간 저는 정말 놀랬었답니다. 정말 황망한 순간이었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들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 장로님과 같은 시점에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깊히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우리들의 현실 속에서 각자 믿는 삶에 프리즘으로 보는 세상은 때론 정말 황망한 것을 믿는 것으로 결말이 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엉뚱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서야 후회하는…. 

이사야서를 바로 읽어야 하는 까닭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를 읽는 일이고, 당신과 제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은 일요일, 바로 주일입니다. 성경 한 장 같이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우선 읽고보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가도록 하지요. 

이사야서 53장입니다. 

23HolySepulchre12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7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8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9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 

10    주께서 그를 상하게 하고자 하셨다. 주께서 그를 병들게 하셨다.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다. 주께서 세우신 뜻을 그가 이루어 드릴 것이다. 

11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자기가 짊어질 것이다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자기 몫을 차지하게 하며, 강한 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겠다. 그는 죽는 데까지 자기의 영혼을 서슴없이 내맡기고,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 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 이사야서 53장, 표준새번역 

 

기본 정신 – 예언자 13

(당신의 천국 – 마흔 두번 째 이야기) 

그(아하스 왕)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면전에서 쫓아 낸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아 벤힌놈 골짜기에서 친자식들을 불살라 제물을 바쳤으며 산당과 산마루에서, 또 우거진 나무 아래서에서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다.  – 역대기하 28 : 3-4 

그(히스기야 왕)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하였고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 자기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마음을 다 쏟았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었다. – 역대기하 31 : 21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 중략 – 두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 중략 –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야 1 : 11 – 17 

20세기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신약성서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제 일장 ‘예수의 설교(The Message of Jesus)’에서 제 일과인 ‘종말론적 설교(The Eschatological  Message)’를 시작하는 첫 문장입니다. “예수 설교의 주요 개념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The dominant concept of Jesus’ message is the Reign of God.)”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비단 불트만의 예가 아니더라도 신약성서 복음서에만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이라는 말이 백번도 넘게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예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단호하고 확실한 신앙 고백을 나누기 위해서 저는 지금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단 한 분이라도 제 이야기 순례길에 동행하며 같은 신앙 고백을 나눌 수만 있게 된다고 하여도 이 순례길은 제게 아주 의미있고, 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믿는답니다.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사야가 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왕들 곧 아하스왕(주전 736년 – 주전 716년)과 히스기야왕(주전715년 – 주전 686년) 때의 역사적 사실들과 예언자 이사야의 당시 역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미 잠시 언급했듯이 아하스왕 시절은 북쪽에서 강력한 군대를 밀고 남하하는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아하스왕의 행위에 대해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스왕이 아시리아 왕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그 때였다.(역대기하 28 : 16)”, “아하스는 야훼의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들을 털어 아시리아 왕들에게 바쳤으니 헛된 일이었다.(열왕기하 28 : 21) 

강국 아시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사대(事大)의 길을 택했던 아하스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외세(外勢)에 대해 굴복하는 일은 정권 또는 왕조의 역사를 이어가는 방편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하나 뿐인 신(神)  야훼만을 모셔야하는 유다의 전통을 망가뜨리는 선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하스왕 당시의 야훼 신앙을 망가뜨리는 종교적 타락에 대한 성서의 기록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구들을 거두어 부수고 야훼의 성전 문들을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예루살렘 모퉁이마다에 제단을 만들어 섬겼다. 또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남의 나라 신들에게 분향하게 하여 선조의 하나님 야휘를 진노케 하였다.(역대기하 28 : 24-25)” 

심지어 아하스왕은 이방 종교 풍습에 따라 친자식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역대기하 28 :3)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부름에 응답한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바로 이 아하스왕 앞에 선 일입니다.(이사야서 7장) 

이사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두 번에 걸쳐 아하스왕 앞에 서서 야훼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시리아 등의 침략이나 외세에 대해 두려워 말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 믿으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에게 의지합니다. 결국 이사야는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 유다도 침공을 받아 유린되리라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아하스왕 앞에서 전하는 두번 째 경고에서 이사야의 유명한 예언이 행해집니다.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 : 14)라는 예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어질 메시아왕국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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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승계한 사람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였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의로운 왕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아하스왕의 외교노선이었던 사대노선을 버리고 독립노선을 천명합니다. 그가 반 아시리아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의 주변 강국 사이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힘으로 남하하는 아시리아를 일시 저지하는데는 당시의 남쪽 강대국인 이집트의 힘이 컷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제적 힘의 역학관계를 잘 이용했던 히스기야왕은  외교정치는 독립노선을 구가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강화합니다. 

그는 성전을 재건, 정화 시킵니다. 이교도적인 이방신들을 모두 제거, 배척하고 유일신 야훼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전통적인 제사의례를 복원하고 유월절 등의 전통적 절기를 복원함으로써 유다와 이스라엘 선조들과 함께 했던 야훼 신앙을 되찾은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예배의식을 복원한 일입니다. 지방에 산재했던 산당들을 부수어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복원한 일입니다. 바로 중앙집권체제의 왕권을 복원시킨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히스기야왕이 야훼 하나님께 복받는 위업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 다윗 못지 않게 야훼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다.(역대기하 29 : 2) 

그러나 히스기야왕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제사의식과 의례, 전통 등은 야훼 하나님과 선조들이 맺었던 계약에 맞게 개혁하고 복원하고 실행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예배의 정신, 제사의 본래적 목적 곧 야훼 하나님과의 계약의 기본 정신을 되찾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하는 정신을 잃고, 그들의 인권을 짓밟고 드리는 제사는 가짜라는 예언들(이사야서 1 장, 10장 1-4절 등)입니다. 

이사야가 심판의 예언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이사야 5 : 7)” 

그리고 그런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 “지혜있는 이들이라 자처하는 자들,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 독한 술에 빠진 자들, 뇌물에 눈이 어두어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이사야 5 : 20 -23)”이라고 선언합니다. 

히스기야왕의 성전 정화와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왕국이 맞게 될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끝은 파국이 아닙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이사야서 9 : 2) 

이제 우리들이 만나 볼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입니다.

거룩 – 예언자 12

(당신의 천국 – 마흔 한 번 째 이야기)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 이사야 6 : 3, 공동번역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 이사야 9 : 6, 표준 새번역 개정판 

이제 우리는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길목에서 또 다른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기록입니다. 

구약성서의 복음서라고도 불리우는 책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인용한 구약성서의 책들 가운데 제일 많이 인용된 책도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특히 우리들이 나중에 만나게 될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잘 읽어 두고  머리 속에 새기고 가야할 책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환상, 메시아 시대, 메시아 왕국, 메시아의 통치, 주의 종, 야훼의 종, 메시아의 고난, 대속, 심판, 구원, 새 하늘 새 땅 등등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사야서입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만났던 아모스, 미가, 호세아 등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책입니다. 직선적이고 직정적인 예언자들과는 달리 때론 환상을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말이 바뀌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좀 어려운 책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들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사야 이야기, 바울 이야기라고 하면 좀 쉽게 읽히지만 이사야 신학, 바울 신학 그러면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요. 같은 말인데 말입니다.

이제 나중에 만나게 될 “예수의 말씀”과 “바울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들여다 보면 아주 쉽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쉬운 말과 어려운 이야기의 차이는 가방의 끈 길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똑같은 “나무”를 설명하는 말도 어린아이 다르고 어른 다르고요. 어디 그 뿐인가요? 직업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고, 왈 배운 정도에 따라 또 설명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나무는 나무”라는 사실이지요. 

이사야서를 바로 읽는 눈과 생각을 세워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을 잘못 읽고 엉뚱한 이해를 하게되면 하나님 나라와는 멀어지게 된답니다. 특히 가짜들과 사기꾼들이  이런 책들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답니다. 이건 사람들이 살아 온 역사가 증명해 주는 일이지요. 

자! 이제 서론 마치고, 이사야 이야기 서너차례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상황과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연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렵니다. 

그가 스스로 야훼에게 사로잡혔던 때가 우시야왕이 죽던 해(이사야 6 :1)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가 예언을 시작했던 시기는 유다왕 아하스 때입니다. 이 때는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까지 위협하던 시절입니다.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직전에 아하스는 자주냐, 사대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일테면 북왕국 이스라엘과 수르(시리아) 등 약소국들이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와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아시리아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왕국을 유지하느냐에 대한 선택을 해야하느냐 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이지요. 

아하스왕은 아시리아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드리는 길을 선택합니다. 성서는 아하스가 죄를 지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은 북왕국 이스라엘 처럼 아시리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남왕국 유다가 아주 멸망 직전에 있을 때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궁중과 연관이 있는 많이 배운 자라는 점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집니다. 왕의 조카라는 설도 있고, 왕실의 기록관이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이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기로 하지요. 그가 예언자로 나서게 된 까닭을 설명하는 것이랍니다. 다른 예언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답니다. 

이사야서 6장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입니다. 

환상

먼저 이사야의 환상입니다. 환상이 무엇일까요?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유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 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서 2 : 28, 사도행전 2 : 17에서 인용)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평시에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예견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상을 통해 이사야가 본 것은 한마디로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것입니다. (6 : 3)이 때 ‘거룩’의 뜻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 이래 땅을 밟고 살다 간, 또는 살고 있는,  또 살아 갈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주목해야 할 점은 이사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입니다. (6 : 5)이건 다른 예언자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막바로 사회, 정치, 종교적인 죄들에 대해 비판과 선언으로 들어가는 데 비해 이사야는 “내 잘못이 크다”는 회개로 부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천사(스랍)가 나타나 이사야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합니다.(6 : 7) 

그리고 천사(스랍)들이 사라지고 야훼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습니다. ( 6 : 8) 

“누굴 보낼꼬?” 라고 묻는 야훼께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제가 갑니다”라고요. 

이렇게 이사야 이야기를 시작하고요. “거룩”에 대한 기억 한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하여도 “거룩하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기도 소리를 거의 모든 예배 때마다 듣곤하였답니다. 이즈음엔 조금 듣기 힘든 것 같습니다. 

뭐 제사의식이나 형식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제가 이즈음 박수치고 양 손 올리고 이른바 찬양 예배 형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까닭은 늙어가는 징조이기 때문일겝니다.

도낀 개낀 – 예언자 11

(당신의 천국 – 마흔 번 째 이야기)

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그가 백성의 목자로 나서리라. 야훼의 힘을 입고 그 하느님 야훼의 드높은 이름으로 목자 노릇을 하리니, 그의 힘이 땅 끝까지 미쳐 모두 그가 이룩한 평화를 누리며 살리라. – 미가  5 : 1 – 4, 공동번역 

성서와 예언사상이 겨냥하는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이 먼저 개조되고,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의 세력’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 때에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고 겸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된다. – 서인석의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에서 

앞선 글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다른 점들 몇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유다와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다고 선언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야훼 하나님께 지은 죄를 놓고 보면 난형난제(難兄難弟)요, 오십보 백보이고, 도낀 개낀이라는 선언입니다. 

미가의 통렬한 비판과 공격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비판과 공격은 남과 북에게 똑같이 퍼부어졌습니다. 

전통적인 생계 수단이었던 소작농들이 무너지는 현상은 아마 농촌출신인 미가의 직접경험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현상에 대한 경고나  부정직한 상행위에 대한 고발, 돈에 매수된 사제와 예언자들의 타락에 대한 심판 예언,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거나 못본 체 하는 왕과 권력에 대한 심판 경고들을 남과 북을 향해 동시에 선언한 것입니다. 

“야곱 가문의 어른들이라는 것들아,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라는 것들아. 정의를 역겨워하고 곧은 것을 구부러뜨리는 것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백성의 피를 빨아 시온을 세웠고, 백성의 진액을 짜서 예루살렘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어른이라는 것들은 삯을 받고 판결을 내리며 예언자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하는구나!” – 미가 3 : 9-11 

“이 성읍에 사는 무리들은 들어아. 남을 등쳐 치부하는 것들아, 거짓말만 내뱉는 도시놈들아, 말끝마다 사기를 하는 것들아, 들어라. ‘천벌받을 것들, 부정한 되로 부정축재한 것들을 나 어찌 용서하겠느냐?’” – 미가 7 : 9 – 10 

또한 미가는 허례 의식만 남은  예배와 제사, 심지어 이방 종교의 의식까지 섞여진 제사와 그 제사를 집행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도 쏟아냅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미가  6 : 8)고 말입니다. 

그러나 미가의 선포가 심판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예언을 그치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반복적으로 기록한 것이 미가서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약의 마태복음(마태 2 : 6)이 인용하게 되는 미가서 5장 1절의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미가와 동시대의 인물인 이사야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우뚝 선 인물입니다.  

미가 이야기를 마치면서 오늘 본  한국 뉴스 한 꼭지로 인해  제 머리 속에 이어진 생각 하나 덧붙입니다. 

경상도 구미시의 시장이라는 者가 “박정희는 반신반인(半神半人) 이었다”고 했다는 기사였습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내노라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박정희 역시 그 한가운데 있는 인물입니다. 극과 극을 이루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한국사회가 그만큼 극과 극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대변하는 증표일 것입니다. 

박정희에 대한 호, 불호나 긍정 평가 또는 부정 평가는 보는 사람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런 다른 평가들이 자유롭게 논의되고, 떳떳하고 공정하게 서로 다른 의견들이 표출될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일 것입니다. 

동상

그러나 죽은 귀신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일은 정신 나간 행위 곧 미친 놈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태양절이라며 죽은 김일성 귀신을 섬기는 북이나 탄신절이라며 죽은 박정희 귀신을 섬기는 남이나 정말 도낀 개낀인 셈입니다. 

성서적 관점, 적어도 미가 예언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의 정권이나 남의 정권이나 죽은 귀신이든 산 귀신이든 사람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는 정권의 말로는 그야말로 임박한 붕괴 뿐입니다. 

미가의 예언대로 북왕국 사마리아와 남왕국 예루살렘이 결국은 모두 망했듯,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려지는 정권의 말로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로는 “이미 왔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진리입니다. 

<신적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진리치고 영속적인 진리 없고, 사회정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진리 치고 참된 신적 진리는 없다.>  S J Samartha 의 말입니다.

독설(毒說) -예언자 10

(당신의 천국 -서른 아홉 번 째 이야기)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할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을 만나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함께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 주인도 부려 먹는구나. 나 야훼가 선언한다. 나 이제 이런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 미가 2 :  1- 2, 공동번역 

예언자 미가가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725년에서 기원전 701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기이고 남왕국 유다에서는 아하스왕 말기와 히스기야왕 초기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분단된 남북왕국 가운데 북왕국에 대해서는 지난 글들에서 대충 훑어 보았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기원전 922년 부터 미가 예언자의 활동시기인 유다왕 히스기야까지의 남왕국 이야기를 북왕국과 비교해서 대충 훑고 넘어 가겠습니다.

남왕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와 역대기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역대기 하에는 유다의 역사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를 통독하다보면 종종 읽기 지루한 곳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전혀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족보이야기가  이어지는 역대기상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역대기에 대한 이야기와 두 개의 다른 사관(史觀) – 신명기 사관과 역대기 사관 –에 대한 이야기는  남왕국 유다 이야기가 끝나고 바벨론 포로 시기 이야기를 할 때 자세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남왕국과 북왕국의 드러나는 차이점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북왕국은 열 개의 부족 지파 동맹체였고, 남왕국 유다는 두 개지파 공동체였습니다. 두 개지파라고 하지만 베냐민지파는 소수였고 유다지파 단일체제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유다 지파의 세가 컸습니다. 

북왕국은 시작부터 모든 면에서 새로 출발하는 입장이었고, 남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위업을 계승하며 시작되었습니다. 

북왕국은 수도를 결정하는 일, 성전과 제단을 만드는 일, 정치 체제를 만드는 일 등 모든 면에서 새로 시작하는 처지였던 반면에 남왕국은 다윗의 성 예루살렘과 솔로몬의 성전과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북왕국은 여러 부족이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이 넓었고, 남왕국은 북왕국의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를 갖고 있었습니다. 경작지 곧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의 크기는 북쪽이  남쪽보다 거의 네배나 컷습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스리기가 남쪽이 훨씬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왕국은 북쪽의 아시리아 등 외세의 침략을 당하기 쉬운 조건에 있었고 남왕국 유다로써는 그런 북왕국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는 좋은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조가 아홉번이나  바뀌었지만 남왕국은 단일 왕조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백년 역사에서 아홉번이나 왕조가 바뀌었다는 말은 정권이 그만큼 불안정했다는 말입니다. 일테면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왕씨 고려왕조 오 백년, 이조왕조 육 백년 이렇게 이어오는 것처럼 이백년 사이에 이씨, 박씨, 김씨 등 왕조가 아홉번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에 반해 남왕국 유다는 약 335년의 역사를 단일 왕조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지요. 다윗과 솔로몬의 후예들이 대를 이어 왕통을 이었답니다.특히 남왕국 유다의 제 3대 임금이었던 아사왕 때부터는 후계를 미리 선정하고 그 후계자와 일정기간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동섭정 정치전통을 세웠답니다. 

한마디로 집안 싸움없이 왕위를 잘 이어가는 전통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무너져 가는 시대가 왔습니다. 북의 완충지대였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남왕국 유다 역시 이제 강력한 외세의 침략 위기에 내몰린 것입니다. 

미가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는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생존하는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른바 자주(自主)냐 사대(事大)냐 하는 논쟁이 권력의 흐름을 결정하는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는 것입니다.

독립문

쉽게 말씀드려서, 강력하고 힘센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고 비위를 맞추어 가며 왕조를 이어갈 것이냐, 나름대로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고 독립 노선을 걸을 것이냐의 싸움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역사 이래 강대국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약소국들이 겪어 온 모습입니다. 생존을 위한 투항이나 복종을 할 것인지, 죽음을 마다치 않는 항거나 투쟁을 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한 때를 맞아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자신들 끼리 노선 싸움을 벌이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남왕국 유다나 이미 망한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그 역사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유사한 다른 민족이나 국가들에 비해 선택의 기준이 남달랐다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 넣으셔야 합니다. 

바로 그들의 선택의 기준은 야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 이제 미가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미가는 예언자 이사야와 같은 시기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 활동을 한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서는 자그마치 66장이나 되는 긴 이야기인데 비해 미가서는 달랑 7장에 그칩니다. 그래 이사야는 대예언서, 대선지서로 부르는 네 개의 이야기 중 하나이고, 미가는 소예언서, 소선지서라고 부르는 열 두 개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그 ‘크다’, ‘작다’의 의미는 기록의 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가는 이사야 못지않은 아주 중요한 예언자 가운데 한사람이랍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아주 다른 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미가는 촌사람, 이사야는 도시사람이었고 

미가는 가난한 사람, 이사야는 있는 사람이었고

미가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사야는 뼈대있는 가문이었고

미가는 시장 사람이었고 , 이사야는 왕궁 사람이었고

미가가 쓰는 말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었고, 이사야가 쓰는 말은 고상하고 문학적이었습니다. 

일테면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미어 남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구나.”라며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쏟아 붓는 미가의 독설(毒說)은 철저히 그의 면목을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미가 이야기 한번 더 이어집니다.

이해(理解) – 예언자 9

(당신의 천국 – 서른 여덟 번 째 이야기)

아시리아 왕은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사마리아 성읍들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게 하였다.  – 중략  – 이렇게 그들은 야훼를 공경하면서도 각 민족이 붙잡혀 오기 전에 가졌던 풍습을 따라 저희의 신도 섬겼다.  – 중략 – 그들은 후손들도 대대로 이날까지 선조들의 풍습을 그대로 지켜 내려 왔다. – 열왕기하 17 : 24 – 41 

그러는 동안 유다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 들어 선 교회는 안정이 되어 터전을 튼튼히 잡았고 주를 두려워하며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차츰 늘어났다. – 사도행전 9 : 31(이상 공동번역) 

넷째 우리 동방은 오래 전부터 중국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다 그대로 준수하여 왔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같지 않으니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다. 그리고 거란은 우매한 나라로서 풍속과 언어가 다르니 그들의 의관, 제도를 아예 본받지 말라. – 고려사(高麗史) 권2, 세가(世家)  2. 태조(太祖) 26년, 이른바 고려 첫 임금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남왕국 유대 이야기로 넘어 가기 전에 몇가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 순례 길에  놓여있는  이정표들을 확인하는 일들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첫째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면서(주전 721년) 새롭게 등장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수도 사마리아 성읍 인근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을 아시리아의 포로로 잡아 갑니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 인근 성읍에 구다(Cuthah)와 바벨론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이주 정착시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확 물갈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성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답니다.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혼내시느랴고 야훼께서 사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잡아 먹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시리아왕은 잡아왔던 이스라엘 사제를 사마리아에 돌아가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sama5(사마리아의_전경)

새롭게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과 아시리아, 바벨론 등지에서 사마리아 땅에 이주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새로 태어난 혼혈부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종교 역시 혼합종교가  되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신앙과 이방 신이 섞이게 된 것입니다. 문화, 언어, 종교 등의 전통이 다른 새로운 종족이 그 좁은 땅 한 구석에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로부터 약 칠백 년이 훨씬 지난 예수 시대에 이르러 예수가 만났던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우리들의 머리 속에 기억해 놓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예수 시대에 예수의 말씀 선포를 듣는 사람들은 이런 수백 년, 아니 거슬러 올라가 천 오륙 백년 전의 출애굽사건부터 그 말씀을 듣는 시대까지 모든 역사적 경험들을 공유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국인들과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했던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행위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결국은 그 땅에도 그리스도 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다는 사도행전의 기사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만의 역사적 경험을 알고 넘어가자는 뜻입니다. 

두번 째는  호세아와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곧 다가올 일에 대한 선포였다는 점을 머리 속에 기억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그들의 예언, 곧 야훼의 선포는 단지 한 세대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바로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훼의 선포에 대한 응답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멀지 않은 시간에 야훼의 날(아모스가 사용한 말입니다)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응답을 하라! 그러나 시간을 주겠다. 다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로 정리할 수 있는 예언자들의 선포였다는 점을 기억하고 가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우리들이 종말론, 또는 종말 신앙, 묵시 사상 등을 이야기할 때 아주 중요한 이해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 째로는 이제 남쪽 왕국 유대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만의 역사적 경험을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처지가 비슷한 경험들이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최근 십수년 사이에 각 나라와 서로 간의 정세에 따라 작동했다가 말았다가 하는 기구가 하나 있지요. 바로 육자회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과 북조선 인민 공화국, 이렇게 여섯 나라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벌려 온 일련의 회담을 일컫는 것이지요. 

한반도는 남북 양 당사국을 둘러 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강대국 사이에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단 21세기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지요. 고조선 이래 오늘까지 북방세력과 바다 건너 일본, 20세기 이후에는 유럽과 미국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 자주(自主)와 사대(事大),  민족의 주체를 찾다 멸망하느냐 비록 굴종이라도 번영의 길을 택하느냐 등등의 단순 이분법적인 싸움이 결코 그치지 않는 역사를 지니고 온 것이지요. 

바로 남왕국 유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역사적 경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북에는 아시리아, 북동엔 바벨론, 남쪽에는 이집트라는 강대국들이 에워 싸고 있는 상황에서 약소국 유대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역시 자주와 사대, 주체와 굴종 같은 이분법적 선택아래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만 우리 한민족이 한반도에서 고민했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판단과 결정 기준이 바로 야훼 신앙을  근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야훼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자!  이 정도 머리 속에 꼭 기억해 두시고 남왕국 유대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가로 하겠습니다.

식(食)과 색(色) – 예언자 8

(당신의 천국 – 서른 일곱 번 째 이야기)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나님을 알아 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물고,  가는 데 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 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 호세아 4 : 1-2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에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그러나 부르면 부를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 중략 –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 호세아 11 장 전체를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상 공동번역) 

1994년 8월 플레이보이사는 웹사이트를 개설함으로써 웹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경영진은 <플레이보이>가  웹사이트가 있는 최초의 미국 잡지였다고 말한다.  – Peter Nowak의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Sex, Bombs, and Burgers)에서 

여호수아, 예수, 호세아라는 이름의 공통점은 바로 그 뜻에 있습니다. 모두 “야훼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호세아의 뜻처럼 호세아의  예언 및 메세지는심판과 멸망을 넘어선 구원에 촛점이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여러 남자들을 거칠 운명이었던 아내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사랑은 바로 구원하시는 야훼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너는 정부와  놀아난 네 아내를 찾아 가 다시 사랑해 주어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에게 마음이 팔려 건포도 과자 따위나 좋아하는데도 이 야훼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주어라.”(호세아 3 : 1) 

끊임없는 야훼 하나님과의 약속과 계약을 위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직 아내 밖에 모르는 순결남 호세아를 버리고 바람난 고멜과 견주어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야훼 하나님과 예언 선포자 호세아가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야훼 신앙에 대한 모습 뿐만 아니라 실제 여로보암 2세 당시의 사회적 실상을 그린 호세아 4장 1-2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정말 막장으로 치닫는 사회를 보는 듯합니다. 

살인, 강도, 사기, 간음, 강간, 유혈 등등으로 표현되는 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또는 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있는 시점의 그 날 하루 뉴스들을 훑어 본다면 그 사회는 바로 오늘이 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예언자로서 사명을 삶의 의미로 살았던 아모스는 사회정의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 선포를 했다면, 호세아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모순을 드러낸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아모스는 식욕(食慾)에 촛점을 맞추었고, 호세아는 색욕(色慾)에 촛점을 맞추어 예언을 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식욕과 색욕은 사람들 일반이  피할 수 없는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불가(佛家) 또는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오욕(五慾) -재욕(財慾), 색욕(色慾), 식욕(食慾), 명예욕(名譽慾), 수면욕(睡眠慾) – 도 따지고 보면 식(재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으로 단순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에서 말하는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 역시 따지고보면 식욕과 색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서 나오는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일겝니다. 

(신구약 이야기가 끝난 뒤, 교회시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불교, 유교, 선교, 미신등의 버리지 못한 전통 – 그 버리지 못함이신앙생활에 득일수도 있고, 실일 수도 있는- 들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피해갈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과 색욕을 통해 죄를 짓는 이스라엘과 사람들을 향해 멸망과 심판,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이루고자하는 야훼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 아모스와 호세아였다는 것이지요. 

아모스는 부익부(잘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빈익빈(못사는 사람들은 더 못사는)이라는사회현상과 권력을 지닌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했다는 것이고요. 

호세아는 한편으로는 아모스와 동일한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개인적으로 문란한 비상식적(이 말은 물론 야훼가 바라시지 않는 의미로)인 생활 태도에 대한 경고가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심판은 피해 갈 수는 없지만 끝내 버리지는 않고 안고간다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선포는 야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크기를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죄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sexbombsburgers

그런데 이 식욕과 색욕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고 사는 기술문명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답니다.   CBS 온라인 뉴스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Peter Nowak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전쟁, 포르노, 패스트푸드라는 세 가지 ‘나쁜 것들’이 현대 기술문명을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인간 문명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열쇠라고까지 이야기한답니다. 

음탕하고, 사람을 죽이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거의 모든 기술을 낳게되는 원인이 된다면서 그런 실례들을 여러가지 들고 있답니다. 

일테면 포르노는 인간이 이성을 잃고 지갑을 여는 산업인데다 소규모 사업체의 특징상 혁신이 빨라, 온라인 카드 결제, 화상 처리, 심지어 장난감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기술이 쓸 만한지 보려면 포르노 업계에서 통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Peter Nowak이 말하는 식과 색이 인류 기술문명의 발달에 기여한 점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그의 예언과 그의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 한계 곧 식욕과 색욕으로 어쩔 수 없이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들의 욕심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곧 다가올 멸망과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북왕국 이스라엘은 결국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그 때의 일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답니다. 

“이스라엘의 열 지파가 유대 밖으로 옮겨진 것은 선조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한 지 947년, 여호수아가  그들의 지도자가 된 지는 800년,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에게서 떠나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기기 시작한 지는 240년 7새월 7일 만의 일이었다. 이런 비극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닥친 것은 그들이 악을 버리지 않으면 이런 벌을 받을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율법을 범한 때문이었다.” – 유대고대사 9권 14장 

이제 남왕국 유대의 예언자들과 유대 멸망까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운명 – 예언자 7

(당신의 천국 – 서른 여섯 번 째  이야기)

“나는 정말 부자가 되었다. 한 몫 단단히 잡았거든, 이 손이 닳도록 벌었는데, 누가 나를 부정축재했다고 하랴”라고  에브라임은 말한다만은, 너희를 에집트에서 이쓸어 낸 것은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었다. – 호세아 12 : 8-9, 공동번역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 이만이나 되고 가족도 많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 요나 4 : 11, 공동번역 

아모스와 같은 시대에 야훼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예언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호세아와 요나입니다. 

먼저 요나 이야기는 세상에 참 많이 알려져 있는 것에 비해 그 이야기의 본 뜻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치 않은 듯합니다. 요나서는 겨우  4장으로  이루어졌고 성경 페이지수로 네장이 채 안되는 짧은 내용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그 명령이 두려워 도망쳐 배를 탓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질 절체 절명의 위기를  맞지요. 그 풍랑을 잠재울 제사제물로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고래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다가 야훼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나서는 야훼가 명령한 사명을 이룬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고생시킨 야훼 하나님을 향해 투정을 부리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달래는 이야기로 끝나지요. 

얼핏 그저 옛날에, 옛날에… 하는 동화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이 요나서가 성서 66권 안에 편집되어 들어가 있는 까닭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니느웨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라고 명령한 니느웨는 당시 신흥 강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서울입니다. 당시는 비록 위세가 조금 위축되었기는 했지만, 몇 십년 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라는 말입니다. 

성서 요나서를 보면 야훼 하나님이 요나에게 명령하고 요나는 그 명령을 피해 도망가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유대고대사를 쓴 요세푸스는 그의 기록을 통해 이 야훼의 명령이 있기 전에 요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때 선지자 요나가 와서 ‘왕은 수리아와 전쟁하여 그들을 정복하고 국경을 넓히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이 원래 가나안 땅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여로보암2세는 수리아를 공격하고 그 땅을 정복하기에 이르렀으니 모두가 요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성취되었다.” –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9권 제 10장(특정 지명들을 빼고 약간 내용을 줄였습니다.) 

결론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했던 사람이고 나름 성공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국의 수도 그것도 만만치 않은 큰나라의 수도 서울로 가서 도대체 야훼신 이라고는 모르는 그 곳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안하면 니들 망해!”하는 소리를 외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 도망친 것이지요. 

전체 이야기 구성은 그런데요. 우리가 정말 요나서를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들이 새로 깨우쳐 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면” 어느 민족이든 거두신다는 신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제 호세아로 넘어가지요. 

호세아  역시 아주 독특한 인물입니다. 민족의 역사, 민족의 운명과 자신의 일생, 자신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본(동일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과 역사를 해석하는 잣대로 “사랑”을 사용하는데  그 사랑은 바로 “결혼관계”라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관계, 결혼약속 같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야훼 사이의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결혼관계, 결혼약속이란 전통적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는 약속이고 , 이 약속은  평생을 버리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적어도 호세아 이야기의 배경에도 이런 전통적 관습 이해가 바탕으로 깔려 있답니다. 

이런 “한남자와  한여자가 평생”이라는 개념이나 인식은 오늘날 많이 깨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비단 오늘의 시점만이 아니라 역사 이래 어느 사회이건 비상식이 상식을 넘어섰던 때는 많았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있을 수는 있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타고나기를 여러 남자를 거쳐야 할 운명을 지닌 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어야 하는 순결남 이야기라면 정말 흔치 않은 것일겝니다. 

호세아의 운명이 그런 것이었는데, 거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자식들마저 제 에미를 닮은 아이들을 두어야만 하는 피할 수 없이 타고난 것이라면 막말로 축복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인 것이지요. 

호세아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답니다. 

“야훼께서 호세아를 시켜 하신 말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는 바람기 있는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아라. 이 나라가 야훼를 저버리고 음란을 피우고 있구나.” – 호세아 1 : 2 

참 예언자의 타고난 삶이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호세아의 예언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심판과 멸망의 예언을 시작하면서 먼저 축복의 예언이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의 모래알 같이 불어나 셀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이 되리라. 너희를 버린 자식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리라.” – 호세아 2 : 1

자! 호세아의 본격적인 예언은 다음 글에서…

정의(正義) – 예언자 6

(당신의 천국 – 서른 다섯 번 째 이야기)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 아모스 5 : 7-8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 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5 : 21-23 

북왕국 이스라엘 이백 년 역사(기원전 922년 부터 기원전 721년까지) 가운데 나라가 가장 융성했던 시절이 바로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때였습니다.(기원전 786년에서 기원전 745년까지 40년) 

성서 열왕기하 14장에는 여로보암 2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해에 이르는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은 것은 그(여로보함 2세)였다. – 중략 – 이스라엘의 고생이 막심한 것을 야훼께서 눈여겨 보셨던 것이다. – 중략 –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서 지워버리지 않기로 하시고 요하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또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여로보암 2세 때에 이미 북쪽 앗수르(아시리아)가 기세를 떨치며 수리아(시리아, 암몬)를 정복했답니다. 수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게는 늘 성가신 존재였답니다. 외세에 대한 근심 하나를 던 것입니다. 

특히 여로보암2세는 나라 경제 운용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쪽 앗수르와 남쪽 이집트를 잇는 무역 통로를 장악하고 대상(隊商) 무역을 통해 국부를 쌓은 것입니다. 

실제 당시의 북왕국과 우시야가 다스리던 남왕국 유대를 합친다면 솔로몬 시대를 능가하던 시절을 구가하였답니다. 

영토도 넓히고 국부도 늘리고 이렇게 잘 나가던 여로보암 2세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곧 닥칠 심판과 멸망의 날카로운 예언을 쏟아 부어었던 사람이 바로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북왕국이 아닌 남왕국 유대 땅 드고아 출신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예언자가 된 까닭을 밝힙니다. 

“나는 본래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이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시는 야훼의 분부를 받고 왔을 뿐이다. “(아모스 7장 14 – 15, 공동번역) 

이 말은 아모스의 예언이 거슬렸던 여로보암 2세가 그의 사제 아마지야를 시켜 아모스의 예언을 그치게 하고 이스라엘에서 떠날 것을 명하자 아모스가 자신이 받은 야훼의 명령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아모스 역시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처럼 어느날 야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명령에 따릅니다. 아모스는 엘리야처럼 무조건 명령에 따른 축에 속합니다. 

남쪽 출신으로 북쪽에 가서 예언을 하게 된 특성만큼이나 독특하게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게  야훼 하나님의 선고를 먼저 내립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마스커스(다메섹), 가자, 블레셋, 띠로, 에돔, 암몬,  모압 등의 주변국가들에게 먼저 야훼께서 받은 예언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유대에 대한 짧은 선고를 한 후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선고를 내립니다. 

아모스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내린 야훼 하나님의 경고는 크게 두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평치 못한 사회에 대한 경고이고, 두번 째는 가짜 제사, 가짜 예배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잘 나가던 시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쌓인 부(富)와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치중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곧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부자는 곡간이 부족할만큼 자꾸 쌓이는 현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특히 아모스는 가진 자들이 거짓과 허위와 권력의 힘으로 못가진 사람들은 속이고 누르는 사회 현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되는 작게, 추는 크게 만들고 가짜 저울로 속이며…. 힘 없는 자 빚돈에 종으로 삼고…”(아모스 8장)라며 그 당시의 사회를 통렬하게 비난합니다. 

두번 째는 가짜 제사, 가짜 예배에 대해 야훼 하나님이 느끼는 역겨움을 알리고 결국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말리라는 예언을 강조합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버리거나 외면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예후왕 시절에 바알 신전은 다 부수고 바알을 신으로 섬기던 시절은 옛날 일이 된 때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뜨렸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였다.”(열왕기하 14 : 24)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로보암은 여로보암 1세 곧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조왕입니다. 그의 죄는 이미 제가 말씀드렸듯이 야훼 하나님의 제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야훼 앞에서 드려야 할 모든 제사들 곧 모세의 계약법에 따른 모든 제사들과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기는 하는데,  야훼는 얼굴을 돌리고 역겨워 하신다고 선포하는 까닭입니다. 바로  예배와 제사의 본질, 본 뜻은 잃어 버리고 의식과 겉치레만 남은 것에 대한 심판 예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모스가 야훼 하나님께 받은 참 제사, 참 예배의 본 뜻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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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의 입을 통해 내린 야훼 하나님의 선포랍니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처럼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 24, 공동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표준 새번역 개정판) 

“Instead, I want to see a mighty flood of justice, an endless river of righteous living.” < NLT(New Living Translation) version>

 2013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아모스의 예언입니다. 

다음 글은 요나와 호세아의  예언입니다.